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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5구간 - 통안재에서 복성이재까지

by 범여(梵如) 2022. 2. 27.

흥부에게 묻다...어케 살아야 착하게 사는지?

 

☞ 산행일시: 2022년 02월 26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심한 미세먼지...차가운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14.7km / 5시간 5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통안재-698.8m봉-704m봉-상사바위 갈림길-안부-572.5m봉-웃치-무명봉-유치재

                무명봉-안부-벙커봉-508.1m봉-매요교회-와룡농장 입구-유치 삼거리-625.3m봉

                김해허공 묘역-방현고개-554.4m봉-무명봉-사치재-헬기장-안부-안부-무명봉

                692.5m봉-조망바위-667.4m봉 갈림길-폐헬기장-무명봉-임도 합류점

                새맥이재-무명봉-암봉-721.7m봉-시리봉 갈림길-안부-775m봉-무명봉-784.8m봉

                복성이 뒷재-아막성 정상-성재-흥부마을 갈림길-601.4m봉-옛복성이재-복성이재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운봉읍, 산동면, 아영면 / 장수군 번암면 

 

春來不似春?...올해는 봄이 오는게 더디기만 하다.

지난해 이맘때 범여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봄꽃 소식에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메고

야생화 찍으러 다니기에 바빴는데 올해는 1년중에 가장 빨리 핀다는 복수초 소식도

안 들리고, 남쪽에서 들려오는 통도사의 자장매화와 선암사 무우전(종정원)의 백매화,

구례 각황전의 홍매화 소식도 아직은 감감 무소식이다.

 

거기다가 몇년동안 해마다 2월말쯤이면 나홀로 부안으로 가서 내소사 뒷쪽의 복수초를 찍고

쇠뿔바위봉 아래에 있는 황진이, 홍랑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생으로 꼽혔던 부안출신의 매창의

詩碑가 있는 어수대, 쇠뿔바위봉을 거쳐 변산바람꽃, 노루귀의 서식지로 유명하여 진사들의

순례코스가 되어버린 청림마을 봄꽃 소식도 더디기만 하다.

아마도 소한, 대한 다 지나고, 입춘과 우수, 경첩을 지난후에 찾아온 강추위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봄꽃 친견은 조금 미뤄야 할 듯 싶다.

 

나홀로 산행을 하는 범여로서는 산에 관한한 오라는데는 없어도 가야할 곳은 천지이다.

이리저리 산행지를 검색하다가 보니 갑자기 고려말에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운봉 들녘이

보고 싶어진다...4번째에 발을 들여놓은 대간길도 이어가고 싶고...

 

우선 일기예보를 검색하는데 날씨는 지난주에 비해서는 많이 풀렸지만 남원지역에는

저녁 8시이후부터 비가 온다고 예보가 되어있다...평소에 잦은 誤報를 해대어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린 구라청의 예보를 잘 안 믿기도 하지만 저녁 8시이후라면 산행을 끝나고 귀경할

시간이라 그때야 비가 오든지 말든지 내 알 바가 아니제...

 

이번주 일요일날은 올해 88세인 누님의 생신이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서

토요일날에 산행을 하기로 한다...연로하신 노인이라 언제 세상을 하직할진 모르지만

그래도 누님이 살아 계시는 것만도 막내로선 늘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부모님이나 진배없으신 누님...아프지 마소...일요일날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인월행 버스표

인월로 가는 버스는 다른 지역과 달리 첫 차가 아침 7시라서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밥한숟갈로

아침을 해결하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50분...잠시후에 버스에 오른다.

동서울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버스 시간표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오미크론인가 지랄인가하는 역병 때문인지 평소와는 달리

지리산으로 향하는 버스인 이 차에는 정원이 28명인데 손님이라곤 달랑 8명이다.

그것도 함양에서 거의 다 내리고 인월을 거쳐서 지리산 백무동으로 향하는 승객은

2명인데 인월에서 내가 내리고 1명만 태우고 버스는 지리산 아래 백무동으로 향한다.

 

함양을 지나서 인월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갑자기 버스가 가질 못한다.

알고보니 이곳에 산불이 나서 많은 차량들과 산불을 진화하는 인력들로 인하여 교통이 마미됐다.

서울에 있을 때 같이 산행했던 젠틀맨님이 이곳 남원으로 귀촌하여 현재 산불감시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큰 걱정이다...오후에 전화를 해봐야겠구나.

인월버스 정류장(10:38)

이런저런 연유로 해서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인월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곧바로 들머리인 통안재로 향하는데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꺽지않고 달리는게 아닌가?

왜 미터기를 안꺽고 운행을 하냐고 하니까...돌아온 대답이 이곳은 통상적으로 그렇게 한단다.

 

택시는 권포리를 지나서 통안재로 향한다...원래 권포리 입구에서 차단기로 막아놨는데

요즘은 이곳에서 진행되는 벌채작업으로 인해서 차단기가 열려 있어서 통안재로 향한다.

차단기가 막혔다면 권포리에서 통안재까지의 거리가 1,7km정도인데 시간을 좀 벌었다.

미터기를 안꺽고 온 택시기사가 택시비가 20,000원인데 22,000원을 달라고 한다.

통안재(655m:11:05)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서 운봉읍 권포리와 임리를 잇는 고개로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란다. 고개 위에는 고남산 통신탑이

내려다 보고있고 서어나무들이 있는 넓은 공터가 보이며 이 지역사람들은

독골재라고 부르며 고남산 정상에 있는 KT송신소로 가는 포장도로이다

산행을 시작하다(11:07)

통안재에서 올라서서 벙커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면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아직까지 봄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숲길을 나홀로 걷는 재미가 소소하다

1년 산행중에 80%는 지맥길을 걷다가보니 등로가 좋은 대간길은 언제부터인지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다...예전에는 산악회만 따라 다닐때는 무심코 앞사람의 등산화만 쳐다보고

다녔지만 나홀로 다닐때는 지도에 표기된 족보있는 봉우리를 가급적 오르기로 한다

통안재에서 출발한 지 8분만에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698.8m봉(11:15)

능선에 올라서니 우리나라 산꾼들중에 봉따먹기 大家들의 시그널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이 봉우리는 앞서 3번이나 대간길을 걸었지만 한번도 오르지 못한 봉우리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제가 생긴다...조그맣고 가벼운 편리한 때문에 10년을 넘게 가지고

다녔던 똑닥이 카메라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어 버리니 참으로 난감하다.

아무리 이것저것을 만져봐도 뭔 문제인지 작동이 안되니 미칠 지경이다.

 

나는 카메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소형 카메라에서부터 고가의 DSLR 카메라까지

10개 넘는 카메라에다 종류도 케논, 니콘, 소니, 라이카, 후지카메라까지 다양한 종류를

보유하고 있지만 유독 가볍고 쬐끄만 이 카메라을 좋아했는데 이 넘이 이제 쥔장을 배신하네...

난 사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좋아하지 않고, 잘 사용하지 않아서 작동도 서투르고 불편하다.

근데 어쩌랴... 꿩 대신 닭이라고...하는 수 없이 이 시간 이후부터는 스마트폰으로 기록을 남긴다

704m봉(11:19)

등로 가운데에 무명묘지가 있고 묘지 뒷쪽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이정표(→고남산 1,570m↑매요마을 3,410m)가 있는 우측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에 지난주에 비하여 기온이 많이 올라가서 그리 춥지는 않으나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겨울을 벗어나지 않은지 상당히 차갑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상사바위 갈림길(11:32)

우측으로는 임리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상사바위쪽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뚜렸하다

고개 가운데는 이정표(↑매요마을 2,710m ↓고남산 2,270m)가 있는데 매요마을쪽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상사바위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지나 남원시 운봉읍 임리에서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로 통하는 고남산 송림속에 상사바위가 있는데 옛날 운봉읍의 한 마을에서 시집 못간

처녀가 상사병에 걸려 미쳐 돌아 다니자 보다못한 부모가 처녀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마을 뒷편의

큰 바위에서 처녀를 밀어 떨어뜨리고 부모들도 자결을 하였다

이후 죽은 처녀는 커다란 지네가 되었고 이 지네가 풀섶을 지날때는 한길이 넘는

풀이 덜덜 떨린다고 하였다...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했는데 지금도 주변에 처녀의 머리카락이 있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남원시 운봉읍 임리쪽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시멘트 임도를 보면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등로 우측 아랫쪽 나뭇가지 사이로는 불당저수지가 흐릿하게 보인다

안부(11:40)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572.5m봉(11:51)

572.5m봉 정상 삼각점(△운봉403 /1981재설)

572.5m봉 정상을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한반도의 등뼈 역할을 하는 백두대간 산줄기라 그런지 길은 참으로 좋다

웃치(11:54)

펑퍼짐한 안부에 이정표(←매요마을 1,310m, →고남산3,670m)가 서 있는데 오룩스맵상의 웃치라 한다.

아마도 운봉읍 임리 뒷쪽의 윗쪽에 있어서 그렇게 부르나?(범여의 생각 中에서)

편안한 길을 따라서 안부를 지나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 좌측 아랫쪽으로는 새로 생긴 대구~광주간 고속도로(옛 88고속도로)가 보인다

무명봉(12:02)

우측으로는 예전에는 없었던 매요리쪽에는 공장 건물같은 곳이 보이고

나뭇가지 뒷쪽으로는 덕두산(德頭山:1,150m)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와 인월면 중군리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 지리산 북쪽 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산 남쪽으로 바래봉, 팔량재 등이 이어지는 산으로 북쪽에 황산이 위치하며 그 사이

좁은 지역으로 람천이, 산의 동쪽으로 광천이 흐르며 북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옥계저수지를

이룬 후 람천으로 합류하는 등 람천과 광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여지도서』(운봉), 『운봉현읍지』 등에 수성암(水聲菴)이 덕두산(德斗山)에 있다고 수록하여

현재와 한자를 달리하였고, 『호남지도』와 『청구요람』(22첩 12면)에 '수성암'이 표기되어 있으며,

『읍지』(운봉지도)에 덕두산(德斗山)이 읍치 서쪽, 응봉(鷹峯)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 '덕두산(德頭山)'으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후 한자 지명이 변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치재(柳峙:470m:12:10)

남원시의 운봉읍 임리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사이를 연결하는 고개로 버들재라고 한다.

백두대간 줄기로 북서쪽의 시리봉에서 산지가 이어지며, 동쪽으로 통안재, 고남산 등이 위치한다.

여지도서』(운봉)에 "유치(柳峙)는 황산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동일문헌 남원부의 기록에도 "팔량치와 닿아 있는 곳이며 영남으로 통하는 길이다.

관애를 만들어 방어할 만하다."라고 하여 그 이전부터 지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운봉 대부분의 지리지에서 유치가 수록되어 있다

 

포장도로가 나오고 매요마을로 내려가는 이곳이 대부분의 지도에는 유치재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범여의 생각으로는 지도상 오류가 아닌가 싶다.

앞에 보이는 뚜렸한 길로가면 예전에 3번이나 걸었던 매요마을로 가는 길이다

공장이 보이는 능선 우측으로는 남원시 운봉읍 임리(林里) 방향이다

 

남원시 운봉읍 임리(林里)는 마을 둘레 야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그 풍경이 일품이라 하여

 ‘숲머리’, ‘숲멀’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를 차용하여 임리()로 표기하였다.

또한 임리는 조선시대 현지 시찰을 위한 원님 행차 시 운봉 동헌을 출발하여 아곡()으로

넘어갈 경우 마을 앞을 지날 때쯤이면 꼭 점심 때가 되어 마을 앞에서 솥(鼎)을 걸고

밥을 지었다고 하여 밥재이들(식정:鼎)이라고도 한다

공장 너머로는 정령치에서 큰고리봉, 새걸산, 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덕두산 뒷쪽으로 있는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은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서 흔적도 안보인다

지도상의 유치재로 표기가 된 안부에서 직진의 뚜렸한 길로 가면 매요마을이 나온다.

예전의 3번은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매요마을로 내려 갔는데 오룩스맵상의 대간길은

이곳에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서 가도록 트랙이 그려져 있다...오늘은 FM대로 가보기로 한다

묘지를 지나서 ...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2:13)

대간길은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우측 아랫쪽으로는 매요마을이 보인다.

예전에는 유치재라 부르는 안부에서 그냥 편안한 길을 따라서 매요마을

가운데로 통과하였는데 지금은 매요마을 뒷쪽 능선길을 걷는다.

이제서야 제대로 대간길을 걷는 느낌이다

무명봉을 내려와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대밭 아랫쪽으로는 매요마을이 보인다

안부(12:16)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동물이동을 추적하는 카메라가 보인다

헐~~~이곳에서 권작가님을 만나다니...

산에 관한한 완벽한 이론가중의 한 분이시며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과 “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저자이신 현오 아우님...오늘은 어느 산을 헤매고 있으신지?

지난해 6월에 지리산 반야봉 아래 묘향암에서 같이 1박한 이후에 같이 산행을 못했는데

잘 계시는지?...산은 늘 거기에 있으니 무리하지 마시고 여유롭게 다니셔...

올 6월에도 날짜 한번 비워두소...묘향암 호림스님도 찾아뵙고 지난해 못봤던 반야낙조와

이끼폭포도 보고 박영발 비트에서 쐬주도 한잔해야죠

대간꾼들이 이곳으로 다니는 모양이다...간간히 산꾼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벙커봉(12:20)

벙커봉에서 내려서니 밤나무밭이 나오고...

안부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 좌측 아랫쪽으로는 고속도로가 보이고...

508.1m봉(12:21)

508.1m봉을 찍고 우측으로 내려서니 대간길이 마치 지맥길 같은 느낌이다

등로가 없는 곳으로 내려서니 권작가의 시그널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두릅밭을 지나...

묘지가 있는 대밭쪽으로 내려간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길이 전혀없는 대밭을 헤치고 내려간다

生을 마감한 이름모를 새 한마리가 보인다...다음 生에는 좋은곳에 태어나거라

과수원 가운데를 가로 지른 다음에 교회 십자가가 보이는 매요마을 민가쪽으로 올라간다

민가가 있는 곳으로 올라선다

민가 뒷쪽의 밭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매요마을이 한 눈에 보이고 밭을 지나니 매요교회가 나온다

밭에서 바라본 매요마을

남원시 운봉읍에 소재한 매요리는 운봉읍 소재지에서 부터 4km 지점에 있으며 8번 군도가

마을 앞을 지나며 이곳에서 남원역까지 운행되는 버스가 있으며, 백두대간을 통과 2개마을 중에 

하나인 곳으로  마을 뒤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고남산과 황산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과 경계에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매요마을은 말의 허리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을 이름을 말마(馬), 허리요(腰)를 써서 '마요리(馬腰里)'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유정대사(惟政大師: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며

이곳 마요리에 머무를 때 지금의 마을 이름으로 바꿔놓았다는 애기가 전해지는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해서 눈속에서도 꽃이 시들지 않고

순결한 향기가 난다는 의미로서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쳤다고 한다.

 

지리산 북쪽 운봉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동네이다

또한 이 마을은 우리나라 십승지중에 하나인 운봉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초석을 마련했던 황산대첩... 황산대첩비가 이곳에서 가까운 비전마을에 있다 

매요교회(12:32)

매요교회 마당을 내려서니 폐교가 되어버리 운성초교 정문이 보이고

우측 아래에는 오랫동안 대간 산꾼들에게 목로주점 역할을 하면서

추억거리를 남겨준 매요휴게소가 있다.

매요휴게소로 가본다...예전에 신순남 할머니가 해주신 두부김치에다 막걸리가 일품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고 적막감만 흐른다...주모 역할을 한 할머니의 건강은

어쩌신 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신 할머니의 근황이 알고 싶어도 주변에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니 알 도리가 없다

인생은 일장춘몽


한주먹 밖에 안되는 손으로
그대 무엇을 쥐려 하는가


한자 밖에 안되는 가슴에
무엇을 품으려 하는가


길지도 않는 인생 속에서
많지도 않는 시간 속에서
그대 무엇에 허덕이는가


일장춘몽 공수래 공수거에
우리네 덧없는 인생을 비유했던가
오는 세월을 막을 수 있는가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있는가
원통의 눈물을 거두소서
통곡의 애한을 버리소서


녹는 애간장이 있거덜랑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타는 목마름이 있거덜랑
한잔 술로 씻어버리세


화무십일홍이라
피는 꽃이 이쁘다 한들
십일을 가지 못하고
지는 꽃이 슬프다 한들
내 마음보다 더 할소냐?


오시는 자 욕심없이 오시고
가시는 자 미련없이 가소서


우리네 인생
참으로 허망하고 부질 없어라
그러나 오늘도 숨을 쉬고 있기에
씨앗든 망태기 짊어지고
산으로 들로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소


고즈넉히 들려오는 풍경소리에
잠들지 않는 상념은
소리없이 깊어만 가네
어차피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인 것을


- 좋은글 中에서 -

매요휴게소의 아쉬움을 간직하고 폐교된 운성초교 담벼락을 지난다

와룡농장 입구(12:35)

도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이곳이 십승지의 하나로 꼽히는 남원 운봉 두류산(지리산) 부근으로 지맥길을

마무리하고 범여가 꼭한번 걸어볼 계획인 곳이다

 

지리산 주변에는 구례나 남원, 경남의 함양.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다. 

모두가 한폭의 그림같은 마을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감록' 에 따르면 이 도시들보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인 운봉 (雲峰) 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고 있는데 오늘날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그 주변을 가리킨다. 

이곳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며 가히 오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 이라고 했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북에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경계를 이룬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한다.

가령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려면 이 두 재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

해발 평균 450m로 서울 남산의 두배 높이에 자리한 운봉은 그런 점에서 '하늘의 요새' 라고 하겠다. 

고려말 남해안을 날뛰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했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후 

빨치산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놀기

유치삼거리로 이어지는 8번 군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

능선에서 곧바로 도로로 내려선다

유치 삼거리(420m:12:40)

남원시 운봉읍 매요리에 있는 고개 삼거리로  직진으로는 직진 방향으로는 인월쪽이고

좌측으로는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방향이며 삼거리에는 유정 버스정류장이 있고

예전의 대간길에 없었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柳峙)” 표시석이 있다.

유치(柳峙)라는 고개가 지나온 유치재가 아닌 이곳이 유치라 불러야 맞을 것 같다.

 

지금 길을 걷고있는 이곳 운봉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판소리라 함은 이조 영조, 정조 때 가장 널리 보급되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주로 남자들이 부를 수 있었던 것을 이조말 대원군이 경복궁 경회루 落成式때

진채선이란 여성을 불러 소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 여성명창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며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강산제)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고 한다.

 

지리산을 휘감고 있는 남원은 역사와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송홍록,송만갑,김정문,이화중선,강도근,안숙선,오갑순,강정렬등 수많은

명인명창을 배출한 국악의 성지이자 판소리 동편제의 本鄕이다.

우리나라 고전을 대표하는 춘향전과 흥부전,현대문학의 걸작인 혼불의 무대이기도하다.

유치 삼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

예전에 없었던 유치삼거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柳峙)” 표시석

대간길은 저 앞에 보이는 파란색 물탱크 앞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柳峙) 표시석

인월로 향하는 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에 등로  옆의

바람이 불지 않아서 이곳에서 간단하게 가져온 떡과 두유하나로 점심을 해결한다.

(12:41~50)

산에 서 있는 유치삼거리 안내판...고도의 표시가 엉터리이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좌측 아래로는 유치삼거리에서 번암으로 이어지는 743번 지방도가 보이고

새롭게 4차선으로 단장된 광주~대구간 고속도로(옛지명:88고속도로) 번암1터널이 보인다

대간길은 우측으로 꺽어져 이어가는데 주위에는 건강한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오르막길 등로 주변에서 만난 묘지

무명봉을 지나고 안부에 내려선 다음에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등로 좌측 능선에는 벌목을 하고 편백나무를 조림해놨다.

등로 우측으로는 남원시 운봉읍과 점촌제, 가산제(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의 기틀을 마련해 준 황산대첩이

이루어졌던 황산(荒山:698.7m)가 보면서 완만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 황산대첩(荒山大捷)이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지리산 북서쪽인 전북 남원의 운봉

황산에서 지방 출신의 신흥 무장 이성계가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크게 물리친다.

14세기 중반부터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왜구의 도발은 황산대첩을 계기로 주춤하게 된다.

황산전투는 같은 해 8월 진포대첩, 1376년 홍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 대첩으로 불린다

625.3m봉(13:22)

대간길 등로에서 우측으로 살짝 벗어나 있고 넓은 공터같은 곳에 무명묘지 1기가 있다.

625.3m봉 정상에는 봉따먹기 대가들의 시그널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등로로 복귀하여 가야할 능선을 바라본다

성터의 흔적같은 너덜길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예전에 신라와 백제 국경지대로 대처했던 가산산성이 흔적인 듯 싶다.

김해허공 묘역(13:28)

방고개(榜峴:570m:13:31)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 방현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가산이란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이며, 방현은 방을 붙인 고개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옛날부터 운봉 관아가 있는 운봉읍과 권농병마사가 있던 아영 지역의 중간

통로였기 때문에 이 고개에 운봉현 유생들이 과거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이 붙었는데,

이곳에 합격여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방을 기다렸다는 데서 유래한다

임도 내리막 아래에는 방현마을이 보이고 축사같은 건물 뒷쪽으로는 황산이 보인다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가산리(佳山里)는 마을 주변의 산세가 아름다운데, 동쪽으로 황산이

높이 솟아 있고, 암벽이 발달한 마을 뒷산은 풍치도 수려할 뿐만 아니라 예부터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산성(가산산성)을 쌓아 대치하던 요새지였다.

 

북쪽 아영면 아곡리로 통하는 방고개가 있어 예로부터 아영면 사람들이 운봉을 넘나드는 주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유적으로는 가산산성과 향교 터, 용암사우 터, 명석치, 정려문, 비보석 등

향토문화재가 있으며, 함양오씨 제각인 화포재(華圃齋)와 파평윤씨의 제각인 명석재(鳴石齋)가 있다.

마을 앞으로 24번 국도가 동서 방향으로 지나며 동쪽으로 경상남도 함양읍에 연결된다. 이 외에도

8번 지방도가 운봉읍과 인월면을 지나고 있다

방고개의 이정표

대간길은 묘지 뒷쪽의 사치재 방향으로 이어진다

554.4m봉(13:34)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엄연히 족보있는 봉우리로 등록되어 있건만

대간 능선에 있는 죄(?)인가...왠지 홀대받는 느낌이다

암릉 아래로 내려선다.

가야할 능선을 바라보면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무명봉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3:42)

사치재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사치재(沙峙:500m:13:45)

전북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서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을 잇는 고개로

이슬재라고도 하며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사치(모래재 부락:장수군 번암면 소재)는 과거 백제의 영토였으며,

신라 영토인 가산리(남원시 운봉읍)와는 국경 분쟁지역이었다고 한다.

 

사치재는 옛날 전란시절 재 아래 숲 속에 몇 집이 살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이곳을 지나

갈 때에 이 마을 한 집에서 아낙네가 베를 짜고 있었다.

그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군사들이 하는 소리가 그 새소리 참말 처량하다

하면서 동리가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하여 모래재라 이름 하였다고 전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비안낙사(飛雁落沙)라 하여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형국이라 한다

사치재를 통과하는 생태통로

생태통로에서 바라본 광주~대구간 고속도로(옛 지명:88고속도로)

88 올림픽을 기념하여 만든 이 고속도로는 내가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2차선에다 도로에 중앙 분리대가 없는 탓인지 고속도로 사고율이 가장 높은 곳이도 하다. 

그 당시에는 국도보다도 못한(?) 고속도로로 차량도 별로 없었고 대간할 때는

무단횡단을 했는데 이제는 교통량도 많고 4차선이라 고속도로의 폼이 나는 편이다

사치재에 있는 안내판

생태통로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빡센 오르막이다...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드는 구간으로 힘들게 올라서니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625m:14:05)

등로에서 바라본 천황산(天皇山:909.6m)의 모습

 남원시 산동면 대상리와 보절면 신파리에 걸쳐있는 천황산은 일명 보현봉, 천황봉, 만행산(萬行山)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천황산의 옛 이름은 만행산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귀정사(歸政寺)의 옛 이름도 만행사였으나, 고려 말 이성계가 고남산에서 운봉

황산벌에 침범하는 왜장 아지발도와 왜구를 멸하고 회군길에 이곳 만행사에서 삼 일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가, 임금이 된 뒤에 다시 만행사에 와서 삼 일 동안 정치를 하고 돌아갔다 해서 귀정사라 명했다 한다.

그 뒤 지명도 바뀌어 법당 뒷산인 만행산을 천왕봉으로, 왼쪽의 봉우리를 태자봉(太子峰), 앞산을

승상봉(丞相峰), 남쪽 산골을 남대문재[南峙], 북쪽산골을 북대문재[北峙]로 하였으며, 병사들이 주둔한 곳을

둔병치(屯兵峙), 천황봉 줄기 산자리 밑에 평평한 바위를 상소바위, 사찰아래 마을을 삼 일 동안은

당나라 요순시대와 같다하여 요동(堯洞) 또는 요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동면 지역에서는 임금을 숭상하는 의미에서 천황봉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절면 지역주민들은 산동면 지역주민과 왕래가 별로 없었기에 그냥 만행산이라고

옛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줄기 전체를 부를 때는 옛 이름대로 만행산으로 표기하고, 만행산의 주봉인

산봉우리 하나만을 부를 때는 천황산이 아닌 천황봉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

오늘 내가 걸었던 능선과 고남산을 뒤돌아서 본다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요천지맥(신산경표상의 천황지맥) 능선

금.호남정맥 팔공산 근처에서 갈라져 남원시 금지면 하도리 요천으로 입수하는

저 능선은 내년쯤에 한번 걸어볼 예정이다

잠시후에 오를 능선을 바라보면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능선에서 바라본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阿谷里)의 모습

는아영면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로 전해지는 아곡리(阿谷里)는 위치가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인 아막성(阿莫城)의 성역이라 하여 아실이라 했는데 한자로 옮기면서 아곡(阿谷)이 되었다.

안부(14:10)

잠시후에 오를 능선 저 뒷쪽으로는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시리봉(777.7m)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영면 너머로는 삼봉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4:15)

자작나무 조림지 사이의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등로 좌측으로는 대성산(大聖山:882.3m)이 보인다

남원시 산동면 월석리와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에 있는 대성산은 옛날 삼한시대에

어느 임금이 산동면 대상리 귀정사에서 삼일간 정치를 하면서 천황봉에 비해 성인격이라 하여

대성산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마을을 둘러싼 산이 반달형으로 생겨 마치 솟아오른 달을

맞이하는 형상이어서 대성산을 ‘큰달뫼’, 영월산을 ‘작은달뫼’라 불렀다.

산 아래의 마을은 큰달뫼와 작은달뫼가 있어 달뫼 또는 월산(月山)이라 했는데 1,300년경 대성산

아래 삼봉의 서당기가 있어 이곳에서 성인(聖人)을 배출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많은 씨족들이 찾아 들었다. 농토가 기름진 이곳을 찾아 온 씨족들은 나주임씨, 서산유씨,

밀양박씨 등이 각각 정착함으로써 일찍부터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나무 계단으로 올라간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들을 뒤돌아 보고...

동남쪽으로는 연비산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보인다

오늘 산행을 시작한 통안재 위에 있는 고남산

남원지역의 어디서봐도 시원스럽게 보이나 아쉽다면 미세먼지로 인한 흐릿함이다

무명봉(14:21)

692.5m봉을 향한 오르막은 계속된다

대간 능선에서 바라본 광주~대구간 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와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의 모습

당겨본 지리산 휴게소의 모습

광주~대구간 고속도로 너머로 운봉의 넓은들이 보이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국경분쟁이 많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임도를 버리고 마치 지맥길같은 등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올라간다

692.5m봉(14:28)

묘지를 지나고...

암릉 구간을 지나고...

조망바위(14:33)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황산(좌)과  오늘 내가 걸었던 대간 능선의 모습

황산(荒山:697m)은

남원시 운봉읍·아영면·인월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려 말 황산대첩의 현장이었다.

 

예전부터 운봉은 교통의 요충지로 전략적으로 중요했는데 특히 황산은 마주한 덕두산 자락과 함께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오는 외적이나 세력을 막았던 목이었다. 황산의 남사면 부층탑이 있는 덕두산

자락의 옥계동 화수교 사이는 폭이 겨우 75m 정도로 좁은 동시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황산대첩이 일어났다.

1380년(우왕 6) 9월, 금강 어귀에서 출몰한 왜구들은 최무선의 최신 화포 공격을 받아 퇴로가 막히자

육지로 상륙하여 충청도를 거쳐 함양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지리산을 넘어 운봉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서쪽의 광주를 거쳐 도망가려 하였다.

이때 삼도순찰사인 이성계가 군대를 거느리고 왜구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밤새 달아나는 왜구를 섬멸했다. 왜구의 섬멸로 핏빛이 어려서 지금의 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1577년(선조 10) 운봉현감 박광옥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하여 일부 파편만 남았으나 1957년에 중건하였다.

조망바위에서 고남산도 한번 당겨본다

667.4m봉 갈림길(14:38)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지도의 족보에 올라있는 667.4m봉이 있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자작나무 조림지 아래로 내려선다

폐헬기장(15:43)

안부가 되어버린 폐헬기장을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4:58)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등로 우측으로는 묘지가 보이고...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우측에서 내려오는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 합류점(15:06)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우측으로 내려가는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향한다

조그만 봉우리에서 내려서니 아주 넓은 임도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새맥이재이다

새맥이재(鳥項峙:515m:15:08)

전북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에서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와 논곡리를 잇는 고개로 번암쪽으로는 

고속도로같은 넓은 임도가 보이지만 아영쪽으로는 등로가 보이질 않고 부산 낙동 산악회에서 

걸어둔 표지판만 없으면 무심코 지니치기 좋을만큼 그냥 평범한 고개로 지명의 유래가 된

새목이는 새의 목에(鳥項) 해당하는 고개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표기하면 조항치(鳥項峙)

라고 하면 될까?

 

아막성과 가까운 이 재는 신라와 백제가 땅따먹기 게임으로 밀고 당기며 싸우던 곳이요,

이성계는 이곳 남원땅을 침략하여 노락질을 일삼던 왜구를 물리치고, 조선 개국 발판의

시금석을 마련한 곳이 오늘 걷고있는 이곳 운봉땅이 아니였던가?

 

또한 개화기에 동학의 힘찬 민중이 마지막 항거로 쓰러져 누운 고개가 이곳이였으며 그리고

동족상쟁의 피비린내 속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오직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치산에 몸을

담았다가 이유도 없이 죽어간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고개이기도 한 곳이다

새목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곧바로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등로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꾸준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무명봉(15:22)

멋쟁이 소나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대간길을 지키고 있구나

암릉길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겨울철이긴 해도 건강한 소나무에서 뿜어나오는 피톤치드향이 상큼하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암봉(15:41)

721.7m봉(15:41)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마사토 지역의 미끄러운 암릉길을 올라선다

시리봉 갈림길(15:49)

이곳에서 우측으로 약250여m 정도 거리에 시리봉(777.7m)이 있는데 오늘 산행중에

공식 직함을 갖은 산 이름이 없어서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귀경길 교통편이

어떨지 몰라서 포기를 하고 그냥 대간길을 이어간다

좌측 아래로 내려선다

폐헬기장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니...

미역줄기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안부(15:58)

등로 좌측 아래로는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방향인데 등로가 잘 보이지 않는구나

안부에서 능선으로 오르면서 뒤돌아본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시리봉의 모습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산행중의 먹거리가 시원찮아서 그런지 자꾸만 산행 속도가 떨어진다

775m봉(16:08)

완만한 내리막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암릉 구간을 지나고...

누워있는듯한 소나무도 만난다

무명봉(16:17)

무명봉에서 바라본 다음 구간에 걸어야 할 진달래로 유명한 매봉과 봉화산의 모습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우측 능선으로 향한다

안부로 내려서니 우측으로는 아영면 월산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안부에서 올라서니 멋진 선바위(立石)을 만나고 곧이어 784.8m봉 정상에 도착한다

784.8m봉(14:20)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진달래 군락지의 등로 아래로 내려가는데 북사면길은 온통 진달래밭이다

내리막 등로는 음지라 잔설이 간간히 보이고 땅이 얼어있어 생각보다 미끄럽다

아무런 생각없이 무심코 내려오다가 넘어진 소나무에 헤딩을 한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은 없습니다."...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下心이란 단어를 배운다

2월의 고백 / 김희선

 

선명한 빛깔을 원하지만

겨울도 봄도 아닌 것이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꽉 찬 완벽함은

머지않아 싫증이 나지만

비어 있는 곳은

채우고 싶은 갈증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할수록

조금은 남겨두는 여유를 갖자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언젠가는 밖으로 드러나듯이

애써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미덕일 때가 있다

 

돋보이지 않아도

꼭 필요한 자리에 알맞은 너라서

더 사랑스럽다

복성이 뒷재(16:34)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오산마을과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 복성이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지도상의 복성이 뒷재를 지나면서 아막성으로 올라간다

돌탑을 바라보면서 아막성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성 우측 아래로는 흥부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아영면 성리가 흥부마을인데 우리나라 판소리중 '동편제'의 발생지라 한다.

또한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부가의 배경이된 마을이기도 하다.

 

흥부에게 묻는다...어케하면 착하게 사는지?...因果應報는 있는 것인지...

요즘에 이 나라에 대통령을 해보겠다는자들은 하나같이 왜 그리 흠결이 많은지 모르겠다.

대통령 하겠다는 자들이 흥부같이 고운 心性을 가지면 안되나?

흥부마을 너머로는 남덕유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아막성터의 길을 걸어간다 

아막성 정상(630m:16:40)

아막성 정상에는 묘지 1기가 보인다

아막성 정상에서 당겨본 고남산의 모습

아막성의 자리는 장수와 남원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아막성에 남겨진 가야의 유물은 금관가야의 뒤를 이은 대가야의 것이다.

금관가야 몰락으로 가야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대가야는 왜와 중국의 다른 나라와 연결할

바닷길이 필요했고 아막성은 섬진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한다.

섬진강에서 아막성에 이르는 봉우리에 남아 있는 봉화대터는 물길을 지키려는 가야가 세운 것이다.

 

1500여 년의 세월의 강을 건너 가야의 기억을 더듬어갈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은 산 아래 월산리와 두락리의 고분들이다.

높이 4~5m에 직경 20m 안팍의 고분은 나무가 자라 산이 되었다가 개간돼 경작지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유물들은 도굴됐고 전설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반복된 전쟁으로 사람살이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되풀이된 탓이다.

백제의 것으로만 알려졌던 고분이 1989년 전북대발굴단의 조사 결과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 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가야의 역사는 긴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숙제를 남겼다.

아막성(阿莫山:전라북도 기념물 38호:16:45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면 아영면 성리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봉화산과 시리봉 사이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에서는 아막성(阿莫城), 신라에서는 모산성(母山城)으로 불렀다.

아막(阿莫)은 주성(主城)또는 주곡(主谷)을 뜻하는데 이 지역이 섬진강의

계곡 분지를 나타내는 지형상의 특색과 그 만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의미다.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주도권을 잡기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167년에 백제는 신라릐 서방을 침공하였고,  서기 17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를 침범하였다... 그 후인 서기 188년 초고왕 1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모산성(아막성)을 침략하는 등 이 산성을 두고

신라와 백제가 영토분쟁이 치열한 곳이 이 아막산성이었다.

 

그 후 백제 무왕 3년(602년) 백제는 4만의 군사로 아막성을 공격하였으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였으며 그러나 후일

재차 공격을 하여 성을 탈환하였지만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그 후 무왕 17년에  백제는 또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였다.

모산이나 아막은 운봉의 옛 지명으로 신라의 영토임을 알 수 있다.

 

성은 포곡식 산성이며 현재 파악되는 성의 규모는 632.8m 이며

3개의 문지와 치성, 토루, 우물, 적대, 수구 등이 확인되고 있고

현재는 북문지가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동, 서문지는 잔존 부위가 남아있는 곳도 있으나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다.

 

축성법은 산 사면에 내탁하여 축성하고 그 위에 넓이 3.5m 정도의 회랑을 설치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6m에 이르며 능선과 이어지는 성곽 외면에는 공호를 파서 둘렀다.

북문지 안쪽에는 운성암이란 암자가 자리를 잡고있다.

허물어져 내린 아막성 성터의 돌들을 조심스레 밟으니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간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동안 이 땅의 숨결이고 삶이었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들을 느끼며 아팠다.

 

지나온 시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고,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과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란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 수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일이다. 오늘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지나간 역사란 없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이다.

결코 잊혀 질 수도 없고 잊혀 져서도 안 되는 오늘의 일이다

 

어느 지성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일본에 당하고 중국에 치이는 이유는 역사의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일까.

우리나라보다 땅덩어리와 인구가 훨씬 적은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국가가 있던가?

그건 유태인들의 투철한 역사인식이 바탕이 된것 때문이 아닐까

내가 힘이 없으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며칠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이 나라의 현재를 생각하니

착잡함과 두려움이 앞선다...한때는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었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독립하면서 평화라는 명분 아래에 수많이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주면서부터

예견된 사태가 아니였던가...평화란 국가가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지

국가가 힘이 없으면 그 무엇으로도 평화를 지킬수가 없다는 걸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권력을 잡고있는 집권 세력들은 평화프로세스라는 이상한 명분 아래에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준 미국과 서방국가들과 거리를 두고 북한과, 중국, 소련 등이 미사일을 쏘고

우리 방공망을 무단으로 침범해도 제대로 대처를 못하는데 이게 평화프로세스인가?

북조선의 귀때기 새파란 지도자의 눈치를 보느라 군사훈련 한번 제대로 못하는 이 나라의

군대는 당나라 군대가 되어 버렸다.

 

열흘만 있으면 대통령 선거란다...그런데 대통령의 후보라는 자들이 이 난국을 타개할

비젼을 제시하는 자들은 한 명도 안보이고 상대방의 약점을만 들춰내면서 마타도어만

일삼고 포플리즘으로 표를 얻어려는 자들만 보이니 한심하구나...

민초들 알기를 개,돼지나 장기판의 卒쯤으로 생각하는 정치권을 이번에 싹 바꿔야겠다.

작금의 이 나라의 지도자중에는 이순신이나 다산같은 오직 민초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지도자는 정녕 없단 말인가?...

아막성을 지나는 범여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성재(16:48)

복성이 마을에서 흥부의 고향인 아영면 성리로 내려가는 고개인데 성리 윗쪽의 고개라 성재라고 부른다

이정표(←아막성 0.2km, 흥부묘 0.7km↑시리봉 2.0km 복성이재 1.2km)가 서있다

오늘에 걷는 대간길 등로 주위에는 시리봉이 2개난 있어서 조금은 헷갈린다

지나온 시리봉은 제2시리봉이고 이곳에서 2km지점에 있는 봉우리가 시리봉이란다

아막성 아래 안부를 지나서 능선에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서 조그만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서니 흥부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가 나온다

흥부마을 갈림길(16:52)

남원시 아영면 성리(城里)로 내려가는 길이다

 

성리(城里)는 아막성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성리(城里)라 하였으며, 성 가까이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을 상성(上城), 아래 위치한 마을을 하성(下城)이라 하였다.

상성은 흥부의 발복지 마을로 입증되어 ‘흥부마을’ 혹은 ‘흥부발복지마을’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흥부마을 임도에 서 있는 이정표

능선에 올라서니 묘지가 나오고 등로에서 5m 윗쪽으로 삼각점이 있는 601.4m봉이 있다.

예전의 대간길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봉우리다...나홀로 산행길에서는 이런게 좋다

묘지 뒷쪽으로 올라간다

601.4m봉(16:58)

601.4m봉 정상의 삼각점(△함양452 / 1981복구)

삼각점을 찍고 곧바로 내려서니 옛 복성이재가 나온다

옛복성이재(17:00)

지금의 복성이재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복성이재였다

옛복성이재에서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로 올라간다

쬐그만 봉우리로 올라섰다가 곧바로 내려서니...

복성이재로 내려선다

복성이재(複星峙:550m:17:02)

복성(複星)마을에서 연유되어 생긴 이름인데 그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복성마을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사이에 있는

조그만 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으로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룬 첩첩산중이어서 농로도 제대로 없었다.

엣날에 변도탄 이라는 기인(奇人)이 있었는데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糧官)으로 있었다.

어느 날 천기를 보고 삼년 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잇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전란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 했으나 평화시에 흑세무민(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는 하는 수 없이 피난처를 물색 하던 중 지리산을 의중에 두고 천기를 보니

북두칠성의 복성(複星)이 갑자기 남쪽에서 비치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 쪽으로 가다가

별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웃복성마을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을 했으며 전란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같이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복성이재에 도착하니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바람이 차갑다

산행을 종료하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히치를 해보려지만

5분을 기다려도 차량 한대가 지나가지 않는 오지중에 오지이다.

복성이재 정상의 모습

일단 흥부마을까지 가보기로 한다.

인월에서 동서울로 가는 막차가 18시 30분이라 아직까지 여유가 있다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는 흥부마을인 성리로 향한다

흥부마을(17:25)

복성이재에서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서 걸어오는데 20여분정도가 소요됐다.

이곳에서 택시를 부르려고 114에 전화를 해서 인월 택시번호를 물어 볼려고 하는데

마을에서 손님을 태운 택시 한대가 나오는게 아닌가...손을 들어서 서울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합승을 하면 안되겠느냐고 하니까 타라고 한다

그 바람에 인월까지 편안하게 왔고 합승을 하는 바람에 택시비도 조금 절약했다

힘들어도 착하게 살자

인월버스 터미널(17:55)

인월(引月)이란 지명은 황산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도주하는 패잔병을 뒤쫓아가며 섬멸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싸울 수없게 되자 ‘달(月)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왜적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웠다고 했는데 그래서 인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여 인풍(引風)이라는 지명도 생겼다.

서울가는 막차 버스표를 예매해놓고 나니 30분정도 시간이 남아서 근처 식당에서 가서

따끈한 묵밥 한그릇을 시켜놓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든든하게 묵밥 한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인월발 → 동서울행 버스표

지리산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 막차는 예정보다 5분 늦게 도착한다

이 버스는 인월에 잠깐 머물렀다가 함양에 도착하여 10여분간 있은 다음에 서울로 향한다

막차도 아침에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28인승 버스에 승객이라곤 7~8명 밖에 되질 않는다.

버스회사야 적자라 힘이 들겠지만 나같은 기저환자는 탱큐이다...버스에 오르자마자 저녁을

먹은 탓인지 노곤하여 깊은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죽암휴게소에 들어서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화장실을 가려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꽤나 많은 비가 쏟아진다...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