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땅 한바퀴 훠이~훠이
☞산행일자: 2015년 4월 17일~19일(2박 3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토욜 오후부터 계속되는 비
☞참석인원: 서울 인테리어협회 회원 17명과 함께...
☞여행코스: 땅끝마을-노화도 산양 선착장-완도 신비의 뱃길- 세연정-이목항-뾰족산-예송리해수욕장
동천항-완도 화흥포항-완도 정도리 구계등-장보고기념관-무안 낙지집
☞소 재 재: 전남, 해남군 송지면 / 완도군 노화도, 보길도, 완도읍 / 무안군 무안읍
이 모임을 시작한 지가 20년이 넘은 탓이라 서로 눈빛만 봐도 잘아는 지라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사업에 상당히 도움이 유익한 단체이다
강남, 서초구에서 그래도 내노라하는 실력있는 업체의 사장들이라 노는것도
상당히 굵은 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친목도 다지고 머리도 식힐겸 여행을 떠나는데
올해는 총무님이 해남출신이고, 보길도가 고향이신 사장님이 계셔서 남도길로
여행지를 잡았다... 부지런히 업무를 정리하고 느즈막한 오후 5시에 양재동
시민의 숲에 모여서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싣고 땅끝 마을로 향한다
4월 17일(금)
총무님이 작성한 여행 계획표
해남군 지도
대한민국 지도중에 육지에서 가장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해남땅
육지에서 가장 끝 부분이라서 땅끝탑이 있는 해남은 백제때에는 새금현(塞琴縣)이었으나
조선 태종9년에 진도현(珍島縣)과 합쳐져 해진현(海珍縣)이 되었다
그 뒤 태종12년(14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옥산으로 옮겼고 세종(1437년)에
해남과 진도를 다시 나누어 해남현을 복구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계생은 그의 시에서“남쪽나라 따뜻하여 겨울에도 눈이없고, 굽이진 물가에 소금을 구우니
낮에도 연기가 이네”라고 했던 해남은 제주도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유배의 땅이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흔히 “고금도에 가서 족보자랑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그만큼 당파싸움에 말려
쫒겨왔을지라도 뼈대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곳이 해남이다
해남은 우리나라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는 유배지로 지정됐다
유배자의 35%가 전라도로 보내졌는데 그 중에 50%가 해남으로 보냈다고 한다
4월 18일(토)
서울에서 출발하여 저녁 9시 30분경에 해남읍에 도착하여 총무인 민 사장 친구가 섭외해 논
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겸한 반주로 술한잔 얼큰하게 마시고 땅끝마을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쯤 됐다
숙소를 배정받아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나서니 바닷바람이 알싸하다
지난해 9월에 땅끝기맥을 마무리하면서 들렸으니 7개월만에 다시 땅끝마을 찾은 셈이다
숙소를 나와 도로를 따라서 사자봉으로 향하는 길의 도로옆 벚꽃은 이미 다 져버렸다
길가 옆에 있는 바람둥이 꽃도 벌써 내년을 기약하며 이별을 준비한다
산행이 아닌 여행으로 나서니 조금은 낯설지만 새로운 맛이 있긴하다
사자봉 오르는 길엔 땅끝을 상징하는 詩碑들이 많이 보인다
땅끝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사자산(獅子山:156.2m)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며
예전에는 칡이 많이 난다고 해서 갈두산(葛頭山)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사자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땅끝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산 전체가
공원화 되어 버려서 마치 서울 남산이나 부산의 용두산같은 느낌이 든다
사자산 정상에서 친목회 사장님들과
흐린 날씨속에 아침해는 벌써 바다위로 올라와 버렸다
사자산 전망대 앞에 있는 땅끝지명 유래비
땅끝의 유래는 한반도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인 해남군 송지면이다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 깃점을 이곳 해남현에서 잡고 북으로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라 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고 있다
사자산에서 바라본 갈두항(葛斗港)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갈두항이 한 눈에 보이고 항구가 있는 마을이 땅끝(土末)마을이다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는 원래 마을 이름은
‘더 이상 갈 수 없다’ 라는 뜻의 갈수리(葛水里)였는데 물이 귀한 해안지방에서
좋지 않은 이름이라 해서 ‘갈두리’로 바꿔 불렀으며 호젓한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의 땅끝마을은 모텔과 식당이 빼곡히 서 있다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보길도와 노화도의 모습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오며 바로앞에 노화도와
보길도가 보인다... 맑은 날이면 한라산이 보인다고 한다
보길도하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떠오르는 섬이다
고산 선생은 제주도를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보길도로 피항을 했는데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서 세연정(윤선도의 원림) 부근을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정원을 꾸몄으며 자연 계곡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세연정이란
정자를 지어 “어부서시사”란 詩를 썼다고 한다
사자산에서 바라본 진도
지난해 이 맘때 세월호가 침몰하여 나라 전체가 비통함에 젖게한 진도 앞바다는
오늘은 바람한 점 없이 조용하건만 사회적인 파장은 아직도 여전하다
어린 학생들을 말없이 삼켜버린 저 바다는 유가족들에게는 통탄할 바다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모든 슬픔을 잊어 버리는데는 세월이 약이건만 아직도
그 아픔을 들먹이며 이용하는 무리들은 과연 이 나라 국민인지 의심스럽다
세월호 침몰 1주기에 팽목항을 박근헤 대통령이 방문하니 유족들은 빈소를
치우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걸 전쟁에서는 초토화 작전이라고 한다
그들이 뭘 잘했다고 국가 원수에게 무례한 결례를 범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들이 세운 공로는 뭣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뭔 잘못을 저질렀나
그들이 정작해야 할 일은 청해진 사장집과 이준석 선장 재판정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당신네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동방예의지국인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했단 말인가... 진도 앞바다는 말이없다
사자산 봉화대
봉화대는 옛날 이곳에서 불을 지퍼 뱃길을 유도했다고한다. 봉화대에서 남쪽 아래500m 거리가
우리나라 육지부의 최남단,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01초 지점으로 조국의 무궁함과
땅끝임을 알리는 높이 10m에 바닥면적 3.6m인 땅끝탑이 세워져있다.
갈두산에는 매년 1월1일이면 땅끝 해맞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
나 말고도 개포동에서 왔다간 사람도 있구나
땅끝탑(土末塔)
땅끝 끝자락 토말탑이 있는 바닷가 갯바위가 위도(북위 34도)상으로 한반도의 끝이다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사자봉 아래 바닷가에 있는 땅끝탑... 이젠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의 깃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을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를 잡아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땅끝탑의 모습
사자산의 곳곳에 땅끝詩碑가 많이 보인다
사자산을 한바퀴 돌고 아침밥을 먹으러 땅끝마을 식당로 향한다
이곳 땅끝마을에서 시작되는 삼남길의 시작되는 곳이자 끝나는 지점인 곳
삼남길이란 한반도의 대동맥으로 한양에서 해남을 거쳐 제주 관덕정에 이르는
길로서 조선시대 10대 간선로 중 길이는 북쪽 서수로라는 경흥로가 가장 길지만
배를타고 제주까지 가야하는 삼남길은 여정이 가장 긴 길이다
조선시대 10大路
삼남지방 표시지도
땅끝마을 앞 바다에 있는 맴섬
땅끝마을 앞 갈두항 옆에는 조그만 섬이 두개 나란히 있다
한 쌍의 매미처럼 보인다고 해서 맴섬이라고 불린다
맴섬앞에 있는 형제섬
갈두항 매표소 뒤에 있는 땅끝마을 표시석
아침 산책을 마치고 식당으로 향한다
아침식사는 어제 내려오면서 다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으로 총무님인 민 사장 친구집 식당에서
부드러운 전복죽으로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짐을 챙겨 보길도를 가기위해 갈두항으로 향한다
갈두항으로 향하기 전에 땅끝마을 조형탑 앞에서
보길도가는 여객선 시간표
보길도 관광 안내도
갈두항에서 맴섬을 배경으로...
갈두항에서 산양진항가는 10시발 장보고호를 타고 보길도를 향하는데 보길도를 가기 위해서는
노화도 산양진항까지는 배를 타고가서 산양진항에서 보길도로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배에다
버스를 실고 가는데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서 뱃머리에서 주위의 산천을 감상하면서 노화도로 향한다
갈두항 앞바다의 모습
바다에서 바라본 사자산과 맴섬
갈두항 입구에 서 있는 보길도 관광 안내도
땅끝마을은 점점 멀어지고...
노화도 산양진항에서 땅끝마을 갈두항으로 향하는 뉴 장보고항
똑닥이 카메라로 잡으니 잘보이지 않지만‘ 전복의 고장 노화도’라 적혀 있는데 전복으로 유명한 고장이란다
이곳 노화도와 보길도가 우리나라 전복의 약70%가 난다고하니 정말 대단한 양이다
전복에는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여, 옛부터 고급 수산물로 취급되었는데, 피부미용, 자양강장, 산후조리,
허약체질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식용뿐만 아니라 약용을 목적으로 드시는 분들도 많다. 일반적으로 조개류는
피로해진 신경을 회복시키는 작용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전복은 시신경의 피로에 뛰어난 효능을 발휘한다.
전복은 자양강장에 좋아 우리나라의 전복은 옛날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먹는 식품으로도 유명하며 햇볕에
말린 전복포는 옛날부터 일급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왔다. 몸이 허약할 때 전복죽을 끓여 먹으면 기운이 나며,
소변이 잘 나오게 되며 요오드 함량이 높고 머리가 아프거나 귀가 울리며 혀와 목이 마르는 증세가 있을때
전복을 먹으면 신기하게 낫기 때문에 간의 힘을 키워준다고도 알려져 있다.
껍질은 한방에서도 석결명이라 부르며 치료약으로 쓰이고 있다. 전복은 조개류 중에서도 수분함량이
많고 단백질, 지방 함량이 적은편이다.
또, 비타민, 칼슘, 인 등의 미네랄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전복을 고아 먹이면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하며 전복자체에도 높은 영양가를 지니고 있지만, 전복의 변에는 보다 더 높은 영양가가 있다
노화도 산양진항의 모습
노화도의 지명유래는 염등리 앞 300ha에 달하는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노화도라 하였다고 하며 또다른 설은 윤선도가 이 섬으로 올 때 어린 종을 데리고 왔다 하여
노아도(奴兒島)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 무인도였으나, 1864년(고종 1) 이후 영암군의 관할에 속하여 궁감(宮監)이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왔으며, 1870년에 면민들의 청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島鎭)이라 하였다.
1896년완도군이 설치되어 노화면, 보길면, 넙도면으로 분리되었으나 1916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3개 면이 노하면으로 통합되었고, 1980년 노화읍으로 승격되었다
주민 대부분은 반농반어에 종사하며 농수산업의 비중이 80% 이상이다.
2007년 말 현재 토지 구성은 현재 3.76㎢, 밭 6.03㎢, 임야 14.19㎢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를 비롯하여 콩·감자·고구마·참깨·마늘 등이 있다.
수산물로는 연안 일대에서 도미·멸치가 잡히며 특히 굴·김·톳 양식을 통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한 주목리와 석궁리에서는 납석이 채굴되어 내화벽돌과 타일의 원료로 일본과 대만에
수출하여 동양 최대의 납석광산을 형성하였다. 지금도 2개소의 광산에서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대당리에는 1884년에 세워진 관찰사 조강하송덕비(趙康夏頌德碑) 등과 7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이포리에는 조개더미가 있다. 염등 마을은 노화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알려져 있다
노화도와 보길도의 지도
노화도 관광 안내판
노화도 산양진항
노화도와 보길도는 각각 다른 섬이며 노화도는 읍소재지이고 보길도는 면소재지다
산양진항이라는 조그만 항구에는 그리크지 않는 배들이 많이 보이는데 한결같이
배에는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복의 먹이인 미역과 다시마를 키우고
전복 양식을 하기 위해서는 크레인이 필수장비라고 한다
전복 양식장으로 유명한 완도군내에서도 노화도와 보길도는 전복 양식이 가장 활발하다
이곳 어민들은 보통 억대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아주 부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땅끝마을 갈두항에서 산양진항으로 잇는 여객선이 30~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는 뜻이다
산양진항에서 버스를 타고 완도 신비의 바닷길을 가는데 마을로 접어드니 우리가
타고 간 28인승 리무진 버스가 들어갈 수가 없어서 1km가량을 후진하여 겨우 마을을
빠져나와 보길도 원림으로 향하는데 촉촉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보길도 지도
보길도의 지명의 유래를 보면,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가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보길도라 불렀다.
1694년 이후 영암군 관할에 속하여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7)에 면민들의
진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道鎭)이라 칭하였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으로
병자호란 당시 수많은 노복(奴僕)과 의병을 태운 뒤 강화도로 가는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맨발로 눈길을 걸어가 청나라 당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이에 세상을
등지고자 마음을 먹고 제주도로 향하던 고산은 풍랑을 만나 잠시 보길도의 황원포에 피항을
하는 중에 보길도의 아름다운 산수에 매료되어 아예 이곳을 눌러살게 되는데 그의 나이 51세다
고산은 자신이 정착한 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고 칭하고 격자봉 정상에 새로 집을지어
낙서재(樂書齋)라 명명한 후 85세의 일기로 낙서재에서 숨을 거둘때까지 세연정, 곡수당,
무민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연정 유채밭에서 바라본 광대봉의 모습
윤선도 원림
입장료를 내고 전시관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 尹善道 園林:명승 제34호)
완도군 보길면 부항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368호 보길도 윤선도 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 윤선도 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명승 제34호
재지정되었으며 지정구역 8만 1,745㎡. 보호구역 39만 8,983㎡이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km, 해남반도에서는 12km 떨어진 외딴섬이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조선조 인조 15년(1637년)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 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 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 원림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전시실을 뒤돌아서 세연지 가운데 있는 세연정으로 향한다
세연지(洗然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꽤나 굳은 비가 내린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진영
윤선도(尹善道)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로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아버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이다.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체이부정설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 보내다시피 한 인물이다
세연지 혹약암(惑躍岩)
세연지 계담(溪潭)에 있는 칠암(七岩)중에 하나로 이 바위는「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 “뛸듯 하면서 뛰지 않고 아직 연못에 있다”
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세연정 비홍교(飛虹橋)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의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樓)에 오른다” 고 기록되어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 부른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方壇)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사투암(射投岩)
세연정 주변에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七岩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에 하나인 사투암(射投岩)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틀려진 모습이다
틀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을듯 깨끗하고 단정하여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의 뜻이며
고산연보(孤山年
고산 선생은 다방면으로 재능을 가지셨던 모양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팔방미인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 중에 하나가 세연정과 손수 가꾸었다는 정원을 보면 타녹을 할 정도이다
동료 사장님들과 세연정을 배경으로...
동대(東臺)
세연정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 동대와 서대가 남아 있는데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평평한 모습이다
세연저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판석보 옆에 위치해 있고, 그 규모는 가로 6.7m와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약 1.5m이며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군무(群舞)를 즐겼던 곳으로 평형이다
세연정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雨期)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졌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세지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을 남겼다.
현재 쓰이는 섬 내의 지명도 거의 그가 붙인 것이다.
부용동 원림 전시실
윤선도 원림 전시실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부용동 원림 전시장을 나오니 봄비답지 않게 여름철 장마때처럼 비가와도 너무 온다
비 때문에 스케줄대로 움직이기는 아무래도 무리일것 같아서 버스 주차장으로 가니
동료 사장들이 가건물 노점에 몰려있어 가보니 황칠나무로 담은 술을 마시고 있다
담금주에다 전복 삶은것, 미역, 김 등을 다양하게 파는데 연세 드신 분이라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사는 바람에 60여만원을 사는 바람에 물건이 동이 났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사람치고 기분좋은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식사 장소인
이목항으로 향한다
이목항에서 바라본 보길대교의 모습
식사 장소인 수정식당
푸짐한 전복에다가 활어회
오늘은 이곳 보길도 출신인 중앙장식 김철홍 사장님의 삼촌이 보길도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전복 양식장을 가지고 있는데 장조카가 내려온다고 하니까 자기가 키우는
양식 전복이 아닌 자연산 전복에다가 자연산 활어를 식당에 직접 공급하여 줘서
식대에는 전복과 활어회는 빼버리고 식당은 매운탕과 스끼다시, 술값, 식대만 받는다
사실 이렇게 좋은 회는 먹기가 쉽지도 않을 뿐더러 금액도 엄청날 터인데 공짜라니...
알고보니 김 사장님의 삼촌은 연 수익이 10억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재력가란다.
감사! 감사! 잘 먹었습니다
아직까지 바깥에는 비가 내리기에 비맞으며 일정을 강행할 필요도 없기에 느긋하게
2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점심만찬을 즐긴 다음 식당밖을 나오니 아직도 비가 내린다
다시 보길도로 향하여 동천석실과 공룡알 해변 관광을 가기로 했으나 일정을 변경하여
보길도 일주도로를 따라서 드라이버 하기로 결정을 한다
해변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옥리 뾰족산 아래의 조금만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가는 길에서 만난 소주병더미... 엄청 드셨구먼
식당에 도착하니 이곳 역시 김사장과 먼 친척되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사장님들은 차에서 내려오질 않고 몇명만이 김 사장을 따라 나선다
김사장님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는지 조금전에 바다에서 잡아왔다는 싱싱한 빙어와 갑오징어를
삶아서 즉석에서 먹는 맛... 소주는 절로 넘어가고 둘이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며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던 사장님들이 뒤늦게
몰려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빙어와 갑오징어회가 금방 동이 나버렸다
복어도 꽤 많이 잡아왔다
보옥리 횟집에서 바라본 뾰족산의 모습
이곳은 해가 넘어갈 즈음이면 서쪽 해안의 정자리의 망끝전망대와 보옥리 사이에 있는
해안도로는 보길도의 서쪽 바다및 하늘을 물들이는 해넘이와 낙조를 감상하기 딱 좋은 곳이란다
보옥리 바닷가에는 뾰족산(보족산:195m)과 남쪽 기슭에는 예송리의 깻돌해변 못지않은
아름다운 몽돌해변이 있는데 크고 둥글둥글한 갯돌이 마치 공룡알처럼 거대하다고 해서
공룡알 갯돌밭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또다시 칙사대접을 받은 다음에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예송리해수욕장
예송리는 보길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에는 예작도, 당사도, 소안도, 기도(소섬)등이
먼 바다에서 밀려드는 파도를 누그뜨리는 덕에 예송리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예송리에서 표면 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촉)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
록수림이 장관을 이루는 예송리 해수욕장은 작은 자갈이 깔려 있고 중리 해수욕장도 경치가 빼어나다.
풍어와 도서민의 무사를 기원하는 당제를 매년 섣달 그믐날 모시며 지신밟기와 농악놀이가 행하여진다.
또한 큰 나무나 바위에 고사를 지내는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청별 앞바다에 매립사업이 이루어져 행정관서나 상가가 청별리 선착장에 집중되어 중심지가 되고 있다.
예송리 앞바다는 미역이나 톳을 양식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고 매년 양식장에서 거둬 들이는 수입이 만만찮다고 한다
게다가 예송리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과 짜잘한 깻돌로 뒤덮인
해변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완도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예송리 깻돌해변은 여름철엔 해수욕을
즐기기 좋고 겨울철엔 해돋이로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롤 이름이 나있는 곳이다
예송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
이곳 예송리 해변을 거닌 다음에 예정시간보다 1시간 먼저 완도로 가기위해 동천항으로 향한다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일기가 불순하면 배가 뜨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예정
시간보다 1시간 먼저 동천항(17:00)을 출발하여 완도 화흥포항으로 향한다
노화동 동천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약 40분 걸려 완도 화흥포항에 도착하니
모두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다들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섬에 갇히면 애로사항이 많기에...
완도 화흥포항
화흥포항에서 배를타고 정도리 구계등으로 향한다
정도리 구계등(명승 제3호)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152번지외 규모 : 길이 800m, 폭 200m나 되는 곳이다
구계등은 「9개의 계단을 이룬 비탈」이란 뜻으로 거센 파도에 닳고 닳아진 갯돌이
바다 밑으로부터 해안까지 아홉 계단을 이루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배후에는
참나무, 떡갈나무 등 40여종의 상록수와 단풍림이 우거져 있어 삼림욕과 다도의
석양을 보는데 좋은 곳이다
구계등 해변에서 돌멩이를 들어 내리치니 천둥소리가 나는듯 하다
잠깐의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강한 빗줄기로 바뀌는 바람에 서둘러
버스에 올라 완도읍에 있는 숙소로 향한다
완도항 앞에있는 로망스 모텔
이튿날 밤의 숙소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청결상태도 불량하고 거기다가
한방에 6명이나 자라고 하니 조금은 심한듯 하다
방을 추가로 얻어려고하니 빈방이 없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방 배정을 받고 저녁을 먹으려고 나가려하니 비가 너무 많이와서
나혼자 나가지 않고 숙소에서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든다
19일(일)
완도군 지도
완도는 면적 50.2㎢, 해안선길이 63.9㎞이고 면적 50.2㎢, 해안선길이 63.9㎞이다.
해남에서 남쪽으로 48㎞ 가량 떨어져 있고, 주위에 고금도·신지도·사후도 등이 있다.
섬 이름은 빙그레 웃을 완(莞)자와 섬 도(島)자를 써서, 고향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장보고가 완도읍 장좌리 장도를 중심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동쪽은 강진현에, 서쪽은 해남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52년(명종 7)에
군내리에 가리포진이 설치되었다가 1896년 완도군의 신설로 군내면이 되었다.
1922년 완도면으로 개칭되고, 1942년에는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의 북부는 군외면, 남부는 완도읍으로 관할구역이 나누어졌다.
최고점은 섬 한가운데 있는 상황봉(644m)이며, 북쪽에는 숙승봉(432m)·백운봉(462m) 등의 산지가
발달하였고, 남쪽에는 낮은 산지와 소규모의 평야가 있다. 해안은 암석해안으로서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3℃, 연강수량 1,699mm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쌀·보리·고구마·마늘·밀감·유채 등이 생산되며,
연근해에서는 고등어·도미·삼치·갈치·멸치·붕장어 등이 잡히고, 김·미역·굴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간석지가 넓고 기후 조건이 좋아 전국 제일의 수산양식지로 꼽힌다.
문화재로는 주도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28), 장도 청해진유적(사적 308), 완도향교(문화재자료 107),
완도객사(문화재자료 109), 완도 정도리의 구계등(명승 3), 완도법화사지(시도 기념물 131) 등이 있다.
그 밖의 볼거리로는 법화암, 청해진 수석공원, 수목원, 쌈지 인공폭포 등이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한 모녀 전설과 청해군사의 노래라는 민요가 전해지며, 장좌마을에서는 정월 초사흗날 당제를 지낸다.
일부 남쪽 해안은 다도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해안 일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숙소에서 600여m 떨어져 있는 완도관광호텔 해수사우나에 들려서
2시간정도 사우나를 즐긴 다음에 택시를 타고 숙소롤 와서 짐을 싼 다음에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마치고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완도 일주를 하기로 하고 버스에 오른다
완도항의 모습
식당에서 나와 버스에 오르는데도 비는 그칠줄을 모른다
구질구질하게 비를 맞으며 관광을 하느니 여행 스케줄을 줄이고
버스로 완도 해안도로를 일주하고 해남 두륜산과 대흥사, 목포 여행을
포기하기로 회원 전체의 의견을 모은 다음에 장보고 기념관이 있는 청해진으로 향한다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는 원래 장좌리(張佐里)로서 장씨(장보고를 칭함)가
있던 곳으로 표기되어 오다가 합병과 동시 민족역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왜정시
개명 하여 장좌리(長佐里)라 칭하며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의 설치로 부락이 형성되어
동남아에 명성을 떨쳤으나 청해진이 폐진됨으로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나
고려대에 정언이현이 귀양 온 곳으로 그의 숙인 혜일승이 같이 와 절을 짓고 포교한 곳이다
삼별초난 때에는 송징장군이 이곳에 있었다하나 후손은 없는 것 같다.
임난 후 인도장씨, 진주소씨, 창원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한 후 1664년 광해군이
제주에서 입숙한 직후 경호를 맡다가 중추부령사로 완도에서 정착하고자 현풍곽씨,
황씨, 문씨등이 입주하여 온 곳이다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기념관은 1200년전 완도에서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던 장보고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정신을 재조명하기 위해
2008년 2월 29일에 개관하였으며, 1층 기획전시실에 마련된 ‘완도의 역사와 문화’
특별전은 선사시대의 완도, 통일신라시대의 완도, 고려시대의 완도, 조선시대의 완도
근현대사의 완도, 완도의 현재와 미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완도의 역사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장보고 기념관 입구에서
장보고(張保皐)
원래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전해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張)이라는 성과 보고(保臯)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長寶高’ 혹은 ‘張寳高’로 되어 있으며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으며, 장보고와 정년은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이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828년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오늘날의
완도인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했다. 왕이 허락하자 1만 명의 병사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교관선(交關船)을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을 보내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에 신라에서는 왕의 사촌인 김균정(金均貞)과 조카인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김균정이 살해되고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金祐徵, 뒷날의 신무왕)은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838년 상대등 김명(金明)이 희강왕 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민애왕, 재위838~839),
김양(金陽) 등이 병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김우징을 찾아와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839년 장보고는 김우징, 김양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장보고는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임명되었으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장보고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되었다.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섬사람[海島人]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청해진에 웅거하여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유사》에는 신무왕이 자신을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장보고에게 약속했고,
이를 어기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보고의 일대기
장보고의 흔적들
장보고 기념관을 두루 살펴보고는 나머지 완도와 해남, 목포의 일정을 단축하고 무안으로 향한다
민사장 친구의 집
몇년전 영암과 무안에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식사를 했던 적이 있었던 식당
오랫만에 왔다고 어제 산에서 따왔다고 하는 자연산 두릅에다 자연산 장어를
내오면서 1인당 2점만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나홀로 산행을 하는 독립군은
두릅같은 건 하도 먹어서 눈길조차 주지않고 장어 2점에 먹는 술맛은 쥑인다
거기다가 일기가 좋질않아 세발낙지는 없고 중낙으로 점심상을 대신한다
인테리어 협회 사장님들...
두릅에다 자연산 장어, 중낙에다가 싱싱한 육회로 풍성한 점심상을 느긋하게
즐긴 다음오후 2시 조금 넘어서 서울로 향하여 오후 6시 조금넘어 서울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