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의 십승지인 운봉 동점촌, 행촌은 어디인가
▲지리산 줄기로 둘러쌓인 남원시 운봉읍.
벌써 <남원풍수>라는 제목으로 네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죄송한 말을 해야만 했다.
그 것은 바로 ‘풍수문외한(風水門外漢)의 풍수이야기 집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아도 누군가 <남원풍수>를 정리할게 분명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짝(놈)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자면 이 책은 기존에 나온 남원풍수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면서
그 현장을 찾아가 사진자료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점 널리 양해 바란다.
조금 오래된 어느 신문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십승지는 어디인가>(서울신문, 2005.03.11)에
“전라도 땅에 있는 십승지는 하나뿐이야.‘감결’이 아홉째로 언급한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이 그거지.
‘남격암’엔 이를 지리산이라고도 했고 더욱 구체적인 설명도 나와 있어. 운봉 땅 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라고 말이야.
이곳에서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이 연달아 나온다고도 했어.
‘토정가장결’에서도 운봉의 두류산은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어. 궁기란 나중에 말하겠지만 한국 최고의 명당인데 지리산은
그 다음이란 뜻이야. 내가 사랑하는 후배 이중환도 지리산을 극찬했어.”라는 글에 ‘운봉 동점촌’이 나온다.
《한국사 테마전》(김경수, 돋을새김, 2009)에 언급된《정감록》 십승지지(十勝之地)에도
“다섯째, 남원 운봉의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리(운봉은 지리산 자락의 해발 400~500미터 높이에
자리 잡은 산골 분지)”와《조용헌의 소설》(조용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에도
“다섯째는 남원 운봉(雲峰)의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리이다. 운봉은 지리산 자락의 해발 400~500미터의
높이에 자리 잡은 산골 분지이다. 여름에 운봉에서 보름 정도 지내본 적이 있는데 삼복더위에도 신선한 곳이다.
”에도 역시 ‘운봉 동점촌’이 나온다.
이덕일과 김병기가 쓴 《우리역사의 수수께끼3》<정감록의 십승지는 정말 명당인가>에는 “넷째는 운봉(雲峰) 행촌(杏村)이다.(운봉 두류산 산록의 동점촌으로 지금의 지리산 북쪽 유역, 혹은 운봉의 행촌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하면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난세’라는 전제가 붙었을 때 ‘명당’이라고 할 만하지만 평상시에는 명당으로 보기가 곤란한 땅이다, 다만 세속을 잊고 마음 편하게 지내기에는 적당한 지역들이다.”와 《정감록》(김탁, 살림, 2005)의
<승지(勝地)사상>에는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p303),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인데 이는 이는 길이
살 수 있는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날 것이니(p303),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p305)”라며
“《정감록》의 십승지가 얼마나 타당한 근거가 있으며 신비성이 있는가는 과학적으로 규명 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승지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우리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하면서 삶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습니다.(…)결국 십승지와 그에 관련된 도참, 풍수사상은 우리 민중들이 끊임없는 전쟁,
폭정, 억압, 착취, 가난,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주려 오면서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에서는 ‘동점촌과 행촌’이 함께 기술되고 있다.
《정감록》이 말하는 난세에 몸을 보존하기 좋은 곳이라는 십승지지 중 한 곳인 ‘운봉 동점촌 혹은 행촌’이 있다는 남원시 운봉읍은
지리산 서북쪽 중턱에 위지한 해발 470m이상의 고원분지로 동쪽에는 용산천(龍山川)이 동천분지를 흐르고 람천(濫川)과 합수(合水)되면서
낙동강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진한(辰韓)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모산현(母山懸)으로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운봉현(雲峰縣)으로 개칭되어 천령군(天嶺郡: 경남 함양군)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나, 940년(고려 태조 23)에
남원부(南原府)로 편입되었다. 1708년(조선 숙종 34)에는 남원부에 있던 남원좌영(南原左營)이 옮겨오기도 했고, 1896년(고종 33)에는
운봉현이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운봉군(雲峰郡)이 4개의 면(面)으로 개편되어 남원군(南原郡)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ㆍ군의 통합으로 남원시 운봉면으로 되었다가 1995년 3월2일 면(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주촌, 덕산, 공안,
행정, 산덕, 동천, 용산, 북천, 서천, 준향, 권포, 임리, 신기, 매요, 가산, 화수 등 17개 법정리, 33개 행정리, 42개 자연마을, 99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감록》의 핵심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하나는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변란(變亂)기에 몸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십승지(十勝地)가 바로 그 것으로 남원고을(남원시) 운봉이 십승지에 포함된다.《정감록》은 필사본이 많아 다양한 이본이 존재하지만 그 내용들은 위에서 밝힌 것처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서 운봉은 ‘동점촌과 행촌’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 두 곳이 같은 곳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곳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지금부터 이곳이 과연 어딘지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자료를 통해 보면 운봉을 <감결>은 "길이 살 수 있는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날 것이다"고
했지만, 최어중이 쓴《십승지 풍수기행》의 운봉 얘기는, 결론부터 말하면 십승지를 찾지 못했다.
다만 준향리는 고려 초기에 생긴 마을이지만 그동안의 전란 때도 난리를 겪지 않았고, 또 산덕리는
'삼재불입(三災不入)' 명당이어서 난리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들어왔다고 한다. 행촌과 비슷한 행정리는
양반촌 이여서 비결파(민중)들이 살 곳이 아니라고 했다.《호남의 풍수》(백형모)에서는 ‘행촌’은 없다며
다만 십승지를 희구해온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내놓은 마을이 있다며, 산덕리, 준향리, 구상리를 꼽았다.
《한국의 자생풍수2》(최창조)에도 십승지의 사연이 깃든 구상리, 산덕리, 준향리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구상리(九相里, 아홉 정승이 날 고장이라 하여 붙은 지명)에서 언젠가 인물이 나리라고 기대함. 운봉이란
지명은 구름에 가려진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를 보게 된 데서 생긴 것, 운봉이 배(舟)의 형국이라 하여 동천,
서천, 서하, 북천 등 네 마을에 짐대(솟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산덕리(山德里)는 정감록십승지(鄭鑑錄十勝地)중 운봉 땅 행촌(杏村)으로 여겨지는 곳, 준향리란 주장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준향리(準香里, 準杏)리는 정감록 십승지 중 하나인 행촌(杏村)으로 지목되기도 했고, 산덕리란 주장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운봉읍과 붙어있는 아영면의 북쪽에 위치한, 흥부마을인 성리 옆에는 구상리라는 마을이 실제로 존재한다.
《아영면주민썬터 누리집》에 실려있는 (아영면)구상리에 깃든 풍수 설화를 정리해 보면, 구상리는 본래 운봉의
북하면(北下面) 지역으로 구색이, 구시기 또는 구상(九相)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송리(松里),
부동(釜洞), 성리(城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구상리(九相里)라 하고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면서 남원시 아영면 구상리가 되었다. 구상리에는 구상, 송리 등이 있다.
구상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초계변씨(草溪卞氏)가 입주하면서부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정감록(鄭鑑錄)비결이 성행하자 자손들의 안전을 기하는 이렇다하는
가문들이 피난지로 알고 찾아와 거주하게 됨으로써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사람이 드물고 천연의 밀림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여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인명에 피해를 끼치니
사람들은 자연히 산신을 섬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집마다 정성을 드리고 매년 마을 공동으로 산신제(山神祭)를
모셔 개를 잡아 호랑이에게 바쳤다하여 마을 이름이 구식(拘食)라고 하였다한다.
또 일설에는 호랑이가 먹이로 개를 찾는다고 해서 구색(拘索)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다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장차 아홉 재상이 나올 수 있는 명당자리라 하여 구상(九相)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곳이 바로 정감록에서 말하는 지역이 아닐까 싶다.
‘동점촌과 행촌’을 찾고자《운봉읍사무소 누리집》에서 마을유래를 살펴봤다.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으나, 이중 준향리(準香里)는
“지새가 무난하여 천재지변이 없고, 산수가 수려하니 유행병이나 괴질이 없고, 인심이 순후하여 도적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않아
삼재(三災)가 없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향촌(香村)으로 부르다가 그 후 서씨들과 유씨들이 정착하면서 준향(準香) 또는 준행(準杏)이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며, 행정리(杏亭里)는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지역으로 은행몰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엄계리 일부가
병합되어 행정리가 되었다. 마을이 형성된 때는 1769년경으로 추정된다.
처음 풍안 유씨(풍안유씨)가 입주하여 살다가 모두 준향리로 옮겨가고 그 뒤 입주한 창녕 조씨(昌寧曺氏)들이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어 김씨, 최씨, 정씨가 차례로 입주했다. 조씨들이 새로 들어와 정착할 무렵 이곳 일대에는 은행나무가 숲을 이루어 풍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곳을 은행마을, 은행몰이라고 이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은행리(銀杏里)가 되었는데 이를 줄여
행정(杏亭)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준향리의 “삼재(三災)가 없는 살기 좋은 고장”과 지명이 은행나무 마을이라는
‘행촌杏村’과 유사한 행정리가 마음에 와 닿는다. 공교롭게도 한때 준향리 ‘준행’으로 불렀는데 준행의 ‘행(杏)’자와 행정의 ‘행(杏)’가
서로 같지 않은가.
현재로서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삼재불입 명당이라는 산덕리와 준향리 그리고 지명이 비슷한 행정리와 아홉정승이
태어난다는 구상리 등이 운봉 십승지에 해당하는 지역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동점촌과 행촌은 같은 곳일까 아니면 다른 곳일까.
앞서 살펴본 대로 문헌마다 같거나 다르기도 하지만, 최어중의 《현장풍수》<고원의 고을 운봉>에는 “류씨 가족은 여기서 3백년간
11대를 살아온 집안이라 했다. 류봉문 노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고리봉 밑에 회덕 마을이 있긴 한데, 피난처라는 말도 있고
한때는 나주에서 온 사람이 살았다 한다.
그리고 동촌(銅村)이 사답삼두락(寺畓三斗落:정감록에 나오는 은어, 심승지를 뜻한다)이라는 말이 있긴 하나 누가 거기 가서 산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한다.”라는 구절에서 동점촌과 한자 표기와 명칭도 비슷한 ‘동촌‘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행촌과
동점촌은 별개의 지역인 듯하다. 류옹이 말했다는 회덕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 주천면 덕치리의 자연마을의 하나이다. 이 마을의 유래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德)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의 ‘모데기’가 한자화
되면서 회덕(會德)이라 하였다는데, 옛날에 괴질이 유행할 때 이 마을만은 안전하였다고 한다. 억새풀로 이엉을 이어 두텁게 지붕을
올린 샛집이 남아 있는 회덕마을은 실제로 운봉읍 행정리와 인접한 마을이라서 류용의 얘기에 무게가 실린다.
이 글의 제목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글을 마무리하면서, 누군가 “마음이 편하면 그 곳이 어디인들 명당 아니랴.”라고 했던 말과
장영훈 선생의《조선시대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덕천서원과 지리산 문하>에 실린, 오늘날 백수(白手)의 어원이 되었다는 남명의
시 한편이 각각 떠올랏다.
춘산저처무망초(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느 곳인들 산나물 없겠느냐마는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오직 하늘 닿은 천왕봉이
마음에 들었기에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백수(빈손)가 이곳으로 들어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까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 같은 물줄기는 마시고도 남겠다.
▲아홉 재상이 나올 수 있는 명당자리라 하여 구상(九相)이라 명명했다는 아영면 구상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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