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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 읽기]<52>‘굴뚝이 없는 집’ 동춘당

by 범여(梵如) 2012. 4. 12.
대전 회덕 동춘당 (大田懷德同春堂:보물 제209호)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이 건물은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宋浚吉)이 자신의 호[同春堂]를 따서 건축한 별당이다.

이 별당의 서북측에는 송준길의 고택인 사랑채와 안채·사당 등이 독립된 건물로 건축되어 있다.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 모양의 평면으로 된 단층팔작지붕이며, 앞면을 널찍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워 주두 없이 직접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높이가 낮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다시

그 위의 판대공에 소로만을 짜넣어 종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서쪽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큰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었다. 방의 전면과 대청의 전면·측면·

뒷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달았는데 난간은 없다.

 

대청의 전면 창호는 띠살로 된 들어열개인데, 그 중 하나에는 작은 들창을 달아 겨울철에는 들어열개

분합문을 닫고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의 창호는 띠살로 된 여닫이창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막새기와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별당건축물로 규모도 크지 않고 선비의

기질을 잘 나타낸 간소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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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출판사 직원이 충청도에 놀러갔다. 끼니가 되어 음식점에 들렀다.

딱히 뭘 먹자고 들른 곳도 아니어서 차림새에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이 음식점은 뭘 잘하나요?” 그러자 주인아주머니는 귀찮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진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밖에 나와서 먹는 음식이 다 그렇지유 뭐.”


음식점 주인이 할 얘기가 아닌 말이 바로 음식점 주인에게서 나오면서 터지는 황당함이 충청도식의 유머다.

가장 경제적인 단순함 속에서 의미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춘당(同春堂)은 송준길(1606∼1672)의 호이자

대전 회덕에 있는 그의 집 별당의 이름이다. 별당이 다 그렇듯이 동춘당도 이 집 고택의 사랑채에 딸린 집이다.

그러나 동춘당은 그 안에서도 밖에서도 부속건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다른 집 같다. 혹시 같은 집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럴 수도 있구먼유” 할 것 같다. 어쩌란 말인지. 아무튼 동춘당은 간단한 집이다.

 
그 뒤에 있는 고택도 간단하다. 너른 대지에 별당인 동춘당이 있고, 동춘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고택의 대문이 나온다. 대문을 열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거기 사랑채가 있다.
아까 지나쳐 온 별당인 동춘당은, 심지어 송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의 유일한 타성바지 집처럼도 느껴진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사랑채의 끝에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외담이 있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분명히
내외하듯이 서있다. 별당인 동춘당은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의 집으로 동편의 네 칸이 마루로, 서편의 두 칸이
온돌로 되어 있는데, 온돌 북쪽에는 툇간을 달았다. 당연히 아궁이는 있는데, 이상하게 굴뚝이 없다.


옛사람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남과 어울릴 때의 몸가짐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일어나는 잡생각을 가장 경계했다.

그래서 사대부가에서는 왕왕 굴뚝을 아주 낮게 설치한 경우가 많다. 높은 굴뚝은 불이 잘 든다. 불이 잘 들면 방이 따뜻해지고,

그러면 저절로 몸이 편안해지는 걸 경계했던 것이다.

원래 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 정좌와 송이창(靜坐窩 宋爾昌)이 지었던 것을 임란 이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동춘당의 서쪽으로 돌아가니 거기 초석 높이만한 구멍이 나 있다. 여기다 굴뚝을 뚫은 것이다. “연기는 나가야쥬.”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