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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의정부 지명과 유래

by 범여(梵如) 2012. 12. 5.

 

참고문헌 : 의정부 향토자료집(의정부교육청刊) , 의정부시 홈페이지 「지명유래」

 


참고문헌 : 의정부 향토자료집(의정부교육청刊) , 의정부시 홈페이지 「지명유래」

 

 의정부 지명유래

 

조선조 1400년 2차 왕자의난 이후 방원은 제3대 태종으로 전위하나 태조(이성계)는 

태종에 대한 증원의 감정을 참지 못해 고향인 함흥으로 간다. 이에 태종은 여러차례 차사를 보냈지만

태조는 물론, 차사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김) 이후 무학대사가 함흥으로 가 설득하여 환궁을 하게되고, 

태종은 지금의 호원동 전좌마을(대한팔프 뒤 회룡골 입구)까지  나와 부왕 태조의 환궁 환영 준비를 하는 가운데

신하의 의견으로 아름드리 나무로 고주기둥을 세우는데 때마침 도착한  부왕 태조는 태종에 대한 노기가 충천하여

활궁에 철전을 매어 잡아당겼으나, 살은 연대에 꽂히고 태종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때부터 "연대가 맞아야 산다"는 말이 생기게 됨)


그후 태조는 끝내 환궁치 아니하고 이곳 의정부에서 잠시 머물러 있다가 남양주군 진접면 내각리 풍양군에서 지냈다고 전해오는데 1408년5월 개경에서 춘추 74세로 승하했다. 태조가 우리 의정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조정대신들이 이곳까지 와서

정사를 논의하는 한편, 태상왕의 윤허를 받았다고 하여 조선시대 최고 관청의 명칭을 따서 의정부라 했다.

그러나 의정부라는 이름은 1912년부터 문헌에 등장하게 됐는데, 그해 5월 23일에 공포된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기도편에 의하면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 라는 부락 명칭이 이때부터 생겼다. (議政府地理志 의정부시 金榮福 )

 

  파발막

 

선조때(1597년)부터 통신망을 위주로 하는 파발제도가 새로 생겼다. 파발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과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리는 보발 등이 있었는데, 전달 방법은 릴레이 식으로 하였다.

기발은 25리(10km)마다 1참을 두었고, 보발은 30리(약12km)마다 1참씩을 두었다.

기발에는 매 참마다 발장 1명, 군인 2명이 이었다. 당시 전국의 파발망은 서발, 북발, 남발 등 세 갈레로 짜여져 있었는데

우리 고장은 북발에 딸려 있었다. 북발은 서울에서 경원에 일는 통신망이다.

북발 = 서울 - 두험천참(의정부) - 안기참(포천) - - - - - - 아오지참(64참)
의정부에는 두험천(중량천)참이 있었는데, 지금의 포천로타리 부근에 파발막이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파발막리]라 부르게 되었다.

 

   범골(호동)

 

범골(호동)의 유래에는 두가지 전설이 전한다.
범골은 도봉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서 이 동네에 범(范)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범씨들이 많이 살고 잇는

고을이란 뜻으로 [범골]이라 불럿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옛날 도봉산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는데,

밤이 되면 언제나 호랑이들이 이 동네에 내려와서 가축들을 잡아 가곤 하였는데, 호랑이가 많은 동네라 하여

 [범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호동]이란 범 〈호〉자와 마을 〈동〉자를 따서 쓰는 말이다.

 

   회룡골(회룡동)

 

도봉산 동북쪽 기슭에 있는 회룡사 입구의 마을로서 절 이름을 따서 회룡골이라 하였는데,

 회룡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천3백여년전 신라 의상 스님이 지었으며, 회룡사는 처음에는 법성사라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 절에서 무학 스님과 함께 3년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온다.

 그 후에 조선왕조의 태조 임금이 된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무학스님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 임금이 되서 돌아왔다 」고 하며 절 이름을 법성사 대신 회룡사로 고쳤다고한다. 

그런가 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 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환궁할 때 이절 부근에 이르자 타고 가던

 임금의 가마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무학 스님이 회란룡가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원이 이루어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회룡사로 고쳣다고 한다.  한편, 회룡사는 망월사 다음으로 오래된 절로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이 많이 있다.

 

   전 좌

 

회룡골 입구 마을로서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 뒷 편에 있다.
조선조 초기에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자 태조 이성계는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함흥으로 간 후

 돌아오지 않다가 결국 무학 스님의 끈질긴 설득으로 한양 환궁의 길에 올랐다. 

한편, 태종은 부왕이 한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친히 나와서 아버지 태조를 맞이 하였다.

이때, 두 임금이 마주 앉았던 곳이라 하여 전좌 마을이 됐다. 전좌란 말의 뜻이 임금님이 앉는 자리란 뜻이다.

 

   외 미(왜묘)

 

전좌마을 오른편에 있는 마을로서 일제시대 이곳에 일본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이마을 뒷산에 일본사람들의

 무덤이 많이 있었다고하여 처음에는 왜묘라고 부르다가 그후에는 외미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장수원

 

조선시대에 이 곳에 원(院)이 있었는데 의정대신들이 태조(太祖)와 정무를 논하러 의정부까지 오던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하여, 다락원을 거쳐 서울로 가는 상인들도 이곳에서 쉬어가면서 주막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장수원이라는 지명은 구바위소에서 흘러오는 물이 하류의 삼형제소까지 길게 흐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하며,

 또 그 무렵 소문으로는 이곳 원에서 나는 약수물을 마시면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오래산다고 하여

 「장수하는 약수」라는 뜻으로 원이름이 장수원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도불암이라는 암자에 약수터가

있는데 물 맛이 좋아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안말 과 바깥말

 

안말과 바깥말은 장수원 뒤의 마을로, 산 밑쪽은 안말이라고 하고 바깥쪽은 바깥말이라고 한다.

안말은 안평대군의 영당과 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락원

 

조선시대에 함경도 원산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포천에서 다락원을 통해 서울로 가는 상품 교역의 길이 번창하였는데,

서울로 들어서는 관문인 이곳에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상점이 생기게 되면서 다락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곳 다락원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물품이 집하되어 서울로 반입되면서 중간상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원산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건어물을 사재기 해두었다가 서울 상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거나 상품을 공급하지

않아 서울 상인들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누원은 상누원(上樓院)과 하누원(下樓院)으로 번창하였는데

상누원은 지금의 서울시 도봉동이고 하누원은 의정부시 호원동이다.

 

    장자동(長者洞), (장재울)

 

장재울은 수락산의 서쪽 산기슭, 석림사 입구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숙종(肅宗)때 서계 박세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곳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 인품이 관후(寬厚)할 뿐만 아니라 직간보국(直諫輔國)하여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관후장자(寬厚長者=마음씨가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 사는 곳이라 하여 ,

박세당선생이 사는 이 마을을 장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변음되어 장재울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이 곳에는 선생님이 살었던 집과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노강서원)들 선생의 많은 족적들이 남겨져 있다.

 

    동막골(東幕谷)

 

동막골은 수락산 아래 전에 이화방적과 신성통상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대우아파트 신축부지가 있는 마을로서 장수원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포천을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간다던가 그와 반대로 함경도지방에서 포천을 거쳐 금

오동 쪽에서 신곡동 가래울 서울 고개(의정부 초등학교 뒤)를 넘어 이곳 동막골을 지나 서울 상계동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 주막이 있었기 때문에 길손들이 동쪽에 있는 막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일설에는 동쪽이 막혀서 동막골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상촌 (정자마을)

 

정자마을은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을 윗말(上村)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계 박세당이 자신을 낮춰 자신이 사는 곳을 아랫말(下村)로 부르고 서거정이 사는 곳은 윗말로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의 마을은 가운뎃말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 정자마을 안에는 샘내기라는 수질이 좋은 우물이 있으며,

 수삼매기라는 빨래터가 있다.

 

   발곡(발이소(술)리=鉢伊述里)

 

옛날에 가래울에서 나는 가래나무를 재료로 하여 바릿대( 절에서 승려들이 쓰는 그릇 )를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가 만든 바릿대는 아주 잘 만들어서 유명했다.  그래서 이름있는 바릿대를 만드는 곳이라 하여  〈 발곡 〉 또는

〈 발이소리 〉 라 부르게 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둔배미(본둔야=本芚夜)

 

둔배미(둔뱀이)는 삼국시대에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밤에 진을 쳤던 곳이라고

하여 둔야 또는 둔뱀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져 오나 둔(芚)과 둔(屯)은 글자가 서로 다르다.

 또한 이 곳을 본둔야(本芚夜)라고도 하는데, 이는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둔야리가

 용현동으로 속해지게 되었으나 이 곳에 둔야면사무소(芚夜面事務所)가 있으므로 본래의 둔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래울(楸洞)

 

가래울은 의정부초등학교 위쪽에 있는 마을로 음지쪽에 있다고 하여 음지말이라고도 불렸으며,

이 곳에 가래나무가 많이 자랐기 때문에 가래울 또는 추동이라고 부르게 되엇는데,

  가래울에서 발곡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이름이 〈 서울고개 〉이다.

 

   청룡(청룡부리)

 

청룡부리는 가래울에서 발이소(술)리(鉢伊述里)로 가는 모퉁이로 이 앞에 안산이 있어서 안산모탱이라고도 불렸으며,

이 위에 고인돌이 있어서 바위모탱이라고도 불렸다.

 

   동오리(東梧里)

 

동오리는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았는데 이 곳이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동우리라고도 부르는데

산 모양이 알둥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현재 신곡1동사무소가 있다.

 

   능골(陵谷)

 

능골은 세조(世祖) 14년(1468) 9월 세조가 승하하자 능의 자리가 될 만한 명당을 잡기 위하여 지사(地師)가 이곳까지 와서 답

사하고 능의 후보자로 내정하였으나 세조의 능이 지금의 광릉으로 결정되어 이름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선구자격인 최동식박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새말(新村)

 

신촌은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경 조선 성종(成宗)의 열번째 아들 경명군(景明君)의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마을을 새로 개척해 살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일설에는 선조(宣祖) 25년(1592)경부터 전주이씨

 일가가 이 곳에 낙향하여 마을을 새로 개척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바깥새말과 안새말로 나뉘며,

안새말에서 바깥새말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말고개라고 한다.

 

   곰고개(공고개) 

공고개는 서울에 조공을 싣고 가는 나귀와 소가 많이 지나 다녀서 붙여진 이름인데, 철도가 부설되고 신작로(1913년부터

1927년 까지 의정부에서 퇴계원으로 가는 길) 가 생기면서 길이 쓸모없어지자, 공고개를 막아서 없어졌고 당내미고개로 넘어다녔다.

현재는 의무대가 들어서 있다.

 

   비석거리

 

비석거리는 윤은보(尹殷輔)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윤은보는 조선 성종(成宗)·중종(中宗)때의

문신(文臣)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의 묘소는 신곡동 산 33번지 (지금의 영석고등학교자리로 추정)에 있으며, 묘소 입구에 위치한 신도비는

 명종(明宗) 6년(1551)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는 전면 각자(刻字)의 비문이 세월의 풍화로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렵다.

신도비는 의정부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다.

 

   어룡골(魚龍)

 

어룡 마을  뒷동산의 이름이  "효자봉" 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 선생은 이름 난 효자였다.

 선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무덤을 효자봉에 쓰고 묘 옆에서 3 년동안 여막살이를 하였다. 

그 효성이 지극 하였으므로 산의 이름을  "효자봉" 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룡골은  효자봉 아래의  마을이며, 

그 앞에는 부용천(莩蓉川)이 흘러 중랑천(中浪川)에 이르고, 그 산의 모양이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으로

마치 용이 누워서 부용천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부용천의 물고기가 용이 된 후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이 되었다고 한다. 물고기가 용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효자봉은 롯데마트 뒤편의 산봉우리 이며 어룡골은 그 아래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 지역으로 추정)

 

   민락골

 

옛날 이 곳에 처음으로 마을을 만들때의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찌나 부지런 하였던지 논과 밭을 개간하면서

골라냄 돌 들을 모아 마을 어귀에 성벽처럼 돌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잘 가꾸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 마을 앞까지 쳐들어 왔다.  "혹시 조선군사가 저 돌성의 울창한 소나무숲에 진을 치고 있지나 않을까?" 

 왜병들은 두려워한 나머지 마을 어귀에서 그대로 물러나갔으므로 그 무서운 난리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이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숲과 돌담때문에 편안하게 지냈다 하여 백성 〈 민 〉 자와 즐거울 〈 락 〉 자를 써서 

 〈 민락골 〉 이라 불려졌다.

 

    삼귀말(三歸)

 

삼귀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조견(趙 )·원선(元宣)·정구(鄭矩) 등 세분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면서

이 곳에서 은거하여, 삼현동귀 (세 분의 어진이가 이 곳에 함께 돌아왔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송산사(松山祠)가 있는데 정조22년(1798)에 이들의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유림들이 삼귀서사(三歸書祠)라는

사당을 세워 조견·원선의 위패를 모시다가 이후 1804년에 송산사로 개칭하였고,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후 1996년에 발굴 복원되었다.

 

    곤제(昆弟)

 

양주조씨(楊州趙氏)의 족보에 의하면, 이 마을의 원래 지명은 양주(楊州) 외송산(外松山) 섭뒤울이라고 했으니

섭은 땔나무(柴) 즉 섶의 옛말로 시북면(柴北面)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또한 5백여년전 양주조씨 두 형제가 이 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곤제라고 불렸는데

형 조극관(趙克冠)은 단종 원년(1453)에 병조판서를 지냈고 동생 조수량(趙遂良)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계유정란 때 두형제가 모두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두 형제의 무덤이 이 마을 뒷산에 있고

 그 후손들이 이 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궁말(궁촌)

 

옛부터 이 마을에 들국화가 많이 피었으므로 국말 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궁말을 중심으로

앞 뒤로 오목이와 벌말등 넓고 경치가 좋아서 궁궐을 지을 만한 서 궁말(궁촌) 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오목리

 

지금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는 민락동은  예전에는  오목리(梧木里) 라  불리웠는데 오목리라는 이름은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목리 옆으로는 진등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진등는 개발 이전 주소로

민락동 519번지부터 522번지 일대로, 한국토지공사에서 주택단지조성을 위한 택지개발을 하면서 선사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국내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은 모두 큰 하천변이나 바닷가등 해성충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곳에서 출토된

유적은 처음으로 내륙지방에서 발견되었으며,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유물분포와 구석기인들의 생활범위가

휠씬 광범위 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혈암제, 가로날밀개, 세석인석핵, 흑요석제 등 모두 36점이 발굴되었다.

 

    원머루(遠隅)

 

원머루는 예전에 서울에서 수락산 고개를 거쳐 포천을 가려면 멀리 돌아가야 될 만큼 먼 모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곳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원우(遠隅)라고 쓰게 되었다. 또한 일설에는 이 모퉁이를 지나야 원님의 산소와

 양마산소로 갈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6.25사변이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부용산 동쪽의 마을 - 주공4단지 맞은편 )

 

   벌말(坪村)

 

평촌은 마을에 넓은 들에 있어서 벌말이라고도 하며, 조견 이 살던 곳이다.

예전에는 이 평촌과 양지편을 합쳐서 동덕동(同德洞)이라고 하였다.

 

   방화동

방화 란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한 꽃이란 뜻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물빛이 맑은

이 마을이 주변에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계절에 따라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쉼없이 피고,  도 피어난다. 

 그래서 이 마을을  〈 방화동 〉 이라 부르게 되었다.

 

    갓바위 (입암리)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의 모양이 갓과 같이 생겼다 하여 〈 갓바위 〉라 부른다.  갓 〈 입 〉

 자와 바위 〈 암 〉 자를 써서 입암리 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입암리에 배나무 밭이 많은데, 

이들 배나무밭에는 송어, 비단잉어를 기르는 집들이 있다.

 

   가재말(가좌)

 

옛날에 어느 장군이 젊은 시절을 싸움터에서만 보내다가 제대를 했다. 그는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마음으로

삶의 터전을 찾아 이곳 저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이 곳에 이르러 살게 되었는데,  살다보니 과연 좋은 곳이었다.

  이 곳을 가좌 (가히 편안하게 지낼만한 좌석) 로구나!  장군은 이 곳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을을 “가좌” 라 불렀는데,  지금은 변음이 되어 〈 가재말 〉 이라고 한다.

 

   구석말(構石洞) (구성말(九星洞))

 

구석말은 세종(世宗)의 막내아들인 운림도정(雲林都正)의 후손들이 와서 살면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는 입구에 있는 구석(構石, 푯돌백이)이라는 돌을 딛고 말을 타거나 내려서 걸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구석말이 변음되어 구성말(九星洞)이라고도 한다. 또한 600년 정도된

 은행나무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서 황새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이 마을에는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묘와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 완성군(完城君) 이기축(李起築)의 묘 등 당대에 명성을 날렸던 명인들의 묘가 있다

 

   정자말

 

정자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 어귀에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노는 정자터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서 문집에 보면 송정동(松亭洞)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능안말

 

능안말은 고산초등학교 부근의 마을로 1468년 세조(世祖)가 승하하자 지사(地師)가 능자리를 물색하기 위하여

신곡동의 능골을 거쳐 이 곳까지 와서 명당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 때 지사가 여기에 능자리를 삼을 것을 마음먹었으나

 광릉이 더 좋은 땅이라고 하여 그 곳으로 결정하자 이름만 능안말로 남게 되었다.

 

   잔돌백이(細石)

 

잔돌백이는 땅을 파면 논, 밭 어느 곳에서나 잔돌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꽤 넓게 형성되어 있다

 

   쇄쟁이

 

쇠쟁이벌은 쇠쟁이등 너머 저수지 아래의 들로, 이 곳에는 길마배미라는 논이 있다. 길마배미는

논의 모양이 소의 등에 얹는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독바위

독바위는 독바위마을 입구 왼쪽 능선에 있으며, 현재는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으로 지금도 계단석이 남아 있다.

 

   빼뻘(배벌)

 

빼뻘은 배나무가 너무 많아서 붙여진 이름(梨坪)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시언(李時言)이 이끈

우관전투 때 백병전을 하던 곳으로 변음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만가대(萬家岱)

 

만가대는 집이 많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집을 더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집이 많이 들어섰다고 하여

만가대(滿家垈)였는데, 지금은 만(滿)자가 바뀌어 만가대(萬家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양주목 호구장 교지(楊洲牧 戶口帳 敎旨)」에 의하면 박씨 일가가 누대에 걸쳐 살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둔야1리(芚夜1里)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골(城谷)

 

성골은 정확한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 곳 주위는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왓장과 주춧돌이 출토되고 있다.

 

   거문돌

 

거문돌은 조선시대에는 東幕(동막)으로 불렸다. 동막은 이 마을 동쪽에 더운 물이 땅에서 솟아올라서 그 물로

사람들이 막을 세워 놓고 목욕을 하였다는 온두막골(溫逗幕谷)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후 묵현(默峴)이라고도 불렸다.

묵현은 거문돌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흑석동(黑石洞)일고 부르고 있다

 

    數突(수돌) 고개

 

수돌고개는 임진왜란 우관전투 당시 빼뻘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이 고개로 많은 왜병들이 일시에 몰렸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 옆에는 의병들이 분해서 자결하였다는 분통골이 있다.

 

    축석령(祝石嶺)

 

축석령은 천보산(天寶山) 기슭에 있는 고개로 포천군 소흘면(蔬屹面)과 경계를 이루며 의정부시 북쪽 관문이 된다.

일명 2백리고개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이르므로 철원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2백리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축석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吳伯周)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귀성도호사(龜城都護使)로 있을 때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벼슬을 버린채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약도 차도가 없어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고 있는데 꿈에서

산신령이 크게 꾸짖으며 "네 아비의 병은 석밀(石蜜)을 먹으면 낫는데 게으름만 피우고 있느냐"하고 호령하자

그는 석밀을 구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보단 말인가"하며 통곡하자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 나왔다.

 이에 부친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범바위라고 불렸으며,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하여 축석령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귀락(歸樂)

 

귀락은 포천시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는 의정부시의 최북단(最北端) 마을로, 조선 영조(英祖) 중엽 박해문(朴海文)이라는 사람이 평안도 도사(平安道 都事)를 지내다 이 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산수가 아름다운 이 곳에서의 삶을 늘 만족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그의 가노(家奴)들이 마을이름이 없어서 불편함을 털어놓고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자 "내가 이곳에 돌아와서(歸鄕) 여생을 즐겁게 지낸다(樂業)"라고 말하면서 마을이름을 귀락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이곳의 지형(地形)이 거북이가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귀락(龜落)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본자일(本自逸)

 

본자일은 1914년 4월 1일 전국행정구역 개편으로 자일리(自逸里)·귀락리(歸樂里)·금곡리(金谷里)를 병합하기전의 자일리를 말한다.

자일리라는 이름은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에 의하면, 6백여년전 태고보우(太古普愚) 스님이

이 곳에 천보사(天寶寺)을 짓고 자적유일(自適遊逸 - 스스로 자유롭게 편안히 지내다)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오리(金梧里)

 

조선 선조(宣祖)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이 이 곳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번창하였다.

한편 포천에는 병조판서 서성(徐 )이라는 분이 살고 있었는데 서울을 왕래할 때 마다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늘 괴로움을 당했다고 한다. 한국국립지리원 지명조사록에 의하면 서서이 서쪽마을에 호랑이와 늑대같이 욕심많고

인정없는 사람들이 산다고 하여 서호랑리(西虎郞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후 변음되어 서오리(西梧里)가 되었고 다시 상서오리·중서오리·하서오리로 나뉘었다가 금오리로 합쳐졌다.

또한 이 곳을 부석동(浮石洞)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 동사무소 앞 주논들에 있던 바위가 장마가 져도 잠기지 않고

 물에 떠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재울(佳佐洞)

 

가재울은 가능동에서 의정부1동으로 편입되었으며, 가재가 많이 살던 가재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 표기로는 가좌동(佳佐洞)으로 정자나무들과 녹양동으로 이어지는 깐깐이들이 있다.

 

   비석거리(비성거리)

 

비성거리는 양주시 양주동 남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의정부시의 최북단 마을로 예전에 양주목사(楊州牧使)가 순행다니던 길목으로 역대 목사들의 송덕비가 많이 세워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변음되어 비석거리가 되었으며, 한자 표기로는 비우(碑偶)라 한다.

 

    하동촌(河東村)

 

하동촌은 천보산(天寶山) 낙맥(落맥脈) 기슭에 있는 마을로 중랑천(中浪川) 상류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골

 

안골은 사패산 서쪽 계곡 일대로, 계곡은 그다지 깊지 않으나 봄에는 진달래, 철쭉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피서지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직동(곧은골)

 

곧은골(直洞)은 윗곧은골과 아랫곧은골로 나뉜다. 아랫곧은골(下直洞)은 영재정이란 정자가 있었고,

그 아래 곧은골 삼거리 근방을 말하며, 6.25사변 전까지만 해도 소나무가 길가에 많이 서 있었다고 한다.

 곤은골삼거리는 현재는 6거리이며,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상직동(윗곧은골)

 

윗곧은골은 현재 경민전문대·경민학원 앞에서부터 곧은골삼거리까지를 말한다.

 

    입석(선돌-立石)

 

선돌은 아랫선돌과 윗선돌로 나뉘는데, 아랫선돌은 이 곳 녹양동에 속하고 윗선돌은 가능동에 속한다.

선돌은 마을 뒷산에 큰 선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선돌에는 늠말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들개(柳峴)

 

버들개는 어두니로 가는 길 윗쪽에 있으며, 이 마을 어귀에 고개가 하나 있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한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윗버들개와 아랫버들개로 나뉜다.

 

   본녹양

 

녹양동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녹양리(綠楊里)·유현리(柳峴里)·비우리(碑隅里)와 입석리(立石里)의 일부를

 합쳐서 녹양리(綠楊里)로개칭하였다가 1964년 5월 8일 「의정부시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녹양동이 되었다.

녹양동의 의정부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北)으로는 양주시 양주동과 접하고 있다.

녹양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이 곳에 녹양평(綠楊坪)이라는 군마(軍馬)사육 목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양평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그 규모가 동서 7리, 남북 12리라고 하였으며,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방목하던 곳으로 마릿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곳에 관한 기록은

그 후에 찬술된 『여지도서(輿地圖書)』나 『대동지지(大東地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폐지된 듯 하다.

 


   백석이고개

 

백석이고개는 축석에서 마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는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고개에 하얀돌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천보산(天寶山)

 

천보산은 보우국사(普愚國師)가 초창(初創)한 천보사(天寶寺)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조선 선조(宣祖)의 후궁인 정빈민씨를 비롯해서 제7자 인성군(仁城君), 손자 해원군(海原君), 증손 화릉군(花綾君),

화창군(花昌君), 화춘군(花春君) 그리고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綾昌君) 등의 왕손들의 묘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금곡

 

금곡리는 광부촌(鑛夫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