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적 배경
인도 문화와 불교의 특성
한국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고 발전하여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되고 중국적 사고방식에 의해 변형된 중국불교를 수입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유연하고 동화력이 강한 종교이므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고 특성 있게 발전한다는 것은 불교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과 뿌리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중국불교나 한국불교도 근원지는 인도불교이고,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인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인 우리가 한국의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로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에서부터
재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B.C. 6~5세기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 활동했을 때 인도는 이미 인도-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가 천년 가까운 동안
발전했고, 또 인도-아리안 족이B.C. 1500년경부터 서북인도로 이주해 오기 전에 다시 천년이 넘도록 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을 창조하고 누렸던 원주민의 인더스 문명이 있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인도는 이미 2천년이
넘는 오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토양과 배경 속에서 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불교는 결코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고타마 사문(沙門)’이라는 한 천재의 독창력에 의해 돌연히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이 연기법(緣起法)에 따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불교의 발생도 많은 인(因)과 연(緣)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교와 인도의 사상적 전통이 갖는 관계를 무시하고 불교만을 따로
떼어서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연기론적 사고방법으로써 불교의 발생 및 발전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을
선입견 없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절 불교의 역사적 배경
1, 문화적 배경─인더스 문명
1921년 죤 마살 경(卿)이 인더스 문명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이래 하랍파와 모헨조다로를 비롯해서 300여 군데서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남으로 봄베이, 북으로 히말라야, 동으로 델리에 이르는 인더스 문명은 메
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화나 고대 이집트 문화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것으로 평가한다.
B.C. 3000년에서B.C. 1500년 사이에 존속했던 인더스 문명은 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와 달리 문헌의 형태로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발굴된 유물과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으로 그 실상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하랍파와 모헨조다로의 유적은 인더스 인들이 당시의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도시문명을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두 도시는 모두 서편 둔덕에 세워진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저지대의 시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 도시가 모두 잘 통제된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시가지는 주요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구운 벽돌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도시계획이나 거대한 곡물창고와 성채로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기구와 능률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잘 지어진 거대한 공중 목욕소와 하수처리 시설, 그리고 위생시설이다.
집집마다 목욕탕과 하수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들이 목욕과 청결을 중요시했으며, 모종의 종교적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더스 문명의 비밀의 일부를 드러내주는 다른 열쇠는 많은 양의 수공품들이다.
그 가운데는 몇 개의 돌조각과 청동조각이 발견되며,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진흙 조형(테라코타), 그리고 돌을
깎아 만든 인장(印章)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장기판과 십진법을 사용한 정확한 측량도구, 그리고
어린이의 장난감도 보인다.
테라코타 조형의 주요 소재는 동물의 수컷, 특히 황소이며, 인물조형의 경우는 반대로 다산(多産)과 관련된 여성의 모습이다.
진흙 조형보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인더스의 신앙과 종교의식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형상을 새긴 돌로 만들어진
인장들이다. 인장에는 인더스의 문자가 새겨져 있으나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인더스 인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어 인더스 인들이 메소포타미아와 무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장에 새겨진 그림의 소재도 테라코타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수컷인데, 황소, 외뿔 가진 무소, 호랑이, 코끼리, 영양, 악어
그리고 신화적인 상상의 동물도 발견된다. 한 인장에선 물소 앞에 일렬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동물들이 단순히 공예를 위한 소재가 아니라 종교적 예배와 의식의 대상임을 말해 준다.
동물들이 모두 수컷이고 또 뿔 달린 동물을 즐겨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자연의 힘, 내지는 남성적 생식력, 생
명의 힘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예배의식을 통해 예배자도 그러한 힘을 받기를 기원했던 것 같다.
동물뿐만 아니라 신이나 사제(司祭)로 보이는 남성의 모습도 보인다.
머리에 뿔이 달린 장식을 하고, 낮은 평상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으며, 왼편엔 코끼리와 호랑이가, 오른편엔 외뿔소와
물소가 그리고 정면 밑에는 역시 뿔 달린 동물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주인이거나 신적인 존재로 추정된다.
동물과 더불어 나무도 성스러운 것으로서 예배 대상이 된 듯하다.
한 인장에선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높다란 머리장식을 한 남자가 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뒤에서
거대한 염소가 굽어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인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예배자를
두 마리의 코브라가 뒤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된 인장도 있다.
뿔 달린 동물의 수컷이나, 남근이 발기된 상태에서 뿔 달린 머리장식을 한 남성상은 모두 자연의 생산력 혹은 생명력을 나타낸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증거는 인더스 부지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돌로 만든 링가(linga : 男根)상이다.
동물의 수컷이나 뿔, 링가 등이 상징하는 남성적 힘과 성력(性力)에 대한 숭배가 주로 상위 계층의 종교였다면
풍요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성신, 혹은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신앙은 대중과 가정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인더스 문명도 BC 1600년경엔 지진이나 강물의 범람 등 확인되지 않는 어떤 원인으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고, B.C. 1500년경 아리안 족이 침입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인더스 문명의 생명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철제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던 유목민인 아리안 족은 큰 어려움 없이 원주민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더스의 도시가 몰락했다고 문화까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더스 문명은 민중 속에 살아남아 갠지스 강 유역이나 남인도로 확산되었다.
비록 정복당했지만 인더스 문화는 아리안 족 문화에 영향을 주어 베다 문화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아리안 문화와 혼융하여 더 커다란 종합을 이루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인장의 조각은 베다나 불교문화의 핵심인 요가나 선정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며, 성스러운 뱀의 수호를 받으면서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에 잠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더스의 종교는 베다 문화가 대중화된 힌두교에서 시바(siva)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위대한 요기(yogi : 요가수행자)이자 동물의 주(主)인 시바는 수소 난디를 타고 다니며, 우주적 창조력의 상징인 링가로 표상된다.
또 정화(淨化)의 의식인 목욕하는 관행도 아리안 족의 문화가 아니며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라고 보인다.
2, 종교 및 철학적 배경─베다(veda) 사상
베다 문화를 창조한 인도-아리안 족은 오늘날 이란이나 러시아, 그리고 유럽 인과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서,
모두 인구어족(印歐語族 :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문화의 주류는 베다를 원류로 하는
산스크리트 문화이며, 산스크리트(Sanskrit, 梵語)는 희랍 어, 라틴 어, 페르시아 어와 더불어 인구어의 가장 오랜 형태의 하나이다.
인구어의 모형(母型)을 사용하던 인도-아리안 족의 조상들은B.C. 3000년경 카스피아 해(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확실치 않은 원인(자연재해로 추정됨)으로B.C. 2000년경부터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무리는 서방으로 향해 이들이 오늘날 유럽 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동방으로 향하였고 서(西) 투르키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수세기 거주했던 듯하다. 이들은 페르시아 어와 산스크리트 어의 모어(母語)인 인도-이란 어를 사용했던
페르시아 인과 인도-아리안 인의 조상이다. 그 후 이들 중 한 무리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이란 땅에 들어가
아리안계 이란 인의 선조가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B.C. 1500년경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의 펀잡(Punjab, 五河) 지방에 들어왔다. 이들이 바로 베다 문화의 주역인 인도-아리안 족이다.
많은 유물, 유적을 남긴 인더스 문명과 대조적으로 초기 인도-아리안 인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인구어로 전해하는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뿐이다.
이것에 의하면, 인도-아리안 족은 반야만적인 유목민족으로서 육식과 술을 먹었으며 춤과 노래를 즐겼던 현실적이고
낙천적인 기질의 민족이었다. 손잡이 달린 도끼와 긴 활, 그리고 말이 끄는 수레를 전투에 사용했다.
도시와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를 건축했던 원주민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침입할 당시 인더스 문명이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유목생활과 오랜 이동생활에서 단련된 체력,
말이 끄는 전차의 사용, 호전적인 무인 기질 등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원주민은 피부 빛이 검다는 의미의 ‘다사스(dasas)’로 불렸으며, 후대에 ‘다사’가 노비의 뜻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선주민이4성계급의 마지막인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했다고 추정된다.
모계 중심적이고 풍요를 위해 지모신(地母神)을 숭배하며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원주민과 대조적으로 인도-아리안족은
가부장적, 부계 중심적 대가족제도를 유지했으며,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다. 이런 습속은 오늘날 힌두 사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던 원주민과 달리 인도-아리안 족은 촌락을 기반으로 하면서 목축을 주업으로 한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벽돌을 굽거나 진흙을 구워 만든 조상이나 목욕탕, 하수시설도 없었고, 인장이나 도기(陶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힌두쿠쉬 산맥을 넘을 때 그들 특유의 몇 가지 문화를 인도로 들여왔다.
그것은 새로운 신들과 그들에게 바치는 찬가(讚歌), 그 찬가를 외우고 낭송하며, 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전문가(이들이 후에 바라문 계급이 됨), 그리고 ‘소마(soma)’라고 부르는 정체 불명의 환각제(이것을 복용함으로써
르쉬[仙人]는 몰아지경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 사제.무사,
서민으로 구성된 3계급의 사회구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스크리트라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언어 등이다.
초기 인도-아리안 족의 종교는 하늘, 태양, 바람, 폭풍, 비, 불, 번개 등 자연현상이 갖는 힘을 상징하는
자연신들(天, deva)에게 제화(祭火, 아그니)를 피우고 우유,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찬가(리트)를 부르고,
신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드리거나 신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은혜를 빌었다. 그 기도의 내용 역시 무병장수,
가축의 번식, 자손의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 등 매우 현실적이고 소박한 것이었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찬가들은
B.C. 1200∼1000년 사이에 점차로 『리그 베다』의 형태로 편집되었다.
1, 베다 문헌
아리안 인이 창조한 문화를 선주민의 인더스 문명에 대해 베다 문화라고 부른다.
어원적으로 ‘베다’(Veda)는 ‘알다’라는 의미의 어근 ‘vid’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을 뜻하며 베다 문헌을 ‘지식서’라고 번역한다. 베다는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도-아리안 인들의 탐구와 이해의 결과를 집성한 것으로서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 신비적 직관력을 가진 르쉬(聖仙, r.s.i)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서, 즉 쉬루티(′sruti)라고 믿는다.
최초로 형성된 베다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리그 베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베다란
리그 베다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 천여 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방대한 문헌의 기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의 절차와 형식이 점차 복잡해졌고, 제사의 의미나 성격도 크게 달라져 갔다.
제사가 복잡해짐에 따라 여러 명의 사제가 역할을 분담했다. 『리그 베다』의 찬가는 신을 제단에 초청하는
권청승(勸請僧, hotr.)에게 속했고, 제구를 다루고 제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행제승(行祭僧, adhvarya)이 제행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사(祭詞, yajus)를 읊었으며, 그 제사를 모은 것이 『야주르 베다』가 되었다.
그리고 『리그 베다』 가운데서 선정된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써 신을 찬미하는 가영승(歌詠僧, udga죚tr.)이 있으며,
그 노래의 모음이 『사마 베다』다. 처음엔 베다란 이 셋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차츰 민간 사이에서 행해졌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여러 가지 주문들을 모은 『아타르바 베다』가 제4의 베다로 추가되었고, 이것은 제사를 총감독하는
브라흐마나 승(僧)이 주관했다.
이상의 4베다는 제사행위에 직접 사용되는 찬가, 노래, 제문, 주문들의 ‘집록’이라는 의미로 상히타(本集, sam.hita)라고 한다.
브라흐마나는B.C. 1500년경부터 수세기간 인도 서북부에 머무르면서 『리그 베다』을 편집했던 아리안족이B.C. 1000년경엔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델리 부근 즉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평원으로 내려온 후에 제작된 문헌이다.
이때는 바라문(사제계급), 크샤트리아(귀족계급), 바이샤(생산자)의 세 계급과 주로 아리안에게 정복된 원주민으로 구성된
수드라(노예계급)가 첨가된 사성제도(四姓制度)가 확립되었고, ‘사성제도’의 정점을 차지하는 바라문 사제들에 의해 제작된
제사 의식에 관한 문헌이 브라흐마나다.
아란야카는 힌두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네 단계, 즉 학습기(學習期), 가장기(家長期), 삼림기(森林期), 유행기(遊行期)
가운데 삼림기에 있는 바라문들이 만든 문헌으로서, 실제의 제의 대신 제의를 상징화하고 내면화시켜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한 문헌이다. 이것은 브라흐마나에서 우파니샤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중간단계를 점한다.
B.C. 800년경부터 아리안 인은 갠지스 강을 따라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바라문 중심, 제사(祭祀) 중심의
사고에서 점차 벗어나 형이상학적, 종교적 문제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수세기 간의 철학적, 종교적
모색의 결과를 모은 것이 우파니샤드다. 다음엔 베다의 사상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우파니샤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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