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대야성의 주역 죽죽장군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전, 합천 땅에서 피비린내나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 신라와 백제가 국운을 걸고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대야성에서 대접전을 벌인 것이다.
1,500년이 지난 지금, 대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대야성터는 합천 군민들의 산책길로 변해 버렸다. 다만 옛날 전쟁터였던 산기슭에 세워진 비석만이 그때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지방유형문화재 128호인 이 비석은 죽죽의 얼을 깊이 간직하고자 1644년(인조 22년)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이 세운 것이다. 비문은 합천 출신으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한강 정구의 제자인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1591-1658)가 지었다.
“신라 선덕왕 때의 일을 살펴보건대, 백제군사 일만명이 대야성을 공격하자 성주 김품석은 나와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보좌관으로 있던 죽죽은 성주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자 이에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힘껏 싸우다가 전사를 하였다. 아! 이것은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비문의 앞부분이다.
죽죽이 어떤 인물이길래, 그 충절을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와 같다고 했을까.
죽죽은 대야주(합천)사람으로 선덕왕때 사지(4두품 벼슬)로서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보좌관으로 있었다. 그리고 대야성과 운명을 같이 한 충신이었다.
당시 대야주(大耶州)라 불린 합천 땅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땅으로 만들어야만 했으며, 반대로 신라는 대야주를 굳건히 지킴으로써 백제의 예봉을 꺾고자 했다. 대야주는 원래 고령을 기반으로 한 대가야 땅이었다. 신라 24대 진흥왕 23년(562년) 대가야가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해 멸망되니 자연히 신라 땅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새로 점령한 서남지역의 평정과 금 주산지 보호 및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이곳에다 견고한 요새인 대야성을 구축하고 도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서기 642년 백제 의지왕은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대야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군은 김품석이었다.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김춘추의 사위가 바로 김품석이다. 일찍이 김춘추는 딸 고타소를 김품석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백제군이 쳐들어 왔을 때 품석은 주색에 빠져 성의 방어를 굳건히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품석은 자기 부하 장수인 검일의 부인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이에 검일이 원한을 품고 윤충과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질러, 백성들과 군사들은 갈팡질팡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때 품석은 보좌관 서천을 시켜 윤충에게 목숨만 살려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윤충이 항복만 하면 살려준다고 하자 서천이 품석과 여러 군졸들에게 권고하여 성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때 죽죽이 이를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백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꾀이는 것이니 만일 성밖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비겁하게 살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면서 극구 만류하였다. 하지만 품석은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군사들이 먼저 나가다자 백제의 복병들은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품석은 막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이고 자기도 목을 찔러 죽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죽죽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가지고 적을 물리치고자 전열을 정비하였다. 동료 장수 용석이 죽죽에게 이르기를 “지금 전쟁의 형세가 이러하니 반드시 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후일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니 죽죽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도 맞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참대와 같이 한 겨울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니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성이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용감하게 전사하였다.
대야성 전투는 비록 신라가 백제에게 대패했지만, 삼국통일의 한 계기를 마련했다. 품석의 장인인 김춘추는 딸과 사위가 대야성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백제를 먼저 공격하여 멸망시키는데 이른 것이다.
함벽루 뒤로 대야성이 있다. 훗날 합천사람들은 대야성을 대밭마루 또는 죽봉산(竹峯山)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죽죽장군이 백제군과 싸워 마지막 충절을 보인 이곳에 장군의 애절한 혼이 대밭으로 변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동욱기자/kdo@gnnews.co.kr
◎합천에서 태어난 무학대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널리 알려진 고승이 바로 무학대사이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 한양천도와 관련된 풍수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무학대사가 합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무학은 합천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삼기(三岐)로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이다. 성은 박(朴)씨이며, 이름은 자초(自超)이다. 무학은 박인일의 아들로 1327년 합천에서 태어나 1405년 금강산 금강암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학이 태어난 합천 대병면에는 무학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무학이 몹쓸병에 걸린 모친을 위해 팠다는 ‘무학천’, ‘무학샘’ 전설. 무학이 고향을 떠나면서 심었다는 ‘무학감나무’ 와 무학탄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1988년 문화부에서는 합천 대병면 상천 탑뜰 건너편에 무학대사가 출가하면서 심었다는 감나무 아래 ‘무학왕사출생사적지’라 새긴 비를세워 무학이 합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기도 하였다.(2000-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