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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8구간 - 무룡고개에서 육십령까지

by 범여(梵如) 2022. 1. 24.

첫사랑 민령이를 찾으려...

 

☞ 산행일자:  2022년 01월 23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약간의 미세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1.5km + 들머리 0.5km / 4시간 3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무령고개-영취산-무명봉-무명봉-부전계곡 갈림길-논개생가 갈림길-안부

                 덕운봉 갈림봉-암봉-전망대 바위-안부-무명봉-갈림길-927.5m봉-금당리갈림길

                 무명봉-암봉-안부-무명봉-961.5m봉-북바위봉-안부-대곡호 갈림길-민령

                 육십령 터널 위-무명봉-안부-무명봉-구시봉-깃대봉 샘터-안부-안부-884.5m봉

                 안부-무명봉-암봉-육십령 휴게소(함양) 갈림길-갈림길-육십령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서하면,서상면 / 전북 장수군 번암면, 장계면

 

요즘들어서 이상하리만큼 하루하루가 체력이 저하되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긴 시간의 산행은 힘이들어 가급적 짧게 구간을 끊어서 홀로 산행을 하는 편이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추위를 피해 울산 지역에 있는 태화북(신산경표상의 삼태지맥)지맥 2구간을

갔다와서는 울산의 도시 근교의 산에 미세먼지로 인한 탓이었는지 호흡기가 상태히 불편했다.

추운 날씨에는 산행을 하지 말하야지 하면서도 목요일쯤만 되면 산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난다

병으로 치면 이것 또한 대단한 重病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부터는 가장 먼저 체크하는것이 날씨와 교통편이다.

산악회를 따라 다니면 경비도 훨씬 적게들고 들. 날머리의 접근이 편하지만 3년전 수술 이후에는

체력 저하로 인해 산행시작 초반에 1시간정도 엄청나게 버벅거리고 오르막길에는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은 통증이 수반되고 먼저 도망가는(?) 동료산꾼들의 따라가지 못하는데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지만

나중에 예정되는 시간에 맞춰 날머리에 도착하지 못하면 동료산꾼들에게도 엄청난 민폐라 가급적

혼자 다니는 편이다...맘도 훨씬 편하고 여유롭다.

 

오늘도 후배산꾼들이 당일로 진행하는 백두대간 길을 나서기에 따라가고 싶어서 몇번을

망설였지만 결국에 포기하고, 오랫만에 지맥길을 한번쉬고 나홀로 백두대간길에 나선다.

대간길을 나선 이유는 올해 눈구경을 한번 하고 싶었던 탓도 있었지만 산행거리도 짧고

코스도 완만한 무룡고개에서 육십령 구간을 갑자기 걸어보고 싶다.

 

이 고개는 나의 맥산행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첫사랑과 같은 곳이다

사연은 이렇다...시절은 2009년 1월 4일...그 당시 난 백두대간이 뭔지, 또 정맥, 기맥은

알지도 못했고 매주 일요일만 되면 북한산만 올랐던 북한산 골수 마니아였다.

그 당시엔 적어도 1년에 북한산을 3~40번을 올랐으니...그럭 저럭 몇년 사이에 북한산을 한 200번정도

오르니 북한산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던 시점에, 우리 아파트 옆집에 살던 내하고 비슷한

연배이신 분이 자기는 백두대간을 하는데 같이 가지고 해서 호기심에서 따라 나섰던 곳이 이 구간이었다.

그 당시 털보산악회라는 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매주 대간길을 나서서 50구간으로 1년에 

끝냈으니 나에게는 이 구간 산행이 사랑으로 치면 “첫사랑과 같이 곳이라 잊을수가 없다”

 

 산에 미쳐서 그 당시 좋아하던 골프와는 자꾸만 멀어지게 되는 바람에 친구들과 지인들에게는

왕따를 당하는 신세였지만(지금도 비슷한 신세)...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미치도록 산에 푹 빠진데 대해서 아무런 悔恨과 후회도 없다

세월이 흘러 어언 12년 백두대간 3회, 9정맥, 110개의 기.지맥을 끝냈고 4번째 대간을 나섰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전주행 버스표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대부분의 첫 차들이 아침 6시에 출발하는데 전주로 가는 버스는

05시 30분이 첫 차이다...백두대간 무룡고개를 접속하기 위해서는 전주에서 장수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장계라는 곳에서 내려야 하는데 06시에 출발을 한다면 08시 50분에 전주에서

출발하는 버스 타기가 애매하여 고민을 했는데 05시 30분에 출발한다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온 탓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늘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니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휴게소이다.

이른 아침이라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버스에서 계속 잠에서 빠졌다가 버스가 전주시내로

들어서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전주고속버스 터미널(07:55)

전주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5분정도 거리에 있는 전주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향한다

전주시외버스 터미널(08:00)

전주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도착하여 08시 50분에 장계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터미널 옆에있는

김밥집에서 라면에다 김밥한줄로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믹스커피까지 한 잔을 한 다음에 터미널로 향한다

전주발 → 장계행 버스표

전주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각 방면 버스 시간표

08:50분 전주발 → 장수행 버스

버스터미널에서 20분정도 여유로운 기다림끝에 장계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장계까지 가는 버스의 소요시간이 얼마나 되냐고 하니까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전주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익산~완주간 고속도로 완주I.C를 들어선 다음에 한참을 달리다가

마이산이 보이는 진안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진안버스터미널에서 10분정도 쉰 다음에

795번 지방도를 따라서 천천이란 조그만 면소재지를 거친 다음에 장계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장계시외버스 공용 터미널(10:05)

전주를 출발한 지 1시간 15분만에 장계시외버스 공용 터미널에 도착한다.

 

장수군에 있는 장계면(長溪面)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 변경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했으며, 장계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벽계군이 벽계현으로 격하됐고,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벽계현이

장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근세 조선 1417년(태종 14년)에 장계현이 장수현에 병합될 때까지 장계면은 현청(동헌)

소재지(노평들)로서 교통과 문물이 발달하였다

 

장계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육십령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계남면과 접해 있고 서로는 산정수동하는 동정대재와 경계를 이루어 천천면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깁재와 경계를 이루어 계북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덕유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장안산에서 발원한 유천이 장계면 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천천면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장계면 중심부를 관통하여 동(경남), 서(전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와 남(남원),

북(무주)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는 면의 중심지인 장계리에 십자로를 형성하고 있어 동부산악권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다. 또한 1993년 11월 1일 계내면을 장계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교통이 발달한 탓에 한때는 읍소재지가 있는 장수읍보다도 컸으며 지금도 택시는 장수읍보다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꼬불꼬불한 743번 지방도를 따라서 가는 무령고개 가는 길에는 대곡호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보이고 잠시 후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19살의 나이에 촉석루에서

왜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물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인 논개의

생가를 지나 구절양장의 도로를 따라서 무령고개로 향한다

무룡고개(舞龍峙:930m:10:27)

장수군 장계면과 번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743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고개 윗쪽으로는 영취산에서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금.호남 정맥의 시발점이 되는곳에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고 장안산으로 오르는 방향으로는 무룡고개 아랫쪽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객 몇명이 보이긴 하나 내가 오르는 대간길의

영취산 방향으로는 달랑 나혼자 뿐이다

지도상에는 무령고개로 표기가 되어 있지만, 안내 표지판에는 무룡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대부분의 지도에 '무령고개'로 표기되어 있는 무룡고개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장계면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930m의 높이로서 장안산(1075.6m)과

영취산(1236.7m)이 만나는 안부의 고개로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이란 이름으로 이 고개를 거쳐서 장안산으로 넘어간다.

 

 무룡(舞龍)은 '용이 춤을 춘다'는 뜻으로 무룡궁(舞龍宮)이라 부르는 큰 명당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며

산세가 마치 용이 꿈틀꿈틀 살아서 무룡고개에서 장안산으로 올라가는 형상이라 한다.

 

또한 선인들은 호남인의 재질과 예기가 이상의 무룡궁의 산경에서 부터 보았다는 것이다,
무룡궁의 산세가 힘차게 치솟아 장안산에 좌정한다. 그러므로 장안산은 호남과 호서의 조산이며 진산이다.
무룡궁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서북으로 금강의 최상류지대이며, 서남은 섬진강의 최상류이고, 동남은

낙동강의 상류지대가 되며 장안산과 영취산을 이어주는 무룡고개는 풍수지리학상으로 입수(入首)라 

표현하는데 이는 머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 무룡고개에는 연산군 때 역적으로 몰린 유자광이 참수된 후

금부에서 그의 뒤를 추적한 결과 조상의 묘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조상의 묘소 덕분으로 왕후장상이 끊이지 않았다며 나졸을 보내 묘소를 파헤쳤다는 설이 있다.

 

장수군은 '무진장'이라 불리는 전북 3대 오지 중 한 곳이다. 
게다가 무룡고개는 장수에서도 오지 취급을 받았으므로 그야말로 오지 중 오지인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찿기가 얼마나 어렵고 외졌던 곳인가를 이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실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하다(10:35)

우리나라의 오지중에 오지를 꼽는다면 경상북도에는 BYC(봉화, 영양, 청송)가 있고

전라도에는 "무진장" 이란 말이 있다. 무주, 진안, 장수 이 세 고을을 일컬어

 부르던 말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지독히도 산골에 파묻혀 있고 오죽 세인들의

왕래가 뜸했으면 무진장 이란 말이 아주, 많이라는 의미를 뜻하게 되었다.

그만큼 오지이지만 또한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곧은 성품을 가진 인재들이 참으로 많이 배출된 곳이 이곳 장수이다.

 

고려가 망하자  함백산 아래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태조3) 성균관 학관  형조.예조.병조.이조판서,우사간 대부 그리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으로 후세 추앙 받은

 명재상 황의정승이 이곳 장수 출신이며, 임진왜란 때 가정이 어려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가 최경회가 전사하자 

진주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

(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와  3.1 독립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 

만해(한 용운)선사와 함께 불교계 대표 및 막후기둥으로 참여하여 선농일치 주창하고, 중국

만주 용정에 대각사 포교원을 설립 독립운동의 근원지로 사용하며 일제시대 부패된 조선 불교를

개혁하기 위하여 대각회를 설립하여 한국 불교사에 큰나큰 족적을 남기신 백 용성 선사 또한

장수군 번암면 출신이고 지금은 장수사과와 한우가 유명하다고 한다.

일기예보로는 오늘의 날씨가 가끔 흐렸다가 오후에 맑음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태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듯한 잔뜩 찌푸린 날씨이다...다행히 날씨는 그리 춥지않고 바람은 없다.

등산로 입구에 영취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초반에 아주 짧은 구간에 150m의 고도를

치고 올라야하는 급경사로 범여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구간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숨고르기를 하면서 영취산으로 향한다

200여m쯤을 지나니 데크목 계단이 끝나고 비포장의 오르막 등로가 시작된다

영취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초반에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느리게 걸었던지 500여m 올라 오는데 20분 가량이나 걸렸다

산악회를 따라 왔으며 동료 산꾼들에게 왕민폐에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텐데 홀로 걸으니 너무나도 여유롭다.

내 첫사랑과 같은 추억이 서린 이곳...벌써 4번째이지만 늘 가슴이 설레는 곳이다.

2016년 11월 20일...까칠한 우리 딸래미 시집보낸 다음날,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고

홀로  3번째 이 길을 걸었었는데 벌써 5년이란 세월도 지났구나

영취산(靈鷲山:1075.6m:10:55~58)

전북 장수군 장계면과 번암면, 경남 함양군 서상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영취산(靈鷲山)은 원래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주위에 있는 산으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 얻은 뒤

설법을 하시던 곳이 영취산(영축산이라고도 함)이다.  양산 통도사 뒷산이 인도의 영취산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영취산이라고 하며 통도사 대웅전(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상이 없다  

 

영취산 하면 철쭉으로 유명한 여수의 영취산이나 양산 통도사를 외호하고 있는

영취산을 떠올리며 대간상의 영취산은 산꾼들 사이에 그다지 회자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오르는 영취산 또한 예사롭게 여길 수 없다.

특히 백두대간의 학습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백두대간은 山自分水領 원칙에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대간은 정맥과 함께 10대강을 나눈다 10대 강 가운데 3개의 강 유역을 나누는 곳은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지는 속리산 천왕봉과 금남호남정맥을 낳는 이 곳 영취산 등 단 두 곳뿐이다.

속리산 비로봉은 낙동강, 금강, 그리고 한강(남한강)의 유역을 가르며, 영취산은 낙동강,

섬진강, 금강의 유역을 나눈다...그래서 이 두 곳을 三派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면 이 비는 정상석과 부딪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즉 낙동강 유역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빗물이 정상석과 부딪쳐 섬진강 혹은 금강유역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섬진강에 스며들어야 할  너무나도 빗물이 금강 혹은 낙동강 유역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운명은 뜻하지 않게 바뀔 수 있다” 는 인간세상의 원리와 너무나도 닮았다.

원래 영취산(靈鷲山)은 원래 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법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영취산, 취서산,

영축산이 다 같은 뜻이며, 「영산(靈山)」또는 「취산(靈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신령스럽고

신비로운 산이란 뜻이다.

 

영취산이라는 지명은 예전에는 장안산이라 불렀고, 무룡고개를 본월치라 불렀다.

팔도지도 같은 고지도에는 이곳 영취산을 본월치에서 비롯한 본월산이란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년)에는 영취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동여지도보다

100년 앞서 제작된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 선생이 산경표(山經表:1769년)라는

지리서(地理書)에는 장안치(長安峙)로 표기되어 있다.

예전의 고지도를 보면 이곳 영취산은 전라도 장수에서 보는것과 경상도 안의에서 보는것이 사뭇 다르다.

고지도(古地圖)  “장수편”에서 보면 영취산, 장안산, 본월치 등이 구분돼 표시되어 있는 반면,

고지도 “안의편”에는 영취산에 대한 표기가 없으며, 오히려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과

장수현(長水縣) 읍지(邑誌)에는 영취산은 일명 장안산이며 읍치(邑治)로부터 20리 지점에 있다

(山水靈鷲山一云長安山東二十里)라고 되어있어 영취산과 장안산을 같은 산으로 보고 있다.

영취산이 장안산의 이명(異名)이라고나 할까(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서 자료 인용)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영취산 정상에는 돌탑이 있고, 삼각점(함양 309, 2002 복구)이 있다.

그리고 전일상호신용금고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1,075.6m/(북쪽)깃대봉 7.5km, (서쪽)무령고개 0.4km,

(남쪽)백운산 3.8km'라 적혀 있고, 또 하나 서부지방산림관리청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육십령 11.8km,

중치 8.2km'라 적혀 있고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낙동강, 금강, 섬진강 분수령'이라

적혀 있으며, 육십령 약 11km(7시간), 장안산 약 3.5km(2시간), 백운산 약 3.5km(2시간),

샘터(무룡궁) 약 0.5km(30분)이라 적혀 있다.

영취산에서 바라본 장안산의 모습

2010년 12월 12일에 금.호남정맥 첫구간을 걸으면서 저 장안산을 지나갔으니

참 세월한번 빠르구나...이곳 영취산은 9정맥중에 가장 짧은금.호남정맥의 분기점이기도 한 곳이다

 

장안산은 육당 최남선이 산의 명승과 종산 개념 등을 고려하여 선정한 12명산에

호남의 산을 대표하며 전국의 8대 종산중에 제일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전국 8대 종산이란 종주산(宗主山)을 말하는 것으로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덕유산, 치악산, 장안산을 말한다

금남호남정맥 전체 개념도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전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인데, 금강과 섬진강, 낙동강 등 3강의 분수령인 영취산(1076m)에서 시작되어 장

안산(1237m), 사두봉(1015m), 신무산(897m), 팔공산(1148m), 시루봉, 성수산, 마이산(678m),

부귀산(806m)을 거쳐 조약봉(565m)에서 끝나고 이곳에서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분기한다.

이렇듯 금남호남정맥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갈라지는 조약봉분기점까지

도상거리 약 65.2km의 산줄기로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9정맥중 가장 짧은 산줄기이지만 최고봉인 장안산(1236.9m)을 위시로 1,000m급 산들이

산재해 있어 못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진안의 명산 마이산도 지나간다.

나홀로 산행의 여유로움으로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첫사랑!

젊으나 늙으나 남자라면 한번쯤 로망을 꿈꿀듯한 단어이지만, 또한 개념이 없는게 첫사랑이 아닐까.

첫사랑이라는 진정한 개념을 아는 사람도 없겠거니와 첫사랑을 해보았다는 사람도 세월이 한참지나

물어본다면 상대방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한게 첫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개념은 동.서양에서는 서로간의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문화적인 차이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란 것이 동양에서는 인(人)· 자비(慈悲)라는 사상과 통하는데 인은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확대되는데 불교의 '자(慈)'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悲)'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하며 여기서 서로 상대를 연민·위로하는 사랑이 생겨난다.

 

춘추 전국 시대 대표적 제자백가(諸子百家)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자(墨子:BC 480년~BC 390년)는

"하늘 아래 서로 겸애하라"(〈묵자〉 겸애편)고 말했고 친족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悲)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반면에 서양에서의 사랑은 에로스(erōs)· 아가페(agapē)· 필리아(philia)라는 3개의 단어로 표현된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며, 아가페적인 사랑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나는

종교적인 사랑을 말하며, 필리아적인 사랑은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서 굳이 내가 첫사랑을 논하는 것은 서양적인 개념에서 보면 필리아적인 사랑이 아닐까...

영취산을 내려서는 등로에는 잔설이 약간 있기는 하나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다.

사실 이곳에 온 목적은 멋진 설산(雪山)을 내심 기대하고 왔는데 이곳의 겨울 날씨가

따뜻했는지 눈이 내리지 않은 탓인지 설산에 대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대간길에다가 함양군에서는 대간길 정비를 참으로 잘해놓아서 걷기가 편한다

대간길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제산봉(霽山峰:852.8m)의 모습

오늘은 무룡계곡에서 영취산 오름길만 빡세게 올라왔지...그 다음부터는 고도차가 그리 크지 않아 편하게 걷는다

산죽길의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무명봉(11:07)

우측의 부전계곡 윗쪽으로는 백운산에서 중봉과 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또다시 직진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는 패스하고 좌측의 사면길로 걸어간다

눈팅이만 패스하고 지나가는 무명봉...체력이 딸리니 잔머리에 요령만 생기는 느낌이다

예전의 이정표는 새것으로 바뀌었구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가야할 덕운봉 갈림봉과 우측의 덕운봉(德雲峰:983.0m)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직진의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사면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지맥길에서는 범여가 전혀 용서가 안되는 부분이지만 4번째 대간길을 걷다보니 슬슬 꽤가 나는가 보다

산죽에 묻혀버린 쉼터처럼 보이는 공터를 지난다

무명봉(11:18)

나뭇가지 사이로 조망이 트이면서 제산봉과 그 너머로 남덕유산이 우람한 근육질로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우측으로는 남령으로 이어지는 남강(진양)기맥 능선이 보인다

부전계곡 갈림길(11:23)

우측으로는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옥산천이 흐르는 부전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함양징으로 유명한 꽃부리 장터(서상면 꽃부리)가 나온다

 

징은 농악놀이 중 빠질 수 없는 악기로 농악기 중 '바람소리'라 하며, 소리가 가장 멀리까지 울리는 악기라 한다.

또 여러 소리를 아우르는 기운을 가진 악기라 집에 징을 걸어두면 잡음 없이 늘 화평하다 하여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징은 노동과 놀이가 따로이지 않았던 시절 그만큼 가까웠다는 뜻이다.

 

함양징은 해방 이후 전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징이었다 한다.

함양군에 따르면 함양 방짜 징(꽃부리징)의 명장 오덕수가 1947년 이곳 서상면 꽃부리

(또는 꽃뿌리)에서 징점을 열고 197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징을 제작했다.

당시 이곳 꽃부리는 물론 서하면 송계리, 봉전리, 안의면 석천리 등에 수십 채의 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 거창에서 두부자공방'을 하고 있는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이용구 대정이

(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를 이르는 말)도 이곳 오덕수 명장으로부터 배웠다 한다.(경남도민일보 자료 인용)

성가실듯한 산죽길이지만 함양군에서 대간길을 잘 관리해놔서 편하게 길을 걷는다

논개생가 갈림길(11:27)

좌측의 내리막 등로는 논개의 생가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논개의 영정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

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나라가 風前燈火의 위기에 미천한 기생 신분으로 적장을 껴안고 남강물에 뛰어들어

草芥같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 나라를 구했는데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이 나라의

작금의 실태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두렵기까지 하다...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여!

제발 선조들이 지켜온 금수강산...부끄럽지 않게 처신하여 주시길...

안부(11:30)

조금 빡세게 오르막을 오르지만 지맥길에 비해서는 아주 양반이다.

잔뜩 흐린 날씨이긴 하지만 오랜 산행 경험으로 봐서는 눈이 올것 같지는 않다

능선에 올라서서 안부를 지나고...

다시 오르막으로 향하는데 암릉으로 된 덕운봉 서봉이라 불리는 갈림봉이 보인다

지나온 영취산(중앙)을 뒤돌아 본다...우측으로 가장 높은산이 장안산이고 영취산 좌측

아랫쪽은 청정계곡으로 유명한 옥산천이 흐르는 부전계곡이 아닌가?

부전 계곡은 영취산과 덕운봉 사이의 옥산천(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소재)이 흐르는 곳으로

백두대간의 울창한 숲에서 흘러내리는 수질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여 여름철에는 등산객과

피서객들이 즐겨찾는 계곡이다.

 

지명의 유래는 조선조 말기에 이곳에서 은거하며 강학을 했다는 부계(扶溪) 전병순(田秉淳:1816~1890)

선생에 의해 유래된 듯 하며 그 당시 강학을 했다는 부계정사(扶溪精舍)가 있으며, 고산자 김정호의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는 영취산 북쪽의 2km지점에 있는 현재의 덕운봉이 부전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전병순(田秉淳)은 1816년(순조 16)~1890년(고종 27)의 조선후기의 재야학자(在野學者)로

자는 이숙(彛叔), 호는 부계(扶溪)· 겸와(謙窩), 전석채(田錫采)의 아들로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그는  동생 전시순(田蓍淳)과 함께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조병덕(趙秉德), 전우(田愚) 등과

교유하였으며, 매문오현(梅門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평생 동안 경남 함양의 부계정사(扶溪精舍)에서 강학(講學)하며 사도(斯道)를 수호하는데

기여한 학자로 문인으로 임철규(林哲奎) . 김낙종(金洛鍾)등이 있었으며 부계정사(扶溪精舍)는 

노론 성리학자였던  부계 전병순이 은거· 강학하던 곳이다. 

저서에 부계집 9권 5책, 편서에 삼은 합고 44군 2책이 있다. 헌종 12년에 세웠고, 동문인 전재

임헌회와 계전 신응조가 기문을 지었다. 1976년에 중건하였고 입구에다 1987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덕운봉 갈림봉(11:42)

우측으로 덕운봉이 보이며 저곳을 지나면 제산봉과 서상면 옥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첫사랑 그 사람은 /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우측의 덕운봉 골짜기 아래로는 함양군 서상면 들녘이 보이고 산중턱에 스카이뷰G.C가 보인다

요즘 코로나 땜에 골프마니아들이 외국을 못나가는 바람에 골프장 쥔장들은 신이났다.

근데 너무나 갑질을 한다고 원성이 자자한데도 馬耳東風 격으로 배짱 장사를 한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는 식인가...사람 맘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거요.

 

세상사가 諸行無常이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인데...그러다가 한방에 훅 가는수가 있으니.

있을때 잘하시요

조망봉에서 내려오니 이정표에 덕운봉이라 표기를 해놨으나 덕운봉 갈림길이란 표현이 맞다.

이정표 우측으로는 띠지들이 많이 걸려있다...대간꾼의 호화준족이 많이 갔다오는 모양이다.

나같은 느림보야 焉敢生心이고 그림의 떡이지...오늘은 산행 거리가 짧아서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귀경 차량의 교통편이 어쩔지 몰라 입맛만 다시고 육십령으로 향한다.

덕운봉 갈림길을 지나면서 잠깐 산죽길이 이어지다가 멋진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봉으로 올라선다

암봉(11:45)

암봉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나 흐릿한 미세먼지가 그림을 망쳐버린다.

좌측으로 장수 덕유산이라 불리는 서봉에서 남덕유산, 남령을 지나 월봉산,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남강(진양)기맥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장쾌하게 펼쳐진다.

최근에 맥산행에 흠뻑 빠진 후배산꾼 큰바위달려님은 저 능선을 지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왔던길을 뒤돌아 본다...아랫쪽 산허리에는 예전엔 없었던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나뭇가지 뒷쪽으로는 출발점인 영취산이 보이고, 가장 높이 보이는 장안산은 쌓인

눈이 조금은 보이나 그리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겨울엔 이곳은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멋진 설경을 잔뜩 기대하면서 오늘 이곳으로 왔는데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두 발로

걸을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한데...더 뭘 바래...

암릉 구간이 끝나고...

산죽길 등로로 내려선다

구조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내려서니 등로가 질척거리면서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럽게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전망대 바위가 나온다

전망대 바위(978m:12:04)

오늘 산행중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전망대 바위 북서쪽 아랫쪽에는 아침에 택시를 타고 지나온 대곡저수지가 보이고

임도 아랫쪽으로는 논개의 생가지가 조성된 집들이 많이 보인다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북서쪽 저 너머로는 진안고원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진안고원은

전라도에서 고도가 독보적으로 높은 곳이며 남부 지방에서는 손꼽히는 고원지역으로 평지도

해발고도가 무진장 높은데 그래서 이 일대를 '진안고원'이라고 불리며 고랭지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 평지 고도가 무진장 높은데가 지리산 자락인 남원시 운봉읍이고, 나머지는 높은 지역 자체가

없다시피하며 운봉 다음으로는 화순, 보성 일대가 높은데 이조차도 200m를 넘는 곳이 매우 드물다.

구시봉으로 가야할 능선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능선 우측 아랫쪽으로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마을이 살짝 보인다.

저곳 어디쯤에 논개의 묘가 있는 곳이고, 논개의 할아버지와 조상들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신안주씨(新安 朱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전망대 바위에서 잠깐 머물다가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2:06)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12)

무명봉에서 내려서 안부를 지난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우회길이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2:14)

우측으로 잘 관리된 우회길이 보이지만 직진의 오르막에 족보가 있는 927.5m봉이 있다.

국립지리원에 뚜렸이 등재되어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대간꾼들에겐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庶子같은 봉우리이다...지맥길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무대포로 산죽을 치고 나가는데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927.5m봉(12:17)

어디로 가라는 건지?

시누대 군락지에 갇혀서 10분이상을 버벅거리면서 개고생을하다가 조금전의 사면길로 내려선다.

그냥 편하게 사면길을 따를걸...족보있는 봉우리 올랐다고 누가 상을 주는것도 아닌데...

이정표를 만나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가는데 갑자기 뭔가 허전하다.

뭐가 빠졌을까...핸드폰?...호주머니 속에 잘 있다.

카메라...내가 가장 중요시 하는 물건...손에 꼭 쥐고 있다

스마트폰의 트랙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의 글씨가 전혀 안보인다.

아뿔싸...정글같은 시누대 숲을 헤치고 나오면서 중요한 안경을 잃어 버렸다

10년을 넘게 애지중지 하면서 내 눈 역할을 충실히 해줬는데...찾으러 가기도

뭐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한 셈 치자꾸나...난 눈이 너무 나빠서 안경이 3개나 있으니

그냥 고이 보내자...사무실에도 하나 있고, 집에도 하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금당리 갈림길(12:36)

시누대가 군락을 이루는 산죽길 우측으로 서상면 금당리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인다

무명봉(12:38)

나뭇가지 우측 아래로는 논개의 묘소가 있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가 살짝 보인다. 

금당리(金塘里)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 면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남서쪽으로 육십령 터널이 지나가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구평, 방지, 양지땀 마을 등이 있다.

 

현재 금당리는 추상(楸上), 추하(楸下), 구평(九坪), 방지(芳池) 4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추상과 추하마을의 형성 시기는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고 하며 담양전씨, 김해김씨, 함안조씨,

진양강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추상과 추하마을은 가래나무를 베어내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가르내라고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추천(楸川)이라고도 하였다.

추상마을은 추하마을 위에 있어 상촌(上村)이라고도 하였고, 추하마을은 추상마을 아래쪽에 있어

하촌(下村)이라고도 하였다.

구평마을은 삼국 시대에 성 밖에 형성된 농경지였다고 하며, 근대에 거창유씨가 위천 금곡에서

들어와 살면서 느티나무를 심고 마을을 가꾸었다고 하며 구평마을은 마을 뒷산의 모양이 거북이

등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 위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하여

구평(龜坪)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평(龜坪)이 구평(九坪)으로 개칭되었다.

방지마을은 삼국 시대 방지성(芳池城), 합미성(合米城)이 있었으므로 그 시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함양박씨가 경상남도 합천에서 이거하여 터를 잡았고 그 후

안동김씨, 신안주씨, 함양오씨, 해주오씨, 함안조씨 등이 이거해 왔다고 한다. 마을 앞산의 봉우리가

연못에 떠 있는 연꽃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꽃다운 못이라는 뜻으로 방지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날씨는 점점 흐려지고 오전에 불지 않았던 바람도 조금씩 불기 시작하니 추워지기 시작한다

안부를 지나고 암릉이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좌측 사면길을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12:42)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2:44)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48)

 왔던길을 뒤돌아 본다

우측의 장안산 옆으로 마루금과 겹치는 영취산과 대간길에 있는 백운산은 눈이 제법 보이고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곳에 예전에 괘관산이라 불렀던 대봉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랫쪽으로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서상 나들목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거창의 명산들인 거망산과 황석산... 그 뒷쪽으로는 철쭉으로 유명한 합천의

황매산은 미세먼지로 인해 흐릿하게 보인다

무명봉에서 바라본 대봉산(1,252m)의 모습

무명봉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평탄한 능선을 따라서 가다가...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961.5m봉(13:08)

961.5m봉에서 내려서니 곧바로 북바위봉 갈림길이 나온다

북바위봉으로 올라선다

북바위봉(鼓峰:977.1m:13:10)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위 조망이 뛰어나다.

지금이야 전북과 경남의 경계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백제와 신라의 영토분쟁이 치열했던 곳으로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이 이기면 이곳에서 북을 쳤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바위봉에서 바라본 논개 생가가 있는 대곡리 주촌마을의 모습

장계는 예로부터 산수가 잘 어우러진 곡창지대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그런지 호남 좌도 농악의 이름난 상쇠들이 많이 배출됐던 고장이 장수라고 한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전망이 트여 함양군 서상면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엔 대곡(오동)저수지와 장수군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논개의 출생지와 사당은 우측 장수군 궐촌(주촌) 마을에 있으나, 그 무덤은 경남 함양에 있다

북바위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의 음지에다 낙엽속에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럽게 안부까지 내려와서 육십령가는 길에 뒤돌아 본 북바위봉의 모습은 멋있게 보인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무명봉으로 올라선다

민령이 점점 가까워지고...

안부(12:24)

잠시후에 가야할 구시봉(깃대봉)의 모습

갈림길이 나오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간다

철쭉 군락지를 내려서니...

좌측으로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多福한 소나무

대곡호(오봉저수지) 갈림길(13:35)

대곡저수지 갈림길에는 예전에 서낭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대곡호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민령이 나온다

민령(岷嶺:840m:13:37)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를 잇는 고개로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로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여 부른 이름이다.

 

논개의 출생지는 고개너머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지만 묘지는 서상면 금당리에 있다.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상태여서 퇴화한 고개가 되어 길의 흔적조차 희미하다.

교통이 편리해진 지금에야 이곳 민령을 넘너들 사람이 없어졌으니 등로가 제구실을 못하므로 고개도

퇴화하여 민령을 쉽게 확인할 수조차 없으니...

민령을 지키고 있는 멋쟁이 소나무

민령을 지나니 철쭉군락지가 나오고 구시봉을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육십령 터널 위(13:43)

이 능선 아랫쪽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육십령 터널이 있다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3:54)

우측 능선의 구시봉을 바라보면서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13:55)

안부에서 올라서니 주위의 조망이 트이면서 장수와 함양, 거창의 멋진 산들이 범여의 눈을 호강 시킨다

동쪽으로는 스카이뷰 골프장 뒷쪽으로 펼쳐지는 금원산~기백산~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주 멋지다

거창군내에는 해발 1,000m 이상이 되는 산이 13개나 있다고 한다.

 

기백산(箕白山:1,331m)이라는 이름은 기(箕)자가 28수 별자리의 하나인데, 청룡이 다스리는 동쪽의

7번째 별자리이고, 백(白)은 음양에서 양인 남성을 상징하는 뜻으로서 여성을 상징하는 금원산과 비교해서

지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비가 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는 뜻의 지우산(智雨山)이라 불렀다.

 

금원산(金猿山:1,353m)은 기백산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북서쪽 끝부분에 솟아있는 산으로서,

남덕유산이 모산(母山)으로 이 산은 육중한 몸매를 간직하고 있는 전형적인 흙산인데, 그만큼 계곡의 수량이

많아 아름다운 계곡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정상 동쪽 기슭에 '유안청계곡'이라는 심산유곡(深山遊谷)이

있는데, 이곳에는 유안청폭포, 자운폭포, 한수동계곡 등 여러개의 소(沼)와 담(潭)이 있다.


특히 이곳은 이태의 『남부군』에서 “5백여명의 남부군이 남녀 모두 부끄러움도 잊은채 옥같은 물속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금원산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 산속에 금빛나는 원숭이가

날뛰므로 한 도사가 바위 속에 가두었다'는 전설에 따라 금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산중턱에 있는

그 바위를 금원암 또는 원암(猿巖)이라고 한다.

영취산에서 오늘 내가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이만큼이나 걸어왔단 말인가?...쥔장 잘못만난 조그만 내 두다리(足)에게 늘 감사하다.

백두대간 백운산에서 대봉산(괘관산)에서 고속도로를 건너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 라인

황석산 뒷쪽으로는 요염한 여인이 누드의 아름다운 자태로 누워있는 듯한 미인봉이 아련히 보인다

남강(진양)기맥을 걸을 때 봤던 그 미인봉은 월악산의 영봉과 흡사한 모습이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올라간다

무명봉(13:57)

지명이 구시봉으로 바뀐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깃대봉이라니...

서부지방 산림청은 확인도 안하는지...하옇던간에 공무원의 탁상행정은 언제쯤 바뀔라나...

구시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구시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함양군 서상면의 모습

경상남도 함양군 북부에 있는 서상면(西上面)의 동쪽은 안의면(), 북쪽은 거창군 북상면(),

남쪽은 서하면(西), 서쪽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장계면()과 접한다.

 

덕유산()·육십령()·깃대봉·백운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계천()이 경호강()과 합류하며 배추·무·미나리·우엉 및 화훼재배가 성하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건설중이며, 진주~함양 국도가 면의 중부를 지난다.

 

문화재로는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경남유형문화재 44), 함양 방지산성

(:경남기념물 174), 극락사지() 등이 있다.

구조이정표를 지나고...

구시봉 정상에 도착한다

구시봉(1,014.3m:14:13~18)

전북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정상석과

국기 게양대 3개, 구급함과 안내판, 2등 삼각점이 있는데 원래의 지명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깃대를

세우고 측량했던 곳이라서 깃대봉이라고 했는데 이를 2006년 중앙지명위원회에서 풍수지리상 소나 말의

먹이통인 ‘구유’형상이라서 장계 주민들의 요구대로 ‘구시봉(전라도 방언으로 구유를 구시라고 함)’으로

고쳤다고 하며 서부지방산림청에서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놨다.

구시봉 정상석 뒷면의 모습

구시봉 정상석 뒤에 새겨져 있는 깃대봉과 구시봉 유래: 산림청에서 세운 푯돌에는 「구시봉」이라

적어놓고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로 그 아래 주둔하던 군사들이 기를 꽂은 곳이라 하여

깃대봉이라 불렀으나, 옛날 한 장수가 이 산에 올라보니 산 형태가 구시형이라 2006. 1. 6 「구시봉」

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고 적고 있다.

 

구시봉을 아직도 ‘깃대봉’이라고 하는데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전북 순창의 회문산 동쪽 깃대봉에 설치된

‘함평 조씨 사패지’다.

 

구시형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구시(1) - “ ‘구덩이’의 경상도 사투리”, 구시(2) -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다.” 고 표기해 놓았는데, 구시봉이란 여기서

구시(2)를 두고 한 말이며 표준어로는 ‘구유봉’이라 부른다

깃대봉 정상 2등 삼각점(△함양21 / 2000복구)

깃대봉은 덕유산 남쪽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가을 억새가 장관인 곳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두 나라 영토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번갈아 기를

꽂았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며 깃대봉 동쪽 물은 추상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서쪽 물은 장계천을 따라

금강으로 향한다.

구시봉에서 오늘 내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우측의 장안산에서 부터 영취산, 백운산을 거쳐 대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장쾌하다

맞은편으로는 지난해 늦가을에 걸었던 할미봉(맨 앞)과 그 뒤로 장수 덕유산이라 불리는 서봉,

남덕유산 능선에서 남령을 거쳐서 월봉산에서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보이고 잠시후에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육십령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북쪽으로는 장수군 장계면 들녘과 그 너머로 있는 마이산이 육안으로 어렴풋이 보이나

성능이 낮은 똑닥이 카메라로는 잡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구시봉에서 5분정도 머무는데  육십령쪽에서 등산객 3명이 올라온다.

산에서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는데 요즘같은 시절에는 사람들과

안 부딪히는 것이 좋을듯 싶어 구시령을 내려선다.

좌측 능선이 대간길이나 그냥 편안한 사면길로 내려간다

육십령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구시봉(깃대봉)의 모습

음지에다 등로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레 내려서니 깃대봉 샘터가 나온다

깃대봉 샘터(14:24)

山自分水嶺의 원칙으로 걷는 백두대간을 하면서 종주하면서 등로 옆에서 만나는 샘터는 그리 흔치않다

지리산을 제외하면 미시령 구간의 상봉 아래의 샘터와, 능경봉 아래에 인풍비 단망비 샘터, 백봉령 남쪽

갈미봉의 샘터, 포암산의 하늘샘, 조령산 제3관문 약수터와, 조령산의 조령샘, 대덕산 오르기전에 만났던

 북사면에 있었던 얼음골 약수터, 앞으로 가야할 지리산 아래 남원 운봉읍 노치리에 있는 노치샘,

그리고 이곳 깃대봉의 약수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 깃대봉샘은 우리나라 맥산행에 있어서 전설적인 존재이신 준.희선생께서 만든 샘이라고 한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꽤 흐른다...시원한 물한바가지를 마신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얼어붙은 등로는 끝이나고...

 계속되는 내리막길

갈림길이 나오지만 어디로 가던간에 금방 다시 만난다

안부(14:33)

안부 우측으로는 산삼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 있는 함양군 산삼자연휴양림은 휴식 공간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함양군의 특산품인 산삼을 접목해 건강 증진과 친환경적 기능을 갖춘 휴양 및

위락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2012년 5월 5일에 개관되었다고 한다.

 

산삼자연휴양림은 전라북도 장수군와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계부의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이

이어진 분수계 사이 깃대봉[약 1,015m]의 동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휴양림의 남서쪽으로는

통영~대전고속도로의 육십령터널이 통과한다. 주변 명소로는 깃대봉과 방지성, 논개묘, 부전계곡,

함양 방지산성,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문태서 장군 사적공원, 영각사, 화림동계곡, 징터, 육십령 등이 있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면 족보가 있는 884.5m봉이 나오지만 대간길은 산허리 사면길로 이어진다

예전에 3번이나 올라가서 실망을 한 탓에 그냥 패스하고 편안한 사면길로 향한다

884.5m봉 갈림길(14:38)

다시 884.5m봉에서 내려오는 마루금을 만나서 육십령으로 향한다

안부(14:41)

능선에 올라서서 지나온 구시봉을 뒤돌아 본다

무명봉(14:48)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서...

1 - 21 구조판을 보면서 살짝 우측으로 향한다

암봉(14:57)

내리막길로 내려간다...육십령이 가까워젔는지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갈림길(15:02)

우측으로 육십령휴게소 함양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대간꾼들이 우측으로 내려갔는데 지금은 장수쪽의

육십령휴게소가 훨씬 잘되어 있어 대부분이 장수쪽의 육십령 휴게소로 향한다

육십령 갈림길(15:08)

육십령 주차장으로 내려서면서 오늘의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육십령(六十嶺:698m:15:10)

경남과 전북의 도계이지만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서 군사 요충지이다.
지금의 육십령 마을은 1930년 경 경남과 전북을 잇는 국도가 개통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며

 이전에는 북쪽으로 두루봉 뒤 군장동(軍藏洞)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군장동은 북으로 합미봉, 남으로 두루봉 골짜기에 자리하여 옛날 군사무기를 저장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남쪽의 두루봉은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으며 적에게 위장하기 위하여 섬꺼치(꺼적데기)를 엮어서

산봉우리를 둘러 덮어 적에게 군량미 노적가리로 보이게 속였다고 한다


육십령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도둑떼가 많아 고개 아래 주막에 육십인 이상 모여야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고 하며. 또 하나는 이곳에서 안의 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요, 장수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또 안의에서 이 고개까지 오르려면 육십고개를 돌아오게 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육십령 충령탑

 1950년 6.25 사변 직후 국군 8사단, 11사단, 수도사단에서 덕유산 지구 공비토벌을 위하여 

작전을 수행하다 산화한 국군 영령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령탑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남진할 때 경남지방에는 이곳으로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넘어올 때에 오백여명의 아군이 이곳을 지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한 곳이다

육십령 정상에 있는 수준점

육십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장수군 장계면의 모습

지금 시간이 15시 15분 이곳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이곳에서 서울을 가려면 장계나 서상으로 가야하는데 거창에서 서상,

장계를 거쳐서 전주로 가는 버스는 08:45, 13:40분이기에 이미 틀렸고,

서상에서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15시 50분에 있고, 장계에서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16시 50분이다...이곳 육십령에서 서상까지는

자동차로 10분거리밖에 안되고 장계쪽보다는 거리가 훨씬 가깝다.

당연히 서상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육십령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함양쪽으로 넘어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상대로

앵벌이를 시도하는데 통행량도 그리많지 않고 인심이 사나운지(?) 차들이 서질 않는다.

육십령 마을입구(15:17)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있는 육십령 마을

서상에서 장계로 이어지는 26번 도로변에 있는 육십령 마을 입구에서 물레방아골

함양이라고 적힌 커다란 표시석이 있다.

이것은 청나라의 기행문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 지원이 조선시대에 함양 안의 현감으로

봉직시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에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2003년부터 함양군내의 모든 축제를 물레방아 축제로 통일하여 개최한다고 한다.

육십령 함양쪽에 있는 육십령 식당의 모습

백두대간 1차, 2차를 하면서 저곳에서 뒷풀이를 했는데... 저 집의 

김치찌게 맛이 참으로 일품이었는데...그 당시 쥔장 할매는 우째 사시는지

궁금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들려 보지는 못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상대로 앵벌이는 실패했고 서상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

육십령 마을에서 1톤 트럭 한대가 나와서 서상쪽으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얼른 쫓아가서 차를 막고 3시 50분에 서울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니 태워 달라고 하니 타라고 한다...덕분에 편하게 서상 터미널까지 왔다.

트럭 쥔장님!...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서상버스 터미널(05:40)

난생 처음 서상이라는 곳을 와본다

이곳에서 표를 예매한 다음에 베낭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고치는 사이에 

함양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하여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서상터미널 버스 시간표

예정시간보다 5분정도 늦은 시간에 서상을 출발하여 서상I.C를 통과하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지나 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선 다음에 죽암휴게소에 들렸다가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18시 20분이다...오랫만에 집에 일찍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