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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16구간 - 우두령에서 괘방령까지

by 범여(梵如) 2022. 3. 27.

그 말 자네는 아는가?"..."왜 사느냐?"고

 

☞ 산행일시: 2022년 03월 27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미세먼지...오후에 강풍

 산행거리: 도상거리12.6km / 5시간 4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멤버들과 함께

☞ 산행코스: 우두령-폐헬기장-호초당산 갈림길-903m봉-962.8m봉-쉼터-안부-삼성산-안부-안부

                  995m봉-조망바위-이정표-안부-여정봉-폐헬기장-갈림길-바람재 안부-961.9m봉

                  쉼터-바람재?-쉼터-신선봉 갈림길-안부-동생봉-안부-형제봉-안부-무명봉-안부

                  무명봉-황악산-헬기장-곤천산 갈림길-돌탑봉-선유봉-쉼터-무명봉-안부-쉼터-쉼터

                  안부-백운봉-직지사 갈림길-운수봉(천덕산)-갈림길-안부-무명봉-안부 쉼터-621.1m봉

                  안부-무명봉-여시굴-무명봉-무명봉-안부-황악터널 위-여시골산-안부-임도

                  매일유업 영동목장-팔각정-괘방령

☞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구성면, 대항면 / 충북 영동군 상촌면, 매곡면

 

이번주 원래의 산행 계획은 밀양(비슬)지맥 마지막 구간을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에 밀양으로 내려가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마지막 구간인 마흘리 고개에서

합수점까지 약 22km를 마무리하고 올라 올려고 했는데 토요일날이 전국적으로 비가 온단다.

갑자기 산행 스케줄을 바꾸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다.

 

그러던중에 가끔 따라 나서는 산악회에서 일욜날 백두대간 당일 산행을 간다고 하기에

저녁 늦게 신청을 했지만 내 걸음이 너무 느려서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맘이 편치않다.

몇번이고 고민을 하다가 안되면 신선봉 갈림길에서 직지사로 탈출할 생각을 하고

산행에 따라 나서기로 한다.

 

큰 수술후 체력 저하로 인한 걸음이 느린 탓도 있지만 나는 독립군 스타일로 걷다가 보니

주변의 산세와 지형도 충분히 확인하고 한번  산행을 하면서 500여컷 정도의 사진도

찍어야 하고 야생화나 버섯, 나물도 있으며 봐야하니 안 그래도 느린 걸음걸이가 

더 느려지니 동료들에게 미안할 수 밖에...그러나 후배 산꾼들이 날 버리진 않겠지...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이른 아침에 양재역에서 산악회 버스를 탑승한다.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코로나라는 역병 탓인지 버스에는 빈 자리가 많이 보이고 내가 이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2번이나 완주했는데 예전의 멤버들은 거의 안보이고 대부분이 새로운 멤버들이다.

그런 탓인지 많이 어색하기만 하다...차에 올라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옥천을 지나고 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 경부고속도로 황간휴게소에 들려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영동군 상촌면소재지를 지나 흥덕리 방향으로 꼬불꼬불한 901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힘들게 우두령 정상에 도착한다.

우두령(牛頭嶺:720m:10:00)

경북 김천시 구성면 삼거리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901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고개 정상에는 동물이동통로가 백두대간 길을 이어주고 있으며, 고개 너머 김천쪽은

매일유업 김천목장이 있고 영동쪽은 소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감시초소가 보인다.

 

우두령의 지명유래는 이 고개가 소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김천 대덕면과 거창 웅양면의 경계에도 우두령이 있어 약간 혼란스러운 곳이다

 

이곳은 생각보다 지대가 높은 곳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수계가 갈라지는 곳으로 북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금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우두령 김천지역 매일유업 목장 입구쪽의 모습

조선시대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령(嶺)은 “산줄기가 낮아져 평평한 곳”

이라 했으니 우두령은 우두산이라 추정된다...1800년경에 발간된 산경표(山經表)에는 우두산(牛頭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 이후인 1860년경에 완성된 대동여지도에는 우두령(牛頭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두령 생태통로 우측에는 문이 굳게 닫힌 매일유업 김천목장이 보이나 정작 소는 한마리도 안 보인다.

지도상에 저 곳이 질매재로 표기가 되어 있는 곳이나 들어가 볼 수가 없구나.

이곳은 예전에 질매재였으나 목장으로 편입되어 고개의 흔적을 찾을수가 없다.

경상도 김천과 충청도 영동을 잇는 고개로 우마차도 다닐 수 있는 큰 고개라 우두령이었는가?

혹자는 김천시 구성면 마산리와 대항면 주례리를 잇는 조그만 고개를 질매재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영진지도, 김천시 지도에도 이곳을 질매재라 표기가 되어 있다.

 

* 산경표(山經表)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나누고, 1,650여 개의 산과

지명을 표기한 지리책이다...산경표의 산지 체계에는 ‘산줄기는 분수령을 따르기 마련(山自分水嶺)’이라는

원칙이 있는데 즉,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고 오직 한 길로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하다(10:05)

오랫만에 산악회를 따라오니 좀 어색하다...난 영락없는 독립군 스타일인가?

동료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등로에 오르자마자 같이온

동료들은 산으로 사라지고 졸지에 오늘도 꼴찌이다.

901번 도로를 올라 동물이동통로를 좌측으로 올라서니 보은국유림관리소에서

설치한 산림천이조사구 표지판을 있는 폐헬기장으로 올라선다.

앞서가는 동료산꾼들은 힘한번 안들이고 편히 가는 모습인데 난 벌써부터 헐떡거린다.

참으로 부러워 보이기도 하고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5년전만해도 산행에 관한한 정말 자신 넘치고 겁없이 다녔는데...지금은 자꾸만 왜소해지는

내 자신이 왜이리도 초라해 보이는지...

이 시간 이후로는 동료들을 산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 뒤에서 오늘 산행중 후미대장을 맡은 태양 아우가 나를 책임지는 모양이다.

너무 미안하여 빨리 가라고 해도 가질 않는다...호화준족인 젊은것이 얼마나 불편할까.

이것도 민폐인데 괜히 왔나하는 후회가 든다

호초당산 갈림길(10:28)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김천시 구성면과 대항면 경계에 있는 호초당산(虎草堂山:893.4m)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인다...지명의 유래는 옛날 범이 많이 살았고 범의 초당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우두령에서 이곳까지 짧은 구간에 고도를 200m를 치고 올라야 하니 힘이 드는데

동료들은 진작에 도망(?)을 가버렸고 앞서간 동료들을 따라가려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오늘도 밉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괜히 따라왔나 싶은 생각에 후회가 막심하다.

혼자 편하게 걸을 걸...근데 뒤에서 따라오는 호위무사(?)가 무척이나 걸거적거린다.

후미대장의 책무땜에 내 뒤에서 오지만 난 불편하기 그지없다.

나 혼자같으면 볼것 다보고 카메라에 담을것 다 담으면서 산행을 하는데 뒤에서

바짝 붙어서 따라오니 영혼이 자유로운 범여가 구속당하는 느낌이라 엄청 불편하다

바람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이지만 미세먼지는 심한 편이다

그래도 산행하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더없이 좋은 날씨이다

안부에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가니...

이정표와 벤취 2개가 있는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선다.

903m봉(10:34)

가야할 삼성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삼성산까지는 조금전에 힘들게 올라온 것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편하게 걸어간다

안부를 지나서 통나무 계단을 따라 편하게 오른다

펑퍼짐한 능선에 올라서 우측으로 향한다

962.8m봉(10:50)

예전에 보지못한 듯한 쉼터의 벤취들이 간간히 만난다.

사실이지 이 길이야 대간 산꾼들 이외에는 이 등로로 오는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을텐데 뭔 벤취가 필요할까?

 

대간꾼들이야 벤취에서 쉬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테고 오늘 등로에 있는

김천의 진산이라는 황악산이야 10명이면 9명은 직지사에서 올라올텐데...

완만한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김천시 대항면으로 이어지는 진밭산(719.0m), 바래봉(584.0m),

동구지산(658.8m), 갈비봉(574.9m)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시원스레 보인다

쉼터(10:54)

안부(10:54)

안부에서 조금 더 진행하여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는 삼성산 정상에 도착한다

삼성산(三聖山:984.9m:11:00)

경북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영동군 쪽으로

경희대연습림 조림지가 있고 산 정상에는 3등삼각점(△영동 314 / 1980 복구)이 있으며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삼성산은  동으로 3개의 산이 조망된다고 해서 삼성산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상은 조금 넓은 공터가 있긴 하지만 전망은 그리좋질 않은 편이며  정상의 동사면쪽에는

직지사의 산내 암자인 삼성암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삼성산 정상 삼각점(△영동314 / 1980복구)

삼성산 정상에서 대간길은 살짝 좌측으로 이어진다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얼었던 등로가 녹은 탓인지 약간의 질척거림은 있으나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이런 내리막길은 무리없이 갈 수가 있으나 좌측의 폐가 70%나 없는 범여로선

정상적인 산꾼들과 같이 걸어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간길을 나선 자체가 상대방에 대한 민폐이제...

눈치 안보려고 안 따라 나서려 했지만 옛날 생각만 하고 따라나선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잠시후에 오를 여정봉 뒷쪽으로는 김천의 진산이라는 황악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무명봉을 지나서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11:10)

안부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예전에 올랐던 무명봉 옆구리로 사면길이 나있다. 

무명봉을 오르지 않고 사면길을 통과하여 안부로 내려가는데 지맥길이야

그런 곳이 별로없어 야성미가 살아 있지만 대간길은 자꾸만 본래의 맛을

잃어 버리는 같아서 산꾼으로서는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하기사 예전에는 산꾼들 사이에 백두대간을 종주했다면 존경(?)하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요즘에는 전혀 그런게 없다

안부(11:18)

안부를 지나서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뒤돌아보니 다른 산악회에서 온 듯한 산꾼들이 올라오고 난 자꾸만 뒤처진다

995m봉(11:25)

잠시후에 오를 여정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조망바위(11:27)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周禮里) 화실마을의 모습

주례리(周禮里)는 황악산과 덕대산의 사이의 바람재 너머 높은 산간 오지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대항면에 속한 화실(화곡)이었으며, 1914년에 주공, 삼거와 통합하여

주례동이라 하였으며 1971년에 화실(화극)을 주례1동으로 나누었다.

자연마을로는 화실, 주공, 삼거리 등이 있는데 화실은 1700년 무렵 홍씨와 송씨가 이곳에 약초를 캐러

왔다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마을 주위에 꽃이 만발하고 각종 열매가 많아서 화실, 화곡(華谷)이라 이름 지었다.

주공은 1790년 곡부 공씨가 개척하였으며, 공자님이 살던 시대인 주나라의 주 자를 따고 자기 성의 공 자를

따서 주공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또 일설에는 이곳에 큰 산이 있어 두리, 주공, 주례라 불렀다고도 한다.

삼거리는 구성면 마산리, 영동군 상촌면 김천시 대항면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줄여서 삼거라 부르기도 한다.

서북쪽으로는 삼도봉에서 갈라져 민주지산, 각호산, 천만산, 상촌산으로 이어지는

초강(각호)지맥 능선이 아련하게 보인다...지난 2월에 나홀로 저 능선에서 강추위에

개고생을 하면서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조망바위를 내려선다

다시 편안한 등로는 계속되고... 남쪽으로 시야가 열린다

등로 우측 아래는 절개지의 낭떠러지이고 계곡 우측으로는 직지사 산내 암자인

삼성암에서 사시불공(巳時禮佛)을 하는지 스님께서 독송하시는 천수경의 독경소리가

대간길까지 들린다... 선 채로 삼성암을 향하여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 사시불공이란 사시(巳時:09:00~11:00)에 하는 예불을 말하는데 대개 절에서는

오전 10시 또는 10시 30분부터 천수경으로 시작하여 여러 게송(偈頌)을 한 후에

예불을 올리게 되는데 사시불공을 일컬어 마지(摩旨:부처님께 올리는 밥)예불이라고도 한다

조금전에 지나온 삼성산 뒷쪽으로는 호초당산(虎草堂山:893.4m)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여야 할 지리산 능선은 미세먼지에 가려져 흐릿하기만 하다 

진밭산 너머로는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과 수도산 방향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정표(11:34)

다시 완만한 능선으로 내려간다

안부(11:38)

여정봉(旅程峰:1,030m:11:39)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김천의 진산인 황악산과

삼성산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한 줄기로 직지사 부속 암자인 삼성암 뒷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삼성암에서 여정봉으로 오르는 정상적인 루트가 없어서 바람재쪽으로 올라서야 한다

명칭에 대한 특별한 유래는 없으나 “황악산으로 가는 도중의 봉우리” 또는 “여행을 하는 노정 봉우리”

등으로 여정봉(旅程峰)으로 불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여정봉 안내판

여정봉에 도착하니 안산에서 왔다는 산악회 회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조금은 찜찜하여 얼른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진 몇 컷 찍은 다음에 서둘러 길을 떠난다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아우...고맙고 미안하이...세세생생 복받을 겨

바람재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쉼터가 보이는 곳에서 대간길은 살짝 좌측으로 이어진다

폐헬기장(11:45)

폐헬기장에 있는 쉼터의자...찿는이가 별로 없는지 찌든 때가 가득하다

갈림길(11:46)

폐헬기장을 지나니 이정표가 나오고 생태복원을 한답시고 막아놓고 좌측으로 우회를 시킨다

예전에 2번의 백두대간 북.남진때는 정통으로 다녔는데...

좌측의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원래 저곳 정상이 바람재 정상이고 표시석도 있었으며

산림청에서 무인감시탑과 헬기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예전같으면 악착같이 바람재 정상으로 향하겠지만 대간을 4번이나 하는 주제에

지맥길도 아닌데 그리 아둥바둥 원칙을 지킬 필요야 있겠나...

산림청에서 만들어 논 우회길로 내려간다

바람재 안부(11:48)

우회길로 내려와서 바람재 정상에서 내려오는 대간길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바람재 안부에서 뒤돌아본 바람재 정상의 모습

바람재는 경북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에서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라고 하며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는데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벙커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2001년도에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미군들이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괘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 평의 목장은 19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바람재 좌측 아래로는 드넓은 바람재 목장이 보인다

961.9m봉(11:50)

"제행무상(諸行無常) 그 말 자네는 아는가?"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아 가느냐?"고 

굳이 묻지 마시게

 

사람 사는일에 

무슨 법칙이 있고

삶에 무슨 

공식이라도 있다던가?

 

그냥,, 세상이 좋으니 

순응하며 사는 것이지

 

보이시는가... 

저기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한조각 흰구름

 

그저, 바람 부는대로 

흘러 가지만 그 얼마나 

여유롭고 아름다운가

 

진정 여유있는 삶이란...?

나, 가진만큼으로 만족하고

남의 것 탐내지도 보지도 아니하고

누구하나 마음 아프게 아니하고

 

누구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하며

오직,,사랑하는 마음하나 

가슴에 담고

 

물 흐르듯, 구름가듯,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네.

"남들은 저리 사는데.."

하고 부러워하지 마시게 깊이 알고 보면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삶의 고통이 있고

근심 걱정 있는 법이라네.

 

옥에도 티가 있듯

이 세상엔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가지...

살아가며 검은 돈은 

탐하지 마시게

먹어서는 아니 되는 

그놈의 ‘돈’받아 먹고

쇠고랑 차는 꼴, 

한 두 사람 보았는가.

 

받을 때는 좋지만 

알고 보니 가시 방석이요

뜨거운 불구덩이 속이요

그 곳을 박차고 벗어나지 

못하는 선량들.

 

오히려, 측은하고 

가련하지 않던가

그저,, 비우고 

고요히 살으시게

캄캄한 밤 하늘의 별을 헤며

반딧불 벗 삼아 마시는 

막걸리 한잔...

소쩍새 울음소리 자장가 삼아

잠이 들어도 마음 편하면 그만이지

 

휘황찬란한 불 빛 아래

값 비싼 술과 멋진 풍류에 취해 

흥청거리며 기회만 있으면 

 

더 가지려 눈 부릅뜨고

그렇게 아웅다웅 하고 살면 

무얼하겠나...

 

가진 것 없는 사람이나..

가진 것 많은 사람이나

옷입고, 잠 자고, 깨고, 

 

술마시고, 하루 세끼 

먹는것도 마찬가지고,

 

늙고 병들어 북망산 갈때

빈손 쥐고 가는것도 

똑 같지 않던가..

우리가 100년을 살겠나,

1000년을 살겠나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 

발버둥쳐 가져 본들

한 치라도 더 높이 오르려

 안간 힘을써서 올라 본들

인생은 일장춘몽

 

들여 마신 숨마져도

다 내 뱉지도 못하고 

눈 감고 가는 길...

 

마지막 입고 갈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는데...

그렇게 모두 버리고 

갈 수 밖에 없는데...

 

이름은 남지 않더라도

가는 길 뒤 편에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나 없도록

허망한 욕심 모두 버리고

 

배풀고, 비우고, 양보하고, 

덕을 쌓으며

그저 고요하게 살다가 

조용히 떠나세나

등로에서 바라본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弓村里) 가경동의 모습

황학산 넓은 자락 아래 자리잡은 전형적인 산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활골(궁촌),

가경동(사택마을), 달기미(월금동), 새막골(쇠막, 우막), 성짓골(성조동), 점마(점촌) 등이 있다.

궁촌은 마을 지형이 활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에 활을 쏘던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으며 가경동은 삼황학 광산의 사택이 많아 사택마을이라고도 한다.

선달기미는 선녀탄금형(仙女彈琴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막골은 처음에 새로 막을 첫고 소를 키우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마는 옛날 그릇점이 있었다.

쉼터(12:54)

가야할 형제봉(여인의 유두처럼 솟아오른 봉우리)과 황악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람재 가는길

풍.수해 재해 예방 감시탑이 나오면서...

  바람재가 나온다

바람재?(12:02)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에서 경북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과거 목장으로

개발되어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이었으나 지금은 텅빈 벌판에 억새만 우거져 분위기가 스산하다.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할 때 진짜 바람재에 있었던 표시석이 언제부터인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바람재’라 일컫는 곳은 이곳 외에도 전남 장흥에 있는 호남정맥에서 땅끝기맥의 시발점이 바람재이며

무등산의 바람재, 월출산의 바람재, 진해 시루봉의 바람재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고개인데 엄격하게 말하면 지도상으로는 이곳은 짝뚱 바람재에다.

바람재 안내판

황악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구조 이정표

낙엽을 밟으면서 호젓하게 걷는데 오늘따라서 이 구간을 걷는 대간 산꾼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濕에 젖어 있는 범여로서는 상당히 불편하고 어색하다

형제봉과 황악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내 체력과 인내를 시험하는 구간인가?

쉼터(12:18)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까칠한 구간...난 숨이 막힐정도로 힘이 들건만.

다른 산악회에 오신 분들에게 연속적으로 추월을 당하고 여인들한테도 다 추월을 당한다.

아!~~~세월앞에 장사 없다고 했는데, 가는 세월을 어찌할꼬

빡세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태양아우가 신선봉 갈림길에서 밥상을 펼치고 있다.

아침에 대장이 황악산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아우가 나를 배려하여 이곳에서 밥상을 펼친다.

짝뚱 바람재에서 신선봉 갈림길까지의 거리가 0.7km인데 30분이나 걸렸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든 곳이였다

신선봉 갈림길(12:32~50)

이정표(→신선봉1.4km, ↓바람재 0.7km, ←황악산 1.4km)와 쉼터의자 2개 구조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후미대장을 맡고있는 아우와 점심밥상을 펼친다...점심이라봐야 편의점에서 산

김밥 한줄과 우유...딸기와 한라봉 하나로 지극히 단촐하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능선에서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잠시후에 오를 형제봉과 황악산의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에 우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김천시내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가 한 눈에 보인다...직지사(直指寺) 신라 418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선산 도리사(挑利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418년(눌지왕 2)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직지사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과, 고려 초기에 능여(能如)스님이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고 하였다는 설,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국보와 보물이 수도없이 많으며 사명대사가 득도(得道)한 절로도 유명하며 2000년 초에

8년간 직지사 주지로 재임하셨던 성웅 큰스님은 범여의 동국대 불교대학원 선배님이셨다.

지금은 상주 남장사 회주로 계시는데 근간에 몸이 불편하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어쩐지 모르겠다...재학시절 스님덕에 직지사에 가서 신세를 많이 졌는데...

직지사는 각종 이야기와 전설을 품고 있다.

창건자 아도화상, 사명대사, 왕건 등등………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신라 경애왕 4년, 고려 태조 10년에 후백제왕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이 이를 구하러 갔다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리고는 황악산 아래 숨어든다.

왜 왕건이 황악산 아래 숨어들었을까?

전투에서 패했으니 당연히 본국(고려)으로 도망가야 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가장 편한 길은 상주를 통과하는 길.

그러나 이 길은 노출이 너무 심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실제 상주를 통과하는 대간 길은 화령 인근으로서 산책로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숨어든 곳이 팔공산과 상주에서 가까운 깊은 산 황악산이 아닌가 싶다.

“直指由中路曲何(곧다고 했는데 꼬부랑길은 웬말인가)”
조선 후기 최고의 풍류 시인 김병연(김삿갓)이 直指寺(직지사)를 두고 한 말이다. 

황악산 골이 깊다는 것은 김삿갓의 詩 ‘꼬부랑길은 웬말인가’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렇게 보면 대간은 우리 역사를 지킨 셈(?)이 된다.

직지사는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임란 때 수난을 당한다.

소실되고 폐허가 되었었다. 히틀러도 나폴레옹도 상대국을 침략하면서

박물관만은 손대지 말라고 했다 하는데 어째서 왜군들은 우리의 많은 사찰을

 파괴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도 대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산을 신성시하고 숭배했다.

산 자체가 종교나 다름없었다.

불교가 도입되면서 산에 대한 신앙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즉 불교사상과 산악숭배 관념이 융합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군들이 많은 사찰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찰들이 명산에 포진하고 있으며, 명산이 가장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곧 대간이니,

왜군들의 사찰 파괴에는 대간 파괴를 통한 민족 정기 말살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직지사는 최근에 까지 바람 잘 날이 없다. 08년 8월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대웅전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지금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일제가 잔재가 참으로 깊고 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직지사의 直指는 이완용 등 친일세력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직지사의 일주문이 1000년 묵은 싸리나무와 칡나무로 만들어졌다 한다.

싸리나무와 칡나무는 밧자루나 광주리를 만들 때 주로 이용된다.

싸리나무가 빗자루 등의 본체라면 칡나무는 이들을 엮어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양자가 보완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다. 일주문, 싸리나무, 칡나무 무엇인가가

예사롭지 않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안부(12:54)

형제봉의 두 봉우리중에 동생봉 격에 해당하는 봉우리로 올라간다 

동생봉 오르는 길에서 만난 노란제비꽃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봄꽃 출사를 한번도 못 나가봤다.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다녔던 부안 변산의 청림마을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홍매화,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화는 시기를 놓쳐버렸고,

수리산의 바람꽃과 노루귀도 벌써 끝물인 모양이다.

 

이제 남은 곳은 동강 할미꽃과 운길산 아래의 세정사 계곡에 있는 너도바람꽃,

중의 무릇, 앉은뱅이 부채와 비교적 늦게 꽃이 피기 시작하는 화야산과 무갑산의

너도 바람꽃과 돌단풍이나 보러가야 할 듯 싶다

동생봉(1,010m:12:58)

안부(13:00)

안부를 지나서 형님봉에 해당되는 형제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형제봉(兄弟峰:1,044.5m:13:05)

약300m의 거리에 두고 남북으로 우뚝솟은 두개의 봉우리가 마치 우애가 깊은 형제의 모습을 닮아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북쪽의 형님 봉우리는 행정구역상 충북 영동군에 속하고 남쪽의 동생 봉우리는 경북 김천시에 속해 있다

형제봉 정상의 이정표

형제봉 안내판

형제봉 정상에서 바라본 궁촌지(弓村池)의 모습

형제봉에서 약간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형제봉을 내려서자마자 우측으로 난 등로에는 상수도보호구역이란 이유로 등로를 폐쇄해놨다

아마도 직지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능여계곡 쪽의 등로인 모양이다

안부(13:08)

무명봉(13:10)

무명봉에서 바라본 황악산의 모습

안부(13:15)

다시 까칠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오르막길에서 뒤돌아 본 형제봉의 모습

무명봉(13:20)

무명봉을 지나니 이정 표지판이 서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중간 중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식사를 하는 대간꾼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안부같은 넓은 공터에서 조금 지나니 등산객 소리가 들리면서...

황악산 정상에 도착한다

황악산(黃岳山:1111.4m:13:28~35)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고 불렀으나

직지사 일주문 현판이나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황악산(黃嶽山)으로 되어있다.

 

황악산의 黃(황)자는 靑(청), 赤(적), 白(백), 黑(흑)의 다섯 방위의 색 가운데 중앙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황악산 아래 직지사를 “東國第一伽藍”으로 불리었다고 하니 직지사가 나라의 중심부에 있다는 뜻이다.

나라의 중심 직지사의 뒷산 이름에 황(중앙)자가 포함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岳’자는? 사실 황악산은 전혀 岳’스럽지 않다. 부드러운 육산(陸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岳’자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온갖 추측이 난무하다.

그 가운데 추풍령 이후 처음으로 우뚝 솟은 산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백두산에 시작된 대간은 추풍령에서 키를 크게 낮춘다.

전통지리학자 모씨는 이러한 모습을 수도꼭지에 호수를 꽂아 물을 멀리 보내고자 할 때 손가락을

누르는 형국이라고 한다. 즉 추풍령은 龍(산줄기)을 멀리 뻗도록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며,

추풍령에서 터져 나온 氣가 뻗어 가장 먼저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곳이 여기 직지사 뒷산이기

 때문에 ‘岳’자가 포함된 황악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비록 ‘악(岳)’ 자가 붙었긴 했지만 산세는 지극히 순한 육산이며,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으며, ‘岳’ 자에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 황학산은 분명 오기인 듯하다

황악산(黃岳山)은 백두대간  줄기가 추풍령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솟구치기 시작한 곳에

자리잡은 능선이 길고 우람한 산으로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상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도 불렸는데 김천 시내에서 서쪽으로 12㎞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주봉인 비로봉(1111.4m)을 중심으로 운수봉(740m)·백운봉(770m)과 형제봉(1035m)·

신선봉(944m) 등이 양쪽으로 말발굽처럼 이어져 있다.

 

능선이 완만하고 산괴(山塊)가 커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산세는 완만해 암봉이나 절벽이 없고

수목으로 울창하며 해발 1100m가 넘는 산 답게 동쪽으로 능여계곡 등 깊은 골짜기를 파놓아

계곡마다 비경을 감추고 있는 곳이다.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봉우리들이 ㄷ자 형태로 연이어 있고 ㄷ자의 열린 곳인 동쪽 산자락에

고찰 직지사가 있고 정상에서 보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봉우리들이 동쪽으로 뻗어가면서 협곡을

이룬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이다.

오늘은 나의 護衛武士 역할을 하는 아우...젊은이 복받을 겨

황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김천시내의 모습

김천시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으며,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김산(金山)·지례(知禮)·개령(開寧) 등 3개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김산군은 본래 신라의 김산현으로 개령군의 영현이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에 이속되었고, 조선 정종 때에 어태를 묻었으므로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

지례현은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지례로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때에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그리고 개령현은 본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 때에 청주(靑州)로 고쳤으며,

진평왕 때에 주를 폐지하고, 문무왕 때에 감문군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개령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이 처음 기록되어 있는 사료는 『세종실록지리지』(김산)로, 김천역(金泉驛)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천역이 인근의 20개 역을 관할하는 찰방이 주재하는

역이라고 쓰여 있다. 한편 『여지도서』(김산)에는 면 중 하나로, 김천면(金泉面)이 기록되어 있다.

즉 김천은 처음에는 역의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면의 이름으로, 나중에는 군과 시의 이름으로 이용된 것이다

황악산 정상 삼각점(△영동 23 /2013 재설)

황악산 동남쪽으로 있는 수도산과 가야산은 흔적조차도 안 보인다.

가까이 있는 김천시내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김천은 예로부터 물좋고 산이좋아 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嶺南의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김천은 아름다운 비경과 청아함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삼산이수(三山二水)란 3개의 산과 2개의 물이라는 의미이니, 이는 곧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으로 예부터 김천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다.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三山)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을 가리킨다.

헬기장(13:36)

황악산 아래 헬기장에서 내려오니 돌탑이 있는 봉우리를 만나는데 참으로 반갑다.

2018년 6월 16일 새벽에 집을 나와서 추풍령에 차를 세워놓고 우두령에서 추풍령까지

당일 산행으로 한바리 하고 집으로 간 적이 있었지...산에 관한한 그때가 봄날이었는데

이제 늙고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으니...가는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고...

곤천산(坤天山) 갈림길

황악산 정상을 내려오자마자 헬기장이 나오고 좌측으로는 영동군 상촌면과 매곡면 경계에 있는

곤천산으로 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서는데 이정표에는 직지사로 표시되어 있다.

 

곤천산(坤天山:1,030.5m)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황계지, 황간읍지, 동국여지 승람 등 각종 고서를

조사하여 보아도 정확한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곤천산은 건천 계곡에

위치하며 곤천산 아래 건천계곡에 건천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각종 문헌 기록이 남아 있어

발음의 유사성을 확인 할 수 있으나. 이것이 곤천과 건천이라는 지명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곤천산(坤天山)'과 함께 곤천산의 이명칭(異名稱)으로 '근천산'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에 곤천사(坤天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천산은 곤천산의 '곤'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돌탑봉(13:38)

예전에 없었던 이상한 안내판들이 많이 보인다

철쭉 군락지는 아직도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좌측의 능선이 대간길인데...

오르지 말라고 하는구나...

野性을 잃어버린 대간길

저 멀리 백마산과 금오산 영암산이 아련히 보인다

3년전인가 진권아우와 둘이서 황강(수도)지맥과 회천(금오)지맥을 걸었던 구간이다

갈림길에서 우측의 봉우리로 올라간다

선유봉(仙遊峰:1,045m:13:45)

예전에 없었던 선유봉이란 지명을 만났는데 한문으로 풀이하면 ‘신선이 놀다는

봉우리’란 뜻인데 신선이 놀다가기에는 인간들의 왕래가 많은 시끄러운 봉우리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오후가 되면서 미세먼지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쉼터(13:46)

직지산에서 올라오는 황악산 등로는 관리가 잘되어 있는 편이다

오늘도 산이라 스승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다.

下心...자기를 낮추면 삶이 편해진다는 것을...

무명봉(13:48)

조금 높은 봉우리가 있는 곳은 어김없이 등로를 돌려놨다.

안부(13:50)

쉬었다 가라는 쉼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쉼터(13:55)

이곳도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으로 등로를 돌려놨다.

철쭉 군락지 사이의 제도권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쉼터(14:00)

등로 좌측으로는 황악산 헬기장에서 1.5km정도 떨어져 있는 곤천산이 보인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왠 넘의 출입금지가 많은 겨?

안부(14:11)

좌측으로 올라가니 백운봉이 나오고 예전에 없었던 정상표지판이 서 있다.

백운봉(白雲峰:770m:14:12)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황악산의 동봉(東峰)이자

직지사 백련암의 배후에 자리한 황악산의 일봉(一峰)이지 독립 봉우리는 아니며,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위치에 있다.

이곳에서의 '白雲'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로 특별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백운봉 정상에서 우측의 등로로 내려온다.

등로는 고속도로같은 느낌이다...태양아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데

나를 데리고 가느라고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하니 맘이 편치 않다.

가야할 운수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계속되는 우회길...서서히 지맥의 本色이 몸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태양 아우님을 먼저 보내고 우회길이 아닌 오리지널 능선으로 올라간다

대간길이지만 대간꾼들은 안 다니고 산꾼들의 칫간이 되었는지 똥구를 닦고 버린 휴지들만 보인다

조금전에 헤어진 등로로 내려간다.

직지사 갈림길(14:28)

우측의 직지사로 내려가는 등로는 아주 좋다...황악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의 주 등로인 셈이다.

좌측의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로 내려가는 길도 뚜렸하다...대간길은 직진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직지사 일주문...2002년 직지사 성지순례 때의 사진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는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직지사는 방랑시인 김삿갓과도 인연이 있는 절집이다.

 

조선 후기의 시인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인데 홍경래(洪景來)난에 조부가 항복하여 가문이 몰락하였다. 

자신이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를 모르고 욕한 것을 후회하며, 

벼슬을 단념하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그래서 세상에서 김삿갓이라 부름) 방랑생활을 하면서

풍자와 해학으로 퇴폐하는 사회를 개탄, 저주, 조소하는 기발한 시를 많이 지었다.


아래 시는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직지사의 스님과 글짓기 내기를 하여 진 사람의 이빨을 뽑기로 하고 지었다는데,

결국 김삿갓이 이겨서 직지사 스님의 이빨을 뽑았다고 한다.

 

    拔齒直指僧

金烏橒積烏頭白: 금오(검은 까마귀)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黃岳花開鶴頭紅: 황악(누른 바위 산)이라 하는데, 꽃이 피어 학 머리가 붉구나
秋風嶺上春花怪: 추풍(가을 단풍)이라는데, 고개 위의 봄 꽃은 괴이하고나
直指由中路曲何: 직지(곧게 가르침)라 했는데, 산 중 굽은 길은 어찐 것인가?

직지사로 내려가는 길 나뭇가지 사이로 직지사의 산내 암자인 중암(中庵)이 흐릿하게 보인다.

저 중암은 범여에겐 인연이 꽤나 많았던 곳이다...한창 불교에 대한 열정과 환희심으로

가득할 20여년 전엔 매달 음력 24일(관음재일)에는 중암에서 열리는 관음재일에 참석하였다.

그땐 중암에 주석하고 계셨던 관응(觀應) 큰스님을 친견하여 선불교(禪佛敎)의 매력에 푹빠졌다가

대종사께서 2004년에 열반에 드시면서 그 이후로는 중암을 가보지 못했다.

 

요즘에 범여는 산에 미쳐 불교에 등한시 하는건 아닌지... 산행도 수행이라면 수행이겠지.

붓다께서도 처처불상(處處佛象)  사사불공(事事佛供) 이라 했거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한고비 숨을 쉬면서 올라서니 풍,수해 재난방지시설 마이크가 보인다

숨을 헐떡 거리면서 올라서니...

운수봉이 나오는데 오룩스맵에서는 운수봉을 천덕산이라고 표기를 해놨다

운수봉(雲水峰:688.2m:14:38)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 경계 능선에 있는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로 오룩스맵에서는 천덕산으로 표기가 되어있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어

보이며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으로 정상은 암장인데 정상에는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와

안내판, 쉼터의자가 깔끔하게 설치되어 있다

운수봉(雲水峰)은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새로 설치되어 있는 운수봉 안내판

태양아우를 먼저 보내고 호젓하게 홀로 걸으니 마음이 홀가분 하다.

갈림길(14:39)

운수봉에서 내려서니 나무계단이 나오고 우측으로는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그 방향으로 등산객들의 시그널이 걸려있어 혼란스럽다.

오후가 되면서 강한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나 그리 춥지는 않는구나

나뭇계단으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

조그만 봉우리도 넘는다.

안부(14:45)

무명봉(14:47)

운수봉을 지나면서 고만고만 봉우리를 몇개를 넘는데 태양아우가 먼저 가버리고

호젓하게 편안한 등로를 걷다가보니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시 나무 계단으로 내려간다

안부 쉼터(14:50)

여시골산 가는길

621.1m봉(14:52)

오룩스맵상의 지도에는 이곳이 여시골산으로 되어 있는 곳이나

실제로는 그 흔한 산꾼들의 시그널 하나도 달려있지 않는 홀대받는 봉우리이다

계속되는 오르락 내리락은 계속되고 체력저하가 오기 시작한다

고도를 낮추어 내려서니 생강나무꽃의 꽃망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부(14:55)

무명봉(14:57)

지루하다

가야할 여시골산...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봄이 오기는 오는구나

여시굴(15:00)

여시는 여우의 경상도 방언이다... 여시는 사냥을 나갔나?...겨울잠을 자고 있나?

여시굴 안내판

등로에서 바라본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香川里)의 모습

지명의 유래는 직지천 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향천동(香川洞)이라 하였다.

황악산과 바람재에서 발원한 준용하천인 직지천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을 동서로 나누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황간군 황남면에 속한 지천이었으나, 1906년 김천군 대항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지천, 합천, 묘내, 방하치를 통합하여 향천동이라 하고, 1971년에 지천을 향천1동으로

나누어졌으며 1988년에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자연마을로는 지천(池川), 광암(廣岩), 기날, 방아재 등이 있다. 지천은 마을 뒤의 작은 못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으므로 지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암은 약 250년 전 한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 앞에 넓은 바위가 있어 광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직지천과 방하천이 합쳐지는 곳이라 하여 합천이라고도 하고, 1930년 이곳에 보통학교가 처음

설립되었다 하여 학교동이라고도 불리어졌으며 기날은 약 5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에

머루와 다래  덩굴이 많아서 기어 드나들었다고 하여 기날이라 했으며, 또 지형이 고양이 모양이라

하여 묘내라고도 한다. 방아재는 1660년 경부터 김씨, 임씨, 이씨, 정씨 등 네 성씨의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동명도 없이 살아오던 곳이다. 1700년 경 황간현 황남면으로 편입되면서 황남면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방아재라는 고개가 있어서 방아재, 방하치라 불리어지고 있다.

무명봉(15:05)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부지런히 가는데 피곤한 탓인지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무명봉(15:08)

가야할 여시골산이 보이고 홀로 호젓하게 걷는데 갑자기 뒤돌아보니 웬 여인이

나를 추월하여 가버린다...사뿐사뿐 걸어가는데도 걸음이 상당히 빨라서 따라 갈수가 없구나.

안부(15:09)

황악터널 위(15:15)

이 등로 아래로 ktx 황악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도 고속열차가 지나가는지 열차 소리가 상당히 시끄럽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여시골산에 도착한다

여시골산(618.8m:15:17)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부터 여우가 많이 살아서 여시골이라 불린 골짜기 배후에 있는 산이어서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여시는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향천리 묘내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5㎞,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윗어둔이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7㎞ 떨어진 곳에 있는 백두대간 줄기로  김천시와 영동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능선은 여시골산 일대를 중심으로 추풍령과 괘방령이 있는 북쪽 지역에서는

700~800m 이하의 비교적 낮은 능선을 이루고, 여시골산 남쪽으로 황악산(黃岳山)·형제봉(兄弟峰)

삼도봉(三道峰)을 지나는 지역에서는 1,000m 이상의 고봉과 800~1,000m 높이의 능선을 이룬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시골산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어촌천(漁村川)을 만나 초강(草江)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 수계를 이루고, 동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백운천(白雲川)을 만나

직지천(直指川)에 합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 수계를 이룬다.

경부고속철도가 여시골산 북쪽에서 지하 터널 형식으로 산지 아래를 통과하여 영동군에서 김천시로 이어진다.

여시골산의 원래 뜻은 여우와 관련된 용어가 아니고 ‘여시’는 순수한 우리말로 ‘엿다, 옅다’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 여시골산의 뜻은 ‘물이 깊지않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여시굴은 함몰된 구덩이에 불과한데 김천시에서는 여시(여우의 경상도 방언)까지

끌어들여 과대포장을 한 느낌이 든다.

 

여시골산의 위치도 문제이다...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이곳을 여시골산이 아닌 그저

618.8m봉으로만 표기를 해놨고, 산꾼들이 많이 사용하는 오룩스맵에서는 아예 표시조차 안되어 있다.

반면 영진지도에는 대간외 387.7m봉인 삼각점봉을 여시골산으로 표기해놨고, ‘사람과 산’이란

잡지에는 삼각점봉을 385.4m로 표기해놨지만, 김형수 555등산지도 만큼은 이 봉우리가

여시골산(625m)이라 하고 김천시에서도 이곳을 여시골산이라 한다.

 

최근에 발간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조금전에 지나온 621.1m봉을 여시골산이라 하여

상당히 헷갈린다...(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冊에서 인용)

여시골산(?)에 도착하니 먼저간 태양아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괘방령으로 향한다.

안부(15:20)

안부에 올라서니 낙엽속에 묻혀버린 묵묘 한 기가 보인다.

이제는 괘방령까지 내려가기만 하면된다...오늘도 나 때문에 늦어진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데 난 아무래도 혼자 걸어야 눈치 안보고 편안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에서도 산림홰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대간길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등로가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산행이나 권력이나 세상사 살면서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인데...정치하는 자들만이 그걸 모르고 사는것 같더라.

한참을 빙 돌아서 대간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

급경사는 거의 다 내려온 듯 하다

임도(15:35)

임도를 따라서 편안하게 괘방령으로 향한다

매일유업 영동목장(15:38)

오늘은 매일유업과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들머리인 우두령에서는 매일유업 김천목장을 만났는데 

날머리인 괘방령에서는 매일유업 영동목장을 만나는구나.

다음 구간에 오를 가성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괘방령 가는 길에서 만난 진달래

팔각정(15:49)

팔각정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괘방령(掛榜嶺:357m:15:50)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514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로

이곳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괘방령이라 불리고 있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괘방령 - 김천시쪽의 모습

추풍령과 괘방령은 옛날 과거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추풍령에 비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황간과 김천을 잇는 514번 도로를 내려선 다음에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한다

영동쪽으로 가니 괘방령 안내판과 매곡면의 각 부락 표시가 있는 돌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매곡면 부락 표시가 되어 있는 돌탑

괘방령 안내판

괘방령 산장

오늘은 날머리 옆에있는 괘방령 산장에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버스로 이동하지 않아서 동료 산꾼들에게는 조금은 덜 미안하다.

맨 꼬래비로 내려오는 바람에 씻지도 못하고 그냥 식탁에 합류한다.

밥과 맥주 2잔을 마시고 식사를 종료한다...내일 아침 6시에 아산병원으로 가서

채혈과 CT촬영을 해야 하기에 저녁 8시 이후로 금식을 해야 한다.

 

낼 병원 예약만 없다면 오늘 나 때문에 산행을 망쳐버린 태양아우를 위해서

양재역이나 사당역에 내려서 저녁 식사겸 소주한잔을 대접하고 싶은데 미안하구나.

젊은이 미안하이...오늘 이 공덕 세세생생 복받을 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