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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 읽기]<48>‘두 번째 꽃송이’ 산천정

by 범여(梵如) 2012. 4. 6.
 
매화와 난초, 국화와 대나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사랑하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중국인들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가장 좋아한다.
이상주의적인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난히 매화를 사랑했다. 예쁘기도 하지만 매화는
만물이 겨울의 추위 속에서 죽음을 겪고 있을 때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려 봄을 알린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것을 불의에 꺾이지 않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보았다.
특히 매화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향기가 더 맑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지리에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의미는 멀리 떨어진 매화 향기가 사방에 퍼지듯이
세상을 교화하는 성인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데 있다.
이육사가 ‘광야’에서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노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후손이고, 매산 정중기는 매화를 형이라고 불렀던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갈암 이현일의 제자이니 조선 사림 영남학파의 매화 사랑은 끝이 없다.


매산도 경북 영천시 삼매리의 매곡리 계곡을 매화 향기로 그윽하게 하고 싶었나 보다.
계곡에 매화를 심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지형상의 의미와 실재하는 의미가 중첩이 되니 중언부언하는 꼴이다.
그래서 매산은 매곡리 계곡에 매화꽃을 상징하는 집들을 건축한다.
매산고택이 그 처음 꽃송이이고, 계곡 건너편의 산천정(山泉亭)이 그 두 번째 꽃송이이며, 그 위의 산수정(山水亭)이
그 세 번째이고, 다시 계곡을 건너 와 매산고택 위쪽의 향양정이 그 네 번째이다. 모두 합쳐 무수한 매화 송이를 상징한다.
흔히 매산고택 건너편의 산천정을 산수정으로 잘못 알고 있다.
마을 사람들도 산천정을 산수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산수정은 따로 있다. 산천정은 매산고택의 안산 기슭에 있는 정자다.
마루에 ‘곡구정사(谷口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계곡 초입의 공부방’이라는 알기 쉬운 뜻이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에 반 칸을 더 써 전체를 쪽마루로 삼고, 세 칸의 양쪽에 방을 들였다.
그래서 마루의 개방성이 전면과 후면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이 지역의 특색이다.
영남 지방에서도 추운 겨울을 맞는 지역이라서 이런 평면을 갖게 되었지만 마루가 마루가 아니라 그냥 통로 같고,
오히려 방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더 좋다. 이 정자의 방 안에서 아직 추운 겨울날 계곡으로 지는 매화를 상상하는 것도 괜찮다.


함성호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