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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전국의 사찰

수덕사

by 범여(梵如) 2012. 2. 8.


 

 

 

선의 중흥도량 수덕사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

 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喜)·

 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 벽초 있다. 수덕사의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수선도량으로서 수덕사는 선(禪)의 생활화와 선풍진작의 계승을 위해 선실천(禪實踐)

수련대회를 갖는 등 일반인들에게 우뚝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경선(碧超 鏡禪)· 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해 총림의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으며 일주문 밖의 상가 등을 정비하여

수행환경 정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들어서면  금강역사상이 반갑게 맞이한다.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법의집 금당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이다.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蹟金剛)이 손에 금강저를 쥐고 있으며,

천상계의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문의 오른쪽에서  입을 크게 열고

호령하는 듯 속계와 성계(聖界)의 경계를 지키고 있다.

 

 

사천왕문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주신인데 서방은 광목천왕, 동방에는 지국천왕이

북방에는 다문천왕 남방에는 증장천왕이 악귀를 다스린다.
 
천왕문에 들어서는 자 만사가 여의형통(如意亨通) 길상할 것이며, 

참선지자(參禪之者)는 정각을 이루고 간경지자(看經之者) 혜안이 대진(大振)하며

염불지자(念佛之者)는 왕생극락이요, 기도지자(祈禱之者)는 대성(大成)할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안동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조사당(1377년) 강릉 객사문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며 현존하는 건축물로 건축사연구는 물론 미술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받는다.


수덕사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1937년에도 한번의 수리공사가 있었다.

대웅전 전각건물이 퇴락하여 일본인들에 위해 해체수리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리를 받치는 장여(長舌)와 화반(花盤)의 밑둥에서 발견된

'지대 원년 무신 4월 17일에 기둥을 세웠다(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는 묵서명을 통해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1528년(중종 23)과

1688년(숙종 14), 1751년(영조 27), 1803년(순조 3)에 각각 몇번의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

수덕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은 만행산(萬行山) 풍국사에서 조성된 불상을 1938년 남원 귀정사(歸政寺)에서 

만공스님이 이운해왔다고 전한다. 풍곡사는 현존하지 않고, 귀정사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삼세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두구의 보살입상은 문수와 보현보살

 

 

 

 

대웅전 측면의 아름다움

 

대웅전 전각의 귀공포

 

수덕사 대웅전의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신전건축물의 기둥에서 보이는

엔타시스기법(고전건축에 사용된 기둥)과 그 맥을 같이한다.

기둥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지름이 커지다가

기둥높이의 1/3지점에서 다시 기둥의 지름은 좁아진 형태를 띠는데,

이를 일러 배흘림기둥(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기둥형태)이라고 한다.

건물을 보다 안정감있게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대체로 법당의 오른쪽에 위치한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체용설(體用說)에 근거하면 왼쪽은 체에 오른쪽은 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체(體)는 본질이라서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用)은 작용이라고 한다.

범종각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은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한 것이다.

 

범종과 함께 목어 운판 법고를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하는데, 수덕사에는 불전사물을 한곳에 봉안하지 않았다.

범종각에는 범종만을, 법고각에 법고와 목어 운판을 두었다.

 

 

법고각 (法鼓閣)

법고각은 소리를 통해 뭇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고자 하는 사물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범종은 맞은편의 종각 안에 봉안했기에 이곳 법고각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삼층석탑

1983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초기의 석탑이다

 

 

칠층석탑

(충청남도지정문화재 자료제181호 칠층 석탑)

1984년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칠층석탑은 1931년 만공스님이 수덕사 주지로 임할 당시 제작한 것이다.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상

 

수덕사 창건설화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
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수덕사 편액*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에 걸려 있으며 , '壬寅淸秋 素筌孫在馨' 이란 관지가 있다.

素筌 孫在馨은 書와 文人畵를 모두 잘 했으며, 惺堂 金敦熙의 제자로 현대 한국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글씨는 1962년에 쓴것으로, 唐楷의 뼈대위에 전서의 劃法을 담은 素筌 특유의 圓潤한 행서이다.

 

 

동방제일선원

소전 손재영이 쓴 동방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을 걸어 사격을 나타내고 선수행 도량임을 말해주고 있다.

금강문 

수덕사의 주지를 역임하시고 덕숭총림의 수좌로 정진하고 계시는 설정 송원(雪靖 松原 1944. ~ )스님께서 쓰신 글씨이다.

스님은 14세에 수덕사에 입산하시어 1955년 원담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이 편액은 현재 금강문에 걸려 있다.

 

 

사천왕문 

수덕사에서 입산,수도하신 법현스님께서 쓰신 글씨이다.

스님께선 사군자를 그리시고 작품전시회를 개최하시기도 하셨다.

 

 

 선지종찰 수덕사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圓潭 진성 眞性스님께서 쓴 글이다.

 

 

덕숭총림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圓潭 진성 眞性스님께서 쓰신 글씨이다.

 

 

세계일화 

(만공스님께서 피지않은 무궁화꽃으로 쓴 글씨)

 

세계는 한 송이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세상 모든 것이 한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있어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이다.

 

 

수덕사 

불기이천구백칠십이년 七月二 惺齋 金台錫이 쓴 예서임을 알 수 있다.

惺齋는 일찍이 중국과 일본을 왕래 하여 안목을 넓혔으며, 篆隸는 篆刻에 뛰어났다.

淸 袁世凱의 서예 고문등을 지냈고, 안성 靑龍寺의 '冥府殿' 전서 편액등을 썼다. 조인정사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조인정사 

'金敦熙印','惺堂' 이라는 백문, 주문의 방인 2과가 있다.

 惺堂 金敦熙는 서화협회(1918 년 설립)회장, 조선미술 전람회 서부 심사위원으로

근대 한국 서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宋 黃庭堅 풍의 행서와 예서에 능했다.

'祖'자,'印' 자의 字法을 전서에서 차용하여 쓴 橫逸한 예서이다.

定慧寺의 '能仁禪院' 편액과 金仙臺에 있는 滿空의 坐禪處 '滿空臺' 石刻도 같은 종류의 글씨이다.

 

 청련당/백련당

"二九六一' 이라는 관지와 '宋月面印','滿空' 이라는 백문, 주문의 방인 도서 2과가 있어

滿空月面스님이 1934년에 쓴 행서임을 알 수 있다.

청련당, 향운각은 圓筆로 裕餘하게, 백련당은 方筆로 痛快하게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見性菴 및 七斤樓 편액도 같은 글씨이며,

이외에도 부속암자에 많은 글씨가 남아 있다.

 

 

범종각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圓潭 진성 眞性스님께서 쓰신 글씨이다

 

 

원담스님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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