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聖地巡禮

조계산 서쪽 품 안에 안긴 송광사

by 범여(梵如) 2018. 7. 29.

 

                                         禪宗과 敎宗이 어우러진 佛國土

                    조계산 동.서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가다

 

(순천) 사적 제506호 - 2018년 첫 날 방문한 승보종찰 송광사

송광사 가람 배치도

전남 순천시 조계산에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松廣寺)는 한국 선종을 대표하는 수행 사찰로서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와 함께 3대 종찰(宗刹)로 불리우는 곳으로 수행을 중시하는 승보종찰

(僧寶宗刹)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송광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조그만

사찰이었지만 1,200년 고려시대 무인 집권기에 일어난 전국적인 불교개혁운동의 하나로 보조국사가

수행결사인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서 송광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송광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석탑이나 석불같은 조형미가 뛰어난 통일신라시대

불교 예술품들은 별로 없으며,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고승들의 진영을 모신 국사전을 비롯하여 고려후기 불교관련

유물과 유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2015.4.4. 순천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송광사의 가람배치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亞’형으로 선종계열의 수행 도량으로서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이 있기는 하지만, 불전(佛殿)을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도량인 승방이나 요사채가 상당히 많았던 곳으로 보인다

전성기때 송광사는 많은 승방과 사찰에 딸린 일을 보던 사람들이 살던 건물들로 아주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며지금도 상당히 많은 공방을 두고 있으며 송광사의 많은 승방들은 1842년 화재와 6.25동란으로

많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많은 건물들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천여행(2) 조계산송광사 (조계종찰,승보사찰 ) 지난 가을날의 추억

우선 풍수지리에 의한 가람의 배치도에서 몇 가지 연유를 엿볼 수 있다.

송광사는 다른 사찰과 비교해 볼 때 그 형상이 여성의 모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조계산 자락이

병풍처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 형상이 마치 단아한 연꽃 봉우리 같아,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 자락은 연꽃의 잎사귀 형상이며 송광사 경내의 목조건물들은 마치 연꽃의 꽃술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의 연꽃 봉우리 지형에 석물(石物)인 석탑이나 석등을 올려 놓는다는 것은 곧,

꽃 봉우리를 가라앉히는 격이 되니 석탑이나 석등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는 이곳 송광사가 솔개형상을 하고 있는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옮길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송광사 국사전 뒷등에 내려앉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솔개(새)의 지형에 위치한 새의 등에 돌을 올려 놓으면 새가 날 수 없게 되니,

석물(石物)을 설치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이 불(火)의 기운이 흐르는 지형을 하고 있다라는 것.

그렇다보니 화엄의 법계도에 의한 화엄도량을 상징하는 건물양식의 대표격인 송광사에

불의 형상인 석등을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역사를 거슬러 볼 때 송광사 창건 이후

실제로 이곳에는 수많은 화재사건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이처럼 역사적인 도량들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가 하면,

1842년(헌종8년)에도 큰 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탄 사건들이 있었다.

또한 1948년 여수 순천 사건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절 주변의 많은 숲이 훼손되고 대웅전 등이 불에

타버렸는데 이를 1955~1961년 사이에 취봉(翠峰)과 금당(錦堂)이 이를 복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볼 때 송광사의 절터는 불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라는 게 현실성에 가깝게 비춰지는데 그래서 일까? 송광사 목조건물들의 계단에는

불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사자상들이 어느 건물에나 배치되어 있고, 승보전 앞에 있는 물화수

역시 이런 불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설치해 놓은 구조물이라니 가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송광사의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는 국보 56호인 국사전을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하사전, 영산전, 약사전이 있다.

승보종찰인 송광사는 건물보다는 문서, 불교용구 등에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삼명으로 번역해 본 의상대사의 법성게

「송광사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때 이미 80여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소실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동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50여동의 대사찰로서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는데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西向)으로 향하고 있는게 특이하다

6.25동란 전까지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 해청당(海淸堂), 행해당(行解堂), 서쪽의 문수전(文殊殿), 임경당,

도성당(道成堂)에 이른다

순천 송광사, 승보사찰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고의 수행도량

 송광사(松廣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 교구본사로 대길상사(大吉祥寺), 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통도사.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중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유서깊은 절이다

 절의 이름 “송광(松廣)”은 조계산의 옛 지명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몇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구전(口傳)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十八(木)+公)’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羅逗山:현재의 모악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木鴟)를 날렸더니 국사전(國師殿)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鴟落臺)

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 이야기를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鴟의 방언)’라고 풀었다.

 

끝으로 김영수(金映遂)라는 분은 이 산에 솔갱이(松의 방언)가 가득차 있었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으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廣)’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岡)’이었을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林錫珍)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선암사를 출발하여 송광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반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 이글거리는 태양은

금방이라도 모든걸 익혀버릴듯한 느낌이다... 서둘러 매표소 방향으로 향하는데 이곳은 새로 상가를

많이 지어놨다만은 분양이 안되는지 텅텅 비어있다.

송광사!... 참으로 오래 와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법정 큰스님께서 열반하시어 이곳 불일암으로

온 이후 불일암 참배를 겸한 조계산 산행이 마지막이었는데 날짜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제93차 전남순천 조계산 산행안내 및 차량좌석예약

조계산 등산 지도

 

송광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송광사적비(松廣寺」와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및

「승평속지(昇平續志)」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스님이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우고 역부(役夫)를 소집하고 임목(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넜다. 그 뒤 얼마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 되어 있었다

그 후 50여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 지눌(知訥) 스님께서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새롭게 발전했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고려 명종 12년)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했던 승려들에게도 道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했던 사람중에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사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知己)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菴)에 들어가 3년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라를 잡았고,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그로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180여년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 송광사를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의 16번째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때는

송광사는 황폐해져 있었는데, 고봉은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佛,法,僧의 전당을 중건하였고 1399년

(정종1년)에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倫旨)를 내렸다.

1420년(세종2년)에는 고봉화상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스님이 당우도 증측하였고, 절의 지위를 항상시키기

위해 정종때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를 뿐

아니라, 왜군들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 했으나 이때에 응선(應善)스님이 1601년(선조34년)에 수삭을 비롯하여 천자암과 보조암, 임경당을 중건

한 뒤에 당시 지리산에 주석하고 계셨던 부휴(浮休)선사를 이곳으로 모셨다.

 

부휴는 1609년 제자 4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송광사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짓고 기타 건물등을 보수하였으며 긔 뒤 600여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冬安居)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다가 1948년 1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등으로 인해 조계산 일대로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들을 벌채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절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에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주지였던 금당(金堂)스님과 화주였던 취봉(聚峰)스님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에 탄 전각들을 창건 또는 중창을 하였다.

 

1970년대 조실이신 구산(九山)스님께서 설법전, 수선사, 화엄전등을 보수 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을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1983년부터 1990년에는 당시 주지이셨던

현호(玄虎)스님이 대웅보전, 지장전, 승보전 등 크고 작은 전각 20여동을 새로 세우거나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니 멋진 누각이 나오건만 순례를 같이 온 도반들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도 안보인다 

청량각(淸凉閣)

석조의 홍교(虹橋)를 쌓고 그 위에 만들어진 누각(樓閣)으로 전면 1칸(10.5척), 측면 4칸(32척)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영조 6년(1730년)에 극락홍교(極樂虹橋)가 조성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홍교가 만들어 지고 건물은 광무 7년(192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걸어서 지나갈 때는 평범한 건물로 보이지만 개울쪽에서 바라보면 석조의 홍교위에 정자같이 지어진

아주 아름다운 누각이다

개울에서 바라본 청량각의 모습

청량각 윗쪽의 모습

청량각을 통과하면서 윗쪽으로 바라보면 보 위에 턱을 괜 용머리가 순래객을 맞이한다  

청량각 앞을 흐르는 계곡물은 최근의 가뭄탓이인지 水量이 아주 적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하게 짜놓은 동부(),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집 호정()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는데.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한 듯한 느낌이다

예전에는 기억에 없는 편백나무 숲도 보인다 

불일암 갈림길 

좌측으로는 法頂스님이 계셨던 불일암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송광사로 가는 길이다

스님이 열반하시고 다비식이 있은 닷새후에 불일암을 갔으니 참으로 오랫만의 기억이다

불일암 앞에서(2010.04.25)

법정스님이 열반하시고 다비식이 끝난 후에 스님에 대한 그리움에 서울에서 차를 몰고와 불일암 앞에서 인즈샷

법정스님이 직접 만드시고 앉아서 책을 읽어셨다는 빠삐용 의자   

불일암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향하니 송광사 안내도와 하마비(下馬碑)가 보인다

하마비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구역을 알리는 표시로 조선 태종 13년(1413) 왕명으로

종묘와 궁궐 문앞에 ‘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생긴 경계석을 세우고 이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하마비의 연원이다

송광사 하마비는 조선의 왕실 기도처인 축성전(1886년)을 건립하고 고종 24년(1887년)에 세웠다.

전국적으로 왕실기도처 역할을 하는 사찰 입궁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송광사 비림(碑林)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불(佛)·법(法)·승(僧) 가운데 승,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말한다

 

일주문 앞 가기 직전에 우측으로 스님들의 행적을 새긴 탑비림이 있는데 송광사의 역대 고승들과 공덕주들의

비림(碑林이 있다.

비림을 지나니 불일서적을 나오고 송광사 일주문이 보인다 

순천 송광사 일주문(松廣寺一株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는데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은 기둥이 짧고 화려한 공포가 다소 버겁게도 보이지만, 고색이 흐르는 단청과 일주문 양옆으로 낮게 질러놓은

담장에서 한결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일주문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

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송광사 일주문 편액 

일주문 앞쪽에는  “曺溪山 大乘禪宗 松廣寺”, 뒷쪽에는 “僧寶寺刹 曺溪(叢林”이라고 쓰여 있는데

전면 1칸의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조계문이라고도 한다.

이 편액의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라고 라고 하며,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줄로 쓰이는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으며, 뒷쪽에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하나 더 있다.

 

일주문은 전후 4출목의 9포작 다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으로서 편액(篇額)의

형식이 다른 사찰과는 달리 창방과 평방의 중앙에  세로로 曺溪山  大乘禪宗 松廣寺라고 쓰여 있어

송광사가 수선(修禪)을 중시하는 절임을 알려준다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줄로 쓰이는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다.

뒷쪽에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하나 더 있다.

불교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을 삼보사찰(三寶寺刹:세가지 보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삼보사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 경남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경판이 모셔져 있는 법보사찰 경남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는 승보사찰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를 일컫는다.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승맥을 이었다는 의미는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잡아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또 하나는 지눌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분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16분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문 안쪽의 모습 

송광사의 일주문 형식은 조금전에 다녀온 선암사와 구례 화엄사 일주문 느낌과 비슷하다

송광사 일주문인 “曺溪門”은 신라말에 처음 세운것을 1310년, 1676년, 1802년에 고쳐졌으며

현재의 조계문은 1802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계단 좌.우쪽의 짐슴 머리모양을 한 머릿돌은

그 형태가 모호하여 사자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한데 일주문에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니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라는 뜻은 아닌지....

일주문 돌계단 소맷돌에 사자상이 세워져 있는데...  

 모양도 그렇고 앉아있는 자세가 특이하다.

고향수(枯香樹)
척주각과 세월각 앞에는 깃대처럼 생긴 높이 15m의 고사목이 있는데 이름이 고향수다.

 

1200년에 보조국사가 송광사에 오셔서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마른 향나무라는 뜻의 고향수(枯香樹)다. 그런데 보조국사가 돌아가시자 이 향나무도 따라 죽었고, 그때부터 스님들은 국사와 나무를 하나로 보고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 까닭에 죽은 나무지만 800년이 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스님들은 고향수가 다시 사는 날, 보조국사도 환생하여 다시 이 도량에 오실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10 m 쯤 되는 높이의 이 나무는 마치 전봇대처럼 삐쭉 솟아있으면서 바짝 말라있다. 겨울에 봐서인지 더욱 앙상해 보였다.

그러나 보조국사의 혼이 담긴 전설 때문인지 큰 말씀을 기다리는 불자들의 소망을 이 나무를 보며 읽을 수 있다

척주각()과 세월각()
일주문을 들어서면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조그맣게 서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과 세월각()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이 전각들은  보통의 전각에 비해 매우 작은 단칸 건물로 서로 엇비켜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 건물은 죽은 자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죽은 자의 영혼을 실은 가마인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로서 사용되는 특이한 전각이다

 

영가가 사찰에 들어오기 위해서 남자의 영가는 척주각에서, 여자의 영가는 세월각에서

각각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해야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들 2개의 건물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압ㄹ 수 없는 것으로 건축적 구성에 있었으나

종교적 기능에 있었어 매우 독특한 전각이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 모습에 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 

우화각(羽化閣) 

송광사 사역(寺域)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건너야 하는 계류위로 물과 조화를 잘 이룬 홍교(虹橋)와 우화각이 있다 

계곡의 맑은 물 위로 우화각과 홍교가 거꾸로 비치는 모습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국(佛國)으로 향하는 선승(禪僧)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듯 하다...이 다리는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 불린다

또한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한시(漢詩)가 많이 걸려 있어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돋보이게 한다 

 

삼청교(능허교)안쪽에는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무기돌이 박혀 있다.

이무기돌은 이무기나 용의 머리를 새긴 것으로, 장식적인 효과뿐 아니라 재해를 막는 주술적인 기능도 지닌다

침계루(枕溪樓)
침계루는 사자루()라고도 불리는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으로  전면의 뒷칸은

계류의 바위위에 누주(樓柱)를 두어 건물을 받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주로 여름을 이용하여

사찰에서 학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또 승려들의 목련극(目蓮劇)과 팔상극(八相劇) 등을

연습하던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황색, 적색, 청색의 색조 구성이 두드려진다 

아래층 벽체에 환기를 위해 암기와로 모양을 낸 꽃창에 드러난 명랑한 정서가 돋보인다

1층 전면 툇간을 계류의 바위 위에 누주를 두어 건물을 받치도록 하였다.

재(齋)가 있을 때 사용된 공간으로 현재는 선원의 보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왕(좌) 검을 든 동방지국천왕(좌)

송광사 사천왕상은 나무로 만든 틀 위에 진흙을 덧붙여 만든 소조상이다.

조선후기 특히 인조(1624~1649)대에 조성된 거의 모든 사천왕상의 재료가 흙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후반까지는 사천왕상의 재료로 주로 흙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송광사와 같이 소조로 제작된 사천왕상이 봉안된 사찰로는 직지사, 법주사, 화엄사, 선운사,흥국사 등이 있다.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왕(좌)과 당을 든 서방광목천왕(우)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順天 松廣寺塑 造四天王像)(보물 제1467호)
천왕문은 정면, 측면 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순천송광사소조사천왕상은 흙으로 조성한 것으로 송광사 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두 4구가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의 배열은 천왕문의 향 우측으로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과 검(劍)을 든 동방 지국천왕이,

향 좌측으로는 당(幢)을 든 서방 광목천왕과 용·여의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이 각각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방의

순서로 안치되어 있다.

 

네 상 모두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전형적인 분노형 얼굴에 머리에는 용(龍) · 봉(鳳) · 화(花) · 운문(雲紋)이 장식된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무인상(武人像)이며 각기 오른발은 악귀를 밟고 있는데 비해 왼 발은 악귀들이 받쳐 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얼굴 모습은 표정이 분노형으로 강한 인상이기는 하나 볼륨감이 뛰어나 입체적인 면이 돋보일 뿐 아니라

다소 해학적인 면도 나타난다.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각 부의 비례가 어긋나지 않고 적당하며 부피감과 함께 사실적 기법이 돋보인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16세기 초반)과 완주 송광사 사천왕상(1649)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서방 광목천왕상의 지물 중 보탑 대신 새끼호랑이가 등장하는 등

새로운 도상을 보여주어 학술적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1628년(인조 6)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서명과 송광사사고(松廣寺史庫) ·

사지(寺誌) 등의 자료가 남아있어, 정유재란으로 훼손된 상을 1628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내부에 있는

사천왕상은 순조 6년(1806)에 최종적으로 채색되었다

종고루(鍾鼓樓) 

천왕문을 지나면 먼저 종고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통과해야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으며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종고루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법왕문이라고 한다.

종고루 앞에 한붕화상(漢朋和尙)이 새겨진 약수...물맛이 담백하다 

약수물 한잔 마시고 종고루 아랫쪽을 지나 송광사 절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고,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하며,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지순례객을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송광사 주지 진화스님

대체적으로 성지순례를 다니다보면 조그만 사찰에는 안내하는 스님도 없으시고 교구본사에

가봐야 관련 국장스님이나 부장 스님이 나와서 안내를 해주시는데 이곳 송광사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고, 날씨 엄청나게 더운대도 불구하시고 주지스님이신 진화 큰스님께서

손수 나오셔서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여 주신다

송광사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시는 송광사 주지 진화 큰스님

우리나라 삼보사찰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전각들이 보이질 않는데 이곳이 해방 이후에

좌.우의 극심한 대립을 이어온 지리산 근처이다보니 그 여파로 사찰이 화재의 피해를 많이본 탓인지

전각들이 대체적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보이고 특이한 점은 송광사 경내에 탑이 없다는 점이다

 

송광사는 특이하게도 여는 절에서 볼 수 있는 탑이나 석등, 주련, 풍경이 보이질 않는데 그 이유는

참선을 중시하는 송광사에서 풍경(風磬)이니, 주련(柱聯)이니 하는 것들은 수행에 방해가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석등이나 탑 또한 부처님을 모신곳에서 부처님을 기리면 됐지

탑이나 석등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 건물로, 108평(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크기와 자형의

이색적인 건물 평면구조가 눈길을 끄는데 내부의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세 분과

문수·보현·관음·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닫집으로 꾸몄다. 

송광사 대웅보전의 모습 

마당에는 그 흔한 석탑이나 당간지주가 보이지 않아 담백하다 

대웅보전의 소맷돌   

송광사 삼세불과 사대보살

삼세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불로 현세불인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측에 연등불을 우측에 56억 7천만년 뒤에 나타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다.

협시보살 네분은 석가여래 좌측에 문수보살이 사자와 함께 우측에 보현보살이 코끼리와 함께

 연등불 옆에 지장보살이 석장을 미륵불 옆에 관음보살이 정병을 들고 서 있다.

 

1951년 소실 후 1988년송광사 8차 중창때 다시 지어진 대웅보전 내에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으며, 각 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시고 있다.

108평의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 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송광사는 1200여 년전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가 창건하여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라

이름하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선양하였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釋照)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황폐해진 길상사를 고려 명종 27년(1197)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이곳을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도량으로 정하고 가람을 크게 중창,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고

선.교를 융합,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조계종풍을 드날려 고려 불교를 중흥시켰다.

 

그로부터 16국사 등 수많은 고승대덕 들이 속출, 그 명맥을 계승하면서 고려말에 이르러 절 이름이

다시 송광사로 바뀌었고 불.법.승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로서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창건 이후 지금까지 6차에 걸친 중창을 하였고 6.25사변으로 인해 대웅전 등 중심건물이 소실되어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회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동안  제7차 중창불사를 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1969년 조계총림을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여년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광사(松廣寺)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입니다.
송광사에서 배출된 16국사는

(1)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 1158~1210

(2) 진각(眞覺)국사 혜심(慧諶, 1178~1234)

(3) 청진(淸眞)국사 몽여(夢如, ?∼1252)

(4) 진명(眞明)국사 혼원(混元, 1191∼1271)

(5) 원오(圓悟)국사 천영(天英, 1215∼1286)

(6) 원감(園鑑)국사 충지(沖止, 1226∼1292)

(7) 자정(恣靜)국사 일인(一印)

(8) 자각(恣覺)국사 정열(晶悅)

(9) 자오(慈悟)국사 담당성징(湛堂聖澄)

(10) 혜감(慧鑑)국사 만항(萬恒, 1249∼1319)

(11) 자원(慈圓)국사 경린(景麟)

(12) 혜각(慧覺)국사 경총(景聰)

(13) 각진(覺眞)국사 복구(復丘, 1270∼1355)

(14) 정혜(淨慧)국사 복암(復庵)

(15) 홍진(弘眞)국사 선현(禪顯)

(16)고봉(高峰)국사 법장(法藏, 1350∼1428)입니다.

이들 16국사가 입적한 후 부도가 세워졌으며 그 가운데 보조국사 부도, 진각국사

부도, 청진국사 부도, 원오국사 부도, 원감국사 부도, 자정국사 부도, 자각국사 부도, 각진국사 부도,

고봉국사 부도, 이렇게 모두 9기의 부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들 부도는 송광사에 7기가 있고,

나머지 2기는 대원사(大原寺)와 불갑사(佛甲寺)에 각각 1기씩 있다

송광사 대웅보전 신중탱화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39위() 신중탱화가 그 원형을 이루지만

조선시대에 차츰 불교가 민간 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보다 많은 신들을 수용하여 104위 신중탱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다시 개개의 신들이 지니는 본래의 신앙적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서 다시 분화되는데 송광사의 신중탱화는

중앙의 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한 104위의 신중탱화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신중탱화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대예적금강신()을 주축으로 한 탱화로 전체 화폭의 1/3이 금강신이 차지하고

좌측에 제석천(), 우측에 대범천(), 아래에 동진보살()을 도설()하였다.

주위에는 성군()·명왕()·천녀() 등을 묘사한다.

 

둘째는 제석천과 대범천·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이 탱화는 3위의 중심 신중을 중심으로

그 권속의 수에는 변화를 보인다.

이 탱화의 특징은 좌측은 천상()을 중심으로 한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제석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신을 위쪽에,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금강신장을

아래쪽에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셋째는 제석천·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달리 제석탱화라고도 하는

이 불화는 모든 신중을 제석의 주위에 배치한다.

여기에서는 무장을 하지 않은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것과 무장을 한 신장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넷째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이 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상하에 팔부신장()과

십이지신장() 등 신장만을 묘사하게 되므로 신장탱화()라고 한다

송광사 대웅보전 조사단 탱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 협시 보살과 승보종찰답게 많은 조사들을 함꼐 모셨다

대웅보전 입구 소맷돌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승맥(僧脈)을 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800여년 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데 그 근본도량이 이 송광사이다

 

둘째는 지눌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지눌스님과 함께 모두 16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인 중요한 사찰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의종(毅宗) 12년(1158)에 황해도 서흥군에서 부친 정광우(鄭光遇)와

모친 조(趙)씨 사이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는데 부모가

‘병이 나으면 출가시키겠다’하고 부처님께 기원을 했더니 이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지눌스님은 어려서 선종 계통의 종휘(宗暉) 선사로부터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호를 목우자(牧牛子) 즉, 소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타락된 모습으로, 밖으로는 불교가 정치적 혼돈속에 휩쓸려 승려들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안으로는선(禪)과 교(敎)가 서로 대립하여 갈등을 일으킨 상황인데

당시 상황을 스님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 소행을 돌이켜 보면 어떠한가? 佛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가리면서 이기적인 일에

구차스럽고 풍진(風塵)속에 빠져 도와 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축을 내니 비록 출가를 한다고 한들

무슨 득(得)이 있겠는가

아! 삼계(三界)를 떠나려 하면서도 속세르르 벗어날 수행이 없으니 다만 사내의 몸을 받았을 뿐 장부(丈夫)의

뜻이 없도다...위로는 도를 넓히는 일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젋은 지눌스님은 이러한 고려 불교의 실상을 ‘호랑이 눈(虎視)’으로 통찰하였다

지눌스님은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바로 세우기로 결의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정혜결사(定慧結社)이다

스님은 25세에 당시 출세의 관문인 승려 과거(僧選)에 합격하였으나 스님은 출세의 길과는 달리 뜻을 같이하는

스님 10여명과 함께 더불어 고려 불교를 정법 불교로 바로잡는 정혜결사를 맹약하였다.

  

젊은 지눌스님은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전남 창평의

청원사(淸源寺)에서 정진을 계속하는데 그곳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통해 진리를 터득한다

그런 다음에 경북 예천 하가산 보문사(普門寺)에서 3년동안 “대장경(大藏經)”을 읽는다

 

그 당시에 선승(禪僧)이 대장경을 읽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인데  지눌스님이 대장경을 읽은 이유는 뭘까?

그것은 禪과 敎가 서로 일치되는 증거를 부처님 말씀을 통해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눌스님은 드디어 「화엄경(華嚴經)」에서 그 일치점을 찾아낸다.

스님은 감격하여 경책을 머리에 이고 방 안을 돌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禪.敎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고뇌하였으며 그 일치점을 찾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따라서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인

선과 교는 손바닥의 안과 밖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체험을 통한 결론은 선과 교를 아우르는 정혜결사의 중요한 초석이 된다 

송광사 대웅보전의 모습

스님 나이 33세에 팔공사 거조사(居祖寺)에서 8년전에 결의한 정혜결사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다

결사운동의 취지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한국불교 최초로 체계적인 결사 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스님들은 물론 재가의 불자,심지어는 유교, 도가(道家)의 사람들도 동참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좀 더 넓은 도량이 필요하였다.

여러곳을 수소문한 결과 송광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그곳은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한 길상사(吉祥寺)가 폐허 직전에 있었는데 그곳은 도량이

넓고 훌륭하여 결사운동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라 생각되어 스님께서는 송광사로 옮기로 한다

 

한편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마지막 깨침의 정진에 들어간다

대혜(大慧)스님의 어록을 읽다가 “禪은 고요한 곳에 있는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는

대목에서 큰 깨침을 얻었다.

 

스님은 드디어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스님 나이 43세때인 1200년에 정혜결사도 길상사로 그대로 옮겼으나

인근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이 있어 혼돈되므로 수선사(修禪社)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고려 불교를 일신하여 정법을 바로 잡으려는 본래의 취지와 하는 일에는 다름이 없었다.

산과 절 이름도 송광산 길상사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님은 송광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정혜결사 운동의 완성을 위하여 ‘소 걸음(牛步) 의 실천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로 독특한 목우가풍(牧牛家風)을 확립하였으니 새로운 한국 정통 불교의 확립이다

불교의 결사(結社) 운동은 불교가 새로워지려는 몸짓이다

지눌스님의 정혜결사 또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과 멀어진 고려 불교를 바로잡고 새롭게 하려는 운동이었다.

고려 불교가 종교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된 것은 불교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인 마음닦는 일(修心)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마음 닦는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들이 현실 문제에 휩쓸리어 타락하고 또, 禪과 敎의 불화의

갈등도 실제 마음을 닦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님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닦는 불교를 정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님 자신도 정혜결사를 약속한 다음 당시 서울(개경:지금의 개성)을 등지고 마음 닦는 일에

정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로 정혜결사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곧추세우는 정법결사(正法結社)요

마음을 닦는 수심결사(修心結社)라 할 수 있다

대웅보전에서 인증샷

비사리 구시

승보전 옆에 있는 비사리 구니는 1724년 전라남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영조 이후 국제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이라 한다.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잇다고 하며 송광사 3가지 명물(능견난사, 쌍향수, 비사리 구시)중 하나이다. 

송광사 종무소

예전에 송광사 성보박물관으로 사용하였는데 성보박물관을 새로지어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성보각()은 유물 전시를 목적으로 지은 누각형 이층건물로 1997년 10월 개관했는데 목조삼존불감 등

송광사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들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송광사 응향각(凝香閣)

불전이나 법당을 관리하는 소임을 지전(持殿) 혹은 노전(爐殿)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거쳐하는 곳을

응향각 혹은 향로전이라 한다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 당시

현재 지장전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증축하였다.

지장보살과 유명계의 시왕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지장보살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이 구제될 때 까지 성불을 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운 보살이며 좌,우 협시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있으며 그 옆으로 명부 시왕과 판관,

녹사, 사자, 동자상을 배치하고 있다.

지장전 옆에는 담장으로 구획된 곳이 있는데, 담 안쪽의 여러 건물들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송광사 승보전(僧寶殿)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인 건물로 6.25전쟁 이후 중창된 대웅전 건물을 옮겨지은 건물이다.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집으로,1961년 중창되어 내력이 오래지는 않지만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므로 법당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승보사찰’인 송광사에서 승보전이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는 크다.

승보전 안에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던 모습을 석가모니불과 10대제자,

16나한 및 1천 250 비구 제자상을 봉안하여 석가모니의 영상회상을 재현하고 있다.     

송광사 대웅보전 주위를 둘러보고 약사전과 영산전으로 향한다

송광사 약사전과 영산전은 나란히 붙어있다 

송광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약사전은 송광사 경내(境內)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법당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형태로 보아 조선중기인 17세기 무렵 건립(建立)한 건물로 추정된다.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로만 메워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약사전은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다. 
1974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영조 27년(1751)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단아한 모습의 약사여래와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약사전 내부에는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고 있으며 후면의 불화는 광무(光武) 8년(1904)에

그려진 것으로 원래는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송광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이 건물은 영취산에 거주하며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인 영산회상의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대회탱(靈山大會幀)과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八相幀)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朝鮮) 인조(仁祖) 17년(1639)에 창건되었다 영조 13년(1737)에 중건되었으며, 약사전보다

크기만 좀 클 뿐 건물 생김새는 똑같으며 화려한 다포 구조를 갖춘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팔작지붕집으로, 내부는

기둥과 보 없이 통칸으로 처리됐으며, 석가여래와 함께 규모가 큰 영산회상도를 후불탱화로 모시고 있다.

 

이 영산회상도는 영조 원년(1725)에 금어 의겸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는데 진경시대의 화풍을 유감 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나머지 세 벽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팔상도의 배경으로 그려진 건축물과 풍경은 인도나 중국이 아닌 조선다운 모습이며 인물이나 복식도 조선시대의

특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외래종교를 토착화해낸 우리 불교미술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웅장한 영산전의 공포

송광사 강원(講院)의 모습

불교전문강원은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께서 설하신 가르침인 경전을 통해

 스님으로서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등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송광사 불이문(不二門)

불이문은 큰 사찰에서 일주문과 사천왕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의 경지를 상징한다.

불이문은 중생이 극락에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대웅보전 위에 있는 불일문 안에는 목우현(영월루)과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인 주심포계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향우편 서향으로 세워졌는데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진각, 청진, 진명, 원오, 원감, 자정, 자각, 담당, 혜감,

자원, 혜각, 각진, 정혜, 흥진, 고봉, 등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정신이 집결된 곳으로 현재 출입을 금하고 있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修禪寺) 등이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여문(眞如門)을 들어서니 스님들의 요사채로 보이는 전각들이 보이고 마당너머로

수선사. 설법전. 조사전이 보이나 1995년 조사전 도난사건 이후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많이 아쉽기만 하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송광사의 가람배치는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도 질서 정연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불일문 안에는 목우현(영월루)의 모습 

대웅보전 위에 있는 불일문 안에는 목우현(영월루)과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인 주심포계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향우편 서향으로 세워졌는데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진각, 청진, 진명, 원오, 원감, 자정, 자각, 담당, 혜감,

자원, 혜각, 각진, 정혜, 흥진, 고봉, 등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정신이 집결된 곳으로 현재 출입을 금하고 있다

진여문에서 뒤돌아본 영산전(좌)과 앙증맞은 약사전(우)의 모습 

짧은 시간에 여러곳을 다니다보니 수박겉할키식 성지순례라 조금은 아쉽다

대웅보전 마당에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송광사 사역(寺域)을 빠져 나온다

송광사 사천왕문을 빠져 나온다

호남정맥 산행길에 장군봉 아래에서(2011.08.14 무박산행)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에서(2011.08.14 무박산행)

멋진 조계산의 능선들(2011.08.14 무박산행때의 사진)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두 사찰을 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쪽 기슭에는 태고총림 선암사, 서편 기슭에는 조계종 삼보사찰로 이름난 송광사다.

이들 사찰은 모두 통일신라 때 창건된 천년고찰들로 수많은 관람객들이 사시사철

찾아든다. 조계산은 그 이름도 국내 불교문화의 요람이란 뜻에서 조계(曹溪)라 얻었다.

 

우리나라에는 6개의 총림이 있다. 조계종 종단에 5개의 총림이 있고( 불보종찰인

영축총림(통도사), 법보종찰인 해인총림(해인사), 승보종찰인 조계총림(송광사)

덕숭총림(예산 수덕사), 고불총림(장성 백양사)가 있고  태고종 종단에 소속된

태고총림 선암사가 바로 이곳 조계산 자락에 있다. 이곳 조계산 자락에 2개의

총림이 있는 그야말로 佛國土이다.

 

조계산의 원래 이름은 청량산이었으나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바꾸었다고 한다

조계(曹溪)란 원래 중국 선종의 제6대조인 혜능스님의 별호로서 고려때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이 산을 “돈오점수(頓悟漸修: 곧 문득 깨달 후 점차 세속의 습을 제거해 나간다)” 

는 수행법을 따르는 수선사를 열면서 산 이름이 처음에 송광산에서 조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 조계종은 고려시대 180년동안 16國師를 배출하면서 크게 흥성하여 불교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었으며,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찰이 바로 송광사이며, 그래서  송광사를 僧寶宗刹이라고 한다  

최근에 문을 연 송광사 성보박물관

대웅전 맞은편에 있었던 예전 박물관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람 바깥쪽에 새로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진짜를 보려면 박물관을 꼼꼼히 봐야하는데 늘 시간에 쫒기다보니 박물관 관람은 수박 겉할키식이라 조금 아쉽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표 불교박물관으로 1997년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에는 희귀 불교문화재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보조국사가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을 비롯해 금동요령(보물 제176호),

경질(보물 제134호), 경패(보물 제175호), 고려고종제서 (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 수선사형지기(보물 제572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고려문서 즉 노비첩, 등 국보 3점 보물 10점 등 총 6천여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추사 김정희의 서첩, 영조의 어필 흥선군의 난초족자 등 지방문화재 26점과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대장경의 목함에 순서를 표시하기 위해 붙였던 경패는 두께 0.5cm

가량의 작은 판을 속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조각한 뛰어난 작품이다.

모두 43개가 남아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그리고 송광사의 3대 명물로는 불가에서 법당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 사용하던 용기인 '능견난사'

송광사 부속암자인 천자암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곱향나무 두그루 '쌍향수' 사찰에서

국재를 모실 때 사찰로 몰려든 대중에게 나눠주려고 밥을 저장했던 목조용기인 '비사리 구시' 등이 있다.

 

 

 

성보박물관에 들려다가 시간에 쫒겨 나오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