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 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이 양씨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다.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이번(李蕃)으로 계속해서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 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동 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집성촌으로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에 의해 형성되었다. 국보, 보물,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마을의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 볼거리가 많아 1993년 영국의 찰스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또한 옛 명문대가의 영광스러운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있는 200년 이상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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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집들을 공부하면서 ‘어쩌다가 우리는 한집에서 대충 20년도 살지 못하게 됐는가’ 하고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집은 고사하고 마을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요사스러운 명칭에 휘둘려 기껏 살아 온
터전을 뒤엎어 버리는 게 우리의 지금 형편이다. 코흘리개였던 동네 꼬마가 어느덧 자라 바래다 준 남자친구와
대문 앞에서 헤어지는 모습에 놀라듯 세월을 느꼈다던 이야기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럴 틈도 없이
가격이 오를 때 팔고, 이문이 생길 때 부수고, 새로 짓고 하는 부동산 자본주의에 우리 삶을 통째로 맡겨 왔다.
이런 때 400년이나 된 집들이, 그것도 한 두 채도 아닌, 100여 채나 되는 집이 한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가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의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조선시대의 반가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거기에 아직도 후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 과거가 박제돼 있는 곳이 아니라
생활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안강에서 영천으로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먼저 호명산과 만나 마을의 전모가 쉬 보이지 않는다.
이 호명산을 휘돌아 들어가면 설창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들이 흡사 물(勿) 자 형국을 이루며 마을 안을
흐르는 양동천과 만나 멈추고, 양동천은 다시 마을 밖을 흐르는 안락천과 이어지며 동해로 빠지는 형산강 줄기와 만난다.
반가들은 물 자 형국의 획을 따라 산 능선에 자리하고, 소작농인 타성받이와 노비들의 집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두 성씨가 대대손손 세를 이루며 지내온 곳이다.
지금도 ‘장가 간다’는 말이 남아있듯이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결혼을 하면 남자는 처가에서 살았다.
1458년 손소라는 청년이 25세의 나이로 부인을 따라 처가살이를 오면서 양동마을은 풍덕 류씨에서 월성 손씨의 마을로 변했다.
이어서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들면서 여강 이씨의 자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두 성씨가 양동마을에 살게 되면서 자손들의 교육, 가문의 회합을 위한 집이 지어지고, 종가와 파(派) 종가의
집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400년 전의 조선집이 여기에 있고, 앞으로의 한국 건축도 여기에 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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