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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 읽기]<11>양동마을 서백당

by 범여(梵如) 2012. 3. 16.

서백당(書百堂: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전기 경주손씨 양민공 손소 관련 주택으로

‘서백당(書百堂)’이라고도 불리며,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손소가 처가에 살다가 이 집을 짓고 분가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그의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손소는 청송부(靑松府)의 속현인 안덕현(安德縣)에서 태어나, 25세인 1457년(세조 3)에

풍덕류씨(豊德柳氏)류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양동에 정착하였다. 이 때 송첨을 지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양동으로 들어온 뒤 처음에는 처가에서 살다가 4년 뒤에 송첨을 짓고 분가하였다고도 전한다.

한편 1484년(성종 15)에 건립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그 뒤 손소의 첫째 아들인 손백돈(孫伯暾)이 우계이씨(羽溪李氏)와 결혼하여 처가에 살면서

아들 손위(孫暐)를 낳았는데, 손위가 후사를 잇지 못하여 손소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이 집안을 이끌었다.

1514년(중종 9)에 손중돈이 양동에 관가정(觀稼亭)을 짓고 손소의 신위와 영정을 사당에 모시면서

송첨은 손소의 넷째 아들인 손계돈(孫季暾)의 사제(私第)로 쓰이며 대종가의 기능을 잃었다.

그 뒤 1924년에 다시 송첨에 사당을 지어 손소의 신위를 옮겨 모시면서 현재까지 대종가로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물(勿)’자형의 형국을 이룬 양동마을의 가장 안쪽인 안골에 위치하고 있다.

제법 높은 언덕의 비탈면에 서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일(一)’자형 대문채와 ‘□’자형의 몸채를 지나면

동북쪽 뒤쪽에 사당이 있다. 집안의 전승에 의하면, 5칸 규모의 제청(祭廳)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사당 앞쪽이나 안채 뒤뜰이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대문채는 평면 8칸으로, 평대문(平大門) 형식의 대문을 중심으로 동남쪽에는 1칸의 방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1칸의 마루와 2칸의 부엌, 그리고 다시 1칸의 고방(庫房)이 이어져 있다.

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앞쪽에 위치한 중문을 통해서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중문을 중심으로 동남쪽에는 큰사랑과 대청, 중사랑 등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공간이 있다.

안채 공간은 안마당 뒤쪽으로 6칸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서남쪽에 안방과 부엌, 고방이 자리하여

중문으로 이어졌고, 반대편에는 산실방(産室房)과 제기고(祭器庫)가 자리하면서 사랑채 공간과 연결되었다.

몸채의 서남쪽에는 곳간채를 중심으로 장독대 등의 생활공간이 있으며, 몸채 뒤쪽에는 후원(後苑)이 있다.

몸채 동남쪽에도 넓은 마당이 있는데, ‘양동의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의 뒤쪽에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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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집을 공부하는 분들이면 으레 겪는 일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종손들과 어느 정도 알고 지내게 마련이다.

워낙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종손들도 귀찮기는 하겠지만 자기 못지않게 집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려니 여겨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미리 연락을 하고 찾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연락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때 혹시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경우, 연구자들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하기 일쑤다.

분명히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알은체도 안 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 상황에서 온갖 상상을 다 한다. 그 무서운 궁금증을 안고 종가에 가면 의문은 그때에야 풀린다.

아까 그냥 지나친 종손이 의관을 갖춰 입고 마중을 나오는 것이다. 의관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사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양은 개인을 사회의 최소 단위로 본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유가에서는 사회의 최소 단위를 가족으로 잡는다.

그래서 가문이라는 것은 나보다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구성원 공통의 가치다. 조선은 국법과 함께 종법이 따로 존재했던 시대다.

그 시대에 종가라는 것은 대단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징성은 종손의 위치에서 보자면 참으로 버거운 짐이었다.

가문의 모든 대소사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회합을 준비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종손은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노력조차 해서는 안 된다. 종손은 종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은 그런 집이다.

서백당은 월성 손씨의 종가다. 당호만 봐도 한숨이 나온다. 참을 인(忍)자를 100번을 쓰라는 의미다.

그러나 나는 서백당에 가면 편안하다. 행랑채가 어떻고, 안채가 어떻고 하는 건축적인 분석을 통해 이유를 찾아야 하겠지만,

서백당에 가면 그런 게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거기에서는 모든 숨결들이 낮게, 낮게 깔려 있다.

허리를 낮출 것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만드는 기품이 배어 있다.

한 인간의 희생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일까? 반가로는 드물게 삼량집이고, 현존하는 반가로서는 온양의 맹씨행단

다음으로 오래된 집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집. 서백당은 그런 집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