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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왕숙(천마)지맥(終)

왕숙(천마)지맥 제2구간 - 금단이고개에서 수레넘어 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4. 2. 3.

☞ 산행일자:  2014년 2월 2일

☞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짙은 안개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1km + 어프로치 5km / 9시간 2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비월교-금단계곡-금단이고개-775m봉-철마산 북봉(내마산)-765m봉-헬기장

                  절고개-길재-철마산-삼각점봉-쇠푸니고개-복두산갈림길-과라리고개

                  괄라리고개-보구니바위-돌핀샘바위-천마산- 805m봉-헬기장-무명봉

                  천마산스키장-403m봉-358m봉-마치고개-벌목지대-백봉산기도원 갈림길

                  암봉(돌탑)-511m봉-백봉산-헬기장-묘적사갈림길-녹촌리갈림길-341m봉

                  NO67송전탑-산불감시초소-수레넘어고개-월문리(묘적사입구 버스정류장)

 

설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으니 특별히 갈데도 없고하여 구정날 고향에서 長兄이 시골에서

제사를 모시긴 하나 늘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내가 다니는 절에서 구정 다례를 모신다.

설날 아침에 가족들과 은사스님의 사찰에서 제사를 모시고 스님에게 세배를 한 다음에

설 다음날에 왕숙(천마)지맥 2구간을 할려고 했으나 기상청의 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기에

하루를 쉬고 이튿날 왕숙(천마)지맥 2구간을 하기 위해서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집에서 베낭을 챙긴 다음에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선릉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선릉역(05:35)

선릉역에 도착하니 05시 35분이다. 동서울터미널이 있는 강변역가는 첫차가 05시

47분이라 10분 이상을 기다리니 열차가 오기에 열차를 타고 강변역에 도착을 한다.

강변역에 도착하여 터미널 대합실 안에 있는 점심에 먹을것을 사야하는데 빵집이

문을 열지않아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하나와 수퍼에서 우유하나를 산 다음에

대합실에서 나와 바로 옆 버스 정류장으로 나온다.

강변역에서 구리가는 버스를 타고 구리 롯데백화점앞 정류장에서 내려 20분이상을 기다린다

비금리가는 버스로 1시간30분 이상을 가야 날머리에 도착하기에 잠을 좀 청하려 했으나 흔들리는

버스에다 계속해서 안내방송의 멘트 때문에 잠자는 걸 포기하고 그냥 우두커니 차창밖만 쳐다본다

비월교앞 버스 정류장(08:35)

버스에 내리자마자 스패치와 아이젠을 착용하고 곧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도로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산돌농원 표지판이 나온다.  

금단계곡을 지나 농원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2일전에 내려온 길을 올라간다.

어제 겨울비치고 꽤나 많이내린 비 탓인지 계곡의 물은 상당히 많다. 

금단계곡의 모습

이정표를 따라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어제비가 많이 온 모양이다.

이튿전에 많이 쌓였던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낙엽만 수북하다

계곡을 지나니...

우측에는 버려진 폐드럼통 2개가 보이고...

본격적인 급경사의 오름이 시작된다

10분 가량을 치고 오르니 y자 갈림길을 만난다

금단이 고개(09:30)

도로에서 55분간을 부지런히 치고 오른 다음 본격적으로 천마지맥 산행을 시작한다 

금단이고개 이정표

(←철마산3.9km/→주금산4.32km/↑팔야리2.5km)

이정표에 걸려있는 다산선생의 詩... 귀양살이 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튿함이 묻어나오는듯 하다 

이틀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전망은 아예없다. 어젠 내린 비에다가 기온이

높은 탓인지 짙은 안개로 인하여 한치앞이 보이질 않는데 그나마 위안인 건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왕숙(천마)지맥 구간은 서울근교라 그런지 길은 좋고 이정표도 그런대로 잘되어 있다.

아마 왕숙(천마)지맥길보다는 남양주시 둘레길 개념으로 만든 다산길의 영향인 모양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벤치들이 보인다

눈이 비를 맞으면서 얼음으로 변해버린 탓에 상당히 미끄럽다.

팔야리(八夜里)갈림길(09:43)

조선시대에 태조가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 곳에 이르러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태조가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여 '여덟밤이' 또는 '팔야'라 하였다고 한다.

남양주시 서쪽을 관통하여 흐르는 '왕숙천'도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는 함흥으로 가버렸고, 이에 태종은 사자를 보내

부친이 돌아오도록 백방 노력했으나, 태조는 일체 거절을 하 고, 사자들마저 모두 죽어버렸다.

 

태종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태조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무학대사를 보내어 겨우 태조를 환궁시킬 수 있었다.

이 때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면 팔야리에서 여덟 밤을 자고 갔으므로,

이 마을 이름이 '여덟배미' 또는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내를 '왕이 자고 갔다'는

의미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팔야리에는 '아작고개·아재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은 옛날에 흉년이 들었던 시기에 어떤 농부가

너무 배가 고파 이 고개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고 말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 전해진다.

혹은 '아지작고개'라고도 불리는데, 호랑이가 이 고개에서 사람을 '아작'하고

잡아먹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전한다.

팔야리 갈림길 이정표

현위치 1-15 이정표(←팔야리2.7km/↓철마산3.3km/→주금산5.0km)

무명봉(09:55)

폐타이어로 만든 벙커봉을 만나고...

멋진 낙락장송 한그루가 홀로걷는 산꾼을 반긴다. 

775m봉(10:10)

현위치 1-14 이정표(←천마산9.8km/→수산리2.2km,→주금산5.8km)가 서있다.

한강기맥길에서 자주 만났던 시그널... 반갑습니다

짙은 안개속에 멋진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릉구간을 우회하는 로프를 타고 내려가 철마산 북봉으로 향한다 

철마산 북봉(786.8m:10:15)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진벌리와 금곡리 그리고 수동면 수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보통 철마산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동여지도」와「대동지지」에는 검단산(黔丹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현재 이 지역 사람들은 검단산으로 부르지 않고 철마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현재 철마산 남봉을 철마산으로 부르고 북봉을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정표에는

철마산 북봉을 내마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처음 산행을 하는 산꾼으로서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철마산 남봉을 철마산으로 부르고 북봉을 검단산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남쪽 봉우리

골짜기에 쇠푸니마을이 있고 북봉 봉우리 골짜기에 검단이마을이 있어 입증이 된다.

북봉인 검단산은 검다니마을의 유래와 같이 ‘검은 산’ 또는 ‘수풀이 우거진 산’ 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또 남봉인 철마산은 쇠푸니 마을의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 ‘쇠를 캐는 광산’ 과 관계있는 이름이 아닐까?

철마산 북봉 정상에는 헬기장과 휴게용 벤치만 달랑있고  어느 산악회에서

코팅지로 철마산 북봉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이 북봉을 내마산 또는 안마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안마산은 안씨 성을 가진 사람과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안마산으로 불렀는데 이와는 달리 철마산 줄기안에

자리잡은 마을이기 때문에 “안마산” 또는 “내마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철마산 북봉정상 이정표

현위치 1-13 이정표(←철마산2.2km,←천마산9.6km/→주금산6.0km)

두번째 만난 팔야리 갈림길(10:24)

현위치 1-12 이정표(←천마산9.4km/→주금산6.2km/↑팔야리)

헬기장(10:25)

현위치 1-11 이정표(←내마산0.35km/→천마산9.2km,→철마산1.9km)

철마산 북봉에서 350m 떨어진 헬기장 이정표에서부터 북봉을 내마산으로 표기한다

절고개(10:29)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왕숙(천마)지맥을 이어가는데 진벌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진벌리(榛伐里) 는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마을로서 갬벌, 진벌로도 불리우며
개암나무가 많은 벌판이므로 '갬벌' 또는 '진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벌리에는 '진벌·가얌벌·가얌벌리·갬벌'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얌나무(개암나무)가 많아서 '가얌벌', '갬벌' 등으로 불리다가 '진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이 곳은 가얌나무가 많았는데 가얌나무를 베어버리고 형성된 마을이어서,

'가얌벌리'로 불리다가, 이의 한자어인 '진벌(榛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무를 베어버리고 이룩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절고개 이정표

꼬부랑 할머니 소나무 

멋진 암릉 좌측으로 우회하며 걷는다 

수산리 갈림길(10:40)

수산리(水山里) 는 남양주시 수동면 철마산 북봉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수막(水幕)동의 '수 (水)'자와 내마산(內馬山)리의 '산(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물막골·수막'은 물줄기의 원 천이라고 해서 '물막골' 또는 이의 한자식 표현인 '수막'이라고 불린다.

중간말과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마산·내마산'은 옛날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곳에 살 았기 때문에 '안마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철마산 줄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기 때문 에 '안마산' 또는

'내마산' 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수산리갈림길 이정표

멋진 암릉을 만나 우측으로 떨어진다 

암릉길을 로프로 타고 내려오는데 빗물에 젖은 상태라 상당히 미끄럽다

무명봉(10:50)

길재(10:55)

길재 이정표 

현위치 1-9 이정표(←천마산7.8km,←철마산0.86km/→주금산7.4km/↑진벌리)

688m봉(11:05)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벤치 2개가 설치되어 있고 직진으로 뚜렸한

길이 있으나 직진을 버리고 좌측으로 진행하여 가야만 한다

철마산(鐵馬山:711m:11:10)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과 수동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철마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불암이라는 바위굴에서 철마를 탄 장군이 나왔다는 전설과 함께 어느 풍수가가 산 머리가

말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철이 나오는 말산 또는 철마산성과 철마가 있었다는 전설 때문에

여러가지 유래가 있었지만 이곳이 철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철에 관련된 이름이 붙었던 하다

 

산의 동편 수동면은 물 좋은 비금계곡으로 유명하고, 서쪽의 팔야리는 조선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여덟밤을 묵어간 역사적 고장이다.

등산로는 비교적 수월하여 등산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정상석 옆 국기게양대 아래엔 철마부대 장병들이 묻어둔 타임캡술 안내판도 보이며

북쪽으로는 진벌리와 매봉산, 조선을 개국한 이 성계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 방원이

미워 함흥으로 떠났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8일이나 머물렀다고 하는 팔야리(八夜里)와

왕숙천 그 너머로 한북정맥길인 죽엽산이 아련히 보이는 곳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30m  앞도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철마산은『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나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서는 '검단산 (黔丹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검단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철마산'이라고만 부르 며, 철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름 유래를 말한다.

북쪽 봉우리인 '검단산'은 '검은 산' 또는 '수풀이 우 거진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남쪽 봉우리인 '철마산'은 쇠푸니의 이름 유래와 관련이 되어서 '쇠 를 캐는 광산'과

관계가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철마산'은 남북 봉우리가 달리 불리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0년대에 지형도를 만들 때, '

철마산'만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검단산'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두 봉우리를 모두 '철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마산 정상에 있는 철마부대 타임캡술

철마산 정상에는 국기 게양대 아래에 철마부대 타임캡술이 있고 양 옆에는 사단장의

기념식수를 해놨다는 표지판이 있고 우측 아래로 철마부대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 아들이 철마부대로 불리는 75사단 사령부에 근무를 하였다.

철마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철마산 정상 이정표

철마산 정상에서 30여m를 지나서  바위 앞 공터봉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는 아직도 성터(철마산성)가 남아 있고 주위에는 높고 험한 산줄기가 이어져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동남서 방향에 돌을 쌓았으며 불암이라는 절벽에는 장군이 나왔다는 바위굴이 있다.

그 바위굴은 장군이 말을 매어 두고 사육했던 곳으로 암반의 곳곳에 장군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바위굴은 신라의 선인 옥단춘의 출생지로서 고려 초 보조국사가

그 자리에 한선사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오늘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철마산 정상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설치된 삼각점(△(성동427/1994 재설)

군부대 경고판도 만나고...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바위를 만나건만... 

오늘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그림의 떡입니다.

꿩대신 닭이라고 전망바위 아래에는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돌무더기 능선을 지나니...쇠푸니 고개가 나온다.

쇠푸니 고개 (11:35)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와  수동면 수산리로 넘나드는 고개로 쇠푸니, 솨파니의

지명이 있는데 이 지역에 쇠(鐵)이 많이나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금곡리는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지역으로 1914년

금곡리의 '금'자와 주곡리의 '곡'자를 따서 금곡 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금곡리에는 '쇠푸니·쇠파니·금곡·원금곡'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로 부터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나서 '쇠푸니', '쇠파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금곡(金谷)'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쇠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금곡마을이 점차 커지고 리 이름으로도 쓰이게 됨에 따라, 구별을 위하여

원래의 금곡마을이라는 의미의 '원금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복두산 갈림길(11:40)

능선을 타고 계속 진행하던 천마지맥길은 직진으로 뚜렸한 복두산으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희미한 좌측 옆사면으로 향하지만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듯 싶다. 현위치 1-6 이정표(←천마산8.8km,↓철마산0.8km/→복두산2.1km)를

지나 5분정도를 가니 다시 우측으로 복두산으로 가는 Y자 길이 나오면서 직진으로 이어간다

과라리 갈림길(11:50)

현위치 1-3 이정표(←철마산1.5km,→천마산5.5km/↓과라리3.9km)가 나오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갈림길에서 꺽어져 내리막길의 편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린다.

저쪽에서 산꾼 한명이 오는데 오늘 처음으로 등로에서 사람을 만난다. 

정말 반가운 方草님

근데 누구셔요? 나도 놀라고 상대방도 놀라는데 2010년도에 낙동정맥을 같이하신

방초님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자리에서 앉아 방초님이

가져오신 독한 약초 술 2잔을 연거푸 얻어 마신다... 방초님께서는 지맥길을

하시는 건 아니고 천마산에서 철마산으로 가시는 중이시란다.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갈길이 멀어 아쉬운 작별을 한다.

510m봉(12:25)

식별할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비에젖은 낙엽을 밟으며 호젓한 등로를 홀로 걸으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걷는다.

방초님에게서 얻어마신 약초술 때문에 기분은 쿨~하고... 이런맛에 나홀로 산행의 매력에 빠지는가?

과라리고개(12:35)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과라리에서 수동면 수산리 넘어가는 고개로

정상에는 이정표와 돌탑이 있고 누군가가 멋진 과라리 아리랑을 걸어놨다. 

과라리 고개 이정표

현위치 1-2 이정표(←철마산3.1km,→천마산3.9km/↓수산리/↑팔현리(과라리)2.3km)

과라리 고개의 돌탑에 써있는 과라리 아리랑

지둔리 갈림길(12:50)

정상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벤치 2개가 산꾼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갈길 바쁜

범여는 매정하게 거절을 하고 길을 걷는다...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천마산으로 향한다.

 

지둔리(芝屯里) 는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곳은 양주군 상도면 지둔리였는데 1

914년 4월 1일 화도면에 편입되었는데 현재에는 수동면으로 되어있다.

지둔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광대울'은 약 200년 전 이 마을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집에서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 때 한 광대가 줄을 타다가 떨어져 울고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 다.

지세와 관련되어 명명된 마을이름도 있는데, '삼각골'은 마을 지형이

삼각형의 골짜기 형 태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천마산의 수려함으로 드러나는 산가(山佳), 풍부한 계 곡물로 나타나는 수가(水佳),

그리고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로 표현되는 인가(人佳) 등 삼가(三佳)로 이 루어진 마을이라 해서

'삼가골'이라 불리던 것이 '삼각골'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한다.

한 동안 편안길을 따라서 호젓하게 걷는다.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이렇게 혼자서 무아지경으로

걸을 수 있는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이란 말인가...

 

가곡리 갈림길(13:15)

현위치 1-7 이정표(←철마산,↓천마산2.4km/↑가곡리4.8km)가 있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남양주시 수동면 가곡리(옛 이름은 가오실)는 조선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의 고향으로,

이유원가는 여섯 아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명문가다. 명산(名山)의 정기를 따라 걸출한

인물들이 천마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았다.

등로에서 앙증맞은 돌탑하나를 만난다... 나 역시 돌하나를 얹어놓고 길을 걷는다

저 넘은 왠 심사가 저리도 꼬였을꼬?

찢어지는 아픔을 달래며...

裸木

괄라리고개(13:50)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위에 있는 천마산 가기전의 고개로
아주 험한 마을로서 다래 덩굴에 걸린다(掛)하여 과라리라 한다.

일제시대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지도에는 括羅里峴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의 2만5천 지도상의 괘라리고개와는 사뭇 다르다.

괘라리고개라면 북창 정염과의 연관을 八卦와 더불어 끌어 댈 수 도 있겠지만 이는 무리인 듯 하다.

괄라리재(444.2m)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진건면 팔야리 쪽을 “括羅里”라는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고

“과라리”로 발음하고 있으므로 괄라리로 넘어가는 고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괄라리 고개 이정표

현위치 1-6 이정표(←천마산700m/→철마산6.4km/↑팔현리4.6km)

좌측은 보광사 방향이나 등로가 폐쇄되었다는 표지판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엉터리 이정표

돌핀샘바위는 0.3km, 보구니 바위는 0.27km 남았는데 3.0km, 2.7km 라고 표기를 해놔서

처음 오는 산꾼들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남양주 시청 담당자 나리... 제발 내돈 아니라고

확인도 하지않고 엉터리 이정표 제작에 경비를 지출했다니 기가 막히네요

당장 확인하여 다시 제작하던지, 경비를 회수하시요... 남양주시는 재정상태가 그렇게 좋은가요

당신네들 하는 짓거리 그리고 무책임한 행정처리 참으로 한심하오

보구니 바위(13:55)

능선위가 험하여 오르지 못하고 우회를 하게 해놨다

보구니 바위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다시 암릉으로 오른다.

비에젖은 미끄러운 암릉길을 조심스럽게 오르니 돌핀샘 바위가 나온다. 

돌핀샘바위(14:02)

천마산 정상 서남쪽 인근에는 높은 절벽바위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약물바위 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서는 연중 끊이지 않고 샘물이 솟아올라서 약물바위샘이라고 한다

돌핀샘이 북한의 신덕샘물과 지리산의 장터목샘물에 이어 ‘감로(甘露)성분’이 가장 많은 샘물이라는데

산행을 하면서는 그게 있는줄도 모르게 걸었는데 자료를 검색해서 알았다.

나중에 100대 명산 산행을 할 때 꼭 확인을 해보고 싶다.

이곳은 응달에다 암릉, 그리고 눈이 녹은 것이 얼어서 반질반질한 빙판길이다.

잠깐동안 스틱을 접은채 두발이 아닌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천마산으로 향한다

뒤돌아 본 돌핀샘바위

마치 돌고래처럼 바위가 생겼는데 그래서 붙혀진 이름인가?

안개에 휩싸인 멸도봉의 모습

멸도봉(搣道峯:795m)은 천마산 가기직전에 있는 암릉 봉우리로 너무 미끄러워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여 천마산으로 향하는데 참으로 아쉬웠던 부분이다 

멸도봉의 유래는 백제의 고승이었던 검단 선사가 전국 각지에 佛法을 전하려고 사방으로

돌아다닐 때 천마산에 올랐다가 이 봉우리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 처음와 본 천마산은 생각보다도 정말 멋진 곳이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우람한 근육질을 가진 멋진 암산이 서울근교에

있다는 건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조만간 꼭 한번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암릉을 우회하여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팔현리(八賢里) 갈림길(14:20)

팔현리(八賢里) 는 남양주시 오남읍에 속한 이곳은 벌판 안쪽이 되므로

'벌안', '배라니', '배래니'라고 불렸다.

 

그런데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망세정(忘世亭) 심선(沈璿) 등

여덟명의 선비가 이 곳에서 항시 만나 강론을 하였다 하여, '여덟 현인(賢人)이

은거 했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여덟 선녀가 이 마을에 내려와 목욕하고 올라갔기 때문에 '팔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이들 팔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팔현재'가 있다. 그리고 원팔현 북쪽 팔현유원지에 '형제바위'가 있다.

옛날 남 양홍씨(南陽洪氏) 가문에서 사효성문(四孝姓門)을 받은 홍서구(洪瑞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우 주구(疇龜),

우구(禹龜), 응구(應龜) 등 4형제가 이 곳에서 사이좋게 놀던 자리라 해서 형제바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 바위에 돌을 던지고 기원을 하면, 아들 형제를 낳는다고 하여 '형제바위'라 불린다는 유래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로프에 의지한 채 천마산 정상으로 향한다.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미련이 남아 뒤돌아 본 멸도봉

천마산 정상이 지척이다

정상 구조목을 만나고...

누워있는 천마산 정상 표시석을 만난 다음에 또다른 정상 표시석을 만난다.

천마산(天摩山:812.4m:14:25)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오남읍, 호평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고 웅장하여 하늘에 닿을 듯 하다하여 “천마산”이라 부른다.

 

경춘 국도를 타고 서울로 갈 때나 양평 서종면의 북한강변 길을 가면서 보면 그 빼어난 모습이 가히 군계일학이다.

이곳을 지나던 이성계는 "가는 곳마다 청산은 많지만 저건 꼭 푸른 하늘에 홀(笏)을 꽂아놓은 것 같도다.

손이 석 자만 더 길다 면 저 끝에서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手長三尺可摩天)"라고 읊었다고 한다.

천마산이라는 넘치는 이름을 얻게 된 유래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있어 어느 지점에서나 정상을 볼 수 있는 특이한 산세와 식물상이

풍부하여 식물관찰 산행지로도 이름나 있는 점 등이 고려되어 100대 명산으로 선정되고. 1983년 8월 29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상 한국의 산천 등에서 발췌)

 

천마산은 양주군에 속해 있던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천마산을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인 ‘화수분’이라고 불렀다고 시지(市誌)에는 기록돼 있다.

그 이유인 즉, 봄이면 산나물, 여름이면 누에를 키우는 뽕잎, 겨울이면 땔감을 대주는 등

생활의 터전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천마산이 그 주변을 지켜주는 말 그대로 진산(鎭山)이었던 것이다.

천마산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에서 나온다.

조선 개국 전, 사냥을 나온 이성계가 산이 높고 험준함을 보고, ‘석자만 더 길었으면

가히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手長三尺可摩天)’라고 한 데서 천마산(하늘을 만질 수 있는 산)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근거 사료는 없는 얘기지만, 그 정도로 옛날에는 이 산이 높아 보였다는 말이 된다.

천마산의 옛 이름이 ‘영적산’이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경기북부 구전자료집’(박이정출판사, 2001)에 보면,

천마산 남쪽 화도읍 노인들의 증언에는 천마산이 옛날에 영적산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정상 산봉우리가 고개를 숙인 모양이라서였다고 한다.

경춘선의 평내호평역에서 내려 바라보면 죽 늘어선 천마산 능선 최고봉이 언뜻 고개를 숙인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것과 ‘영적산’이란 이름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설명이 없다.

시문화원에 물어봐도 금시초문이란다. 천마산을 ‘소박 맞은 산’이라고도 했다는데, 이

역시 외지고 산세가 험해서 그랬다지만 지금 보면 의미가 없는 별칭이다.

그보다 천마산에는 걸출한 인물들과 얽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많다.

남양주시 향토사료관의 임병규 관장에 따르면, 천마산 서쪽 자락인 진건읍의 견성암과 독정리는

바로 풍양조씨의 시조이자 고려건국 직후 문하시중을 지낸 조맹과 관련된 사찰과 땅의 이름이다.

조맹은 구척(九尺)의 장수이자 도인으로, 세상을 등지고 견성암에서 도를 닦았고 그 옆에 혼자 쓰던 우물이 ‘독정(獨井)’이었다.

왕건이 사직의 안녕을 위해 조맹을 찾았고, 점괘를 통해 이를 미리 예견한 조맹이 견성암으로 숨었으나

왕의 추격대가 조맹의 세수대야만 한 짚신 한짝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내 개경으로 데려가 중용했다는 것이다.

남양주는 아주 옛적엔 풍양골로 불렸는데 거기에서 풍양조씨가 유래했다.

천마산 북서 자락의 오남면 괘라리는 조선시대 연산군-명종 시대를 살다간 도인인 북창 정염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용호비결(龍虎秘訣) 하면 누군지 금세 알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가(仙家)에서는 수단지도(修丹之道)의 귀중한 요결로

전해지는 책이다. 북창의 동생 정작은 허준이 동의보감을 쓸 때 참여해 내단적 양생술을 근본으로 한 처방전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괘라리란 이름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두 형제와 무관한 이름은 아닌 듯하다.

천마산이 수행 또는 수도와 연관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0대 명산에 들만큼 뛰어난 비경을 자랑해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등산객들이 꽤나많다.

옆에 있는 등산객에게 부탁하여 사진 한장을 남긴 다음에 암릉을 타고 마치고개로

향하다가 등로아래 암릉 사이로 내려서서 배가고파  늦은 점심상을 펼친다.

천마산 정상 삼각점(양동21 / 1983 복구)

805m봉(14:28)

정상에서 계속 연결되는 암릉으로 내려오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등로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단촐한 점심

식사래봐야 햄버거에다가 바나나 우유하나, 커피에다가 과일로 점심을 먹는다.

10분정도의 빠른 식사(?)를 마치고 다시 등로로 올라와서 서둘러 마치고개로 향한다.

등로 끝부분에 오니 데크목 계단을 만들어 놨고 이곳에서 우측의 멋진 암릉을 바라보며 내림막길로 내려온다.

천마산 아래 첫번째 이정표(14:43)

이정표(←정상0.17km/→관리사무소2.75km/↓호평동2.83km)...관리사무소 방향으로 진행한다

두번째 이정표(14:45)

이정표(←관리사무소2.74km/→정상0.18km/↑마치고개3.60km)가 있고

우측으로 90도 꺽어져 마치고개 방향으로 진행한다

직진을 하면 호평동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호평동(好坪洞)]은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호만(好滿)리의 '호(好)'자와 평동(坪洞)리의

'평(坪)'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호평동에는 '가마솥둥지'라는 바위가 있는데, 좌우로 갈라진

바위 사이가 큰 가마솥을 얹을 만하다 해서, '가마솥둥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이 지역은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온 동네 부녀자들이 키를 들고

이 곳으로 와서 키로 물을 퍼서 바위에 끼얹으며 비가 오기를 빌었다고 한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몇 번식 키질을 하기도 했으며, 키질을 마치고 내려 오면

젖은 키가 채 마르기도 전에 비가 오곤 했다고 한다. '호만'이라는 이름은 원래 '홈안'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내미골 논에다 물을 대기 위해 느티울 쪽으로 나무 홈을 파서 만든 홈통을 이어 댄

농수로가 있었는데, 이 홈통으로 된 농수로 안에 있는 집들을 '홈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부르기 쉽게 '호만'이라고 하기 시작했으며, 한자어로는 '호만 (好滿)'이라 표기했다.

헬기장(14:53)

헬기장을 가로질러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뚜렸한 길이 나오는 등로를 버리고 로프가 설치된 좌측에 로프가 설치된 암릉으로 향한다

이곳은 바짝 신경쓰야 할 곳이다... 무심코 좋은길로 내려가면 대형 알바를 하는 곳이다.

로프가 설치된 암릉길을 내려서니 편안한 등로가 나온다.

편안한 등로를 내려오니 우측에 조그만 돌탑도 보이고...

묵현리 갈림길 (15:25)

남양주시 화도읍 (墨峴里)는 천마산과 마치고개 밑이 되므로 '먹고개''먹갓'또는 '묵동'이라 하였다

이곳 묵현리에는 옛 원터가 있었던 곳이라서 '원지(院址)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 곳은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대로 변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 원(院)을 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약 100여년 전에 폐지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지명만으로 전하여 온다.

이곳부터는 남양주시에서 조성한 다산길 13코스란다 .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ㅜ 자의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곳곳에 간이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차량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짙은 안개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천마산 스키장(14:45)

403m봉(15:47)

358m봉(15:52)

봉우리 정상에는 삼각점(△402복구 / 건설부78.11)이라고 되어 있으나

국립토정보지리원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양수 450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안부사거리(16:00)

안부사거리 이정표 ... 직진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헬기장(16:02)

헬기장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을 1분정도 내려오니 마치고개가 보인다

마치고개 이정표

마치고개(摩峙:16:05)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화동읍 묵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넘어에는

유명한 마석가구단지가 있고 고개 넘어 우측으로 꺽어지면 비젼힐스C.C가 있다.

 

마치고개는 사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임꺽정패가 천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전설도 있다.

‘구전자료집’에도, 지금은 마치터널이 뚫린 산 남쪽 화도읍 묵현리 마치고개에서 임꺽정패가

자주 출몰했으며, 고개를 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아래 원터라는 곳에서

사람들을 기다려 숫자가 차야 대낮에 넘어다녔다는 것이다.

숫자를 채우려면 며칠씩 걸리기도 해, 그 근처 종가에서 기다리는

나그네들을 위해 밥을 해놓기도 했다고 한다.

임꺽정 패는 근처 하남에 있던 당시 우(牛)시장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천마산에는 임꺽정 바위가 있는데, 모양새는 작고 볼품이 없다고 한다.

마치고개를 가로질러 백봉산을 오르기 위해 능선으로 진입한다 

시간이 어중간하여 이곳에서 산행을 접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이곳에서 끊으면

다음구간을 한번에 하려면 너무 길고 2번에 나누면 너무 짧을 것 같아서 미련없이 능선으로 오른다.

한가지 믿는 것은 이곳은 서울근교라서 조금 늦게 내려와도 대중교통이 늦게까지 있고

베낭에 헤드렌턴도 있고 하여서 수레넘어 고개까지 밀어 부친다

마치고개에 올라서니 나무계단과 이정표가 나오고 곳곳에 군 벙커가 보이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땅바닥이 질척거리면서 길이 미끄러워 자꾸만 힘이든다.

우측으로는 민둥산에 자작나무를 심어논 군락지를 만나면서 오르는데 배는 고파온다.

그런데 먹을 것이라고는 곶감 2개와 베지밀 하나밖에 없다.

너무 힘들어 의자에 앉아 마지막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면한다.

백봉산 기도원 갈림길(16:30)

좌측 등로 아래에는 비젼힐스 골프장인데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2003년에서 2008년까지 6년동안 내가 속해있는 모임에서 골프 월례회를

했던 곳이라 정이 든 곳인데 아쉽다... 이 골프장은 비거리는 짧으나 파4 코스에서

투온하고 쓰리퍼트 아니 포퍼트 하기가 일쑤인 그린이 아주 까다로운 곳이였는데...

아마 지금가면 완전히 백돌이겠지... 올 겨울에는 전지훈련을 안가서 골프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ㅋㅋㅋ.

이정표(←정상 1.5km, →마치고개 0.88km)...백봉산 정상방향 직진으로 진행한다

(구) 서울리조트 정상위에 있는 구조목

서울리조트 상단부 돌탑(16:45)

돌탑 정상에서 능선 아래로 내려보니 예전에 스키장을 비롯한 위락시설이 있었던 장소에는

컨테이너 서너개와 조립식 건물 한동만 보이고 부도가 난 탓인지 모든게 폐허로 변해 버렸다.

뭣이든지 쥔장을 잘 만나야돼...범여의 다리가 말하겠지 나도 쥔장 잘못만나 개고생이라고... 미안혀

출입금지 팻말이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야 지맥길인 511m봉을 만나는데

사유지라서 막아논 바람에 좌측으로 우회하여 왕숙(천마)지맥길을 이어간다

서울리조트상단 돌탑을 좌측으로 우회하여 진행하니 이정표(←정상 0.5km, →마치고개 1.8km)가

나오고 이정표를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을 치고 올라간다.

511m봉 능선 안부(16:50)

이곳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511m봉이나 시간도 늦었고 올라가봐야 군 통신시설물만

있기에 1분이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좌측으로 꺽어져 백봉산으로 향한다.

드디어 백봉산에 도착을 한다. 백봉산 정상에는 2층짜리 팔각정과 정상석과

이정표, 국기 게양대와 3등 삼각점이 있으며 늦은 시간에도 등산객 두 사람이 보인다

백봉산 정상의 모습

백봉산 정상 삼각점(△ 양수 316 1998 재설)

백봉산(柏峰山:590m :16:55)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와부읍, 화도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백봉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산봉우리 형체가 잣송이 같다고 하여

잣봉이라 하며 백봉(柏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양주 시지(市志)에 의하면 백봉산 또는 백봉으로 불리는 이 산은 평내동과

화도읍 쪽에서는 ‘잣봉산’이라 부르며 와부읍 쪽에서는 묘적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지,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에서는 묘적산이라 되어 있다고 한다.

팔곡산(八谷山)이란 이름도 보이고 묘적산이란 이름과 함께 노적산이란 이름도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람도에는 묘적산(妙積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나온 조선지지자료에는 잣 백(柏)자를 써서 백봉(柏峰)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묘적사가 있었다고해서 묘적산이라 하기도 했고 노가리처럼 생겨서 노적봉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백봉의 사방에 많은 골짜기가 있어서 팔곡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옛날에 잣나무가 많아서 잣봉산이라 한 것을 한자화해서 백봉(柏峰)이라 했는데

근래에 지도를 만들면서 잣 배(柏)자를 흰 백(白)으로 잘못 쓴 것이 틀림없다.

 

한북정맥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는  천마산을 일구고 이어서 마치고개로 이어져 남쪽 뻗어내린

능선에 솟아 있는 백봉(590m)은 높이는 낮으나 산세가 아름답고 동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전망이 뛰어나고 교통편이 좋은 산으로 정상남쪽 산자락에는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무술도량으로 창건하였다는 묘적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은 조선 세종대왕때 학열대사가 불사를 새로 지었으며 그 후 남북 군영을 세워

무과시험을 보다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소실되었다가 재증축하였다고 한다.

묘적사 경내 한가운데에는 7층석탑과 2백년 수령의 보리수 나무가 서있다.

백봉산 정상 이정표

백봉산은 경춘국도의 마치터널을 사이에 두고 천마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종주산행의 할 경우에  홍릉과 유릉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신 곳이다.

유릉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계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동릉 3실의 능이다.

이 홍릉과 유릉은 산행기점과 종점도 될 수 있어서 산행 전 또는 산행 후에 둘러보면 유익한 산행이 될 것이다.

홍,유릉을 모두 금곡에 있다 해서 합쳐서 '금곡릉' 이라고도 하며 금곡릉 벌안에 영친왕의 묘도 있다.

팔각정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넓은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을 지나

청구아파트. 묘적사 방향 이정표를 따라서 내려간다

백봉산 아래에 있는 헬기장

범여의 몰골 좀보소

헬기장을 지나 빠르게 내려오는데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눈대신 비가 온 탓인지

등로가 완전히 뻘밭이다... 거기다가 등산화에 흙이 자꾸만 붙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내리막길에 급하게 내려오다가 두번이나 미끄러지는 바람에 돈도없이 땅만 계약한다.

묘적사 안부 사거리(17:15)

 묘적사 대웅전

묘적사는 봉선사의 말사로서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되어 올 뿐이다.

묘적사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이 있으며, 이들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묘적사는
조선 초기에는 그 사격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 또한 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절에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일종의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잘 막았으나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완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이제면(李濟冕)이라는 사람의 묘와 묘비가 있어,

이를 통해 비가 세워졌던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절이 거의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묘적사 안부 사거리 이정표

406m봉 안부 갈림길(15:17)

묘적사 갈림길에서 2분정도 걸으니 y자의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의 뚜렸한 방향으로

커다란 송전탑이 짙은 안개속에 가려 있는데 이곳에서 직진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내려선다.

좌측 내리막길에서 만난 선답자들의 시그널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지 사물이 조금 뚜렸이 보인다

녹촌리 갈림길(17:30)

화도읍 녹촌리(鹿村里) 는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녹동(鹿洞)의

 '녹(鹿)자와 궁촌(宮村)의 '촌(村)'자를 따서 녹촌리라 해서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녹촌'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마을 앞산인 잣봉산에 수목이 울창하여 사슴이 많이 있었기

문에 '사슴 녹(鹿)'자를 써서 '녹촌(鹿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녹촌리 갈림길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우측으로는 잣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341m봉(17:38)

오르막을 오르니 정상의 넓은 공터에는 원두막쉼터와 각종 체육시설이  있고

왕숙(천마)지맥길은 봉우리를 지나 이정표를 끼고 2시방향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이정표(↑하산길(청구아파트) 2.40km, ↓정상(백봉산) 2.58km, →하산길(수리넘어고개) 1.15km)

5분 정도를 내려오니 우측에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무명묘지 한기를 만난다

No67 송전탑(17:50)

송전탑을 통과하여 좌측으로 꺽어져  다시 오르막으로 오르니...

산불감시초소(17:55)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조그만 바위를 끼고 좌측으로 내려오니 엄청난 절개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후답자들은 초소에서 직진으로 내려 가시길...

수레넘어 고개(車踰領:18:00)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와 화도읍 차산리를 잇는 고개로  86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차산리에 있는 고개라고 하여 '차유령(車踰領, 수레넘이고개)'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3) 4월 10일 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유강(兪絳)이

돌아가시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兪省曾)공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숙민공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車踰嶺)'또는 '수레넘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반가운 이정석

수레넘어고개에 도착하여 아이젠과 스패치를 벗고 스틱을 접은 다음 베낭을

정리하는데 도로옆에 반가운 동원정사라는 이정석을 만난다.

동원정사는 송묵스님 주지로 계시는 사찰인데 나와는 8년째 같이 모임을

하는 곳에 회장으로 계시며 지금도 조계종 포교원 포교부장으로 계시며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스님이시다... 반가워서 전화를 하니 빨리 오라고 하시는데

마음 같아서는 내려가서 뵙고 새배라도 하고 싶지만 옷과 몸뚱아리가 흙에

뒤범벅이 되어 찾아뵈올 수 없어서 다음에 뵙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늘 저를 이쁘해주시는 스님... 항상 고맙게 생각하면서

스님에게 전화를 끊고 오른쪽 월문리 방향으로 20분간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그래도 내가 히치 전문가(?)인데... 이곳은 지나가는 차량이

많긴 하지만 옷이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양심상 히치를 못하고 내려오니

묘적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수퍼에서 캔맥주 2개를

마시면서 노인이 쥔장인 어르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로 옷을 딲고 난로에

옷을 말린 다음에 19시에 오는 60번 마을버스를 타고 덕소역으로 향한다.

덕소역에 도착하여 잠실역으로 직통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25분만에 잠실역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갈아 탄 다음에 집에와서 막걸리 한병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