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참선
불교의 수행법 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린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참선은 앞서 공부해 온 참회나 발원 그리고 기도 등과는 차이점이 있다.
앞의 것들이 다분히 외부 지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참선은 철저히 내부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밖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 데 참선의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가장 불교다운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의거해 보건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만 법문을 듣고 각자 나무 밑이나 한가한 곳에가서
사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외부의 어떠한 신과 같은 대상을 향하여 복을 빌거나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바라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스스로의 지혜를 돌이키도록 하고, 자비심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가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참선은 가장 불교적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참회나 발원 혹은 기도 등도
결국은 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 내지는 적응단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참회를 통해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변화가 시작되었고, 기도를 통하여 강력한
변화를 체험하였다면, 이제 그 마음자리 자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비파사나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 보는 묵조선(默照禪) 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조계종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참선은 불교의 여러 수행법이 중국에 전해져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다.
이러한 참선수행법 이전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관법수행이라고 한다.
참선에 대해 정리하기에 앞서 먼저 이 관법수행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관법수행 _ 참선 이전의 수행법
수식관(數息觀)
고요히 사유하다 보면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한다.
어느 때는 찰나지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때문에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가 없다.
정말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날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이 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한다. 숨쉬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에 깊이 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쉴 때 마음의 긴장과 불안이 어느새 풀어진다.
이러한 긴장이완 효과뿐만 아니라 수식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끝에 둔다.
그리고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숨이 차다고 알며,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것을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다고 알며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안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날숨 모두 이와 같음을 안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안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고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이다.
부정관(不淨觀)
부정관(不淨觀)이란 말 그대로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이렇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옆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 마음을 집중한다.
또는 마음을 미간(眉間)에 둔다. 그 다음에는 앉은 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은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한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y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속에
왔다 갔다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씀씀이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어로 중국에서 한역을 하면서 삼매로 정리된 것이다.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흔히 독서에 몰입한 사람을 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말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2) 참선
참선(參禪)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자성자리를 밝히는 데 있다. ‘본마음.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하다.
이러한 청정무구심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 『금강경오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보스님의 게송이 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리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티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려질 리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 준다고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의 이지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참선의 자세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좌선의 자세를 연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선수행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 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종 가람의 입구에는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텅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 는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음알이를 쉰다고 하는데, 그러면 알음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 온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걸림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둘째, 앉는 자세는 먼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셋째,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넷째, 허리와 양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자세이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 된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해 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쉰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 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4)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한다.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이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일갈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 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5) 참선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점검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에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점차 남의 허물이 눈에 더욱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점검해 볼 여지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
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이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남편이나 직장 상사를 부처님이나 스님 대하듯이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아랫사람에게 겸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한 수행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격과 조건이 되는 이를 공경하기는 쉽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정한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이에게 공경심과 겸허함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결국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귀한 마음가짐으로서, 일상에서
선을 닦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한편 참선을 제대로 닦는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無爲)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선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복을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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