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
1. 시대적 배경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탄생되었다.
불교가 탄생될 당시의 인도 사회는 새로운 종교. 사상의 출현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다.
인도의 역사는 B.C 3000년전 인더스강 유역에 도시는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고 높이 솟은 성채와 평지의
그러나 서력 기원 전 1,500년 경아리아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코카사스 지방으로부터 이주해 오면서 인도의 문화는 그들에 의해 주도되게 되었다.
브라만교는 초기 베다에서 나무, 물, 태양 등 자연을 신격화하는 다신교적 성격을 보였으나,
브라만 계급은 아리아인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제도화한 계급제도의 산물이다.
* 사종성(四種姓)계급 = 사성계급A. 성직자계급-브라만
B. 왕족.무사계급-크샤트리아
C. 평민계급-바이샤
D. 천민계급-수드라
아리아 인들의 종교인 브라만교는 사성계급 제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베다의 끝이라고 불리워지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만이 인간에 내재하는 아트만과 동일하다는
그러나 기원전 B.C 6C경 불교가 탄생할 무렵 인도의 사회는 이러한 전통이 크게 흔들이는 전환기였다.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강 유역으로부터 야므나강을 거쳐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에 이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면서 많은 농산물을 산출하게 되었다.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은 잉여물자를 산출함으로써 교역을 촉진하고 또 농경에 필요한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의 생산도 촉진하여 수공업을 발달시켰다.
그러한 결과로 새로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도시를 이룩하게 되었고, 이들 소도시를 중심으로 다수의 군소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말미암아 국가를 통치하는 왕족과 경제적인 실권을 가진 장자(長者)들이 사회 전면에 부각되었고,
그것은 곧 사제계급인 브라만의 약화를 가리켰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전통적 종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불교의 자료에 의하면 62가지(62見), 자이나교에 따르면 363가지 다른 견해들이 당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6가지가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하여 불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신흥 사상들의 공통점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따라서 브라만 신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요소들이 모여
존재를 나타낸다고 보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출가하여 대부분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였으며 스스로를 사문(沙門)이라 불렀다.
이처럼 당시의 종교. 사상계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와 함께 새로운 사상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참 삶의 길로서의
불교의 출현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2. 부처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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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탄생에 관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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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한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한다.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다.
1) 부처님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카필라국 - 현재 네팔 타라이지방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 인도국경과 네팔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다는 카필라왕국에서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왕(Suddhodana, 정반왕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왕비(Maya, 摩耶)이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다.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다.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정반왕이 40살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불전에 의하면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콜리성 데바다하(Devadaha, 천비성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나무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룸비니 동산'은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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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쇼카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藏)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쇼카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쇼카)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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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니, 온 세상의 모든 고통 내 이를 평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堂安之)
'탄생게'로 불리는 이 외침은 실제 있었던 일의 기록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을 위해
그러면 어떤 일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던가? 첫째로는 인간의 성품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것이라는
부처님의 삶을 그리는 신앙인의 눈에는 적어도 그 두 가지를 위해 오셨던 분이 부처님이셨다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석가족 남자성은 '고타마'이고, 태자의 이름은 '싯타르타'라고 지었는데, 그래서, 부처님의 어릴 적 성과 이름은
불타(佛陀)란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깨친 사람(覺者)’이란 뜻이며 부처님이란 말도 같은 뜻을 가진다.
그는 석가족(Sakya족) 출신이었으므로, '석가모니'란 ‘석가족출신의 성자’란 뜻 혹은 ‘석가족 출신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다.
왕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히말라야의 예언가인 아시타(Asita)선인을 불러 점치게 하니 아이의 장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왕자는 세상에 있으면전 세계를 덕으로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될 것이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 깨달음의
라며 자신은 나이가 많아 그 때를 지켜 볼 수 없어서 못내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날이 갈수록 태자의 훌륭한 용모와 기개로 주위에 찬탄을 받았다. 더욱이 싯다르타 태자의 궁중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로 왔다.
그러나 태자의 젊은 시절은 남달리 자기 반성적인 사색의 생활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아한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이와 아울러 세상에 대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다른 번민을 하였던 것이다. '사문유관'으로 묘사되는 설화는 바로 태자가 고심하였던 그 원초적인 의문을 구상화시킨 예이다.
2) 태자의 고뇌(苦惱)
태자는 어느 날 봄 임금인 정반왕을 따라 춘경제(春耕祭)에 첨석한 일이 있다.
농부는 밭이랑을 고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산새들의 지저귐이 귓가에 따가왔다.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던 이 자연에는 생존경쟁, 약육강식 등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농부의 손은 거치른 일 때문에 부르텄고, 그의 이마는 태양에 그을린 채 깊은 고뇌의 주름을 보이고 있었다.
* 큰 나무아래에서 사색에 잠긴 것을 이를 일러 "염부수(閻浮樹) 아래의 정관(靜觀)"이라 한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세속의 부귀영화는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행복한 듯 보이는
여러 생명들이 당하는 고통은 태자에게 있어서는 곧 자신의 슬픔인 양 느껴졌다.
언젠가는 저 괴로운 생존들을 진실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어느날 태자는 성문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생활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문(北門)에서는 출가 수행자를 만나 생노병사의 고(苦)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음을 듣고 기뻐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싯다르타가 열 아흡 살이 되자 부왕은 서둘러 태자비를 물색하기로 했다.
태자는 야쇼다라(Yashodara)비 사이에서 라훌라(Rahula)라는 아들을 얻었다.
숫도다나왕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날도 숲속에 들어가 온종일 혼자 명상에 잠기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 있었다.
3) 부처님의 출가(出家)
오랜 번민의 나날이 흘러간 어느 날 밤 태자는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였다.마침내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법석이던 지난밤의 궁중은 적막했다.
태자는 이윽고 야쇼다아라가 잠든 침실로 갔다.
"나의 애마 칸타카를 끌어다 주게! 영원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 출가를 단행하려 집을 나가기로 했네.
찬다카는 슷도다나 왕의 엄중한 명령을 생각했다. 태자에게 말을 내어주어서는 아니 되리라.
"고상하다! 아름답다! 칸타카, 나의 길에 동반해 다오. 이 밤 나는 길을 떠난다. 너의 도움을 다오. 이 길은 외롭고 험하다.
쾌락의 길에는 많은 이들이 기꺼이 따라간다. 그러나, 진리와 지혜를 찾으려가는 길에는 한 사람의 동반자도 따라가 주지 않는 법.
왜냐하면, 그 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칸타카! 너의 힘을 빌려다오. 너의 빠른 발을 빌려다오. 세상은 외롭고
험한 이 길의 동반자인 너의 이름을 길이 기억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덕으로 부처가 되어 인간과 하늘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다 구제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자는 마치 친구에게 하듯 말에게 이야기했다.
싯다르타는 성을 벗어나자 길을 재촉해 말발굽 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아누피야 고을을 흐르는 아노마강을 건너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찬다카여! 이것을 부왕께 가져다 드리고 나의 말씀을 전해다오.
이것은 이모님과 야쇼다라에게 전하여라,
그때 마침 사냥꾼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 태자는 호화로운 옷을 벗어서 사냥꾼에게 주고 사냥꾼의 거칠고 해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4) 부처님의 고행(苦行)
태자는 약 6년간에 걸친 고행을 시작하였다. 팔리(pali) 불전의 기록에 따르면 태자는 첫 1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의빔비사라왕을 만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빔비사라왕은 고귀한 싯다르타의 모습을 대하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한 지 2년째 되던 해부터 갖가지 고행의 수련을 쌓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도 그 일행으로 함께 수도하였고, 곧 스승에 의해 큰그릇임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 심각한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애욕의 근원인 이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영원한 자아(Atman)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고행을 시작한지도 다섯 해 그토록 모진 고행을 겪은 태자의 몸은 쇄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등과
왜냐하면, 고행의 궁극으로 얻는 것은 결국 목숨을 잃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고행을 버리고 네란자라 강에 나아가 목욕을 하고 한 여인으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았다.
이를 보고 함께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며 그를 떠나 사르나트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심기일전한 싯다르타는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가 한 보리수(핍팔라나무) 아래 지나가는 목동이 준 길상초(吉祥草)에
5) 부처님의 대각(大覺)
이제 앞에서는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은 날듯이 흘가분했다.
'순수한 명상에 의하여 대각을 얻기까지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품은 채, 이때 마왕 마라(Mara: 일명 마왕 파순)가
* 위와 같이 마왕을 굴복시키고 미증유의 깨달음을 이룬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수하항마(樹下降魔)'라고 한다.
드디어, 밤의 첫눈이 뜨였을 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지혜에 이르렀다.
이레째 되던 새벽, 주위는 새로운 고요에 휩싸이고, 샛별이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 때 대각을 이룬 나이가 '35살'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싯다르타가 아니였다.
몸은 비록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평범한 존재였지만 이제 그분은 위대한 분, 대각을 얻으신 분, 붓다(Buddha)가 되신 것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한 분, 모든 생명의 초월자이면서도 그 생명의 싹 속에 의미를 주는 분으로 부처님은 탄생하신 것이다.
대지는 진동 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천화(天花)가 나부꼈다.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싯다르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에게 널리 전해 해탈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그는 이제부터 중생들을 구제하는 길에 나서기로 새로운 뜻을 세웠다. 그러나 마왕은 부처님께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파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소(牛) 있는 자는 소로 말미암아 즐겁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즐겁다. 그대는 이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지 않은가"
부처님은 결연히 보리수를 박차고 중생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이 세상이 어두워질 때, 나는 쉼 없는 진리의 북을 치리라'
깨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침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몸소 깨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한 바를 좇아 생각해 본다면 첫째 정적(情的)으로 그것은 한량없는 기쁨이다.
둘째, 지적(知的)으로는 '하나'인 세계의 체험이다. '나'다 하는 벽이 깨져 나와 남, 나와 우주가 하나되는 것이다.
끝으로, 의지적(意志的)으로는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다. 나와 중생이 하나 됨으로써 동체자비의 실천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6) 부처님의 전법(轉法)
부처님은 대각(大覺)을 이루신 후 '무명(無明)의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중생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을까?'라고* 위와 같이 범천이 부처님께 전법도생(轉法度生)을 권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이라고 한다.
대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였다고 '전법륜경'에 전해 오고 있다.
*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첫번째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초전법륜(初轉法輪)' 또는 '녹원전법(鹿園傳法)'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은 것, 병드는 것, 죽어야 하는 것은 고통일지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을까? 올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업을 지니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갖고,
부드럽고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비구는 이내 그 길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한동안 녹야원에 계실 무렵, 바라나사에 야사라고 하는 큰 부자의 아들이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시녀들의 추하게 자는 꼴에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야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마음은 점차 안정이 되었다.
또한 야사의 뒤를 이어 그의 친구 56명도 함께 출가하여 비구가 됨으로써 승단은 어느덧 62명의 단원을 가진 게 되었다.
그들 삼형제인 우루벨라, 가야(Gaya), 나디(Nadi)는 불을 섬기는 무리로서 각기 수백명씩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세에나 마을에 도착하여 우루베라 거처로 찾아가 그의 사
당인 성화당에서 하루밤 쉬어갈 것을 청했다."대사문이시여, 저에게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그 곳에는 신통력을 가진 용왕이 있고 무서운 독을 가진 독사가 있습니다.
우루벨라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참된 수행자의 기품은 지녔지만, 결국 용왕에게 당하고야 말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부처님은 그 용을 바릿대에 담아서 우루벨라에게 보였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눈은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혐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모든 것은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루벨라, 가야, 나디 삼형제와 그들 제자 100명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일찍이 태자시절 도가 이루어지면 맨 먼저 자기를 제도해 달라고 청한 왕사성(王舍城)의 빔비사라(Bimbiisara)왕과의
"저 석가족 출신의 세존 고타마는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며, 밝은 지혜와 행을 갖춘 사람이며,
깨달음에 이른 행복한 사람이며, 세간을 아는 사람이며, 위없는 사람이며, 사람을 잘 다스리고 길들이는 사람이며,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며, 깨달은 이며, 세간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그 분은 스스로 알고 증득하여 중생을 가르치신다.
그 분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은, 내용도 있고 표현이 완전한 교법을 설하시며, 완전하고 원만하며, 모든 것에 두루 깨끗하고 맑은 행을 설하신다.
그와 같은 아라한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왕은 곧 12만 바라문과 장자들을 이끌고 부처님 처소에 찾아가 예배하고 법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보시에 관한 이야기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일과, 하늘에 태어나는 이야기와,
네 가지 진리를 들은 빔비사라 왕과 12만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무릇 인연으로 해서 모이고 생긴 것은 이윽고
모두 소멸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 중 1만의 사람은 재가신도가 되었다.
그 때 빔비사라 왕은 법을 보고, 법을 알고, 법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의혹이 없어지고, 주저함이 없는 확신을
얻었으며 스승의 가르침 이외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은 경지에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에 사뢰어 "오늘부터
이 목숨이 다하기까지 삼보에 귀의하고 법을 받들겠나이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은 부처님이 거처하실 곳을 물색하던 중 마을에서 멀지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고, 다니기에 편리하고,
한편 얼마 후 그곳에 살던 청년 사리불(舍利佛)와 목련(目蓮)가 최초의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앗사지에게 감화를 받아 자연외도인
그들은 나중에 다같이 석가모니불의 10대제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마가다국 출신의 가섭(迦葉)는
한편,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오셔서 설법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수많은 강물이 한 바다로 모여들듯 온갖 계층,
다정한 진리의 벗인 법우가 되어 넓고 깊은 부처님의 법 바다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면서 평등 사회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에서 중생교화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고향인 카필라밧투에서는 부왕 이하 모든
그래서 싯다르타 태자와는 동갑으로 어렸을 때부터 태자와 함께 자란 친구이며 지금은 왕의 신임이 두터운
온 국민의 환호 속에 부왕을 비롯한 가족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마친 부처님은 편히 쉬는 일도 없이 친족들을 향해 법을 설했다. 그리하여 어린 아들 라훌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왕족들, 즉 사촌동생들인 데바닷타와 아루나, 아난다와 마하파자파티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하려는 것을 부처님께서 거절하자 아난다가
한편 파세나짓왕이 통치하고 코살라국의 사밧티(사위성)에는 수닷타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달리 자선심이 강해서 항상 외롭고
그래서 귀국한 뒤 부처님을 위해 안거하기 좋은 장소를 구하던 중 마을에서 멀지 않고 수행하기에 조용한 제타숲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제타숲은 파세나짓왕의 아들인 제타 왕자의 소유였다. 수닷타는 정사를 짓겠으니 동산을 팔라고 청하였다.
왕자는 당신이 저 동산 가득히 황금을 채워 준다면 몰라도 팔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수닷타는 곧 전재산을 다 걷우어 황금으로 바꾸었다.
"수닷타 장자여 그만 두시오! 정사를 짓는 것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
왕자는 그 빈터에 문을 세우고, 정사를 위한 부속건물을 지었다.
부처님께서 사밧타 성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이 사밧타에는 가난한 한 '난다'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 성으로 오신답니다. 오늘 밤, 파세나짓 왕과 시민들이 수만개의 등불을 밝혀 연등회를 베풀고 부처님을 맞이한답니다."
이 여인도 그 말을 듣자 등불을 켜 부처님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었으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이곳까지 오셔서 만나. 뵙게 될 수 있다니
여인은 이 기름으로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예정으로 있는 길목의 한 모퉁이에 등불을 밝혔다.
"부처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 것도 부처님께 공양 올릴 것이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 등불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널고 큰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을 켠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성불하게 될 것이니라."
어느 때 부처님은 사밧티에 들어가 밥을 빈 다음 슈라바이스티 부근을 지나갈 무렵에 일이다.
앙굴리마라는 순간 기이한 느낌이 든다. 자기는 서 있고 저 비구는 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앙굴리마라여! 인간의 불성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느니라" 그는 드디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을 뜨게 되었다.
"부처님이시어!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까?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그렇고 그렇도다. 앙굴리마라여!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도다.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시골인 에카사라에 계실 때 일이다.
"사문 고오타마여! 나는 손수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며 곡식을 거둬들인 다음에야 음식을 먹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바라드바쟈 바라문이여 ! 나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어서 먹을 것을 얻고 있느니라"
"사문이여! 우리들은 누구하나 당신이 괭이나 쟁기를 끄는 소를 본 적이 없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믿음은 종자이며 고행은 단비이다. 지혜는 나에게 있어서 멍에이며 괭이이며, 참회하는 생각은 팽이의 자루이며,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는 사리불(또는 사리자, 사리붓다)가 있었다.
'어떤 인연으로 불법이 이 세상에 오래 갈 수 있고 흑은 오래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그 가르침이 오래 존속된 부처님은 반드시 계율을 제정하여 제자들에게 실천 하도륵 가르쳤다.
계율을 받아 지님으로써 바른 법을 수행하는 데에 게으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이 일은 하고 이 일은 하지 말라. 이 일은 생각하고 이 일은 생각하지 말라.
이와 같이 분별해 가르치지 않았어도 부처님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은 잘못됨이 별로 없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리풋다는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어! 일찌기 듣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그러시다면 그 계율을 지금 제정해 주십시오.
"사리불아! 아직 가만 있거라, 여래는 그 때는 알고 있느니라.
얼마 후 교단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수디나여! 네가 한 일은 옳지 못하다. 그 짓은 위의가 아니며 사문의 할 일이 아니다.
첫째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함이요,
다섯째, 이미 믿는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함이요,
여섯째,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함이요,
일곱째,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
요,
여덟째, 현재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아홉째,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열째, 바른 법을 오래가게 하기 위함이다.
계율을 말하려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라. 어떤 비구가 부정한 행을 범하고 음행을 범하면
부처님은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프라티목샤(戒本)의 첫째 조문을 제정하고 널리 알렸다.
이때부터 때와 곳을 따라 비구들의 잘못을 보실 때마다 널리 가려내어 말씀하였다.
뭇중생들을 위해서 45년간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교화활동을 펴신다.
7) 부처님의 열반(涅槃)
부처님이 80세가 되시던 해, 부처님께서는 벨루바(Beluva)라는 곳에서 여름 안거를 지낸다.
그 곳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Kushinagara)에 닿으셨다. 사십여년을 곁에서 모신 아난다(Ananda)에게 사라(Sara)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하라고 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마치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스(Mallas)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아난다여, 나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구나,
나의 여정은 이제 막을 내리려 하노라. 나는 이제 팔십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아난다는 눈물을 삼키며 이 슬픈 소식을 말라스의 사람에게 전하고, 다시 부처님께 그 삶을 연장시킬 수 없겠느냐고 간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로 제자들을 달래시고, 슬픔에 잠겨 사라수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자 했다.
이때 쿠시나가라의 100살이 넘은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시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말씀하시었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워 지자
무수히 모여든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이든지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자리이타의 법을 다 갖추었으니 만일
더 오래 머루른다 해도 이 이상 이익 될 바가 없을 것이다. 마땅히 제도할 사람은 이미 다 제도했으며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이가 있더라도 득도의 인연을 모두 지었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더 풀어쓰면,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제행무상 불방일정진'(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기셨다.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께서는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이야말로 진리 속에 살다 진리속에 가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들어 보였다. 그가 들어 보인 길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의 길이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 동안 부처님의 육신은 꽃으로 장식되어 많은 이들의 충심으로부터의 송별을 받았다.
돌아 가신지 꼭 일주일이 되던 날 육신은 마쿠타반다나(Makutabandhana) 사원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그분이 가장 아끼던 제자 '마하 캇사파(MahaKasyapa: 마하가섭)'를 기다리기 위한 조치였다.
부처님께서는 열분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사리풋다(사리불) 목갈라나(목건련) 두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상수제자였던 마하캇사파(마하가섭)는 이때 다른 지방으로 전교를 떠났던 것이다.
가섭이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두발을 관밖으로 내어 가섭에게 보이신다.
마하캇사파는 스승의 육신에 정례하고 장례를 비롯한 교단의 사후수습을 진두 지휘하였다.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마하가섭에게 관밖으로 두발을 내보이신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이라고 한다.
부처님 입적 소식은 인근 여러 나라에 퍼졌으며 평소에 부처님을 존경하던 모든 이들은 이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화장 후 그 분의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분쟁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타협을 보지 못하고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때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드로나(Drone)라는 현자가 있어서 중재를 시도, 그 사리를 똑같이
8등분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그 사리를 정중히 모시고 가서 스투파(Stupa: 탑)를
세우고 깊이 공양하게 되었다.
* 부처님의 일생중에 부처님을 슬프게 한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석가족이 코살라국에 멸망을 당한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목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든 것이고,
셋째는 부처님의 사촌인 아난다의 형이었던 데바닷다의 반역이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교단이 커지자 마가다국의 태자 아자타삿투의 후원을 받아 부처님의 교단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며 자객을 보내고, 높은 산에서 바위를 굴리고, 성질이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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