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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화엄사상(華嚴思想)

by 범여(梵如) 2013. 9. 14.

화엄사상(華嚴思想)

 

1) 화엄경의 해제

원래 경이름[經名]에는 그 경이 지니는 전체의 내용이 잘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경이름 풀이를

잘 하면 그 경의 반(半)은 해석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경』의 갖춘 이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해제를 먼저 살펴보자.

 먼저 대(大)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인데 단순히 작다고 하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대가 아니라

절대적인 ‘대’로 써,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는 의미의 극대(極大)를 말하고 있다.

 이어서 ‘방(方)’이란 방정하다ㆍ바르다 뜻이 고 ‘광(廣)’은 넓다는 의미이니까 합하여 ‘대방광’하면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있다는 뜻이 되고, 거기에 불(佛)을 붙 여 ‘대방광불’하면 시ㆍ공을 초월한 부처님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다음 ‘화엄(華嚴)’은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고, 꾸 민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는 깨달음의 원인으로서의 수행에 비유한 것이고 ‘엄’은 수행의 결과로서

부처님을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 즉 보살이 수행의 꽃으로써 부처님을 장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때 중요한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만을 뽑아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모를 잡초들까지도 모두 다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일명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 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화엄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되어 버리고 단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이

현존하고 있는데, 한역은 두 가지의 대본(大本), 즉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번역본이 있다.

 

전자는 번역된 권수가 60권이기 때문에 『60화엄』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번역된 시대가 동진(東晋)이므로

『진경(晋經)』이라 부르는 반면, 후자는 권수가 80권이라서 『80화엄』 또는 당나라 때의 번역이기 때문에

『당경(唐經)』이라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이 있으나, 이것은 대본(大本)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부분적인 번역이다.

 

그리고 9세기 말에 번역된 티베트본인 『서장화엄경(西藏華嚴經)』도 현존하고 있다.

이렇게 판본이 몇 가지나 되 다 보니 자연히 구성조직도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60화엄』은 칠처팔회(七處八會 : 일곱 장소에서 여덟 번의 법회) 34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80화엄』은

칠처구회(七處九會 :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의 법회) 3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삼분(三分)하여 지상편(地上篇), 천상편(天上篇), 지상회귀편(地上回歸篇)으로 나누기도 한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현재의 체제로 만들어진 경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상을 같이 하는 여러가지

단독 경전 을 모아 집대성한 것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학자들은 그 장소를

서역(西域)의 우전국(于猊國)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화엄종의 성립

화엄학이란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성립한 『화엄경』을 종(縱)으로 하고, 『화엄경』에 전념한 조사들의

견해를 횡(橫)으로 삼아서 만들어 놓은 큰 체계이다.

 따라서 화엄조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한국 화엄종의 성립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중국화엄종의 초조(初祖)는 두순(杜順, 557~640)이다.

그의 사상적 입장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저작으로 정되고 있는 『법계관문(法界觀門)』조차도

오늘날 진찬(眞撰)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저서가 많은 사 이 반드시 훌륭한 사상가는

아니듯이 저술이 전해지지 않는 것과 종교자로서의 비중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겠다.

 

지엄(智儼, 602~668)은 두순의 법맥을 잇고, 화엄교학의 대성자 법장을 길러낸 과도기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것은 두순이 실천적이고 관행적(觀行的)이었던 성격에 비해 화엄학의 중요한 사상적인 문제의 소박한 원형이

거의 지엄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엄이 남긴 저술로는 『60화엄』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인

『수현기( 搜玄記)』를 비롯해서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법장(法藏, 643~712)은 제3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화엄교학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다.

화엄종을 현수종 (賢首宗)이라 부르는 것도 그의 호인 현수(賢首)에서 유래되고 있는 별칭이다.

그는 지엄 이상으로 유식(唯識)을 의 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지만,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이것을 흡수 융합시킴으로써 자신의 화엄교학을 한차원 높게 완성시켜 나갔다.

 

법장이 세운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은 물론이거니와 법계연기(法界緣起)ㆍ성기사상(性起思想)ㆍ

육상원융(六相圓融) 등, 그 어느 것도 화엄의 지상성(至上性)을 드러내기 위한 교리들이다.

 그의 화엄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저술 가운데, 화엄학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오교장(五敎章)』과

『60화엄』 의 주석서인 『탐현기(探玄記)』, 그리고 『기신론(起信論)』 주석의 백미라고 하는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등이 유명하다.

 

징관(澄觀, 738~839)은 당나라 초기 때 전개된 학문불교가 중엽에는 실천불교로 변모해가는 바로

그 시대에 활약 하던 인물로서 화엄과 선(禪)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한 스님이다.

 종밀(宗密, 780~841)은 징관이 화엄 속에 선을 융합시키고자 한 반면, 그는 선(禪)과 교(敎)를 완전히

대등한 위 치로 보고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자장(慈藏)에 의해 처음으로 『화엄경』이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 두 스님에 의해 화엄사상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원효 는 어느 한 종파에 국한시킬 수 없을 만큼 불교전반에 걸쳐 사상적 폭이 크기 때문에, 역시

해동초조(海東初祖)는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잘 압축되어 드러나 있다.

 

고려시대에는 균여(均如, 9 23~973)가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를 위시하여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고, 이어서

지눌(知訥, 1158~1210)은 『화엄절요(華嚴節要)』를 통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화엄선을 선양하였다.

조선조 초기는 김시습(金時習)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후기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등 화엄조사들이 후학들을 위해

사기(私記)를 지었다.

 

3)화엄교학의 중심 사상

 화엄경』은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리불이나

목련과 같은 훌륭한 제자까지도 벙어리와 귀머거리처럼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만 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 방울의 거품을 보고서 바다 전체를 보았다고 한다거나 반대로 바닷물을 다 마신 후에야

그 맛을 알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의 낱말에 구애받지 않고 좀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화엄경』 전체를 하나의

대 서사시(敍事詩)나 대 드라마로 이해한다면, 보다 좀 더 친근감이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엄교학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성기사상(性起思想)과 법계연기(法界緣起)가 화엄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법계연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법계연기는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계를 사(事)와 이(理)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 사법계설(四法界說)이다.

첫째, 사법계(事法界)는 모든 현상적이고 차별적인 세계를 말한다.

둘째, 이법계(理法界)는 사법계를 성립시키는 본체적이고 평등한 세계를 가리킨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이와 사, 즉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닌 것임을 설명한다.

        마치 파도와 물의 관 계로 비유할 수 있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현상계가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의 세계는 현상적으로 보면 개개의 사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가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설명이다. 마치 바다의 섬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 밑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것과도 같다는 뜻이다.  

 

이를 인다라망(因陀羅網)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소위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고 표현되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 우주 전체의 모습을 보고 그 풀잎에 맺혀있는 한 방울의 작은 이슬에서 온 중생의

아픔을 느끼는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화엄사상에만 국한되고 있는 이론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도 충분히 입증이 되고 있어 더욱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우리 몸을 복제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세포하나만 있으면 우리 몸 전체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세포 하나를 통해 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이를 사회생활속에 적 용시켜보면 우리는 서로가

연관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존재라는 것이 화엄사상 의 기본 입장임을 알 수가 있다.

 

화엄사상(華嚴思想)

<화엄경>은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준말이며,

범어로는 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절대적인 대(大), 상대가 끊어진 극대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大)라고 할 수 있다.

 

방광(方廣)이란 넓다는 뜻인데 특히 공간적으로 넓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이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붓다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말한다.

그 붓다를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이다.

화엄을 범어로는 Ganda-vyuha라고 하는데 Ganda란 잡화(雜華)라는 뜻이고, vyuha란 엄식(嚴飾)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화엄이란 잡화엄식이라는 말 그대로 갖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은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부 경전 자체 내에서도 설처(說處)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도량이며, 설한 시기도

성도 직후로 되어 있다. <팔십화엄>에는 시성정걱(始成正覺)이라 하고, <육십화엄>에도

시성정각이며 세친이 지은 <십지경론>의 저본이 된 <십지경>에는 제이칠일(第二七日)이라고 하였다.

또 천태교판에서도 <화엄경>을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최초 삼칠일 즉 21일 동안 말씀하신

경이라고 하고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60권, 80권, 40권으로 된 <육십화엄>,

<팔십화엄>, <사십화엄> 등 3부 <화엄경>이 있다.

 

<육십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 의해 418에서 420년에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고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팔십화엄>은 대주(大周)시대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역출되었으며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사십화엄>은 당의 반야(般若)가 798년에 역출하였으며 입법계품의 별역으로

<입불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可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 본래의 이름이다.

 

그러나 <육십화엄>이나 <팔십화엄>은 처음부터 대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각 품이 별행경으로 먼저 성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분경을 모아

어떤 의도하에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이 웅대한 화엄대경인 것이다.

 

법계연기(法界緣起)

 중국 화엄종에서는 화엄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이며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보고 있으며, 그 화엄세계는 법계연기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화엄경>의 불보살세계를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의 법계연기로 나타낸 것이

화엄종의 종취라고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은 밝히고 있다. 이러한 법계연기설은 청량을

거쳐 규봉종밀대에 와서 사종법계설로 확정된다.

 

종밀은 <주법계관문>에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를 인용하면서 사종법계의 의의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주법계관문>은 두순이 지었다고 하는 <법계관문>을 종밀이 주석한 것이다.

<법계관문>에서는 진공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의 법계삼관을 설하고 있다.

 

먼저 진공관(眞空觀)은 모든 법은 실성이 없어 유(有)와 공(空)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인 줄을 관함이다.

다음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은 차별있는 사법(事法)과 평등한 이법(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하는 것임을 관함이다.

끝으로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은 우주간의 온갖 사물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으로 관함이다.

 

지엄은 법계연기를 보리정분의 정문(淨門)연기와 범부염법의 염문(染門)연기로 나누고 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과 인불가설(因分不可說)로 나누고

그것이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와 보현경계(普賢境界)라고 하고 있다.

종밀에 이르러서는 사종법계설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법계란 Dharma-dhatu의 번역어로

연기현전하는 우주만유이다.

 

이 법계의 체는 일심(一心)인데 원명구덕의 일심이며, 총해만유(總該萬有)의 일심이다.

따라서 법계란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이 법계를 설명하는데 사(事)와

이(理)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인 것이다.

 

사종법계는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이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 통괄되는 것을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화엄의 무진법계는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개체와 개체는 공통성이 없이 차별적인 면만을 본 것이다.

 

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르 말한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와 개체의 동일성, 공통성을 본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는 이와 사,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이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는 이사무애(理事無碍)를 바탕으로 하여 의지의 전환이 있어야

가능한 직접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늘 그렇게 있는 세계이나 이해나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현실화해야 하는 세계이다.

 

십현연기(十玄緣起)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연기를 체계적으로 관찰한 구체적 설명이 십현연기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한다.

십(十)은 원만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현묘, 문은 사사무애법문이다.

10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세계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십현문이 설해지고 있는 중국 화엄전적으로는 지엄의 <화엄일승십현문>, <수현기>와

법장의 <화엄오교장>, <화엄경문의강목>, <금사자장>, <탐현기>와 징관의 <화엄경소>,

<현담>, <화엄약책> 그리고 종밀의 <원각경대소> 등이 대표적이다.

 

법장은 <화엄오교장>에서는 스승인 지엄의 십현문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탐현기>에서는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탐현기> 이후에 보이는 십현설을 신십현(新十玄)이라 하고 그 이전의

십현설을 고십현(古十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신십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신십현은 동시구족상응문, 광협자재무애문, 일다상용부동문, 제법상즉자재문, 은밀현료구성문,

미세상용안립문, 인다라망경계문, 탁사현법상해문, 십세격법이성문, 주반원명구덕문이다.

이 가운데 광협자재무애문과 주반원명구덕문은 고십현에서의 제장순잡구덕문과

유심회전선성문을 고친 것이며, 은밀현료구성문은 고십현의 비밀은현구성문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십현연기의 총설이다. 동시는 선후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구족은 모두 섭수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체 제법이 열 가지 뜻을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열 가지 뜻이란 교의(敎義), 이사(理事), 경지(境地), 행위(行爲), 인과(因果), 의정(依正), 체용(體用),

인법(人法), 역순(逆順), 감응(感應)이다.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연기 제법에 각각 광협이 있으면서도 무애하다는 것이다.

이는 간격이 멀든 가깝든 간에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없다는 뜻이다.

광(廣)은 밖이 없다는 무외(無外)의 뜻으로 넓음이란 한계를 갖고 있지 않아 밖이 없는 것이다.

협(狹)은 안이 없다는 무내(無內)의 뜻으로 가장 좁음이란 그 자체 안에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아 안이 없다는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큰 것과 좁은 것이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는 것이다. 좁은 것과 넓은 것은 하나와 전체로 말할 수 있으므로 서로 자유롭게

구애됨이 없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 이는 고십현에서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순수한 것과 잡된 것이 본분위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일념에 구족하여 원융무애하다는 의미이다.

순수한 것과 잡된 것이 섞여 있으니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 대로 제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는 전체에 들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 무애자재하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하나와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상입(相入)을 말한다.

상입이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걸림없이 융합하는 것이다.

하나란 하나라는 자성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라 연기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가 아니다. 각각

제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차별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종합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하여 움직인다.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묘용(妙用)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하여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두 가지가 하나로 융합하는 즉(卽)은 물과 물결처럼 한 물건의 체 그대로가 다른 물건인 뜻으로 말하는 ‘즉’이다.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고십현에서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비밀은’과 ‘현’으로 된 것을 ‘은밀’과 ‘현료’로 정리한 것이다.

비밀 즉 숨은 것과 현료 즉 드러난 것이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금사자장>에서는 우리가 금사자를 접할 때 사자로서 사자를 볼 때는 사자뿐이고

금은 없으며, 금을 볼 때는 단지 금뿐이고 사자는 없으나 금사자는 금과 사자를 합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화엄현담>에서는 반달의 예를 들고 있다.

반달은 반은 빛나고 반은 어둡다. 그러나 감춰진 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을 지구에서 보면 큰 공만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달 자체가 늘어났다 줄어들지 않는다.

그 반달은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밞음 아래에 어둠이 있고 어둠 아래에 밝음이 있다.

하나로 많은 것을 섭수하면 하나는 드러나고 많은 것은 가리워진다.

많은 것이 하나를 거두어들이면 많은 것은 드러나나 하나는 가리워진다.

한 터럭이 법계를 섭수하면 곧 나머지 터럭의 법계는 모두 가리워지고 나머지 낱낱

터럭의 가리워지고 드러남도 또한 그러하다. 한 편은 보이고 한 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둘다 갖추어져 있어서 하나가 성립되면 다른 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미세한 것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미세란 인간의 이해가 닿는 곳을 넘어서 고도로 작고 정밀하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함용하므로 상용(相容)이라고 하고, 하나와 많은 것이

섞이지 않으므로 안립(安立)이라고 한다.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하며,

이들 세계의 일체 먼지 속에 또다시 무한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일념 중에 모든 것을 구족하여 가지런히 나타나 명료하지 않음이 없음을 겨자씨를

담은 병에 비유하기도 하고 화살이 빽빽히 꽂친 화살통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인다라망의 비유에 의해 상호 반영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천 궁전에 걸린 보배망의 각 보배구슬마다 서로 다른 일체 구슬이 비쳐

무진한 것처럼 법계의 일체도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하다.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은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당체가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두두물물이 다 비로자나 진법신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는 곧바로 법의 상징이고, 법이 비유이고 비유가 곧 법이다.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십세가 시간에 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즉, 상입하여 하나의 총합을 이루지만

그러나 전후 장단의 구별이 뚜렷하여 질서가 정연한 것을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는 한생각 일념에 포섭되므로

십세(十世)이다. 또 일념을 열면 구세가 되므로 합하여 십세가 된다.

그래서 일념이 십세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념이지만 십세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완연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주체와 객체가 조화롭게 함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홀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우주법계에는 어느 한 사물도 홀로 생겨나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서로 주인이

되고 객이 되어 모든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십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바꾼 것이다.

 

육상원융(六相圓融)

 십현연기와 더불어 육상원융 또한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한다. 이는 총별, 동이, 성괴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모든 존재는 다 총상, 별상, 동상, 이상, 괴상, 성상의 육상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일체가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성립된 총상(總相)은 부분을 총괄하여 전체를 만들고 있다.

별상(別相)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총상에 의지하여

원만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총상이 없으면 별상이 없고 따라서 총상 밖에

별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동상(同相)이란 별상의 하나하나가 서로 조화되어 모순되지 않고 성립되는 힘을 균등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상(異相)이란 별상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있으면서 제각기 상을 잃지 않고 조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성상(成相)이란 별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총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부분이 다만 집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괴상(壞相)은 별상이 총상을 성립시키면서도 별상 제각기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

총상의 모양으로 혼융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육상을 집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총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을 총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별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그 자체를 이른다.

동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은 각각 가로와 세로로 되어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성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각각 인연이 되어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괴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집을 조립하여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각 자기의 본 모양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육상의 관계를 체상용(體相用)의 관계로 나누어 보면 총상과 별상은 연기의 체(體)라고 보고,

동상과 이상은 연기의 상(相)이라고 하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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