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0호)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건물로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남면(南面)하고 있다.
어느 때 지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咸陽太守)로 있을 때
창건하여 자주 올랐으므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1380년(우왕 6) 왜구의 노략질에 의하여 관아와 함께 불타버렸으며, 1692년(숙종 18)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경부터 함양국민학교 교사로 쓰여오다가 1963년부터는 군립도서관으로 쓰였으며, 1978년 겨울 현재
위치로 옮겼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 재임시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를 철거시킨 것이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말도 전하여진다. 현재는 함양군청 정문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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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측에는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안동지역이 있고,
그 우측으로는 일두 정여창으로 대표되는 함양지역이 있다는 말이다.
함양은 그만큼 많은 선비를 배출한 지역이다. 그래서 사화에 휩싸여 많은 선비가 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대개 사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인심이 무너지고 상하지 않는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유객을 거두고 권세를 부려서 평민을 침해한다. 이미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평하는 것을 싫어한다. 모두 홀로 한 지방에서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당색이 다르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마을과 마을이 서로 비방하고 욕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함양군청 근처에 있는 학사루(學士樓)는 원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었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웅장한 누각이다. 건립 연대는 꽤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말의 시인이며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함양태수를 자청해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지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잊고자 애썼다고 하니 세워진 것은 그 이전이다.
학사루는 함양읍성의 중심에 위치한 객사의 부속건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 건물만 남겨두고 모든 건물을 없애 버렸다.
주변의 풍경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건물 자체만으로도 안정된 비례를 보여준다.
그런데 묘한 것이 누구는 어지러운 세상을 잊기 위해 누에 오르고, 누구는 누에 올라 세상을 어지럽힌다.
최치원이 학사루에 오른 지 약 600년 후에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학사루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일개 궁궐 문을 지키던 갑사에서 무령군으로 권세를 누리며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이고,
조정을 어지럽히던 유자광의 시를 발견한다. 김종직이 누구던가. 나중에 조선 사림의 종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김종직은 단호하게 유자광의 시가 적힌 편액을 떼어버린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유자광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단종을 폐위한
세조를 모욕한 글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수많은 사림을 숙청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많은 영남의 사림이 죽거나 귀양길에 올랐다. 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거기 오른 사람들이 모자란 탓이다.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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