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위대한 평민
높은 관직에서 나라를 호령한 이들을 먼저 기억하는 게 역사의 생리다.
그러나 정작 역사의 줄기를 이루는 것은 평범한 민초들.
조선이 몰락의 길을 걷던 1878년(고종15년).
한국 근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평민 의병장으로 우뚝 선 신돌석 장군으로 30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전설적인 의병활동의 주인공인 신돌석 장군은 암울했던 시대, 민중의 우상이자 등불이었다.
출생과 함께 눈을 뜬 항거정신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신돌석 장군의 호적 이름은 ‘태호’다.
하지만 어린 시절, ‘돌선(乭先)’으로 불렸던 장군은 의병 활동 당시 더욱 평민스러운 이름, ‘돌석’을 사용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장군이 태어난 고장은 1870년부터 약 1년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이필제(李弼濟) 난’의 중심지로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反)봉건 농민운동지인 영덕에서 태어나고 자란 장군은 자연스럽게 반봉건의식에 눈을 떴다.
사실 장군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 출세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고 19세기에는 평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했으니, 장군의 반봉건 의식은 남달랐을 터.
여기에 성장한 시기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본이 혈안되던 때니 울분을 참지 못 하던 장군의 뜨거운 피는 강렬한 항일의식으로 이어졌다.
의병으로 일어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이를 빌미로 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도하면서 반일 민족의식을 다져가던 신돌석 장군은 1895년 일본이 무뢰배들을 동원해 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었지만 고향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어선 장군은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김하락 의병부대의 중군장(中軍將)을 지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김하락 의병장이 순국하자,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역량을 키워갔다.
실제로 신돌석 장군은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로 지사와 의사를 찾아다니며 구국 방안을 논의하고 항전을 준비했다.
이 가운데는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활동한 박상진!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군대해산 직후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한 민긍호 등이 있었고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신돌석 장군은 의병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갔다.
태백산 호랑이
장군이 다시 의병으로 나선 것은 1906년이다.
조국의 운명은 점점 더 망국의 길로 접어들어 1904년에는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가, 1905년에는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장군은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아우인 신우경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모아 다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이 주축을 이루었고 의로운 행동과 10여 년간의 교류로 양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장군은 스스로 ‘영릉 의병장(寧陵 義兵長)’이 되어 항전을 시작했고, 장군의 부친은 가산을 처분해 무기와 군량을 구입하는 등 의병활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했는데, 신돌석 의병부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장군의 공격 목표는 영덕, 영양, 봉화, 울진, 삼척 등지의 일본군과 관아, 일본인 집단 거주지, 일본인들의 조선 농수산물 약탈을 위한 선박으로 영릉의병의 공격으로 일본인들의 주요 시설물이 붕괴됐다.
특히 신돌석 장군은 태백산맥을 주 무대로 활동했는데, 당시 일본군은 신식 무기를 앞세워 의병을 공격했으나 의병들은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응해 '태백산 호랑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런가하면 탄환 제작에 필요한 그물추를 확보하기 위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해 ‘신출귀몰 축지법의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평민 의병장으로서 장군의 신출귀몰한 명성과 혁혁한 전과는 농민들의 항일 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을 고양시켜 갔다.
그렇게 거대한 역사의 줄기를 이뤄가던 1908년.
장군의 생애는 일제의 현상금을 탐낸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며 서른의 나이에 돌연 멈추니, 평민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해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민 항전으로 발전시킨 신돌석 장군의 불꽃같은 삶은 스러졌으나, 그의 저항정신은 역사 속에서 결연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