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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전국의 사찰

순천 선암사 /주저 앉아야 낮은 것이 보이더라

by 범여(梵如) 2013. 3. 22.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사찰 ?

     

이곳 선암사에는 여러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다. 태고총림 ... 태고종 유일의 고찰 ...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사찰 등이다. 그러나 태고종 유일의 고찰이자,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사찰이라는 수식어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뼈아픈

과거가 숨겨져 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보통 한국불교하면 모두 계종을 떠올린다. 그러나 현대 한국 불교는 무려 27개의 종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가운데 세가 가장 큰 곳이 조계종이며, 다음으로는 태고종(太古宗)을 뽑을 수 있다. 나머지 종단은

대부분 본산 중심이 군소종파라고 할 수 있다. 남한에 있는 사찰 가운데 19세기 이전에 조성된 사찰은

대략 1,000여 개소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이름난 고찰은 대략 300여 개소에 이른다. 

 

300여 개소에 이르는 고찰 중 대부분은 조계종 산하의 사찰이며, 태고종은 단 두 곳의 고찰만을 가지고 있으니,

본산인 서울 신촌의 봉원사와 이곳 순천의 선암사이다. 그나마 선암사의 법적 주인이 조계종이기 때문에,

소유관계만 따진다면 봉원사만이 태고종의 유일한 고찰인 것이다. 그런데 선암사는 법적 주인이 조계종인데,

왜 태고종의 승려들이 수행하고 있으며, 왜 태고총림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일까? 이는 우리나라의 얼룩진

불교 역사를 되집어 볼 수 밖에 없다.

 

1954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그 유명한 <사찰 정화 유시>를 불쑥 발표한다. " 재래의 가정을 가진

승려는 친일승(親日僧)이니 모든 사찰에서 물러나라..."  이른바 비구(比丘 ..수행승)과 대처승(帶妻僧 ..교화승)의

대립을 조장한 명령이었다. 당시 대처승인 교화승은 7,000명에 달하였고, 비구측 수행승은 3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극소수이었던 수행승들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합법적인 수단과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단 3년만에

전국 대부분의 고찰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결은 치열하여,

비구측은 曺溪宗을 創宗하고, 이에 맞서 대처승들은 1970년 太古宗을 창종하기에 이른다.

 

 이런 역사의 와중에 이승만의 사찰정화 유시에 따라 법적인 수단을 강구하여 선암사 가람은 조계종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선암사를 점유하고 있던 이들은 대처승 측이었으니 지금도 선암사는

유일한 태고총림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암사의 소유를 둘러싼 복잡한 종파의 갈등 와중에

실질적인 재산관리인은 순천시장(順天市長)에게 넘어간 사실이다. 이렇게 선암사는 법적으로 조계종측의

재산이지만, 실질적 소유주는 태고종측이며, 재산관리인은 순천시장으로 되어 있어 그 복잡한 역학관계

때문에 선암사는 함부로, 쉽게 불사를 일으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선암사는 수많은 사찰들의

원칙없는 佛事 붐에 의하여 원형이 파손되어 갈 때,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사찰로

남게 되었다. 아이로니....    

 

                                             태고총림(太古叢林)

위와 같이 이승만대통령의 특별담화로 비구와 대처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형식적으로 종단은 조계종으로 통합되었지만, 독신을 주장하는 세력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는 와중에 5.16 군사혁명을 맞게 되었다. 당시 불교재건위원회에

의하여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을 종명으로 통합 종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의 쌍방 의견대립, 그리고 결국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대처승측이 패소하면서

강제로 종단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대처승측은  1970년 1월 박대륜(朴大輪)을 宗正으로 하여

통합종단이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분리하여 태고종(太古宗)종단을 발족하였다. 태고(太古)는 고려

말기 불교를 통합한 태고 보우국사(太古 普愚國師)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태고종은 "대중 교화"를 이념으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불교 교육기관과 언론 출판 기관,

어린이 교육 및 복지기관, 사회복지기관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태고종의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종단이

10여 개의 큰 사찰을 제외하면, 3,000여 개의 私說 사암(寺庵)으로 이루러져 있다는 점이다.

 

사설 사암이란 개인이 설립한 규모가 작고 역사가 짧은 사찰을 말한다. 

즉 절의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태고종은 한국불교의 전통문화인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와 제48호 단청을 보유하고 있다.

 

태고종은 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출가(出家) 수행을 근본으로 하되, 출가(出家)와 재가(在家)가

다르지 아니하며,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고,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바탕으로 중생의 교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유일하게 실시하고 있는 재가교역자로서

전법사 제도인 교임(敎任)제도는 여러 사유로 출가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수행도량을 마련하여

수행과 대중 교화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교임(敎任)은 남녀, 연령 또는 결혼 여부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

창건 연혁(創建 年革)

선암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529년(신라 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창하여 청량산 해천사 (淸凉山 海川寺)라고

하였다는 설과, 875년에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다.

 

<조계산 선암사 사적기> 등의 기록을 조합하면, 아도화상이 경북 선산에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고

활약하던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막 받아들이던 시점이고, 불교를 공인한 것이 법흥왕 14년인데,

신라 땅도 아닌 백제 땅에 신라 승 아도가 선암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신뢰도가 낮다고 할 수있다.

 

비록 아도화상이 비로암에서 해천사를 개산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작은 암자에 불과하고,

현재의 위치에 사찰의 격식을 갖춘 것은 도선국사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선암사는 도선국사에 의하여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창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선국사            道詵國師

 

도선국사는 이곳 선암사를 실질적으로 창건하고, 氣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도 남아 있는

1 철불(鐵佛), 2 보탑(寶塔), 3 부도(浮屠)를 세웠다고 한다. 37세가 되던 해, 도선은 옥룡사로

주석처를 옮기면서, 옥룡사를 중심으로 선암사, 금둔사, 징광사 등에서 선법을 크게 번창시켰다. 

  

이곳 선암사에는 도선국사의 진영(眞影 . 보물 제 1506 호)와 그의 부도로 전해지는

선조암지부도(보물 제1188호)가 있으며, 그의 유품으로 그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직인통(職印筒)이 성보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도선국사 진영(道詵國師 眞影)

  보물 제15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신리시대에 활동한 선승이며, 이곳 선암사를 창건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초상화로,화면의 크기는 가로 105cm, 세로 131.5cm이며, 전체 크기는

가로 112.5cm, 세로 147cm이다. 두 발을 받침대 이에 올려 놓은 의좌상(椅坐像)으로, 오른손에

주장자(柱杖子 ... 선사들이 좌선할 때 또는 설법할 때 지니는 지팡이)를 세워 들고 있다.

 

옷주름의 표현이 특이한데, 녹색 장삼은 색의 농담(濃淡)으로, 붉은 가사의 옷주름은 먹선과 흰

선을 중첩하여 표현하였다. 1805년 도일비구(道日比丘)가 그린 초상화이다.

도선국사(道禪國師)

도선(道禪. 827~898)은 신라 말기의 승려로, 풍수설의 대가이다. 자는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속성은 김씨이며, 시호는 요공국사, 선각국사이고  영암 출신이다.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지리산 월유봉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다.그 후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慧徹)을 찾아가, "無說說, 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850년 천도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후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그를 초빙하여 법문을 열었다. 72세의 나이로 그가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의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先覺國師로 추봉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 승려 一行으로부터 풍수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연대는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므로 신빙성을 그리 높지않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신화적 존재로까지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이다. 875년 도선은 "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 道詵秘記>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왕건은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했다. 그래서 <훈요십조. 訓要十條>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기..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吉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생각컨데 국왕, 공주, 왕비, 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선암사에는 대각국사와 관련된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각국사의 부도(보물 1117호), 대각국사의 진영 (보물 제1044호), 금동은입사향로

(전남유형문화재 제20호), 금란가사, 용문탁의, 중창건도기 등이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선암사에서는 대각국사의 열반 이후 매년 음력 9월28일을 기념하여 탄신다례(誕辰茶禮)를

가장 큰 연중행사로 지내고 있다.

대각국사 진영(大覺國師 眞影)

    

이 대각국사의 영정은 가로 110.2cm 세로 144cm의 크기이다.

비단애 채색하여 그린 것으로,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왼손은 긴 막대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단주(短珠)에 팔목을 끼고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이 영정은 현재 선암사 응향각에 봉안되어 있다. 

  

사색에 잠긴 듯한 눈빛과 넓은 이마, 큰 코와 귀 그리고 꽉 다물고 있는 입에서

그의 학식과 수행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녹색의 가사를 걸쳤으며,

금빛의 둥근 고리로 매듭을 대신하였다.

 

이 영정은 승려화가인 도일비구(道日比丘)에 의하여 1805년에 수정, 보완한 것으로

앞 시대의 양식적 특색을 알 수있는 당대의 대표작이며, 나옹선사 혜근(惠勤)의 글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습기로 인하여 얼룩이 있고, 일부 골곡진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천태종(天台宗)의 開祖이다.

성은 王씨이고,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이다.

송악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 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하여 47세에 입적할 때까지 구법과 수행,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이었다. 의천은 1085년 송나라에 들어가 고승 50여 명을

만나 불법을 교류하였고, 귀국 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에 착수하였다.

그는 도선국사에 이어 선암사 대각암에 머물면서 이곳 선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선암사 중수비(仙巖寺 重修碑)

1707년(숙종 33)에 건립된 석비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암사의 무우전(무우전) 뒷편 북암가는 길목에 서 있다. 선암사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승려 약휴(若休. 1664~1738)가 1698년부터 8년 동안 선암사를 중수하였다.

약휴스님은 선암사를 성심으로 보호하여 <호암자. 護巖子>라고 불렸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중수비를 건립하였다.  

총높이 5.02m, 비신 너비 1.25m, 두께 30cm의 크기이다.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세우고, 정상에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귀부의 귀두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나, 목이 매우 짧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귀갑(龜甲)은 육각문이 음각으로 선명하게 시문되어 있다.

이수는 하단에 앙련을 두르고 상단에 두 마리의 용이 얽혀서 꿈틀거리고 있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어, 조선시대의 석비로는 수작에 속한다고 한다. 

                                                선암사 가는 길

우리나라의 산사 건축은 진입로부터 시작한다.

산사의 진입로는 그 자체가 건축적, 조경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산사의 얼굴이다. 

선암사 주차장에서 차를 내리고 약 반 시간 걸리는 이 5리 길 진입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속세와 성역을 가르는 분할 공간이자 완충지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사에는 반드시 모두 저마다의 특성을 가진 진입로가 있다. 

  

그 진입로는 산의 형상에 따라 그 지방이 식생(植生)환경에 따라 다르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길, 하동 쌍계사의 10리 벗꽃길, 합천 해인사의 가야동 계곡길,

장성 백양사의 굴참나무길, 영월 법흥사의 준수한 소나무숲길, 부안 내소사의 곧게 뻗은

전나무 가로수길, 영주 부석사의 은행나무 비탈길, 조계산 송광사의 활엽수와 침엽수가 어우러진 길...

어느 절의 진입로가 더 아름다운지 따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선암사 진입로길은 평범하고 친숙한 우리 야산의 전형으로, 줄곧 계곡을 곁에 두고

물소리를 들으며 걷게 된다. 그러나 어느만큼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그때 그때의 인공 설치물이

이 갈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한다.  해묵은 굴참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선 넓은 공터를 지나면

키 큰 측백나무를 배경으로 한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밭을 지나면 장승과 산문 역할을 하고 있는

석주(石柱) 한 쌍이 길 양편에 서 있고, 여기서 산 모서리를 돌아서면 아름다운 승선교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난다.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는 조계산(曺溪山)의 매력은 무엇일까.

물론 승보사찰인 송광사(松廣寺)와 태고총림인 선암사(仙巖寺)가 이 산의 강보에 싸여 있는 것도

확실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산의 푸른 배경이 되는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볕과 계곡물이 현상 뒤의 심원에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선암사에 오면 말문을 닫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적적동중사     寂寂洞中寺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숙숙림하승     肅肅林下僧       쓸쓸한 숲 아래 스님일세

                          정진혼파락     情塵渾擺落       마음 속 띠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수정징응     智水正澄凝       슬기로운 물은 맑게 고여 있네

                          은예팔천성     殷禮八千聖       팔천의 성인에게 예배하고

                          담교삼요간     淡交三要間       담담한 사귐은 삼요의 벗일세

                          아래소열뇌     我來消熱惱       내가 와서 뜨거운 번뇌 식히니

                          여대옥호수     如對玉壺水       마치 옥병 속 얼음 대하듯 하네

 

고려시대의 文人이었던 김극기(金克己)가 이곳 선암사에 놀러 왔다가 위와 같은 詩를 남겼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명이 있었으며, 진사가 된 후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詩作으로

소일하다가, 40대에 이르러서야 벼슬길에 나섰다. 그의 문집 <김거사집. 金居士集>은 1220년

당시의 집권자이었던 최우(崔禹)의 명에 의하여 고율시(古律詩), 사륙(四六), 잡문 등으로 모아

우리 문학사상 초유의 대규모인 135권으로 간행되었으나, 그후 失傳되었다. 그러나 신동국여지승람이나

동문선에 그의 시 260여 수가 남아 있다.  

 

 

절에서도 참선에 드는 선방을 따로 만들어 진아(眞我)를 찾아 나서듯, 묵상 순례하기 좋은 길을

걸으며 사색에 들면 의외로 자신이 만나기를 갈구해 왔던 "큰 힘"을 쉽게 만나게 된다.

이곳 조계산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을 "조계산 굴목재 길" 이라고 부르다가

"천년 불심길"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선암사는 부처를 모시는 절이지만, 이곳에는 부처보다 더 많은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기분 좋은 흙길을 밟고 쉬엄쉬엄 올라가면, 왼쪽계곡에 있는 승선교(乘仙橋)를 만나고,

그 다리 아래 계곡 너른바위에 내려서면, 강선루(降仙樓)란 누각이 멋진 돔 속의 한 폭 그림으로 앉아 있다.

선암사(仙巖寺) 자체가 신선을 품고 있지만, 모든 다리와 누각에는 선(仙)자가 항렬처럼 붙어 다니고 있다.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 400 호

    

선암사의 부도밭을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인 다리가 승선교(昇仙橋)이다. 승선교는 조선 후기의 석조홍교(石造虹橋)로 길이 14m,

너비 3.5m의 규모이다. 기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虹霓 .. 무지개 虹, 무지개 霓)를 쌓았는데, 돌을 연결한 솜씨가 정교하여, 홍예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정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 계곡 기슭까지의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냇돌을 사용하여 석벽을 쌓아 막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 석벽도 난석(亂石) 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원형을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기단부 아래에는 가설(架設)도 없이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안전하다.

홍예  한 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을 향하여 삐죽 나와 있어,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더하고 있는데, 예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승선교는 아래쪽의 작은 다리와 위쪽의 큰 다리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선암사 진입로는 이 작은 다리 건너 계곡 건너편 길을 통하여 큰 다리를 통해 다시 건너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결과 다리의 구조가 더욱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른쪽 산자락에 붙여 새 길을

내어 그쪽ㅇ으로 다니니, 승선교 두 다리는 그저 장식으로 남아 있는 셈이 되었다.

승선교 무지개 다리 아래로는 아무렇게나 굴러 있는 바위덩이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데,

멀리 계곡 돌아가는 길목에는 강선루 2층집 정자가 우뚝 서 있어 우리에게 여기서 쉬어가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낸다. 냇물이 잔잔히 흐를 때는 무지개다리 물 속의 그림자와 합쳐 둥근 언을

그리고, ㅡ럴 때 계곡 아래로 내려가 보면 그 동그라미 속에 강선루가 들어앉은 듯 보이고 있다.

선암사의 제1경이라고 할 만하다. 

포물선 꼭지점에 해당하는 무지개 다리 정 가운데에는 멋지게 조각한 용머리를 냇물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돌출시켜 그것이 중심추 역할을 해서 다리는 균형이 매우 잘 맞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선교는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의 크기로 무척 크고 긴 다리이다.

양쪽 기단을 천연 암반에 두고, 훌륭한 솜씨로 쌓았기 때문에 폭우에 계곡물이 범람하여도 끄떡없다.

앞뒤의 잡석들만 쓸려 내려갈 뿐, 장대석으로 쌓은 홍예 틀은 그대로 남아 있다.

 

벌교의 홍교(虹橋)도 기술을 전수 받은 선암사 스님들의 작품이다.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 생활이 궁핍해진 절에서는 스님이 목수가 되어 법당을 세운다.

직접 기와도 굽고, 단청과 불화도 그렸다. 쇠를 녹여 범종을 만든느 스님에 돌다리를 쌓는 스님도 있었다.

선암사 호암(호암)스님이 1713년에 세운 승선교를 제대로 보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 된다.

사진 찍기 좋은 너럭바위에서 보면, 다리 밑으로 보이는 강선루(降仙樓)와 승선교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승선교는 홍예교(虹霓橋) 즉 무지개 다리이고, 구름다리이다.

이러한 홍예교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산성이나 사찰, 고분 벽화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성(聖)과 속(俗) 그리고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같이 극과 극을 연결하는 조화와 중용이 있는 우리나라의

가치관이 숨어 있는 다리이다.

  

선암사 홍예교의 이름은 승선교(昇仙橋)이다. 신선이 오른 다리라는 의미이다.

승선교는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 다리로서의 직선과 냇가를 품고 있는 곡선이 만나서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다리이다. 홍예교는 두 개가 있다. 승선교의 곡선 안쪽에서 절 방향을 바라보면 강선루가 보이는데, 아주 일품의 그림이 된다.

하나의 풍경이 절묘하게 자리를 잡아 신선이 내려올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강선루(降仙樓)와 승선교는 하나의 풍경 안에서 만나고 있다. 여기에 선암사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여졌다 하는 창건설화를 보태면, 그야말로 선암사는 신선이  

살던, 놀던 곳이었다.  

승선교와 강선루

    

승선교는 선암사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게 함으로써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한편 강선루는 팔작지붕의 아래는 네 기둥 사이를

지나가는 통로이고, 2층은 청마루로 된 중층문루이다. 이 두 건축물은 종교적인 의미와 예술적

감각에 의해 한 앵글 속의 걸작으로 태어났다. 

  

선암사 가는 길목에 있는 목장승을 지나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지점에 30여m 간격을 두고 석조

쌍무지개 다리를 놓아 사람이 밟는 위쪽을 흙으로 덭어, 첫 번 째 다리를 건너갔다가 두 번 째

다리에서 되돌아와 강선루를 통하여 선암사로 들어가도록 연결시켜 놓았다. 승선교는

1707년(숙종 33)에 공사를 시작하여 6년 후인 1713년에 완공되었다. 도선국사의 선암사

창건시기를 기점으로 보아도 800년의 세월이 흐른 전통의 巨刹이었으므로 분명 통행로가 있었을 터인데,

단순한 교통수단으로 6년 동안의 장기간 공사를 하였을 리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두 걸작, 승선교와 강선루를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면 평범하지만 예쁜 다리 그

리고 단순한 문루에 지나지 않겠지만, 둘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빛나는 예술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건축물이 하나로 인식되지만, 강선루는 승선교가 세워지고 216년이나 지난 1929년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문루는 일주문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선암사에서 일주문 밖에 문루를 하나 더 세운 것은 강선루가 승선교와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이룬 것이 그의 해답일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선조들의

예술혼을 되새겨 보며 아름다운선경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강선루(降仙樓)

 

 

조계산 선암사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이고, 위층은 가늘고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위층에는 게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각을

일주문 안쪽에 두고 있는데 반하여, 선암사의 경우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이채롭다. 선암사의 실질적인 경역이 바로 이곳 강선루에서부터 시작된다. 

 

선암사(仙巖寺), 승선교(昇仙橋), 강선루(降仙樓)는 모두 신선과 관련되어 이름을 지어 놓았다.

선암사라는 이름 자체가, 조계산 장군봉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바위가 있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선들이 살던 곳, 쉬던 곳이 선암사이다. 선암사에는 부처를 만나러 갈까,

신선을 만나러 가야 할까. 만나면 무엇을 듣고, 물어야 할까? 

무지개를 쫓는 /

아이들의 순수함처럼 /

신선이 되고픈 열망에 /

아름다운 이상을 꿈 꾸었으니 /

화려하였던 태고총림 /

 

선암사의 전성기는 가버리고 /

울창한 숲 속긔 계곡물 소리만 /

우화등선의 비밀을 감춘 채 /

세월 속의 나그네로 사라지는구나 /

등선하는 승선교와 / 강선하는 강선루를 바라보며 /

 

옛 구도자들의 열정을 사모하는데 /

어찌하여 /

신선들을 불러들이는 ? 스님들의 목탁소리만 /

무상한 세월을 달래고 있는가  

                                           삼인당(三忍塘)

 

강선루를 지나면 삼인당(三忍塘)이라는 연못이 나온다.

삼인당은 선암사의 많은 연못 중에서 가장 아랫쪽에 있는 연못이다.

아기자기한 선암사에는 연못이 참 많다. 이곳 삼인당은 절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여들여

만든 타원형의 자그마한 연못이다. 크기는 긴 거리가 약 30m, 짧은 폭이 약 20m이며,

못 안에는 자그마한 인공 섬을 만들어, 꽃무릇(상사초)과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의 연못으로 꾸며 놓았다.

 

삼인당 앞 둑에 나란히 서 있는 커다란 전나무 세 그루는 三忍의 의미를 더욱 돋우고 있으며,

여름 한철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가을로 들어서면 꽃무릇(상사초)가 인공섬 정수리에

수북히 만발하여 시선을 사로 잡는다. 

  

삼인당은 도선국사가 선암사를 창건할 당시 만들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물어지고

매워진 것을 1996년 복원하였다. 연못 안의인공섬에는 1996년 복원 시까지 연못가에 있는

나무와 동일한 전나무가 한 그루 있었으나, 잘리고 말았으며, 연못을  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건축적 배려로 인공섬을 배치하였다.

 

                                            연못이 많은 선암사

 

삼인당 연못은 산비탈 한쪽에 일부러 조성한 것이다.

굳이 이 자리에 연못을 조성한 것은 여름 장마철에 큰물이 들어오면 일단 여기에 가두었다

계곡으로 흘려 보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연못이 없으면, 이 산자락에는 홍수 때 지나간

물길 자국만 남아 토사가 빈번히 일어났을 것이다. 삼인당 물은 선암사 동쪽 기슭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물으로 모아 채우는데, 발굴조사에  의하면 땅에 묻힌 암거(暗渠) 자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암사는 산자락을 타고 집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경내에는 비탈진 곳마다 이러한 연못을 조성하였다.

삼성각과 천불전 계단 아래에는 네모난 방지(方池)가 있고, 심검당과 종무소 곁에는 쌍둥이 못 쌍지(雙池)가 있고,

범종각과 해우소 사이의 석축 아래로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지원(池苑)이 있는데, 모두 조경적 기능과 토목적

기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삼인당에 섬이 있어 이 연못은 더 커보이고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된 것이다.

삼인당 섬에는 전나무 한 그루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그래서 겨울이면 늘 푸른 나무가 삭막한 계절이 쓸쓸함을 달래주고,

여름이면 배롱나무 빨간 꽃이 석달 열흘간 해맑은 빛으로 피어난다.

    

                                          비보사찰(裨補寺刹)

 

삼인(三忍)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三法忍이라 이르며,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름이 없고, 나라는 것도 없으므로, 이것을 알면 열반에 들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삼인당은 이처럼 부처를 기리기 위한 연못이다. 삼인당 구조가 타원형으로 생긴 것은 그 지형 탓도 있지만,

경내의 네모난 방지와 석축 밑의 자연스러운 연못과는 다른 양상을 취한것일 수 있다. 그런데 타원형의

못 한쪽으로 치우쳐 달걀모양의 섬은 왜 만들었을까?

   

거기에는 아마 두 가지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삼인당으로 흘러 드는 물길은 위쪽 가운데로

들어와 아래쪽 옆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 이 섬이 없으면 못 왼쪽은 물의 흐름이 생기지 않아

고인 물이 썩게 된다. 그러나 섬이 있음으로 해서 유입된 물은 못 전체를 돌아나가는 회로가 생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학적 배려이다. 인간의 시각적 습관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극장 객석에 앉으면 무대 오른쪽보다 왼쪽으로 눈이 먼저 가고 또 많이 간다.

그래서 연극에서 무대장치의 기본원칙을 말해주는 무대지도를 보면 오른쪽을 무겁게하고, 왼쪽을비워두라고 한다.

 

 하지만 풍수지리와 관련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풍수지리상으로 보아 선암사 터는

산강수약(山强水弱)에 해당하여, 화재에 취약하므로 물의 기운을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어

비보(裨補)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도선국사가 세운 전국 곳곳의 절터에는 비보(裨補)의

흔적들을 찾을 수가 있으며, 裨補란 모자람을 도와서 채운다는 뜻의 풍수지리 용어이다.

아울러 선암사에는 화재와 관련된 수많은 비방이 가득하다.

이곳 삼인당을 지나 곧장 오르면 오른쪽으로 야생차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또한 하마비(하마비)가 보인다.

요즈음 절들은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은 차치하고, 절까지 길을 넓혀 거기에

포장까지 해서 심지어는 절 앞 마당까지 차들이 곧장 처들어오듯 들어오곤 한다.

도대체 절을 찾아가는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며 절까지 이를 수 있는 곳이 드물다.

이 하마비를 보면서 요즈음은 절 입구에 하차비(下車碑)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 하마비에 대하여 구전설화에 의하면, 고려 시절 동래정씨의 시조 묘소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墳墓) 입구인 이곳에서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하마비를 세우게 되었고, 하마정(下馬停)이라고

하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정에 얽힌 전설로는 임진왜란 당시 倭將이 하마정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 하자, 말이 갑자기 요동을 치며 왜장이 말에서 떨어졌다. 다시 말을 타려고 하자

또 말이 요동을 쳤다. 통역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 사연을 설명하였더니, 왜장도 예의를 갖

추고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가람 배치

선암사는 40여 동의 전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사찰 건축의 규범 속에서 신앙의 변화에

따른 전각들이 주변에 옹기종기 건립되어 있어 무질서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전각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경사가 있으면 경사진 대로,

터가 좁으면 좁은 대로, 전체적인 조화를 해치지 않고 있다.

  

전각들은 영역과 축선에 따라 배치되고 있는데, 영역의 구분은 축대와 담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영역과 영역은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로 이루어진 조경이 이어주고 있다. 선암사는 일주문, 만세루,

쌍탑, 대웅전으로 구성된 대웅전 영역과 그 위로 불조전, 팔상전이 있는 원통전 영역, 그 위로 미타전,

달마전이 있는 응진전 영역, 그 옆으로 무우전이 있는 각황전 영역으로 구분할 수있다. 영역은 축선에

따라 몇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대웅전 영역은 대칭되는 쌍탑으로 인해 중심성이 강조되었으며, 원통전 영역은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로 건물의 일부분만 보여 호기심을 일으킨다. 응진전 영역은 두 개의 전각들이 서로 엇물리게 하여

대문에서 전체 전각들을 다 보이게 하였으며, 각황전 영역은 ㄷ자형으로 승방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일주문 (一柱門)

 

선암사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일주문은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의 일주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그 돌계단의 소맷돌에는 이름

모를 석수(石獸)가 선암사를 수호하고 있다. 건물은 단순한 맞배지붕이며,

두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cm

중간에서 보조기둥을 잘랐다. 이는 기둥 얖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하며,

다른 일주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고 있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을 두어 공포로 꽉 차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1719년에 작성된 "조계문중창상량문(曺溪門重創上梁文)"에

의하면, 조계문이 1719년에 중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일주문이 당시에는 조계문(曺溪門)이라고

하였다.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

이 현판은 창건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 이외에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암사의 창건에 관한 사실로 529년 아도화상이 비로암에 해천사(海川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선암사의 전신으로 보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작은 암자에

불과하였지, 선암사는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암사는 이러하다.

  

선암사는 여러 차례의 火災에 시달리는역사를 갖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의 화재, 1759년(영조 35) 때의 화재, 1823년(순조 23) 때의 화재,

1948년의 화재, 1950년의 화재 등 이러한 많은 화재들 속에서 선암사는 불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1759년 화재 이후에는 절 이름을 아예 물을 의미하는 해천사(海川寺)로 바꾼다.

그러나 이 처방의 약효는오래 가지 못하고 1823년의 화재 이후 다시 선암사로 돌아온다.

아무튼 선암사에는 이외에도 해천당이라는당우, 심검당의 벽면에 해(海)자와 수(水)자를

새겨 넣은 것도 그리고 경내에 석등을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하여도

불을 피하기 위한 선암사의 심정은 알만하다.   

 

                                           범종루

 

 

 

                                                 금고(金鼓)

선암사 괘불탱 및 부속유물 일괄

이곳 선암사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탱과 괘불함 그리고 황동제 후령통 1조, 감지주서(紺紙朱書)

발원문 1매, 백지묵서(白紙墨書) 9매, 백지주서(白紙朱書) 및 인본(印本) 다라니 9매 등의

복장유물로 보물 제14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 사진의 괘불탱은 18세기에 활동하던 화원 쾌윤(快允)이 1753년에 그린 작품으로, 크기는

가로 722cm, 세로 1,260cm이다. 홍련좌(紅蓮座)를 딛고 있는 석가모니불 입상(立像)이 단독으로

화면 가득 그려진 독존도(獨尊圖) 형식이다. 석가모니불이 두상 왼쪽에는 구슬장식이 화려한 금탑

안에 다보불(多寶佛)로 추정되고 있는 불상이 앉아 있고, 탑 밖에는 대요설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와 대칭하여 두상 오른쪽에는 각자 손 모양을 달리 하고 있는 시방불(十方佛)이 묘사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의 신체 비례가 적당하고, 유려하면서도 정밀한 필치로 그린 이목구비와 손, 발 그리고

꽃무늬 등 세련미와 조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8세기 불화 화단의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괘불탱을 보관하고 있던 괘불함은 전, 후, 좌, 우 14곳에 손잡이용 고리가 달려있고,

함의 각 모서리에 물고기, 연꽃, 나비 무늬가 투각된 금속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외 복장유물도 보존상태가 비교적양호한 편이다. 

후령통(候鈴筒 .. 아래 사진)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 함께 넣는 금, 은, 칠보 등의

보물과 오곡(五穀), 오향(五香), 오약(五藥)을 복장(腹藏)이라고 하며, 후령통은 이 복장을

넣는 통을 이르는 말이다. 높이는 약 10~20cm이다. 불상에 들어가는 통은 대개 원통이고,

불화에 딸린 후령통은 사각통이 많다.

 

대부분 철이나 구리 등 금속재료로 만드나 가끔 도자기로 만들기도 한다.

뚜껑과 본체를 따로 만드는데, 뚜껑에는 둥근 대롱을 끼워 넣어 공기의 통로를 만든다.

본체 표면에는 산스크리트(梵語) 문자를 써 놓고, 내부에는 색실로 묶은 오색천을 넣어 빈 공간을 채운다. 복

장을 넣을 때는 보자기로 잘 싸거나, 복장 주머니에 넣어 통 안에 보관한다. 이때 사용하는 보자기를

황소포자라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아래를 오르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에는 < 육조고사. 六朝古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글씨는 서포 김만중(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김익겸)의 글씨인데,

육조고사의 육조는 혜능(혜능)을 말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선종을 처음 전한 "달마"로 부터

여섯번 째, 그 선종을 이어온 혜는이 중국 조계(曺溪)에서 그 禪法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六朝古寺란 그 혜능의 옛 절을 뜻한다.  

     

                                 전도선국사 직인통(傳道詵國師 職印筒)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사용하였다고 하나, 그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기타 기록은 없다. 나무로 만들었으며, 3개 모두

위에 뚜껑을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높이는 15~17cm, 밑부분 지름은 16~19cm이다.

  

그 중 하나는 팔각으로 맨 꼭대기에 꼭지가 달려 있으며, 전면에는 길게 장식을 달아 자물쇠 장치를

부착하였고, 그 양편으로 고리를 상하로 2개씩 달아 놓았다. 통 밑에는 철제로 띠를 돌려 단단하게

묶었으며, 중앙의 개폐 부분에도 철제 띠를 돌렸다. 상단에는 통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각종 장식과

꼭지부분에도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다른하나는 가죽이 한 겹 입혀졌고, 나머지는 낡아 벗겨지고 없으며, 가죽은 고래가죽이다. 

직인통 안에는 " 도선국사직인통무신일천이백이십칠년 : 道詵國師職印筒戊申一千二百二十七年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연대는 742년으로 도선국사의 생몰연대와는 동떨어진다. 이 묵서 기록은 창호지에

써 놓은 것인데, 선암사에서는 1946년에 입적한 이월영스님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직인통의 실제

제작연도는 알 수없으나, 작품의 기법 또는 각종 철제 장식 등으로 보아 도선국사의 생존연대 (827~898)로

보기는 어렵고, 그 후인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875년 도선국사에 의한 선암사의 창건 당시 함께 대웅전이

건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0년에 경잠(敬岑), 경준(敬俊), 문정(文正)의 3대사가

주동이 되어 중건하였다. 1766년에 재차 화재를 만나, 1824년에 재차 중건하였다.

즉, 현존하는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1824년(순조 24)에 중창된 것이다.  

대웅전은 선암사 가람배치의 중심에 해당하는건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축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

 

 

 

 

 

                                           삼층석탑(三層石塔)

 

대웅전 앞마당에 좌우로 3층석탑 2基가 있는데 모두 보물 제395호로 지정되어 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루고있는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角弧二段)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취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석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결구(結構)방법에 규율성을 보여주고 있다. 위와 아래의비율도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 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볼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 경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층석탑 유물(三層石塔 遺物)

보물 제9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6년 삼층석탑 중 동탑(東塔)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모두 사리 장엄구로서 청자 항아리와 백자 항아리 각 1점 씩, 사리 장치로는 금동사리탑과 水晶 용기 및

사리 1과(顆)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들은 탑신부 하부에 사리공(舍利孔)을 파고, 기단부 갑석 위에

유물을 안치하였다. 그런 후 탑신으로 덮는 수법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탑신부 하부에서 사리공이 발견된

예는 지금까지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청자 항아리는 뚜껑에 꼭지가 있는 소호(小壺)인데, 상단에 귀가 세군데에 달려 있다.

강진 대구면 도요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며, 조성 시대는 11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금동사리탑은 연꽃 대좌 위에 팔각의 탑신과 옥개(屋蓋)를 갖추고 있다.

연꽃대좌는 3중으로 겹겹이 쌓여 있고, 옥개 상면에는 기왓골과 우동이 마련되어 있다.

금동사리탑은 9세기에 발달한 우리나라 석조 부도의 팔각원당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금속공예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팔각 원통형 수정 용기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데, 금동사리탑 안에 사리를 안치한 후

그 외곽을 덮는 데 사용되었다. 크기는 높이 6.2cm 폭 1.9cm의 크기이다. 백자 항아리 안에서 발견되었다.

위 분청사기는 뚜껑이 있는 항아리인데, 유색은 불투명하다.

담청색을 내포한 백색유가가 표면에 두껍게 시유되어 있으며, 그릇의 겉 면에는

가마 안의 철분이 떨어져 검은 점 모양으로 뿌려져 있다. 제작 시기는 16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제작 장소는 고흥두원 운대리로 추정한다.

     

                                             감로왕도(甘露王圖)

보물 제15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감로왕도는 1736년 의겸(義謙)이 으뜸화원을 맡아

그린 작품으로. 화기에 "서부도전하단도(西浮圖殿下壇圖)"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부도전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단에는 칠여래와 관음, 지방보살, 인로왕보살이 그려져있고, 중단에는 한 쌍의 아귀와 제단,

하단에는 육도 제상을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감로왕도에서 주목되는 점은 상단에 그려진

칠여래가 중단과 하단에 비하여 비중있게 그려진 점인데, 이는 수륙재(水陸齋)를 통하여 중생들을

영가천도(靈駕遷度)하는 감로도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황색 바탕 위에

녹색과 적색을 주조로 한 차분한 색상과 안정된 필치,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육조제상의 장면은

화원 의겸의 역량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이라고 한다.  

 

 

                                            팔상전       八相殿

 

팔상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 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압축한 팔상도를 봉안하였다.

<선암사사적기>에 의하면, 康熙 4년(1704)과 1707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초에 건립되었거나, 보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게 쌓은 축대에 위치한 팔상전은 조사당, 불조전과 나란히 남서향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가운데 3칸 좌우와 후면에

불벽을 세워 전무와 후무로 공간을 나누었다.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지만, 양 측면의 네 기둥 만 특이하게

각 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으로 연결하고, 창방 위에 귀면 화반을 두어 도리 밑

장혀를 받치고 있다. 천정이 반자로 마감되어 가구 구성은 알 수 없으나 기둥 윗부분은 첨차와

소로로 외1출목의 공포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살미부분이 익공형식을 하고 있어 두 형식이

혼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달마수각(達磨水閣)

이곳 선암사 달마전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각(水閣)이 있다.

달마전에는 뒷편 야생차 밭에서 흘러 들어온 약수를 담고 있는 4개의 석함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달마수각은 칠전선원수각(七殿禪院水閣)이라고도 불리는데, 칠전선원 뒤 약 6천평의 야샹차밭을

가로질러 땅 밑으로 흘러온 물이 연결된 대통을 타고 흐르는 네 개의 석함을 일컫는다.

 

맨 위에 있는 큰 사각형 석함(石函)에 물이 고이면(上湯), 부처님에게 올리는 정수(淨水)로 공양하거나,

차(茶)를 꿇이는 물로 사용한다. 그 옆에 있는 타원형 석함으로 내려온 물(中湯)은 스님들과 대중이

마시는 물이다. 그 옆의 조그마한 둥근 석함으로 다시 흘러 내려온 물(下湯)은 밥을 짓고 채소를 씻

는 데 사용하고, 마지막 가장 작은 석함에 괸 물은 몸을 씻고, 빨래를 하는 데 사용한다. 

                                           원통각(圓通閣)

 

원통(圓通)이란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준말로,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통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원통전이다. 따라서 관음전은 원통전과 같다.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 좁은 틈새 뒤로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은 약휴선사(若休禪師)가 1698년에 창건하고, 1년 후에 불조전을 창건하였다.

정면 3칸 가운데 칸의 지붕을 밖으로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丁자 모양의 건물이 되었다. 

丁자의 돌출된 부분이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에 일치하여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원통전의 지붕면만 노출된다.  

선암사는 일주문, 대웅전을 잇는 남북축선상에 대웅전 좌우로 설선당과 심검당을 두어 중점을

형성하고, 그 위에 여러 전각들을 지세에 맞추어 배치하였는데, 원통각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원통가의 좌향은 동남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丁)자형 건물로, 정면에 기둥과 活柱를 내어

처마선을 길게 노출시켰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전면은 약 1m 정도되는 축대를 쌓았고, 양 측면과 후면은 외벌대로 되어 있다.

초석은 덤벙주초와 일부는 원형의 다듬돌로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을 얹고 창방으로

걸었으며, 창방과 장혀 사이에 화반, 동자주가 있다. 화반 위로는 장혀, 도리, 서까래 순으로 짜여져 있다.

원통각 내부는 보가 없는 무량구조로서, 이 지방에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구조 형식에 속한다.

내진과 외진은 간단한 벽과 문으로 구분되어 내진은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진의 천정은 우물반자로 짜여져 있으며, 내진의 천정은 출목을 연결시켜 천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 (위 사진)이 봉안되어 았는데, 스승인 침굉스님으로부터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뜻에 따라 호암(護庵)이라는 이름을 받은 약휴(若休)스님이 선암사의 뒷산

선암에서 본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복전(大福田)

1789년(정조 13)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이곳 원통전에서 그리고 해봉스님은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드디어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후일  왕위에 오른 순조가 그 고마움에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이 현판은 원통전 내부에 걸려 있다.

                                             원통전  꽃창살

사찰과 꽃살문

    절을 뜻하는 가람은 " 여러 사람들이 즐겨 모이는 곳" 이라는 인도어 < Samgharama  僧伽藍摩 >에서

나온 말이다. 가람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문에 귀의한 스님들에게 몸과 마음을 닦는 모든 살림살이가

담긴 큰 그릇이었다. 사찰이 물질과 관념, 쓰임새와 수행을 아우른 복합공간이 된 까닭이다.

그래서 가람은 입체적으로 표현된 건축적 경전이자, 신앙의 거대한 만다라라고 한다.

 

사찰의 문에 피어난 꽃살문(紋)은 그 경전 가운데에서 가장 작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법당 안과 밖을 이어주는 문을 소복하게 덮은 그 꽃들은 무심하게 드나드는 모든 중생들을 염화미소로 맞고 또 보낸다.

 

부처의 극락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늘 미륵불빛처럼 일렁이는 꽃이 있다. "묘법연화경"은 부처 대한 최고의

경배 가운데 하나로 "꽃으로 장식하기"를 꼽았다. 꽃살문은 종교적 장엄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경전이 된다. 

 

 

 

 

 

 

위 사진은 원통전 법당 문에 조각된 방아찧는 토끼의 모습이다.

2011년은 토끼띠 해인 신묘년(辛卯年)이다. 토끼를 표기하는 한자는 십이지(十二支) 띠

동물을 표시할 땐 묘(卯)를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 토끼를 지칭할 때에는 토(兎)자를 사용한다.

십이지동물 중 네 번째인 토끼는 방향은 정동(正東)이고, 달로는 음력 2월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시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토끼는 세계 여러나라의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우리나라 민담에서 토끼는 바닷속 용궁에서 간을 빼앗길 뻔 하다.

용왕과 별주부를 속이고 무사히 육지로 돌아온 이야기에서부터, 달 속 떡방아를 찧는

토끼에 이르기까지 의롭고, 꾀 많은 때로는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져 왔다. 

호랑이를 속이는 토끼, 자라를 속이는 토끼의 이야기 등은 토끼가 꾀 많은 지자(智者)의

표현된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토끼는 벽사(劈邪 ...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와 다산(多産)의 상징이다.

우선 토끼는 뒷다리가 튼튼하여 잘 뛰므로 삿된 기운으로 잘 달아날 수 있고, 귀가 크므로 장

수할 상(像)으로 비유된다. 또한 윗 입술이 갈라져 있어 여음(女陰)을 나타내 다산의 상징이 되고 있고,

털빛이 곱고 부드러우니 선녀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실제로 토끼는 한 번에 많게는 20마리에 가까운

새끼를 낳기도 한다. 특히 토끼는 달(月)과 연관된 대표적 동물로 묘사되어 왔다. 조선시대 민화에도

다정하고 화목한 관계를 상징하는 두 마리 토끼가 쌍으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배경에는 거의

대부분 계수나무와 달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원통전 내부 우물천정

 

 

 

 

                                          금동향로(金銅香爐)

이 향로는 선암사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입술부에 넓은 전이 달린 사발모양의 몸통과 나팔모양의 받침으로 구성되어 잇는 일반적인 양식이다.

세부 형식을 보면, 손잡이에는 넓은 전이 달려 있어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으며, 몸통으로

내려와서는 전후 양 면에 한 줄로 원형 인동문(忍冬紋)을 입사하여 그 가운데에 만(卍)자를 새겨

넣었으며, 그 사이의 전후면에는 톱니바퀴 모양의 원형 무늬를 입사하고, 그 중앙으로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 부분에는 16판의 위를 향하고 있는 연꽃을 약간 돋아난 양각으로 새겨 더욱 종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맏침대는 하부가 크고 상단부는 원추형처럼 좁아지는  형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고 있는데, 몸통에서 받침으로 내려오는 곳에는 2단의 굵은 양각 선대를 둘러 몸통과

받침을 잇는 공간을 조형미 있게 메웠다. 받침대 하단으로 내려오면서 역시 담담한 꽃무늬를 입사하여

장식으로 삼았고, 저변에서는 넓은 선대를 돌려 향로 전체를 받치고 있다. 이 향로는 제작 연대를

알려주는 명문은 없으나, 몸통과 입술 등에 화려한 문양을 피하면서 담담한 우아미를 갖추고 있다. 

 

                                                 卍의 의미

만(卍)은 부처의 가슴이나 손, 발에 나타나는 만덕(萬德)의 상징이다.

그 기원은 인도의 신 "비슈누"의 가슴에 있는 선모(旋毛)에서 비롯되었는데,

상서로운 조짐이나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덕의 모임을 뜻한다. 석가의 깊은 내용을

구상화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만다라(曼茶羅  ... 신성한 영역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이다.

이러한 만다라는 관상의 대상이기도 하며,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로 볼 수 있다.

  

만자는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 또는 표지로 사용되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만)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卍)로 크게

나누어지지만,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불조전(佛祖殿)

 

 

불조전은 대개 사찰의 개창자나 중창자, 중수자 및 역대 유명한 선조사(禪祖師)스님들의 진영이 봉안된다.

그러나 이곳 선암사의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의 53불 즉, 60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전각인데,

1761년에 중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기와집으로 주심포 형식에 익공 형식이 가미된 건물이다.

 

                                          조사당(祖師堂)

 

 

 

                                          각황전(覺皇殿)

 

선암사 창건 당시의 기록은 없고, 1088년 대각국사 의천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년에 복원하였고, 다시 1760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각황전은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하여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규모는 작으나 화려한 멋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각황전 안에는 우물천정으로

하고 있으며, 처음 지었을 당시 조성하였던 철불을 1900년 경에 석고로 도색하여 봉안하고 있다.

                                          사각 연목

 

 

 

                                            뒷간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는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출입용으로 맞배지붕을

붙여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전라남도 지방에서 이와 같은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 총 26칸으로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해우소 중 가장 큰 건물이다. 그만큼 대중들이 많은 절집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화장실로서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사례이다.

그 명칭은 순천선암사측간(順天仙巖寺厠間)으로 지정되었다.  정유재란 등 여러 차례의 선암사

화재 중에서도 소실되지 않은 몇몇 건물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해우소(解憂所)

    

똥을 의미하는 분(糞)은 쌀 미(米)와 다를 이(異)가 합쳐진 한자이다.

선암사 해우소는 공양을 하는 곳과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공부 하고, 해우소에서 몸의 오물을 처리하라는 의미이다.

사찰의 해우소는 일반 화장실과는 달리 사용상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낙서하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하며,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셋째, 외우고자 하는 게송이 있다면 외운다.

넷째,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온다.

다섯째, 손을 씻기 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해우소에 쭈구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소설 "칼의 노래"의 김훈 작가는 그의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 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오와서 양명(陽明)하다...

 

그러나 선암사 화장실은 하도 깊어서 " 저녁에 스님이 대변을 보고나서 아침에 소변 보러

화장실에 들르면 그때서야 쿵하고 똥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깊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끝이 잘 안보인다. 그런데도 작가 김훈은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하다"라고 하였으니 정말 간 큰 남자이다.  

 

출처 :사띠수행, 녹야명상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