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十勝地의 設
三災(전쟁,흉년.전염병 등의 천재지변)가 들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理想鄕의 생활터전을 말 하는 것으로서 四方은 험준한 산줄기가 감싸고 있고 그 곳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出入口는 물줄기가 흐르는 峽谷이라 지형은 호로병처럼 좁아서 안에서 밖을 살피는 것은 망원경 보듯 하지만 밖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것은 실로 不可能하여 人間이 산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급자족(耕作)할 수 있는 드넓은 신천지가 펼쳐지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산중이라 전쟁도 피해 간다고 하여 “十勝地”라 했다. 십승지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물(水)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地)이 있어야 했으며 외부와 단절을 要하는“바람과 구름과 비(風.雲.雨)”그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필요한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곳이여야 했다.
2.十勝地의 位置
문헌에 나타 난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전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십승지가 어느 한 곳에 지정 된 것이 아닌 산줄기(外境)가 감싸고 있는 전체적인 내경(분지)에 속하는 것이므로 문헌이나 역사적인 고증이 없는 한 “이 곳이다”라고 어느 한 곳을 정확하게 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따라서 현재까지 십승지의 위치가 뚜렷하게 밝혀진 곳은 소백산 아래 풍기 금계촌이 유일하며 전국에 걸쳐 60여 곳에 십승지가 있다고 알려진 것 중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은 괴산군이 20여개로 가장 많고 그 밖에 대부분의 십승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3.文獻에 나타나는 十勝地. 民衆에 가장 많이 알려진 문헌으로는 조선중기(壬亂과 丙子胡亂이후)에 저술된 작자미상의 “鄭鑑錄”인데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의 운명과 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예언서로 “鄭鑑”이라는 분과 “李沁”이라는 분의 對話을 기록한 “감결”과 의상대사의 “산수비기” 도선스님의 “도선비결”무학대사의“무학비결”이지함의“토정가장결”율곡과 서산대사 등이 저술한 내용를 포함하여 작자미상의 6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자가 난무하고 있으나, 십승지에 언급한 내용은 극소수로 남사고의“남사고비결”과 이중환의 “택리지”등에서 나타나는 십승지 등에 나타나는 내용과 대 부분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십승지는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 등에서 언급한 열 곳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수 많은 십승지 중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9대산문 이나 사찰 등이 들어선 절터도 십승지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4.十勝地는 어디에서 由來하였는가!
십승지는 조선시대의 중기 때 까지만 하여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향의 땅이 아니었다.
전란과 흉년 등으로 인한 재앙을 피하고 자손의 보호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던 당시 사람들의 애환과 처절한 고통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시작은 高麗가 망하고 조선이 建國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우리에게 익수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고사성어가 “십승지”를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두문불출”이란 광덕산(만수산으로 불리기도 한다)서쪽 두문동 계곡에 숨어 들어던 두문동72현을 표현한 말로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것에 항거하며‘不事二君“을 외치면서 싸릿문을 걸어 잠그고 문밖의 출입을 금하고 고사리를 캐먹으며 목숨을 연명 해 가던 고려충신들의 항거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역사는 사멸되고 말았지만 마지막 왕조를 지키던 충신들의 사모곡은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두문동에 숨어들어 고사리를 캐어 먹으면서 최후까지 항거 하였던 것이다.(만수산 서쪽 계곡(서두문동)에는 “두문동 72현”으로 알려진 고려충신 72인이 은거 하였고 동쪽 계곡(동두문동)에는 무인48인이 은거하였다)
5.杜門洞72賢을 말하다. 고려우왕1388년 命을 받아 북방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 워 회군(위화도회군)하여 八道都統使 최영장군을 高峰縣(경기도 고양)으로 歸養 보내고 우왕을 江華島로 추방한 후 공양왕을 내세워 사실 상 고려 통치에 들어간다. 1392년 공양왕을 강원도 삼척으로 귀양을 보낸 이성계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니 정몽주를 필두로 한 고려충신72人은 개성에 있는 광덕산(萬壽山) 불조현(嶺)을 넘을 때 관과 조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杜門不出” 해 버린다. 이에 당황한 이성계는 이들을 설득하여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不朝峴=두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조선에 不朝한다는 뜻))을 외치는 그 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자 杜門洞을 불사르고 그들을 몰살 시키라는 命을 내린다. 살아남은 자들은 坊坊曲曲으로 흩어져 인적이 닿지 않은 골짜기에 숨어들어 후일을 도모하고 자손은 保存하면서 터전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한편,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귀양 보내져 감호되다가 삼척시 근덕면의 궁촌리로 귀양지가 옮겨진 恭讓王은 태종(1394년)이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공양왕을 모시던 신하들은 공양왕이 살해되자 건의령(한의령으로 불리기도 하며 백두대간 태백시 상사미동과 삼척시 도계읍을 넘나드는 고개)을 넘어 오면서 고갯마루에 조복을 벗어두고 산속으로 숨어드니 정선의“두문동”과 남면의 백이산 주변이다. 나라를 잃고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고려인들은 百二叔齊(상나라 말 형제로 상나라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고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살아가지만 “왕미자”라는 사람이 찾아와 “주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주나라의 산에서 나는 고사리는 왜 먹는 가?”라고 말하자 이마저도 거절하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의 忠誠心을 따라 고사리로 목숨을 연명 해 가며 한 많은 인생을 “아리아”로 풀어내니 서럽고도 애절한 오늘 날 우리에게 사랑받고 있는“정선아리랑”이다.
이 들의 復權은 영조 때 와서야 이루어 졌는데 후릉(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는 조선 종종과 비 정안황후의 릉)을
참배하러 가던 영조가 不朝峴을 넘을 때 지명의 由來를 묻자 고려충신들이 조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杜門洞에 숨어들었다고 하여 “不朝峴(조서에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는 사연을 듣고 감복 (이들의 충정에 감동하여)하여 표절사를 건립하고 비를 세워 祭祀를 지내게 하고
후손들을 復權시키라는 命을 내리니 조선건국 127년만의 일이다.(松都不朝峴七十二賢言志錄:규장각)
이상과 같이 십승지는 新天地를 찾아 떠났던 사람들의 理想鄕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며 戰亂과 災殃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高麗人들의 애달픈 事緣이 담겨진 歷史가 朝鮮中期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십승지의 시초(始初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안했던 당시로서는 戰爭을 피할 수 있고 世上과 斷絶되어 살아가기 좋은 最後의
보류였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壬亂과 丙子胡亂 등의 커다란 전란 등 時代相 어려움은 또 다른 移民을 낳아
新天地를 찾아 떠나는 이들에게 狹小한 出口에 가려져 있던 십승지는 화가 미치지 못하니 더 없이 좋은 避難處가 되었고
가장 살기 좋은 理想鄕의 땅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移住는 현재까지 진행형으로 民衆뿐만 아니라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 가던 사람.친일파로 동네사람들의
미움을 사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 빨갱이 활동으로 연좌제에 걸려 산속으로 숨어 든 사람, 먹고살기 위해 火田
일구던 火田民 등이었으나, 요즘에 십승지에 찾아드는 사람들은 都市生活에 지쳐 自然을 찾아가는 사람과 歸農하는
사람들로 歲月의 變化無雙함을 느끼게 한다.
6.朝鮮時代 中期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十勝地
조선시대 중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십승지의 대 부분은 한강 以南을 中心으로 백두대간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理想鄕의 땅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며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등에 살기 좋은 10곳의 십승지로 정리한 記錄으로 남겨져 오늘 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鄭鑑錄은 1980년대 말경 정다운이란 스님이 변역하여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남쪽에 살고 있는 정도령이란 사람이 정권을 잡는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으나 정권교체를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만난 듯 열광적인 독서열풍을 가져왔지만 그 당시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십승지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향을 꿈꾸던 신천지가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 양택(풍수지리에서는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을 양택이라 하고 죽은자가 묻힐 수 있는 곳을 음택이라 한다)이라 하여 그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었을 뿐이며, 이러한 역사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십승지의 유래이자 結論으로 세세한 내용은 연구자(학문적인 연구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에게 미루기로 하고, 위 내용을 기초로 십승지라 일컬어지고 있는 地域의 外境을 원현을 그리며 자연성벽 역할을 하고 있는 산줄를 따라 걸어 보면서 먼 발취에서나마 힘들엇던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볼 것 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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