해인사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일주문
(김규진 글)
(박해근 글)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가야산 해인사"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봉황문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보면 두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범종각
종각에는 사물이라고 불리는 법기(法器)가 설치되어 있다.
사물은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을 말하는데 이 범종각은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왼쪽을 체로 오른쪽을
용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 된 것이다.
구광루
(남천당 한규(翰圭, 1868~1936)대사가 쓴 편액)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
지금은 해인사의 사중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 보관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귀중한 불교 문화재를
좀 더 잘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 시설의 마련이 필요하다.
대적광전
한사원의 큰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에 따라 결정된다.
그 주불이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 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벽화이야기
독성각
응진전과 명부전 사이에 독성각이 있다.
한때 독성 용왕 산신상을 모시고 삼성각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독성 한 분만을 모셔서 독성각으로 불린다.
응진전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의 건물은 1817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1918년에 판전
서재에 봉안되었던 십육 나한을 옮겨와 모셨다.
응진전 가운데에는 석가여래상이 토조로 조성되어 있다.
장경각
대적광전 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한 장경각(藏經閣)이 자리하고 있다. 국보 제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 무렵인 1488년쯤에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각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모두 네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
북쪽의 건물을 수다라전(修多羅殿)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 동의 건물에는
사간판(寺刊板) 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삼층석탑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본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할 때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ㆍ보륜ㆍ보주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한
다음에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
대적광전 아래쪽의 3층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히는 기구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 개의 보주(寶珠, 작은 공 모양 장식)
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팔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궁현당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1940년에 중창되었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게 된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깊고 오묘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의 궁현당은 달리 '부처를 가려 뽑는 곳'이라는 뜻의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운당
덕 많은 수행자와 신심 깊은 신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의미의 이 건물은
창건년도는 알 수 없고 1490년에 중수되어 그 이후에 몇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게 되는데
지금의 건물은 1984년에 완전중수되어 지금은 종무소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房舍)로 사용되고 있다.
길상탑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서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ㆍ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쇠꼬챙이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이러한 소탑(小塔)은 본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895년(신라 진성왕 8)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성철스님 사리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