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지리산!(天鳴 不鳴智異)
☞산행일자: 2022년 06월 12일
☞산행날씨:맑았다가 흐렸다가 변화무쌍한 날씨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백무동 버스정류장-백무동 탐방지원센터-장터목 산장 갈림길-쉼터-첫나들이 폭포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무엇인가"
대간(大幹)이란 큰 줄기를 뜻하며, 백두대간 이란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능선)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큰 줄기를 말한다.
즉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 출발하더라도 제대로만 가면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말해,백두대간은 우리땅의 골간을 이루는 한반도의 등뼈이며 우리땅 전체가 남과 북이 이 땅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백두산에서 금강산.설악산을거쳐 지리산까지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부른다.
모든 산맥은 중심산맥인 백두대간에서 다시 가지치고 있는데, 북쪽과 남쪽의 연결산맥인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그 순서에 우선하고 나머지는 북쪽에서 차례대로 정하고 있다.
이들 산맥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백두, 장백이고 그 지방의 이름으로 된 것이 해서(海西),
호남(湖南)이고, 강이름과 관계한 까닭은 모든 정맥은 강의 경계능선의 분수령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인데
산이 곧 물과 관계된 자연의 섭리로써,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며 얻어진 축적된
지리인식이며 이에 동화된생활상식이었다.
백두대간 중 영취산(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에 있는 산) 에서 가지쳐 나간 호남정맥을
경계로 판소리는 동편제.서편제로 나뉜다.
또한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도,전라도,충정도의 말씨가 다르고, 삼국시대에는 국경을 이루기도 했다.
백두대간에서 장백정간과 13개의 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반도는 비로서 삼천리 강산이 된다.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1대간,1정간,13정맥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개념은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인식체계의 바탕이 된다.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총길이는 1.625km이며, 이 중 남한 구간은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의 지도상거리가 690km이고 실측거리는 740km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백무동행 버스표
백두대간을 4번이나 하면서 구간에 대한 순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11일에 성삼재에서 통안재까지 걸은 이후에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을 당분간 접고
지맥길에 집중한 결과 이젠 162개 지맥중에 120여개 정도를 마쳤으니 앞으로 남은 40여개는
거리가 짧은것이 대다수이니 얼쭈 3년이면 끝내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人生事 塞翁之馬라
장담이야 할 수 있겠는가...4년전에도 암수술로 인해 버벅거리는 바람에 1년정도 늦었지 않았는가.
안 그래도 나날이 떨어지는 체력에 자꾸만 고민이 커지지만 그래도 해야제 우짜겠노...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예약한 버스표를 찾으려는데
예약한 신용카드를 안 가지고 왔네...참으로 난감하다.
매표소 직원이 핸드폰 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더니 버스표를 준다...휴~~~십년 감수했네...
첫 구간인 천왕봉을 가기 위해서는 교통편이 문제이다.
정상적으로는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경남 산청군 신안면 원지터미널로 가야하는데
서울에서 원지로 가는 막차가 22시 10분이고 서울에서 원지까지 소요시간은 3시간 10분이다.
이렇게 되면 원지 도착 시간이 새벽 1시 30여분 정도 된다.
그리고 원지에서 중산리로 가는 첫차는 06시 35분에 진주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중산리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하려면 아무리 빨라야 7시 30분에나 산행을 시작할 수 있어 내 체력으로는 무리이다.
고민끝에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1시 59분에 출발하는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역산행을 하기로 한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밤11시 40분...지리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은 생각보다 적다.
28인승 버스에 중간중간 자리가 비어있다...정시에 출발한 버스를 타고 깊은 잠에 빠진다.
예전에는 집을 나와서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기가 일쑤인데, 산에 미친 이후로 몸뚱아리의
변화가 왔는지 버스나 열차를 타면 아주 잠이 잘 온다.
버스가 멈추는 바람에 잠결에서 깨어나니 경부고속도로 죽암휴게소이고 곧이어 버스는 달리고
함양터미널에서 2명을 내려놓고 인월, 마천을 거쳐 백무동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이다.
백무동 버스 시간표
백무동 버스 터미널(03:30)
백무동에 도착한 버스는 승객의 대부분이 산꾼인데 버스는 어둠속에 승객을 내려놓고는 쏜쌀같이
터미널을 빠져 나간다...산꾼들은 대부분이 두세명이 아니면 나처럼 독립군이다.
화장실에 들려서 잠깐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깜깜이 산행을 지독히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산행을 시작하려니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고
날씨는 생각보다 춥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람막이 자켓을 갈아입고 잠깐을 망설이다가 날이 밝기까지 천천히
걷는게 나을 듯 싶어서 산행을 하기로 하고 산행 시작전에 오늘의 무사산행을 기원하기 위하여
터미널 옆에있는 천왕할매상에게 예를 올리러 간다
지리산 천왕할매상
지리산은 고대로부터 산신 신앙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아 왔는데 신라 때에는 산신에게 제사지내던
삼산오악(三山五嶽) 중 하나였고, 노고단(老姑壇)이란 지명 역시 지리산 산신에 대한 성대한 제사의식이
지속적으로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으며, 현재도 지리산 성모는 ‘산신 할머니’, ‘천왕 할매’
등으로 불리며 마을이나 개인의 대소사가 있을 때에 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는 마고라고 하는 성모천왕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성모천왕이 산을 내려다보는데 ‘법우’라는 도행(道行)이 높은 화상이 도를 닦고 있었다.
성모천왕은 ‘내가 저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어 하늘의 뜻을 펼치리라.’ 하고 마음을 먹고 산꼭대기에서 소변을 보았다.
법우화상이 홀연히 보니 산골짜기에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큰 시냇물이 흘러 내려오는 것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큰 물줄기가 생겼을까?’ 궁금해 하며 천왕봉 꼭대기로 올라간 법우화상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성모천왕은 “내가 인간 세계에 귀양을 내려와 있었는데,
그대와 인연을 맺고자 물의 술법을 이용하였다.”라고 하였다. 둘은 드디어 부부가 되어 딸 여덟을 낳았고,
이들에게 무업(巫業)을 가르쳐서 조선 팔도에 보냈다. 지금 팔도의 무당들은 이들의 후손이다.
지리산성모는 ‘성모천왕’, ‘마고’, ‘마야고’ 등으로 불리며, 그 다양한 명칭만큼 시대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신모가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고 했다.
이는 김종직의 『두류산록(頭流山錄)』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널리
구연되었던 신화였음을 알 수 있다.
『두류산록』에는 이 외에도 신모가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는 이야기를 승려들에게 들었다고
하는데, ‘마고’, ‘마야고’라고 불리는 신모의 명칭에 기인한 전승이라 보이며, 현재 보편적으로 전승되는
<지리산성모 이야기>는 이능화의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 기재된 신모와 법우화상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이 팔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지리산에 있는 백무동(百巫洞)이라는 지명이 상징하듯 무당이 많이 거주하기도 하였고,
타지의 무당들도 지리산을 ‘큰 산’으로 섬기며 치성과 참배를 하는 대상이 되면서 유포된 이야기인 듯하다.
지리산성모는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신으로 숭앙되며 다양한 유형의 전승을 형성해 왔다.
이러한 전승들 속에서 지리산성모는 ‘마고’라는 거인 창조신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라며 고려 건국신화에 차용되었던 흔적도 발견되며, 또한 법우화상과 혼인하여 팔도 무당이 되게
하였다는 전승은 무속과 불교가 융합된 민간신앙의 층위를 보여 주는 한편, 지금껏 현지인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3:45)
천왕할매상에게 예를 올리고 근처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이나 하나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려했는데 예전에 이 시간쯤이면 가계문을 열고 산꾼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구멍가계는
불이 꺼진 채 장사를 하지 않아서 적막강산이다...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세석산장에서 햇반으로 아침, 장터목 산장에서 간식, 법계사에서 점심공양을 해결하면
될 것 같아서 먹거리를 최대한 줄여서 베낭을 가볍게 했는데 초반부터 계획이 어긋난다.
베낭에서 초콜렛 2개, 초코파이 2개, 두유2개, 육포 하나가 전부이다.
조금은 난감하지만 어찌 되겠지 하고 어둠속에 길을 떠난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03:55)
장터목 산장 갈림길(03:56)
이곳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하동바위, 소지봉을 지나서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길이고
직진으로는 내가 가야할 세석산장 방향이다...나와 같이 타고온 산꾼들은 전부 다 장터목
방향으로 가버리고 나홀로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향한다.
그래...홀로 걷는 이 길이 얼마나 여유롭고 좋은가?
세석대피소까지 6.5km라고 하니 주차장에서 이곳까지 0.5km 걸어왔으니 쉬엄쉬엄 가자꾸나.
산꾼들을 따라 다니면 민폐이지만 홀로 가는 이 길...걸거적 거릴것 없으니 뭔 꺽정이냐
예전엔 없었던 안내판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마을의 이름은 창조 신화의 여신 마고할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여신 마고가 반야와 결혼한 후 그의 딸 100명을 무당으로 전국에
배출하였는데 지리산에서 그 딸들이 내려왔던 통로가 이곳 백무동이였다고 한다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들이 어둠속에 많이 보인다
자연은 자연답게 두는게 가장좋은 방법인데 왜 그리 자연을 못살게 구는지?
예전에 혼자서 낙동정맥에서 가지쳐 나온 경북 영양군의 어느 지맥길을 타면서 들은 얘기다.
우리나라 오지중에 오지인 그 마을에 씨름선수 출신인 강 아무개가 진행하는
1박2일 프로그램에서 그 마을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유명세(?) 탓인지
하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동네가 망가졌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제발 있는 그대로 좀 놔주소...
쉼터(04:10)
오랫만에 어둠속의 산행을 한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어둠속의 산행이지만 오늘은 어쩔수 없는 차선책이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 지 0.7km되는 지점이다.
한신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물소리가 정겹기까지 한다...아직은 어둠이 걷힐 기미는
없지만 호젓하게 걷는 이 길...아직까지는 걸을만 하고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백무동에서 올라와서 첫번째 만나는 다리
세석고원 오름길까지는 여러개의 다리를 왔다리 갔다리하면서 지나가야 하는데
첫번째의 다리이다...지리산 계곡의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차갑다.
베낭에서 비상용으로 가져온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길을 걷는다.
어둠속에 등로 우측 윗쪽으로는 너덜겅이 보인다
거기다가 친절한 금자씨마냥...예전에는 없었던 예쁜 안내판도 보인다
2번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장쾌하다.
이 다리 아래가 첫나들이 폭포인데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채
지나니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첫나들이 폭포(630m:04:35)
아주 오래전에는 바람이 없는 날에도 이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로 인해 바람이 일어나
‘바람폭포’라 하였고, 어느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백무동에서 올라오면 첫번째
만나는 폭포라 하여 ‘첫나들이 폭포’ 라 불리우고 있으며, 한신계곡의 맑은 물이 계곡을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세상을 맞이하는 폭포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홍수예.경보시스템(04:37)
홍수예.경보시스템를 지난 후에 출렁다리를 만나면서 조금씩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낮을 이기는 밤이 없듯이 밝음을 이기는 어둠도 없다는게 만고 진리의 불변이렸다.
여기까지가 가내소자연관찰로인 모양이다.
그러나 가내소폭포까지는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쉼터(04:50~05:10)
서울에 올라갈 차표도 예매하지 않았으니 그리 죽기 살기로 갈 일도 없다.
이곳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아침 대용으로 가져온 초코파이 하나와 두유로
아침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좌측의 희미한 등로로 올라가면
장터목산장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이제 날은 완전히 밝아졌고 다시 베낭을 메고 가내소 폭포로 향한다.
가내소 폭포위에 도착하자 안내판이 붙어있고 내려다보는 가내소폭포는 장관이다.
가내소 폭포(05:15)
먼 옛날 한 도인이 이곳에서 수행을 한 지 12년이 되는 어느날
마지막 수행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묵고 눈을 감고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지리산 마고할미의 셋째 딸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하였고 , 도인은 그 유혹에 넘어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도인은 “에이~ 나의 도(道) 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고
이곳을 떠났다. 그래서 ‘가내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소설 “동편제”에 나오는 소리꾼 정구룡이 이곳에서 得音을 얻었다는 곳이다
1993년도 이 청준 소설 “서편제” 를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서편제는
많이 알고 있으나 동편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동편제의 특징은 지리산을 닮은 탓에 시작이 진중하고 구절의 끝마침을 되게 하여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이 시원함이 느껴지는데 동편제 명창들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을 담은 ‘적벽가’에 능하다.
동편제의 창시자는 조선 후기의 송흥록인데 남원 운봉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여류명창 박초월이 한때 이곳에 머물며 판소리를 배워서 비전마을은 현재 ‘국악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동편제 창시자 송홍록은 귀신의 울음소리인 귀곡성의 대가였다고 전한다.
근대 명창으로는 권삼득, 송홍록, 박기홍, 김세종, 송만갑 등을 꼽고 있다.
서편제는 애절하고도 섬세하며 구슬픈 계면조로 즉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끝마침이 꼬리가 달린 듯 자르르르
붙어다니는 여성적인 소리이어서 서편제 명창들은 슬픈 소리가 많은 심청가에 능하다.
서편제는 박유전이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보성 율포면 강산마을이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재근, 정응민, 조상현 등 명창이 계보를 이어 왔다고 한다.
가내소 폭포를 지나면서 연이어 폭포를 만나는데 15분쯤 올라서니 오층폭포가 나온다
오층폭포(855m:05:25)
오륜폭포라고도 부르며 5개의 폭포에서 5개의 소(沼)로 떨어진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오층폭포 옆의 돌계단을로 오른다...아주 천천히...
토사 유출을 막기위해서 조성한 돌계단은 산꾼들의 도가니에는 쥐약이다.
이런 곳에는 스틱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아주 천천히 걷는게 특효약이다
한신계곡을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에는 어김없이 많이 만나는 다리.
이곳을 걷는 자체만으로도 즐겁기만 하다.
지리산의 세석고원 북쪽 아래에서 시작되는 한신 계곡
명승 제72호로 지정된 한신계곡은 칠선계곡, 뱀사골계곡과 함께 지리산 3대 계곡으로 불린다.
오층폭포를 지나면서 한신계곡을 매료되어 걷다보니 지도상의 한신폭포는 어딘지 모르고 지나왔다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세석고원으로 향하는 길은 조금씩 조금씩 고도를 높혀간다.
600여m의 백무동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고도를 1,000m 이상을 높혀야 한다
쉬엄쉬엄 걷다가보니 백무동 탐방대피소에서 3.5km를 지났다는 표식이 보인다
산속에는 들려오는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너무나 처량하게 들린다
홍수.예경보시스템(05:57)
한신계곡은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끼는 계곡’이라는 의미에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또 계곡의 물이 차고 험난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다고 해서 한심계곡이라 부르던 것의
발음이 변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고도 하며, 옛날에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평전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몰죽음을 당했다고 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는 계곡이다
다시 다리를 따라서 계곡을 건너는데 산함박꽃이 꽃을 틔우기 시작한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한신계곡은 장터목으로 가는 코스와는 달리
산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어둠속에 이곳까지 참으로 편안하게 왔다.
혼자서 호젓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며
뒤돌아보니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젊은 친구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를 추월한다
예전과는 달리 이곳도 데크목 계단들이 많이 설치되어 예전에 비해서 산행은 편하나
世俗에서 찌든 스트레스와 욕망, 미움, 분노, 그리고 그리움 등을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예전의 험한 능선이 좋았는데 사람들이 갈수록 편리함과 추구하니 방법이 없구나.
계곡 우측 너머로 하늘문이 열리면서 저 윗쪽에 영신봉의 뒷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날이 밝으면서 가내소 폭포를 지나 부지런히 걸었더니만 가내소에서 2km 지점을 올라왔다
이곳의 해발이 1,085m란다...서서히 한신계곡의 오르막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죽은 산죽군락지를 지나니 세석고원 가는 길에서 장터목 산장으로 오르는 한신지계곡 갈림길이 나온다
한신지계곡 합류점(06:40)
한신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과 한신 지(支)계곡에서 합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여러 개의 폭포를 이루면서 10여㎞에 걸쳐 흐른다.
백무동 위에서 세석까지 흐르는 본류 외에도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과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흐르는 한신지계곡 등 4갈래의 물줄기가 엄천으로
흘러 남강 상류를 이룬다.
본류는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을 흘러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한다.
지리산 계곡 가운데 폭포를 가장 많이 끼고 있으며, 지리산 등반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신지계곡 합류점 이정표
한신지계곡을 건너면서 세석고원으로 향하는 등로는 갑자기 급경사의 구간으로 바뀐다.
친절하게도 국공파들이 조심하라는 문구도 보이는데...쟈들은 아직까지 지리산을 오르는
산꾼들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모양이다...조심해라, 하지마라, 벌금 매기겠다 라는 단어밖에 모르나...
한신계곡 오름길에서 만난 고광나무꽃
급경사의 오르막을 아주 조심스럽게 오른다...나홀로 산행의 호젓함을 맛본다.
산악회를 따라 나서면 전혀 느낄수 없는 볼 것 다보고, 즐길것 다 즐기고
황소걸음으로 가도 누구 눈치볼 필요없고...이게 독립군(나홀로 산행)의 특권 아니더냐
무명폭(07:00)
한신계곡의 가장 윗쪽에 있는 멋진 폭포이건만 이름없는 무명폭포이다
지금 한신계곡에는 삼나물이라 불리는 눈개승마와 산함박꽃, 고광나무꽃이 대세이다
10여년전만 해도 멀쩡하던 나무였는데 生을 마감했구나
이곳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 나무를 만나면 세석고원이 거의 다왔다는 느낌이다.
백무동탐방지원센터에서 6km지점을 올라왔다...고도를 1,000m 가량을 높힌 셈이다.
세석고원 오르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하는데 이게 뭐여...귀하디 귀한 두루미꽃을 만난다.
두루미꽃(꽃말:화려함)
두루미의 고고한 자태를 닮은 품위가 느껴지는 꽃으로 마치 귀한 공주나 왕자처럼 피어 있는
꽃을 보면 꽃에도 귀한 것이 따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꽃은 어느 것이나 소중하다.
두루미꽃은 마치 두루미의 고고한 자태를 보는 듯 품위가 느껴지는 야생화다.
두루미꽃은 빽빽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뿌리줄기가 옆으로 자라면서 크기 때문이다.
키도 작고 꽃도 작은 것이 무리지어 피지만 가는 줄기와 두툼한 이파리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데
키는 8~15㎝ 내외로 작은 편이며, 5~7월에 꽃 역시 아주 작게 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루미의 머리를 닮았다.
그러나 잎과 잎맥 모양이 두루미가 날개를 넓게 펼친 것과 비슷해서 두루미꽃이라고 부른다.
잎은 길이가 2~5㎝, 폭은 1.5~4㎝로 모양은 하트형이며 줄기에서 2~3장이 나오며 잎의 끝은 뾰족하고
뒷면에는 돌기 모양의 털이 나며 꽃은 흰색으로 줄기 끝에 5~20송이 정도가 무리지어 달린다.
잎과 잎 사이에서 줄기가 올라오고 꽃이 필 무렵에 잎이 두 장이 더 나와 그 사이에서 꽃이 피는
특성이 있고 열매는 8~9월경에 적색으로 달린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한방에서는 뿌리를 제외한 식물체 전체를 무학초라는 약재로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시베리아, 유럽, 캄차카 반도 등지에 분포한다.
눈개승마(꽃말:산양의 수염)
하얀꽃이 겹겹히 쌓인 모습이 겨울에 온 눈과 같다고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승마(升麻)는 식물체인 마(麻)를 나타내는데 옛날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가난한 부인이 병이 났는데 약을 지을 돈이없어 고민하던 중 지나가는 도사가
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이름도 없던 마종류의 풀을 달여 먹으라고 가르쳐 주고
떠났는데 그 풀을 달여먹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10km가 넘는 한신계곡의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다...저 곳을 내가 지나왔다니...가슴이 뿌듯하다
한신계곡 맨 윗쪽에 있는 주목(朱木)...정상이 다 왔다는 얘기이다.
병꽃도 범여를 응원한다...드디어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지나 세석고원 맨 윗쪽에 도착한다.
세석고원 정상(1,516m:07:55)
백무동 출발하여 정확하게 7km 지점...4시간 10분에 걸쳐 백두대간 마루금에 도착하여 대간길을 걷는다
이곳이 정상적이 대간 마루금이나 출입금지지역이다
대간길 마루금은 막혀있고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내려간다
세석산장을 향해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지리산 남부 능선은 흐릿하기만 하다.
세석갈림길(07:58)
휴식을 위해서 세석산장으로 향하는데 산꾼들의 웃음소리가 많이 들린다.
등로에서 바라본 세석산장에는 산꾼들이 많이 보이길래 산장으로 안간다.
코로나란 역병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기저환자인 나로서는 왠지 찜찜하여
산꾼들이 거의 없는 입구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아직까지 허기는
오질않고 장터목대피소까지는 갈 수 있을것 같다
세석산장(1,563m:08:00~10)
이곳에서 두유하나를 마시고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본격적인 대간 능선길을 시작한다
대간길은 세석고원 좌측 위가 마루금이나 출입금지 지역이라 고원 가운데를 가로질러 제도권 등로로 걷는다.
마루금 아랫쪽의 세석고원에는 구상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세석평전의 쥔 행세를 하는
철쭉은 철이 지난는지 잘 보이지 않고 노란색의 미나리아제비꽃이 많이 보인다
세석고원은 구상나무, 분비나무 등 침엽수가 위치한 하대(下帶), 철쭉 등 관목류가 자라는 중대(中帶),
싱그러운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상대(上帶) 등 등고선에 따라서 뚜렸한 식물 생태계가 나눠진다.
그러나 세석고원의 볼거리는 단연 5월말에서 6월초에 만개하는 수십만그루의 철쭉이다.
소설가 문순태는 소설『철쭉제』에서 세석 철쭉을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놓은 것 같은”...
“하늘끝까지 붉게 물들여져 있는 있는 듯” 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 세석 철쭉은 그리 붉지않고
지금은 지리산의 또 다른 철쭉 명소인 바래봉 철쭉이 등산객에게 훨씬 인기라고 한다
세석평전(細石平田)은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하고
북으로 덕유산 국립공원에 이어지며 천왕봉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智異山 명칭은 두음법칙의 예외로 특이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로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으로 본시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리산의 등골’이라 여겨지는 이곳
고지대의 넉넉함 때문인지 신라 때 화랑도의 수련장에서부터 구한말 동학농민군의 전장,
한때 등산객들의 야영장으로 많은 이들에게 그 품을 내어준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연이 심각하게 몸살을 앓아 20년 가까이 국립공원의 관리와 복원 작업이 이어졌고
다행히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우리는 단 몇 년 만에 자연을 망가뜨릴 수 있지만 되찾기
위해선 수십 년이 걸린다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촛대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영신봉과 세석산장의 모습
한편 지리산 아래인 하동군 북천면이 고향인 소설가 이병주(李炳注)는 그의 에세이집
『산을 생각한다』에서 오래전 세석 철쭉이 만개했을 때, 빨치산에 대한 자살사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때 유서로 남긴 쪽지에는 이렇게 쒸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아! 꽃으로 치장하고 너만 이렇게 호화스러울 수 있는냐!”
연진(蓮眞) 낭자의 애절한 사랑을 잊지 못하는 호야(乎也)의 화신인지 철쭉 한송이가 애처롭게 보인다.
조금전에 왔던길을 뒤돌아 본다.
세석고원에 묻혀버린 산장 너머로 지리능선에서 가장 氣가 세다는 영신봉이 또렸하다.
낙남정맥이라 부르고 낙남정간이라고도 부르는 정맥길의 시발점이기도 한 봉우리.
또한 백두대간의 끝지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라는 분쟁(?)의 중심에 서있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 진부령(혹은 향로봉)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끄트머리 지점인 지리산
구간에서 영신봉을 지나 대부분이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으로 향하지만 일부의 산꾼들 사이에는
저곳 영신봉에서 삼신봉, 고운동재, 돌고지재, 우듬지 분기점이라 부르는 547m봉 까지 낙남정맥과
함께 하다가 이곳에서 낙남정맥은 좌측으로 향하고 우측으로 빠져서 구영고개, 하동의 진산인
금오산, 연대봉을 지나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느껴지는 노량앞 바다(남해대교)를 함수점으로 보는
일부 산꾼들도 있다...이 구간을 신백두대간이라 부르는 산꾼도 있고 우듬지(나뭇가지의 가느다란 끝 부분)
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간길을 천왕봉으로 향하던 노량앞바다로 향하던 그건 오직 산꾼 본인의 몫이다
촛대봉 오르기전의 세석고원 데크목 쉼터 아래에는 곰치들과 박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보이는 저 곰치는 아직도 부드러워 입에서 군침이 돌지만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백두산 서파에서 많이봤던 곰취꽃들을 이곳에서 보는 행운을 누린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박새들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1472년 8월에 조선 초기에 성리학자였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1)은
지리산 기행기 <유두류록>에서 세석은 저여원(沮汝原)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산마루에
펼쳐져 있는 평원은 평탄하고 광할하여 5,6리 정도나 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1,600 m 높이에 위치한 낮고 평평한 땅 세석. 그곳은 지금도 아름답고 넉넉하게 펼쳐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석(細石)”이란 단어의 최초 기록은 구한말의 학자 연제 송병선(淵齋 宋秉璿)의 글에서 보인다.
그의 문집 21권에 있는 『두류산기(頭流山記)』는 1879년 지리산을 오르고 쓴 글로 비교적 자세하게
세석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의 저서 두류산기를 보면 세석을 내세석과 외세석으로 나누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는 이러한 개념들이 잘 쓰이지 않고 있는데 외세석은 영신봉 아래 음양수 근처의
평지를 말하고, 내세석은 세석산장이 있는 세석 상층부를 말한다
촛대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보니 뚜렸한 영신봉 너머로 보여야 할 반야봉은 흐릿하기만 하다.
반야봉 아래의 묘향암 절집의 쥔장인 호림스님께서는 잘 계시는지?...
지난 초파일에 전화 통화는 했지만 이곳에 오니 근황이 궁금하다...스님! 8월중에 가면 하룻밤 재워주소...
영신봉(靈神峰:1651.6m)의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세개골 상단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좌고대와 창불대, 가섭상이라는 바위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영신사 좌고대에 올라 3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을 이룬다고 하였다.
영신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세석고원 아래 음양수 근처 대성동의 큰세개골 위가 영신사 터라고 한다.
촛대봉으로 올라간다...마치 촛농이 흘러내린듯한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운집한 촛대봉.
호랑이의 密告로 깨져버린 호야와 연진낭자의 사랑의 아픔을 보듯 가슴이 찡하다.
촛대봉 바위로 굳어버린 연진낭자의 애처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촛대봉에 오른 산꾼들은
그저 희희낙락거린다
촛대봉에 올라서니 목책 위에서 엄청난 망원렌즈를 장착한 대포카메라로 뭔가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다...자세히 보니 오늘 이곳 지리산에서 어느 단체가
화대종주 행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우측의 촛대봉 정상으로 향한다
촛대봉(1,703.1m:08:30~08:45)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에 걸쳐있는 지리산의 봉우리중 하나로 세석고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암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연진낭자가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린
모습이라고 전하며 촛대봉의 옛 이름은 촉봉(燭峰) 혹은 촉대봉(燭臺峰)이었다.
음양수 전설의 주인공인 연진처자가 낯에는 세석평전의 철쭉밭을가꾸고,
밤에는 죄를 사하기 위해 촛불을 켜놓고,기도를 올리던 장소라하여
촛대봉이란 지명이 붙은 곳이다.
세석고원을 사이에 두고 영신봉을 마주 바라보는 봉우리는 천왕봉 웅장함과
발아래 거림골 풍경이 조화를 이룬 멋있는 바위들을 모아 놓은 봉우리다.
촛대봉 아래 40분 거리에는 산나물 최대 군락지가 있다.
알면서도 못가는 곳이고 거림 쪽으로 찾아 오르기 쉬운 곳으로 거림마을
사람들이 나물과 약초를 뜯으러 다녔던 길은 인적이 드문 산속의 오지다.
지리산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약초는 국내 수요를 충당하고도 생산량의 반 이상을
일본·홍콩 등지로 수출하며 산수유를 비롯하여 오미자·익모초·작약·천궁·도라지·구절초·
능소화·화살나무·천남성·연령초·지황·만병초·석장포·자금우·개비자·탱자·현삼·구기자 등이 많다.
약초 외에도 식용식물로 고비나물·고사리·왕머루·보리수·잣·다래·상수리나무·고광나무·산딸기
등과 차풀·생강나무 등의 차(茶) 대용품도 있다.고 한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맨 뒷쪽 제일 높은 봉우리)
촛대봉에 올라서니 대전에서 오셨다는 등산객 10여명이 산상파티를 벌이면서
내가 올라서니 나에게 스마트폰을 건내면서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한다.
내가 사진 몇 컷을 찍어주니 잘 찍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김밥한줄 과 치킨을
먹으면서 같이 먹자고 하는데 이게 웬 떡이란가...안 그래도 배가 살짝 고팠는데...
그 분들이 주신 김밥과 치킨을 먹고나니 배가 든든하다...천왕봉까지는 갈 것 같다.
貧者의 주린 배를 채워주신 이 공덕...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세석고원(細石高原)은 ‘남녘의 개마고원’이라 불릴만큼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나타내는 고원지대로 그 주변 둘레가 12km나 되며, 약 30만평의 드넓은 면적으로
동쪽의 촛대봉과 서쪽의 영신봉 사이에 남향으로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 세석평전이라 하는데 ‘평전(平田)’이란 일본식
발음이라 세석고원이라 부르는게 맞을듯 싶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이다.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 제공을 한 그 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지리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고 빨치산의 참상을 겪은 슬픈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산. 그러나 찌든 세속에서 중생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함을 주는 산
촛대봉 정상에서 내려와 장터목 대피소로 향한다
촛대봉을 지나면서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다.
화대종주를 하시는 분들과 많이 부딪힌다... 이 분들은 무조건 빨리 걸어야 하니
안 비켜줄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산행 리듬이 깨지는 기분이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오랜 기간동안 지맥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왠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로는 어색한 느낌이다...지맥길이야 산악회를 따라
다니지 않는 다음에야 시작부터 끝지점까지 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못하니...
무명봉(08:51)
가야할 능선 너머로 연하봉과 제석봉이 연달아 보인다
철계단을 내려서는데 또 뒤에서 화대종주 팀들이 우루루 뒤쫒아(?) 온는 바람에 또 비켜준다.
*화대종주란?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에서 코재로 올라 노고단, 주능선을 지나 천왕봉,
중봉에서 경상남도 산청대원사 까지 46.3km의 코스를 말한다
좌측으로는 암릉구간이 이어지고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촛대봉에서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능선... 기암(奇巖)과 고사목을 자주 만나는데 이 구간은 환경부가
지정한 특정 야생식물 보호구역으로 대상 면적은 약 10km에 이르며 금강제비꽃과 약용식물로
유명한 땃두릅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설악산 대청봉, 대성산, 월출산과 보호구역으로 지정 되었다.
촛대봉에서 거림골로 이어지는 능선이 참으로 장쾌하다
한여름의 지리 주능선 종주에서 자주 만날수 있는 산오이풀은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꽃은 피지 않고 있다.
안부(08:55)
화대대종주팀들과 부딪히는 것도 걸거적거리고 간간히 만나는 것도 어색하여
자꾸 양보하다가 보니 자꾸만 뒤쳐지만 지리 주능선을 걷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걸 어쩌나.
등로 주위에는 산함박꽃이 지리능선을 걷는 범여를 반겨준다.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천왕봉에 이르는 25km의 구간에는 야생화를 비롯한 식물의 寶庫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본인 식물학자 나가이(中井猛之進)는 지리산 전체의 식물 조사를
행하고 「지리산 식물 조사 보고서」를 펴낸적이 있는데 이 책에 첨부된 지리산 전도에는 지리산의
여러 등산로와 함께 주능선길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그때 당시 주능선길이 뚜렸한 산길이었는지
산행하는 사람이 많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이즈음하여 주능선길이 열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쉬엄쉬엄 황소걸음으로 걷다보니 세석산장을 출발한 지 1.4km란다.
이제 내가 몇번이나 더 지리능선을 걸을지는 모르겠으나 걷는것
자체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닐까...조금을 오르다보니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조망바위(1,639m:09:10)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지리산의 남서쪽은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뒤돌아보니 연진낭자가 호랑이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묻어있는 촛대봉(암릉)이 뚜렸하게 보인다
지리 남부능선과 낙남정맥길이 다 보이는 곳이고 거림골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로
이 나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대성동과 의신마을로 이어지는 능선도 보인다.
저 곳은 6.25 전쟁 때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80여년전의 아픈 역사를 꼽씹으며 천왕봉으로 향한다
잠사후에 가야할 화장봉과 연하봉, 제석봉을 지나 우뚝솟은 천왕봉이 보인다
암봉은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올해 5월에는 날씨가 추웠던 탓인지 이곳에는 아직까지 앵초가 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삼신봉(三神峰:1,660m:09:30)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명봉이나 트랭글맵에서는 삼신봉이라 한다.
옛날 세명의 신이 놀았던 봉우리라하여 삼신봉이라고 하는데 암릉으로 일반적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는 등산객들은 잘모르고 지나가는 듯 하는 봉우리이다.
안부 윗쪽으로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데 그 곳을 말함인가 보는데 오를수가 없다.
석장승인지 돌부처인지 모를 멋진 조각같은 바위를 만난다
예전엔 무심코 지나쳤던 암릉구간도 천천히 걷다보니 잘 보이는 느낌이다
여유로운 걸음을 걷다보니 전망이 뛰어난 화장봉에 도착한다
화장봉(花藏峰:1,693.3m:09:36~45)
아름다운 꽃을 감추고 있는 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봉우리로 예전에는 전망이 좋은
곳이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담배를 태우고 꽁초를 하도 많이 버려서 꽁초봉이라고 불렀었다.
이곳도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예전엔 없었던 철난간도 설치되어 있는데
지리산 주능선에서 조망이 아주 뛰어난 곳중에 하나이다.
예전엔 없었던 화장봉이란 지명도 얻었다...물론 국립지리원에는 무명봉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백무동쪽과 남동쪽의 도장골과 거림골 방향 너머로 사천쪽도 아련히 보이고
잠시후에 가야할 연하봉, 제석봉과 천왕봉도 약간의 미세먼지로 인해 깨끗하진
않지만 나름 뚜렸하게 보인다
화장봉 정상의 모습
인증샷
잠시후에 가야할 연하봉 너머로 보이는 천왕봉은 구름속에 조금씩 가려지기 시작한다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지리산의 천왕봉...범여의 德이 아직 부족함인가?
능선 우측으로는 산청군 시천면 바른개골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남해바다와 사천의 와룡산이 보이는 곳이지만 아쉽다
안부(09:48)
예전에는 헬기장이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대간길로 깨끗하게 정비가 되었다
안부를 지나 연하봉을 향하면서 아침에 지나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조금전에 지나온 화장봉 좌측으로 오르지 못한 삼신봉이 보이고 그너머로 촛대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지나온 화장봉을 뒤돌아 본다...그 뒷쪽으로 여인의 궁둥이처럼 보이는 곳이 반야봉이다
반야봉(般若峰1,731.8m)은 지리산 10경중 제4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인데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 주능선은 멋진 기암괴석과 야생화로 산꾼의 눈을 호강시키는구나.
일출봉에서 도장골 능선을 따라서 시천면 중산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경상도가 55%를 차지하고 전라도가 45%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형은 융기 작용및 침식,
삭박에 의해 산간 분지와 고원, 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어 있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 사찰과 국보, 보물등이 문화재가 많으며 800여종의
식물과 400여종의 동물들이 있으며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지리산(智利山)이었다고 하며 여기서 다만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智慧로운 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란 뜻으로 智異山으로고쳐 부르기도 한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 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년) 최치원이 쓴 비문에서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등산객들과의 거리를 두면서 호젓하게 걷다보니 연화봉으로 올라선다
암릉으로 구성된 연하봉 정상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눈도장을 찍는다.
연하봉(煙霞峰:1,723.4m:09:57)
연하봉(煙霞峰)의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극히 사랑함을 뜻하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구름이 노는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을 가졌다
연하선경은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새벽 여명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며 고사목이 숲을 이루고
원시림이 가득하여 연하봉 일대의 비경을 지리10경중에 제8경인 연하선경(煙霞仙京)이라 부른다
이정표에서 바라본 연하봉의 모습
연하봉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장터목 대피소로 향한다
안부로 내려서면서 바라본 제석봉과 천왕봉...구름에 가려진 천왕봉을 볼 수 있을까 조바심이 앞선다.
안부(10:00)
도장골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멋진 암릉으로 구성된 일출봉이 보인다
산청군 시천면 도장골로 이어지는 능선은 비탐구간이라 갈 수 없는 곳이다
민족의 아픔을 가슴속에 묻고있는 지리 능선의 모습
이곳 지리산은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 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
일출봉(日出峰:10:05)
장터목 산장으로 내려가기 전인 0.4km지점 능선에 지난 2016년 5월 15일 북진구간 때는
이정표 아래에 분명히 일출봉이란 표시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아주 오래된 예전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일출봉이린 지위를 잃어버리고 무명봉으로 격하된 일출봉...하지만 진짜
일출봉은 이곳으로 남쪽으로 떨어진 암봉이 진짜 일출봉이다
우측의 산청군 시천면 도장골로 이어지는 능선은 비탐구간인지 출입금지판이 보인다
하기사 오늘은 그리로 갈 일이 없다.
도장골은 지리산 주능선상에 위치한 연하봉과 촛대봉에서 비롯되는 도장골을 지리산을 대표하는
숨은 계곡이라 칭하며 한신계곡의 수많은 폭포와 뱀사골의 아기자기하고 빼어난 소(沼)와 담(潭)의
조화 그리고 원시림과 절벽의 계곡미가 살아있는 칠선계곡을 버무린 합작품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대어에서 산을 나타내는 말 중에 달이 있으며 달을 뿌리로 하는 말 중에 지역에 따라 모음이
변하면서 닫 혹은 돋이 있다...돋 + 안쪽 골 > 돋의 안골 > 도댠골 > 도잔골 > 도장골 결국
도장골은 산의 안쪽에 있는 골이라는 보통명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장터목대피소로 향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주위에는 눈개승마가 군락을 이루면서 꽃을 피우고 잠취나물들이 지천이다
장터목대피소로 향하는 등로는 지리산에서 만나기가 힘든 陸山 길이다
민족의 그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슬픈 내색한번 안하고 모든 산꾼을 보듬어 주고있는 어머니 포근한 품안같은 산이다.
어머니의 품안같이 포근함이 그리워 매번 지리산을 찾는데
올 때마다 느끼는 그 감동 난 언제 그 빚을 다 갚을까?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산이 크다고 산국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山國:산이 많은 나라)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세속에서의 찌들고 힘들었던 무거운 짐은 어머니의 품안같은
이 지리산에 묻어버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장터목 대피소가 보이고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이 많다.
옛날 봇짐장사들은 가족들의 생계와 삶을 영위하기위해 이 고개를 넘었는데
나는 지리산의 氣를 받기위해 걷는다고나 할까...지난 2주동안 지리산을 향한
가슴앓이가 어느정도 해소된 느낌이다...이곳에서 남쪽의 중산리와 북쪽의 백무동
방향을 바라보니 가슴이 확 터진다...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아마 계속되는 ing가 아닐까.
매번 지리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벅찬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다가오는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아 여자들의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장쾌하고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산이라 부르고 싶다.
골짜기마다 슬픈 역사와 동족상쟁의 아픔을 가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쉼터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려니 화대종주 하시는 분들이 모두다 점령했다.
하는 수 없이 취사장 밖에 있는 의자는 비어있어 거기서 두유 하나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장터목 대피소(場基項:1,653m:10:15~10:30)
걍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의 경계의 고개에 있는 대피소로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북쪽 기슭의 주민과 남쪽 기슭의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장터목에서 장을 열어
서로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즉 남쪽 산청 시천면 사람들이 생선, 소금 등
해산물 따위를 지고 법천골로 해서 장터목으로 올라오고, 북쪽 남원과 함양 마천면쪽 사람들은 곡식, 직물,
약초 등을 짊어지고 백무동으로 해서 올라와서 물물교환을 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곳에
장이 선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장터목이 지금은 천왕봉을 오르는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예전의 장터보다도 어쩌면 더 번잡한지도 모른다
크게보면 다섯 곳의 등반로가 모이는 곳이고 천왕봉 일출을 고집하는 분들이 묵어 가는 곳이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15분정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고 천왕봉을 향한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등로 주변에는 참당귀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 주위에서 만난 참당귀꽃
돌계단을 따라서 제석봉을 향하는데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여 베낭을 점검하는데
이게뭐여!...중요한 스마트폰을 조금전에 휴식을 취하던 벤취에 두고온 모양이다.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폰을 빌려서 전화를 하니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다.
장터목 대피소의 매점이란다...베낭을 내려놓고 매점으로 되돌아가서 가서 핸드폰을 회수한다.
벌써 치매가 오나...아님 건망증이 심한 것인가...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증인가?...암튼 모르겠다.
핸드폰을 되찾아 제석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뒤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연하봉이 구름에
묻혀 버리는데 자꾸만 맘이 조급해진다...천왕봉을 보지 못할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 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 하지 말고
얼기 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
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소
내 것도 아닌데...
삶도 내 것이라고 하지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오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없는 욕심 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피고
인생 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요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깜깜한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게 있겠소?
살다보면 기쁜일도 슬픈일도 있다만은
잠시 대역 연기 하는 것일 뿐
슬픈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게 있소
기쁜표정 짓는다 하여
모든게 기쁜 것만은 아니요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렇게 사는겁니다.
서산대사의 해탈시(解說詩)
해탈(解脫)이란 지혜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끝에
득도를 이루면서 읆은 시를 해탈시라고 한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제석봉 고사목 안내판.
언제쯤이면 저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까...지리산을 올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늘 미안함이 아려오는 곳이다
제석봉엔 하얀 고사목들이 처연하고 봉우리 일대가 황량하다
제석봉 정상은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수천그루의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들이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인재에 의한 고사목이라고 한다.
즉 자유당 말기에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사람의 삼촌이란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봉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론이 악화되고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흔적을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렀단다.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이 빚어낸 결과 치고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른듯 하다
제석봉(帝釋峰:1,806m:11:00)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봉우리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있다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저 윗쪽이 진짜 제석봉인데 오르고 싶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서 망설여진다.
행여 등산객들 사이에 국공파들이 끼어있어 제지를 받으면 그것도 망신살이니 포기를 한다.
등로 가운데 있는 제석봉 표시목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허 형만님의 詩...행복에서 발췌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로는 짙은 안개가 몰려와서 갑자기 五里霧中이다
제석봉을 지나 철계단으로 내려선다.
이정목 좌측으로 이어지는 암릉구간
제석봉과 통천문 사이에 있는 이곳은 암벽으로 되어있고 고산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흔히들 이곳을 톱날능선이라고 하는데 산행이 금지된 곳이다
멋진 톱날능선을 바라보면서 우회하여 걷다가 보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안부(11:13)
제석단터(帝釋壇?:11:20)
조금전에 지나온 안부인지 아님 이곳이 제석단이 있었던 자리인가?
아니면 지리산기에 나오는 향적사 절터인가?... 아뭏든 둘중에 하나인것 같은데 알 길이 없다
이륙(李陸: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향적사가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있는 승려가 없다.
지리산의 물줄기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발원하고 또 하나는 법계사 아래서 발원하여
살천에 이르러 합쳐져 하나가 된다"고 했다.
*이륙(李陸)은 조선조 세종때부터 연산군 시대에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톱날능선을 내려와 편하게 걷다가 이곳부터 천왕봉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이다
능선 아래에서 薄霧가 밀려온다...아무래도 지리산의 멋진 仙境을 보기에는 범여의 德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래 순리대로 살자...조금전에 지나오면서 웅장한 지리산의 멋진 선경을 본 걸로 만족하자.
더 바라면 그것도 욕심이고 집착이요, 탐욕이란 걸...
오늘도 산이란 대스승에게 하나를 배운다...空(비우라는 의미를)
통천문을 향하는 길...잠깐이지만 등산객들과 부딪힘없이 호전하게 걷는다.
오르막 철재 난간을 지나니 통천문 입구가 나온다
통천문 입구에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大刻字)가 암굴 동문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는데 옛 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통천문(通天門:1,814m:11:30)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결국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에서까지의 지리능선의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가 만나는 문이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그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산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시인 고은님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적고 있는데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좁은 철계단으로 올라서...
조금전에 지나온 제석봉쪽을 바라보니 잠깐사이에 짙은 안개가 제석봉을 삼켜버렸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지리능선에 대한 경외감(敬畏感)...범여는 이 맛에 지리능선을 걷는가 보다
산에서 만나는 야생화를 보는 건...늘 첫사랑의 설렘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천왕봉을 향한 본격적인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리산의 옛 지명은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남악산(南岳山), 방호산(方壺山)으로
불리우기도 했는데 방장산은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영주산(瀛洲山:한라산)과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신산(三神山), 또는 삼선산(三仙山)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여기에 묘향산을 더해 4대 신산, 다시 구월산을 더하면 5대 신산 또는 5악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멀리 백두대간에서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여 서쪽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등
3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이 형성되어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총 면적은 440,485㎦로 설악산의 1.2배, 한라산의 3배, 속리산의 1.5배
가야산의 7.5배로 가장 크다
철계단을 지나서 빡세게 오르막을 올라서니 薄霧에 묻혀버린 천왕봉이 범여의 애간장을 녹인다
칠선계곡 갈림길(11:45)
좌측으로는 칠선계곡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이곳은 지금 예약을 하지 않고는 걸을수 없는 등로이다.
40대 초반에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으로 와 봤으니 어언 3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산은 늘 그대로인 것 같은데...나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 어짜면 좋노...
칠선계곡 등로 초입에는 예전에 없었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칠선계곡(七仙溪谷)은 국립공원 100景중에 제30景에 속하며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에 속하는 곳이다.
지리산의 원시림 그대로가 유지된 곳으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천왕봉에서
칠선폭포를 거쳐 용소(龍沼)까지 이어지며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골이 깊고 험헌데다
실제로 인명사고가 많이나는 곳으로 멋진이름과는 달리 죽음의 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왕봉 가는길에 추운 날씨 탓인지 늦둥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철쭉의 한자 지명은 척촉(躑躅)인데, “꽃이 아름다워 사람이 머뭇거린다”
또는 “잎과 꽃에 있는 독을 먹은 사람이 머뭇거리며 비틀거린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철쭉과 산철쭉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네, 철쭉보다 꽃색이 진분홍이고 잎이
좁은 것이 산철쭉인데, 도시에 심는 것은 대부분 산철쭉이거나 교배종이다.
민족의 그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슬픈 내색한번 안하고 모든 산꾼을 보듬어 주고있는 어머니 포근한 품안같은 산이다.
천왕봉 정상 아래에는 넓은 공터에는 여러 등로에서 올라온 많은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천왕봉 산장이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철거되어 쉼터로 이용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토굴식 석조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6.25동란 이후에 까지 존속되다가
지금은 그 터만 남았는데 예전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천왕봉을 지켰던 성모상은 14세기말에 왜구에 의해 홰손되었다가 간신히 복원을 했는데
1970년대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또 홰손한 것을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
주지 혜범스님이 성모상을 찾아서 현재는 천왕사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지리산의 기운을 관할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는 성모상(聖母像)은 천왕할머니,
마야부인, 마고부인이라고도 불리며 언제부터 지리산에 모셔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신것이라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
위숙황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봉안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일부 스님들은 성모석상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이라고 하며
한편으로는 천신(天神)의 딸 마고(麻姑)가 지리산에 내려와 여덟명의 딸을 낳아
무당으로 길러 팔도로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무조설(巫祖設)로 조명하기도 한다
예전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 있게 일월대 (日月臺)라고도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월대란 이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으며, 월출과 월몰을 한 곳에서 바
라볼 수 있는 곳이 일월대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을 잘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이곳 천왕봉은 지리십경중에 제일경으로 일출이 환상적인 곳이다.
일월대는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日月臺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그 아래의 바위에는 암각화로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곳에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天柱”라는 암각 글씨가 보인다
천주(天柱)란 “하늘을 받히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가 각자되어있는 곳은 천왕봉 정상석 옆의 표지안내판
“노고단 천왕봉까지 역사현장에서!”라는 안내 표지판 바로 아래에 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를 정확한 기록은 알 길이 없다
천왕봉(天王峰:1,915.4m:11:55~12:10)
천왕봉은 언제부터 불리워진 이름일까?' 아직 밝혀진 바 없고, 문헌상 기록도 없다.
천왕봉의 이름은 다양한 유래를 품고 있는데 천왕봉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사찰에 들어설 때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과한다.
즉, 천왕봉은 사천왕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산봉우리 이름에는 불교적인 이름들.
천왕봉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이외에도 여러 곳지만 불교 성지인 지리산 천왕봉도 예외일 수 없을 듯하다.
지리산에는 천왕봉 말고도 제석봉, 반야봉, 연하봉 등... 불교에서 따온 지명이 무수히도 많다
또 다른 설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일제는 우리글과 말을 못쓰게
하였는데 사람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여 그것이 "창씨개명[創氏改名]"에서
비롯 되었다는 설도 있다...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큰 산 이나 봉우리 이름 등...
"왕[王]"을 황[皇]또는 왕[旺]으로 왜곡 시켰다는 설도 있다.
예를 들면, 속리산의 천왕봉[天王峰]을 천황봉[天皇峰]으로 바꾸었다는...
이는 '일본천황'이나 '왕[旺]=[日+王]'을 연상시키기 위해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천왕봉 정상 뒷면의 모습
현재의 표지석은 19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규호씨와 민정당 실력자였던
권익현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웠다고 하며 높이 1.5m의 자연석을
옮겨와 세운 이 표지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남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되다를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로 언제부터인가 바꿔 새겨 놓았다
예전의 정상석 후면엔 남명선생의 詩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請着千石鐘 (청간천석종) 청하여 천석종을 보니
非大叩無聲 (비대구무성) 큰 종채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아니한다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아니하네
코로나라19라는 역병에서 해방된 탓(?)인가.
천왕봉 정상은 등산객들로 인해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이고
인증삿을 남기기 위한 정상석 쟁탈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인증샷을 남길 엄두도 못내고 주위에서 밀려나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 돗때기 시장같은 정상에서 내려가려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게 아쉽다.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남해바다는 물론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진주시내와, 내 고향
의령땅의 진산인 자굴산도 보일텐데...오늘은 그 꿈을 포기해야 할 듯 싶다.
아쉬움은 가슴속에 묻어두고...대간길은 이곳에서 종료하고 법계사로 내려간다
대원사 갈림길(12:12)
좌측으로는 지리산 동부능선으로 중봉, 하봉,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덕천지맥(신산경표상 웅석지맥)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화대종주꾼들이 가는 대원사코스,
지리태극종주의 길이기도 한데 일반 등산객들은 잘 다니지 않고 비탐구간이 많다.
2016년 9월에 나홀로 덕천지맥을 걷다가 비를 맞으며 개고생을 한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다
법계사로 향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짙은 안개속에 무심코 걷다보니 이정표가 있는 천왕샘에 도착한다.
천왕샘(天王泉:12:20)
예전엔 이 조그만 샘이 서부 경남지역의 식수원인 남강댐의 발원지라고 하며
남강 발원지라는 팻말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표식이 없어졌다.
실제의 남강 발원지는 이곳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남덕유산 참샘이 발원지다
이곳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흐르게 되는데 이제 남강의 발원지가 아닌 그냥 천왕샘으로
제대로 정리가 된 모양이다
조망봉(12:23)
조망봉에 우측을 바라보니 보여야 할 웅석봉은 구름에 가려져 아예 하얀 도화지 보는 느낌이다
맑은 날씨에 이곳에 서면 덕천강과 경호강이 보이고 남명 선생의
산천재가 있는 덕산마을이 보일 곳이지만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남명선생께서 천왕봉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지어 지내며 제자를 기르던 산천재가 있고,
또 그의 학맥을 잇는 남명학파의 중심인 덕천서원이 있으며 또 그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며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으로 불리웠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1501년 같은해에 태어나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됐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퇴계는 仁을 중시하며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나갔으며
남명은 직선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비판자로서 義를 숭상했다.
기질과 학풍, 현실관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 ‘퇴계는 온화하고 포근해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은 우뚝 솟은 기상이 지리산을 닮았다’고 당시 선비들은 평가했다
그러기에 지금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 서북부 지역사람들은 남명의 성품을 닮아 반골 기질이 강한듯 하다
한참을 내려왔나 싶었는데 겨우 0.6km라니...멋진 바위가 산꾼을 반긴다.
개선문(凱旋門:1700m:12:30)
천왕봉 북서쪽에 있는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으로 오르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원 지명은 하늘을 여는 문이라 해서
개천문(開天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엔 좌.우의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좌측은 무너져 없어지고
우측의 것만 10m 높이의 우람한 바위가 서 있는데 폭 2m의 공간 사이를 지난다
개선문을 지나면서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발이 아프다.
그래도 빡센 오르막보다야 편하지만 ...인간이라 참으로 간사하다.
그래서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다고 했던가.
중산리 계곡의 짙은 안개를 바라보면서 내려서니 예전에 없었던 쉼터가 나온다.
안전쉼터(12:50)
쉼터의 이름이 심장안전쉼터란다...하기사 이런 급경사의 오르막엔 심장에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하제...
등로의 돌계단을 걷는데 도가니의 무리를 주지않기 위해 천천히 내려오니 등로 우측의 10여m 지점에
암릉 아래의 커다란 굴이 보이는데 이곳이 천불암터이다
천불암터((千佛菴:12:56)
지리산 유람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법계사는 천왕봉과의 거리가 20여리이다.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강(天王舡)이라 부르며 이 절에서 천왕봉 쪽으로 3, 4리쯤 되는 곳에 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들어앉을 수 있는 이곳을 천불암(千佛菴)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세상을 피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부뚜막, 굴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불암(千佛庵)은 천왕봉 밑에 있으며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고 했다. <대동지지>에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이 있는데,
집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아래에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으며 법주굴(法住窟)이라고 부른다"며
유람록과 엇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륙은 세조 조와 성종조의 명신으로 서울의 청파동에서 출생하였다고 호가 청파(靑坡)이다.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22세(1459년)에 생원과와 진사과에
오르고 갑신년(1464년)에는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 병조참판ㆍ대사헌에 이르렀다. 저술한 책으로는 《청파집(靑坡集》이 있다.
또 인조 때 난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은 육의 현손이다
한평생을 지리산에 바친 김경렬 옹은 <다큐멘터리 지리산>에서 "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에 있었던 암자로 절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근세에 와서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란 때 의병도총부 소관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병란,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암법주굴은 천불암이다.
그럼, 그가 말한 '(암)법주굴'은 어디일까. 천불암이야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암)법주굴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자료 인용)
등로에서 좌측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있기에 관심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아래로는 150cm 정도 되는 높이의 굴이 있고앞이 탁 트인 굴 안은 생각보다도 넓었다.
암자라기보다는 천연수도처에 가깝다. 벽에는 누군가 새긴 이름들이 낙서처럼 어지럽다.
통일교회란 글씨도 보이고 판독을 할 수없는 글씨도 보인다
제법 널따란 공간은 십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수풀에 가려 있지만 은둔처로서는 그만이다.
세상과 단절된 편안함이 느껴지며 바닥에도, 천장에도 그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다시 등로로 되돌아와서 법계사로 향한다
쉼터(13:00)
쉼터 아래에 2번째 심장안전쉼터를 만난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경사가 진 너럭바위가 나오는데 이곳은 예전엔 문창대라고 했던 곳이다.
이곳을 문창대(文昌臺)라는 기록도 보인다.
문창대(文昌臺?:13:10)
1970년대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의 답사를 기록한 「진양지(晋陽誌)」에 ‘문에서 서쪽으로 수십보쯤에
문창대가 있으니 최고운이 놀던 곳이요’라는 기록과 그곳에는 지리산(청학동)에서 이상향을 꿈꾸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렀던 곳으로 암벽에는 “孤雲崔先生 杖屦之所(고운최선생 장구지소: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문창대라 했다.
그러나 「진양지」의 증보 과정에서 실증(實證)없이 보강된 점, 바위 각자 또한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문헌에서의 문창대는 법계사에서 마주 보이는 지금의 세존봉(世尊峰:1,373.9m)이
문창대였음을 알 수 있다.
송병순도 <유방장록>에서 벽계암(법계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저 앞의 봉우리 정상이 바로 문창대입니다. 그런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갈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어 법계사 앞 봉우리 정상이 문장대임을 말하고 있다.
문창대(?)에서 바라본 세존봉(世尊峰:1,373.9m)이 나중에 밝혀진 문창대이다.
문창대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기록은 유람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문창대'라는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으로 그는 일흔이 넘은 1617년에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겼는데,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며 문창대를 언급했다.
이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조선 선비들이 문창대를 유람록에 기록하면서
문창대는 이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성여신보다 앞선 시기인 1489년 김일손도 문창대를 다녀갔다.
그러나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세존암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임을 알 수 있다.
문창대로 잘못 알려진 너럭바위를 내려서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나오고 계단을
내려서서 좌측으로 살짝 발걸음을 옮기니 2014년도 태풍으로 무너진 일주문이
새로 복원된 법계사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법계사 일주문(法界寺:1,450m:13:20~45)
법계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에 의해 분풀이로 불탔다고 한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1405년 조선 태종 5년 을유년에 벽계 정심선사께서 중창한 뒤 수도처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사찰로 그 후 임진왜란과 1910년 한일합방 때 또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무인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동안 초라한 초옥으로 3층 석탑을
지켜 오다 1981년 신유년에 조재련, 조재화, 조재영 불자와 신도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계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 남부군 이현상부대의 아지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법계사는 예전 벽계암으로도 불렸다. 조선 초기의 승려 벽계 정심(생몰연대 미상)이 중창을 해서
절 이름도 그렇게 붙은 것이다. 벽계 정심은 누구인가. 흔히 우리나라 불교사를 이야기할 때
그 법맥을 고려 후기 태고 보우 이래로 환암 혼수, 구곡 각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본다.
* 하늘아래 첫 절집이라는 법계사...허나 실제로는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높은곳에 있는 절이다.
첫째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있는 묘향암이 해발 1.500m로 가장 높고, 두번째는 태백산 천재단
아래에 있는 만경사가 해발 1,470m, 세번째가 이곳 법계사(1,450m)이다.
일주문 옆에는 천왕봉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일주문 앞에서 절집에 들어서기 전에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법계사로 올라간다.
법계사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서기 500년경에 창건한 가람으로 고찰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 법계사, 대원사가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공통점은 돌탑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남원 황산대첩에서 패배한 왜구 집단,
즉 소년장수 아지발도의 군대가 이성계에게 패배하고 난 뒤에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법계사에 올라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왜구들이 법계사에 천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과 일본의 민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속설이 있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
이 왜구의 패잔병들이 지리산 심장부까지 들어와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구들이 법계사도 불살랐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활동하였던 벽계정심(碧溪淨心)
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서산대사가 벽송지엄의 맥이니까 조선 선불교의 맨 앞에 벽계정심이 있다.
앞서 3번의 대간 종주...산악회를 따라서 올때는 중산리에서 노고단, 노고단에서 중산리의
지리 능선을 한번에 종주하는 바람에 법계사를 들리지 않았는데 오늘이야 나홀로 산행이니
부담없이 법계사 경내로 들어간다.
비탈길을 올라서니 종무소가 나오고 맞은편에는일제강점기에 지리산의 정기를 끊어려고
박아놨던 쇠말뚝을 다시 뽑아서 전시해놨다...종무소 안쪽으로 들어서니 주지 스님께서
출타를 하려다가 어서 오셔요 하게 반갑게 맞이한다.
종무소에 들려서 20,000원을 내고 기와한장을 불사하고나니 기와불사를 담당하는 보살님이
점심공양을 했냐고 묻길래 아직 못했다고 했더니만 공양시간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오늘 祭를 지낸는지 떡에다 커피를 한 잔 타주면서 드시라고 한다...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터라 떡을 많이 먹었더니만 속이 든든하다...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적멸보궁으로 올라간다
법계사의 주전(主殿)인 적멸보궁(寂滅寶宮)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향해 예배드리는 법당을 적멸보궁이라하는데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서기544)에 연기조사께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인도에서
모셔와 봉안한 유서 깊은 사찰로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셨다는 것은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상주(常住)하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 우리나라에는 5대적멸보궁이 있는데 이는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신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께서 중국의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가지고 귀국한 후 다섯곳의 명당 길지에 세운 보궁으로 5대
적멸보궁은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이다.
지리산 법계사 적멸보궁 주련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만대의 법왕이며 삼계주인 부처님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쌍림에서 열반한 지 얼마나 흘렀는가!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 석가세존 진신사리 지금 여기 모셨나니
普使羣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중생들로 하여금 예배 쉬지 않게 하리.
적멸보궁 안쪽으로 가진 않고 밖에서 선 채로 예를 올린 다음에 3층 석탑 방향으로 향한다.
삼층석탑 오르는 길 우측 바위 아래에 조성된 지가 얼마안된 듯한 삼신할머니상에 기도객들이 보인다
3층 석탑을 바라보면서 극락전으로 향하는데 그 앞에 암각된 글씨가 많은 집채만한 바위가 보인다
지구에서 310광년 떨어져 있는 카노푸스(Canopus)라는 별을 노인성이라고 부르는데 노인성은
일명 남극성(南極星)이라고도 불리며, 하늘에서 태양을 제외하면 시리우스에 이어 두번째로 밝은 별이다.
노인성 별을 잘 볼수 있는 곳으로는 남해 보리암 , 제주 존자암 , 그리고 지리산 법계사에서 볼 수
있다고 하며 전쟁이 나거나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면 보이지 않다가 평화가 찾아오면 보인다고 한다.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하늘에서 태양을 제외하면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은 빛을 내는 별임에도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권 국가에서는 보기가 어렵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성좌로 이별을 본 사람은 오래 산다고 믿었는데, 노인성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옆의 커다란 바위에는 낙서처럼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老人星照(노인성조)’ ‘北斗七星照(북두칠성조)’ ‘三台星照(삼태성조)’ ‘紫微星照(자미성조)’ 등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고 ‘朴治映(박치영)’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좌우와 밑에 새겨져 있다.
새긴 형태는 엉성하고 낙서 같지만 아마도 법계사가 불타고 초막 형태로 있을 때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도꾼의 흔적으로 보인다. 노인성, 북두칠성, 삼태성, 자미성이 자기를 비춰주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비록 형식은 삼류 같지만 민초들 저변의 밑바닥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던 별신앙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법계사 여기저기 바위에 낙서처럼 새겨져 있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朴正民(박정민), 朴治映(박치영)
등의 이름은 법계사가 빨치산 토벌로 불에 타서 무주공산 상태로 있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후반쯤 사이에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계사 산신각
지리산이 민족의 영산이고 천왕할미의 전설이 있어서인지...
산신각에는 산신이 아닌 천왕할미라는 여자 산신령을 모시고 있다
법계사 3층석탑(보물 제473호)
이 석탑은 산신각 앞에 있는 높이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이형석탑이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는 몸돌을 얹었다
자연 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하는 예는 신라 이래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하부 기단부를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으며 지붕돌은 두텁고 지붕 주름은 각층이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여지는 포탄형의 석재가 상륜부에 얹혀져 있다
전체적인 수법과 만들어진 수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5m이다
3층석탑 안내판 좌측에는 법계사 극락전이 있고 극락전 북서쪽 윗쪽에 범종각이 있다.
좀 특이한 가람배치이다...대체적으로 범종각이나 불전사물(佛殿四物)은 가람의 주전(主殿)앞에
있는데 이곳은 가람의 맨 윗쪽에 범종각이 있는게 특이하다...너무 위에 있어서 올라가지 않았다
법계사 범종각의 범종의 무게가 1080관이라고 한다.
108배, 108염주, 108번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108이라는 숫자는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숫자 중 하나로 108번뇌는, 중생들은 어떤 사물을 여섯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접할 때
한결같지 못하고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이렇게 세 가지로 분별함에서 오는 번뇌(6x3=18)와,
여섯 감각기관이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으로 분별함에서 오는 번뇌(6x3=18)를
합해 36가지 번뇌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 36가지의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지니(36번뇌 x 3세대) 108번뇌가 된다.
* 불전사물(佛殿四物)이란 목어(木魚) 운판(雲板) 법고(法鼓) 범종(梵鐘)을 말한다.
극락전 주련
願共法界諸衆生(원공법계제중생) 원하옵건데 법계있는 모든중생들이
同入彌陀大願海(동입미타대원해) 모두함께 아미타불 대원해에 들어가서
盡未來際度衆生(진미래제도중생) 미래제가 다하도록 무량중생 제도하며
自他一時成佛道(자타일시성불도) 너나없이 모두함께 성불의도 이루리다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
문창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람록으로는 1902년 2월부터 3월까지 40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김회석(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과 송병순(1839~1912)의 <유방장록>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유람록에서 문창대의 험함과 돌우물의 기이함, 최치원의 활쏘기 행적 등을 묘사했다.
그중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을 보자.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
김회석의 글처럼 예전에는 문창대를 최치원이 활을 쏘았다고 해서 '시궁대'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고운대'로 불렀다가 나중에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법계사 주위를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조금전에 떡과 커피를 준 종무소 보살과
인사를 나눈후에 법계사를 빠져나와 로타리 대피소로 내려간다
로타리대피소(1,435m:13:46)
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으로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수용인원 60명이란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의 영향인지 대피소 문은 굳게 닫혀있고 로타리 대피소 좌측으로는 순두류로
내려가는 등로가 있다
로타리대피소 이정표
순두류로 내려가는 등로는 완만하나 중산리로 향하는 거리는 훨씬 멀다.
거기다가 경남환경교육 연구원 입구에서 버스를 타야하는데 시간이
들쑥날쑥하여 경사가 급하고 힘이 들지만 그냥 칼바위 방향으로 향한다
순두류는 이름 그대로 백두대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렀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란 의미의 지리산 옛 지명중 하나이다
순두류는 해발 900m의 지대에 경사 10도에 전개된 3만여평의 평지인데
두류산의 지세가 순하게 흘러서 산 속의 평원을 이룬 곳으로, 가파른 연릉이
사방을 감싸않은 특이한 지세로 한때는 인삼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헬기장(13:50)
암릉(13:52)
제도권 등로를 벗어나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면 문창대라 부르는 세존봉으로
오르는 등로이지만 비탐구간인지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노루오줌꽃...왜 하필이면 노루오줌이라니
노루의 오줌냄새가 난다하여 노루오줌이라는 얘기도 있고
노루가 물 마시러 오는 물가에 핀다하여 노루오줌라는데 어느게 맞는지 모르겠다
홍수 예.경보 시스템(14:00)
중산리까지는 급경사에다 계속되는 돌계단이라 도가니에 엄청난 무리가 온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황소걸음으로 중산리 방향으로 내려가니 망바위 이정표가 나온다
망바위 이정표
망바위(1,177m:14:10))
망바위는 1489년 4월에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랐던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에는
세존암(世尊巖)이라 기록되어 있고, 해방 전후에 이곳 지리산에 은거해 있던
빨치산들이 이 바위 위에서 망을 봤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1464~1498)은 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파의 중앙진출이 활발했을 때
언론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주로 언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를 하고 주서·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쉼터(14:16)
등로에서 바라본 중산리에는 천상병 시인의 詩碑가 있는 곳이다
고인이 생전에 이상향이라 여겼던 지리산 천왕봉을
건강이 나빠서 오르지 못했지만 늘 동경했던 곳이 천왕봉이었단다
歸天 /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산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장터목 대피소 갈림길(14:40)
우측으로는 장터목대피소로 가는 길이다...예전에 장터목으로 올라 천왕봉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장터목 대피소 갈림길에 내려오니 넓은 공터에 심장안전쉼터라는 곳이 나오는데
천왕봉에서 내려오면서 3번째 만나는 심장안전쉼터라는 곳이다.
예전엔 없었던 쉼터였는데 그만큼 심장마비로 인한 안전사고가 많다는 얘기인가?...
하기사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고도를 1,300m이상을 올려야 하는 급경사이니 이해가 된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급경사는 어느 정도 내려온 듯 싶다...사진 한 컷을 찍고 가려는데
진주에서 오셨다는 50대 중.후반쯤 부부와 같이 중산리 방향으로 가면서 동행을 한다.
자기들은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서 원점회귀를 하는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새벽에서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세석산장을 찍고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중이라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난 오늘 수도없이 왔던 지리산 산행을 가장 편하게 걸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중산리 주차장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내려간다
출렁다리(14:42)
얼쭉 급경사는 다 내려온 온 모양이다...큰 고도차 없이 칼바위 이정표가 나온다
칼바위(劍巖:800m:14:45)
칼날처럼 뾰족하게 생긴 바위는 원래 하나였는데 벼락을 맞아 갈라졌다고 한다
칼바위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임금에 오른 직후 그 목숨을 노리는 자의 은신처가
이곳이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이성계는 부하에게 그 목을 베어오라 명령을 하였다
이 성계의 부하는 선비를 발견하고 칼로 쳤더니 갈라져 유암폭포 아래 ‘홈바위’ 로
그 칼이 부러지며 2km 위인 여기에 날아와 꽂혀 지금의 '칼바위'에 꽂혔다고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칼바위를 지나니 장터목대피소 사면에서 시작되어 유암폭포, 법천폭포를 거치면서
내려온 물줄기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생각같아서는 계곡으로 내려가서 발을 담그고
싶지만 오늘은 그 정도의 더위는 아니라 그냥 중산리로 향한다
홍수예.경보시스템(15:02)
산을 거의 다 내려온 모양이다...날머리에는 통천길이란 아치로 만든 조형물이 보이고
예전에 중산리 야영장이 조성된 자리에는 뭘 하려는지 포크레인으로 땅을 몽땅 뒤집어놨다.
중산리 야영장(15:10)
이제 지리산 산행은 완전히 끝났고 좌측으로는 순두류를 거쳐서 법계사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이고 우측에는 식수대와 화장실이 있는데 예전에 있었던 宇天선생의
추모비를 찾을길이 없다...후배 현오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니 식수대 건너편
공터 한구석에 설치되어 있는데 지리산 산신령이라 불렸던 宇天선생을 국공파들이
널리 홀대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씁쓸하다.
宇天 許萬洙 선생 추모비(04:13)
지리산 산신령으로 알려진 진주출신의 우천선생은 한국동란 이후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했으며
숱한 사람을 구조하고 안내했던 산악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분이 1976년 6월에 세석고원의 철쭉을 뒤로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당시 지인들에게 “이제 지리산으로 영원히 들어가니 한달내 오지 않으면 내 소지품을
불태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가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의 어느 곳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아는 이가 없다...이후 많은이들은 그를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렀다.
법계교에서 바라본 중산리 계곡
산청군 시천면(矢川面)은 낙동강의 발원지 강 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하여
矢川(화살 시(矢),내천(川))으로 불리며 물이 빠르고 계곡이 깊고 주변경관이 산자수명하여
유래한 지명이고 중산리(中山里)는 이름 그대로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중산리는 조선조 개국 당시 패망한 고려의 지지한 세력들의 은둔지였던 탓에 조선의 탄압을
받았던 곳이고 조선시대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기록 속 중산리는 계단식 논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묘사된 곳이다
법계교(法界橋:15:15)
법계를 벗어나 속계(俗界)르 나온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15:18)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를 빠져나오니 식당가에는 발디딜 틈조차 없을정도로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다
아무리 코로나19가 해제되었다고는 하나 기저환자인 나로서는 조금 찜찜하여 그냥 지나친다.
순두류가는 버스 시간표
법계사로 가는 버스가 있는 곳에서 주차장으로 가기위해 두리번거리니 조금전에
만났던 진주의 부부를 다시 만난다...선생님! 다시 만났네요 하면서 어디로 가실건가 묻는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원지가는 버스를 타고 원지에서 서울로 가려고 한다고 하니
자기들이 원지까지 모셔드리겠다고 한다...같이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승용차를 타고
원지버스정류장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산에 대한 얘기, 고향에 관한 얘기...
내 고향이 의령이라고 하니, 자기들도 원래 고향은 합천이라고 하면서 더 살갑게 대한다.
원지터미널에 내려주면서 잘 가시라고 하면서 음료수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원지버스정류소(16:05)
진주에 사신다는 貴人의 도움으로 원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고맙다는 예의를 표하려고 음료수값을 드리니 극구 사양하면서 쏜살같이
가버리는 바람에 기록도 못 남겼다...원지터미널 매표소에 가서 버스표를
예매하니 다 매진되고 지금 이 시간에 19시에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밖에 없다.
하는 수 없이 이 버스표를 예매하고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마치고
깔끔하게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다시 원지정류소로 향한다
원지 삼거리
예전에 이곳에서 내고향 의령으로 가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이쪽으로
안 다니고, 고향을 간지도 오래되었고, 예전처럼 고향에 대한 애정도 식어 버렸다.
원지는 다복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안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원지 또는 원목정이라 한다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에 있는 원지는 신안면 소재지가 있고 진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곳에서 지리산방향, 진주, 함양, 거창으로 가는
교통량이 많고 경호강 건너편인 단성면에는 고려시대 원나라를 갔다가 목화씨를
가져와서 심었다는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와 문익점을 기리는 도천서원이 있고,
그 근처에는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성철 큰스님의 생가가 있다...지금은 큰 스님의 생가가
겁외사(劫外寺)라는 절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배도 부르겠다...갈때도 없어서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하는데
진주에서 출발하여 17시 20분에 원지를 통과한 후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들어온다
버스 문이 열리고 이곳에서 서너명의 승객이 타는데 기사에게 19시 버스표인데 자리 있냐고
물으니 자리가 하나 남았다고 하길래 19시 버스표로 탈 수 있냐고 하니까 탈 수 있다고
하면서 타라고 한다...덕분에 2시간 먼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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