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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감천(기양)지맥(終)

감천(기양)지맥 제3구간 - 주아현에서 낙동강/감천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19. 7. 15.

 

☞ 산행일시: 2019년 07월 14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바람한 점이 없이 습하고 짙은 박무 

산행거리: 도상거리16.7km  / 8시간 35분 소요

☞ 참석인원: 백두사랑 지맥팀 10명과 함께

☞ 산행코스: 주아현-임도-346봉-묵묘-무명봉-무명봉-무명봉-형제봉-안부-헬기장-497봉

                 갈등고개-무명봉-옛 갈등고개-무명봉-부처바위-비봉산 갈림길-433.8봉-안부

                 403봉-안부-갈림길-신산-갈림길-435.6봉-조망바위-김해김공 묘-금오고개

                 순흥안공 묘-동물이동통로-265.4갈림길-갈림길-무명봉-생곡리 갈림길-178봉

                 170봉-안부-무명봉-무명봉-212.2봉-파평윤공 묘-무명봉-묘지-임도 삼거리

                 흰터고개-경주이씨 묘-무명봉-무명봉-화조리 고개-일선김공 묘-무명봉-독립지사 묘

                151.7봉-임도-쉼터-남산 봉수대-쉼터-완창대군 묘-금오서원 갈림길-158.9봉

                무명봉-도로-낙동강/감천 합수점

소 재 지: 경북 구미시 옥성면, 선산읍

 

 토요일이 내 생일이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딸과 사위 등 친.인척 20여명이 집으로 찾아와

생일을 축해주었다...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베낭도 챙기도 못하고 늦은 시간에 헤어져 잠자리에 들었는데 내가 자야 할

시간에 잠을 못잔 탓인지 생체리듬이 깨져 도데체 잠이 오질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을 자는둥 마는둥 일어나 베낭을 챙겨서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06시 50분에 양재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기흥휴게소에 잠깐 들렸다가 경부고속도로에서

남이J.C를 지나 당진~ 영덕간 고속도로에서 다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다음에 선산I.C를 빠져나와

구미시 옥성면 덕촌리에서 3번 군도를 따라서 올라가 오늘의 들머리인 주아현에 도착한다

지난번 날머리의 모습

주아현(注兒峴:180m:09:25))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와 덕촌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망해버린 ‘언덕배기’란

라이브 카페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고 고개 좌측에는 옥성영농 곶감작업장  건물이 있다

주아리 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라 주아현이라 하면 주아리는 조선 태종 원년 임씨 집안에 9형제가

살았다 하여 9제동으로 불리어 왔으나 그 후 약관 소년이 주서(고려 시대 관직)에 급제하였다 하여

주아동(注兒童)이라 이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이 마을이 점령당하여 주민 학살이 많았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9:30)

망해버린 언덕배기 라이브 카페 마당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데 이곳은 어제 비가 왔는지

상당히 습하고 바람 한 점이 없는게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하는 듯 하다

등로에 들어서 올라서니 주아현 고개위에 멋진 당산목 한 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당산목  바로 옆에는 묘지 한 기가 보인다

당산목 사진 한컷 찍는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숲속으로 사라진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이것이 마지막이었다...오늘도 꼴찌는 조여사님과 나다

급경사의 오르막길

초반부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임도(09:50)

좌측으로는 형제봉(옥성)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은 덕촌리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주아현에서 이곳 임도까지 짧은 구간에 고도를 갑자기 치고 올리는 바람에

엄청나게 힘이 들었는데 임도를 지나 또다시 급경사의 능선으로 치고 올라선다

곧추선 능선을 올라서니 우측의 사면길이 나오나 맥길은 좌측의 급경사로 오른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의 급경사 오르막길

어제밤 잠을 제대로 못잤던 탓인지 상당히 힘이들고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죽을 힘을 다해 능선에 올라서 좌측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등로를 만나서 우측으로 향한다

346봉(10:00)

346봉에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형제봉으로 향한다

쓰러진 소나무 고사목이 갈길 바쁜 산꾼에게 태클을 걸어대고...

잠시 낙엽이 수북한 능선을 걸어보는 묘미도 있다.

다람쥐 옹달샘

묵묘(10:03)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덕다리 버섯 幼生들이 간간히 보인다 

무명봉(10:14)

다시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고도를 높이는데 숨은 차고 초반부터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바람이라도 좀 불어주면 좋으련만...오늘은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무명봉(10:24)

능선을 따라서 걸어간다

등로에 올라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열리는데 미세먼지인지 박무(薄霧)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게 흐릿하게만 보인다...고향가는 길에 자주 이용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선산휴게소 뒷쪽에 있는 옥성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원통산이 보인다 

무명봉(10:30)

이런 능선에는 바람이 부는게 당연한데 바람 한 점이 없다

어좌(御座)처럼 생긴 소나무를 지나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형제봉이 나온다

형제봉(兄弟峰:532.1m:10:47)

경북 구미시 옥성면과 선산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비봉산 정상 형제봉 531M’ 라고 적힌

표시석과 구조 이정목, 등산 안내도가 있는 공터인데 지도상에는 삼각점이  있다고 했으나 찾을길이 없다. 

비봉산은 선산읍내에 있는 조그만 산(122.9m)이고 형제봉은 532.1m인데 왜 비봉산 형제봉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에 따르면 비봉산은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에 있는 산(122m)이다.
선산의 진산 비봉산의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비봉산(飛鳳山)은 선산도호부의

북쪽 10보(步)에 있는 진산이다’라고 기록돼 있으며 ‘여지도서’ 선산편에는 ‘비봉산은 충청도 보은 속리산

동쪽에서 뻗어 나와 상주를 지나며 연악산을 이루고 다시 뻗어 나와 본 고을의 주산(主山)을 이룬다’라고 적고 있다.

비봉산의 이름이 다르게 쓰이는 기록도 전한다.


‘한국지명총람’에는 형제봉(兄弟峯)을 비봉산(飛鳳山), 어구산이라고도 부르고 ‘선산 읍내의 진산으로

그 모양이 봉이 나는 형국’이라며 ‘두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서 형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선산의 역사와 인물, 문화를 기록한 최현의 일선지에는 ‘읍의 진산으로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술가가 주산의 형세로써 이름 붙였으니 망장으로 전산을 이름하고 무래로 서산을 이름하고 봉란으로 안산을 이름했다.

또 봉황이 대나무에 깃든다는 의미를 취해 죽장, 죽림, 오동으로 절의 이름을 짓고 금오, 봉암 등의 산 또한 모두

이러한 유래로써 이름을 취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구미의 명산인 금오산 이름도 비봉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형제봉에서 바라본 구미시 옥성면소재와 낙동강의 모습

짙은 박무로 인해 모든것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옥성면(玉城面) 동쪽은 낙동강 건너 도개면(), 남쪽은 선산읍, 서쪽은 무을면(), 북쪽은 상주시 

낙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의 삼봉산(:448m)을 비롯하여 남쪽에 형제봉(:531m)·

원통산(:476m)·복우산(:509m)·어구산 등이 솟아 있는 저산성 지대로 곳곳에 산간분지가 발달해 있다.

농업은 주곡 위주이나 경지율이 낮아 생산량이 적은 편이며, 농산물 외의 소득으로는 양잠업이 성하고 낙동강

연변에서는 땅콩을 많이 생산한다. 광업은 태봉() 금광을 비롯하여 몇 군데에 금광이 있다.

교통은 1976년 대구∼상주 간 국도를 옥성면 쪽으로 이설, 포장함으로써 지역간 도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재로는 대둔사(), 대둔사 대웅전(경북유형문화재 162), 대둔사 명부전(殿)·응진전(殿

당간지주석(竿)·성파대사비()와 부도(), 선산 주아리() 3층석탑, 구봉리()

고분군, 득익사지() 등이 있다

인증샷

봉황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신령스러운 새다.
상스러운 새로 여겨지는 봉황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키는 6척에 이르며 목과 날개에는 5색 찬란한 빛이 나고 다섯 가지의 울음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성품이 어질다고 하며, 특히 새 가운데 왕이라고 불리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순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신선한 물만 마시고 성인군자가 나야만 이 새가 나타나는데 용, 거북 기린과 함께 4령(四靈)으로 꼽힌다.
전국 모든 비봉산은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飛鳳)을 닮았다 해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선산의 비봉산!
풍수설에 따르면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 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봉황의 두 날개며 현 선산출장소 뒤 봉우리가

몸과 목이 되는데 가운데 봉우리 아래에 선산출장소가 자리 잡고 있어 봉황의 입이 선산출장소를

물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옛 풍수학자들은 이 산의 모양을 보고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났다는 말이 우연이 아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선산에선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최현의 일선지 지리도 십절에는 ‘고을 사람들 예부터 학당을 중히 여기니 해마다 뛰어난 인물 조정에 올랐네.

한 조각 성서 영봉리에 선비들 오히려 장원방이라 말하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영봉리는 서문 밖에 있는데 전가식, 정지담, 하위지가 모두 장원 급제했다’고 적고 있다.

선산군지(善山郡誌)에서 발췌한 비봉산의 유래

형제봉 정상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갈림길이 나오고 급하게 좌측으로 내려간다

가야할 497봉의 모습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 갔다가...

다시 능선으로...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1:08)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형제봉에서 497봉 오르는 길은 V자 형태의 등로로 초반부터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등로는 생각보다 좋다.

영지버섯 幼生들도 간간히 보인다

다시 오르막길

암릉구간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497봉 아래에 있는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11:22)

497봉(11:23)

497봉 아래에 있는 구덩이 ...상당히 깊다.

바람한 점이 없고 습도가 높아 산행 속도도 늦고 물이 너무 많이 먹힌다

초반부터 지치기 시작하는데 동행하는 조여사님도 상당히 힘들어 한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베낭 무게도 줄이고 휴식도 취할겸  이곳에서 밥상을 펼친다

점심이라봐야 밥에다 물김치 한가지이다

497봉 정상의 이정표

뭔 심사가 저리도 불편한 건지?

식사를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11:45)

신산가는 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살아감 속에 아픔은
                                   용혜원

봄바람은 꽃을 피우고
가을바람은 열매를 맺게 하듯
아픔은 그만큼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눈 대화중에
몇 마디 때문에
고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을 한순간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이루어야 한다면
항상 기쁨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웃기만 하며
말도 별로 하지 않고
고개만 끄떡이는 그대이지만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올 때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바다는 살아 있기에
성난 듯 파도도 치지만
많은 날들
잔잔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봄바람은 꽃을 피우고
가을바람은 열매를 맺게 하듯
아픔은 그만큼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같은 날은 이런 등로만 있으면 좋으련만...

시멘트 도로가 보이는 갈등고개로 내려선다

갈등고개 옥성 휴양림쪽의 모습

갈등고개(387m:11:55)

구미시 옥산면 초곡리와 선산읍 노상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옥성 휴양림과 선산읍내로

이어지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숲길따라 도보 여행길’이라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조금 더 가면 옛 갈등고개가 나온다

갈등고개 이정표

노선 안내도

둘레길 안내 표지판

무명봉(11:57)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옛 갈등고개(11:58)

이곳이 옛날 민초들이 넘었던 애환이 서린 갈등고개였는데 새로운 고개에 모든걸 뺏겨 버렸다

갈등(葛藤)이란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칡과 등나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의지나 처지, 이해관계 따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킴을 이르는 말인데

이곳의 지명은 그것이 아닌 ‘칡이 많이 나는 높은 고개(葛登)’ 아닐까( 범여의 생각中에서)

경상도의 방언중에는 ‘높은 곳을 오를 등(登)’을 쓰며 높은 곳을 나타내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옛 갈등고개 이정표

옛 갈등고개 좌측으로 시멘트 임도가 보인다

뒤돌아 본 옛 갈등고개의 모습

암릉구간이 나오기 시작하고...

무명봉(12:03)

이곳은 제도권 등로인지 길은 무쟈게 좋다

암릉 구간 사이의 등로로 올라선다

다시 살짝 내려간다

쉼터용 의자도 보이고...

다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멋진 암릉구간을 돌아서니 부처바위가 나온다

부처바위(12:10)

구미시 옥성면 초곡리와 선산읍 노상리의 경계 능선에 있으며 능선 아래의 계곡이 부처골, 부처뱅이

등으로 불리우고 있었으며 바위의 모양이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臥佛)과  흡사하다는 설과 갈라져

있는 바위들이 붙어 있다고 해서 ‘붙어진(경상도 사투리로 부처진)’  바위라는 설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봐도 와불로 보기에는 억지스럽워 뒷쪽의 설이 맞는 듯 싶다

부처바위 안내판

부처바위에 있는 이정표

부처바위의 모습

이곳에서 산행을 하면서 우리 일행 이외에 선산읍내에서 왔다고 하는 한 여인을 만났다.

선산읍에서는 아마도 둘레길 개념으로 다니는 모양이다... 더운 날씨에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옷이 다 젖어 있는데 물한통도 안 들고 다닌다.

그러면서 우리를 보고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데 우리도 반갑다고 인사를 건낸다

부처바위를 지나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 통나무 계단으로 오른다

능선에 올라서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니 등로가 약간 열리고 낙동강 너머로 보현지맥의 마지막 구간인 나각산이 보인다

비봉산 갈림길(12:17)

정상에는 앙증맞은 돌탑 하나와 운동기구, 평상이 있으며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형제봉의 母山 역할을 하는듯한 선산 읍내에 위치한 비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쉼터용 나무 벤취를 지나니...

433.8봉(12:19)

등로가 서서히 맥길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등로는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고...

안부(12:25)

우측으로는 깊은 계곡이 보인다

다시 등로에 올라서고...

잡목을 헤치면서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간다

403봉(12:33)

고사목의 저항을 받으며 내려선다

안부(12:36)

자꾸만 등로는 흐릿해지고...

계속되는 조그만 봉우리의 오르내림...바람한 점 없고 습도가 심해 굉장히 힘이든다.

물을 계속 먹어되지만 감당이 안된다...오늘 물과 이온음료, 쥬스 등 마실것만 4L정도

가져왔는데 벌써 절반 정도 먹었다...가야할 길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걱정이다.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흔히 복싱경기에서 큰 주먹 한방에 맛이 가기보다는 잔펀치에서 맛이 간다고 했다

오늘 산행이 마치 잔펀치에 맛이 가는 기분이다 

갈림길(12:50)

낙엽이 수북한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다시 오르막길

오르막길에는 뫳돼지 쉬키가 지랄발광을 했는지 온 산을 쑥대밭이다

신산에 도착한다

신산(神山:457m:12:58)

구미시 옥산면 초곡리와 선산읍 신기리, 교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주위가 모두 가려져

아무런 조망도 없는 그저 밋밋한 산으로 국립지리원 지도는 이 봉을 신산으로.영진지도는 잠시후에

지나갈  436m봉을 신산으로 적고 있으며 이곳부터는 북쪽으로 주아령부터 같이 해온 옥성면과

작별을 하고 행정구역이 온전히 선산읍으로 들어서는데 신산이란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신산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졸각무당버섯인가?...아무리봐도 아리까리하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등로 가운데에 후손들이 관리하지 않은 묵은 묘지가 보인다

등로 좌측에는 약초재배단지가 보인다

갈림길(13:03)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바위에 ‘卍’가 쓰여진 빨간 글씨가 보인다.

비교적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가니 깨진 삼각점이 있는 435.6봉이 나온다

435.6봉(13:05)

영진 지도에는 이곳을 신산이라 표기를 해놨다.

판독이 불가능한 435.6봉 삼각점

깨진채로 나무 아래에 방치되어 있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삼각점을 놓치기 쉽다

435.6봉에 있는 선답자들의 흔적

등로가 잘 보이질 안보인다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는데 가을철에 송이가 나올법한 곳이다

잡목이 상당히 성가시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가는데...

우리나라 산줄기 해독에 관한한“ 讀圖의 神”이라 불리우는 산으로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조망바위(13:15)

뒤에서 오시는 조여사님이 자꾸 뒤쳐진다...나 역시 엄청나게 힘이든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쉬고 있으니 조여사님이 오시는데 자꾸만 쥐가 나는 모양이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선산읍의 모습...그 뒷쪽으로 금오산에 박무에 묻혀 버렸다

1751년 실학자 이중환이 전국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편찬한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인재 반은 선산에서 배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괭필, 신당 정붕, 송당 박영, 진락당 김취성,

용암 박운, 구암 김취문 등으로 선산고을에 학맥이 이어져서 많은 유적이 조선조 초중기에

배출되어 과거에 많이 합격하여 선비의 고장이요 학문의 고장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능선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간간히 보이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길이 없는 등로를 헤매고 내려서니 묘지가 나온다 

김해김공 묘지(13:38)

묘지를 지나면서 등로가 뚜렸한 좌측 능선을 버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우측 능선으로 붙어야 한다

능선을 헤치고 내려서니 일선김씨 가족묘지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일선김씨(一善金氏)는 김선궁을 시조이자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구미시 세거 성씨로 일선(一善)은

선산의 옛 이름으로,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이라 칭하였고, 614년(진평왕 36) 주(州)로 승격되었지만

687년(신문왕 7)에 폐지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숭선군(崇善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995년

(성종 14)에 다시 선주(善州)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주가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지선주군사(知善州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이

되었고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초명이 김선(金宣)으로, 문하시중삼중대광(門下侍中三重大匡)·정난보국공신

(靖難輔國功臣)에 책록되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으며, 정종 때에 다시 대승(大丞)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순충(順忠)이다. 김알지의 29세손으로 문성왕의 7세손이며 신라 김씨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로 15세에 태조 왕건의 원정군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며, 태조로부터 어궁(御弓)을 하사받고 선궁이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 김선궁이 고려 개국의 일등공신이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일선으로 하였다.

일선김씨 가족공원묘지 표시석으로 내려서니 우측에 구미 상하수도 사업소 건물이 나온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갈비집으로 등장하는 건물이었는데 구미시에서 인수한 모양이다

금오고개(13:53)

구미시 선산읍 교리와 생곡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선산읍에서 옥성면으로 이어지는 59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바로 옆에 새로 생긴 4차선의 33번 국도로 인해 한산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

고개를 가로질러 묘지로 올라선다

묘지에서 바라본 선산읍 교리(敎里)의 모습

조선 초기부터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이라 하였으며 또한 향교에서 유생들이

공부를 하고 마을에 초시에 합격한 생원()들이 많아 생원골 또는 생골이라고도 하였다.

14세기 도량 할머니란 이가 전 재산을 팔아 향교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향교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교동()이 되었고, 이후 지금의 선산읍 교리가 되었다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있으며 교리에서 발원하여 화조리 감천으로 흐르는 단계천(川)의

발원지가 있는 곳이다.

 

하천연장은 4.3km, 유로연장 6.98km, 유역면적 12.23㎢인 단계천의 지명은 조선 시대 선산 출신의

충신 단계 하위지( )에서 유래했는데, 하위지가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그의 집 앞 

시냇물이 붉게 물들어,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라 부르게 되었다.

순흥안공 묘(13:54)

순흥안공 묘를 올라서니 갑자기 오금이 저릴정도의 아찔한 절개지가 나오고 동물 이동통로가 보인다

잡목의 거센 저항을 받으면 시멘트 길 위로 내려선다

가야할 길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들어오니 2m가 넘는 휀스가 처져있다.

저 안쪽으로 들어서야 조금 편하게 갈 것 같은데 들어갈 방법이 없다

인공 수로로 내려선 다음에...

동물이동통로 위(14:02)

선산읍에서 도개면으로 이어지는 33번 일반국도 위에 세원진 동물이동통로이다

내가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해 보기는 처음이다

시누대 사이를 개고생하면서 빠져 나오니...

또 다시 휀스가 길을 막는다

뭔 지랄인지...

천신만고 끝에 휀스를 넘어...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절개지로 올라간다

뒤돌아 본 동물이동통로의 모습

개고생하면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몸뚱아리는 나무에 할키어 상처투성이다

절개지에서 바라본 선산읍 생곡리(生谷里)의 모습

구미시 선산읍에 속해 있는 생곡리는 산 속이 되므로 생곡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솝실, 띠갱번,

사방골, 솔밖에, 야시나독골, 원당마을 등이 있는데 솝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생곡리의 그것과 같다. 띠갱번마을은 띠가 많이 있는 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방골마을은 모래가 많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솔밖에마을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 야시나 독골마을은 야시(여우)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원당마을은 여헌

장현광의 영당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인공 수로를 지나 오르는데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어디로 가라는 건지?

급경사의 오르막길...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뒤따라 오는 조여사님은 보이지도 않고...

산초나무를 비롯한 가시 식물들이 그냥 두지를 않는다

온 몸뚱아리가 상처투성이다

재선충으로 인해 벌채해서 만든 나무 무덤이 보이는 능선에 올라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에 조여사님이 오시는데 컨디션 난조로 인해 계속 쥐가 나는 모양이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가 보다...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참으로 참으로 대단하시다

다시 잡목의 저항은 시작되고...

제대로 맥길을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265.4봉 갈림길(14:55)

넓은 임도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족보가 있는 265.4봉 가는 길이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갈림길(14:57)

독도에 아주 유의해야 할 구간이다.

무심코 넓은 임도를 따라가기 쉽상이다

앞서간 동료 산꾼들이 길을 잃어버릴까봐  작대기로 표시를 해놨다...감사합니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이고...

계속되는 내리막길

잡목을 헤치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희미한 등로는 계속되고...

무명봉(15:10)

소나무 무덤은 계속 보이고...

생곡리 갈림길(15:15)

생곡리 갈림길 이정표

희미한 등로는 계속되고...

오랜만에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데 소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향이 머리를 맑게 해준다

멧돼지 목욕탕(?)

소나무 무덤이 많이 보인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뫳돼지 놀이터

178봉(15:21)

망가진 철조망을 따라서 걷는다

170봉(15:25)

170봉 정상의 지적 삼각점

다시 망가진 철조망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5:28)

다시 오르막길

완만한 능선으로 오른다

무명봉(15:35)

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고...

또 다시 망가진 철조망을 따라서 걷는다

무명봉(15:38)

우측으로 내려선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내리막을 내려간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오르막으로 향하는데 군 교통호인지 타이어로 된 임도가 보인다 

212.2봉(15:48)

산여울 김명근님 시그널에는 지형도상에는 없는 지명인 ‘쌍봉’이라고 적어놨다.

이 분은 이 지역 출신이신가?...지형도에도는 없지만 그 지역 사람들만에 부르는 지명은

있기 마련인데, 아니면 여름철이라 숲으로 인해 확인이 안되지만 봉우리가 2개가 있어

쌍봉이라 부르나?...근거없는 지명을 붙어놨을리 없지만...지형도에는 없어 믿음은 쉽게 안간다

212.2봉를 내려섰다가...

우측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들어선다.

우측의 뚜렸한 임도로 내려가면 선산읍 동부리 역말로 내려가는 길이다.

동부리(東部里)는 고려 말 군수 이득진()이 쌓은 선산읍성 남문()과 동문()이 있던 곳으로,

옛날에는 동문에 들어가기 전에 말에서 내리라는 ‘대소인원개하마()’라는 하마비가 서 있었으나

지금은 옛 군민회관(문화회관) 뒤에 묻혔다고 한다. 동문 밖 시외버스터미널 일대는 옛날에 죄인을 가두어

두던 곳이어서 옥걸[]이라 불렀으며, 북쪽에 얼음을 얼려 보관하는 빙고()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로 내려서는데...

우측에 관리가 안된 파평윤공 묘지가 보인다

파평윤공 묘(15:52)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향한다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우측의 임도를 따라서 가면 동부리 남골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무명봉(15:58)

묘지(16:00)

등로는 안 보이는데 먼저간 동료산꾼들이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꺽어서 표시를 해놨다

무명묘지가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묘지를 내려서니...

임도 삼거리(16:04)

잡풀이 무성한 임도가 나온다

좌측으로는 독동리 문동골로 향하는 길이고 우측은 동부리 흰터마을 가는 길이다

민동골이라고도 부르는 문동골은 원래 마을에서 글 잘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문동골 또는 문산()이라 하였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옷이 젖기는 마찬가지라

우의를 입지 않고 걷는데 다행히 비는 금방 그친다 

다시 우측으로 갔다가...

좌측으로 꺽어진다

능선 좌측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제357호인 독동리 반송(禿洞里 盤松)이 있는 곳이지만

우거진 숲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숲이 우거진 임도로 내려서니 흰터고개가 나온다

독동리 반송(禿洞里盤松:천연기념물 제357호)...사진 모셔옴

반송(盤松)은 소나무의 한 종류로 줄기가 밑둥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전체적으로 우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반송은 나이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3.1m이고 밑줄기 둘레는 4.05m이다.
줄기가 아래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전체적으로는 부챗살처럼 퍼진 반송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안강 노씨가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자라던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 반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반송 중의 하나이므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1988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흰터고개(16:12)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독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넘어 독동리쪽에는

축사가 있고 흰터고개 우측의 동부리 쪽에는 함안 조창래와 조연식 공덕비가 있다.

고개의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흰터마을에서 유래된 듯하며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우측으로 올라 가려고 했는데 잡목으로 인해 등로가 보이지 않아 독동리쪽으로 오른다.

절개지를 올라선다.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선다

경주이씨 묘(16:20)

묘지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6:22)

묘지 뒷쪽 능선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한양 조공 묘지를 지나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에서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공동묘지 같은 곳을 지나간다

무명봉(16:26)

또다시 등로는 점점 거칠어진다

점박이버터버섯

여름부터 가을까지  침엽수, 활엽수림의 땅에 홀로 또는 무리지어 나며 갓의 지름은 7~12cm로

처음은 둥근 산 모양에서 차차 평형하게 된다...처음에는 자실체 전체가 백색이나 차차 적갈색의

얼룩 또는 적갈색으로 되며, 갓 표면은 매끄럽고, 가장자리는 처음에 아래로 말리나 위로 말리는

것도 있으며 살은 백색이며 두껍고 단단하다.

주름살은 폭이 좁고 밀생하며 올린 또는 끝붙은 주름살인데, 가장자리는 미세한 톱니처럼 되어 있다.

길이는 7~12cm이고 굵기는 1~2cm로 가운데는 굵고 기부쪽으로는 가늘며 새로 줄무늬의 홈이

있으며 질기고 속은 비어 있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능선을 헤치고 내려선다 

도라지가 있는 곳을 지나니 선산읍내(邑內)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선산읍은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불린 이름으로, 고을에 도적이 없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곳이므로 선산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 일선주·숭선군, 고려시대에 선주부, 조선시대에

일선현·선산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동내방()·독동방(禿)·무래방(

서내방(西)을 통합하여 선산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선산읍으로 승격하였고,

1983년 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성면 포상리·봉곡리, 금릉군 감문면 소재리·봉남리를 편입하였다

 

백두대간 낙동정맥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 줄기가 연악산을 거쳐 동으로 달려 형성된 비봉산()이

남쪽으로 금오산과 마주보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남쪽으로 감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앞들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다.

화조리 고개(16:35)

구미시 선산읍 화조리에서 독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의 1번군도가 지나간다.

선산읍에 있는 화조리(里)는 자연마을로는 화조, 구미역터, 새남골, 감천, 황새울, 서당골,

성황당마을 등이 있으며, 화조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구미역터마을은 조선 때 구미역의

터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역말이라고도 불린다. 새남골마을은 역말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감천마을은 앞에 감천이 흐른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황새울마을은 황새가

많이 모여들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성황당마을은 뒷산에 성황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도로로 가로질러 묘지로 올라선다

일선김공 묘(16:36)

묘지 뒷쪽 숲속으로 들어간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무명봉(16:55)

아카시아 나무들의 저항을 받으며 나오니...

화조리 고개 옆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에서 바라본 영남유교문화 진흥원의 모습

영남유교문화진흥원은 노진환원장 사비로 2005,9,2일 (사)영남유교문화진흥원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607번지 일대 부지112천㎡에 설립하여 30여 년간 수집하여 보관중인 고려, 조선시대 장서와

문적 60,000여점에 대해 보관 전시와 영남유교문화권 지역을 중심으로 훼손 및 멸실 위기에 있는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가치창조및 전통문화 보급을 위하여 전통한옥으로 전시관 ,

기념관등 한옥 20여동이 있다고 한다

독립지사 안강노공 묘(16:58)

낙동강 너머로 작약지맥, 숭덕지맥, 운달지맥이 만나는 합수점이 아련히 보인다

151.7봉(17:04)

151.7봉 정상에는 대곡정이라는 2층으로된 팔각정과 대곡정 기문 표시석이 서 있다. 

대곡정 현판

대곡정 기문 전면

대곡정 기문 후면

금오서원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17:07)

굽은애기버섯 군락지도 보인다

누굴 기다리시나?

쉼터(17:12)

남산 봉수대(169.3m:17:18)

지형도상에는 169.3봉이라 표기되어 있는 남산봉수대는 구미시 화조리와 원리의 경계

지점에 있으며 정상에는 봉분이 없는 평장의 경주노공 비석이 셋 있고, 왼쪽으로 비켜 봉분이

하나 더 있으며  묘지 가운데 조그만 봉우리 위에 삼각점과 169.3봉 산패가 걸려있다

묘지를 조성하면서 국가시설물인 삼각점이 있어서 남겨둔 모양이다.

특이한 점은 남산이 ‘남녁 남(南)이 아닌 쪽 람(藍)’ 남산이다.  

169.3봉(남산 봉수대) 삼각점(△구미 302/ 2003복구)

묘지를 조성하면서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만 남겨 놓았다

남산 봉수대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흔적

관리가 안되고 있는 남산봉수대 정상에 있는 경주노공 묘지들

남산봉수대 정상에 있는  또다른 묘지

하산길에 뒤돌아 본 남산봉수대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남산(藍山) 봉수대는  조선조 세종 때 정한 5곳의 봉수대 깃점 중 제2선인

동래선(東來線)에 속해 있었으며, 칠곡군 약목면의 박집산(朴執山), 구미시 임수동의 건대산(件垈山),

해평면의 석현(石峴)에서 올라오는 봉수 신호를 받아 김천시 개령연의 감문산(甘文山) , 상주의

회룡산(回龍山) 봉수대로 전달하여 서울 남산(목멱산:木覓山)까지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산꼭대기에 띠를 두른 모양으로 설치되었는데, 현재 봉돈(烽墩:봉화 연기를 피우는 돈대) 1기만

남아 있다...돌을 쌓아 올려 만든 봉돈의 높이는 1.8m, 상부 직경은 2.6m, 하부 직경은 4.3m이다

봉수대를 둘러싼 축조의 길이는 약 85m, 석축의 길이는 47m, 토석축이 약 38m에 이른다.

석축은 거의 붕괴된 상태이지만 토석축의 원형이 유지되어 있다

남산 봉수대 안내판

합수점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가는데 금오서원에 배향(配享)한 김종직, 길재의 안내판이 보인다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을 추모하여 고향인 밀양에 예림서원을 비롯하여 선산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하여 그의 공덕은 후학들에 의하여 길이

추모되고 있는 것이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유교적 이념에 의한 이상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나래를 펴고저 하였으며 후일의 유학자들이 그를 높이 받들어 존중하였던 것이니 김종직이야말로

도학의 이념을 정치에 실천코저 했던 조선조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모함을 받는 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도를 따라서 조금을 더 걸어가니 고려삼은(高麗三隱)중에 한 사람이며

이곳 선산 출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안내판이 나온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은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하며, 흔히 삼은이라 부른다.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이다.

구미 해평현(지금의 해평면)에서 태어난 야은 길재(吉再·1353∼1419)는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자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삼은은 고려조에서 벼슬을 했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 당시 ‘불사이군(不事二君·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을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충절의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한 길재는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가 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려말 창왕 때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나라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400년(정종 2) 세자 이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려 했지만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후 고향인 구미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419년(세종 2)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으로도 후세에 모범을 남긴 사람이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의 회고시가(懷古詩歌)

쉼터(05:25)

금오서원 안내판

금오서원 갈림길(17:27)

금오서원-

사진 펌

구미시 선산읍 원동의 남산(藍山) 아래에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이 있다.

1545년(명종 22년)에 최응룡, 김취문이 길재를 기리기 위해 주창하여 1570년(선조 3년)에 금오산 아래에 건립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년)에 선산 부사 김용(金涌)과 지방 사림들이

서원 자리가 너무 외딴곳에 있어 관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서원에는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을 추가로

배향하여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셔왔다. 경내에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尙賢廟)와 동재(東齋)'

서재(西齋)'정학당(正學堂)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1985년에 경상북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임도에서 직진으로 향한다

넓은 등로로 올라간다

전주이씨 완창대군 묘(17:30)

창대군은 도조대왕과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의 제1남으로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출생하여

역동(易東) 우탁(禹倬)에게 수업(受業)하고 원나라의 천호직과 고려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조고황제 등극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요 부조묘(不 廟)의 은전을 받았다.

금오서원 갈림길(17:29)

158.9봉(17:30)

봉우리를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또다른 묘지가 나오고...우측으로 내려간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또 다른 묘지로 내려서니...

등로 가운데에 있는 밭이 맥길을 막아선다.

밭 가운데로 지나가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울타리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좌측 도로로 내려선다

임도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묘지를 지나고...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 마지막 봉우리로 향한다

무명봉(17:48)

아카시아 숲을 헤치며...

도로로 내려선다(17:50)

도로에서 바라본 금오산의 모습

1970년 6월 국내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오산(烏山·976m), 선산과 인동지역의 주산인 비봉산과

천생산, 신라 불교 최초의 전래지 도리사를 품은 냉산이 있다. 이 가운데 으뜸은 금오산이다.

영남8경 또는 경북8경이라 불리며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기암괴석과 잘 발달한 계곡이 산세와

조화를 이뤄 가히 일품이다. 이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연간 250만명이 찾고 있다. 금오산은 수려한 경관만큼이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삼족오(三足烏)와 숭산(嵩山), 임금을 예언한 산이라는 범상치 않은

지명 유래 등이 깃들어 있다.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자 영남 사림의 원류 야은 길재(1353~1419)

선생이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남동쪽 기슭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어 유명세를 더한다.

금오산은 태백과 소백준령을 거침없이 내달린 백두대간이 구미 땅에서 기백이 충연한 곳이다.

‘금오’란 이름은 신라에 불교를 가장 먼저 전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중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전해지며 금까마귀는 예로부터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바로 삼족오를 뜻한다. 그래서 구미 시민들은 금오산을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으로

여기며 소중히 여긴다. 

 

금오산은 남숭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 때 산의 아름다움과 수백개의 절이 들어선 고귀함으로 중국의

오악(五嶽) 중 으뜸인 숭산에 버금간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금오산 자락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 시조 주원장이

태어난 전설도 있다. 땡땡이 떠돌이 중 출신인 주원장의 출생지를 확인할 길 없지만 아무튼 금오산의 ‘유명세’가

낳은 전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조선 초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는 금오산의 형국을 보고 ‘임금이 날 산’

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금오산 남동쪽 기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시조로 고려 왕조 망국의 한을 노래했던 야은은 조선 왕조를 오롯이 거부하고 고향 금오산 기슭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중국 은나라 말 ‘백이·숙제’가 새로 건국된 주나라 무왕을 섬기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킨 것에 비견된다.
야은은 금오산의 도선굴과 대혈사 등지에서 오로지 학문에 매진했으며, 훗날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사림을 배출했다.

도로에서 만난 이정표

먼저 도착한 산꾼들이 꼴찌로 오는 범여를 기다리고 있다

낙동강변에 조성된 파크 골프장의 모습

미안하지만 합수점까지 간다

바라보이는 능선은 2011년에 걸었던 팔공지맥 능선이다

합수점 가는 길에서 바라본 냉산(冷山:691m)의 모습

그 아래에 있는 도리사는 짙은 박무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2009년인가 도리사 성지순례를 갔으니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그 당시 주지스님이셨던 법등스님의 법문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냉산(冷山:691m)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명 태조산(太祖山)

이라고도 하며 고려 태조 왕건이 산성을 쌓고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태조봉(太祖峰)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축성한 숭신산성이 있다.

 

냉산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도리사를 비롯해 숭신산성(일명 냉산성),

금수굴 등의 명승지가 있어 도리사를 찾는 신도뿐만 아니라 등산객을 비롯한 다양한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도리사 극락보전...사진 펌

도리사(桃李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고구려의 스님인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신라 불교의 초전법륜지(初傳法輪地)이다

아도화상은 중국에서 현창화상에게 선도를 배워 19세에 자명을 받아 선산 도개부에 있는 모례의 집에서 굴실을

지어 거처하다가 시봉자가 늘어나게 되어 진기승지를 찾아 결암봉불 하던 중 이곳에 오색도화(五色桃花)가

설중(雪中)에 만개하여 사호(寺號)를 도리사라 하니 해동 최초 가람으로 신라불법의 초전법륜지가 되었다

 

신라 불교 초전법륜지로 성지화된 이곳에서는 1976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 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서 봉안된 형태로 발견됐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돼 현재 직지사 성

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돼 있으며 1968년 봄, 아미타 좌상 개금 당시 불상 밑에서 1731년 영조 7년 때의

중수기가 발견되었으며, 극락전 뜰앞에 있는 보물 470호인 도리사 화엄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 다른

특이한 양식이며 여러 개의 석주를 맞대 형성된 기단부, 그리고 그 상층부에 중층의 탑신부와 상륜을 배치한

특수 형식으로써 귀중한 문화재로의 옛 향기를 품고 있다.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 옆에 아도의 사적비겸 자운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인조 17년에,

뒷면에는 효종6년에 새긴 아도화상의 사적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현존 건물은 법당 극락전과 삼성각을 비롯하여

선원과 2동의 요사,그리고 세존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합수점 가는 길에서 바라본 구미보의 모습

전 정권에서 만든 시설물이라고 적폐대상이라며 철거 위기에 놓인 구미보

정치인들의 아둔한 머리는 나같은 민초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연구 대상이다.

자기들의 私益이 우선인지 國益이 우선이인지 구분을 못하는 모양이다

제발들 정신 좀 차리소...당신네들 적폐청산 외치는 사이에 자영업자들 살림살이는 거들나게 생겼소 

합수점으로 가는 길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는다.

내 키보다 더 큰 풀밭을 헤쳐나가다가 온 몸이 상처투성이다

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한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인해 올 여름 들어서 가장 힘든 산행을 하면서 합수점에 도착했다

중간에 너무 체력이 떨어져 중탈을 몇번이나 생각했지만 조여사님 땜에 끝까지 왔다.

합수점(18:10)

합수점 너머로 팔공기맥 능선이 보이고...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합수점 맞은편에는 2017년 2월 26일에 진권아우와 젠틀맨님과 걸었던 금오지맥 합수점이 보인다.

다들 잘 계시겠지...보고 싶다.

버스로 돌아와서 식사를 예약한 고아읍으로 향한다.

식당에 도착하여 화장실 문을 잠그고 깔끔하게 샤워를 한 다음에 산악회에서 제공한

삼계탕으로 몸 보신을 한다...션한 맥주 한잔이 간절하지만 이틀 후 병원에서 종합 검사가

있기에 입맛만 다시고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

오랜 시간동안 불평없이 느림보 범여를 기다려 준 동료 산꾼들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世世生生 福 받을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