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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전국의 사찰

덕숭산 정혜사

by 범여(梵如) 2012. 2. 8.

 

 

 

 

정혜사

(김규진서)

정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백제 599년(법왕 1)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한 이후에

많은 고승들이 수도를 했다고 하나 절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30년 승려 만공(滿空)이 머물면서 절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현존 당우로는 관음전·능인선원(能仁禪院)·산신각·불유각(佛乳閣)·요사채 등이 있다.

 

 

 

 

(석 문)

 

*향적당*

 

 

 

*남매탑*

 

 

*관음전*

 

 

관음보살좌상은 조각가인 김진복 선생님의  작품으로  높이가 105cm이다.

 

 

 

 

*산신각*

 

스님께서 예불을 하고 계서 밖에서 참배를 하였으니..

 

 

만공스님이 참선하였다는 좌선대 

(나가대정과 만공대)

'나가'는 산스크리트어로 '용'  '큰뱀' 이란 의미의 Nagar에서 온말로

'나가대정'은 무궁무진한 조화력을 가진 부처님의 힘을 말한다.

 

 

 

 

 

만공스님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근대 한국선의 자리매김을 한 대선사로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이다.

경허성우의 제자이다. 1871년 전북 태인군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때 김제 금산사에서 들어가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 진암노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해 동학사의 경허스님의 인도에 따라

천장사에서 경허의 속가 형님이었던 태허스님을 은사,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천장암에서 서너 살 아랫사람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혀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이를 화두로 정진하였다.

어느 날 서쪽 벽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일체의 현상이 사라지더니 허공 중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순간

2년이 넘도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온갖 의심의 덩어리가 사라졌다.
 
다시 통도사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던 만공은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예불 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듣고

순간 홀연 아무것도 막힘없고 걸림 없는 큰 깨달음의 희열을 맛보았다.
 
천장암으로 돌아온 만공은 경허로부터

“구름 달 골짜기 산 곳곳이 같으니, 산중 선자의 대가풍일세, 은밀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한 가닥 군세 기틀이 안중에 살아있네”라는 전법게(법을 전하는 게송)를 받았다.
 
만공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간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수행하는 스님)들을 지도하는 한편,

수덕사정혜사견성암 등을 중창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을 설립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총독 미나미(南次朗)에 일본의 한국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그에 관한 일화이다.
 
미나미 “조선의 불교란 것이 과거에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와서는 부패한 종교가 되었으므로 본관(미나미 지로, 南次朗)의 전임인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懿) 총독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를 통합하려고 했던 정책은 백번 지당한 것이있다.

이제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므로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만공 “청정본연 하거늘 어찌 문득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지난번 데라우찌 총독은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숱하게 많은 승려에게 일본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토록 하여

불교계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지금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불교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방편이 법에 어긋남이 없건만 일본불교와 합쳐 잘될 이유가

없으므로 총독부에서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 오는 말하는 불교진흥책이란 것도 총독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책이니라”
 
스님은 격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숫한 일화가 있다.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와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스님의 이런 기이한 무애행(無碍行: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하는 행동)은

범상한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겠으나 제대로 갖춘 눈으로 보면 세상을 깨우치는 풍우요 암시였던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전월사(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1946년 입적하니 세수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저서로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이 있다.

 

 

스님들 수행중에 계신 선방이니 닫힌문 틈새를 기웃거린다.

저녁공양 준비시간이 되었는지 스님들 모습이 보이고

스님들께서는 관음전부처님 뵐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신다.

정혜사 향적당에서 부터 오르는 전각들 앞에서의 풍경들은 제각각이니

앞서가는 일행들의 발걸음을 따라야하는 급한마음을 잠시 잊고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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