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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불교의 이해와 신행 - (16)

by 범여(梵如) 2015. 1. 16.

제4부 교리문답

[연기법(緣起法)]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으로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일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기(生起)와 소멸(消滅)의 법칙을 말한다.
 
즉 모든 현상은 무수한 인(因)과 연(緣)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성립되기에 독립ㆍ자존적인 존재는
없으며,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이다.
소위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 연하여 의식(意識)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쌓이고 모이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이 세상 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현상계의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이치이며
현상계의 근원적인 원리로서, 부처님은 다만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보편타당한 깨달음[等正覺]을
이루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 별해 연설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5온(五蘊)]
불교는 인간을 어떤 존재라고 파악하는가?
 
오온은 5음(五陰), 5중(五衆), 5취(五聚)라고도 하는데, 12처(十二處)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현실세계의
구조와 성질을 설명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관으로 일체 만유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다.
 
즉 이 몸뚱이는 물질 현상인 색(色)과 정신 현상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모아 쌓인 것, 화합하여 모인 것이라는 뜻이다.
5온설은 우리 육신은 인연에 의해 5온이 잠정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에 지나 지 않기 때문에 집착할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5온 그 자체가 진실한 ‘나’가 아니 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할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하여 5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5온은
중생에게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섯 가지 망상이라고도 불린다.
 
5온설은 단순히 우리들의 존재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그릇된 자아의 의식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말해진 것으로 후에 무아설(無我說)로 발전하여 간다.
 
[12처(十二處)]
불교는 현실 세계를 어떠한 입장에서 파악하는가?
구역(舊譯)에서는 12입(十二入)이라고도 하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六根)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六境)을 12처라고 한다.
부처님은 “모든 것은 눈과 빛, 귀와 소 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뜻과 법이라는 열두가지
속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어떤 존재도 안이비설신의(六根)의 인식 기관과 색성향미촉법(六境)
이라는 인식의 대상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전체인 일체의 모든 것이 전부 이 12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12처는 5온(五蘊)의 색온(色蘊)을 전개하여 5근 5경, 수상행식의 4온(四蘊)을 합하여 나타난
의 근ㆍ법경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에 의한 것일 뿐 실체가 없다는 무상과 무아의
불교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 12처설은 당시 바라문교가 범(梵)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 음에 반하여,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천 명,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인 6근이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 객체인 6경은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법인(三法印)]

불교에서는 현실 세계의 구조와 성질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교의 근본 교의로 인(印)은 인인증가(印認臧可)의 뜻이고, 법인(法印)이란 가르침의 깃발이란

의미로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법의 특성이라는 뜻이다.

삼법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일체개고인 (一切皆苦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을 말하기도 하고,
일체개고인 대신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대신하여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 하기도 한다.
즉 제행은 인연에 따라 나고 꺼지는 만유의 현상을 말하는데, 이러한 온갖 물(物)ㆍ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 변화하여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
즐거움과 괴로움도 아닌 모든 것까지도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법이란 물질적ㆍ정신적인 모든 현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내가 삼법인으로 일체법(一切法)을 인증(印臧)하는 것이니, 삼법인의 교의(敎義)에
맞는 것은 불법(佛法)이요, 이와 다른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하여 삼법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사성제(四聖諦)]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사성제에서 제(諦)란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실.진리라는 뜻이며, 사진제(四眞諦), 사제(四諦)라고도 한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설한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최초의 설법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하는데,
현실과 이상세계의 원인과 결과를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생의 생존하는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요, 모든 고통은 원인들이 모여서 일어난 다는 것이며, 중생이 직면하는 고통은 없앨 수 있다는 것이며,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 불교의 실천적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차례로 알게 되는 것이요, 한꺼번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의 증상을 정확히 진찰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고, 병이없는
건강한 상태란 어떤 것이며, 그런 건강에 이르려면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의료의 4단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도 한다.
사성제설은 선악의 근저에 있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 되는 이 가르침은
범속한 세간의 생사를 벗어나 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오음성고(五陰盛苦)]
무엇이 중생의 고통인가?
8고[八苦 :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4고와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의 하나로, 오음이란 곧 5온(五蘊)으로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이 모두 고통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이란 육신에 집착하는 것,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 지각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
의지에 집착하는 것, 의식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오음성고는 우리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치성해서 일어나는 고통을 말한다.
대개 물리적ㆍ심리적ㆍ정신 적 5종 요소로 형성되어 있는 생명 존재를 오음신(五陰身)이라 부른다.

[공(空)]
공사상은 우주의 실상인가, 허무주의인가?
공은 비어 있음, 무(無)ㆍ공적(空寂)ㆍ공정(空淨)이라고 번역한다.
허무나 멸무(滅無)와는 다른 실상(實相)의 의미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 불변하는 자성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아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 이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존재 를 5온ㆍ12처ㆍ18계 등으로 분석함으로써 아(我)의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과 연기 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 부파불교에 오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성실론에서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한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은 원시불교의 연기관과 부파불 교의 공관을 총합하여 일체제법이 공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 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을 설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
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 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 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인연에 따라 생겨지는 현상을 공이라 하고, 또한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하고,
또 이것을 중도라고 칭한다. 일찍이 하나의 현상도 인연에 따르지 않고 생한 것은 없으니, 이런 고로
일체 현상은 공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중관(中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편벽되고 삿된 미망을 여읜 법의 실리, 곧 절대 이성을 관함을 말한다.
삼론종에서는 제법이 불생불멸하며 무거무래(無去無來)한 것이라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하고,
천태종에서는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은 낱낱이 모두 절대(絶對)라고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한다.
중관학파는 인도의 대승불교를 지탱해 온 교학 체계에 있어서 유가행파와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상가는 용수와 그의 제자 아리야제바이다.
용수의 공사상은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모든 것은 공임을
자각하는 데서 그 방법을 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인 동시에 실천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주안 점을 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을 막론하고 먼저 자기에게 부정적으 로 대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런 부정적 대립자를 부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없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되고, 그 없다는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확인되 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있다는 그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공의 이치는 상호간에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는 한쪽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또한 중도라고
한다.
따라서 중관 사상은 대상을 인식할 때 집착하는 마음을 가 리키는 편견과 사견, 즉 분별심을 세척하여
올바른 진리관을 정립해 주는 사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중도 라고 할 수 있다.
용수의 학파를 중관학파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저서인 『중론』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고,
『중론』외에 『십이문론』과 제자인 데바의 저서 『백론』을 합해 삼론이라 하여 중국 삼론종에서는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팔부중도(八不中道)]
도의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팔불중관(八不中觀), 팔불정관(八不正觀), 무애중도(無碍中道), 무득중도(無得中道)라고도 한다.
즉 중생들은 일체 존재를 잘못 알고 생(生)ㆍ멸(滅)ㆍ거(去)ㆍ래(來)ㆍ일(一)ㆍ이(異)ㆍ단(斷)ㆍ상(常)이라는
그릇된 고집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일체 현상이 모두 자성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 ㆍ
불멸ㆍ불거ㆍ불래ㆍ불일ㆍ불이ㆍ부단ㆍ불상의 팔불(八不)의 정관을 닦는 것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 으로 살펴보면,
첫째,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법의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 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생멸에 대한 착각과 집착하는 것을 고쳐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불상부단(不常不斷)이란 모든 법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데, 영원히 상주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한 것이다.
셋째, 불이불이(不一不異)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넷째, 불거불래(不去不來)는 일체 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하여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한 것이다.
이 같은 팔불의 중관 사상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기치로 한 것이니, 팔불로써 집착을 타파하여 공임을 보인것이
파사요, 그리하여 중도를 드러낸 것이 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구부정(四句否定)]
부정을 반복하는 중관의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물에 관해서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몇 번이고 부정을 거듭하여 유무(有無)의 견해를 명백하게
해주는 변증법적인 문답법을 말하는데, 사구분별(四句分別), 또는 사구백비(四句百非)라고도 한다.
중관파에 서는 통상 사구분별의 각 구는 모두 부정된다.
사구는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 긍정종합(肯定綜合), 부정종합(否定綜合)을 말한다.
즉 유(有)와 공(空)으로 만유 제법을 판정할 때에, 제1구의 유(有)는 정립, 제2구의 공(空)은 반정립,
제3구의 역유역무(亦有亦無)는 긍정 종합, 제4구의 비유비공(非有非空) 은 부정 종합이며,
이러한 사구를 몇 번이고 부정하는 것을 백비(百非)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함 경전에 서는 ‘세계는 상주한다. 무상이다. 상주 또는 무상이다.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등의 질문에 대해 결코 답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사구의 어느 것이든 특정한 견해를 지니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부처님은 당시 외도들의 질문 중 세상의 상주와 무상에 관한 사구, 세계의 유한과 무한에 관한
사구및 혼과 신체가 동일한가, 다른가, 등 14개항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은 일은 잘 알 려져 있다[十四無記].
중론에서는 ‘일체는 진실이다. 혹은 비진실이다. 진실이고 비진실이다. 비진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이를 교육적 단계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4연(四緣)]
일체 현상이 생기는 과정은 무엇인가?
4연은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그 연(緣)을 넷으로 나눈 것,
즉 인연(因緣), 등 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인연은 일체의 현상이 직접적ㆍ내적인 원 인인 인(因)과 간접적ㆍ외적인 원인인 연(緣)이
화합하여 생멸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며, 등무간연은 심 (心)ㆍ심소(心所)가 전념(前念)ㆍ
후념(後念)으로 옮아 변할 때에, 전념이 없어진 마음이 길을 열어 뒤에 생기는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소연연은 소연, 즉 심식의 대상이 우리의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연(緣)이 된다는 것이며,
증상연은 유력증상연과 무력증상연이 있는데, 전자는 다른 현 상이 생기는 데 힘을 주는 연(緣)이요,
후자는 다른 현상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연(緣)을 말한다.
[이제설(二諦說)]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는 어떻게 다른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말한다. 진제란 승의제(勝義諦), 제일의제(帝一義諦)라고도 하여
출세간적 진리를 말하며, 속제란 세속제(世俗諦), 세제(世諦)라 하여 세간의 진리를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으나 쉽게 말해 속제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과(果)이며,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되어 있으며 생멸은 공의 상태이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진제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여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
원시 경전에서는 승의(勝義)란 궁극적 진실인 열반에 해당하고, 세속이란 언어 표현 혹은 언어 습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여졌지만, 반야경에서는 5온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모든 교설은 일체법의 공
성(空性)이라고 하는 승의의 진리를 위한 방편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반야경의 이제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일체 법공설(一切法空說)의 의미를 천명한 것이 용수이다.
용수의 이제설은 세속의 진리와 승의의 진리를 둘 로 구분하여 교설의 측면에서는 이제(二諦)로 중심을 두면서 동시에 언어 습관 일반과 승의의 진리를 준 별하는 도리의 측면으로 본 이제의 성격을 겸비하고 있다. 용수의 이제설은 중국에 와서는 길장, 승랑 등 에 의해서 더욱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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