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옆에 있다. 소쇄원이 지어진 지 꼭 30년 후인 1560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정자의 관리는 김성원의 후손도 아니고 임억령의
후손도 아닌, 성산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만큼 이 정자는 주인이 누군지가
의미 없을 정도로 성산 일대의 문인들이 이용했고, 그들에게 사랑받았던 정자다.
식영정은 자미탄가에 높이 솟은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식영정에 다가가려면 절벽 위로 난
길고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절벽 위에서 풍경을 아래로 굽어보는 것도 좋지만 이 구불구불한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는 것도 식영정을 찾는 재미 중 하나다.
식영정은 정자다. 정자는 살림집과 달리 노는 집이다.
그냥 노는 집이 아니라 자기의 공부를 자연 속에서 확인하고, 증명하며 노는 집이다.
그런데 정자는 영남의 정자와 호남의 정자로 구분된다.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호남의 정자는 주위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호방하게 서 있는 반면 영남의 정자는 살림집과 그리 멀지 않거나, 아예 살림집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그들의 학풍에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理) 중심의 정주계 성리학이 압도적이다.
단지 기의 작용을 어느 정도 비중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뉜다.
이렇게 볼 때 호남의 사림은 주기론자가 많고, 영남의 사림은 주리론자가 압도적이다.
당연히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살피는 호남의 정자들은 앞이 탁 트인 곳에 자리하고,
현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영남의 정자들은 한층 더 은밀한 곳에 자리한다.
식영정은 호남 정자의 대표적인 예다. 그것은 식영정이란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임억령은 정자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김성원의 부탁을 받고 장자의 ‘제물편’에 있는 그림자의 예를 든다.
흡사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같은 예를 통해 임억령은 인생이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신기루 같고,
그림자 같은 거라고 말하며 그림자(影)를 끊고(息) 존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식영정이라고 지었다.
식영정에 오르면 거기서 보이는 모든 현상이 뜬구름 같은 것이고,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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