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

범여(梵如) 2012. 5. 17. 07:28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

 

 

백제의 상징이 된 패자(敗子)
승리는 꼭 승자의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승리하지 못한 패자의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백제의 무장, 계백은 죽을 줄 알면서도 최후의 선택을 순순히 받아들인 충절과 용기로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싸우다 전사하니, 백제 역사의 대미를 처절하게 장식한 그는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백제의 상징으로 살아있다.

알려지지 않은 계백의 삶
사실 백제의 마지막을 같이 한 계백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계백이 벼슬에 나아가 2품의 ‘달솔(達率)’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계가 어떠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5년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계백의 이름은 승(升)이며 백제동성(百濟同姓)’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계백의 성은 백제 왕실의 성씨인 ‘부여’씨로 여겨지고, 1928년 편찬된 <부여지(扶餘誌)>에 ‘팔충면(八忠面)은 부여군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기를, 백제의 충신인 성충, 계백 등 8인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고장의 유래에 얽힌 글을 토대로 지금의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가 계백의 태생지인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또 계백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계백을 낳을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백충대 우물 근처 석실로 물어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 이야기와 계백이 부여 천등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해묵은 왕솔이 갈대 넘어지듯 했으며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의 전설을 통해 계백의 비범한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유년 시절부터 무예 솜씨가 출중했던 계백은 최후의 전투, 황산벌 싸움으로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됐다.

황산벌 전투
한때는 고구려와 신라를 제압하고 3국 중 가장 융성한 힘으로 중국까지 점령하려 했던 절대강국이었던 백제.
하지만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는 영토 다툼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고,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니,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향해 돌진했다.

나당 연합군의 협공에 백제의 충신들은 입을 모아 ‘육로로 오면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지 못하게, 수군이면 기벌포(伎伐浦)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연회만을 즐기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던 의자왕은 충신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고 적들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계백으로 하여금 적을 막도록 하니, 660년 7월, 계백은 전투를 위해 황산벌에 섰다.

백제의 마지막 영웅을 만나러 가자, 황산벌로...
660년 7월 10일을 백제 사비성 함락의 날로 삼은 나당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백제를 함락시키고 있었다.

13만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배를 이용해 금강 하구로 상륙한 뒤, 규모를 앞세워 곧장 부여 사비성을 향했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도 이천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지금의 논산 지역인 황산벌로 진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결사대로 인해 황산벌에서 발목이 잡혔다.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리고 있던 백제군은 세 갈래 길로 진격해 오는 신라군을 맞이해 네 번 싸워 모두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계백 장군이 거느린 5천 군사 대 신라 김유신 장군이 거느린 5만 군사.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승부였으나, 싸움터로 향하기 전 ‘가족이 적의 종이 되어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며 가족을 죽이고, 자신 또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한 계백의 결사항전은 백제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은 것이다.

하지만 10대의 어린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 전투에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죽음을 맞자 기가 오른 신라군은 총공격을 펼쳤고, 5만 대군을 막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던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모두 전사하니 신라는 백제를 물리친 뒤, 곧장 내리 달려 당나라 군대와 함께 사비성을 포위했고 678년을 이어 온 백제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계백은 아직도 황산벌을 달린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하여 이어져 왔고 패자의 기록은 묻혀지고 지워지기 마련이지만 계백의 용맹은 1천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가슴에 심어져 있다.


물론 전장에 나가기 전, 가족을 희생시킨 행동은 논란의 여지로 남아있지만 나라의 운명이 걸린 백척간두의 결전에 맞서 결기의 수단으로 개인의 삶을 지우고, 나라를 택한 계백의 충절과 애환은 국가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