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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35구간 -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by 범여(梵如) 2014. 8. 11.

 

     아! 어머니 젖가슴만큼이나 포그한 지리산이여

 

 

☞ 산행일자: 2014년 8월 9일~10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날씨... 오후부터는  계속 내리는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8.5km + 어프로치7.5km / 15 시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25명과 함께

☞ 산행코스: 성삼재-코재-노고단 산장-노고단-돼지령-1,424m봉-피아골 삼거리-임걸령

              노루목-반야봉-삼도봉-화개재-토끼봉-명선봉-연하천 산장-삼각고지-형제봉

             벽소령산장-덕평봉-선비샘-1,576m봉-칠선봉-1,556m봉-영신봉-세석산장

             촛대봉-삼신봉-연하봉-장터목 산장-제석봉-통천문-천왕봉-천왕샘-개선문

             법계사-로타리산장-순두류 버스정류장-중산리 매표소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전남 구례군 토지면 / 경남 하동군 화계면,

                 함양군 마천면, 산청군 시천면

 

백두대간을 2013년 3월 10일에 시작한 백두대간 남진... 17개월만인 오늘

35구간의 대장정을 마치는 날이지만 이젠 별 감흥이 없다.

 

일요일이 우란분절(칠월 백중)이라 처음에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는 수 없어 토욜 오후에 은사스님의 사찰에 들려 부모님의 위패에  예를 표하고

죄스런 마음에 은사스님이 계시는 요사채에 들려 인사도 못하고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절을 빠져나와 집으로 와서 꾸역꾸역 베낭을 챙긴다

 

그보다도 이젠 자꾸만 아파오는 무릎 통증 때문에 행여 산행을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설 뿐이다... 원래 이번 지리산구간을 2번에 나눠서 하기로 했다가 한번에

끝난다고 하니까. 무릎 통증 때문에 한참을 망설였다가 혼자서 하루 먼저 구례로 가서

성삼재에서 세석까지 갔다가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가 거림에 있는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세석으로 올라와 동료산꾼들과 합류하여 종주를 마치기로 하고 금욜 구례가는

심야버스를 예매하였다가 그래도 미운정 고운정이 다들었던 동료산꾼들과 마지막 같이

하고픈 생각 때문에 예매표를 취소하고 토욜 밤 9시 40분에 지리산가는 버스에 오른다 

백두대간 지도

백두대간 북진 (2009년 1월 40일 ~ 2010년 1월 16일 완주)

백두대간 남진 (2013년 3월 10일 ~  2014년 8월 10일 완주)

 

백두대간이라는 말의 사용은 10세기 초,『옥룡기』에 '우리 나라는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이후 「고려사」,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산수고」와 「산경표」같은

문헌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과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백두대간은 10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인식개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일제시대를 지나며 산맥론에 묻혀 잊혀졌다.

이후 1980년대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가 헌책방에서 「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두대간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시민들에게도 친근한 개념이 되었다.

 

 
 
 
 
 
 
 
 
 
 
초중고 교육과정에 사용되고 있는 산맥지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교과서에 삽입된 한반도 지도는 1903년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 정립된 산맥지도다.
고토 분지로는 망아지 4마리와 여섯 사람을 동원시켜 14개월에 걸쳐
한반도의 지질구조를 조사한 끝에 1903년 '조선산악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고토 분지로는 이 논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백두대간을 함경·낭림·태백산맥으로
세 동강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백두대간과 결부되는 산맥들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바꿔 마천령·강남·적유령· 묘향·언진·멸악·마식령·광주·차령·노령산맥으로 개명했다.

우리의 선조들이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명명한 한반도의 산맥줄기는 인간형상으로 창조된
한반도의 골격을 뜻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두뇌를 감싸고 있는 백두(두개골)에서 뻗어 내린
산맥의 정기가 한반도의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미친다'는 한민족의 자긍심을 뜻한다.

 

 


백두대간을 나타내는 산경도

2009년 1월 4일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난 백두대간이란 단어도 몰랐던 시절에

어느 한 친구에게 백두대간을 가는데 따라가자고 한다... 그래서 대답은 O.K

그때만 하더라도 내 불알친구 淸眼과 매주말마다 북한산만 다닌 북한산 마니아였다

당시 월계동에 살던 이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김포 신도시로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갈곳이 없는 앙꼬없는 찐빵 신세가 되버렸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흔히 일반 산행인지 알고 소주 2병에다 찌게까지 먹을것 잔뜩 짊어지고 첫구간이었던

무령계곡에서 육십령가는 코스였는데 내가 즐겼던 일반산행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였다

점점 호기심이 생기고 오기가 생겨서 대간에 빠져드는데 나를 데리고 간 친구는 10번도 못하고

포기하는 바람에 나홀로 이 산악회, 저 산악회를 기웃거리며 매주 다닌끝에 13개월만 완주한다

그런데 대간길을 알면 알수록 오묘한 자연의 이치에 그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기록이 너무 없어 다시 남진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자본수탈을 위해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

정립된 산맥지도가 아닌 여암 신경준 선생이 만든 진정한 山經表에 의해 걷고 싶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성삼재((性三峙:1,102m:02:40)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수 휴게소(전북 임실 소재)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가 구례 I.C를 빠져나와 성삼재로 오르는 꼬부랑

고갯길을 오르는데 버스가 몇번을 헐떡거리면서 힘이 부치는지 시동을 끄트린다

차창밖 하늘에는 음력 7월 보름날의 둥글달이 두둥실 떠있다.

한참을 헐떡거린 다음에 버스는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하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이곳은 奧寒이 들만큼 추위를 느끼는데 愛馬의 쥔장인 박사장이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산행 준비를 한다.

성삼재의 유래

삼한시대에 진한 대군에 쫓기던 마한 왕이 전쟁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래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이 달궁이라 이름지어져 불렸다 한다.

그 당시 마한 왕은 달궁을 지키기 위하여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峙),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령재(黃嶺峙),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姓三峙)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동료산꾼들과 야심한 새벽에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 종주를 시작한다

성삼재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서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를 따라 오르는데

시원한 바람에다 하늘에는 구름속에 살짝 가려진 칠월 백중날 둥근달이 산꾼을 격려한다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17개월간 喜怒哀樂을 같이 동료산꾼들과 헤어짐을 아쉬워 하듯...  

다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지 계속해서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무넹기 고개(코재)에 다다른다

무넹기 고개(03:00)

무넹기 고개(코재)가나온다. 무넹기는 '물이넘쳐 마을로 들어온다' 라는 뜻을가진

"무너미"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데 그 가파름에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 코재 ' 라고 하기도 한다

 

지리산 남부 탐방소 김승완님의 고견에 의하면

" 코재 " 의 유래는 노고단을 얼굴 전체로 보면 코에 해당하는

부분의 위치에 있어서 코재라 불려진다고 한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코재 위에 눈썹 바위가 있고 무넹기를 전라도 방언으로 ' 데망생이

 '( 표준어: 이마 ) 라하니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코재라는 유래 보다 현재의 위치가 코에

해당한다는 유래가 신빙성이 더 있지 않나 싶다. (자료 인용)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화엄사 가는 길이 나오고 남서쪽으로는 갈 수 없는 종석대가 있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좁은 길을 따라 노고단을 향하는 빠른 길을 택한다

노고단 고개 (1,440m:03:15)

성삼재에서 3km의 거리를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30분정도 오르니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 입구의 노고할미가 야심한 새벽에 지리산에 오른 산꾼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곳에서 어젯밤 하루를 보낸 다른 산꾼들도 산행을 준비하는지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이 대피소는 1920년대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풍토병 치료를 위해 지었던 수양관 건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한여름에도 날씨가 서늘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노고단(老姑壇)

노고단이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사터를 말하며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라고 한다.

노()는 존칭의 의미이며, 고()는 마고를 뜻하기도 해서 마고할매를 위한 제사터라고한다

마고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신으로 그가 사는곳은 마고성이라고 한다.

원래 마고는 젊은여성이었으나 오랜 전설속의 여신이므로 마고할매라고 불린다

이곳에만 0.5km만 가면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인 노고봉이 나오는데 오늘은 그냥 패~~~스

노고단(老姑壇:1507m) - 2013년 8월 26일(지리 종주시 사진)

전북 남원군 산내면과 전남 구레군 토지면의 경계에 위치한 봉우리로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과 더불어 지리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이다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老姑)를 모시는 곳(壇)이라 하여 노고단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가을에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고, 신라 화랑들이 이 곳을 수련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 제사터는 원래 천왕봉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노고단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서 서양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별장터였던

노고단은 6.25 당시에 빨치산 소탕 작전때에 불타버려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이곳 노고단은 지리 10경중 제2경인  노고운해(老姑雲海)가 단연 유명한 곳이다.

노고단의 구름바다는 지리산 남쪽 자락을 휘감고 도는 섬진강의 습한 기온 때문에

다른 곳보다 빈도가 높다고 하며 노고단 주변이 고요한 구름바다에 잠길때면 봉두산과

조계산 등 남녁의 산들은 마치 섬처럼 솟아다도해 같은 선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화엄사 계곡의 끝머리 바위턱에 앉아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며 계곡을 덮고, 능선을
휘감아 돌다 저 들녁까지 이르러 온통 하얀 솜이불을 깔아놓은듯 펼쳐지는 운무를 바라
보고 있노라면, 잠시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다.
노고단은 지리산 종주코스의 출발점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임걸령 - 반야봉 - 토끼
봉 - 벽소령 - 세석평전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 능선길은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밟아보고 싶어하는 영원한 동경의 코스다

지리산 종주 시발점인 노고단 고개(03:30)

이곳에서 동료산꾼들을 체크하고 15분간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다

돼지령 헬기장(04:05)

지리능선중에서 가장 편한 길이기도 하지만 어둠속에서도 발걸음은 빨라진다

헬기장을 지나지만 아직도 어둠속이다...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돼지령(04:15)

피아골 삼거리(04:23)

지리산의 단풍 산행코스로 유명한 피아골은 6.25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물들은

계곡이라해서 피아골로 불린다고 알려져있으나  피아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심었던 골짜기라,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피는

보이지않고, 빨치산과 토벌대가 흘린 수많은 피가 먼저 생각나는건 아마도 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피아골이란 유래는 옛날 속세를 버리고 이곳의 한적한 仙景을 찾은 仙客들이 이곳에서 오고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을  그 후 변음이 되어 피아골로 불렀단다  

앞사람의 등산화만 보고 부지런히 가는데 넓은 공터가 나온다... 아마도 돼지평전인 모양이다

돼지평전(04:30)

멧돼지가 종종 출몰하기때문에 '돼지평전'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멧돼지가 좋아하는 원추리 뿌리며 둥글레 뿌리가 많다고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등산로에 "멧돼지 출몰 조심" 이라는 안내판도 서있다

임걸령(林傑嶺:05:30)

조선 선조때의 좀도둑인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그가 활동한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이곳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임걸령 약수물

산꾼들에겐 지리산이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식수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오늘같은 거리엔 산꾼들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식수가 최소한 6L가

필요하지만 난 오늘 500ml짜리 수통 하나만 달랑 가지고 왔다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에서 물 한바가지 들이 마시고

수통에 물을 채운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나는데 노고단에서 이곳까지는

고도차가 없는 평지에 가까운 길을 걸어왔지만 이곳부터는 고도를 높이기

위해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올라서니 처음으로 이마에서 땀이 솟기 시작한다

노루목 (1498m:05:05)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한다. 또 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

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반야봉가는 갈림길이다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일부러 가기에는 그리 쉽지않는 봉우리이다.

대부분의 동료산꾼들은 어두운데 뭐 볼거 있다고 하면서 삼도봉으로 가버리고

동료산꾼 5명만이 나와 함께 반야봉으로 향한다

반야봉 삼거리(05:15)

노루목에서 반야봉쪽으로 200여m 진행을 하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두고 스틱만 가진 채 반야봉으로 올라간다.

주위에 짙은 안개가 가득하다. 그리고 상당히 고도를 높혀간다.

반야봉(般若峰1,734m:05:30)

반야봉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 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야봉은 대부분의 봉우리가 지리주릉에 있는 것과 달리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고단 방향에서는 노루목에서 곧바로 오르면 되고, 반대 방향인 삼도봉에서는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등산로는 여러 곳 있었는데, 주릉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입통제 구간이다.

달궁 쟁기소에서 시작하는 8km의 길은 원시림에 파묻힌 부드러운 길이고,

심원마을에서 시작하는 9km의 길은 노고단 방면으로 펼쳐지는 부챗살 모양의 전망이 일품이고,

반선마을에서 심마니능선을 경유하는 코스는 지리주릉, 서북능선, 삼정능선이 모두 조망된다.

이 외에도 심원마을에서 대소골, 반선마을에서 뱀사골-이끼폭포를 경유해서 올라오는 코스도

있는데 이 코스 또한 통제 되었다.

반야봉 정상에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정상 아래에 있는 불무장등(일명: 날라리봉)과 노고봉 정상을 휘감고 있는 운해가

지리산의 신비로움을 자아내게 하는데  백번을 다시 생각해도 반야봉으로 잘왔다고 생각한다

주위의 짙은 안개가 반야봉의 仙景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긴 지리산 진면목을 보려면 3대가 福을 쌓아야 한다고 했거늘

나처럼 제대로 복을 쌓지 않고 무임승차로 지리산의 선경을 감상할 순 없겠지.

반야봉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지리산만의 풍요로움과 고고함과 풍겨주는 반야봉 주변의 구상나무, 분비나무,

신갈나무 등 원수림 수해(樹海) 이다.반야봉 일대는 광양 백운산과 함께 서울대학교 학습림이기도 한 지역이다

산오이풀은 오이향 냄새가 난다고 해서 산오이풀이라고 불리는 이 꽃은 지리산과 설악산 등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다... 이곳 반야봉 일대는 야생화 천국이다

금강초롱, 마타리, 등골나무, 고들빼기, 원추리,동자꽃,꿩의다리 등 조금 이른 시기에 핀 쑥부쟁이도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와 철계단을 지나니 우측 아래로 고사목은 죽어서도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智異 10景중 제3경인 老姑雲海의 모습

지리산은 1967년 12월 국내최초의국립공원으로지정 전북과 전남, 경남 등의

5개 시,군, 15개읍. 면에,속하는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산의 총면적은 약472㎢이고 이는 계룡산 국립공원의 7배, 

제주도 면적의4/1이자 서울시 면적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에서 유래된것으로 이는 수많은 隱者들이 이 산에 숨어 도를 닦으며 정진 해왔음을 말해준다.

지리산은 옛날에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고도 하였고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 오악이라 하였는 데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젠 날은 완전히 밝아오고 반야봉 아래 피아골과 목통골의 경계...아니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일명:날나리봉)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 이름이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철이른 쑥부쟁이

삼도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불무장등봉

구례의 피아골과 하동 칠불암 안의 목통골의 경계를 가르는 불무장등봉은

그야말로 백미로 보인다. 반야봉에서 보는 안타까움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지리산의 아흔아홉골의 골짜기가 한 눈에 보이니 가슴이 띄기 시작한다.

황홀경에 취해 다시한번 바라보는 노고운해

베낭을 벗어둔 반야봉 갈림길에서 되돌아오니 천리마님,오늘 처음만난 분과

배왕초는 어느새 삼도봉으로 도망을 가버리고 단현님과 주원아빠만 나를 기다린다

단현님께서 주신 사과 한조각을 먹고 다시 삼도봉으로 향한다

다시 대간 합류길(06:00)

반야봉을 2km의 거리를 갔다오는데 55분이 소요되었다.

이제 반야봉을 거치지 않고 가버린 동료산꾼들을 따라가야 하는데 무릎 통증 때문에

걱정이 선다.  같이 동행한 3명은 벌써 도망가버리고 최연장자인 단현님과 최연소자인

주원아빠가 같이 동행해주어 외롭지 않게 마지막 대간길을 이어간다  

등로가 가운데 무명묘지 한기가 있다

관리가 그래도 괜찮은 걸 보니 후손들이 돌보는 모양이다

묘지를 지나 편안한 등로를 잠시 걷다가 오르막을 오르니 삼도봉이 나온다

우측으로 날나리봉 너머로 또다시 노고운해가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시야에 들어온다

노고운해

삼도봉(三道峰:1499m:06:05)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목통골의 모습(경남 하동군 화개면 소재)

삼도봉에서 인증샷만 남기고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먼저간 동료들과 1시간 가량의 갭을

어떻게 따라갈까 걱정이 앞서지만... 부지런히 따라 갈 수 밖에...

삼도봉 암릉지나 약간 내리막을 만나면서 화개재까지 544 계단을 걷는다

화개재로 이어지는 544 데크목 계단

헬기장과 데크목 광장이 설치되어 있는 화개재의 모습

화개재(1,316m:06:25)

화개재는 먼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한다.

먼 옛날 산내장터애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너무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서려있다.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이 곳 능선안부가 화개재이다.

화개재는 남원군 산내면과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속하고 뱀사골 정상인데

예로부터 양측 주민과 상인들이 물물교역을 위해 넘나들던 길목이다.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긴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처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계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반선으로 가는 뱀사골 계곡이 나온다.

뱀사골 가는길

뱀사골의 유래는 300여 년 전 송림사에서는 해마다 칠월칠석날 법력이 높은 승려 한 사람을 뽑아

선인대에서 불공을 드리게 했다.매년 열리는 행사를 이상하게 생각한 고승이 그 해에 뽑힌 승려의

옷자락에 독을 묻혀 올려 보냈다.

 

다음날 선인대에 가보니 이무기가 승려를 삼키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송림사에서 해마다 승려 한 명을 이무기의 제물로 바쳤던 것.

그 후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됐다.

 

뱀사골 들머리 마을을 ‘반선(半仙·절반의 신선)’이라 지은 것은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요룡대에서 이무기가 용이 돼 하늘로 오르다 떨어져 파였다는 탁용소를 지나 금포교까지는

뱀사골에서 가장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한다. 여기서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의 뱀소, 바위

틈 물길이 병을 닮은 병소, 병풍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는 병풍소, 고승의 영험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재승대,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어오다 빠졌다는 간장소를

거치면 뱀사골 정상인 화개재다.

흰까실 쑥부쟁이

동자꽃... 동자승이 아직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이곳 지리산 등로에는 동자승 군락지가 참으로 많이 보인다

토끼봉(卯峰:1534m:06:50)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 그러는게 아니고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좌측으로 반야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토끼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겨울에 한 번 불을 때면 3개월간 溫氣가 돈다는 ‘亞’자 방으로 유명한 칠불사가 나온다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
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우아할 뿐 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쉬어가기 알맞은 고봉이다. 정상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토끼봉을 지나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하던 샘인 총각샘은

등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 발견한 샘인데
장터목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인 이름이라 해서 노총각 2명이 고심 끝에

총각샘이라 이름 붙였다 하는 샘은 결국 보지못하고 선두팀에게 민페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편한 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토끼봉 헬기장

헬기장을 지나 오르막을 치고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배가 너무 고파온다

어차피 먼저 간 동료들은 만나기가 힘들것 같아 동행한 단현님과 주원아빠랑 등로 옆

공터에서 아침상을 펼치고 식사를 하면서 맥주 한켠을 나눠 마신뒤 다시 길을 나선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가기 위해 오르막을 오르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보이는 천왕봉

정말 환상 그 자체이다... 왜 산꾼들이 지리산에 이토록 미치는지 알 것만 같다

박새어린잎

뒤돌아보니 조금전에 갔다온 반야봉이 아쉬운듯 우리를 바라본다

마치 떠나버린 반야도사를 무작정 기다리는 마고할미처럼...

명선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가야할 피의 능선

명선봉(1,586m)은 연하천 대피소 뒤의 봉우리로 산꾼들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있는 명선봉~삼각봉~형제봉~벽소령 능선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 국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어서 '피의 능선'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선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빗점골이라는 골짜기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알려졌다

토끼봉을 지나서 연하천 가는 길은 예전에 비해서 등로를 상당히

많이 정리를 해놔서 인위적인 냄새가 많이나긴 하지만 걷기는 상당히 편하다.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는데 지리산의 특성상 돌을 많이 밟다보니 오른쪽 관절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가야할  거리가 너무 많이 남았는데도 포기하고픈 맘이다

연하천(煙霞泉) 대피소(08:15)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여 연하천(烟霞泉) 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례에 있는 연하반 산악회(현 지리산 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다.

‘구름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연하천의 샘물은 사계절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지역 자체가

고산지대임에도 늪지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항시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연하천 대피소 앞에 걸려있는 文句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글 이원규, 노래 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니 반야봉에서 먼저 도망간 배왕초님이 우릴 기다린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과일로 원기를 보충하고 수통에 식수를 보충한다

연하천 대피소 이정표

다시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향하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고 산행하기엔 최적이다

평지에 가까운 등로를 따라서 빠르게 걷는다

금강초롱

음정마을 갈림길(08:35)

음정(陰丁)마을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속하는 마을로 양정,하정마을과 함께

삼정리로 들어가며 마을의 위치가 음지에 취락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음지정제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음지말 남쪽 골짜기를 비내리골이라 하는데 옛날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나뭇꾼과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남편과 아들이 하도 원통하여  눈물을 흘려서 비내리골

만들어졌으며 그 자리에서 바위로 변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벽소력 정상에는

부자(父子)바위가 서 있다고 한다

음정마을 갈림길에는 1년전에 없었던 초소가 하나 생겼는데

국공파들이 산꾼들을 또 얼마나 겁박을 할까

삼각고지(三角高地:1,462m:08:40)

함양군 마천면 심정마을에서 연하천으로 오르는 직등 코스로 6.25 동란 당시

군사 요충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봉우리로서 근처에는 그 당시 벙커의

흔적과 총알을 맞은 나무도 보이고 당시 나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 현상이

사살 당하기 직전까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밋밋한 능선에 지리 01-24 이정목이 서있고 좌측 능선은 삼정산 가는 길이기도 하다

뒤돌아서 본 오르지 못한 명선봉의 모습

협곡같은 암릉사이 계단을 지나니...

 

가야할 형제봉 정상이 보인다

잠시동안 암릉구간을 빡세게 우회하여 오른 다음 내려서니... 형제봉이 나온다

형제봉(兄弟峰:1,452m:09:05)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으로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이곳 달빛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벽소령의 명월보다 못지않다.
태고의 정적과 고요 속에 구상나무 숲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고, 창백한 달빛과 은하수가 아름답다.

형제바위 앞에 서있는 이정목

지나온 형제봉의 모습

늘 인자하면서 엄하셨던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한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을 여자의 산에 비유를 하곤한다.

찌들고 지친 중생들을 늘 아무런 조건도 없이 보듬어 주는 산

해발 1700고지에도 풍부한 물을 제공하는 산!

난 지리산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건... 너무 크고 방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곤 하지만 그때마다 힘든 범여를 보듬어 주는 울 엄니같은 산

 

울 엄니 돌아가신지가 올해가 40년 나에게는 늘 엄하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울 엄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나도 이제 출가할 나이가 다 된

내 새끼를 보니 울 엄니를 이해할 것만 같다. 오늘따라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형제봉을 지나 급한 내림길로 들어섰다가 오르니 오늘에

가장 전망이 좋은 전망암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이다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울 엄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하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같은 산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늘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여유로움

언제든지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안아주는 여유로움을 가진 산

그런 지리산은 옛날 신선이 내려와서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중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의 뜻이라는 지리산(智異山),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내려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란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소(沼)를 품은 산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1967.12.29)으로 지정되었고 쌍계사와 화엄사, 실상사

대원사 등 수많은 고찰들은 품은 산,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이데오르기의 산물로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군 유격대의 근거지가 되어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이데올르기의 제물로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의 영혼을 감싸안은 슬픈 산이기도 하다

같이 동행한 배왕초님과 주원아빠

마지막 산행에 같이 동행하여 정말 해피했습니다

 

오늘 산행코스중에 최고의 조망권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오늘의 종착지인 천왕봉이 운해에 휩싸여 신비한

모습을 연출하고 제석봉과 영신봉, 칠선봉,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암 바로 아래로는 해방이후의 좌.우 이념에 휘말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아무 말이없는 지리산 능선의 삼태골과 절골, 대성동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남해바다가 보이며 바다너머로는 사천 와룡산, 그리고 남서쪽으론 광양 백운산이 보인다  

잠시 뒤돌아보니 형제봉이 짙은 안개에 휩싸여 버린다

산이높고 골이 깊은 탓인지 날씨 또한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대성동골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6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지리산의 너무나 멋진 仙景에 잠시동안 푹 빠졌다가 다시 벽소령으로 향한다

오르막 내리막을 왔다리 갔다리 로프로 암릉구간을 지나고 또다시 암릉구간을

지난 다음 꽤나 시간이 걸린 다음에야 벽소령에 도착을 한다

 벽소령(碧宵嶺:09:50)

벽소령(碧宵嶺) 벽소령은 지리산 10경중 제4경으로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가 높고 푸른 산릉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시인 고은선생은  "어둑어둑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찬탄하였다.

벽소령 정상 이정목

벽소령 산장에는 예전에 없던 통제시설이 참으로 많이 생겼다

그리고 또 뭔 공사를 하려는지 대피소 주위에는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많은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도 잠깐 쉬면서 과일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얼른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길을 나선다... 누가 대신 걸어줄

것도 아니기에 비를 맞으며 걷는다. 

아예 레인코트를 꺼내지도 않고 비를 맞으며 걷는데 어차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기는 마찬가지...이 정도 비는 맞으며 걷는게 퇴악볕보다는 낫다 

대성동, 의신길 가는 길
옛 선비들의 힘든 여정이 녹아있는 대성동을 오르는 이 코스는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이태 남부군)..

 60여년 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초들의 영혼은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들이 이 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펌글)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가는 구간은 초반 20여분은 그냥 임도길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도차가 없이 편안하게 걷는다.

우측으로 빗점골 곡과 대성동, 의신마을이 보이고 백운산과 좆비산,

박경리 여사의 소설 土地의 무대가 되었던 하동 악양들도 보이는

곳이건만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서 밀려오는 운해로 인해 오리무중이 되버렸다

낙석을 조심하라는 팻말이 붙은 지역을 지나고...

임도 끝지점에 넓은 공터가 나오고...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넓은 공터에 서있는 이정목

숲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다시 넓은 공터를 지난 다음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산행을 시작한 지 9시간이 다되어 가니 이젠 산행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거기다가 등로가 편하다보니 졸음은 쏟아지고... 덕평봉으로 오르는 길에

접어드니 빗방울은 그치기 시작하는데 아직까지 노루목에서 헤어진

동료들을 따라잡지 못했기에 걸음을 멈출수가 없다.

이정목을 지나고 암릉구간 고개를 지나는데스마트폰에 깔아논 앱

트랭글에서 이곳이 덕평봉이라 알려준다.

덕평봉(德平峰:1,522m:10:40)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상덕평 마을위에 있는 봉우리로 아마 지명은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이곳 역시 지나온 명선봉과 마찬가지로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여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선비샘으로 향하게끔 되어 있다

선비샘 가기 직전에 만난 이정표

선비샘(10:50)

옛날 이 샘터 아래의 상덕평에 살았던 노인이 화전민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일생을 후회하며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양반으로 대접 받기를 원했다.

이것이 한이 되었던 노인은 죽기전에 덕평봉 아래지금의 샘터에다 자신의 묘를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훗날 이곳을 지나던 양반네들이 물을 먹기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그 결과 샘터위에

할아버지 묘에 절을 모양새가 되어 노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동네사람들은 덕평봉 아래에 있는 샘터의 이름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리산의 맛있는 샘물이라면 이곳 선비샘과 임걸령샘, 참샘이라고 한다

반야봉을 갔다오는 바람에 2km의 거리를 선두와 동행하기 위해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덕평봉에서 선비샘으로 내려오는데 산꾼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설마 우리 일행은 아니겠지 하는 맘에 기대도 안하고 내려왔는데 동료산꾼들이 보인다

너무나 반갑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이런 의리라는건 전당포에 잡혔는지...

이곳에서 소시지에 소주 한잔을 마시고 수통에 물을 채운 다음에 세석으로 향한다

아직까지 세석까지 가는길은 멀기만 하다... 천왕봉도 아니고...

어차피 피하지 못할거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은 이 길... 무쏘의 뿔처럼 묵묵히 앞만보고 걷는다

망바위(11:20)

망바위에 올라서니 오늘은 一望無際가 아닌 五里霧中이다.

짙은  운해가 지리능선 전체를 휘감아버려 천왕봉과 중봉은 커녕

바로 앞에 있는 칠선봉도 보이지 않으니 망바위란 지명이 민망스럽기만 하다

망바위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망바위에서 잠시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잠시 편한 길을 걷다가 오르막을 오른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하여 마치 수석 전시장같은 암릉구간을 지나니 칠선봉이 나온다

칠선봉(七仙峰:1,558m:11:35)

일곱개의 바위가 기묘한 암봉으로 서 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천상에서 내려온 칠선녀가 한자리에서 노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칠선봉에서 영신봉으로 향하는 구간은 마치 설악산을 걷는 기분같다

멋진 기암괴석들이 고사목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산수국

넘어진 나무들도 예술품처럼 보인다

앙증맞은 동자꽃

환상 그 자체다

내 두 다리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어찌 저런 멋진 仙景을 감상할 수 있으랴...

멋진 암릉을 우회하니 이정목이 나오고 이윽고 급경사 오르막의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7분동안 숨을 헐떡거리며 데크목 계단의 급경사를 오르니...

멋진 조망을 자랑하는 암릉구간이 나오건만 짙은 안개로 인해 전망은 꽝이다

너무나 힘이들어 다리가 풀려버리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동료산꾼들과 휴식을

취하면서 하늘마음님이 가져온 소주에다가 맥주를 말아서 한잔을 마시니 조금은 낫다

꽤나 많은 휴식 시간을 가진 다음에 세석 대피소로 향한다.

영신봉으로 향하는 길에 발을 약간 헛디디면서 넘어지는데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힌다

참으로 아파도 너무 아프지만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억지로 참고 세석으로 향한다 

영신봉(靈神峰:1,651m:12:30)

신을 맞이하는 뜻이라는 봉우리로 지리산 주능선에 있는 봉우리중에

가장 영험한 기운이 모였다해서 명명된 봉우리로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대에는 지리산 10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영신봉의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세개골 상단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좌고대와 창불대, 가섭상이라는 바위가 있다.

신 동국여지승람은 영신사 좌고대에 올라 3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을 이룬다고 하였다.

영신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세석평전 아래 음양수 아래 대성동의

큰세개골 위가 영신사 터라고 한다.

낙남정맥 종산제

낙남정맥이란?

백두대간이 백두산 설악산으로 줄기차게 뻗어내리다 그 종착지인 지리산 천왕봉 가기전 세석평전을 품고있는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쳐 내려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을 바라보는 바위 봉우리인 삼신봉에서 청학동 안부를

거쳐 삼신봉 보다 더 좋은 전망을 선사하는 외삼신봉과 묵계치 고운재를 지나 옥산까지의 산줄기는 서쪽으로

섬진강으로 물길을 대주고 있으며 이후 산줄기를 짤라내고 인위적으로 진양호 물이 사천만으로 흘러들게 만든

거대한 강 가화강를 지나 백운산, 대곡산, 무량산, 여항산, 서북산, 광려산, 대산 마산의 진산인 무학산, 천주산,

창원의 진산인 봉림산, 대암산, 용제봉, 김해의 신어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인 김해시 매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 줄기를 낙동강에 담그는 221키로의 산줄기로써 옥산이후 줄기차게 경상남도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분계하며

북쪽으로는 모든 물이 남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과 만나며 남쪽으로는 바닷가 개울을 적셔주고 있다

 

지리산 구간을 제외하면 800미터 이하의 낮은 산등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가화강 부근의 산줄기들은 200미터

내외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과수원 밭등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내륙과 해안의 특이한 기후 분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산줄기이다

여지편람에는 낙남정간으로 표시되어 있어 항간에 종주하는 분들이 낙남정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찍이 삼한시대를 전후하여 이 산줄기를 끼고 변한 12국 또는 가야 6국이 결성되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다.

수로왕이 서기 42년 가락국을 건설하면서 약 491년간 가야국으로 통합하여 신라에 항복할 때까지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남긴 역사의 터전이기도 하다.

 

낙남정맥 졸업식(2010.08.22)

대피소 가는길에서 바라본 세석평전과 촛대봉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제공을 한 그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연진(蓮眞) 낭자의 애절한 사랑이 그리도 서러웠단 말인가

여름에 핀 불쟁이의 딸의 쑥부쟁이도 애처롭게만 보인다... 동병상련인가?

새석대피소 가는길 좌측에 예전에 보이지 않던  풍력발전기도 보인다

우측 대피소로 내려선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세석 대피소(12:40)

지리산에서 가장 큰 대피소답게 산꾼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한다

이곳에서 동료산꾼 천리마님, 깔끄막님, 마린님 부부와 함께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 오면서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오랜 산행 경험상 그칠 비는 아닌것

같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전자장비들은 비에 젖지않게 한 다음에 천왕봉으로 향한다

대피소를 출발하는데 산꾼 한명이 나에게 ‘범여님 안녕하세요’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안면은 있는데 누군가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천왕봉으로 향한다... 죄송합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는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부지런히 걷는 수 밖에...

세석대피소의 모습

세석평전(細石平田)

잔돌이 많아 평야와 같다하여 잔돌평전이라고도 부르는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공원으로 그 주위가 12km나 된다고 하며

상,중,하 식물분포가 구분되고 상층은 초생종류인 지보초, 좁쌀풀, 산새풀 등이

군락을 이루고 중층은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관목지대이고 하층은 구상나무를

비롯한 상록수와 혼유림을 이루고 있다

촛대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세석평전과 세석 대피소

세석평전 습지

촛대봉 갈림길

세석평전을 지나 능선에 오르니 촛대봉 갈림길이 나온다이젠 비가 폭우성으로 변해 버렸다...

우의를 입지 않았으니 범여의 모습은 완전히 새앙쥐꼴이다...

60이 다된 나이에 뭔짓거리여 그래도 갈곳은 다 가봐야지 깔끄막님과 함께 촛대봉으로 오른다

촛대봉(燭臺峰:1,703m:13:20)

음양수 전설의 주인공인 연진낭자가 낮에는 세석평전의 철쭉밭을 가꾸고,

밤에는 죄를 사하기위해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올리던 장소라하여 촛대봉이란 이름이 붙었다.

 

훗날 연진낭자가 바위로 변했는데 그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 촛대봉에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삼라만상을 이루고있다.

세석평전에서 올려다 본 촛대봉은 그리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지리산 주능선 종주에서

두번째로 어려운 오르막길이고, 지리산 종주에서 맨 처음 만나는 1700m급 높이를 가진 봉우리이다.

촛대봉 이정표

촛대봉에서 장터목 가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빗줄기는 자꾸만 더 강해지는데 급경사를 지나서 편안한 길을 다시 걷는다

전망이 아주 뛰어난 암릉구간에 오르나 바위가 비에 젖어 엄청나게 미끄러우니

한발한발 내딛기가 엄청나게 힘이들고 우의를 안 입은 탓에다 비가 너무오니

고어텍스 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간다

지리산의 秘景은 환상적이지만 빗줄기는 점점 새지고...

삼신봉(三神峰:14:05)

연하봉 오르는 길은 비단길처럼은 편안하다

 

연하봉(煙霞峰:1,730m:14:15)

연하봉(煙霞峰)의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극히 사랑함을 뜻하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연하선경은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새벽 여명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며 고사목이 숲을 이루고

원시림이 가득하여 연하봉 일대의 비경을 지리10경중에 제5경인 연하선경(煙霞仙京)이라 부른다

 

연하선경(煙霞仙京)의 멋진 암릉들... 비만 오지 않았으면 더욱 더 멋질텐데

아무래도 범여의 德이 부족한 모양이다... 빗길에 계속해서 내리막을 걷는다.

등로에 물이차여 걷기도 불편하거니와 시간도 자꾸만 지체된다

장터목(14:30)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교환과 물건을

사고팔던 곳이라 장터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터목에 있는  산장은 1971년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리산 산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1986년 80명, 1997년에는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자연보호와 탐방객의 편의및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운용되고 있다

대피소에서 중산리방향으로 20m가량 내려가면 산희샘(장터목샘)이란 식수가 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선두팀들과 만나지만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반갑다는 느낌은 전혀없다

대피소를 들어가지도 않고 제석봉가는 계단에 앉아 물한모금 마시고 급경사로 오른다

산행을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나고 거기다가 계속해서 비를 맞은탓에 체력이 소진되어

한계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장터목에서 제석봉 오르는 600m가 6km가 되는것 같다

다행이라면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다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인재에 의한 고사목이라고 한다.

즉 자유당 말기에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사람의 삼촌이란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봉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론이 악화되고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흔적을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렀단다.

제석봉(帝釋峰:1,806m:15:00)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천왕봉(天王峰:1,915m)과 중봉(中峰: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로

봉우리 근처에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고, 그 옆에 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제석봉 일대 약 33의 완만한 비탈은 고사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나무 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이어지는 주 능선은 25.5km에 이르며 이 산의 둘레는 320km에 달한다. 

이 넓은 터에 해발 15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동쪽의 으뜸은

천왕봉 (1915m)이고 서쪽의 으뜸은 반야봉과(1732m) 노고단(1507m)이다

이 세 봉우리를 지리산의 3대 주봉이라 부른다.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능선을따라 서쪽으로이동하면  제석봉(1806m),

연하봉(1730m), 촛대봉(1703m), 영신봉(1651m), 칠선봉(1576m), 덕평봉(1522m), 명선봉(158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만복대(1433m), 고리봉(1304m), 바래봉(1165m)이

있으며 천왕봉의 동쪽에는 중봉(1875m), 하봉(1781m), 써리봉(1640m), 웅석봉(1099m)이있다.

 

 이 가운데 천왕봉에서 노고단사이의 산행을 종주산행이라 말하며,동쪽 끝의 웅석봉에서 서쪽끝의

바래봉까지의 산행을 지리산 극종주 산행이라 부른다. 

지리산에는 또한 20여개의 긴 계곡들이 있다.  동쪽 천왕봉에는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이 있으며 서쪽 반야봉에는 피아골,뱀사골, 심원계곡이있는데

어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저마다의 매력으로 넘친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이 산은 애초에 넓은 바다로 속했으나 모래등이 퇴적된 뒤

선캄브리아기와 고생대를 거치면서 육지와 호수 바다로 번갈아 바뀌었다가, 중생대에 발생한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우리나라 전지역이 육지로 솟았을 때 지리산이 가장 높이 우뚝 솟았다고 한다.

제석봉을 지나 천왕봉가는 길에 또다시 빗줄기는 굵어진다 

通天門이라... 철계단으로 되어있는 암릉문으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암릉에 ‘通天門’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통천문(通天門:15:25)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결국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이 문을 지나  하늘의 임금이 살고 있다는 천왕봉 이라는 하늘나라가 있다면

이럴것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스럽고 아름다운 곳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오늘은 이곳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워서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간다.

 

시인 고은님은 통천문을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했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니 우리 인간들이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통천문의 모습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

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山 208번지에 소재한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미터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 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찌를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 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天柱"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 조식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 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 치듯 흐르는 물보라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방장산(지리산)의 솔잎이 푸릇푸릇 다함이 없으니

만번 죽어 마땅한 신(臣)이

이것으로 여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에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사절하면서 남긴 말 中에서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으로 오르는 구간은 정말 힘이든

이렇게 힘이 들기에 더욱 더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다

천왕봉(天王峰:1,915m:15:45)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으며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

정상에는 1982년에 경상남도가 세운 높이 1.5m의 표지석이 서 있다.

함양 방면으로는 칠선계곡을 이루고, 산청 방면으로는 통신골·천왕골(상봉골)을 이루어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며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항상 구름에 싸여 있어 예로부터

3대에 걸쳐 선행을 쌓아야 이곳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며,

지리산 10경 가운데 제1경이 천왕일출일 만큼 해돋이가 아름답다. 정상에 1칸 크기의 돌담벽이 있고,

그 안의 너와집 사당에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빨치산에 의해 파손된 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고정상 아래에는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천왕샘이 있다.

5년 8개월에 거친 대장정

이 나라의 山河를 누비면서 걸어온 길 이제는 푹 쉬고싶다

천왕봉은 갑자기 또다시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사진 한장

찍는 사이에 야속하게도 동료산꾼들은 다들 가버린다

그래 내가 德이 없음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이신 천리마님과 단현님이 끝까지 기다리다

천리마님이 가져오신 인동주로 축하한다면서 권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

성취감의 눈물인지 회한의 눈물인지 나도 모르겠다... 이곳 천왕봉에서...

 

 

 

대한 산줄기 따라

계절마다 새로운 풍경의 숲의 놀이터에

발길이 닿으면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인이 되었지...

숱한 물음은 여러 빛깔의 느낌표를 남기고

빛나는 여정에 아름다운 마침표 하나...

방랑의 흔적들은 세포 곳곳에

숨결처럼 흐르리

 

 

不狂不及

미치지 않고서는 이루지 못한다

 

 

동료산꾼 시화님이 종주 기념하여 써 준  축하시

 

오늘 개인 사정으로 참석은 못했지만 나를 위해 멋진 프랑카드를 만들어준

원일님 넘넘 감사하고요... 시화님도... 世世生生 복받을 깁니다

비는 이제 폭우수준으로 쏟아지기 시작하고 가장 늦게 뼛속까지 스며드는 비를

맞으며 혼자서 법계사로 향하는데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영신봉에서

다친 무릎에 엄청난 고통의 통증이 시작된다... 그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반대편에서 밀려오는 먹구름은 점점 짙어지고 비줄기는 굵어지건만 속력을 낼 수가 없다

천왕샘(16:10)

지리산 천왕샘은 남강의 발원지로서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개선문(16:25)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으로 ‘開天門’이라고도 부르는 개선문은 서쪽 통천문과 더불어

천왕봉을 오르는 주요 관문으로 원래는 좌우에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있었으나

오른편 기둥이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고 한다.

예전에 없었던 앙증맞은  목장승

마지막에 안간힘을 다해 아픈 다리를 질질끌고 내려오니 오늘 처음오신

남.녀 두분도 걷지 못하고 자꾸만 뒤쳐진다... 오늘같은 날은 두 구간을

끊어서 마지막 구간은 축제분위기로 즐겼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15시간씩

걷고 난 다음에 파김치가 된 후에 뭔 흥이 나겠나...

나야 오늘 대간이 끝나면 이 산악회에서 산행할 일이 없겠지만...

그러고 보면 독고다이(나홀로 산행)가 확실히 최고인 것 같에

가다가 힘들고 배고면 먹고, 졸리면 자고, 이번에 못가면 다음에 가면 되고...

물처럼 바람처럼  여유작작 즐길것 다 즐기면서 말이다

법계사 뒤 암릉구간에 내려오니 맞은편 봉우리가 기가 질리게 만든다

아직도 법계사에서 중산리까지 4km를  더 걸어야 하다니...

이 다리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법계사 입구(16:55)

오늘이 불교의 5대 명절인 우란분절(칠월 백중)인데 법계사 적멸보궁에 들려

향이라도 하나 피워 예를 표하고 싶지만 시간도 너무 늦었고 옷이 너무 젖어

입구에서 적멸보궁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올리고 로타리산장으로 향한다

법계사 일주문(백두대간 북진길 때의 사진:2009,5,10)

 

법계사 연혁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발 1450m) 위치한 법계사(法界寺)는 신라 진흥왕 5년

(서기 544년)에 인도에서 건너오신 연기조사(緣起祖師)께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여 창건하셨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께서 중창하셨다.

그 후 임진왜란과 서기 1910년 한일합방때 또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무인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동란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간 초라한 초옥

으로 3층석탑을 지켜오다 불자와 신도님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3층 석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법계사 적멸보궁(寂滅寶宮) 편액(2014년1월1일 지리산 일출 산행 때 사진)

법계사 삼층석탑 (法界寺 三層石塔:보물 제473호)

이 탑은 법계사 유일의 문화재요 보물로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위치한 법계사

유일의 문화재요 거룩한 성보(聖寶)입니다.

『이 석탑은 법계사의 산신각 앞에 있는 높이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이형석탑으로 기단부는 자연암반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 몸돌을 얹었다. 자연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한 예는 신라 이래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하부 기단석을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다.

 

지붕돌은 두텁고 지붕주름은 각 층이 삼단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여지는 포탄형의 석재가 상륜부에 얹혀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과 만든 수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5m이다.

법계사는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설악산 봉정암 불뇌탑과 비슷함을 봅니다.

그리고 이 탑은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있다고 합니다.

일본이 쇠말뚝을 박고 절을 불태우면서도 사리탑을 그냥 놔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법계사 자료 인용)

 

로타리대피소(1,335m:17:05)

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으로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수용인원 60명이란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걸어서 중산리까지 걸어가기는 아무래도 이 다리로는

무리일 것 같아 어차피 이 구간은  대간길이 아닌 접속구간이라 의미도

없기에 4km 구간의 중산리 방향을 포기하고 좌측 순두류 방향으로 향한다

2.8km 지점까지 가면 중산리가는 버스를 탈 수 있기에...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다... 순두류에서 중산리가는 마지막 버스가 18:00이다

2.8km를  55분에... 정상적인 컨디션이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지만

오늘은 좀 무리일 것 같다... 더군더나 이곳은 국립공원 안이라 버스가 끊어지면

답이 안나오는  곳이라 일단은 시도해 보는 수 밖에...

카메라를 비롯해 거추장스러운 건 모두 베낭속에 집어넣고 달리기 시작한다

계곡물은 자꾸만 불어나고 불안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2km지점을 지나니 다행히 넓은 임도가 나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없는 힘도 생긴다고 하였던가

2.8km를 35분만에 내려왔다... 평지도 아닌 산길을..

순두류 버스 정류장(17:40)

비는  또다시 억수같이 쏟아지고 20분동안 버스를 기다린 끝에 중산리에 도착하여 식당버스로

대형버스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장 아래 계곡에서 알탕을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해단식을

하는데 다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중간에 빠져나와 휴식을 취한 다음에 밤 8시 30분에 서울로

출발하는데 대전을 지나다 버스가 펑크가 나면서 버스가 뒤뚱거린다

수원에서 내려온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