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8년 11월 24일
김제 금산사, 귀신사...그리고 완주 송광사
이번달 법보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삼국유사 성지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기행” 이번달 성지 순례는
미륵보살의 불국토가 있는 김제 금산사로 떠나는데 금산사, 귀신사를 품고있는 모악산(母岳山)은
영태(靈胎)를 모신 정상 아래에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같아 지어진 지명이다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금산(金山), 조선시대에 쓴 동국여지승람에는 모악산으로 나와있다.
금산사지(金山寺志)에는 “조선의 고어(古語)로 엄뫼 또는 큰뫼로 칭하였다.
엄뫼는 모악(母岳)이라 의역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音譯)하여 금(金), 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모악은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도작문화(稻作文化)를 발생시켰고, 새 생명을 잉태한
문화유적의 산실로 백제유민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미륵신앙의 텃밭인 동시에 증산교를 비롯한
토속신앙이 아주 발달된 곳이 모악산인데 호남사람들은 큰산이라고도 부른다
이른 아침에 조계사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금산사로 향하는데 올 겨울들어 서울에 첫 눈이 펑펑 쏟아진다
버스는 출발하고 수원을 지나면서 비로 바뀌더니 금산사 I.C를 지나면서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금산사 가람 배치도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서 금산사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20년도 넘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금산사를 찾는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오늘도 주박사님의 멋진 안내를 기대하면서 일주문을 지나 가람에 가장 가까운 곳에 버스는 멈춘다.
원래 사찰 순례를 하려면 일주문에서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 팀들은 약간의 특혜(?)를
받아 절집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다가 보니 이곳도 일주문과 견훤석문이라고 칭하는 홍예석문을
놓치는 憂를 범하는데 금산사 홍예석문은 금산사로 통하는 관문으로 예부터 금산사를 수호하는
성문으로 후백제의 왕 견훤이 큰 아들 신검에게 유폐된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금산사로 향하는 길에 조그만 전각이 나오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다.
이곳에는 돌할머니라 부르는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데 일제시대때에 배고픈 병사들을
위해 빈 절구통에 절구질을 하면 쌀이 나왔다는 전설을 갖고있는 부처님이란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親見을 하지 못하고 가는게 아쉽기만 하다
전각(殿閣)옆에는 토속신앙의 흔적이 보이는게 이채롭다
금산사 해탈교(解脫橋)
마치 순천 선암사 승선교를 옮겨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너무나 닮았다
다리 아래에 있는 용두(龍頭)까지도 승선교를 빼닮았다
금산사 금강문(金剛門)
1994년에 건립된 이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
2구와 함께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강문에는 가람의 외곽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
금강문에 모셔진 밀적금강(密迹金剛)과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모셔져 있는데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를 들고 항상 부처를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밀적이란 붓다의 비밀스러운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나라연금강은 코끼리보다 100만 배나 힘이 세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 있는 신중(神衆)이 아니라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광이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상징한다.
보통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음금강역사'라고 한다.
그의 자세로는 주먹을 쥐고 한 팔을 들어올리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의 모습
금산사 천왕문(天王門)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천왕문은 1994년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좌우 각 2구씩 목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서방광목천왕(左)과 북방다문천왕(右)
동방지국천왕(左)과 남방증장천왕(右)
금산사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법당 대신 설법을 하기 위하여 지은 누각.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그것은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 등이 대중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넓지 못하다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중심 불전을 마주 올려다볼 수 있는 누각에서 법요를 베푸는 옛 방식의 하나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이 누각에서 예불하고 설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즉, 초기 가람 형태에서
금당(金堂)의 뒤편에 배치되었던 강당(講堂)의 기능을 이 누각이 금당의 앞쪽에서 대신하게 된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중문(中門) 역할의 건물이 보제루인데 현재의 건물은 1960년대에
건립되어 1998년에 증축된 바 있으며,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 규모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의 보제루는 아마도 이 만세루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하며, 2층은 주로 법회나
대중집회의 공간으로 활용되는데, ‘보제루’라는 편액 외에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는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최근에 조성된 금동석가여래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누각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조선시대부터 인데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집결소가 되고 군사적 필요에 따라 누각으로 번성하였다고 하며 승병이 사라지면서 법회, 강설, 대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인 기능이 아닌 가람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보제루 아래를 지나니 대적광전이 있는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으며,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大寂光殿>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이 1991년 쓴 글씨다.
황욱(黃旭, 1898~1993)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도 악필법 쓴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大華嚴寺>와
<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불보살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 :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는데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 · 노사나불 ·
그리고 약사불이고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 관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일광보살 그리고
월광보살이다... 5여래는 모두 목조 좌상으로 높이는 대개 2.56m 안팎이고, 6보살은 모두 소조 입상으로 높이가
2.73m 정도로 수인은 불상에 따라 각기 선정인 · 지권인 · 시무외인 등을 취하였고, 보살상은 한결같이 화관(花冠)으로
장엄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전각을 중창하면서 불보살상도 이때 조성한 듯 간략화한 법의와 다소 경직된 상호 등에서
조선 중기의 일반적 경향을 살필 수 있는데 이처럼 5여래와 6보살을 봉안한 전각은 그 유례가 없다.
한국의 불교는 흔히 통불교(通佛敎)라고 하는데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禪과 敎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으며, 주존불을 어떻게 모셨는가에 따라 중심
전각만이 대웅전 · 무량수전 · 비로전 등으로 나뉠 뿐이고,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관세음신앙과 지장신앙 ·
약사신앙 등이 어우러져 있다... 심지어 재래의 토속신앙마저 융화시켜 산신 신앙으로 불교화 하고
있음은 이러한 한국 불교의 통불교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 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 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의 문살
금산사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보물제27호)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점판암으로 건립되었으며, 높이 2.18m이다.
금산사 경내 대적광전(大寂光殿) 왼쪽에 있는데 원래 금산사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는데. 기단(基壇)은 지상에 6각의 화강암 석재 3단이 놓이고, 각 면에 사자가 양각되었다.
6각 점판암 석재가 2장 놓였고, 하층은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 상층은 앙련(仰蓮:위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그 사이의 중석(中石)자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연화대석(蓮花臺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각층이 6각으로 현재 최상 2층의 옥신이 남아 있고 이하의 옥신은 없어졌으며,
옥개석(屋蓋石)은 11층까지만 남아 있고, 최상 2층의 옥신은 한 덩이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우각(隅角)에 우주형(隅柱形)이 있으며, 각면에는 원 안에 좌상의 불상을 선으로 새겼다.
옥개석 상하에 홈이 패어 있어 주목되며, 이것은 옥신을 1장석(一帳石)으로 만들지 않고 각 면마다
1장씩의 판석으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으나 화강석재로 보충하였다. 특수한 석재를 사용한 점에서 이색적이며,
각층의 체감비율이 완만하고, 각층의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이 탑을 한층 아름답게 만들었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시대로 여겨왔으나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미륵전(彌勒殿:국보 제62호)
미륵전은 금산사에 있는 1635년(인조 13)에 지은 목조건물.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1·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며 겉모양이 3층으로 된
한국의 유일한 법당으로 내부는 통층(通層)이다.
기단(基壇)은 양쪽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앉힌 돌계단이 있으며, 두리기둥은 우주(隅柱:모서리 기둥)가 매우 굵고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올렸으며, 머리끝 부분과 기둥 사이에 공간포(空間包)를 놓았다.
기구(架構) 방식은 1층은 고주(高柱) 4개와 20개의 기둥을 주위에 세워 고주와 이 기둥들을 커다란 퇴보로 연결하였다.
2층은 이 퇴보 위에 가장자리 기둥을 세워 그 안쪽 고주를 퇴보로 연결하였고, 3층은 몇 토막의 나무를 이어서 만든
고주를 그대로 우주를 삼아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 특수한 가구 방식은 목조 탑파(塔婆)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데, 심주(心柱) 각층 기둥이 연결되는 방식을 본떠서 한 개의 심주 대신에 네 개의 고주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二出目)으로 외부 첨차(檐遮)는 우설(牛舌), 내부 첨차는 운궁(雲宮)으로 되었다.
1층과 2층의 퇴보는 그 끝이 길쭉하게 뻗어나와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고, 그 아래에 운공(雲空)이 있다.
규모가 웅대하고 상부의 줄어든 비율이 크기 때문에 안정감을 준다.
미륵전의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으며,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丈六殿)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이와같은 가구법은 (架構法)은 목조탑파에서 하나의 심주(心柱)를 세워 보(褓)를 심주에 걸던
수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법당은 목조탑파의 가구법이 아니라 3층 전각의 가구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내부의 공포에 있어 초제공(初諸工)과 이제공(二諸工)
모두의 살미첨자의 끝은 한 판(板)으로 붙은 운형(雲形)으로 조각되어,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추녀는 모두 활주를 세워서 떠받치고 있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1층 평면의 구성을 보면 내진(內陣)의 후반부 3칸에 3면을 벽으로 막아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불상 앞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밑에 통로를 내어 본존불상의 철제 대좌를 만져볼 수 있게 처리하였다.
후불벽을 비롯한 1, 2, 3층의 벽면이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으나 탱화나 벽화는 내부에는 남아 있지 않고,
1층 외벽에만 관음보살, 사천왕, 금강신장 등 30개의 벽화가 남아 있으며, 안팎의 포벽 각각 36개소에는
전면에 여래좌상, 남북측면에 관음보살입상, 미륵보살입상, 동측면에 나한상을 그리고 있다.
2층 포벽에는 28개소에 인물화, 3층 포벽에는 18개소에 여래좌상과 존자상 등이 그려져 있다.
벽화조성 연대는 외부는 1946년 이후, 내부는 1897년 무렵인 것으로 짐작된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미륵전 내부에는 소조불(塑造佛:흙으로 형태를 빚은 뒤 자연 건조시켜서 만든 불상)로
만든 미륵보살상이 있는데 건물 내부에 있는 불상중에는 세계 최고의 크기.라고 한다.
미륵불 본존의 높이가 11.82m이고 법화림 보살(좌)과 대묘상보살(우)는 8.79m라고 한다
이 미륵불상에 대해서「증산도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밤에 금산사 미륵전에 불공을 드리던 사람들이 실수를 하여 장륙미륵불상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좌우 시립한 보살상과 미륵전은 화마를 피했으나 가운데 서 있는 미륵불만 불에 타서 왼쪽으로 넘어졌다.
장공 김복진(金復鎭)이 조각을 시작한 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하여 무인년(戊寅年 : 1938년) 9월 3일에
육장 반(六丈半)의 미륵불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 소조불상은 작가 스스로 ‘서울에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서울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운송하여 현지에서 조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한 이 불상은 11미터가 넘는 대형의 장육불상으로 정면을 향하여 있으며 좌우에는
조선 인조대에 만들어진 협시보살이 있는데 머리 정상에는 붉은 색 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머리는 나발이다.
귀는 양쪽으로 늘어져 있으나 긴 편은 아니며 반개한 눈에 근엄한 표정이다. 몸에는 통견을 둘렀으나 양쪽 가슴이
길게 늘어져 보이고 왼손은 앞으로 들어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두 다리는 치마 아래로 윤곽이 드러나 보이고, 아래로 지그재그의 옷주름이 다리 사이를 관통하고 있으며 양손
아래로 내려온 소매의 주름도 지그재그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도상은 파괴되기 전의 불상을 참고로 제작한 것이며,
얼굴 표정과 손가락의 표현 등에서는 전통적인 조각과 달리 신식 조각가로서 인체의 특성을 불상에서 구현하였다.
미륵보살상 발 아래는 돈이 많이 보인다
1935년 3월 9일밤에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미륵전의 본존불상이 화재로 불타서 넘어졌다.
사찰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이 불상은 솥(鼎)을 엎어 대좌로 사용한 입불상이었는데
사람들이 동전을 그 위에 던지곤 하였다고 한다...어느날 동자승이 그 동전을 주우려고
밤에 촛불을 들고 법당에 들어 갔다가 그만 실화(失火)로 본존불이 불에 탔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은 미륵전에 불공이 드리던 사람들이 부주의로 불이 났다고도 한다
삼존불 아랫쪽으로 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거기에는 쇠로된 커다란 솥이 있는데 손을대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방등계단에서 바라본 금산사(金山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은 김제의 명산으로 산이 깊고 넓어 비경을
많이 감추고 있는 예로부터 호남 사경四景을 말할 때 금산사를 가장 먼저 꼽는 것도 바로 영산인
모악산에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진표(眞表) 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는데 진표율사는 숭제 법사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하였고, 그 뒤 변산의 불사의방에서
17년이나 극한적 고행 수도인 망신참(亡身懺)을 하여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는
표지인 간자(簡子)를 건네받은 이야기는 불교사상 유명하다.
그 뒤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762년부터 766년 동안 금산사를 대찰로 중창하였는데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후삼국시대인 935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이 지역 최대의 사찰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1097년 혜덕왕사가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가 금산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이루었던 시기다.
가람배치도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으로 구획되어 86동의 건물과 43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금산사의
전성기라고 할 만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뇌묵 처영 스님이 이끄는
의승병의 거점이 되어 호국에 앞장섰으나 정유재란 때 왜구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가람이 불타 버렸다.
그 뒤 수문(守文) 대사가 대사구 지역을 복구하면서 중창을 이루었고 금산사의 명성은 이어져 1725년
환성 지안 스님이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전국에서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할 정도였다.
근래에는 1961년 월주(月珠) 스님이 중창을 시작하여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전통찻집, 보제루 등을 새로 짓고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등을 해체 복원하였고, 방등계단 성역화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금산사에는 숱한 문화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지정문화재만 들더라도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노주(보물 제22호), 석등(보물 제828호),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 제24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등이 있다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보물 제23호)
석련대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대좌로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 쯤 떨어진 석축 아래에 있는데 석련대란 석조연화대좌의 준말인데, 이 석련대는 규모도 크고 세부 조각
수법에서도 뛰어나다.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마치 많은 부재를 사용한 듯하고,
상·중·하대의 구성이 정연하며 화려하다
상대(上臺)는 기능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불상을 안치하였던 상부는 평평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불상 양발 밑의 돌기를 끼워 넣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두 개의 네모 구멍이 중앙에 있다. 바깥쪽으로는 이중의
둥근 테를 음각하여 장식성을 높이고 있다.
아래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잎이 전면을 에워싸고 있는데, 밑부분에 10개, 다시 그 사이마다 하나씩,
모두 20개의 피어오르는 단판앙련화문(單瓣仰蓮花文: 홑잎의 연꽃잎이 위로 향하여 있는 무늬)이 조각되어 있다.
상부의 꽃잎 사이에도 밖으로 향하는 작은 잎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전면을 빈틈없이 채워 넣으려는 화려한 장식적
의장이 엿보이며, 연꽃잎은 넓은 홑잎이지만 그 안에 다시 세 겹의 잎이 겹겹이 놓여 있어, 둥근 면을 따라 층층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활짝 핀 연꽃의 팽창감 있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중대(中臺)는 육각인데, 각 면에는 좁고 긴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 귀꽃 같은 화형(花形)무늬가 양각되었다.
받침 또한 육각으로 2단의 각형(角形)이다.
하대석(下臺石)의 윗부분은 출렁이는 물결 모양의 복판복련화(複瓣覆蓮花: 아래로 향하여 있는 겹잎의 연꽃잎) 10개가
가지런히 전면을 채우고 있다. 상대석 연꽃잎이 지닌 화려함과는 달리 힘찬 역동감이 강조되어 대좌 전체에 안정감을 준다.
하대석의 측면에는 한 면에 하나씩 모두 10개의 안상이 조각되었으며, 그 가운데 8면의 안상에는 서화형(瑞花形: 눈 모양)이,
2면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었다
이 석련대는 규모나 조형성에 있어서 현존 불상대좌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하대의 연꽃잎은 9세기에 조성된 양양 선림원지 승탑(보물 제447호)의 연꽃잎과 양식상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꽃잎 속의 화사한 무늬나 중대석 안상 내의 귀꽃형 장식 문양 또는 하대석 안상 내의 장식 조각의
무질서한 배치, 그리고 하대석이 매우 넓어진 점 등은 보다 후기에 제작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제8호)의 연꽃잎에 비하여 율동적이고 사실감이 뛰어난 점으로 미루어보면,
이 작품의 조성 시기는 10세기 중엽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방등계단(金山寺 方等戒檀:보물제26호)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종형 사리탑 및 계단으로 방등(금강)계단은 경내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높은 대지 위에 형성된 2중 방형기단 위의 중앙부에 석종형 사리탑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계단은 기단 위에 종 모양의 사리탑을 세우고 수계자에게 계율을 전수하던 곳으로 금산사의 계단을 특별히
방등계단이라 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근본이 계에 있고 계를
지키는 것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므로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산사 금강계단이 언제, 어떤 사상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이 전하지 않아 개축된 시기나 내용도 알 수 없으나, 762년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의
사상이 참회에서 미륵의 수계로 이어진 것을 보면 진표율사에 의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혜덕왕사(慧德王師)소현(韶顯, 1038∼1095)에 의해 금산사가 크게 중창될 당시 재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면석마다 고려시대 양식을 보이는 조각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원명대사(圓明大師)해원(海圓, 1262∼1330)에 의해 금산사가 다시 중창되면서
금강계단 역시 개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기단 면석 조각 중에는 조선시대 양식을 보이는 것도 있어
조선시대 들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조성된 듯하다.
금산사 경내 대적광전 오른쪽, 미륵전의 왼쪽으로 높은 대상(臺上)에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이 고려 전기에
조성된 오층석탑과 나란히 있다. 구조는 상하 2단의 정방형 기단 위에 석종형 사리탑을 놓은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1,250㎝, 높이가 80㎝이며 상층기단은 길이가 850㎝, 높이가 6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기단의 외곽에 길쭉한 석재를 이어 붙여 사리탑의 경계를 두르고 그 안쪽에 사리탑을 축조하였다.
기단 면석마다 고려시대의 기법이 잘 표현된 불상과 신장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하층기단의 3면에는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 있는데, 인왕상으로 보인다. 난간의 사방 모서리
위치에는 사천왕상을 세워, 기단 영역의 내부가 성스러운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계단의 중앙부에는 한 장의 판돌을 깔아 사리탑의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탑신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머리를
새겨 놓았으며 돌판 한가운데에는 연꽃잎을 둥그렇게 새겨 두르고 그 안쪽 테두리에 맞추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날씬한 종모양이며 아래쪽에는 꽃무늬를 장식한 띠를 새겼고 꼭대기에는 아홉 개의 용머리가 밖을 향하도록
조각하였는데 이는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없는 것이다. 구룡의 머리 위로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앙화를 얹고 그 위로는
위아래가 납작한 공 모양의 복발을 놓고 맨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얹어 놓았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계단형식의 사리탑 중 완전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문 상황이므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아울러 돋을새김 조각으로 석단의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탑신에 용머리를 장식한 점과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새김 장식에 나타난 조형 등은 김제 금산사 석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金堤金山寺金剛戒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방등계단에서 미륵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방등계단에서 바라본 대적광전의 모습
금산사의 특징중에 하나는 모든 전각에 주련에 하나도 없다.
아마도 선종 사찰이 아니어서 그러는 모양이다
금산사 조사전
금산사대장전(金山寺大藏殿:보물 제827호)
금산사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이 건물은 본래 미륵전 앞에
세웠던 팔각원당형 목조탑으로서 장경각(藏經閣)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임진왜란 후에 수문(守文)대사가
중창할 때 이를 팔작지붕의 건물로 세웠는데, 현재는 장경각의 기능은 없어지고 내부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건물의 구성은 다듬은돌바른층쌓기를 한 석조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건물 정면의 중앙칸에는 분합문을 달았고, 좌우칸은 아랫부분에 안상(眼象)이 조각된 판벽을 설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흰 회벽으로 처리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주두(柱頭)와 주간(柱間)에 각각 한 개씩의 공간포를 짜올렸으며,
전후 중앙칸만은 각각 두 개씩의 공간포를 올린 다포계 양식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중앙 내주(內柱) 사이에 간벽(間壁)을 치고 상부에는 중방을 걸었고, 천장은 중앙 1단을 높여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또한, 이 간벽에는 상부에 화염문의 장식벽화를
그리고, 그 앞에는 목조의 거신광배(擧身光背)를 세웠으며, 전면 수미단은 높이 1.07m, 전면길이 4.0m, 측면 1.8m로서
4단으로 구획하여 정교한 장식문을 투조(透彫)하였는데, 보기드문 예술품이다.
이 건물은 본래 목조탑파형 건물로 기록되어 있는 매우 특징있는 건물로서, 탑파형 목조건축물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장전은 불교의 경전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로 장경각이라고도 불린다.
금산사의 대장전(보물 제827호)은 정면과 측면이 3칸인 다포식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본래 진표율사가 세운 전각으로 원래 모양은 정팔각형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 1635년에 지금과 같은 전각으로 변형하였다.
지금도 전각 꼭대기에 복발과 보주등이 남아 있어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보여준다.
삼면의 벽에는 10폭의 변화가 그려져 있다
대장전은 두 벌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세웠다.
팔작지붕의 용마루 중앙에 불탑의 상륜부를 세워 놓은 점이 특이한데, 평면이 정면 3칸,
측면 3칸인 점, 내부에 고주 2개를 세운 점 등은 일반적인 구성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불단을 고주 앞쪽이 아닌 뒤쪽 후벽에 기대어 안치한 점, 고주를 상하 2토막을
이어 만든 점 등은 특이하며, 또 정면 중앙 칸과 좌우 측면 앞툇칸에만 문을 설치하고,
나머지 칸에는 모두 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감실처럼 만든 점은 독특한 예이다.
정면 문짝의 문살은 아름다운 소슬꽃살무늬를 수놓듯이 조각하여 만들었다.
공포는 안팎 2출목이며, 포벽에는 꽃, 층급벽에는 나한도를 그려 놓았다.
공포의 구성은 정면, 측면이 같고 후면은 달라서 주목된다. 첨차끝의 쇠서에는 안팎 모두
연꽃을 장식하였고 첨차 밑부분은 초각(草刻)하고 몸에는 당초무되를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불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광배를 갖춘 석가불좌상과 좌우협시인 가섭상과 아난상을 봉안하였다.
불단은 정교하게 조각된 용, 봉황, 비천, 꽃무늬 채색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대장전 안쪽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는 수미단은
높이가 1.07m, 전면 길이 4.0m, 측면 길이 1.8m이며 4단으로 구획하여 정교한 장식문으로
투조(透彫)하였는데 보기 드문 예술 작품으로 꼽히며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있다. 건물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규모이지만 정중 목탑의
변형 건물로 주목되며 석가모니불 후불광배의 조각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대장전의 문살
솟을빗꽃살문 형식이며, 문살이 교차하여 형성된 육각형의 영역안에 꽃잎이 여섯장인 관념적인 꽃을 새겼다.
붉은색, 푸른색, 흰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었으며 같은 색의 꽃들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사찰의 법당 문은 거의 대다수가 꽃살 문양으로 되어 있는데 빗꽃살문과 소슬빗꽃살문이 주류를 이루며
통판에 꽃문양을 투조(透彫)한 것도 간혹 있다...빗꽃살문은 살대를 45도와 135도를 빗대어 교차시켜
짠 문으로 격자문을 기울인 모습과 흡사하고, 소빗살문은 빗살문에 장살(수직살)을 첨가한 것을 소빗살문이라
부르는데 빗살문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문살위에 꽃이나 추상적인 무늬를 새겨 장식성을
훨씬 높인것이 특징이다
사찰 전각의 문은 중생이 이승의 티끌을 털고극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이기에 불교에서는
최상의 장엄을 표현하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과정
에서 사용된 것도 꽃이고 불교의 최고 경전인 법화경(妙法蓮華經)과 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의
명칭에서도 꽃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꽃이 법이요, 부처님의 진리이다
꽃살문은 주로 교살문, 격자문살의 교차된 부분에 꽃무늬를 부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사찰의 꽃살문은 대부분 부처님을 예배하는 법당의 출입문에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부처님을
경배하는 최상의 공양물이 꽃이기 때문이다...불교 예술의 정수라고 표현하는 사찰의 꽃살문은
세계 어느나라 건축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예술성이 깃든 조각품이다
문살 아랫쪽에 그려져 있는 용의 모습
노주(露柱: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노주의 정확한 용도를 알 수가 없으나 그 형태의 방형(方形)이 연화대(蓮花臺)처럼
조성된 특이한 석조물에 착안하여 노주(露柱)라고 부르고 있다
석조의 건조물 구조는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마다 안상(眼象)과
화형문(花形紋), 그리고 귀기와 앙련(仰連), 복련(伏連) 등이 화려하고 다양하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상대석에는 일반 석탑의 상륜부와 유사한 양식이 조각되어 있는데 상륜부가 원형(圓形)이며
보주(寶珠) 사이는 간주(竿柱) 형식인 것이 매우 특이하다
연봉형(蓮峯形)인 조성 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산사 명부전(冥府殿)
대장전과 나란히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명부전은 정면과 측면이 3칸인 불전이다.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위에 다듬지 않은 돌을 주초삼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놓은 전각으로 이 전각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봉안하였는데 지장보살의 왼손에는 금강보륜을
쥐고 있으며 지장삼존 좌.우로는 시왕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금산사명부전시왕도(金山寺冥府殿十王圖)
금산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불화로 화기(畵記)에 의하면,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풍곡당(豊谷堂) 덕린(德麟), 해운당(海雲堂) 익찬(益贊), 월허당(月虛堂) 준언(俊彦), 반월당(槃月堂)
해선(海詵) 등의 승려들이 편수가 되어 1861년(철종 12)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에 있는 도갑사(道岬寺)에서
20명의 화원과 함께 그린 다음 이곳 금산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명부전(冥府殿)의 지장삼존상 뒤에 봉안되어 있는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판관, 옥졸 등이 둘러싸고 있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왕도는 사찰 내 명부전,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 등에 봉안되는 불화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그 하단부에 시왕·제석천·범천·사천왕 등이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본존인 지장보살의 좌우를 둘러싼 형태로 구도상의 변화는 있지만 고려시대의
도상적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장시왕도 제작이 매우 성행했다.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시왕도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구성된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이래 번성한 지장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불화로 일찍이 진표율사는 철저한 수행의 힘으로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고 더욱 정진하여
미륵에게서 다시 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진표율사의 수행에서 지장신앙은 미륵신앙과 함께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에는 진표율사의 투철한 정진의 힘이 시대를 초월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다
금산사석등(金山寺石燈:보물 제828호)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으로 옥개석과 상대석, 하대석 등은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화창석, 중대석 등은 옥개석과 하대석의 받침에 맞지 않는 부정형(不定形)이며, 양식도 후세에
내려오면서 없어진 부재를 보완한 것이다. 옥개석과 상륜부 등은 원형으로 고려시대에 해당한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오른쪽에는 766년(신라 혜공왕 2)에 목조탑이 세워졌는데 후에 탑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대장전이라는 불전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김제 금산사 석등은 금산사 대장전에
안치된 불상과 금산사 앞뜰을 비추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김제 금산사 석등은 시대가 각기 다른 부재로 뒤에 보수된 것이다.
지대석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가 128㎝이며 하대석과 상대석은 원형(圓形)에 각각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을 8엽(葉)의 무늬로 조각하였다. 하대석과 상대석 사이에는 중대석이 끼어 있는데 형태는
8각형으로 높이는 96㎝이다. 등집은 높이가 54㎝로 중대석과 마찬가지로 8각형이지만 형태는 똑같지 않다.
좁은 면의 폭은 약 17㎝이며, 넓은 면은 약 33㎝이다. 여기에 십자형으로 4개의 화창(火窓)을 뚫었다.
화창은 길이 36㎝, 폭 16㎝의 장방형이다. 옥개석은 한 변이 55㎝의 팔각 추녀로서, 추녀 부피는 5㎝로
얇은 편이고 추녀 끝에 귀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중 남쪽의 귀꽃은 파손되어 있다. 상륜부는 복발, 보륜,
보주가 함께 조식된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다
금산사 원통전(圓通殿)
미륵전 옆 보제루 우측에 건립된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관세음보살의 공덕이 주원융통하다는 의미에서 원통전이라고도 하는데 이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홀로 모시거나, 양류관음이나 해수관음 또는 천수관음 등을 모시기도 한다.
관음상은 대개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찰에 관음전이 있다
금산사 원통전 42수관음보살좌상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고 최근에 조성한 42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보살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가설해 놓았는데, 관세음보살은 대자 대비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관음전, 대비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수관보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천개의 손과 눈은 관음보살의 대자비와 방편을 상징한다.
1천이란 말은 역시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대자비가 한량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며,
또는 '보문(普門)'의 의미로 방편이 한량없다는 의미이며, 탱화로 모실 때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모두 묘사하지만, 조각상으로 모실때는 사정상 42수(手)만을 나타내는 경구가 많다.
곧 42수 중 합장한 두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밖의 40수는 그 하나하나의 손이 25유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1,000수(40*25=1,000)가 된다.
여기서 25유는 지옥부터 천상까지의 육도 중생을 보다 자세히 분류하여 25계층으로 나타낸 것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아직 볼 것이 많은데 주최측에서 12시에 식당에 점심 예약을 해놨다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아쉬움을 남기고 절 집 마당을 빠져나와 혜덕왕사진응탑비가 있는 금산사 부도로 향한다.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塔碑:보물 제24호)
금산사의 동편으로 모악산 정상을 따라 약 300m쯤 가다 보면 왼쪽에 부도전이 있는데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는
부도전 내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옛 봉천원구 북쪽에 해당하며, 1096년(숙종 1) 12월 봉천원구에서
59세로 입적하자, 나라에서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린 뒤, 1111년(예종 6) 탑호를 진응탑비(眞應塔碑)라 하고
금산사 동쪽 부도전 내에 세웠다.
혜덕왕사(慧德王師)[1038~1096]는 고려 전기의 승려로, 속성은 이(李)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해안사(海安寺)의 지광국사(智光國師) 제자로 들어갔고, 1061년(문종 15) 경기도 개성의
송악산에 있는 왕륜사(王輪寺)에서 치러진 승과에서 합격하였다. 1
079년(문종 33)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금산사를 재건하고 봉천원구(奉天院區)와
광교원구(廣敎院區)를 확장하였다.
눈.비로부터 탑의 망실을 막기 위하여 탑을 렉사판으로 가려 놓았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너무 마모되어 확인을 할 길이 없다.
비의 제액(題額)은 ‘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이고 비제(碑題)는
‘고려국전주대유가업금산사보리수정진요익융광구우호세능화중관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병서
(高麗國全州大楡伽業金山寺普利首精進饒益融廣口祐護世能化中觀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 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唯識) 경전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혜덕왕사의 문도(門徒)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智光國師)의 비석과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800여 명에 이른다.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기록에는 글을 지은 사람을 이모(李某)로, 쓴 사람을 정윤(鄭允)으로 보고 있으며, 음기를 쓴 사람을
채유탄(蔡惟誕)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비문 끝에 ‘천경원년세재신묘맹하월(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이란
기년이 있어 1111년(예종 6)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혜덕왕사가 입적하고 나서 15년 후의 일이다
비(碑)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이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없으며, 탑비와 귀부, 비신, 그리고
지대석만 남아 있는데 비신(碑身)은 장방형으로 높이 2.78m, 너비 1.5m, 두께 0.18m에 이르는 대리석으로서,
높이 0.6m, 길이 2.55m의 화강암제 귀부 위에 세워져 있다. 귀부의 구상(龜像)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는
작은 편이며, 조각이 매우 뚜렷하여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글씨는 사방 약 2m 정도로 새겨져 있으며, 당나라 구양순체의 해서로 매우 정교하면서 대단히 뛰어난 솜씨이다.
전면은 43행 77자씩 새겼고, 둘레에는 당초문을 장식하였고, 육각의 갑문(甲文) 중앙부에는 비신 삽입부를
조각하였는데, 둘레를 22엽의 중판화문(重瓣花文)을 새긴 귀부를 방형 지대석 위에 석재로 새겼으며,
지대석 네 측면에는 파린문(波鱗文)을 새겼다
전체적인 것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알아 볼 수 있는 비문의 내용에는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 이자연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 그리고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 명에 이른다.
비의 형태로 보아 원래 이수가 있었을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없으며 탑비와 귀부, 비신과 지대석만 남아있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높이 2.78m, 너비 1.5m, 두께 0.18m에 이르는 대리석으로 화강암재 귀부위에 세워졌다.
혜덕왕사 탑비의 귀부 정면의 모습
높이 0.6m, 길이 2.55m의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는 몸체에
비해서 머리는 작은 편이며 조각이 매우 뚜렸하여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혜덕왕사 탑비의 귀부 꼬리의 모습- 꼬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육각의 갑문(甲文) 중앙부에는 비신 삽입부를 조각하였는데 둘레를 22엽의 중판화문(重瓣花文)을
새긴 귀부를 방형 지대석 위에 석재로 새겼으며, 지대석 네 측면에는 파린문(波鱗文)을 새겼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것만 같은 느낌이다
소요당대사 혜감비(逍遙堂大師 慧鑑碑)
소요당대사 혜감비는 1651년(조선 효종2년)에 세워진 비로 높이 194cm, 너비 93cm, 폭 31cm이다.
김제 금산사에 건립된 소요당대사의 비로, 이경석(李景奭, 1595~1671년)이 비문을 찬하였고
조진석(趙晋錫, 1610~1654년)이 글씨와 전각을 담당하였다.
소요당대사의 법명은 태능(太能)으로 俗姓은 오씨로서 13세때 출가하여 부휴(浮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는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 자리하였다.
그는 禪과 敎에 대해 一源二流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自性이란 본래 淸淨하고 自在한 것으로서
현실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자체가 초월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태능이 열반한 후
효종은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금산사에 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逍遙堂大師 浮屠碑銘 (篆題)
朝鮮國 賜號國一都大禪師 慧鑑大師 .
逍遙堂 浮屠碑銘 幷序
옛날 達磨大師는 중국으로부터 印度로 귀국하고자 서쪽 葱嶺으로 돌아갈 때 신 한짝을 남겨두는 靈蹤을 남겼고 ,
李翶는 동쪽 藥山에 올라가서 藥山惟儼스님으로부터 一聲의 妙蹟을 전하여 받았거늘, 하물며 우리들은 스님의
舍利를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어찌 浮圖의 建造를 빼 놓을 수 있겠는가!
스님의 속성은 吳氏이고, 法諱는 太能이요, 호남 潭陽 출신이다
진표율사 부도(眞表律師 浮屠)
진표율사의 부도는형식상으로 매우 단정하고 철감선사나 적임선사의 부도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진표는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660년)한 후 약 60년이 지난 718년(또는 734년)에 전라도 만경현(萬頃縣:지금의 김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은 정(井)씨라고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 순제법사에게로 나아가 출가하여 수행을 떠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부안 변산의 부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수련했으며 망신참회(亡身黎悔)로써 계를 얻었다.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2권과 증과(證果)의 간자 189개를 주고 이르기를 "이것으로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삼으라" 하였다.
이윽고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돌아와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미륵장륙상을 모시고 그 다음에 금당을 지어 미륵하생신앙의 불국토를 이루려는 백제 유민의 애환을 달랬다.
진표가 태어난 지는 백제가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난 후로서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신라에 대한 항전을 하던 시기로 통일신라에 대한 원성이 드높았으며 억압받던 백제 유민의 고통을 달래주고 앞으로 올 좋은 세상 즉 미륵하생의 간절한 희망을 원하고 있었던 때였다
당호(堂號)가 확인되는 부도의 주인공을 보면 소요당대사(逍謠堂大師), 용봉대선사, 남악당,
백곡당, 해운당, 서봉당, 벽허당, 인봉당이며, 1984년에 진표율사의 부도가 건립되었다
최근에 세워진 명문당 스님의 부도
부도 대좌의 모습
부도가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부도전을 내려오면 뒤돌아 본 모악산(母岳山:796m)의 모습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모악산은, 전주.김제 일원의
근교산으로, 유명한 금산사와 함께 이 고장 사람들의 당일 산행지로 각광 받는 산이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탈교를 지나고...
금산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따뜻한 국물이 있는 만두.전골로 식사를 마치고 다음 코스인 귀신사로 향한다
귀신사 입구의 모습
금산사에서 귀신사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진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있어서 금방
도착하는데이곳은 금산사와는 달리 남도의 여느 사찰처럼 조용하고 말 그대로 절간이다.
순례객도 달랑 우리일행뿐이고 절집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귀신사(歸信寺)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원명(圓明)이 중창하였고, 그 뒤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에
춘봉(春峯)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병 300여 기(騎)가 성을 함락한 후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삼층석탑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귀신사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귀신사석수(石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고,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통일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정교한 조각의 예술성을
보이고 있으며, 높이 2.5m이다.
또 석수는 딴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 중간에 남근(男根)
같은 석주가 꽂혀 있고 도약 하려는 듯한 석수의 모습에는 당당한 위용이 엿보인다. 석수나 남근은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 있고, 높이 1.65m, 너비 1.65m이다.
귀신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정략적으로 세운 사찰로서 통일신라의 지배 이념인
화엄사상을 전파하고 반감어린 백제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으며,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의 터전을 연 이후 그의 제자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수많은
화엄사찰을 건립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10개의 사찰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이란
이름을 붙혔는데, 소백산의 부석사,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현사. 계룡산의 갑사, 삽주의 화신사, 금정사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지금의 귀신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수용한 신앙은 화엄사상(華嚴思想)이 아닌
아미타 신앙(부석사), 정토신앙(불국사), 미륵신앙(범어사)등 범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 분열되었던 민족문화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통합적 사상이 필요했는데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화엄학이야말로 통합 불교로서 신라의 국가적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엄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분열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옛 고구려나 백제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포교활동을 벌였고, 그 가운데 지역적 핵심 가람들이 후일에 화엄십찰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말의 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857~?)은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이 귀신사에서 쓴 것으로 통일신라말까지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한 듯 하다.
고려시대에도 건물과 암자가 즐비한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 지역을
쳐들어왔던 왜구300여명이 주둔했을만큼 사세(寺勢)가 컸다고 하나 조선시대에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이 이곳을 찾은 뒤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라는 시문(詩文)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15세기 당시의 귀신사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한때는 8개의 암자를 거느렸으며금산사를 말사로 두었을만큼 사세가 컸으나 지금은 옛 영화를
잊어버린 조용한 사찰로 남아있다.
귀신사 요사채
귀신사 대적광전(歸信寺大寂光殿:보물 제826호)
김제시 금산면 귀신사에 있는 불전(佛殿)으로 신라 때인 678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귀신사는 고려 말에 왜구 300여 명이 이곳에 주둔했을 만큼 규모가 커서 주변 일대에 전각과 암자가
즐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양성한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경내에는 대적광전, 명부전, 요사채가 남아있고 최근에 영산전을 신축했다.
이 중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경 조선시대에 다시 건립되었다.
대적광전은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그 위에 갑석을 놓은 고식 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외벌대를 돌렸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고 기둥은 민흘림의 원기둥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평면의
구성이 독특한데 규모로 볼 때 정면 3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5칸으로 계획하여 주간에는 겨우 문
두 짝만을 달 수 있는 크기로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갈수록 1자 남짓씩 점차 주간이 줄어들며 기둥과
창방으로 구획되는 면들이 세로가 긴 직사각형을 이루어 건물 전체가 수직적 형상을 갖는다.
더욱이 측면의 풍판이 측벽에 붙을 정도로 우주에서 도리의 뺄목이 충분히 뻗지 못해 건물이 더욱 높게 느껴진다.
측면의 주간은 어칸을 길게 하고 전후 퇴칸의 길이를 짧게하는 보통의 평면구성과는 달리 오히려 퇴칸을
어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였고 내부의 기둥열도 측면 평주열과 관계없이 앞뒤에 4개씩, 8개의
고주를 두 줄로 배치하여 마치 내진과 외진이 구별되는 중층 건물과 같이 평면을 구성했다
귀신사중수기』에는 법당이 2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중수하면서 중층에서 단층으로 건물이
개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지붕도 측면 평주와 내진주의 배열로 볼 때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전면에 모두 빗살문을 달았는데 어칸을 제외하면 협칸과 퇴칸은 문 밑에 머름대를 설치하여 창으로
계획하였다. 측면은 양측 모두 전퇴칸에 외짝문을 시설하였고 배면은 어칸에만 두 짝 빗살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 구조인데, 맞배집이기 때문에 전·후면에만 공포를 배치하였고 전면은 주간마다 1조씩의 간포를
배치했으나 배면에서는 퇴칸의 간포를 생략하였다. 내외 2출목 구조로 공포를 짜서 처마를 받치고 있는데
전면은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고 공포는 전후면의 세부적 수법이 차이가 있다.
전면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살미 끝이 서로 이어지듯 뾰족한 앙서형의 모습이며, 살미 위의 연봉 조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에 배면은 살미 끝을 둥글게 운공형으로 초새김하였고,
특히 주상포의 초제공 살미 모습은 전면보다 후면이 고식의 수법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건물을 중수하면서 뒤쪽에 옛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춘봉스님이 중수하였는데, 현재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
김시습이 썼다는 귀신사허(歸信寺墟)
煙埋秋草夕陽中 가을풀 가득한 곳 석양 중에 와보니
獨立空山思不窮 홀로선 빈 산에서 생각은 끝없어라
壞塔已無花雨瑞 탑은 무너져 꽃도 없는 곳에 단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斷碑猶帶薜蘿叢 부서진 비석 위에는 들풀이 엉켜 있네
幾年成敗隨流水 얼마간의 성패야 흘러가는 물같은 것
千古關河送去鴻 옛날에도 관하에서 기러기를 날려 보내지 않았나
世上興亡皆若此 세상의 흥망은 모두 이와 같을까
不須懷糈問天公 기다리지 못하고 천공에게 물어보네
대적광전 편액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대략 17세기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형의 맞배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놓은 공포가 기둥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인데 이런 양식은 17세기에 지어진 불전(佛殿) 건물의 공통된 형식이기도 하다.
논산의 쌍계사 대웅전,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경주의 기림사 대적광전이 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면의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우측과 좌측의 끝칸인 퇴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였으나 근간에는 벽을 쳐내고 빗살무늬 창호로 바꾸었다.
기단은 커다란 면석을 세우고 그 위에 납작한 돌을 얹어 고식(古式)으로 꾸며져 있으며
자연석 주초(柱礎)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두리 기둥을 세웠다.
대적광전 내부의 가구(架構)는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平柱)위에 얹히게 하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위에 보를 놓이도록 하였는데, 대적광전 안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이
너무 커서 천정을 높게 하기 위해 처리한 수법이라고 한다
그 결과 불상의머리 옆으로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내부 공간의 모습으로 보아 원래 이 건물은
중층(重層)이었던 것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고친 것으로 추측된다
맞배지붕으로 양 옆에 풍판을 달은 귀신사 대적광전은 앞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뒷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징인데 규모는 왜소하나 세부에 옛 방식 그대로라 주목이 되는 전각이다
귀신사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歸信寺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보물 제1516호)
비로자나불은 부처의 진신(眞身)을 나타내는 존칭으로『화엄경』의 주존불로서 부처의 광명이
모든 곳에 두루 비치며 그 불신(佛身)에는 모든 세계를 포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좌측에 있는 약사불은
질병의 고통을 없애 주는 부처이며, 오른쪽의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1633년에 작성된 귀신사 나한전 낙성문에 따르면 그 이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귀신사를 1624년에 중건한 것으로 미루어 1624~1633년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우선 규모가 매우 큰 것이 특인데,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
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의 불신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불격을 보여 준다.
지권인(智拳印)[비로자나불이 결하는 수인(手印)이며,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만 이 수인을 하므로 이 수인을 한
불상은 곧 비로자나불이다]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삼불 형식으로,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대형의 소조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김제 귀신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법주사 소조 삼불 좌상과 완주 송광사 소조 삼불 좌상 등과 더불어 같은 시대에
만들어져 이러한 같은 양상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지권인의 표현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마디 쪽으로 뻗은 모습인데
이러한 표현은 명(明)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수인이며 긴 장신형의 불상 비례 역시 명초에 유행하던
표현이어서 명대 조각의 영향을 알 수 있다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 명대의 조각 양식을 수용하면서 이를 조선 불상에 정착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자 했던 일면을 알 수 있으며, 거대한 규모인 소조 불상 조각의 기법은 작품
면에서도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귀신사 불상들은 매우 가늘고 긴 몸매를 갖고 있으며 상반신은 길고 하반신은 두께가 낮고 두 무릎 사이의 폭이 넓다.
하반신 두께가 낮고 무릎의 폭이 넓다는 것은 다리가 얇고 길다는 것이므로, 상하반신 모두 좁고 얇으며 긴 것이다.
얼굴도 폭이 좁으면서 길고, 양감이 없어 밋밋하며, 어깨도 좁으며 입의 가로 길이가 코 폭 정도와 같거나 비슷한 정도로 좁다.
옷주름은 예리하며 옷주름 사이가 좁고 밀집되어 있고 그 수도 많다.
또한 상반신 좌측면 왼쪽 어깨 아래로 늘어진 옷주름은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좌우로 나뉘어져
흘러내린 형태이다.
양 어깨와 무릎에는 각각 3줄과 2줄의 양각선 주름이 대칭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어깨에서 팔을 향하여 늘어져
있는 옷주름은 ‘U’자형을 띠고 있다.
귀신사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은 흙으로 만든 소조불로서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하고
약사불(右)과 아미타불(左)을 배치한 삼불형식으로 1980년대 금물을 입힌 불상이다.
삼불좌상은 매우 커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데 중창을 하면서 전각을 너무 작게 지어진 탓이라고 한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의 불신(佛身)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 마디쪽으로 뻗은 지권인(智拳印)의
표현은 당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수인(手印)이며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상 역시
명나라 초에 유행하던 표현의 당시 불상이어서 당시 명나라 시대의 조각을 엿볼수 있는 불상이다
대적광전에 있는 신중탱화의 모습
삼존불 좌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주수완 박사님
대적광전을 참배하고 돌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돌계단을 올라가니 석탑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기왓장에는 좋은 글귀들이 많이 보인다
귀신사 석탑(歸信寺石搭: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2호)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귀신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5.5m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을
쌓고 그 위에 4장의 돌로 이루어진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몇 개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1층탑신은 네 귀퉁이에 네모난
돌기둥을 별개의 석재로 세우고 그 사이에 판석을 4면에 끼웠고, 그 위에 판석 1면을 얹어 옥개석을
받치게 하여 8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각의 옥개석 아래에는 굄돌 1매씩이 끼워져 있다.
탑신은 옥개석의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낮아 안정감을 느끼게 하며 옥개석은 판석형으로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추녀 끝은 약간 반전된 듯하나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1층은 8개, 2층은 4개,
3층은 1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2층 이상도 거의 같은 수법으로 탑신과 옥개석을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인 체감비율은 1층탑신의 체감률에
비해 2층탑신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을 비롯한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
계통을 따른 백제시대의 석탑양식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상륜부는 결실되어 현재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몇 차례에 걸쳐 도굴되거나
붕괴되어 보수되었는데 2층탑신석 굄대와 옥개석이 바뀌어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석탑은 676년(문무왕 16) 귀신사 건립 당시의 석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옥개석이 탑신에 비하여
지나치게 넓고 여러 개의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옥개석의 상하단에 굄대를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백제 석탑양식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귀신사 석탑은 여느 석탑이 법당 앞에 있는 것과는 달리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고, 그 앞에 남근석
(男根石)을 등에 업은 석수(石獸)가 배치된 것으로 보아 민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석탑은 676년 귀신사 창건 당시의 석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지붕돌이 탑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넓고 여러 개의 다른 돌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지붕돌의 상 · 하단에 굄대를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백제 석탑 양식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생각하고 있다.
높이 5.5m의 삼층석탑은 바닥받침돌 위에 단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장의 돌로 이루어진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몸돌을 올렸다. 1층 몸돌이 장대한 데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몇 장의 얇고 편편한 돌로 짜여졌으며 아래에는 경사진 받침, 위에는 몸돌 받침으로 네모진 판석을 두었다.
지붕돌 모서리에 난 구멍은 풍령을 달았던 흔적이다. 이 탑은 몇 차례에 걸쳐 도굴되거나 붕괴되어 보수했다
귀신사 석수(歸信寺 石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
김제 귀신사의 삼층석탑 앞에 놓인 석사자상으로 등 위에는 대나무 마디 모양이 조각된 돌기둥이 있다.
불교 조각사에서 석조 동물, 특히 사자상의 전통은 일찍이 분황사 모전석탑 주변의 석사자나
불국사 다보탑에 봉안된 석사자, 혹은 법주사 쌍사자석등이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어
주로 탑이나 석등과 연관된 조형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귀신사 석사자 역시 석탑 앞에 봉안되어 있는데 그 앞에 있던 석등을 받치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비록 대나무형 돌기둥 위의 구조물은 사라졌지만, 사자상 자체의 조각기법은 매우 뛰어난데 특히 완전히 배를 땅에
대고 앉아있는 모습은 실제 사자가 편하게 쉬고 있는 모습과 유사한데, 이러한 사실적 표현은 다른 유물에서는
볼 수 없다.
발톱과 다리 근육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입을 약간 벌리고 앞을 주시하는 모습은 마치 충직한 동물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해학적이면서도 친근감이 드는데 마모가 심해 세부 묘사 파악에 제한이 있지만, 그 규모나
조각기법상 상당한 공력이 들어간 귀신사의 중요 석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서쪽 솔개봉을 바라보면서 엎드려 있는 이 사자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은 사자상은 머리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사자상의 등 위에는 남성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또 그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둥을 얹어 놓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사자상은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귀신사 석사자상은 사자상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성을 갖는 작품이다.
이 사자상처럼 땅에 배를 대고 누워있는 형태의 유물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과 조선 초기
유물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 앞의 사자석등을 들 수 있는데, 귀신사 사자상에 비해 형태가 추상적이고
해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자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해태나 해치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남근숭배사상이 어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귀부 역할을 하는 사자상은 보는 이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긴 한데
어떤 사람들은 개라고도 한다
남근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랫 부분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유례가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인데 이 남근석 위에 또하나의 돌이 놓여 있는데, 원래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찰 내에 이러한 조형물을 찾아보기는 매우 드문 일로,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풍수지리상 이 곳이 구순혈(狗脣穴)이어서 이러한 석물을 두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원래 남근석을 두는 사찰은 백제 왕실의 내원(內願) 사찰 뿐이므로, 이로 보아 이 절은 백제 때의 절일 것이라는 설이다.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과 사실적인 표현이 눈길을 끄는 이 돌짐승의 조성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귀부 역할을 하고 있는 사자상
사자상의 꼬리모습
3층석탑 옆에 서 있는 비
귀신사 명부전의 모습
귀신사 영산전
영산전의 모습
절 모퉁이에 있는 탑석과 옥개석
귀신사를 대충 둘러보고 이곳에서 40여분을 버스를 타고 종남산 아래에 있는 완주 송광사로 향한다
송광사 가람배치도
가람(伽藍)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절’의 의미로 쓰여왔던 말이다.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람마(Sangharama)’를 소리나는대로 한역한 ‘승가람마’를 줄인 것이다.
‘승가’는 ‘대중’을 의미하며, ‘람마’는 ‘원(園)’이라는 뜻인데, 이를 줄여 ‘가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람은 승가들이 한군데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찰을 의미하게 되었다.
송광사 가람배치는 백제식 평지 가람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송광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종남산의 모습
주차장에서 내려 송광사 경내로 향한다
완주 송광사 일주문(一柱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일주문은 조선 중엽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3km 떨어진 '나드리'라는 곳에 있었으나, 절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점차 안쪽으로 옮겨지다가 1944년 해광스님이 이곳에 세웠다고 하는데 문의 좌우 측면에는 위 아래의 굵기가 같은 중심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에 연꽃을 조각한 보조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며, 용머리 등으로 장식한 처마가 화려하며, 건물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멋을 풍긴다.
일주문에는 '入此門來 莫存智慧)'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이 일주문을 들어노는 사람은 세속적인 생각,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한 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여 불법에 귀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주문에는 자신의 간직한 불성의 씨앗을 개발하여 스스로 부처의 길에 이르고 동시에 모든 중생을깨달음의 세게로 이끌어야 한다는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일불승 사상이 담겨 있다.
일주문의 편액은 일중 김충현 서예가의 작품으로 불기2518년(1974년)에 썼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내며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 (IMF)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송광사의 가람배치도는 여느 사찰에 비해 조금은 특이한데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대웅전이 정확하게
일직선상에 서 있는데, 주수완 박사님의 설명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이 우리나라 가람배치도의 표준이라고 한다
송광사 일주문 현판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송광사(松廣寺)는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마친 이곳 전라북도 완주군에 종남산이 있는데 송광사는 그 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남산 남쪽에 영험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고 했다고 한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귀국해서도 가지산 보림사와 종남산 백련사에 번갈아 거주하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했다.
이때 체징선사는 백련사를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했다. 이래로 송광사는 사세를 면면히 이어왔다.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중국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사명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했다.
조선시대 임진 ·정유 양란 때 송광사는 전소되었는데, 광해군 때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도인
덕림화상이 주맹이 되어 응호, 승명, 운정, 득순, 홍신 스님 등과 더불어 노력 끝에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1636년)에 따르면, 송광사는 인조의 척족(戚族)인 이취반(李就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시주하였고, 보조국사 체징이 점지해 두었던 터에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듬 해에 7칸 중층의
대웅전을 건립함으로써 초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사액되었다고 했다.
그 후 명부전(1640년), 천왕전(1649년), 나한전(1656년), 일주문 등이 연이어 신축됨으로써 세 번째 중건됐다.
그 후에도 1707년에 네 번째 중건이, 1857년에 다섯 번째 중건이 있었다.
<송광사대웅전중수상량문(1857년)>에 따르면, 다섯 번째 중건은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 전라도 관찰사 심경택,
전주부윤 홍종화 등이 백만전을 지원하여 2층 구조로 지어진 대웅전을 49일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이러한 송광사의 중건을 전하는 바로는 <전주송광사개창비(全州松廣寺開創碑), 1636년)>, <경진년칠월일서방산송광사
시왕조성흘공기 (庚辰年七月日西方山松廣寺十王造成訖功記), 1640년>, <불상조성시주목록(佛像造成施主目錄), 1641년>,
<대영산십육성중오백성문조성회원문(大靈山十六聖衆五百聲聞造成回願文), 1656년>, <전가경19년갑술법당중수동참기
(前嘉慶十九年甲戌法堂重修同參記), 1814년)>, <송광사대웅전중건상량문(松廣寺大雄殿重建上樑文), 1857년> 등이
전해 온다
경내에서 뒤돌아 본 일주문의 모습
참으로 오랫만에 송광사를 찾았다...2000년대초였던가 지금은 회주로 주석하고 계시는
도영 큰스님께서 포교원장으로 계실때 이곳에서 1박2일간 포교사 연수교육을 받았으니
어언 20여년이 다되어 가는구나...그런데 오늘 성지순례의 컨셉은 미륵신앙의 성지순례인데
이곳 완주 송광사는 선종 사찰이 아닌가... 아마도 금산사와 가까워서 그랬던 모양이다
송광사 금강문(金剛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금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인데, 조선후기 금강문에는 중앙 통로 좌우로 두 명의
금강역사와 문수보살·보현보살이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측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동자 모습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송광사 금강문은 다포계 팔작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벽암각성(1574~1659) 대사가 중창한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구례 화엄사· 경남 하동 쌍계사, 그리고 완주
송광사는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어, 임진·정유 양란 이후 신중신앙이 호국신앙과
연결된 가람 배치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금강문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르며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셨져 있다.
보현보살과 아금강강역사(阿金剛力士)
문수보살과 우금강역사(吽金剛力士)
문 양쪽에는 손으로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杵) 또는 칼, 창을 손에 든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셨다.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셨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금강문을 지나면서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쳐부수어
완전한 행복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이 있다.
천왕문(天王門:보물 제1255호)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으로 건축하여 이곳은 여닫는 문으로 되어 있다.
현판도 사찰에 들어오는 쪽에는 천왕문으로, 대웅전 쪽에는 천왕전으로 현판을 달았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봉안한 기록이 있다.
송광사 천왕문에 모셔져 있는 소조(흙으로 만든)사천왕상은 보물제1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쪽 세계를 관할하며 인간의 기쁨과 감정, 그리고 봄을 주관하고,
지혜의 칼을 든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 세셰를 관할인간의 사랑과 여름을 주관하는 천왕이다.
사천왕(四天王)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등
네 명의 천왕을 말하며, 도리천에 사는 제석천의 심부름꾼으로 사방을 수호하는 호법신인데 국가적 차원에서는
호국신앙과 연결되었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불법(佛法)과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신앙되었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앞 뒤로 문이 달려 여닫을 수 있는 천왕전(天王殿)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음력 매월 초하루 사천왕 법회 및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천왕 기도가 행해지고 있는 신앙 공간으로서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천왕문이라 하지 않고 천왕전이라 하고 있다.
용과 여위주를 든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쪽 세계를 관할하며 인간의 노여움과 가을을
주관하고, 탑과 큰 깃대를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인간의 즐거움과 겨울을 주관한다.
송광사의 사천왕은 진흙으로 조성된 소조상(塑造像)으로 크기가 425cm에 달하는 거대한 상이며,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되었는데, 얼굴 표정은 분노형으로 마음 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무섭다.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다양한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북방 다문천왕은
당(幢)과 보탑(寶塔)을 들고 있으며, 신체 비례가 균형잡혀 있고 각 부분의 세밀한 표현이 돋보이는 등
조선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뛰어난 조형성을 가진 수준작으로 평가된다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송광사는 사천왕의 위치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게 특이한데, 시계방향으로 90도씩 올라가 있다.
남방증장천왕의 자리에 동방지국천왕이 배치되고, 동방지국천왕 자리에 북방다문천왕이 배치되어
있는게 일반적인 예이다.
사천왕상 발 아래에 있는 생령(마구니)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천왕은 점차 갑옷을 입고, 위엄이 있는 무인상(武人象)을 하고 있는
형태로 바뀌면서, 동. 서.남.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고 있으며 대부분 사찰 입구에서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는데, 이곳 송광사 사천왕은 배치되어 있는 위치가 일반적인 예와는 조금 다르다.
서방광목천왕의 좌측 머리 끝 뒷면에 조선 인조 27년( 1649)에 조성되었다는 글이 있으며, 좌측 손에
얹혀있는 보탑(寶塔) 아래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조상(塑造象:진흙)으로 만든 사천왕상은 크기가 4.25m에 달하며 신체 비례가 균형이 잡혀있고, 각 부분의
세밀한 표현이 돋보이는데,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준작으로 보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왕문을 통과하여 대웅전쪽에서 바라보니 天王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천왕문에 앞, 뒤로 여닫을 수 있는 여닫이문이 달려 있기 때문에 문(門)이 아닌 전각(殿閣)
형태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사천왕은 문의 양 공간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각안에 모셔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 사천왕 법회와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어
신앙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天王門이 아닌 天王殿으로 부르고 있다.
천왕문 우측에 보이는 당간지주(幢竿支柱)
당(幢 : 불화를 그린 旗)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을말하며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다
기본형식은 두 기둥을 60∼100㎝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그 안쪽 면에 상대하여 간(杆)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마련하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시설하였다
송광사 종루(鐘樓:보물 제1244호)
종루는 범종(梵鐘)·법고(法鼓)·목어(木魚)·운판(雲板) 등 사찰에서 의식 때 사용하는 불전사물을 봉안한
곳으로 송광사 종루는 중앙의 1칸에서 사방으로 1칸씩 돌출된 아(亞)자형 평면의 2층 누각 건물로, 십자형
평면 위에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세웠다. 일반적으로 종루나 종각이 사각형으로 지어지는데 반해 송광사
종루는 보궁(寶宮)에 주로 채택되는 십자형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2층의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구성되고 주위를 계자난간을 두르고 계단이 있는 쪽만 개방되어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는 기둥 바깥으로는 마루가 설치되지 않고 계자난간도 없어 지금과 같은
마루와 계자난간은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사진 촬영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광사의 종루는 현재까지 그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건물의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루에 걸린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은 1977년에 조성된 것이고, 바닥에 놓인 범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조성되어 1769년(영조 45)에 중수된 것이다
송광사 범종(梵鍾: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현재 십자형 종루 바닥에 놓여있는 송광사 범종은 전체높이 104.5㎝, 몸체높이 84.0㎝, 입지름 72.0㎝로,
종 몸체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 숙종 42년(康熙 55년, 1716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1977년 범종이
새로 조성되기 전까지 사용해 왔으나 이후 범종에 균열이 생겨, 1981년에 두 차례에 걸친 균열방지 작업 후
타종이 불가능해져 현재와 같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몸체 중앙부의 배부분에는 네모꼴 연곽(蓮廊)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위패(位牌)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거의 수직을 이루는 몸체의 하단부에는 연곽 바로 아래에, 범종을 조성한 시기와 봉안사찰· 봉안장소·
조성에 참여했던 스님들과 사주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범종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강희 55년인 숙종 42년(1716년)에 조성되어 광주 무등산 증심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는데, 어느 시기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송광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영조 45년인 1769년에 범종을 중수했다는 기록도 추가로 새겨져 있다.
송광사 절 마당으로 들어서 선 채로 대웅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대웅전 앞 마당에서 바라본 종남산(終南山608m)
종남산은 전북 완주군의 소양면과 용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에는 소양천의 상류가 흐르고 있고,
서방산, 위봉산 등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있으며, 서남쪽 기슭에는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주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와 이를 원료로 만든 한지 산지로 유명하며 사찰로는 신원사, 송광사(松廣寺)가 있다.
지명은 송광사를 세운 도의선사(道義禪師, 783~821)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땅 속에서 깨끗하고 풍부한 용천수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고서 여기가 큰 절을 세울 만한 곳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는 길을 포기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종남산(終南山)의 원래 지명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주(周)나라 서울 풍호(豊鎬)의 남쪽에 있는 산에서
비롯되었는데 이후 대개 수도(首都)의 남쪽 산을 이르며, 줄여서 남산(南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양, 지금의 서울 남산도 종남산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시경(詩經)에도 남산이 언급되며, 수많은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았다.대표적인 詩句는 도연명의 그것이다.
‘採菊東籬下 동쪽 담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
悠然見南山 쓸쓸히 남산을 바라보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보물 제1243호)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의하면 송광사는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점지(占地)되었고 1622년에 중창되었다.
당시 중창에는 덕림선사(德林禪師)를 중창주로 하여 응호, 승명, 운정, 득순 등이 참여하였으며,
대웅전을 중창한 후 벽암(碧巖) 각성대사(覺性大師)를 초빙하여 50일간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 시주함으로써 1636년(인조 14)에 이르기까지 계속 큰 불사가 이루어져 송광사는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대공덕화주(大功德化主)인 벽암은 당대의 최고 승려로서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소집하여 서울로 진군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들을 이끌고 성을 완성하였던 승병대장이었다.
그가 송광사의 중창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유익하였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조성기를 보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귀환과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어 호국도량으로서 송광사의 성격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1623년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2층 불전이었으나 건물이 기울어 다시 중수되면서(1814년 또는 1857년)
지금과 같은 단층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다. 장대석 외벌대로 낮게 기단을 조성하고
덤벙주초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정면은 5칸 모두 두짝 분합문을 달았다. 기둥을 높게 하여 문인방 상부와
창방 사이에는 사방을 돌아가며 벽화를 그렸는데 이와 같은 상벽의 설치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비슷한 규모의
불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정면에는 석등 2개와 괘불대가 있고, 조금전에 다녀온 금산사나 귀신사와는 달리
선종 사찰이라 그런지 기둥에는 편액이 걸려있고 대웅전 현판의 글씨는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義昌君)이 썼는데, 구례 화엄사 대웅전 현판 역시 의창군의 글씨여서 두 사찰과
의창군 그리고 벽암각성대사의 관계가 주목된다
선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인조의 숙부였던
의창군 이광(李珖/ 1589~1645)은 아버지를 닮아 한석봉체
큰 글씨를 잘 써 조선 중기 서예가에 꼽혔는데, 그러나 이 편액은 의창군이 1636년 구례 화엄사에 써
내려준 대웅전 편액 글씨를 본뜬 번각(飜刻) 편액인데,
편액 왼쪽에 '의창군 서(書)'라고 짤막한 관지가 붙어 있는 데 비해 이 글씨는 서울 조계사와 진관사,
하동 쌍계사, 불 타기 전 내장사 대웅전, 지금은 원담 스님 글씨로 바뀐 수덕사 대웅전까지 여러 절에서
번각해 달았는데 완주 송광사 것도 그중 하나로 글씨 짜임새가 좋고 운필이 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숭유억불 시대 핍박받던 사찰 입장에선 임금 숙부의 글씨를 걸어놓음으로써 탐관오리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덜어보려는 뜻도 컸을 거라고 한다.
彿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 불신은 온 법계에 충만하시어
普顯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시네.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부주) : 인연 따라 두루 감응하지 않음이 없으나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 언제나 이 보리좌에 자리 하시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 넓고 큰 원력은 다함이 없어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 망망한 깨달음의 바다는 헤아릴 수 없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정료대와
정료대(야간에 솔가지에 불을 붙혀 올려놓아 어둠을 밝히던 곳)의 요대는 거북태형이고,
요주는 복련의 받침위에 짧은 사각 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사각의 요판이 있다.
대웅전 앞 돌계단 왼쪽에 장방형 대석(臺石)을 얹은 거북상과 소맷돌의 석주
대웅전의 문짝은 화려한 꽃살문짝이 단순하고 띠살문이어서 더 정감이 가는듯 하다
문 아래쪽 궁창을 귀면상과 연꽃 무늬로 처리를 하였다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274호)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일컫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조선후기에 유행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즉 삼세불상(三世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높이 5.5m, 좌측의 약사여래(5.2m) 우측의 아미타여래(5.2m)인데 각각의 부처가
삼세(三世:전세, 현세, 내세)를 상징하는 이 삼세불은 모두 조선 인조 19년(1641년)에 조성되었다
흙(소조)으로 빚은 삼존불상은 법당내에 있는 좌불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며, 불상의 각 부분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이 불상은 석가여래의 화현이라 여겨지던 진묵(眞默)스님이 점안(點眼)한 것이라고 하며 불상의
복장(腹藏)에서는 병자호란 때 중국의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두 왕세자(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의
무사 귀국을 비는 발원문이 나왔다고 한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0cm)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65c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 양식에 걸맞는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에서는 세 불상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불상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 극복의 의지와 역사 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의 공포는 다포계 구조로 주칸마다 한 조씩의 간포를 배치하였으며 외 3출목 내 4출목
구조로서 살미는 가늘고 곡선진 앙서형이며 내부는 모두 연봉을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면의 공포는 좌우 퇴칸을 제외한 어칸과 협칸의 쇠서 모양이 화암사 극락전 배면의 공포
하앙재와 같이 사절(斜截)하여 간략히 처리되었다. 전면에 비해 후면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대웅전의 내부는 평주열보다 뒤로 후퇴시켜 4개의 고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친 후 그 앞에 가로 3칸, 세로 1칸 크기의 수미단을 구성하고 거대한 삼세불을 봉안하여
법당의 내부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천개를 가설하였고 천장은 중앙 3칸이 우물천장이고 주위는 빗천장이다.
중앙의 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조각, 판형으로 새겨 부착한 게, 물고기, 거북 등이 있고, 빗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천장 전체가 하나의 천개처럼 법당 안을 장엄한다
삼존불 사이 사이에 있는 삼존패의 모습(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대웅전 삼존불상 사이에 있는 나무패 3개는 17세기에 만든 것으로 이 삼전 목패(木牌)는
목패(木牌) 또는 원패(願牌)라고도 하며 뒷면에는 각각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세자전하수천추(世子殿下壽千秋)’라고 적혀 있는데
인조 임금과 왕비 그리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빌어드린 조각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맞아 어지러운 민심과피폐해진 재정을 회복하고자 최고의 승병대장인
16도총섭 벽암스님과 승병을 보내 송광사를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이 절을 호국원찰로 삼았다.
연꽃과 구름,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특히 왕을 상징하는
중앙 나무패에 있는 구름과 용이 뒤섞인 그림은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당시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 명호를 기록한
불패(佛牌)와 구분하기 위해 삼전하(三殿下)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삼전패(三殿牌)라고 일컫는다.
높이가 약 230cm에 달하는 거대한 목패는 모두 3점인데,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세부의 문양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여러 장의 나무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상 옆의 목패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으며, 인조 때 조성된 것이라는 제작 연도가
기록되어 있으며, 왕과 세자를 위한 전패에는 정조 16년(1792)에 수리했다는 묵서명이 있어, 목패
연구에 기준작이 되고 있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거대하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불교 목공예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송광사 자료 인용)
불단은 엄청나게 큰데 불자들이 앉을 자리는 아주 좁아 답답하다
마치 일본 교토의 사찰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주수완 박사님의 설명을 듣고 법당을 나오니 들어갈 때 무심코 봤던지
나와서 보니 2000년대 초반애ㅔ 포교사 교육을 받을 때 왔던 전혀 딴판이다
대웅전 사면으로 현판이 걸려 있는 삼세불 사방법당으로 바뀌었다.
서쪽에는 서방정토 아미타여래를 상징하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현판이 걸려 있고,
북쪽으로는 보광명전(普光明殿)이 편액이 걸려 있다.
보광전(普光殿)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로 《80화엄경》에 ‘그때 세존께서 마갈제국의 고요한
보리도량(菩提道場)에서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보광명전(普光明殿)의 연화장사자좌(蓮華藏師子座)에
앉아계셨다’는 묘사가 세 번 나오는데, 어떤 사찰의 보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기도 하는데, 이는 《화엄경》의
교주가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유리광전(琉璃光殿) 현판이 걸려있다.
중생을 치료한다는 약사여래가 계시는 유리광전(琉璃光殿)은 보통 동향인데,
그것은 약사여래의 정토가 동쪽으로 무수한 불국토를 지나서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방법당으로 변모된 송광사 대웅전의 모습
나한전(羅漢殿: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나한전은 깨달은 성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인데 송광사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 및
500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전 내부에는 주불로 석가여래부처를 나무로 조성하여 모시고, 좌우로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 등이 모셔져 있으며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들의 모습
송광사 오백나한전 목조여래삼존상과 권속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나한전에 있는 이 불상들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어졌으며 중앙에 석가여래를
두고, 죄.우에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했다.
나한전 네벽에 있는 오백나한은 남자 스님들로 오백 상수(上首)라고 한다
이들은 석가여래의 제자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진리를 깨달아 존경과 공양을 받을만하고
윤회의 삶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이다
한 동안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오백나한 신앙이 성행했으며, 송광사 오백나한상은
금방이라도중생의 비원을 들어줄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사찰의 나한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앙증맞은 오백나한상의 모습
근엄한 16나한상의 모습
삼성각
삼성각 내부의 모습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지장전은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는 것을 뒤로 미룬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모신 전각을 말하며, 당나라 때 개원사 스님이었던 도명존자는 동명이인으로 잘못
판단한 저승사자에 의해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후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무독귀왕은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어떤 브라만의 딸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찾으러 지옥에 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있는 지옥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인연으로 지장보살의 협시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명부전은 지장삼존상과 명부세계의 재판을 담당하는 10명의 왕인 시왕(十王)을 함께 모신 전각을 말한다.
송광사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은 1999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는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명부전이 협소한 까닭에 지장전을 신축하고 지장전으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현재 지장전에는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사자상 6구, 동자상 8구, 금강역사상
2구 등 총 31구의 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성기에 의하면 1640년에 승명(勝明) 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17세기 명부신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명부전의 존상들은 2005년에 보수·개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도 송광사 지장전은 우리나라 3대 지장성지로 유명하다.
시간이 없어 명부전과 관음전을 제대로 들리지도 못하고 서둘러 일주문으로 향한다
집행부가 서울로 가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지 無言의 재촉을 하는 바람에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에
“세심정(洗沈亭)” 이란 정자를 만난다...정자에 쉬면서 마음속에 찌든 때를 벗기라는 뜻인가?
일주문에서 뒤돌아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완주 송광사 안내판
주차장 가는 길
주차장 백련지에서 바라본 송광사와 종남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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