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내 땅...떳떳하게 걸어볼 날이 언제쯤이련가
☞산행일자: 2017년 10월 1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세찬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9km + 어프로치 8.3km / 9시간 38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미시령-쉼터-울산바위 갈림길-너덜지대-1,318봉(황철북봉)-암봉-쉼터-황철봉
황철남봉-저항령-너덜지대-1,250m봉(걸레봉)-안부-암봉-쉼터-1,275m봉-삼각점
암봉-쉼터-너덜길-1,326m봉(마등봉)공터-마등령정상-마등령-마등령 갈림길-이정표
봉정암 갈림길-오세암-안부-만경대-오세암 갈림길-영시암-철교1-설담당 부도-철교2
유네스코 생물보존탑-백담탐방 안내소-백담사-버스정류장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북면 / 고성군 토성면 / 속초시 설악동
지난 8월 마지막주에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 설악산 구간을 끝내고 한달동안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10월의첫날에 나머지 설악산 구간을 끝내려고 이른 새벽에 愛馬를 몰고 집을 나서는데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
처음에는 동서울에서 백담사로 가는 06시49분 차를 타고 백담사에 내려서 용대리에서 백담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원칙대로 북진을 하려고 했는데 이럴경우 백담사에서 오전 10시나 되어서 산행이 시작되면 귀경 교통편이 문제가
될 것 같아 역산행을 생각하고 새벽에 간단하게 베낭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내설악 광장(03:30)
미시령으로 가는 길에 내설악 광장에 들려서 황태 해장국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미시령으로 향하는데 많은 갈등을 한다... 용대리에다 차를 세워놓고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향할 것이냐, 미시령에다 차를 세워놓고 산행을 할 것이냐 고민을 한다
택시를 탈 경우 어차피 택시가 원통에서 오기에 택시 요금이 만만찮아 무조건 미시령으로 향한다
그래 함 가보자...밑져봐야 본전이제
愛馬를 몰고 미시령에 도착하니 모든게 적막강산이고, 어찌나 바람이 드센지 서 있기조차 힘들다
대간 산꾼들에겐 저승사자같은 국공파 직원들이 머물고 있는 초소에는 불이 꺼져 있어 맘놓고
주차장에 애마를 세워놓고 산행을 준비한다
미시령(彌矢嶺:767m:04:45)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미시령(彌時嶺)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 · 연수령(延壽嶺) · 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미시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杆城郡)에는 미시파령이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는데 바다 고을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본조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麗水坡嶺)이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 『택리지』에는
연수령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데『여지도서』 간성군 관액조에는 미시령이 군 남쪽 팔십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간성군 석파령(石破嶺) 남쪽에 미시령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토성면 원암리(元巖里)에 위치한 고개 지명으로 미시령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이름으로 연슈파 또는 큰영이라 기록되어 있다.
미시령은 진부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과 함께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고개로 미시령에 서 있는
정상석은 1960년에 이 고개로 46번 도로가 개통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랫쪽에 2007년 5월에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황철봉,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상봉, 신선봉, 마산봉 진부령으로 이어진다
1750년대 「해동지도」의 미시령 일대
산행을 시작하다(05:00)
국공파 초소에 불이 꺼진것을 확인하고 나니 훨씬 여유로움이 생긴다
어둠속에 미시령 정상석 뒷쪽으로 개구멍을 찾으니 전혀 보이질 않고 철조망은 요새화 되어 있다
우측으로 돌아 철조망 끄트머리에서 철조망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카메라가 있어 얼마전 노인봉
인근에서 국공파에 걸려 곤혹을 치른 학습효과 때문에 카메라를 피해 등로로 접어든다
본격적인 숲속으로 들어서니 단속구간 등로치고는 등로가 상당히 뚜렸하다
다닐 사람은 다 다닌다는 뜻이렸다...여유롭게 라디오를 켜고 노랫소릴 흥얼거리며 걷는다
피뢰침(05:12)
예전에 감시 카메라가 있었던 곳에 카메라는 안 보이고 어둠속에 태양광 시설물과 피뢰침이 보인다
피뢰침을 지나니...
어느 간이 큰 산꾼이 흔적을 남겨놨다
쉼터(05:30)
조금을 더 진행하니...
6.25전사자 유해 발굴지역이 나온다
이곳은 8.15해방이후 6.25전쟁 이전에는 설악산을 끼고있는 양양, 속초, 고성, 인제는 북한땅이었다
6.25전쟁 당시 수 많은 무명용사들의 흘린 피로 이곳 설악산을 수복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고성 화진포에는 아직도 김일성 별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당시
김일성이 설악산을 빼앗기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7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요즘 세태를 보면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희생으로 지킨 이 나라...
현 정부들어 모든게 불안하다제발 국민들이 두다리 쭉 뻗고 살 수 있도록 안심 좀 시켜주소
등로 아랫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상당히 거세다
가벼운 윈드자켓을 입었는데도 상당히 추운 느낌이다
어둠속에 천연보호구역 말뚝도 보인다
울산바위 갈림길(1,092m:05:45)
이곳에서 우측으로 살짝 꺽어지니 본격적인 너덜길이 나온다
너덜길 초입에 들어선다
집채만한 바위 너덜길이 시작되는데 저 윗쪽에서 헤드렌턴 불빛 서너개가 보인다
산꾼이면 계속 산행을 시작할텐데 가지않고 계속 서 있는데 국공파가 아닌지 불안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갈 순 없고 에~라 모르겠다 가는데까지 가보자하고 오르막으로 오른다
올라가서 보니 동해안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보려고 기다리는 산꾼들이 아닌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얼마나 놀랬는지...
속초앞바다가 벌겋게 물들었다... 일출이 시작되려는가 보다(06:00)
어느 산꾼은 삼각대를 세워놓고 일출을 기다린다...일출 시간이 06시 20분이란다
나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 20여분간 여유를 부리면서 동해바다를 응시한다
완전히 날은 밝아지고... 아침에 내가 올라온 미시령계곡 용대리쪽은 완전히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다
맞은편은 대간길 마지막 구간도 국공파에 쫓겨 어둠속에 걸어야 할 상봉, 신선봉, 마산봉 너머로 향로봉이 보인다
저 곳은 설악산 자락이 아니고 금강산의 맨 끝자락이 아닌가
내 나라, 내 땅, 내 산길을 죄인의 심정이 아닌 떳떳하게 걸어볼 날이 언제쯤이련가
일출(06:20)
일출을 배경으로...
황철봉 가는 너덜길에서 바라본 울산바위(873m)
화강암으로 둘레가 4km나 되는 하나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서 예전에는 '천후산' 또는 '연화반계산'이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칠때 바위에 반동이 되어 나오는 메아리가 마치
하늘에서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와 흡사하다하여 '천후산'이라 불리었으며,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기후가
접하는 지역이다보니 운해가 자주끼고 이 운해가 바위산 중턱쯤에 끼었을때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연꽃이 반쯤
피다만 봉우리와 흡사하다하여 '연화반계산'이라 불리었다 한다.
'울산바위'는 바위산 자체가 설악산을 안쪽에 두고 울타리를 쳐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하여,
또는 우는 산과 같다하여 '울산바위'라 불리게 되었다하며, 경남 울산의 지명과 같다보니 전설이 나오기를
울산에 있던 바위로서 옛날 태고적에 금강산에 일만이천봉을 모은다는 소문을 듣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쉰다는 것이 영원히 쉬게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산이다.
맞은편으로 상봉과 신선봉 마산봉으로 이어지는 저곳...어차피 어둠속에 걸어야 할 저곳 오늘 실컷 봐두자 꾸나
향로봉 정상너머 북한땅이 아련히 보인다
내 생전에 북한땅의 대간길을 걸을 수 있으려나 이런 저런 생각에 맘이 착잡하다
울산바위 너머로 속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구름사이로 해는 벌써 한참을 올라와 버렸다
두 다리가 아닌 두팔, 두발...아니 네발로 기다시피 황철북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雲海가 되어 버린 미시령 계곡너머로 도솔지맥 능선이 마치 병풍처럼 보인다
우측이 아마 6.25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귀신잡는 해병” 이란
칭호를 받은 도솔산과 대우산이 보이고 좌측 끄트머리쪽은 용늪으로 유명한 대암산인듯 하다
단속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야광봉을 세워놔 길잃을 일은 없겠다
가라는 건지...가지 말라는 건지아둔한 범여의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된다
당겨본 울산바위
해는 구름속에 완전히 가려지고 이 시간 이후 산행이 끝날때까징 해를 보질 못했다
황철북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네발(?)로 기어서 열심히 오르는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황철북봉(1,318m:06:40)
황철북봉 삼각점(△설악22 / 1987 재설)
가야할 걸레봉과 마등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황철북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너덜길로 내려서는데 황철봉 정상은 낙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친절하게 야광봉을 걸어놨다...가라는건지 가지 말라는 건지...아뭏든 감사합니다
낙엽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황철봉 가는길
거센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며 황철봉을 지키고 있는 분비나무
심한 바람에 나부끼는 시그널...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암봉(07:00)
苦行
암릉 사이로 대간길은 이어지고...
쉼터(07:05)
황철봉(黃鐵峰:1,381m:07:2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설악산의 서북릉, 즉 미시령과 마등령 중간의
미시령에서 남쪽 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백두대간 상에 있으며 산세는 육산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산 주변에
엄청난 너덜과 색다른 식생을 지니고 있어서 설악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대청봉이나 천불동쪽과는
또 다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오랜기간 동안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통제구역이 되어 있고, 설악산의 다른 곳에 비해
특출한 기암괴석이나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간 종주꾼과 황철봉의 의미를 아는 사람 이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설악산에서 소외되어 있는 형편처럼 되어 있다.
이곳 너덜의 암릉에는 황(sulfur)과 철분같은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나침판이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속초문화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가을에 낙엽이 지고 햇빛을 받으면 산 전체가 누런 색깔의 쇠(鐵)같은
모습으로 비친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데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곳인 황철봉 정상에 인증샷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황철남봉으로 향한다
등로는 비교적 뚜렸하다
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곡예하듯 걷는다
가야할 마등봉이 보이고...
대청봉과 화채봉도 보이기 시작하고...
황철남봉(07:40)
오를수 없는 암릉구간은 패~~~스
미시령 계곡 용대리 방향은 여전히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다
저항령을 넘어 너덜길을 따라서 올라야할 1,250봉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신성한 봉우리를 걸레봉이라 이름을 붙혀놨다
다시 너덜길이 시작되고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어서 저항령으로 내려간다
아직도 내설악 계곡에는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걸레봉 너머로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이 보인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국공파들이 설치한 야광봉을 따라서 저항령으로 내려간다
신흥사와 대포항...속초 앞바다로 이어지는 저항령 계곡과 달마봉의 모습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저항령가는 길
또 다시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험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로프가 있는 암릉구간이 나오고...
돌배나무 한그루가 쓰러져 있는 저항령으로 내려선다
저항령(低項嶺:1,100m:08:1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을 넘나드는 고개로 넓은 공터가 있다.
우측으로는 백담사와 용대리로 연결되고 좌측으로는 긴 저항령 게곡을
내려가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잇는 신흥사가 나오는 곳이다.
북주 능선(北主綾線)에 있는 고개 중의 하나로 동쪽으로는 정고평(丁庫坪)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百潭寺)에 이른다.
늘목령이라고도 하며, 저항령(低項嶺), 늘목령 모두 노루목 고개, 목우(牧牛)재와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의미의 늘으목, 늘목에서 유래하였다.
즉 늘목령은 늘목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늘목령이 된 것이고, 저항령(低項嶺)은 늘목이
노루목으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로 장항(獐項)이라고 표기하여, 거기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장항령(獐項嶺)이라고 하던 것이, 발음상 저항령(低項嶺)으로 변하고, 이것을 의미와는
관계없이 한자로 저항령(低項嶺)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볼 때
저항령(低項嶺)도 마등령(馬登嶺)처럼 옛날부터 이용된 길인 것을 알 수 있다.
6.25동란 당시 이곳 저항령은 상당히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라고 한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6.25 전쟁 기간 중 설악산 지구 전투에서 처절한 사투를 거듭하여
인민군 10,948명을 사살하고 417명을 생포. 그 당시 신원이 밝혀진 아군 전사자 363명.
반세기가 지난 2012년 6월의 소청봉과 저항령 고지에는 6.25 전쟁 당시 전사자 65구가
발견된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녹슨 철모를 관통한 총알자국과 낡은 군화 속 발가락뼈가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지킨 조국을 우린 요즘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에 무거운 가슴을 안고 다시 1,250봉(걸레봉)으로 오른다
걸레봉을 오르면서 뒤돌아 본 황철남봉의 모습
다시 너덜길
이곳은 지나온 곳과는 달리 야광봉이 없다...길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 페인트로 표시를 해놨다
너덜길 오르는 길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지나온 황철남봉을 뒤돌아 본다
그 세찬 바람에 피어있는 털진달래...정녕 너는 제 정신이나?
저항령 계곡은 저항령에서 설악동 방면으로 약 6㎞에 걸쳐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신흥사에서
비선대 방면으로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저항령계곡을 접어들어 저항령~길골을 거쳐 백담사에 이를 수 있다.
계곡 중간에 폭포와 소(沼)는 거의 없지만 수량이 풍부한 것이 특징으로 멸종위기의 야생동물인 산양의
서식지이기도 하여 2011년 이 계곡 일대의 650만㎡의 면적이 2030년까지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걸레봉 좌측으로 멋진 암릉이 보이는 곳이 대간 능선이나 위험하여 우회하는 구간이다
걸레봉(1,250m:08:40)
지도상에는 1,250봉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예전에는 저항령 윗쪽에 있어서 저항봉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언젠가 누구한테서인지는 몰라도 걸레봉이라 부르면서 부터 걸레봉이란 명칭 굳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봉우리 아래에 있는 너덜겅이 멀리서 보면 찢어진 걸레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건 아닌지?
정상에 오르니 어찌나 세찬 바람이 부는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들어 서둘러 아래로 내려선다
지나온 능선의 모습
1,250m봉으로 내려서는 길도 세찬 강풍으로 인해 몸뚱아리 중심을 잡기가 힘이든다
뒤돌아 본 걸레봉(1,250m봉)의 모습
저 멋진 암릉이 대간길이긴 하나 오를수 없어 우회하면서 걷는다
바람에 밀려서 내려가니...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너덜길을 지나 다시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선다
늦게핀 개쑥부쟁이도 세찬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한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가는 길에 얼굴을 들어보니 강아지처럼 생긴 바위도 보인다
저건 촛대바위인가?
안부(09:10)
암봉(09:12)
조금전에 내가 걸어온 능선
한국(남한)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산이며,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음력 8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하는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했고,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란
뜻으로 설산(雪山), 설봉산(雪峯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산세, 울산바위를 비롯한 기암괴석,
계곡의 맑은 물과 수많은 폭포 및 숲, 그리고 백담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 등이 조화를 이루어 사찰경관이 뛰어나다.
설악산은 내설악(內雪嶽)과 외설악(外雪嶽)으로 구분되는데,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미시령(826m)과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고 부른다
조금전에 우회하면서 지나온 암봉의 모습...과연 설악산답다
설악의 오른쪽 날개, 화채능선 풍수지리상으로는 설악의 산세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산세’를
지녔다고 하는데 대청봉이 닭의 머리이자 부리요, 서북능선이 왼쪽 날개, 화채능선이 오른쪽 날개,
그리고 공룡능선이 닭의 몸통이 되는 셈이고, 용아장성이 시작되는 봉정암은 설악의 심장이자 알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설악의 형상을 보면 화채능선은 닭의 오른쪽 날개이다.
닭의 부리로 쪼아 먹을 수 있는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오른쪽 날개 겨드랑이 밑이 죽음의 계곡이다.
그 누가 이곳을 죽음의 계곡이라 명하였는가....
죽음의 계곡은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곧바로 내려오는 능선의 바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자주 눈사태가 일어나는 곳으로 이 계곡에서는 설상훈련과 빙폭 훈련을 할 수가 있어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등정을 위한 해외원정대들이 전지훈련차 많이 찾는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종종 등반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1969년에는 한국산악회원 열 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을 위한 훈련을 하다가 눈사태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계곡 루트는 1956년 8월 한국산악회원 전감(田堪)씨가 최초로 개척한 이래 아직 뚜렷한 등반로는 없다.
죽음의 계곡은 바로 닭의 목에 해당한다.
다시 좁디좁은 등로를 따라서 마등봉으로 향한다
쉼터(09:30)
마가목이 꽤나 많이 보이건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손에 닿는것만 쬐끔 수확한다
초록의 명(命)이 다하는 날
층층이 쌓은 삶의 무게
인연의 끈을 놓으며
쓸쓸히 흩날리는 운명
탓할 수 없는 아픔만 남는다.
뒤안길로 밀린 추억
지울 수 없는 미련
세월가면 잊어질까 ?
꽃피던 시절
푸르러든 꿈
욕망의 불을 끈지 오래인데
바스락 그리는 슬픔
낭만을 지우고 있네
차가운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
황량한 텅 빈 공간에
나목(裸木) 긴 그림자만 흔들린다.
문재학님의 詩 낙엽
1,275m봉(09:40)
오를 수 없기에 우회하면서 걸었다
1,275m봉 삼각점은 암릉 아래 등로에 설치가 되어있다
1,275m봉 삼각점(△ 설악 414. 2007 재설)
마등봉 가기전 저기 어디쯤에 부부바위 혹은 연인바위라 부르는곳도 있는데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암봉(09:50)
암봉에서 바라본 권금성의 모습
권금성(權金城)의 유래는
아주 오랜 옛날 한 마을에 권씨 성의 장사와 김씨 성의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쳐들어오자 산세가 험한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권금성 자리이다.
적이 오자 방어할 길이 없어 서로 의논하였다. 그래서 두 장사가 그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적병이 오기 전에 성을 쌓아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안에 성을 만들어야 화를 면할 것이오.”
하지만 성을 쌓는 다는 것이 결코 생각 처럼 쉽지 않았다. 의논 끝에 돌을 날라다가 이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는 다면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장사가 궁리 끝에 “이렇게 합시다. 돌을 날라서는 성을 쌓을 수 없으니
내가 강에 내려가 돌을 던질 테니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그래야만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좋습니다.” 그래서 권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주어서 던졌고 그러면 김장사는 그 위에서 돌을 받아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들면 서로 교대로 김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던지고 권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아 성을 쌓았다. 이렇게 권장사와 김장사가 만든 성이라 권금성(權金城)이라고 부른다.
울산바위와 달마봉 너머로 속초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가야할 마등봉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달마봉((達磨峰:635m)
달마봉 신흥사(神興寺) 앞의 세심천(洗心川) 건너 동편에 솟아있는 암봉(岩峰)으로
산봉우리의 둥글기가 흡사 달마와 같다하여 달마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둥글둥글한 달마대사의 모습처럼 달마봉도 둥근 것이 특징이며, 달마봉에 오르면
오른쪽에 보이는 영랑호(永郞湖)의 잔잔한 물결에 달마봉의 모습이 비친다고 한다.
『달마』라는 뜻은 달마대사의 준말로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선종(禪宗)의 시조이며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왕의 셋째 아들로 인도의 향지국 왕족 출신으로 본 이름은 보리다라이다.
부처님 전등 제 27조이신 반야다라 尊者로부터 법을 받아 달마라는 이름을 받으니 곧 28조다.
존자는 동쪽의 중국 땅에 불법의 인연이 성함을 보시고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3년 간의 기간을 보
낸 후에 중국으로 오니, 梁 무제와의 문답, 제자 혜가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가 남긴 <二入四行>(報怨行. 隨緣行, 稱法行, 無所求行)의 가르침을 남겼다.
거센 바람앞에서도 도도함을 잃지 않은 병조희풀
쉼터(10:10)
마등봉으로 오르는 본격적인 너덜길은 시작되고...
등로에서 바라본 황태축제로 유명한 용대리(龍垈里) 계곡의 모습
인제군 북면 설악산에 자리하며 낮은 산지가 대부분을 이루는 산촌마을로 서쪽으로 북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 구만이, 남교, 당정곡, 암자동 등이 있으며 구만이는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남교는 조선시대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남교역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고 당정곡은 조선시대 어느 한 선비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암자동은 백담사에 딸린 작은 암자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용대리 일대에는 한국 최대의 황태덕장이 있는 곳으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황태의 70%를 차지하는데
1961년 함경북도에서 월남한 나종오씨가 처음으로 덕장을 만들엇다고 하며, 이어 다른 함경도 사람들이
함께 시작하였고, 3년 뒤 대관령 황태덕장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990~13,200㎡ 규모의 덕장이 15개 있고, 매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인제황태축제가 열린다.
명태는 거는 즉시 얼어야만 물과 함께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 나가지 않는데 이곳의 밤의
평균 기온이 두 달이상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며 계곡에서 늘 바람이 불어오는 천혜의 기후조건이다
진부령 동쪽 거진항 일대에는 할복장(割腹場)에서 배를 가른 명태들이 이곳에서 보통 1월초부터 3개월간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속살이 황색을 띠며, 육질이 부드럽고 영양이 풍부한 황태가 된다
황태의 깊은 맛은 물론 간장해독, 숙취해소, 노폐물 제거, 독사 독및 연탄가스 중독 해독에 효과 있다고 한다
너덜길 우측에는 자작나무 군락지가 산꾼을 반긴다
너덜겅을 지나 마등봉으로 올라선다
울산바위 너머로 펼쳐지는 속초시내의 모습
첫째, 속초는 속새(높이 30~60㎝의 상록 양치식물)가 많으므로 황무지, 원야(原野)의 의미로 속새,
또는 한자로 표기하여 속초(束草)라고 불리었는데, 이 두 땅이름이 함께 사용되다가
속초라는 땅이름만 남게 되었다.
둘째, 지금의 영금정 옆에 솔산이 있을 때, 바다에서 이 포구를 들여다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서 세워 놓은 것 같은 형태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셋째, 풍수지리학 상 속초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소가 누워서 풀을 먹고 있는 형국이므로,
누워서는 맘대로 풀을 뜯지 못하기 때문에 풀을 묶어서 소가 먹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넷째, 울산바위에 관한 전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설악산에 구경 왔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신흥사 승려에게 울산바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는데,
어느 해에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 세금을 주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울산 고을의 원님이 이 바위를 재(災)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동자승이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곧 지금의 속초 시가지에 자라고 있는 풀을 새끼로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 맨 후 불에 태워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로 적는 속초(束草)로 불리게 되었다.
--- 속초문화원 발간 [속초(束草)의 옛 땅이름]에서 인용
오늘 내가 걸었던 능선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3번째 걷는 황철봉 구간...국공파의 등쌀에 다시올 일이 있을까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뭉쿨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마등봉((馬登峰:1,326m:10:25)
너덜겅을 올라오니 지도상에 1,326봉이 표기된 곳을 ‘외대 산악회’에서 “마등봉”이라
표기해놨고 정상에는 3등 삼각점(△설악304 2007 재설)이 있는데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산꾼 한명이 나타나는데 복장이 마치 국공파의 옷 색깔과 비슷하여 얼마나
놀랬는지... 젊은 산꾼 역시 나와같이 독립군(나홀로 산행)인데 새벽 3시에 한계령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왔단다...정말 대단한 호화준족이다
난 지난 8월에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 12시 10분에 도착했으니 2시간 이상 빨리온 셈이다
마등령에 국공파가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하기에 정상에서 맘 놓고 휴식을 취한다
젊은 산꾼에게 부탁하여 인증샷
1,326m봉 정상 3등삼각점(△설악304 / 2007재설)
마등봉에서 바라본 화채능선
화채(華彩)란 꽃처럼 고운 빛깔을 수놓은 능선을 일컬음이며 화채능선(華彩綾線)
화채릉은 일명 동북(東北)능선이라고도 하며 자연휴식년제로 오랫동안 등산코스를 개방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곳곳에 협곡과 절벽으로 인해 일반 등산객들이 개별적으로 산행하기는 위험하다.
설악의 멋진 풍경사진등은 대부분 화채능선에 찍은 사진들이 많은데
화채능선을 찾는 사람은 산꾼보다는 사진작가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만큼
조망이 빼어날 뿐만아니라, 화채능선은 항상 출입이 통제돼 왔던 설악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다.
설악 매니아들 중에서도 화채능선 한번 가보는게 꿈이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마등령에서 바라본 공룡 능선(恐龍稜線)의 모습
마등령(馬登嶺)에서 희운각 대피소(喜雲閣待避所) 못 미처 바로 북쪽 신선암(神仙岩)까지의
바위 능선으로 바위가 뾰족하여 마치 공룡(恐龍)의 등같이 생겼다.
나한봉(羅漢峰, 1275m), 노인봉(老人峰, 1184m)이 위치하고 있다.
설악산에서 길을 잃었다.
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빠지는 길길은 그날 하늘 속에 있었다.
(중략)
십년여 산을 들어도 길을 잃은 일은 없었다.
깊은 골짜기 함께 쓰러져 산과 내가 상처를 나누어 갖지는 못했다.
짐승 사이로 별 사이로 가듯길을 잃었어야 했다.
누구나 정상에선 길을 잃는 것을앞서 가면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아래로만 고개를 내밀고 우왕좌왕했을까.
이젠 길을 잃어라 낙엽 속에 웅크려자듯 별 사이로 헤매어
떨듯 더 크게 길을 잃어라.
-이성선 <길을 잃어라>
설악산(雪岳山)의 장쾌한 모습
설악산은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는 설화산(雪華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에서는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으로 불려왔다.
지금은 거의다 설악산으로 불러지만, 옛 지도와 문헌에는 대부분 ‘산’를 빼고
설악이라 기술되어 있으며, 대부분 눈(雪)과 관련지어 설명해놓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해 쌓인 눈이 하지에 이르러 비로소
녹으므로 설악(雪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증보문헌비고」에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쌓여 바위가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으로 이름지었다는’는 기록이 있다.
설악산을 또 한계산(寒溪山)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엄밀히 말해서 설악산과 한계산은
같은 산은 아니였다. 다산시문집의 산수심원기(汕水甚尋源記)에 보면 ‘소양수의 발원지는
두곳에 있는데 하나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기린(基麟)의 옛고을을
지나니 춘천부 동쪽 140리에 있다. 이른바 기린수(基麟水)요, 또 하나는 인제현 한계산에서
나와 (지금의 설악산 남쪽능선) 남쪽으로 흘러 서화(瑞和)의 옛고을을 지나니
이른바 서화수( 瑞和水)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설악산과 한계산은 같은 산이 아니다.
설악산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단종이 세조에게 폐위 당하자, 김시습은 책을 다 불사르고 집을 떠나 절로 도피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양주의 수락산과 수춘(壽春:지금의 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해가의
설악산과 한계산, 월성의 금오산 등이 매월당이 머물렀던 곳이다.
스스로 호를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고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峯)이라고도 불렀다.
공터(10:35)
공터에서 바라본 공룡능선과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의 모습
조금전 마등봉에서 만난 산꾼의 정보에 의하면 국공파가 없는걸 확인했지만 그래도 찜찜하다
나무뒤에 숨어서 정세를 살피니 국공파가 없기에 서둘러 禁線을 넘어 마등령으로 내려서니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마등령(馬登領:1,220m:10:45)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설악동의 경계에 있는 내 ·외설악(內 ·外雪嶽)을 연결하는 고개 중의 하나로
동으로 금강굴(金剛窟), 비선대(飛仙臺), 서로는 오세암(五歲庵), 백담사(百潭寺), 남으로 공룡(恐龍)능선,
대청봉(大靑峰), 북으로는 저항령(低項領), 황철봉(黃鐵峰), 미시령(彌矢領)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등산객들만이 넘어 다니나, 예전 도보시대에는 행상인, 민간인들이 동·서를 넘어 다닐 때
이용한 옛길 중의 하나였다. 말 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등령(馬登領)이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마등령(馬登領)으로 표기하나, 옛 기록에는 모두 마등령(馬等領)으로 되어 있다.
또 《설악(雪嶽)의 뿌리》에는 마등령(摩登嶺)으로 표기하여, 산이 험준하여 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는 영혼이 자유로운 몸이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마등령 삼거리로 향한다
마등령삼거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천화대의 모습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숱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등령삼거리 이정표
마등령 삼거리(10:50)
마등령 삼거리에서 오세암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 등로는 참으로 오랫만에 걸어본다... 아마도 10년은 더된듯 싶다
이정표(1,163m:11:00)
이 코스는 등산객 한명을 볼 수 없을정도로 너무나 조용하고 호젓하다
범여가 가장 싫어하는 돌계단이 시작되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철계단이 있다
이정표(1,028m:11:15)
또다른 철계단... 오세암가는 길은 한없이 내리막길이다
지난 여름철에 산산태가 난 지역이란다
오세암으로 들어서는 좌측으로 봉정암가는 길이 보인다
오세암으로 들어서 처음으로 만나는 전각이 시무외전(施無畏殿)이다
오세암 시무외전(施無畏殿:11:40)
좀 특이한 명칭의 전각으로 우리나라 사찰중에 유일한 지명의 전각이 아닌가 싶다
시무외(施無畏)란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베푸는 걸 말한다
시무외전 법당에는 주불이 천수천안관음불이다
시무외전 밖에서 선 채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동자전으로 향하는데 공양간과 종무소가 나오는데
가람의 규모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아직도 한창 불사중이다
마침 공양시간이기도 하여 밥통에서 밥한술에다 미역국 말아 한그릇을 비운다
원래는 영시암에서 점심을 먹으려했는데 이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점심을 해결한다
담백한 오세암 절집의 밥
밥을 먹고 밥값을 내려고보니 지갑을 차에놓고 왔네그려... 담에 드릴께요
오세암의 상징적인 전각인 동자전의 모습
오세암(五歲庵)의 지명유래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내설악 백담사에서 10km 쯤 떨어진 해발 1,200m고지에 오세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옛날 매월대사가 두 살 된 자기 조카를 동자로 데리고 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암자를 짓고 매월암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해 늦은 겨울, 대사는 암자의 식량이 떨어지자 당시 4살 된 동자에게 식량을 구하러
양양 큰 절에 가서 3일 간 있다가 올터이니 기다리라 하고 떠났다.
대사는 3일분 식량만 남겨 놓은 채 길을 떠났으나 양양에서 식량을 구해 가지고 돌아올 무렵 공교롭게도
큰 눈이 내려 다섯 자나 넘게 쌓였고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눈이 녹지 않아 비통 속에서 해를 넘기고 이듬해
3월에야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사가 암자 못미쳐 망원대에 올라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암자에서 목탁소리가 들려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급히 달려가 보니 동자가 불상 앞에 앉아 목탁을 치고 있는데, 몸은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나 가느다란
목소리로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는 지난 겨을 식량을 구하러 절을 떠나기 전에 동자에게
너의 어머니는 관세음보살이니라 하고 일러 주었었다.
대사는 다섯 살 된 동자가 견성득도한 것을 보고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천진관음보전(天眞觀音寶殿)
오세암의 중심전각으로 주불은 백의관음으로 모셔놨다
오세암은 647년(선덕여왕 1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서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조그만 초막을 짓고 수행하던 중에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이라 불렀으며, 조선 초기에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이곳에서
출가를 했고, 조선조 명종때 보우스님이 암자를 중건하였고, 1643년(인조21년)에 설정스님이
중건한 다음에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뀌었으며 5세 동자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근대에는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 선사가 수행한 곳이며 6.25때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진관음보전에 봉안된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
범종각
황금빛 동종이 조금 특이하다...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현동과 문수동을 지나 오세암을 빠져 나온다(12:00)
안부(12:10)
안부 좌측으로 ‘탐방로 아님’ 팻말이 있는 쪽이 내설악 만경대 가는 곳이라 무조건 올라간다
내설악 만경대(萬景臺:922.2m:12:20)
설악산에는 만경대가 3곳이 있는데 오색약수터쪽에 있는 양양 만경대, 천불동계곡 천당폭포 근처에
있는 만경대, 그리고 오세암 맞은편에 있는 만경대가 있는데 이곳을 내설악 만경대라고 부른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서쪽 일대를 가리키며 내설악 만경대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영실천 골짜기를 따라 오세암 근처에서 해발고도 922.2m의 봉우리 형태를 취하는 경관 조망대이다.
영실천은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가야동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면서 백담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안쪽에 있다는 의미로 방향상으로는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서쪽의
마등령과 미시령, 서쪽의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설악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서북능선과 화채능선 등
3개의 주능선 서쪽을 지칭한다.
만경대는 만 가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대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곳에 내설악에 있는 자연경관을
관망하기 쉽다는 데에서 내설악 만경대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만경대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조망대이다.
설악산 일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화강암의 차별침식 작용으로 인해 약한 부분은 씻겨 나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아서 형성되었으며 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조망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만경대의 남쪽에 있는 가야동계곡 역시 노출된 기반암의 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의해 폭포와 소가 여러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가야동계곡의 폭포와 소는 천불동계곡이나 십이선녀탕계곡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다
만경대 정상에서 반가운 현오님의 시그널을 만나다
만경대 정상에 올라서니 오세암이 가장 잘 보인다
만경대에서 바라본 용아장성 능선
용아장성은 내설악 그 중심부에 있으며 동으로 가야동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이
펼쳐지며,서로는 수렴동, 구곡담계곡을 끼고 서북 주릉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내설악의 중심에 자리한 용아장성은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20여 개의 바위봉우리가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 있다.
만경대에서 오세암을 다시한번 바라보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영시암으로 향하는 길에는 오세암으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날씨가 꾸무리하니 비가 올것 같아서 부지런히 영시암 방향으로 향한다
앙증맞은 다리도 건너고...
우측으론 집터의 흔적같은 곳도 보인다
투구꽃... 넌 아직도 왜그리 도도하니...
안부(12:50)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데크목 등로가 나온다
오세암 갈림길(13:15)
좌측으로는 봉정암과 소청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영시암과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세암 갈림길 이정표
부드러운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영시암에 도착한다
영시암에 도착하니 오늘도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물한바가지 들이키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영시암(永矢庵:13:15)
영시암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의 부속암자로화살 시(矢)로
'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뜻으로 영원토록 널리 베푸는 암자라는 뜻이다.
조선조 숙종 15년(1689) 장희빈 사건 때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재집권하는 등
혼란한 시기에 영의정 김수황이 사화에 휩쓸려 숙청당하고 사사되자
아들 김창흡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하며 살겠다고 창건한 암자이다.
영시암 법당 앞에 적혀 있는 영시암이란 현판은 여초 거사 김응현의 글씨라고 한다.
영시암에서 백담사로 향하는 길은 부드러운 트레킹 코스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배초향은 아직도 세월가는 줄 모르고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철교 1(13:45)
예전에 없었던 설담당 부도 안내판이 있다
설담당부도탑(雪潭堂浮圖塔(13:47)
부도(浮圖)란 부도’를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이란 뜻으로 설담당스님은
백담사의 스님으로 계곡 건너편에 있었는데 여기로 옮겨 왔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듯이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기에 부지런히 백담사로 향한다
철교 2(14:00)
뒤돌아 본 수렴동 계곡
수렴동계곡은 금강산의 수렴동계곡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금강산의 수렴동은 설악산의 수렴동보다 한 수 아래인 모양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금강의 수렴동이 오두막집의 들창에 친 발이라면, 설악의 수렴동은
경회루의 넓은 한쪽 면을 뒤덮고 있는 큰 발이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탑(14:15)
백담탐방안내소(14:18)
용대리 버스 정류소로 향한다
백담사로 향하는 백담계곡에는 돌탑 천지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서 백담사 경내로 들어선다(14:25)
이곳은 템플스테이로 이용되는 요사체인 모양이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 극락보전 방향으로 향한다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요사채 무금선원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다
너와집 형태로 된 찻집인 白潭茶院인 농다실(聾茶室)도 보인다
농(귀머거리 농(聾)이라...들을것도 없이 차 맛을 음미하라는 뜻인가?
찻집앞에 동판에 새겨진 조주스님의 어록이 눈길을 끈다
문: 佛道가 무엇입니까?
답: 차나 한잔 들고가게!
백담사 산령각
산령각에는 참배객들이 서 있어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뭐하다
산신과 동자가 그려진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산령각 앞에 있는 연꽃지(蓮池)...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이 무수하게 많다
나한전은 공사중이라 참배를 할 수가 없다
백담사의 本殿인 극락보전
1957년에 지어진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보물 제1182호인 목조 아미타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1748년(영조24년)에 조성되었으며
높이가 84cm로 머리에는 큼직한 계주가 솟아있고 육계의 구분이 불분명 하나 나발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어깨와 가슴은 넓고 자세는 당당하며 수인은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함께 한 통인(通印)에 양 손 모두에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衆生印)을 나타내고 있다
통견의 법의는 두껍고 곡선으로 처리된 옷주름은 돌출되어 있으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목조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은 1748년 운마산 보월사(寶月寺)에서 불상을 조성하여
이안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발원문 4매와 만(卍)자 소화문, 황단삼회장 저고리 1점, 그리고 유리와 수정
수백점을 싼 보자기가 나왔다고 한다
극락보전 아미타목불좌상(보물 제1182호)
백담사의 극락보전안에 주불(主佛)로 봉안되어 있으며 높이87cm,어깨너비42cm,무릅너비가 42cm이다.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조선 영조24년(1748)에 조성되었으며,이 불상은 목재로 두손은 시무외,여원인에 엄지와 중지에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고, 두발은 결과부좌형(結跏趺坐形)이며 머리에는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육계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나발(螺髮)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여 당시의 사가형적이고
평탄적인 얼굴보다 우수한 편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머물렀다는 華嚴室
백담사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전대통령이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동안 은둔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는데 만해의 민족정신이 깃든 백담사에 민족의 죄인인 전두환
전직대통령이 거취했다는 아이러니한 인연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화두는 역시 전두환 대통령이다.
백담사에 들어서면 극락보전 앞 화엄당이 바로 전두환, 이순자 전직대통령 부부가 머물던 처소이다.
바로 이곳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곳에는 문을 열어 탐방객들이
전두환 대통령이 쓰던 유품과 사진을 둘러볼 수 있게 했다.
백담사 종무소인 법화실과 삼층석탑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간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한계사(寒溪寺)라 했으며,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한계령 중턱 장수대 근방이었다.
이 한계사는 불터고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탄 자리에 43년 후에 다시 절을 중건했으나 이나마도 불타 버렸다.
이후 백담사는 많은 화재와 사연을 지닌 채 1천3백년을 존속해왔다.
최근에는 1915년 1백60여칸의 백담사는 불타버리고, 4년후에 중건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찰이 계속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므로 이름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신령스러운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지금의 절까지 담(潭)을 세어 1백개가 되는
장소에 사찰을 건립하면 삼재(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으며, 담(潭)자는 불의 기
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허응당 보우대사의 시 - 한적한 곳
백담사 절집 마당에는 유난히 詩碑가 많이 보이는데 만해선사의 영향이 아닐까?
보우대사는 숭유억불 정책이 있던 조선중기에 불교 중흥을 바친 인물로 한국 불교의 큰 스승이다
조선조 세조당시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불가에 귀의한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저녁무렵
범종각
만해선사 흉상
백담사를 거론할 때 만해(卍海)선사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흔히들 독립운동 얘기를 할때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라고 말한다
속가 고향이 충남 홍성인 만해선사는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큰 스님이셨다
백담사는 만해선사가 불교유신론(1910년)과 님의 침묵(1925년)을 지은 곳이며, 만해의 승려생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로인해 백담사는 만해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승려, 사상가, 독립운동가, 시인으로서 일제 시대에 끝까지 민족 양심을 지킨 인물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으며 의병운동-동학혁명군에 가입했다 설악산 등으로 몸을 피한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으며, 1935년 이래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조선일보 등에 연재소설을 썼으며
1944년 6월 심우장에서 입적하셨다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만해기념관은 다음에 들리기로 하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아쉽다
만해선사의 오도송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세계 뒤흔드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오도송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禪詩를 말한다.
만해기념관
일제시대 《님의 침묵》을 집필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작품활동과 항일운동 업적을 조망할 수 있는 만해 기념관은
만해 선사의 민족 사랑 정신을계 승하기 위해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내에 3백33㎡ 규모로 1997년 11월 9일 개관하였다.
백담사는 만해선사가 《불교유신론(1910년)》과 《님의 침묵(1925년)》을 지은 곳이며, 만해의 승려생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이로인해 백담사는 만해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백담사 사찰 경내에 위치한 만해기념관은, 일제 당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기리고자
백담사측에서 설립했다. 그 외 만해당과 만해적선당, 대규모 강당인 만해 교육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담사 일주문에서 우측에 보면 'ㄱ' 자형의 전통 한옥을 만나게 되는데 이 건물이 기념관이다.
백담사에 만해기념관과 만해당, 만해교육원 등이 건립되면서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그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또한 만해기념관에는 1929년 1월 1일 만해가 조국의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갖고 새날을 개척하라고 격려한 신년논설 등 만해의 독립정신을 볼 수 있는 유품이 상당수 전시되어 있다.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독립은 남을 배척함이 아니라는 엄격한 한용운의 독립정신, 재판과정에서 만해선사가
민족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한 내용을 보도한 신문기사, 옥중 투고 글도 게시되어 있다. 님의 침묵 판행본도 30여가지
전시되어 있어, 외국 발간본도 있다.
만해기념관: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1백10평 규모로 모두 8백여점의 유물이 상설전시하고 있다.
만해가 사용했던 육필원고인 《불교유신론》,《님의침묵》,《불교대전》 등 만해 저서 초간본 1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또한 한용운 시집 영역본, 만해 문학세계 및 사상을 조감한 각종 논문평전 등이 있다.
만해의 출가 및 수행, 3.1운동, 옥중 투쟁, 계몽 활동, 문학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놓아, 한 눈에
만해선사의 일생을 볼 수 있는데 기념관 내부 한편에 만해스님의 일대기를 비디오로 상영하고 있고 만해스님을 기리는
후학들이 만든 조각품 초상화 등도 선보이고 있다.
기념관 밖에는 만해의 시《나룻배와 시인》이 조각된 만해시비와 만해의 인물 두상 조각이 있다.
지하 전시장: 만해개인이 아닌 불교의 유물,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조계종 종정 월하스님의 글, 중광스님의
글과 백담사 주지가 소장한 심우도 10폭 병풍 등이 눈길을 끈다.
교육관: 총 1백20평 규모로 만해시인학교와 만해불교사상강좌 등을 통해 만해스님이 일제강점 암흑시대에
겨례의 가슴에 심어준 사상을 되살릴 수련장으로 활용된다.
만해선사의 詩...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이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어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백담사 불이문(不二門)
백담사 사천왕상
백담사로 들어서는 洗心橋를 지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전각이 금강문인데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흔히 사천왕상이라고 하면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으로 우측에는 칼을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과 용.여의주를 쥐고있는 남방증장천왕이 있고
좌측에는 비파를 켜고있는 북방다문천왕, 긴 막대기 위에 깃발을 단 당을 손에 쥐고 있는 서방광목천왕이
있는데 사천왕들은 모두 눈을 무섭게 부럽뜬 험상궂은 얼굴에 갑옷을 입고발 아래는 악귀를 밟고 있는게
특징인데 백담사 사천왕상은 여느 사찰과는 달리 금강역사에 하얀 코끼리를 타고있는 문수보살과 사자를
타고있는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금강역사와 보현보살
백담사의 초입을 지키고 있는 금강문
나는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 바람에 백담사 뒷문에서 앞문으로 나온 셈이다
修心橋(14:35)
금강문을 나오면서 수심교에서 뒤돌아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춘성대선사 공덕비와 부도
백담사 수심교로 들어가기 전 좌측에는 만해선사의 유일한 제자였으며 거침없는
행동과 무소유로 일관하며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신 춘성대선사 부도탑이 보인다
백담사 버스 정류장(14:38)
셔틀버스를 이용할 경우
08:00(용대리:첫차 출발) - 18:00(백담사:나오는 마지막 차)
총거리 7km중 4km만 버스가 운행되고 나머지 3km는 도보...왕복 2시간 소요
도보로 왕복하실 경우
셔틀버스운행시간과 관계없이 통행하실 수 있으며 왕복 3시간 30분 소요
안내문의
국립공원 설악산 관리사무소 백담분소 ☎ 033-462-2554
마을버스 문의처 : 용대향토기업 ☎ 033-462-3009
백담사 만해기념관 이용안내 : ☎ 033-462-6969
백담사 정류장에서 버스를 15분정도 걸려서 용대리 주차장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향한다
미시령 주차장(15:15)
용대리에서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향하는데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안꺽고 가는게 아닌가
어랴!... 이 친구봐라... 가만히 있다가 미시령에 도착하여 택시요금이 얼마냐고 물으니
얼굴색 한번 안 변하고 30,000원을 달라고 한다... 왜 미터기를 안꺾냐고 하면서 난 20,000원만
주겠다고 하니 ‘어르신 다들 30,000원 받는다’ 한다...이보쇼 용대리도 인제군 북면이요
미시령도 인제군 북면이면 당연히 미터기를 요금을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미터기를 안 꺽었으니
당신이 실수하거니 20,000원만 받던지 아님 미터기를 꺽고 용대리까지 가는데 만약 30,000원이
나오면 내가 요금을 배로 주리라 했더니만 아무말도 못한다
당신 동네에 와서 택시 이용하는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라고 하면서 앞으로 산꾼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면 인제군청에 신고하겠다고 하니 아무말도 못하고 23,000원만 달라고 하는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23,000원을 주고 내렸지만 조금은 괘씸하다
미시령 주차장에서 바라본 속초시내의 모습
담 구간 어둠속에 걸어야 할 상봉도 미리한번 봐두고...
미시령정상은 어찌나 바람이 드센지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든다
낮에보니 국공파 초소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다
서둘러 愛馬를 몰고 귀경을 하는데 홍천을 지나니 비가 많이오기 시작한다
백두대간길중 가장 어려운 구간을 접수하고 서울가는 길은 상당히 홀가분하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3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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