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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22구간-갈령삼거리에서 문장대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22. 7. 11.

山은 世俗을 떠나지 않았는데 世俗 山을 떠나려 하는구나

 

☞ 산행일자: 2022년 07월 10일

☞ 산행날씨: 흐리고 습한 날씨에 바람한 점없는 최악의 산행조건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6.6km(들머리3.4km, 날머리1.3km)포함 / 9시간 2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화북탐방지원센터-오송교-반야교-성불사입구

                     오송폭포-쉴바위-문장대 광장-문장대-다시 문장대 광장-암봉-문수봉

                     청법대 안부-신선대-경업대(법주사)갈림길-입석대-암봉-1,012.4m봉

                      안부-상고외석문-비로봉-두껍등 바위-도룡농 바위-배석대(상고암)갈림길

                     천왕석문-돌탑-상고암(법주사)갈림길-장각동 갈림길(헬기장)-조망바위

                     천왕봉-한남.금북정맥 분기점(대목재)-쉼터-도화리 고개-암봉-묘지

                     조망바위-암봉-769m봉-무명봉-조망바위-안부-쉼터-안부-703.2m봉

                     안부-무명봉-안부-폐헬기장-740m봉-725.8m봉-667.5m봉-안부

                     636m봉-657m봉-안부-641.5m봉-피앗재-안부-696m봉-안부-800.6m봉

                    안부-형제봉-안부-갈령삼거리-조망바위-암봉-코끼리 바위-조망바위

                    헬기장-갈령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남면, 화북면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계속되는 폭염으로 인한 탓인지 체력이 저하되고 등로가 잘 안 보이는 지맥길 산행은

집에서도 걱정하고 나 역시 개고생하는게 싫어서 7~8월의 지맥 산행은 잠깐 접고

대간길을 걷기로 한다.

요즘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몸뚱아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는 느낌이다.

 

지난주에는 예전에 가끔 다녔던 산악회를 따라서 문경구간 대간길을 한바리했는데

이번주는 대간2번, 호남정맥을 했던 산악회를 따라서 무박으로 대간길을 나선다.

다행히도 속리산 구간은 오리지널 대간팀과 이벤트 팀으로 나누는데 어둠속 산행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범여는 이벤트팀을 따라갔다가 내가 원하는 구간까지 대간길을

걷기로 한다.

 

걸음이 엄청나게 빠른 선두팀들은 늘재에서 출발을 하고, 이벤트팀들은 화북분소에서

출발을 한다...늘재에서 문장대까지는 8.5여km이다...하지만 화북분소 팀들은 문장대까지

3.4여km의 접속구간이 있으니 5km정도의 갭이 있고, 밤티재에서 문장대까지는 비탐구간인데다

암릉구간이라 속력을 낼 수 없으니 선두팀에게 따라 잡히더라고 일행들에게는 민폐를

최소할 수 있을것 같아서 무박 산행을 따라 나선다. 

 

거기다가 2시간여를 걸어서 문장대로 올라서면 날이 밝을 것이고 그러면 접속구간이 아닌

대간길은 밝은 날씨에 걸으니 충분히 내가 원하는 산행이 되는 셈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속리산 국립공원 화북분소(03:05)

밤 11시 30분에 양재역을 출발한 버스는 여러군데를 들려 산꾼들을 싣고 속리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코스가 좋아서 그런지 산악회 버스는 滿車인지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려 하는데 오늘따라서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 2시 30분경에 늘재 초입에 도착하여 선두팀을 내려주고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서 화북분소로 향한다.

 

예전에 2번이나 이곳에서 무박으로 걸었던 늘재...비탐구간이라 동료들은 산에서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숲속으로 사라진다...나도 저짓거리를 해봤지...어둠속이긴 해도 따라가고

싶지만 내가가면 후배들에게 밉상으로 찍히고 짐만 될것 같아서 포기한다.

 

되돌아 나온 버스는 가로등만 졸고있는 장암리 마을회관을 지나서 속리산 화북분소로 향한다

조금을 달리다가 속리산 국립공원 화북분소 앞에있는 대형 주차장에서 차를 멈춘다.

이곳에서 소형주차장까지는 걸어서는 20분이상 걸리는 곳이다.

다행히 차단기는 열려있어 버스기사에게 사정하여 소형주차장이 있는 탐방지원센터로 향한다 

화북탐방지원센터(03:13)

산행을 시작하다(03:15)

이곳에서 이벤트팀이라 불리는 10여명의 동료 산꾼들이 산행 준비를 하는 동안에 

나홀로 헤드렌턴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체 먼저 길을 나선다...왜냐구요.

좌측의 폐가 없는 관계로 초반에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라

동료들에게 추한 모습은 보이기가 싫어서... 

오송교(五松橋:03:18)

반야교(般若橋:03:21)

어둠속에 반야교를 지나니 성불사 입구와 오송폭포 갈림길이 나온다

성불사는 못 가더라도 오송폭포는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100m 정도 떨어진 폭포로 향한다 

오송폭포(03:22)

안내판을 지나서 로프를 넘어 오송폭포에 도착하니 가뭄 탓인지 폭포처럼 안보인다

거기다가 어둠속에 똑닥이 카메라의 후레쉬가 약하여 폭포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송폭포(五松瀑布)...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2021년 6월6일)

속리산 신선대에서 발원한 오송폭포는 시어동 오송정골 어림대 안에 있는 폭포로

성불사의 동쪽 아래에 있으며 높이는 7m 정도되는데 5층 대로 되었다.

밑에 학이 서식하였다는 학소대가 있어서 경치가 좋고 세조가 올랐다는 어림대(御臨臺)가 있다.

옛적에는 오른쪽으로 오송정(五松亭)이 있었고, 지금도 그 터에 오송이 항상 푸르다 하여

오송폭포라 한다고 하며 이 곳의 칡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데, 세조가 문장대에 오르기 위하여

이 산을 오르다가 칡에 걸려 넘어지면서 호령하여 나무라자 그 때부터 땅으로 뻗지 않고

나무로 오른다고 한다.

다시 성불사 입구 되돌아와서 문장대로 향하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어둠속에 길을 걷는다.

내가 오송폭포를 갔다올 동안 동료 산꾼들은 먼저 가버렸는지 흔적조차 없다.

야심한 새벽의 계곡길이라 그런지 날씨가 그리 덥지는 않으나 높은 습도에 바람한 점 없다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하는듯 잠깐 사이에 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말했지

머리 좋은자가 노력하는 자를 이길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우짜겠노...

佛家에서는 布行도 수행의 한 방법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도를 높일수록 숨소리는 가팔라진다.

적막한 고요속에 돌계단에 부딪히는 범여의 스틱소리만 여명을 깨우려는 듯

요란하게만 들린다...잠시후에 저 윗쪽에서 헤드렌턴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쉴바위(708m:04:10)

어둠속에 쉴바위를 만난다...‘쉴’이란 ‘쉬어가다’의 경상도 방언으로 쉬어가는

바위라는 뜻이다...이곳에서 조금전에 보인 불빛이 보였던 등산객들을 만나는데

우리 일행은 아니고 젊은 친구 10여명이 모여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쉴바위가 문장대와 주차장의 중간정도 되는 거리이다

어둠속에 앙증맞은 다리를 지나 문장대로 향하는데 우리 일행을

여기서 만나는데 후배들이 내가 먼저 간 줄만 알았던 모양이다.

오늘도 후배 산꾼이 건네준 흑사탕 한 알을 얻어 먹는다...고맙소...복받을기요

난 맨날 후배들에게 신세만 지니 밉상 아니...진상으로 찍힐까 두렵다.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했는데...실천이 안되니 말이다

근처에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가뭄탓인지 말라 버렸다.

편안한 등로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여명이 걷히면서 주위가 밝아진다

문장대 광장(1,006m:05:00)

문장대 광장에는 문장대 거점검문소라는 초소가 있고 그 뒷쪽 봉우리가

이동통신탑이 있는 1,016.2m봉우리가 보인다... 엄연한 대간길에 속해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 비탐구간이다

광장 의자에 베낭을 벗어놓고 문장대로 향한다...어차피 이곳으로 다시와야 하니까.

문장대 정상에 도착한다.

멋진 일출을 내심 꿈꾸었는데 짙은 雲霧로 인하여 범여의 꿈은 산산 조각으로 변한다.

아마도 범여의 德이 모자라는 모양이다...문장대 주변에는 580여종의 동물과 670여종의

식물이 서식한다고 하며 특히 희귀식물인 백색 진달래를 비롯한 주목과 금낭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문장대(文藏臺:1,031.7m:05:08~27)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에서 천왕봉,

비로봉에 이어서 3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흰 구름이 항상 정상에 걸려 있다고 해서

운장대(雲藏臺)라고도 불렀으며 평생에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을 간다고 했다는 설이 있다

 

운장대라 불리운 문장대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복전암(福田庵)에서 감로수(甘露水)

마시며 요양을 하고 있을때 꿈속에서 월광태자(月光太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현몽하여 운장대에 올랐더니 “삼강오륜(三講五倫)”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로 불리웠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3천명이 앉을만하다고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 월광태자(月光太子:522 ~ 몰년 미상)는 이뇌왕과 그의 아내 양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대가야의 10대이자 마지막 국왕으로 562년 신라군의 의해 대가야는 멸망하고 대가야를

정벌한 신라는 대가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월광 태자를 대가야의 임금으로 즉위시켰지만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자 폐위시켰고, 이후 월광 태자는 승려가 되어 지금의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

가야산  아래의 월광사라는 작은 절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내심 멋진 일출을 꿈꾸면서 문장대에 올랐지만 一場春夢이 돼버렸다.

철계단을 따라서 문장대 정상의 너럭바위에 오르니 동료산꾼들이 반겨준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山水들이 즐비해 俗離 36景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 第一景이 이곳 문장대로 옛부터 시인, 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럭셔리한 후배산꾼들...늘 부럽기만 하오

아끼는 후배산꾼 시화님...3년후 162지맥 졸업때도 멋진 글 부탁하오.

그땐 不狂不及이 아닌 더 멋진 글로써 ...

2015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 3일동안 비박을 하면서 충북 알프스를
종주하며 걸었던 관음봉을 배경으로 하늘마음 회장님이 멋진 사진 한장을 남겨준다.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습관처럼 인물로 인증샷은 잘 안남기는데

북동쪽으로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극찬했던 청화산은 뭣이 그리도 수줍은지

운무에 갇혀 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우측으로 시루봉, 도장산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 십승지 능선...지맥길을 끝내고 난 후, 영주 금계동 십승지를 끝내고 멈춰버린 

나머지 구간을 걸어볼 예정인 저 능선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라나...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관음봉(峯:985m)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속리산의 아홉개

봉우리중의 하나로 속리산의 장소적 의미와 경승에 대하여 수록한 사료들이 적지않으나

자세한 기록은 별로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명산은 속리산이다. 신라 때에는 속리악()으로 일컫고,

중사()로 하였다."라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도 "속리산은 쑥돌(화강암)로 되었는데 문장대 ·천왕봉 ·비로봉 ·

관음봉 · 묘봉들이 기이한 봉우리와 수목이 많아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므로 소금강()이라

하며, 법주사()와 고적이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로부터 유명한 산이다.

관음(觀音)이란 관세음보살을 말하며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

보살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100L짜리 비박 베낭을 메고 무식하게 그때가 범여의 봄날이었는데 이제는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으니 가는 세월을 막을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문장대에서 바라본 칠형제봉의 모습

 

속리산이라는 산명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藪石記)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속리산의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 오다가 속리산으로 바뀌었다

문장대 정상에 바라본 칠형제 능선과 산수유릿지

속리산국립공원 화북 공원 관리소에서 청법대로 연결된 능선으로

1995년 청주 청심산악회에서 개척하였는데 개척당시 9피치(pitch)를 개척하던

김 선주씨가 추락하여 사망한 곳으로 故 김선주씨를 기리는 뜻에서

9pitch 40m 벽을 선주벽이라 명명했다하며 그 때가 산수유가 필 무렵이어서

산수유릿지라고 부른단다

속리산의 본래의 지명은 산 봉우리가 아홉이라 구봉산(九峰山)이었으나 신라시대부터

“세속을 멀리한 산” 이라 하여 속리산(俗離山)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산으로 많은 산봉우리가

기묘하고 산세가 웅장하며 기암이 구름 위에 솟아올라 마치 옥부용(玉芙蓉)과 같이 아름다워

옛날부터 ‘작은 금강산’ 이라 불리우고 있다.


속리산은 여덟이란 숫자와 인연이 깊다.

산 이름 역시 속리산을 포함해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구봉산(九峰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鋼山), 자하산(紫霞山) 등으로 불리웠다. 연봉이 또 여덟 개 있으니

1058m의 천왕봉(天王峰)을 비롯하여 바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顯峰),

관음봉(觀音峰), 묘봉(妙峰)과 수정봉(水晶峰)이 있다.


또한 대가 여덟이니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신선대(神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이고 돌문이 여덟 개 있으니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내석문(上庫內石門),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이 있다.

이벤트팀으로 온 동료들은 문장대 정상에 퍼질러 앉아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밍기적 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와는 산행 목표가 다른듯하여 난 서둘러

문장대를 내려와서 서둘러 길을 떠난다

다시 문장대 광장(1,006m:05:32)

이곳에서 벗어논 베낭을 다시메고 길을 떠난다

노방초 / 정연복 

 

길가에 

아무렇게난 난 풀

 

남몰래 피었다가

또  아무도 모르게 진다

 

지상의 한 귀퉁이에

생겨나 잠시 있다가

 

어느날 조용히

스러질 나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는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별로 다를 바 없다

 

 

* 노방초(草)란 이름없는 들꽃을 말하며 길가에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흔히 기생(妓生)’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좌측의 편안한 사면길을 버리고 암봉으로 올라가는데 아마도 지맥길을

걷던 습관인지도 모르겠다...모든 맥길은 능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에...

암봉(05:33)

암봉에서 바라본 문장대의 모습

암봉에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사면길을 만나고 산죽길을 따라 대간길을 이어간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 나희덕님의 시 속리산에서 -

천왕봉으로 향하는 편안한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문수봉을 만나러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릉으로 올라간다

문수봉(文殊峰:1,037m:05:40)

문수봉은 그저 밋밋한 봉우리로 트랭글앱과 오룩스앱에서는 표시조차 안되어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 8봉중의 하나인 문수봉은 예전엔 사자봉으로 불렸으며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녔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우리나라 명산대찰의 지명중에 불교를 상징하는 지명이

많은데 이곳 속리산 역시 예외가 아니다... 비로봉, 천왕봉, 문수봉, 관음봉 등...그런데 문수봉 정상

위로는 오를수도 없고 가는 방법도 없으니 홀대받는 느낌이다

하산길에서 뒤볼아본 문수봉 정상의 모습

문수봉 능선 아래로 내려서니 철난간이 설치된 등로를 만나고 구름속의 해는 벌써 중천에 있다.

앞에 보이는 청법대를 바라보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운무속에 아침해는 벌써 중천에 떠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바람한 점 없는 높은 습도 때문인지 땀이 

주체하지 못할정도로 옷을 적시기 시작하는데 오르지 못할 청법대가 

환상적인 모습으로 산꾼 범여를 반긴다

청법대(聽法臺:1,020.9m)는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座臺)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을 외우는 소리에 제 정신을 차렸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오를수가 없으며 샛길로

돌아 우뚝 선 바위로 오를수가 있다고 하는데 갈 길이 멀어서 입맛만 다시고 신선대로 향한다

청법대 안부(05:50)

청법대를 오르지 못하고 산죽길을 따라서 신선대로 향하는데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수줍은듯 바위틈에 숨은 산오이풀도 꽃을 피울 준비 작업중인 모양이다

가야할 천왕봉이 조금씩 시야에 가까워 오는 느낌이다

철계단의 암릉구간 아래로 내려간다

가날픈 몸매인 꿩의 다리...너는 왜 그리도 수줍음이 많으냐?

신선대로 향하는 돌계단에서 뒤돌아본 청법대의 모습

신선대로 향하는 돌계단...심장에 무리를 주지않기 위해서 牛步 걸음으로 걷는다

돌계단으로 올라서 개인이 운영하는 신선대 주막에 도착한다.

신선대 주막으로 좌측으로 등로가 보이는데 이 길로가면 성불사쪽 오송폭포로 가는 길이다

신선대(神仙臺:1,028.8m:06:10~40)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암릉으로 주막이 있다.

 

옛날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서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며 춤을추고 있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을 달려갈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고있는 봉우리를 신선대(神仙臺)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대 주막에 걸려있는 대간꾼들의 흔적

주막에 도착하니 쥔장인듯한 남자가 나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오늘 몇명이나 왔냐고 하길래 40명정도 왔다고 하니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주막에 걸려있는 신선대 표지판

이곳에서 쥔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홀로 밥상을 편다.

맨날 식사라봐야 빵조가리에다 쥬스 한잔인데 오랫만에 밥을 먹어본다.

15분쯤 지나니 동료들이 도착하여 동동주 4통에 부침개 4개를 시키는데

주막 쥔장은 이른 아침에 양넘 지갑줏은 기분일게다.

후배산꾼들의 산상만찬

도데체 산에 온건지, 먹으로 온 것지 독립군 범여의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불가.

난 여기에 낑기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가 먼저 천왕봉으로 향한다.

럭셔리한 명품 산행이란 이런건가요?...한없이 부럽소이다

얼마전에 비가온 탓인지 등로는 젖어있어 미끄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무심코 걷다가보니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는 경업대 갈림길에 도착한다

경업대(慶業臺) 갈림길(1.014m:06:43)

산죽길로 조금을 더 내려오니 우측으로 경업대와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속리산 8臺중의 하나인 경업대의 지명의 유래는 임 경업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했는 곳이라 한다.

 

* 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 활약한 명장 임경업(1594∼1646) 장군은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급제한 후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백마산성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큰 공을

많이 세웠으나 청을 반대하던 장군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반대파에 의한 모함으로 희생되었다.

속리산은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不一致)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등로에는 토사 유출을 막기위해 야자수 매트를 깔아놓아 걷기는 편하지만

행여 자연적인 순리에 역행하는 짓거리는 아닌지 모르겠다.

잠시후에 지나게 될 비로봉 너머로 천왕봉은 雲霧를 이고 있어 흐릿하게 보인다

약간 오르막을 올랐다가 내리막에 내려선 다음에 등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올라간다

입석대 가는길

입석대(立石臺:1,010.4m:06:58)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임경업 장군이 7년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조선조 인조(16대임금)때 임경업 장군이 6년동안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정도 단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수가 없다.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의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장군은 정신을 차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주 보이는 석벽위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의 비석처럼 세워 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들린다.

 

장군은 경업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세우려 했으나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장군은 그의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수련하여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해서 입석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입석대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희미한 산죽길을 지나 좁은 개구멍(?)을 통과한다

산죽길을 벗어나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제도권 등로에 복귀하여 천왕봉으로 향한다

노루오줌이 범여에게 뭔 할말이 있는지 길을 막는구나.

이보시게!...이젠 범여는 너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이빨빠진 호랑이 신세라네.

철계단을 따라서 빡세게 올라서니 멋진 암봉이 나오는다

암봉(07:10)

암봉을 지난 다음에 다시 등로를 벗어나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1,012.4m봉 가는 길

1,012.4m봉(07:14)

암봉인 1,012.4m봉 정상에는 원추리가 더운 날씨 탓인지 축 처진 모습이 안타깝다.

지금 덕유산의 덕유평전에는 원추리가 지천으로 피어있을텐데...갈 시간이 없구나.

오라는덴 없어도 갈 곳이 많은 범여는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다

문장대에서 법주사로 내려가는 계곡길도 雲霧로 인해 멋진 仙景은 一場春夢이다

1,012.4m봉 정상에서 등로로 되돌아와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에 내려선 다음에 다시 물기에 젖어 상당히 미끄러운 나무계단을 올라간다

안부(07:18)

신선대를 지나면서부터는 등로에서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아니면 더운 날씨라서 그런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속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문장대만 偏愛한단 말인가.

명색이 속리산의 주 능선임도 불구하고 천왕봉길은 이래저래 홀대받는 느낌이다.

庶子의 길인 이런 호젓하고 조용한 등로는 독립군인 범여가 좋아하는 길이기도 하다

틈새바위를 통과한다...아니 문바위랄까?

그거야 산꾼들마다 생각이 다르니 어떻게 부르던간에 엿장수 맘 아닌가...

안부로 내려섰다가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데크목 계단에서 바라본 장각동으로 가는 능선은 五里霧中이다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07:22)

고릴라를 닮은 이 바위는 자세히보면 어미와 새끼 고릴라 두마리가 나란히 앉아

경관을 감상하는듯한 모습인데 속리산 8석문의 하나인 상고외석문이라고 한다 

상고외석문을 지나면서 등로 좌측에는 비로자나불을 연상케 하는

비로봉이 있으나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알 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비로봉(毘盧峰;1,031.1m:07:24))

보은군 속리산면과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 안에서 좌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췄고 이에 율사께서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햋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율사께서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에 그곳을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께서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진표율사께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모든것을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로봉 정상엔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이곳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갈 길이 멀어 그냥 통과한다

속리산에는 오르지 못할 봉우리가 많다... 청법대, 입석대, 비로봉도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서 걷어야 하는데 속리산국립공원 측에서 한번은 생각해야 부분이 아닐까.

꿩의다리는 6~8월 경 우리나라 산 어디서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화 중의 하나로

양지 바른 풀밭이나 반그늘 숲속에서 50~100센티미터 높이로 자라며 이웃 식물보다는

웃자라서 쉽게 눈에 띄는 꽃이다

 

미나리아제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지고 가지 끝에 흰색의

작은 꽃송이가 무리지어 여러 송이 달려서 산방화서(繖房花序)를 이루며 꽃의 생김새는 우리가

보통 보아온 꽃과는 차이가 많다.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이 통상적으로 갖고 있는 꽃잎이나 꽃받침잎이

보이지 않으며 가늘고 긴 실 같은 화사(花絲)가 수평으로 방사상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화사가 바로 수술이고 암술도 소수 포함되어 있다.

 

이 꽃은 원래 꽃잎이 없으며 꽃잎 역할을 대신하는 꽃받침이 4개 있으나 개화과정에서 그것마저

일찌감치 탈락된 상태이고 수술과 암술만 남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처럼 보이게 되어 꿩의다리

꽃의 독특한 모양새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대표적인 불완전화이다.

 

꿩의다리는 비슷한 종류가 많아서 잎의 모양과 꽃의 색깔 등으로 구분하는데

금꿩의다리, 은꿩의다리, 연잎꿩의다리, 좀꿩의다리, 자주꿩의다리, 산꿩의다리,

발톱꿩의다리 등 10여종이 있다.

 안부에서 약간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속리산의

주탐방로는 지리산, 설악산과는 달리 돌로 만들어진 등로가 아니라

도가니의 충격은 없으나 마사토라 상당히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할 곳이다.

비로봉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오자 멋진 암릉구간이 펼쳐지면서

마치 수석 전시장이 펼쳐지는데 설악산 못지않은 장관이 펼쳐진다

미역줄기나무 군락지 사이로 대간길은 이어지고...

두껍등 바위(07:25)

비로봉에서 내려오는 우측에 마치 등산화를 올려놓은 듯한 멋진 바위가 보이는데

이 바위는 반대편에서 보면 뚜꺼비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뚜껍등 바위라고 한다

신라 말기의 문신이자,유학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이곳 속리산의 비경에 반해 다음과 같은 멋진 시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은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 구나

도룡농 바위(07:27)

바위 절벽에 한마리의 도룡농이 붙어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도룡농 바위를 지나면서 내리막길 숲속으로 들어선다.

해가 나지 않아서 아직까지 그런대로 걸을만하나 높은 습도 탓인지

옷은 땀으로 인해 다 젖어 버렸다...환복을 하고 싶은데 옷을 차에

두고 왔으니 그림의 떡이라 찝찝해서 미칠 지경이다

산수국(꽃말:변하기 쉬운 마음)

참꽃(有性花)과 헛꽃(無性花)로 나누어진  수국은 참으로 특이하다

보통 꽃으로 알고있는 커다란 꽃잎은 꽃이 아닌 꽃받침으로 헛꽃이라

부르고 헛꽃 중심에 있는 조그만 열매같은 것이 실제로 꽃인 참꽃이다.

참꽃을 대신하는 헛꽃이 진짜 꽃처럼 보이면서 곤충을 유인하는 특이한 꽃이다

상고암. 배석대(拜石臺) 갈림길(973m:07:30)

집채만한 바위가 너덜을 이루고 있는 이곳 우측으로 내려가면 상고암과 배석대가

나오는 곳인데 등로가  잘보이지 않는데  천왕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608년에 신라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拜石臺)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고암.배석대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

배석대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천왕석문

천왕석문(天王石門:07:32)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갈 수 없는게 마치 요즘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태를 꾸짖는 것 같다... 오만과 탐욕을 다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가라고...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천왕석문을 통과 한다.

돌탑(07:36)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상고암(법주사) 갈림길이 나온다

상고암(上庫庵)갈림길(07:39)

갈림길엔 ←문장대 2.8km, ↓법주사 5.1km , →천왕봉 0.6km이정표가 있다

 

속리산은 주봉이 천왕봉이지만 문장대의 명성에 가려 푸대접을 받는곳이다

흔히들 속리산하면 문장대란 공식이 정답인양 알지만 천왕봉이 엄연한 주봉이다

이곳은 법주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을 능선 위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좌측이 문장대이고

우측이 천왕봉이며 그 가운데 우뚝솟은 봉우리가 비로봉...비로봉 아래에 있는 상고암이

속리산 전체를 가장 잘볼 수 있는 곳으로, 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왕봉도 보인다

마치 기암괴석을 모아논 암릉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곳...

속리산 전체 계곡 구석구석을 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상고암이란다.

상고암으로 가는길

2016년 9월 16일에 홀로 상고암을 들렸었는데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상고암(上庫庵) 대한불교조계종 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사내암자로 720년(성덕왕 19)에

창건하였으며, 처음은 법주사를 짓기 위한 목재를 저장하여두던 창고로 이용되다가 뒤에 암자로

바뀌었다고 하며, 또, 일설에는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서 모자성을 구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고

해서, 뒷날 상고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1876년(고종 13) 인명(仁明)이 중창하였고,

1897년 보봉(普峰)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에 황폐화되었다.

 

1963년 법혜(法慧)스님의 원력(願力)으로 옛터에 법당을 다시 세웠고, 1975년 극락보전(極樂寶殿)을,

1976년 영산전(靈山殿)과 산신각과 남북통일기원탑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원래 속리산에는

상고·중고(中庫)·하고(下庫)의 삼고(三庫)가 있었는데 중고암·하고암은 약 70년 전에 파괴되었다고 하며,

이 상고암은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암자의 동북방에는 유명한 입석대(立石臺)와 경업대(慶業臺)가 있고, 임경업(林慶業)의 스승

독보대사(獨步大師)가 수도했던 토굴(土窟)이 있었다고 하나 찾을 수 없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539~575) 14년(553년)에 천축에서 불법을 구하고 귀국한 의신조사에

창건된 가람으로서 불법을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가람이란 뜻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한 이곳이 속세를 떠니 불법의 진리를 펼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헤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에

증통국사가 중건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의 주전(主殿)인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하고 있으며,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며,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智拳印)을 하고 있고, 오른쪽 노사나불의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국보 제55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으로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으며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 양식으로, 

5층은 다포 양식으로 꾸몄고,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776년(신라 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율사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예전에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지명대종사께서 나를 상당히

어여삐하셨는데 벌써 인사를 올린지가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구나

 

큰 스님과의 인연으로 법주사를 찾았을때는 부처님에 대한 환희심으로 살았는데

이젠 완전히 날라리 불자가 되어 버렸으니...큰스님!  참회합니다

상고암 갈림길에서 법주사를 향해 저두일배의 예를 올리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그리 만나기가 쉽지않은 이삭사초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이삭사초(꽃말:자중)

사초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40~80센티미터로, 잎은 선형(線形)이며 어긋난다. 

5~6월에 갈색 꽃이 피는데 위에서부터 1~4개는 윗부분에 암꽃, 밑부분에 수꽃이 달리지만 

나머지 작은 이삭은 전부 암꽃만 달리며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장각동 갈림길(1,017m:07:47)

장각동 갈림길에 있는 헬기장

완만한 오르막길로 오르는데 길은 험하지 않으나 높은 습도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사방이 탁트인 이런 곳에서는 바람이 불어줄 법도 한데 오늘은 그럴 기미가 전혀없다.

조망바위(07:5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장각동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은 상오리 칠층석탑과 장각폭포가 있으며  장각동(長角洞)은

소의 뱃속모양의 명당터를 일컫는 곳으로 우복동(牛腹洞)의 쇠뿔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 한다

속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가기 위해서는 이 암릉구간을 통과해야만 한다

철딱서니 없는 넘...세월가는줄 모르는구먼...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하니 천왕봉 주변 탐방로 안내판이 홀로걷는 산꾼을 반긴다

 

예전에는 천황봉(天皇峰)이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에서부터는 천황봉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결과라고 하여, 2007년 중앙지명위원회가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등을 근거로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다다고 한다

천왕봉(天王峰:1,058m:07:58)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속리산 능선 9개의 봉우리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의 主峰이긴 하지만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주봉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대자재천왕이 10월 인일 축시에 이곳 천왕봉으로 내려와 45일동안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천왕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9봉9대(九峰九臺)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대목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십이지종산(十二之宗山)의 하나이자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이곳부터 한남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인증샷

천왕봉 정상 삼각점(△속리 11 / 2003 재설)

맑은 날 천왕봉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천왕봉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듯 장엄한 곳이건만 범여의 덕이 모자람인지 천왕봉 정상의 멋진 선경은 꿈에 불과하다

 

12대 宗山의 하나인 속리산은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의 24절경을 꼽는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

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오늘은 천왕봉 정상을 전세내어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은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되는데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비로봉~문장대로 이어지는 장쾌하고 멋있는 속리산 능선은 짙은 운무로 엉망이다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하였고,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문장대(文藏臺)·관음봉(觀音峰)·

길상봉(吉祥峰)·문수봉(文殊峰) 등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속리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으로 불리워오다가 김제 금산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진표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에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를 탄 사람이 달구지에서 내려와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묻는데 나는 금산사에서 오는 진표라는 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곳을 찾아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것을 알고

佛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고 하니까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 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俗離)'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천왕봉에 잠깐 머무는데 주위 전망도 볼 것이 없고 몸뚱아리의 땀냄새 때문인지

날파리같은 벌레들이 자꾸만 귀찮게 군다...럭세리 산행팀은 올 기미조차 안보이고

그분들과 내가 산행의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듯 하여 서둘러 길을 떠난다.

잠시후에 내가 걸어야 할 능선들의 운무는 그칠 기미조차도 없다.

대목재(大木峙:한남.금북정맥 분기점:08:05)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대목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대목재이다.

마을의 지명유래는 사람들이 크게 화목하게 산다하여 대목동이라고 바꾸어 불리다가

한일병합 후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어 대목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안성 칠장산까지 158.1km까지 한남. 금북정맥 길...2011년 3월 11일에

걸었으니 벌써 10년도 넘어 버렸구나...이 구간은 아직까지 비탐구간이다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 칠장산까지 와서 북쪽으로 김포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하는 한남정맥과 남쪽으론 칠장산에서 태안 앞바다인 안흥만에서 맥을 다하는

420km의 금북정맥의 시발점이 이곳이다.

분기점인 이곳에서 갈목재까지는 비탐구간으로 국공파들의 상시 단속구간이기는

하지만 정맥길을 걷는 맥꾼들중 갈 사람은 다 가더라...단속만이 능사가 아닌 국공파와

산꾼들과 共存하는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큰비단그물버섯인가?...야생화와는 달리 버섯공부는 참으로 힘이든다

도화리 고개를 향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비에젖은 등로가 엄청나게 미끄럽다.

쉼터(08:08)

다시 꼬꾸라지듯 급경사로 내려서니 넗은 공터가 있는 도화리 고개로 내려선다

도화리 고개(桃花峙:972m:08:18)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마을과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대목마을로 잇는 고개로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대목마을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내속리산면 대목리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내.외속리산면이

속리산면으로 통합되면서 도화리로 개명되었는데 이정표도 예전의 대목리가 아닌 도화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산꾼들은 이곳을 대목재라 부르는데 도화리 고개로 불러야 할듯...

 

상오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56대)은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월악산 덕주사에

누이 덕주공주를 두고 망국의 한을 품고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 소백산

국망봉에서 나라잃은 설움의 한을 달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행적이 묘연했던

경순왕 행적비는 상오리 장각동에 있다고 한다

좌측의 상오리방향의 등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우측의 도화리 방향은 등로가 아주 좋다.

 

보은군 속리산면에 속해있는 도화리(桃花里)는 면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마을로

봄철에 복숭아 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어서 임경업 장군이 무예를 닦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다가 도화동이라 불러 처음에는 도화동이라 불렸다.

 

일설에는 지형이 복숭아 같아 도화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하며 후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화목하게

산다하여 대목동이라고 바꾸어 불리다가 한일병합 후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어 대목리로

바꾸었다고 하며 2007년 8월 도화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댐고리, 아래대목골, 웃대목골 등이 있다. 아래대목골은 도화리의

아래쪽에 웃대목골은 도화리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왕봉에서 도화리 고개까지 짧은 구간에 고도를 100여m정도 떨어졌다가

다시 빡센 오르막을 오르려니 힘이 부치는데 오늘따라 바람의 협조는 전혀없다

같은 속리산군(俗離山群)에 속해있는 홀대받는 느낌을 주는 곳이 이곳인 모양인지

주탐방로에서는 꿈도 못꿀 대간꾼들의 시그널들이 간간히 보인기 시작한다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고도차가 없는 안부 능선을 걷는다

암봉(08:23)

호젓한 산죽길...신선대에서 동료들과 작별후에 사람 구경은 못했다.

산악회를 따라서 왔지만 오늘도 홀로 걸으니 난 영락없는 독립군 체질인가보다...

내리막길로 내려선다...아무도 없는 산길...베낭에서 라디오를 꺼내 

음악을 켜는데 나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건지 일장춘몽이 노래가 나온다

 

♪ 이래저래 살아봐도 일백년 인생이요

아둥바둥 살아봐도 일백년 인생이라네

 

그깟 백년 살아보려 몸부림쳤소

기껏 백년 살아보려 발버둥첬소

 

♬수천금을 가졌어도 부족한 마음

수만금을 가졌어도 모자란 마음

 

천년만년 살거라고 착각하며 살았소

빈손으로 가는 인생 인생은 일장춘몽♩

묘지(08:25)

계속되는 내리막길

조망바위(08:28)

꽤나 많이 온 것 같은데 천왕봉에서 겨우 500m밖에 못왔구나.

암봉(08:35)

암봉에서 바라본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계곡의 모습

예전에는 마을 이름이 내속리산면 대목리였으나, 내.외속리산면이 속리산면으로 통합되면서

도화리(桃花里:복숭화꽃 동네)로 개명되어 대목리 계곡이 아닌 도화리 계곡으로 바뀌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조금은 진부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

769m봉(08:40)

넓은 공터처럼 보이는 능선을 통과한다...슬슬 체력의 저하가 오기 시작한는구나

무명봉(08:44)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조망이 뛰어난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08:46)

잠시후에 오를 703.2m봉이 뚜렸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서면 충북 알프스의 시발점인 구병산이 확연히 보이는 곳이나 오늘은 아니다

반갑습니다

안부(08:50)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선다

엄연한 국립공원에 속한 길이지만 도화리 고개 지나면서부터는

500m마다 구조 이정목은 서 있으나 이정목은 전혀없다.

그러다보니 국가가 하지 않으니 민초들이 나선 모양이다

부지런히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형제봉이 5km나 남았다고...

쉼터(08:53)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고도차가 그리 크지않은 능선길을  걷는다

안부(08:55)

안부에서 올라서니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 암릉구간이 나온다

다시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이게 누구신가?...무지막지한 전설적인 산꾼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지난해 여름 지리산 묘향암을 가면서 신세를 참 많이 졌었는데...

 

엄청난 체력에 빠른 走力...무한도전인가, j3소속이랬나...

아마도 저 분은 전생에 산신령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703.2m봉(09:05)

국립지리원의 지도에 표기된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대간길에선 푸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형제봉으로 향한다

촛대바위?...범여의 생각中에서

암릉구간을 우회하면서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09:08)

무명봉(09:15)

무명봉에서 직진 등로가 아닌 사면길로 돌아가니 산죽밭이 나온다

안부(09:17)

우측 아래의 잣나무 군락지를 바라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폐헬기장(09:20)

폐헬기장을 지나면서 대간길은 다시한번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등로가 너무 좋다보니 습관성인 몽류병이 도지는지 슬슬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약간의 오르막길

지나온 대간 능선과 천왕봉을 뒤돌아 본다.

남쪽 능선에 있는 구병산은 오늘 꼬라지가 났는지 당체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구병산(九屛山:876m)은 충북 보은군 장안면,속리면, 마로면과 경북 상주시 화남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인기 순위중에 96위에

해당되는 산으로 구병리 우복동과 삼가리 협곡을 사이에 두고 정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 속리산 천황봉인데 산의 형세가 아내가 자신을 버린 남편을 찾아와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보은지방에서는 속리산 천황봉과 구병산 그리고 금적산(金積山) 등

세 산을 ‘보은삼산(報恩三山)’이라고 일컬어 왔으며이 삼산을 두고 ‘속리산은

부산(夫山)이요, 구병산은 부산(婦山)이요, 금적산은 자산(子山)’이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속리산 국립공원 남단 경계를 이루는 구병산의 산세는 동에서 서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능선 상에 아홉 개에 달하는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다.

아홉 봉우리로 인하여 옛날에는 구봉산(九峯山)으로도 불리었다 한다.

암봉을 이룬 아홉 봉우리들마다 각각 신선대, 백운대, 봉학대, 노적봉, 쌀개봉 등

저마다 이름들이 있었다 전해지며 이중 최고봉인 정상이 백운대, 정상 서릉 상의

쌀개봉과 노적봉, 동릉 상의 신선대 정도만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이 산은 물가에 드리운 기암절벽들이 한 폭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서원계곡과

삼재팔란(三災八亂)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로 알려진 구병리 우복동, 속리산

정이품송의 아내라는 얘기를 듣는 정부인 소나무, 삼가저수지, 최근에 발견된 정상

바로 옆 풍혈과 구병리 동굴풍혈, 숨은골의 쌀난바위, 그리고 주능선 남과 북을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 등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풍광에 뛰어난 볼거리들이 온 산을

수놓고 있다.

740m봉(09:25)

정말 지루하다...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지건만 무지막지한

선두팀들의 추월이 두려워서 쉬지도 못하겠다...죄없는 물만 마셔된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꺽어져 동북방향으로 향하는데 암릉구간이다

계속되는 암릉구간의 안부 능선

천왕봉에서 상오리로 이어지는 계곡...11년전 한남.금북 첫구간을

저 곳으로 내려왔는데 엄청나게 지루했던 구간이었던 곳이었다.

725.8m봉(09:32)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서 내려오니...

우측으로 천왕봉으로 향하는 편안한 사면길이 보인다

형제봉으로 가는 길은 등로는 아주 좋으나 아무리 걸어도

거리가 줄지않는 느낌이라서 엄청나게 지루하다

667.5m봉(09:57)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대간길은 우측으로 90도 꺽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유명한 장각폭포와 금란정이 있는데 폭포 아래 널찍한

소(沼)와 절벽위의 정자와 소나무가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장각마을에는 상오리의 7층 석탑(보물 제683호)이 있고 이곳은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낭만자객, 이 순신 등 드라마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지나온 725.8m봉 너머로 구름을 이고있는 천왕봉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건강한 소나무들이 자생하는 등로를 지난다

안부(10:05)

의자나무?

636m봉(10:12)

천왕봉에서 4km 지난 지점...가야할 형제봉은 아직도 3.1km나 남았다니...

바람만 불어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전혀 협조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가야할 형제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657m봉(10:20)

안부(10:22)

암릉구간을 통과한 다음에...

641.5m봉으로 올라간다

641.5m봉(10:27)

피앗재로 내려가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죽어서도 피앗재를 수호(?)하고 있는 멋진 枯死木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피앗재(614m:10:32)

보은군 속리산면 대목리 만수동에서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옛날에 첩첩산중이라 피난지로 적합한 곳이어서 ‘피화재(避禍峙)’로 불렀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피앗재로 불리웠다고 하는데 피화치(避禍峙) 로 한자식으로

표기하다 보니 난(亂)을 피했던 장소 였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잘못 이해되고 여기에서의

"피"는 벼와 비슷하게 생긴 구황작물인 피이고 "앗"은 밭(田)을 의미하여 피가 많다고하여

이름 붙여진 '피밭골'이 소리바꿈 한것 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보은의 만수동 사람들이 상주 화북장을 보러 다녔던 중요한

고갯길이었으며 만수동 계곡은 풍광이 뛰어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란다

전쟁이 일어나 팔도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아온 탓에

아직도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만수동 가는길

보은군 속리산면에 있는 만수동( 洞)은 본래 풍천 임씨들의 묘막이라 하여 묘막이라

불렀는데 1987년 군조례에 의거 묘막이전의 이름인 만세동에서 유래하여 만수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냉골, 만수동, 묵밧추리 등이 있으며 냉골은 만수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대가

냉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묵밧추리는 만수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946년에 신설하였다 한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형제봉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苦行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뚜벅이 걸음일망정 신선대에서 이곳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왔다는게 어딘가...

쥔장 잘못 만나 10년 넘게 개고생하는 내 두 다리에게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

빡센 오르막길...심장에 무리가 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걷는다

千辛萬苦끝에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잠시동안 안부 능선으로 걷는다

암릉구간을 만나서는...

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암릉 아래로 내려간다

잠깐동안 형제봉으로 향하는 편안한 길

안부(10:49)

등로 우측에 있는 집채보다도 더 큰 암릉도 만난다

696m봉(10:52)

696m봉 구조 이정목

암봉을 오를수가 없어서 좌측으로 우회를 하면서 내려간다

안부(10:55)

형제봉의 전위봉인 800.6m봉을 향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무덥기는 해도 해도 오늘은 컨디션은 괜찮은지 오르막길이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은 느낌이다

암릉구간을 지나고...

거의 다온 것 같은데 아직도 형제봉이 1.1km나 남았다니...헐

암릉구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버섯들이 간간히 보인다

갈색비늘난 버섯인가?

이 버섯 이름은 모르겠다

또다시 너덜길같은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800.6m봉(11:20)

800.6m봉을 올랐다가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미끄러운 암릉구간을 지나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1:21)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가보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날의 산행길...바람조차도 산꾼을 괴롭힌다.

그러나 힘들게 걸어온 길...형제봉가는 길에 잠시 편안 길을 만나서 호젓하게 걷는다

그래도 산에 대한 불평은 하지말자.

세속에서 찌든 몸뚱아리 속의 노폐물을 淨化하는데는 산만큼 좋은데가 어디 있느냐.

안부를 지나서 형제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바람한 점 없고 땀은 비오듯 쏟아지지만 그래도 그늘속을 걷는다는게 어디냐.

 

중국의 원말명초(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시기에 묘협스님이 쓰신

보왕삼매론 (寶王三昧論)에는 1번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리하여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병으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말씀하셨지.

 

쉬우면 쉬운대로 힘들면 힘든데로 그저 순리에 적응하며 걸어가는게 산에 대한

산꾼이 해야할 도리이겠지

능선에 올라서 좌측의 비탈로 올라가는데 구조이정목에 16-13이란 표식이 있다.

이게 뭐여!...바로 윗쪽에 있는 봉우리가 형제봉인줄 알았는데 아직도 0.6km라나 남았다네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형제봉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무명봉으로 올라간다 

형제봉 전위봉인데 ...이곳이 동생봉인 모양이다

동생봉(?)의 나뭇가지 사이로 우복동천(牛腹洞天) 명당터로 알려진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인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쉰섬마을이 아련히 보인다

섬 기린초(꽃말:기다림, 인내)

울릉도와 독도에서 주로 자생한다고 해서 명명된 섬기린초...니가 왜 거기서 나와?

지혈, 해독약으로 활용되는 기린초가 바위 틈새에 다소곳이 피어있다.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는 오늘같은 날에 바위 틈새라 얼마나 덥겠냐.

그래도 씩씩하게 삶을 살아가는 너가 웬지 모르게 멋지게 보이는구나.

 

섬기린초는 돌나무과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예전에는 귀했으나 지금은 흔한 꽃이 되었다.

지명은 뿔을 가진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을 닮았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몸은 사슴같고,

꼬리는 소 같고,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오색(五色)이라고 한다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속의 동물이다

안부를 지나서...

미끄러운 경사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안부(11:35)

안부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암릉 윗쪽에 정상석이 있는 형제봉으로 향한다

형제봉(兄弟峰:831.1m:11:36)

형제봉은 보은군 속리산면 모막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 화남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한국지명총람』에 '형제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산의 두 봉우리가

형제처럼 나란히 솟아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맨 뒷쪽으로 잔뜩 흐린날 속에 흐릿하게 속리산 천왕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내 작은 두 다리로 참으로 많이도 걸어왔다... 5km 뒤인 늘재에서 출발하여

무지막지하게 산길을 걷는  선두팀에게 추월당하는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신선대에서 아침밥을 먹고 이곳까지 한번도 안쉬고 왔는데 아직까지 선두팀은 안보인다

 

신선대에서 출발한 후 형제봉까지 오는동안 산에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덕분에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도 독차지했고, 형제봉도 독차지하는 호사를 누린다

인증샷

형제봉 정상에 있는 산꾼들의 흔적도 바람한 점 없는 폭염에 그로기 상태이다.

암릉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얼굴이 익는 느낌이라 서둘러 안부로 내려간다

형제봉 정상의 암릉...友愛깊은 형제처럼 보이는구나

정상에서 내려와 베낭을 다시메고 갈령삼거리로 향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형제봉 사면의 모습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와서 좌측으로 편하게 이어지는 사면길을 걷는다.

피곤함이 밀려오는지 잠깐사이 눈을 감고 걷다가 등로를 가로막고 있는

작은 고사목에 걸려 된통 꼬꾸라 진다...넘어진 내 몰골을 보며서 웃음이 나온다.

멀쩡한 집에서 에어컨 빵빵 털어놓고 골프 중계방송이나 볼 것이지...뭔 개고생인지...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방심하지 말거라

안부(11:45)

형제봉에서 계속되는 급경사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다시 오르막으로 오른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계란버섯

최근에 자주 비가 내린 탓인지 등로에서 심심찮게 버섯을 만난다 

갈령삼거리(680m:11:53)

지난해 6월 5일 수헌아우와 함께 백두대간 3차 땜방을 하면서 이곳을 왔으니 정확하게

13개월만에 다시 갈령 삼거리에 다시 왔다...문장대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느낀 점은 

이 구간은 확실히 북진보다 남진이 훨씬 수월한 느낌이다...1시간 이상 차이가 난다

 

오늘은 폭염에다 바람한 점 날씨로 인해 최악의 산행 조건이었지만 무사히 대간길을 끝낸다.

이곳부터 갈령까지는 날머리 접속구간에다 계속되는 내리막이라 큰 걱정은 안된다.

지금이 12시경...나홀로 산행이었다면 현재의  컨디션으로 비조령까지 충분히 갈수 있겠다.

그러면 갈령까지의 1.3km라는 접속이라는 헛짓거리를 안 해도 될것이고...

비조령에서 내가 이 지역에 오면 자주 이용하는 화령개인택시 이진석 기사님에게 전화하여

화령까지 가서 상주가는 버스를 타고 귀경하면 좋으련만...하필이면 오늘 따라서 지갑을

버스에다 두고 왔구나

비조령까지 가려는 꿈은 가슴에다 묻어두고 갈령으로 향한다

갈령삼거리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치는 49개 지맥중에 하나인 이안(신산경표상:작약)지맥이

분기되는 분기점이다...이안(利安: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 대간 속리산군 형제봉 남동쪽 0.6km

지점의 721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갈령(49번국지도),두루봉(대궐터산. 873m),동네실재,

국사봉(703.3m),황령고개,칠봉산(598m),갈티재,성재산(356m),작약산(774m), 은점재,수정봉(488m),

태봉산(106m) 을 거처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낙동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9m 되는

산줄기로 이안천의 우측, 영강의 남쪽 분수령을 작약지맥(芍藥枝脈)이라 칭하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이안지맥이라고 부른다

갈령삼거리를 뒤로하고 갈령으로 향하는데 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산꾼들의

시그널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저 반갑기만 하다

안부를 지나서 지나...

 조망바위로 올라간다

조망바위(12:00)

2019년 10월 6일에 나홀로 걸었던 청계산 두루봉(874m)의 모습

산 허리에는 예전에 없었던 임도가 하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청계산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와 화서면 하송리, 화남면 동관리의삼면 경계봉을 이루는

산으로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랫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

 

두루+봉=두루 봉. ‘두루’는 ‘들’의 옛말인 ‘드르’와 같이 ‘땅’ 또는 ‘산’ 에서 왔다. ‘달’은 ‘높다’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산마루가 두루 뭉실하거나 어느 고장을 울타리 치듯 휘어 돈 산을

‘두루산’이라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는데 대궐터산은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더 내려가 극락정사 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이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는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속리산의 천왕봉이 아련히 보인다.

천왕봉은 엄연한 속리산의 주봉이지만 문장대라는 빼어난 동생탓에(?)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는 봉우리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800.6m봉(우)과 형제봉(좌)의 모습

양지(陽地)를 좋아한다고 해서 이름 붙혀진 돌양지꽃

이 폭염에 바위 틈새에서 묵묵히 본분(?)을 다하는 너에게 박수를 보낸다.

 

높은산의 바위 틈새에서 노랗게 피는 양지꽃은 양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양지꽃이라고 하는데,

꽃이 오래 피어 있기로 유명해 길게는 4개월가량이나 핀다. 또 생명력이 유난히 강해 줄기가 중간에

끊어져도 다시 그곳에 뿌리를 내려 새순이 돋아나는 품종이다.

 

돌양지꽃은 양지꽃과 거의 같지만 키가 20㎝로 30~50㎝인 양지꽃보다 작다.

또 양지꽃은 이른 봄인 4월에 꽃이 피지만 돌양지꽃은 늦봄인 6~7월이 되어야 꽃이 핀다.

조망바위에서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암봉으로 올라간다

암봉(12:03)

오늘 산행중의 마지막 봉우리로 정상에 올라서니 십승지 가운데 하나로 우복동천(牛腹洞川)이라

불리는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가 한 눈에 보이고, 우측으론 도장산과 시루봉,  뒷쪽으로는 청화산이다.

청화산은 전국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편찬한 지리서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50~1752)이 극찬했다는 청화산이 구름을 이고 흐릿하게 보인다

갈령가는 길에서 바라본 우복동천(牛腹洞川)

풍수지리에서 피난, 보신의 10가지 장소를 10승지(十勝地)라고 하는데

그 10승지중의 하나인 소의 뱃속 모양의 명당터인 우복동이 바로 상주시 화북면 일원이며

실제로 화북면으로 피난온 사람들은 한국전쟁당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상주시 화북면은 三山(속리산:1,057.7m, 청화산:984m, 도장산:827.9m), 三水(낙동강, 금강, 한강)의

고장으로 불리는 곳으로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백성들은 물론 몰락한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약용의 <다신시문집> 제18권 ‘증언(贈言)- 다산이 제생(諸生)에게 주는 말’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산은 실학자답게 우복동가(牛腹洞歌)의 詩로 십승지의 폐혜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단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빛이 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멍청한 선비그를 두고 마음이 솔깃하여
 

 지레가서 두어마지기 밭이라도 차지 하려고

죽장망훼 차림으로그곳 찾아 훌쩍 떠나
백 바퀴나 산을 돌다 지치고 쓰러졌다네
 

적이 쳐들어와도 나라위해 죽어야지

너희들 처자 데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아내가 방아찧어 나라 세금 받치게 해야지
아아! 세상에 어디 우복동이 있을 것인가 
 
 - 정약용 ‘우복동가(牛腹洞歌)’ 중에서   
 

그 곳은 속리산 동편,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일대였다.

 우복동천(牛腹洞川)  개념도  

십승지(十勝之)는 예언의 땅으로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이다.
조선시대 평범한 민초들이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흉년과 홍수로 굶어 죽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 많은 백성이 개죽음을 당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비결(秘訣)을 탄생시켰다.  

비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법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비결서가 <정감록>이다.  
십승지는 이러한 비결에서 유래되었다.   
 

 <정감록>은 가장 널리 십승지를 알린 비결서다.  

역사적 격동기에는 수많은 백성이 십승지에 나타난 예언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의 심층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우복동(牛腹洞)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로

상주 속리산 동편에 숨어 있다고 전해진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산에서 만나는 광고판...이 지역의 택시를 이용하다보면 다른 지역의

택시기사분들과는 달리 백두대간과 지맥 산길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신 분들이 많다

암릉 사이로 내려간다

코끼리 바위(12:17)

조망바위(12:19)

조망바위에 서니 저 아래로  갈령터널이 뚫리면서 옛 영화를 잃어버린 49번 도로가 보인다.

아직까지는 무지막지한 선두팀에게 추월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다.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맞은편에 있는 청계산을 바라보는 여유를 부린다

삼백의 고장을 아우르며 내려다보고 있는 청계산의 주봉인 두루봉의 모습

상주하면 흔히들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상주 지역에서 잘되는 세 가지 흰 것 

즉, 명주와 흰쌀 그리고 곶감을 가르키는 말이다.

 

상주는 경주의  ‘慶’과 함께 경‘尙’도란 이름의 어원이 된 유서 깊은 도시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까지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되는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었던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한때 한 끗발 날리던 지역이라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한 편인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며

인구가 급격히 외지로 빠져 나가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구미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

고향만 아니었으면 크지도 못했을거라며 아직까지 선산 촌동네라고 까는 노인 분들이 꽤 있다.

전형적인 농촌 기반의 도시이나, 대구, 대전, 청주 등 모두 1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속리산국립공원을 끼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이 낙동강 수계에 속하지만 화령 서쪽 지역 금강 수계이며 심지어 화북면 일부는

한강 수계로 들어간다. 즉 산경표 상의 백두대간의 동과 서를 넘나드는 특이한 지역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대 삼국이 탄생한 곳이 이곳 상주이다.

삼한시대부터 사벌국(沙伐國),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하였고,  삼국유사

나오는 6가야 중 가장 고고학적 근거가 희박한 고령가야가 상주시 함창읍에 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아자개와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의 출신지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당시

상주 가은현 출신인데 이 곳은 당시에는 상주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문경시 소속인 가은읍

지역 출신으로 가은읍 5일장 지명이 아자개 장터이고, 버스정류장도 아자개 정류장이다.

그리고 새벽에 화북분소 오르는 초입인 화북면 장암리에는 견훤산성터가 있다.

 

마귀광대버섯

마귀광대버섯은 갓의 색이 갈색 도는 황갈색을 띠고 있고 백색 사마귀점이

산재해 있으며 갓 끝 부위에 짧은 홈선이 있으며, 대의 표면애 부스럼 모양의

인피가 있고, 대 기부는 양파모양이고 바로 윗쪽에 2~4개의 불완전한 띠가 있는게

특징이며 맹독성 버섯으로 독성분은 무스카리아 이보테닉 산으로 환각, 환시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벙커가 보이면서 차량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갈령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헬기장(12:34)

마사토로 인해  미끄러운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고개 아래로 뚫린 갈령터널로 인해 세월속에 잊혀져 가는 도로개통비

갈령 표시석 뒷태를 바라보면서 갈령으로 내려선다

갈령정상석 뒷면의 모습

갈령(葛嶺:445m:12:40)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나인 상주 우복동이 있으며 6.25동란 때 한국군 제7연대가 인민군을 맞아 첫 승리한

화령장 전투중에 격전지로 유명한 곳으로 상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도로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의 넓은 도로가 지나가는 갈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지금은 나처럼 대간 산꾼이나 찾는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데 갈령(葛嶺)은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

있지만 칡을 뜻 하는 ‘칡 갈(葛)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순 우리말 ‘가르다’, ‘갈라지다’에서 어원을

찾는다...물길을 가르거나 행정구역을 가르는 곳을 말한다.

 

금북정맥의 가루고개, 영산기맥의 갈재나 노령(蘆嶺) 역시 마찬가진데 가르다는 ‘갈’의 우리말을

한자화 하면서 칡 갈(葛)이나 갈대 노(蘆)자를 들이댄 것이라(音借表記)...한자를 보고 그 뜻을 풀게

아니라 한자 이전의 우리말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칡이나 갈대와는 무관하게 가르는 고개라는

뜻의 갈령이다.

갈령 정상에는 우복고을 관광화북’이라는 글씨가 나무속에 가려져 있다

고개 넘어 화북면 용유리에 우복동마을이 있는데 백두대간 청화산 남쪽 골짜기 마을로

최근들어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꾸며져 있으며. 우복동(牛腹洞)은 조선시대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라는데 근거를 두고 소의 뱃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설을 한다.

 

소 뱃속이 아늑한지 어떤지 들어가보질 않아서 알 수는 없고, 혹은 풍수에서는

‘牛伏’이라 하여 소가 엎드린 형국으로도 풀이를 한다.

신선대에서부터 이곳 갈령까지 빠르진 않지만 선두팀들보다 5km나 먼저 출발하여

그 분들에게 추월 당하는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바람한 점 폭염속에서 이곳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걸어왔다...오늘은 아침에 빵쪼가리가 아닌 밥을 든든하게 먹은

탓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베낭 무게를 줄이려고 터득한

노하우가 물을 덜 마시는 트레이닝을 해서 남들보다 훨씬 물을 덜 마시는 편인데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워 평소보다 2배에 가까운 물과 음료를 섭취했는데 소변한번

보지 않았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한다.

갈아입을 옷을 차에다 둔 탓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계곡에 물이 없어 씻지도 못했다.

웃도리를 벗으니 옷에 베인 땀이 물에 젖은듯 줄줄 흐른다

 

하는 수 없이 염치 불구하고 웃도리와 런닝을 벗어 스틱에 끼워 나무에 걸어놓고

돌로 된 벤취에 누워 베낭을 베개삼아 잠시 잠을 청했는데 얼마나 피곤하고 긴장을

했던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졌다가 개미 쉬키들이 하도 물어대서 일어나니 오후

2시가 다되어 가는구나...1시간 넘게 꿀맛같은 깊은 잠에서 일어나니 몸이 날아갈 것만 같다

 

2시쯤 되었을까...대간 선두팀이 아닌 산악회 회장님과 이벤트팀들이 내려온다.

그 이후의 사건은 잘 모르겠고...잠시후에 버스가 도착하고 화령에 와서 삼겹살에

맛있는 점심을 제공하지만 모래 병원 검사하는 날이라서 먹는 걸 자제한다.

 

어제가 내 생일이라 가족들이 산에 가지말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데도 산에 가야

한다고 하니 내 성격을 아는터라 더 이상 토를 안단다...산에 와서 힘은 들었지만

또 한 구간을 끝냈다는 喜悅感을 가슴에 간직하고 귀경하는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