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친목회원들과 속초에서 2박 3일

범여(梵如) 2015. 4. 6. 10:28

☞여행일자: 2015년 4 월 3일~5일

☞여행날씨: 흐린 날씨 

☞산행코스: 주문진항-휴휴암-3.8휴게소-하조대-속초중앙시장-한화콘도-척산온천

                 동명항-거진항- 화진포-미시령-용대리

소 재 재: 강원도 강릉시 / 양양군 / 속초시 / 고성군 일원

 

내가 개포동이란 곳을 들어와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한 지가 1983년 9월 17일었으니

올해로 33년째다... 강산이 벌써 3번이나 변해 버렸구나... 내 청춘을 다 바쳐버린 이곳

이제 이 정든 사업장을 재건축으로 인해 사업장을 오는 6월 30일 이전에 옮겨야 한다

개포동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와 열심히 일을 하다가 만난 분들과 친목회를 한 지도 어언

30여년이 다 되어가고 해마다 3월말에서 4월초경에 놀러를 가는데 올해는 속초로 향한다

친목회에서 가장 막내인 나에겐 이 분들이 늘 고마우셨던 분이다.

전직, 시의원, 구의원, 동장,통장, 부녀회장, 예비군 중대장이신데 이젠 모두 다 현직에서

은퇴하시고 여유롭게 사시는 분이다... 그 당시 어린 나를 잘 봐주시어 영업을 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시었고, 지금까지도 끈끈한 유대관계로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다

이곳에서야 내가 할 일이라곤 몸으로 때우면 다 해결되는 곳이다

특히 이 모임은 뚜렸한 목적을 정해놓고 다니질 않고 가다가 좋은데 있으면 들리고

배고프면 아무데서나 들려서 먹고하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행이다

 

4월 3일(금요일)

한계령

개포동에서 08시 30분에 출발하여 경춘 고속도로 가평 휴게소에 들려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동홍천I.C를 빠져나와 인제, 원통을 지나 한계령으로 향하는데 예전과는 달리 길이 너무 좋아

한계령까지 2시간만에 도착한다

그 옛날 인제, 원통에서 군대 생활을 하신 분들은 얼마나 이곳이 오지인지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 라고 했는데 요즘은 ‘인제는 괜찮다 양구가 있으니까? ’ 할 만큼 쿄통이 좋아졌다

장수대를 지나 꼬불꼬불한 도로를 따라 한계령에 올라서니 차가운 바람때문에 이곳은 아직 한겨울이다

 

기상청의 예보로는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가 약간 흐리긴 해도 가시거리는 아주 좋다

한계령에서 내려다보는 설악산 흘림골과 망대암산, 점봉산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백두대간인 이곳은 남,북진을 2번이나 했지만 늘 어둠속에 다닌 탓인지 낮에오니 새롭기만 하다

한계령 정상에서 인증샷

한계령 대피소에서 대청봉 오르는 등로는 5월 15일까지 경방기간이라 문이 굳게 닫혀있다

한계령 정상은 바람이 너무세서 오래있지 못하고 커피한잔 마시고 주문진항으로 향한다

꼬불꼬불한 등로를 내려가는데 맨날 도둑고양이처럼 백두대간길을 밤에만 다녔던 점봉산

초입구간을 지나니 새롭기만 하다... 흘림골, 주전골을 지나 오색약수 아래로 내려서니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윗쪽과는 달리 조금씩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문진항

강원도 강릉시에 속한 주문진읍은 고구려 때에는 지산현이었으며 일명 양곡이라 하였다.

신라35대 경덕왕 16년 (서기757년)에 이르러 지산이라 하며 명주의 속영으로 하였고

고려 8대 현종9년 (서기1018년) 지방관제의 개정에 의해 연곡면에 소속된 마을이었다.(동국여지승람)

조선 영조 10년(서기1734년)에 조사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사기리, 교항리, 향호리, 주문리가 연곡면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 영조 33년(서기1757년)에 사기리, 교항리, 향호리, 주문리는 신리면이 되었다.

강릉부의 면, 리는 조선 영조36년(서기1760년) 전국 읍지를 종합 정리한 [여지도서]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신리면은 4개리이고, 면에는 권농관, 리에는 리장이 임명되어 향촌행정을 수행하였다.

1897년에 작성된 [강릉군지] 방리조에 나오는 리도 [여지도서], [임영지]와 같이 신리면은 4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같은 신리면의 마을구성이 대한제국까지 유지되었으며, 1913년 부제(제령 제7호)가 공포되어

강릉대도호부는 강릉부가 되고 신리면 마을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호수, 인구는 큰 차이를 보였다.

주문진항 너머로 백두대간 능선인 선자령,대관령,고루포기산 너머로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주문진 수산시장

이곳에서 저녁에 먹을 횟감과 점심때 먹을 문어, 전복, 해삼, 멍게를 잔뜩산다

주문진 수산시장의 각종 어패류들

이 집은 문어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계인가보다...

대게도 사서 삶아주는 집에서 삶고...

횟감을 사서 문어와 대게를 삶아주는 골목안 창성식당으로 가서 곰치국을 시킨다

난 처음에 곰치국이 산에서 나는 곰치나물로 끓인 국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생선종류다

이 집 음식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정갈하여 사 가지고 온 문어와 대게로 소주 한잔을

하고 조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목적도 없이 7번 국도를 따라서 속초방향으로 향한다

창성식당 걸래로 걸어놓은 문구

이 글을 읽고 배꼽을 잡는다

휴휴암(休休庵)

1997년 홍법스님이 묘적전이라는 법당하나로 창건하였고, 1999년

관세음보살 형상의 바위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입소문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님들과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기도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암자이기도 하다.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을 모두 놓고 쉬고 쉰다는 휴휴암(休休庵).

휴휴암은 “자연의 순리로 그 가치를 알고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명의 존중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휴휴암은 온갖 풍파, 모진 세상에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또 쉬면서 기도하는 곳“ 이라고 한다

푸르런 동해바다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도심에서 찌든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느낌이다

휴휴암 불이문

사찰에 있는 여러 문 중에서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바로 불이문()이다.

말 그대로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 문을 본당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연결된 하나이다.

이렇게 불이()를 알게 되면 비로소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불이는 분별도 떠났고, 언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데

『유마경』에는 불이법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마가 보살들에게 “불이법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 “모든 것을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고, 알려 해도 알 수

없으므로 모든 물음과 답변을 초월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문수보살이 유마에게 불이법문을 물었다. 그러나 유마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은 그러한 유마를 칭찬하며 “문자와 말까지도 있지 아니한 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은 열반에 들기 전 “나는

40여 년간 단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불이와 통하는 맥락이다.

불이문을 지남은 곧 해탈에 이름을 상징하므로 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해탈문을 별도로 두는 절도 있다. 해탈()이란 미혹의 세계에서 빠져나옴을 의미한다.

그 문을 통과하는 중생들이 미혹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해탈에는 심()해탈과 혜()해탈이 있으며 심해탈은 마음속의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남을 뜻하고, 혜해탈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해탈문은 보통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묘적전(妙寂殿)

1997년 묘적전을 짓고 법단 안의 나무 먼지를 아무리 청소해도 다 없앨 수가 없었고

법당을 공개할 날이 다 되었는데 스님이 일에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다.

앞바다에 나가서 스님들이 멱을 감고 빨래를 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

법당안을 살펴보니 그렇게도 없애기 힘들었던 나무가루들과 먼지들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묘적전에 모셔져 있는 천수천안관음보살(薩)

천개의 눈과 귀로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듣고, 천개의 손으로 중생을 자애롭게 구제한다는 부처님관음보살 과거세 모든 사람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낸  몸에  개의

  있어 모든 사람 괴로움 으로 보고 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나타낸다.

밀법당(密法堂:다라니 굴법당)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나오는 부처님과, 불보살님, 천왕들을 고려불화를 그려놓아

다라니를 모르고 기도 드리는 불자들을 위해 해설집을 편찬해 논 굴법당이다

비룡관음전

묘적전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종무소 2층 건물을 지나 바닷가쪽 해안의 절벽위에

세워진 비룡관음전은 전면에 비룡관음상이 있으며 이곳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연화대 바위법당

일명 연화법당으로 불리는 이곳은 동해해상용왕단이 있는데 방생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대략 100여평 정도의 넓은 바위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으로 휴휴암에서 바닷쪽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북쪽의 해안가를 건너보면 나투신이라 불리는

관세음보살상이누워있는 모습과 보살상을 향해 절을하는 거북이 바위를 볼 수 있다

연화대 주위에는 태아바위, 거북바위, 동물모양,  발바닥모양 바위가 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늘 이곳에서 미역을 따고 드넓은 너래바위에서 말리다가

어느날 우년하 무리지어 노닐고 있는 물고기를 보기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 신기해 휴휴암 주지 흥법 스님께 이를 알렸다 한다.

 

주지 스님은 “관세음보살님도 이곳 바다에서 누워 쉬고 계시는데 하물며 미물도 이곳에서

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하주 보살님을 통해 자비행으로 고기밥을 주기 시작했다 한다.

자비행을 행한지도 여러 달이 지나자 물고기들은 수십마리가 수백마리, 수천마리로 순식간에

떼지어 몰려들어 장관을 연출해 이곳을 찾는 불자님들이나 관광객들이 신기해 한다.

휴휴암에서는 이곳을 연화법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바다에 있는 거대한 너래반석이 연밥같이 파여 있고

파도가 치면 물이 뺑~돌아서 부딪치는 것이 마치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해 이 같이 부른다 한다

연화법당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휴휴암 바닷가에서

누워 계시는 나투신(관세음보살)에게 절을 하고있는 거북이 바위

 홍법스님과 청설모 이야기

어느 날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던 중에

 청설모 한마리가 나타나서 자꾸 주지 스님의 기도를 방해하였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은 청설모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았는데 그때 무지개가 뜨면서

수면 밖으로 관세음보살님의 형상이 나투셨다고(모습을 드러내셨다고) 한다.

 

홍법스님은 "이전까지는 바닷물에 잠겨있던 관세음보살님이 해수면이 낮아지며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암자측의 설명대로 휴휴암 주변에서는 관세음보살의 모습과 똑같은 신기로운 형상의

바위를 비롯해 발가락 모습이 선명한 바위 등 온갖 기이한 모습의 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암자측이 설명하는 자료를 보면 관세음보살은 묘적전 법당이 올려다 보이는 해변에 위치해 있다.

자그마한 절벽을 이루는 큰 바위 아래, 바닷물이 들락날락 거리는 돌무덤에 위치해 있는

관세음보살 상은 길이가 13m로 보면 볼수록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관세음보살 모습 그대로다.

또한 관세음보살 상 우측에는 관세음보살을 향해 기어가는 모습을 한 거북이 모 양의 바위를 비롯해

발가락이 선명한 모습의 발 모양 바위와 바닥이 갈라진 모습의 또 다른 발 모양의 바위, 손가락을

말아 쥔 모습의 주먹바위 등이 흩어져 있어 신비 감을 더하고 있다.

암자측은 거북이 모양 바위는 관세음보살을 향해 기도하는 남순동자로, 주변에 있는 2개의

모양 바위는 누워 있는 관세음보살 상에서 볼 수 없는 관세음보살의 발로 표현하고 있다.

휴휴암의 한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은 바닷가 절벽에 항상 계신다고 했는데 휴휴 암 바닷가에서

그 몸을 나투신 것"이라며 "이런 의미로 볼 때 휴휴암은 그야말로 관음성지"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줌인한 와불(관세음보살)과 거북이 바위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만지고 있는 누님들

바닷가 쪽에서 바라본 휴휴암의 모습

범종루(梵鐘樓)

범종루의 삼천삼백삼십관 관음범종은 현재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장 큰

종으로 종을 치면 업장이 소명되고 앞길이 열리며 복이 들어 온다고 한다.

또한 지옥 중생들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종소리를 울려주는 것이라 한다.

12개의 기둥으로 한면이 3칸씩 정4면으로 조성된 누각으로 내부에는 목어를 비롯하여 순금으로 도금

해놨고 놓은 3330관의 국내 최대의 범종이라 하며 누구나 종을 타종할 수 잇도록 허락을 하고 있다

황금종의 외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범종루 옆에 있는 감로수

지혜관음보살상 앞에

흥법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 첨만독 천일 철야기도를 드리는 2006년 봄에 바다 절벽 밑에서

키가 크고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관세음보살님이 바다에서 용출하신 모습을 친경하고

불사원을 세워 익산에서 나오는 화강암으로 휴휴안 동쪽 끝자락에 보살님 높이 33자 통 돌로

무게 115t 3단 좌대를 합해 총 높이 53자의 지혜관세음보살님을 모셨다 한다.

우측에는 동해해상용왕신, 9용신, 좌측에는 남순동자님을 모셔져 있다.

 

이 보살상은 관음용선 위에 좌측에는 동해해상용왕, 우측에는 신통력이 자유자재한

남순동자상 사이에 금색으로 된 책을 들고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항상 책을 안고 있는 지혜관세음보살상은 학문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학문을,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채워주시는 보살님이시다

 

남순동자는 관세음보살을 왼쪽에서 보좌하며 “백의 관음보살은 설함이 없이 설하고

“남순동자는 들음 없이 듣는다.

감로병의 버들은 언제나 여름이요

바위 앞의 푸른 대는 어디에서나 봄이로다”라는 관음 게송이 전한다.

지혜관음보살상

휴휴암 지혜관세음보살상은 석공예 명장인 한국석조각예술원 고석산 명장이 3년간의

작업 끝에 대작을 완성하여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불심과 예술혼이 깃든 작품이라 한다.

총 높이 53척, 통돌 300톤으로 조성된 국내 최초의 매머드급 지혜관세음보살은 학문통달과

지혜를 주시는 보살님으로, 해상용왕님, 남순동자와 함께 관음용선을 타고 항해하며

중생들을 구제하는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한다.

 

고석산 명장은 일찍이 정종섭선생에게 사사하였고, 전국기능경기대회 석공예부문

입상과 미술대전 특선등으로 석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불교미술전람회등 다수의 전람회에서 수상하였고, 1997년 대한민국 석공예명장의

영예를 안았으며, 미술대전 초대작가에 이어 석공예심사장, 심사위원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강남 봉은사 미륵대불설계와 울산보림사 지장보살, 동화사 약사대불 병풍석등

미술사에 길이 남을 다수의 작품에 참여하였다 한다.

휴휴암의 관음상은 바닷가에 조성되었으면서도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육지(휴휴암)을 향하고 있다. 

해수관음상이 있는 사찰들은 모두 가깝든 멀든 바다를 향하고 있었는데, 휴휴암은 관음상을

조성하면서도 바다를 향하고 있지 않아 그 이름도 해수관음상이 아닌 지혜관음상이다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중국 스님으로 이름은 계차(契此).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다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고, 배는 늘어진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말이 일정치 않고, 아무데서나 눕고 자고 하였다. 언제나 지팡이에 자루를 걸어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 넣어 가지고 거리로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기만하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길흉 화복이나, 날씨 등을 미리 말하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한다.

 “일발천가반 고신만리유 청일도인소 문로백운두(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 靑日覩人少 問路白雲頭)”라고

읊은 그의 게송을 보더라도 그 평생을 짐작할 수 있다. 916년(양 정명 2) 3월에 명주(明州)

악림사 동쪽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미륵진미륵 분신백천억 시시시시인 시인자불식

(彌勒眞彌勒 分身百千億 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이라는 게송을 남기고 죽었다.

그때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휴휴암 포대화상은 부를 상징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해서 얼마나 배와 젖가슴을 얼마나

만졌는지 손때에 광이 난다... 이게 중생들의 집착이 아닐런지...

휴휴암을 구석구석 보고 싶었지만 절에 관심이 없는 친목회원들 때문에 주마간산식으로 보고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다가 3.8휴게소에 들려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3.8휴게소

예전에 3.8선이 그어졌던 곳으로 6.25동란 이전에는 북한 지역었던 곳이다

지금은 휴게소가 있고 동해바다는 그때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도소리만 요란하다

휴게소 전망대에서 바라본 3.8해수욕장

추운 날씨이건만 바다에서 서핑보드를 즐기는 사람이 보인다

아마 저 사람도 내가 산에 미친만큼 서핑보드에 미친 모양이다

 

겨레여! 이곳을 저 파도소리처럼 잊지말자

한때 민족의 사랑도 끊기었던 3.8선

하늘에 사무친 한을 국토통일 그날까지

 

                                (황금찬 시인의 不忘記 中에서)

3.8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고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하조대로 향한다

하조대 관광 안내도

‘해오름의 고장’ 양양(襄陽)땅... 참으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구나

하조대(河趙臺)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 하여 두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조선 정종때 정자를 건립하였으나 퇴락하여 철폐되었으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여 1940년에 8각정을 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때 불에 탄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되었다. 하조대는 동해바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돌출된 만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 복원한 건물로 초익공굴도리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병통을 얹어 소나무와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으며, 정작각 앞에는

조선 숙종때 참판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3자가 암각된 바위가 있다.

이곳은 인접한 하조대해수욕장과 함께 양양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양양의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출처:양양군청>

河趙臺 암각화

하조대 정자각 앞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조선 숙종때  충청관찰사를  지낸 이세근이 쓴 것이라 한다

하륜은 조선조 초기에 민중정치를 표방한 삼봉 정도전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을 살해한 이 방원

(후에 태종)의 책사였으며 조준의 하륜를 따르는 수하였다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

하조대 정자각 앞 바닷가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이 소나무가

아침에 TV 방송이 시작하기전에 나오는 애국가의 영상에 등장하는 소나무다

멋진 자태가 한국인의 기상을 말해주는듯 하다.

소나무의 크기가 약9m 정도이고 수령이 2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군부대 철책이 둘러쌓여 있고 17시에는 군부대에서 철책문을

닫는다고 하여  하조대에서 서둘러 등대로 향한다

하조대 등대옆에 서 있는 바다헌장 표시석

하조대 등대

등대에서 바라본 하조대(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음)와 멋진 소나무

하조대를 나와서 7번국도를 타고 숙소인 한화콘도가 있는 숙초로 향한다

지나는 길에 낙산사가 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관람을 포기하고 양양읍내를 통과한다

예전에 속초 왔다가  귀경할 때 미시령과 한계령이 막히면 구룡령을 넘기위해  다녔던

샛길 방향에는 양양국제공항 표시판이 여행객을 좀 씁쓸하게 만든다.

국제공항이라....2.7km나 되는 활주로는 지금 개점휴업이다

예전에 이 지역 출신의 유력 국회의원이 밀어부쳐 개항한 공항... 세금 먹는 하마가

되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실패한 국책사업은 오늘도 이름만 바꾼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국토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는데 비단 이곳 뿐이겠는가

무안공항, 예천공항 등... 수도없이 많은 공항들이 민초들의 허리를 휘게 하는데

책임지는 인간(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야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하고 현재 당 대표를 맡고 있는 지체높은(?) 분께선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를 40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설0발0를 치면서 야단이다

저런 분들이 대통령 후보에 당 대표라니... 당신네들 맨 정신인지 정말 의심스럽다

요즘 나같은 자영업자들을 비롯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힘드니 알기나 하오... 담 선거에 봅시다

 

우리나라에 비해서 땅덩어리는 80여배, GDP도 수십배에 달하며 전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도 상.하 양원을 다해도 535명밖에 안되는데 400명이라니...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릴 그만하소

아예 전 국민의 국회의원화를 주장하시지요... 국민들이 생각하는 국회의원 수는

딱 50명정도면 맞을것 같소... 당신네들 밥값이나 제대로 하셔요

양양을 지나 속초시내에 접어들어 속초중앙시장으로 향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큰 시장이고 상품 구색도 대단하다

속초중앙시장 명물인 만석닭강정도 술안주 할려고 한박스 사고...

콘도에서 먹을 대게와 소라, 멍게, 거기다가 휴휴암 근처에서 누님들이 뜯은 쑥으로

낼 아침에 도다리 쑥꾹을 끓이려고 도다리를 산 다음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감나무집

한 회원이 속초에서 유명한 집이라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감나무집에

송이감자 옹심이를 시켰는데 말 그대로 대실망이다

음식은 짜고 약간의 불친절함, 이런곳이 유명한 음식점이라면 대한민국

유명 음식점은 지천으로 깔려있고 우리동네 라면집은 명품집이겠다... 두번 다시 안가고 싶은 곳이다

음식점에서 나와 주차장 가는 길에 줄을서서 사먹은 씨앗호떡이 훨씬 맛있다

한화콘도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상봉과 신선봉의 모습

친목회원 한 누님의 사위가 한화 계열사에 근무하는 관계로 한화콘도에 여장을 푼다

콘도 테라스에서 백두대간 구간인 상봉과 신선봉이 구름에 휩싸여 환상적인 모습을

자아내는데 2번이나 걸었던 저 곳을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동해바다쪽은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샤워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든다

 

4월 4일(토)

한화콘도

어젯밤 늦게까지 술마시고 떠들고 노느라 피곤도 할것 같것만  노인네들이라 그런지

6시가 안되어서 다들 일어나는 바람에 콘도 근처에 있는 척산온천에 가서 1시간을 넘는

시간동안  몸을 푹 담그며 여독을 풀고 다시 숙소로 와서 도다리 쑥국에다 밥먹고 해장으로

참이슬 한병 간단하게 비웠는데도 간에 기별도 안 가니 술이 약한건지 내가 술이 센건지 모르겠다

9시가 넘어서 이틀날의 여정을 시작한다

속초 동명항

10여년전 바람친구 장인이 별세하여 이곳에서 저녁먹고 근처 여관에 친구들과 묵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별볼일 없었는데 지금은 현대화로 인하여 상당히 깔끔하다

동명항 입구에서 만난 아낙

울 엄니도 자식들을 위해 저렇게 고단한 삶을 살았겠지

튀김 아줌씨의 낚시밥에 걸리다

주차장에서 점심때 먹을 횟감과 대게를 사러 횟집으로 향하는 항구 길목에는 튀김집이 많다

선그라스를 끼고 잔뜩 멋을 낸 튀김 아줌씨가 꽃새우 튀김 한마리를 서비스로 준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지 않았던가...그것도 나만 먹는게 아니라 옆에있는 누님까지 얻어준다

쬐끔 미안하기도 하고 그냥 갈 수가 없어서...세종대왕(10,000원) 한장으로 튀김을 산다... 아줌씨 낚시밥에 걸렸다

동명항의 갈매기들이 먹이찾기에 한창이다

동명항 횟집

집행부 누님들이 횟감을 사는 동안에 나는 막내라는 특권으로 방파제와 영금정으로 어슬렁거린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일상에서 찌든 때와 스트레스를 저 동해바다에 버리고 아무것도 생각않고 그냥 떠들고 즐긴다

동명항에서 바라본 설악산의 모습

지금이야 경방기간이라 오를 수 없는 산이지만 올해도 한번 올라봐야 할 산이다

말린 생선들이 맛깔스럽다

생선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산골출신아라 생선이름은 잘 모른다

동명항의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니 靈琴亭이란 팔각정이 나온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영금정(바다 가운데에 있는 바위)의 모습

영금정(靈琴亭)은 동명동 등대 동쪽에 위치한 넓은 암반에 붙혀진 명칭으로

1626년 발간된 〈면세일반〉에서 처음 기록을 볼 수 있다

영금정이란 이름은 파도가 석벽에 부딪힐 때면 신비한 음곡(音曲)이 들리는데

그 음곡이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혀졌다.

이 같은 전설을 통해 이 일대가 바다위의 울산바위처럼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돌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말기에 속초항의 개발로

모두 파괴되어 지금의 넓은 암반으로 변했기에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한편 김정호의〈대동지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이곳 일대를

비선대(秘仙臺)라  불렀다

선녀들이 남몰래 하강하여 목욕도 하고 신비한 음곡조(音曲調)를 읆으며

즐기는 곳이라고 하여 붙혀진 이름인데 그만큼 이 일대의 경치가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속초시 자료인용)

영금정에서 바라본 동명항 등대

동명항에서 횟감을 구입한 다음에 무작정  7번 국도를 따라 간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서...

간성을 지나 거진읍을 지날 즈음에 약간의 허기가 져서 횟감으로 술한잔 할곳을 찾는데

마땅한 장소도 없을 뿐더러 바닷가라 바람이 상당히 세차게 불어온다

마침 고성군 국민체육센터 건물이 보이길래 무작정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한다

이곳에 내려 바람을 피할 곳을 찾다가 건물 모퉁이에 기가 막힌 곳에 자리를 펴고

동명항에서 떠온 횟감으로 쐬주한잔 찟거리니... 극락이 따로있나... 이게 극락이제

주린 배를 채우고 기분이 쿨~한채로 무작정 북쪽으로 달리다보니 화진포 관광지가 나온다

동해안 최북단에 자리잡은 화진포에 도착하니 멋진 금강송이 보이고 잘 가꿔진 화진포가 나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사는데 생각보다 비싼 3,000원이나 달라고 한다

회비에서 내니 나에겐 부담이 없지만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2번째 오는데 10년도 넘은 시절에 오늘 친목회에서 한번 온 기억이 난다

지금도 모임을 같이하는 개포동 예비군 중대장의 후배인 金某 중령이 군부대 시설인

화진포 휴양소 책임자로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이틀동안 칙사 대접을 받은 기억이 아련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던 그 친구는 퇴직하여 지금도 가끔 만나는 사이이다

이 기붕 부통령 별장

자유당 시절에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제2인자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자기 아들인 이 강석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기붕 별장 안내문

별장내에 전시된 자료들

이 기붕 부통령 부인 박마리아 여사의 침실

10분정도 전시실을 관람하고 나오니 주위에는 바닷가임에도 불구하고

해송이 아닌 건강한 금강송이 화진포 호수 주위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시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나오니 동해바다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화진포 해수욕장에 세워져 있는 거북이 형상사이로 금구도(金龜島)가 보인다

광개토대왕(金龜島) 안내판

화진포 해수욕장 앞바다에 거북이 형상을 하고있는 광개토왕릉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서기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서기 409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그 이듬해인 장수왕 2년( 서기 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한다

이곳에 광개토대왕능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계림(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문자명왕 2년에 이곳에서

광개토대왕 망제(望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거북섬 성의 구조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성의 정상부인 약45k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조를 축조하였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렸히 남아 있으며

산정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지지대는 잔돌끼움 쌓기의 협축법으로 석축한 보호벽(城)과 방파성(防波城)이

약 60m, 높이 170~230cm, 3개 구간에 남아있다 

화진포 해수욕장 방파제를 지나서 산 속에 있는 김일성 별장으로 향한다

화진포 城이라 불리는 김일성 별장의 안내판

김일성 별장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화진포 앞바다와 광개토대왕릉의 모습

김일성 별장 안내문

김일성 별장에서 만난 김 정일

김일성 별장내에 전시된 자료들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이 입었다는 옷

화진포 해수욕장의 모습

화진포 해수욕장과 군부대 휴양소(콘도처럼 생긴 건물)

김일성 별장에서 바라본 화진호의 모습

화진호 너머로 지금 엄연한 우리 땅의 백두대간 능선이지만 안보라는 이유로 갈 수없는 길이다

내 생애 남북통일이 되어 백두산 정상까지 북녘땅의 백두대간길을 걸을 있을란지...

한없는 서글픔을 느끼면서 김일성 별장을 나와서 근처의 막국수집에서 막국수 한 그릇을 먹고

화진호 언덕에 자릴잡고 있는 國父이신 이승만 별장으로 향한다 

이 승만 전 대통령 별장입구

이 승만 초대 대통령 전시관 입구에는 화진포 역사안보 전시관도 있고 매표소도 있지만

이 기붕과 김 일성 별장 들어갈 때 끊은 표만 있으면 이곳은 그냥 들어갈 수 있다

이 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에서 바라본 화진호의 모습

이 대통령이 생전에 사용했던 제니스 라디오와 녹음기 그리고 훈장

화진포 별장의 유래 안내판

이 전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밀랍인형

이 전대통령의 침실

이 전대통령의 화진포 별장 집무실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에서 화진포호를 배경으로

별장을 두루두루 구경을 하고 바로 위에 있는 기념관으로 향한다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이 승만 대통령의 휘호

富國兵强 永世自由(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해서 영구히 자유를 누리자)

화진포 기념관의 유래 안내판

 

 

 

 

 

 

기념관 내부 전시 자료들

이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입었던 의상들

이 승만 대통령 흉상

이 승만 대통령의 연보

별장과 기념관을 둘러보고 내려오니 별장 우측 아래에 화진포 설화가 담긴 동상이 있어 혼자 가본다

화진포의 전설을 안고 있는 동상

화진포에서 다시 속초로 향한다... 집행부는 저녁에 먹을 대게와 해산물을 사러

속초로 향하고 비주류는 고성에서 미시령길로 빠져 숙소인 한화콘도로 향한다

매주 토욜 저녁이나 일욜 새벽에 베낭을 메고 나가는 습관 탓인지 이 시간쯤이면

산에 갈 수 없으면 한없이 초조해지는 버릇이 오늘도 증상으로 나타난다

누님들이 사가지고 온 해산물에다 저녁을 먹으면서 거나하게 이스리 서너병을 나발불고

후식으로 속이 꽉찬 대게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자정이 넘도록 얘기꽃을 피운다

 

4월 5일

어제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관계로 일어나니 아침 6시가 조금 넘었다

누님들이 아침 준비를 하는 사이에 콘도 주위를 한바퀴 돈 다음에 얼큰한

매운탕에다가 맛있게 아침을 먹고 콘도를 정리한 다음에 체크 아웃을 하고

콘도를 출발하여 척산온천에 도착하여 한시간 반동안 느긋하게 온천욕을

한 다음에 11시경 이른 시간에 서울로 출발한다

척산온천에서 바라본 설악산 울산바위의 모습

 

척산온천과 유래

느긋하게 온천을 하고 나왔는데도 나이먹은 누님들은 씻을곳(?)이 많아서 그런지 나올 생각도 않는다.

20여분을 기다려 서울로 출발하는데 편한 미시령 터널로 가지않고 미시령 옛길로 호젓하게 가보고

싶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서 미시령으로 향하는데 짙은 운해에 휩싸인 미시령은 환상적 그 자체다

미시령

백두대간 남진, 북진 들머리, 날머리를 합쳐 4번이나 지나간 미시령이지만 늘 밤에만

지나갔기에 낮에오니 낯설기만한 미시령... 산꾼들에겐 미시령 휴게소의 초소가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진 곳이 아닌가!... 그런데 낮에 와보니 휴게소는 폐쇄되어

흉가처럼 을씨년스럽고, 소복입고 머리를 풀어해친 처녀귀신이라도 나올것만 같은

음산한 분위기아다

 미시령(彌時嶺:826m)

강원도 고성군의 토성면 원암리와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56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 고개는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미시령(彌時嶺)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 · 연수령(延壽嶺) · 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미시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杆城郡)에는 미시파령이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바다 고을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본조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麗水坡嶺)이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 『택리지』에는 연수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간성군 관액조에는 미시령이 군 남쪽 팔십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간성군 석파령(石破嶺) 남쪽에 미시령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토성면 원암리(元巖里)에 위치한 고개 지명으로

 미시령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이름으로 연슈파 또는 큰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승만 대통령이 제호했다는 미시령 표시석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용대리로 향한다

미시령 안내판

이색 선생이 썼다는 미시파령의 詩구절

미시령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짙은 안개가 자욱한 꼬불꼬불 한길을 내려와 넓은 4차선 도로를 만난다

원통과 인제를 지나고 홍천 어디쯤에서 담백한 막국수 한그릇으로 점심을 먹고 서울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시 술한잔으로 회포를 풀고 각자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