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梵如) 2015. 7. 17. 18:14

 

☞ 일 자: 2015년 7월 9일 ~ 12일(3박 4일)

☞ 날 씨: 맑은 날씨에 무척 더움

☞ 인 원: 알파3050산악회 26명과 함께

☞ 코 스: 보석국제호텔-주차장-백두산 북파(천문봉)~천지~장백폭포~온천지대~목단강

             하와이호텔(11일)~재래시장-목단강 공항~인천공항(12일)

☞ 소재지: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의 백두산 일대

 

서파로 올라 백두산 천지를 멋지게 감상한 다음, 다시 송강하(松江河)에 이도백하(二道白河)로

이동하여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외부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호텔로 들어와 방 배정을 받는데 이리저리

방배정을 하니 여자 3명 남자 1명이 남아서 부부로 오신 한 분이 양보하여 방 하나는 더 얻지 않았다.

처음 뵌 그분은 최근 공직에서 명퇴하였다는데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와 같은 종씨(경주김씨)이다

나는 상촌공파이고 그 분은 계룡군파이라고 하니 무척이나 반갑다

방에 들어와서 샤워를 마치고 술을 좋아하는 몇 분이서 별도로 모여 호텔 정문앞 야영장에서

양꼬치에다 중국 곡주(고량주)를 마시는데 일행중에 리딩 대장의 친구분이라는 스쿠버님의

재치있는 夜說에 일행들이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음보를 터트리며 늦은 밤까지 놀다 방으로 들어온다

보석국제호텔(07:00)

이도백하(二道白河:중국식 발음:얼다오바이어)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조자치주

안투현(安圖縣)속해 있는 도시로 10여년 백두산을 가기위해 왔을때 비해서는 상전벽해가

됐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으며 이 도시는 해발 750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천지에서

북쪽으로 약 45km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에 백두산 북파쪽으로 오르기 위해서 다시 버스에 오른다

호텔이 있는 이도백하(二道白河)진에서 차량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북파산문에 있는 매표소에 도착하니 토요일라 그런지 북파쪽의 천문봉으로

향하는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 가이드가 표를 끊은 다음에

산문매표소에서 버스를 이용해 20여분가량 이동 한 후 또다시 표를 구입한다  

북파산문 입구의 모습

북파산문 입구에서 인증샷

백두산 북파산문 입구(08:00)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가이드가 들고있는 깃발을 보면서 일행들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북파산문 주차장의 모습

30분이상 줄을 선 다음에야 버스를 타고 다시 30여분을 달려서 버스에 내린 다음에 또다시 버스를 기다린다

파일:Jilin-map.png

중국 길림성 지도 (위키백과 인용)

천문봉으로 오르는 주차장(08:30)

또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서 30분을 기다린 다음에 미니버스에 오른다

이곳 주차장이 해발 2,200m라고 하는데 그렇게 높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예전에 이 곳을 왔을때는 갤로퍼같은 지프차로 천문봉 아래까지 갔으며 그 당시

일기가 불순하여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람이 그리많지 않은걸로 기억이 되는데

오늘은 날씨가 쾌청한 탓인지 엄청난 인파로 인해 천문봉을 오르기도 전에 지친다

이곳 백두산도 생각보다 상당히 덥다... 독립군(나홀로 산행) 체질이라 이런곳은 딱 질색인데

170대나 되는 미니버스(한국명:쌍룡에서 생산되는 이스타나:이곳은 벤츠)가 정신없이

천문봉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주차장에서 인파들에 시달려 진이 다 빠진 다음에야 미니버스에 올라 천문봉으로 향한다

꼬불꼬불한 길을 버스는 달리는데 이리저리 몸이 쏠리면서 천문봉으로 올라간다

천문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정신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

박종율님의 ‘산경표를 따라서’에서 인용

장백산 관리사무소(09:30)

30분을 넘게 버스를 기다린 끝에 또다시 20분을 넘게 달린끝에 천문봉 아래 장백산 관리 사무소에 도착한다

주차장을 나와  천문봉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이곳은 해발 2,600m 지점인 고산툰드라

지대라 그런지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아 마치 사막길을 걷는 느낌이다

천문봉으로 오르는 인파 대문에 천문봉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천문봉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가이드가 거기에 올라가봐야 발디딜 틈도 없으니

가지말고 천지가 잘 보이는 좌측으로 가라고 하는데 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백두산 오기도 쉽지 않지만 1년에 230일 이상 천지를 볼 수 없다는 날씨에 이렇게

맑고 청명한 날씨에 가지 말라니...가이드와 우리는 主客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가이드가 ‘갑’질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대꾸하는 사람이 없다

한번 받아버릴까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대장과 총무님을 비롯한 집행부가 힘들것 같아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참고 집행부를 따라서 천지가 잘보이는 곳으로 향한다

천문봉(天文峰:2,670m)

백두산 16봉중 북쪽에 있는 봉우리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1958년 이 봉우리의

북쪽에 백두산 기상관측를 세울 때  기상대를 상징하여 천문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봉우리 정상에는 천지를 향한 ‘천상은병풍’에는 오색 영롱한 비취주옥들이 박혀있고

그 앞에는 수리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용각봉이 있다

참으로 착한 우리 일행

가이드가 천문봉으로 오르지말고 천지가 잘보이는 곳으로 가라고해서 그쪽으로 가는 중이다

천문봉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천문봉이 무너질까 걱정이다

천지의 둘레는 14km이며, 천지 주변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 신비한 구름에 싸인 백운봉, 독수리

부리처럼 생긴 천문봉 등 해발 2500미터가 넘는 봉우리 16개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파로 오르면 천지를 위에서 내려다 보지만 북파로 오르면 천지에 보다 가깝게 갈 수 있다

아~~~天池

어제 서파에서 바라본 천지보다 오늘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의 물빛은 훨씬 맑고 영롱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연중 운무에 가려있어 30%만이 천지를 볼 수 있다는데

난 이틀동안 서파와 북파에서 멋진 천지를 보았으니 분명 행운아임이 아닐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민족의 성산(聖山), 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 읍루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도 자기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 전설화, 신격화했다. 

그래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에게도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 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하여 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하며, 명칭도 달리하여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백두산이라 부르고 있다. ,

天池 표시석 앞에서 인증샷

1983년 여름에 등소평(鄧小平)이가 이곳에 올랐던 기념으로 세운 표시석이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같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장백산, 또는 태항산이라 부르고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백산, 개마산, 도태산으로 불리운다... 늘 그리움의 대상인 백두산은 그저 그런 산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민족의 성산 (聖山) 또는 영산 (靈山) 으로 백두산을 말하고,

이 땅의 크고 작은 산들과 그 줄기를 모두 백두의 대간 (大幹) 과 연관짓고 있다.
그런 생각의 큰 틀을 일찍이 육당 (六堂) 최남선 (崔南善) 은 구체화해 읊은 바 있다

.이름하여 백두산은 "우리 종성 (種姓) 의 근본 (根本) 이며, 우리 문화의 연원 (淵源) 이며,

우리 국토의 초석 (礎石) 이며, 우리 역사의 포태 (胞胎) 이며, 우리 생명의 양분 (養分) 이며,

우리 정신의 편책 (鞭策) 이며, 우리 이상 (理想) 의 지주 (支柱) 이며, 우리 운명의 효모 (酵母)" 라고

했으며 그는 백두산 기행기를 쓰면서 제호를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라고 했다.

 

근참이란 겸허하고 어렵게 찿아 뵙는다는 뜻인데 난 어제, 오늘 이틀동안 너무나 가볍게

이렇게 멋진 仙景을 감상했으니 혹 나중에라도 백두산을 가벼이 볼까 걱정이다

 

백두산을 육당선생은 ‘조선의 근본’이라 했고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백두산을 ‘모든 산의 어버이’라고 불렀다

백두산 북파 개념도

백두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네군데로 나누는데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각각

오르는 길이 있는데 서파, 북파식으로 ‘파(坡)’란 각운이 붙는데 ‘파(坡)’란 ‘언덕’이란 뜻이다

 

중에서도 오늘 내가 오르는 북파가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중에서 가장 일찍 개방된 길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길이다... 백두산 관광 기념사진의 90% 이상이  북파쪽에서 촬영됐다

북파로 오르는 길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① 장백폭포와 나란히 있는 580여개의 계단쪽으로

올라 1시간쯤 지나면 달문을 지나 천지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이곳은 지금 폐쇄가 된 몽양다

②또 하나는 주차장에서 미니버스로 천문봉 턱밑까지 오르는 코스가 있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

·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되며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백두산이 위와 같은 산명(山名)에 나타나는 정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태백산(太白山)과

백산(白山)의 의미를 살펴 보면 광명사상(光明思想)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먼 옛날 우리 선민(先民)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 부근의 고산(高山) 명산(名山)의 이름을 대개

이렇게 광명(光明) 신성(神聖)한 산악(山岳)이라는 의미로 '밝달' 또는 '밝뫼'로 불렀으며 그것이

한자명 '백산(白山)'등으로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육당 최남선의 '故事通' 참조)

 

따라서 백산, 태백산은 곧 우리말 이름 '밝달(뫼)', '한밝달(뫼)'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며,

후일 백두산의 명칭 또한 광명사상(光明思想)과 밀접한 '밝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불함(不咸)'과 '개마(蓋馬)'의 명칭을 주목해 보자. '불함'은 그 음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밝달'의 '밝'이나 또는 '밝음' '붉음'과 통할 수 있다.

이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에서 광명인

'밝'과 '불함'을 같은 의미로 간파하면서  '불함산'이 곧 '백산(白山)' '백악(白岳)'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어(古語)에 있어서 '화(火)'의 의미인 '불'과 '광명'의 의미인 '밝음'의 의미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블-□[ㅂㆍㄹ]-발-밝'이 전변(轉變)하여 온 사실을 볼 수 있는 만큼 '불함'의 산명(山名)과

 '백(白)'의 산명은 동의이서(同意異書)라고 말한다.

끝으로 '도태(徒太)'의 의미 역시 '한밝[太白]'의 뜻을 갖는다. <위서(魏書)>에서는 '도태'의 의미를

 위(魏)나라 말로 태백(太白)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말갈전(靺鞨傳)>에 적힌

'태백산(太白山)'을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도태'라는 말이 다름아닌 우리말

 ' 한밝달(뫼)'을 한자로 옮겨 쓴 지방어(地方語)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의 이명(異名)인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등은 모두 '밝달' '한밝달'의

의미가 한자로 이기(異記)된 것 뿐이며 백두산이 명칭 역시 '밝달'-'백산(白山)'의 과정을 지나

정착된,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백두산의 이름을 백두, 즉 희다는 한자 '백 (白)' 과 머리를 뜻하는 '두 (頭)' 자로 붙인 까닭은 여름 한철을

빼고는 1년내내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라는 풀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백 (白) 이라는 한자를 쓴 것은 '' 또는 해 (日) 와 빛 (光) 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늘' 또는 '천의 (天意)' , 즉 '하늘의 뜻' 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 의 참뜻은 '의 우두머리' 이며 '하늘자리' 를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이

동방의 모든 산의 조산 (祖山) 이자 주산 (主山) 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백두산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한 편이며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지리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7월 의 평균기온은 8.5℃,  6~9월의 4개월간 10℃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

풍향은 주로 여름철에 서풍 또는 남서풍이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다. 풍속은 최대 초속 60m,

연평균 강수량은 1500㎜(2500㎜나 되어 우리나라 최다우지대라는 설도 있다),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나 되고 기상상태가 변화무쌍하고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백두산 산행에는 안전을 위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48회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 산정과 천지 일대의 겨울은 사실상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지속되며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은 7,8월 두달 뿐이며, 연평균 기온은 섭씨6도에서 8도, 연중 최고기온은 섭씨 18도에서 20도,

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47도 정도이다

백두산은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해발 2,500m이상인 봉우리 만도

16개이며, 개는 북한에, 9개는 중국에 속해 있으며, 시대에 따라 이들 봉우리의 명칭이 달랐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2,749.2m)으로 중국에서는 백두봉이라 하며, 두번째 높은 봉우리는

백운봉(2691m), 세 번째가 기상대가 있는 곳이 천문봉(2670m)이다.

 

중국측에서는 장군봉을 백두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삼기봉, 고준봉, 자하봉(2,618m),

화개봉, 철벽봉(2,560m), 천활봉, 용문봉, 관일봉, 금병봉, 지반봉(2,603m), 와호봉(2,566m),

관면봉등 16개 봉우리에 모두 명칭이 있으며 이러한 명칭은 1900년대 초에 붙여진 이름으로

한 봉우리에 2개의 명칭이 있어 구분이 어렵기도 하다.
비류봉(2,580m), 백암산(2,670m), 차일봉(2,596m), 층암산(2,691m), 마천우(2,691m) 등의

7개 봉우리에만 명칭이 전해지고 있다.

백두산의 주요 봉우리

북한지역 :장군봉(2,749.2m), 해발봉 2,719m, 자하봉 2,618m, , 제운봉(낙원봉) 2,603m,

와호봉 2,566m, 제비봉 2,549m, 비류봉 2,580m, 쌍무지개봉 2,626m,  

중국지역 : 백운봉 2,691m, 천문봉(백암봉(2,670m), 청석봉(옥주봉) 2,662m, 자하봉 2,618m,

녹명봉(지반봉) 2,603m, 차일봉(용문봉) 2,596m, 철벽봉 2,550m,

백두산의 봉우리에 대한 개념도

백두산은 중국식 지명으로 장백산(長白山: 중국식 발음:짱빠이산)이다

산 정상의 머리가 하얗다고해서 백두산(白頭山)이니 중국의 이름도 같은 뜻이다

정상에 있는 천지를 가로질러 조.중의 국경이 가로 지른다

본디 물은 하나이나 애꿎은 천지물의 남쪽 60%는 북한의 물이고, 북쪽의 40%는 중국물이다

북한과 중국은 1962년 10월 13일 ‘중․조변계조약(中朝邊界條約)’을 맺고 국경선을 확정하고,

1964년 3월 20일에는 조․중국경에 관한 의정서를 작성한 뒤 베이징에서 조인식을 가졌다

흔히들 지리산 일출을 보려면 3代가 德을 쌓아야 한다고 했거늘... 그 지리산과 비교가

되지않는 백두산의 天池를 하루도 아닌 이틀동안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건

뭐라 표현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나 되고 기상상태가 변화무쌍하며 특히 7~8월에 구름과 안개가 끼는날이

평균 33일 가량 된다는데 난 하루도 아닌 이틀동안 천지를 보았다는 건 분명 행운아이다

10여년 전 이곳에 왔을때 비를 쫄딱맞고 개고생하면서 딱 2분정도 구름이 걷히면서 천지물을

받을때도 그 벅찬 감동과  환희심을 잊지 못했는데... 

 

天池

천지는 천지 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한 천상의 호수라는 뜻으로 대택, 대지, 용왕담, 달문담, 신분,

용궁지, 천상수, 달문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으며 호수면이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동서)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로 수심은 남쪽이 얕다.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티티카카호'(최고수심 304미터)와 2위인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있는 '라도가호'(225 미터) 보다도 더 깊어 세계 최심의 산상 호수로 밝혀졌다.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되어 생긴 칼데라 호로, 분화구의 전체면적 가운데 천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40.6%에 이르며,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 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저수량은 약 20억 km. 1990년 초 조사에 의하면 천지 물의 내원은 대기강수(빗물),

 집수구에서 흘러 드는 지표수와 지하에서 공급되는 지하수라고한다.

세 가지 내원 가운데 지하수의 공급량은 전체 천지 공급수량의 61.5%를 차지하며,

다음으로 천지 호면에 내리는 빗물은 1년 사이에 천지에 공급하는수량이 30.76%를 차지한다고 한다.

마치 독수리의 부리처럼 생긴 백두산에서 3번째 봉우리인 천문봉(2,670m)의 모습

백두산은 중생대부터 신생대 초에 걸쳐 1,000 내지 1,500 미터의 융기 고원상에 형성되었다가 다시

신생대 제 3기 말부터 제4기 초에 다량의 현무암이 분출하여 반경30리에 걸쳐 최초

종상화산을 형성한 뒤 차차 냉각됨에 따라 균열이 생기고 산정 부분이 함몰하여 칼데라호인 천지를 형성하였다.

 

우리 나라에 있는 단 하나뿐인 칼데라호이며, 수량이 연평균 1340 mm나 되는데 우리 나라 전체

평균 강수량보다 많고 대개의 화산활동은 화산이 폭발하는 정상부에 호수를 만드는 것이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인 백두산과

한라산의 경우를 살펴보면, 산정상부에 호수가 생성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호수는 성인에 따라 크게 칼데라호와 화구호로 구분된다

미끄러운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천지 너머로 북한군 초소가 드문드문 보이며, 천지의 2/5가 중국영토, 3/5가 북한영토라고 한다.

어제 서파에서 처럼 오늘 북파에서 바라보는 북한땅의 백두산을 바라보는 범여의 마을은 착잡하기만 하다

동파쪽 중국 지역은 한창 공사중인데 이러다가 백두산 전체가

왕서방(중국)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이리저리 인파에 치이면서도 구경할 것은 다하고 정해진 시간안에 가이드가

모이라고 하는 장소에 도착하여 오르지 못한 천문봉을 바라보니 한없는 아쉬움만 남는다

일행이 다 모인 다음에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버스에 오른다

자리가 맞질 않아서 미니버스 맨 뒷좌석에서 중국인 한족(漢族)여인 2명과 앉았는데

꼬부랑길을 내려오면서 차가 이리저리 쏠릴때 그 여인들은 자꾸만 내 가슴에 안긴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알아 듣지만 못하는 중국말로 낄낄대는데 이건

홍콩만 아닌 마카오까지 갔다오는 느낌이다

멋진 천지를 이틀동안 본 걸로만도 본전을 뽑고도 남았는데 이국 여인을 2명씩이나

계속 안아보면서 백두산을 내려오니... 난 정녕 복받은 사람인가 ㅋㅋㅋ

주차장을 내려와서 또다시 다른 버스를 타고 장백폭포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장백폭포 입구

이곳 북파등로 주차장에 내리니 입구에는 장사치들과 중국사람들이 가족끼리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데 마치 70년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느낌이다

입구에는 백두산 천지 괴물을 전시해 놓은 관람장도 보인다

장백폭포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가는곳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중국이 과연 크기는 큰 모양이다

온천지대

온천지대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장백폭포쪽으로 향하는데

10여년 전에 비해서 시설도 많이 깔끔해진 편이다

백두산 온천 원수(源水)의 온도가 83C라고 하는데 실제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가보니 그렇지 않고 국내의 온천물과 비슷한 온도로 느껴진다

 이 온천수는 최고 83도의 온도로 계란을 넣으면 노른자 부터 익고 흰자위가 나중에 익는다고 한다

온천물이 흘러 내리는 곳의 온도는 42c라고 표기되어 있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장백폭포로 향한다 

장백폭포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모습

장백폭포를 거쳐서 내려오는 천지의 물

천지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하여 흘러내려 비룡폭포(68m),

장백폭포(長白瀑布:70m)를 이루면서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이도백하(二道白河])로 흘러간다.

달문을 통해 유출되는 양은 1일 약 36만㎥(7월)에 이르며, 이도백하 수문 관리소에서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장백폭포에서 일 년 동안흘러 내리는 물의 양은 0.3866억 km. 천지 출수량의 93.16%를 차지한다고 한다.

나들이 나온 중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숲길로 접어든다

‘瀑布下’라 장백폭포 아래라는 뜻인 모양이다 (범여의 생각中에서)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인증샷

장백폭포(長白瀑布)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라고도 불리며 중국식 발음으로는

장백폭포(長白瀑布:창바이푸부)는 중국 동북부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천지에서 북쪽으로 트인 달문을

통해서 흘러나온 물은 천문봉과 용문봉을 사이 골짜기를따라 1km정도를 흘러가다가 낙차 68m로 떨어지는

폭포가 장백폭포이다평균 수량이 초당 2.15톤에 달하며 눈이 녹는 시기에는 물의 양이 더 많아진다고 한다

인근의 다른 폭포들이 얼어붙는 한 겨울에도 이 폭포만은 얼지 않아서 그 멋진 모습을감상할 수 있으며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의 소리가 200m이상 먼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백두산에는 폭포가 60여개 있으며, 높이 40m의 백두밀영폭포와 높이 20m의 백두폭포를 비롯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번이나 꺾어내리는 사기문폭포, 두개의 폭포가 바위벼랑에서 가지런히 떨어져

 내리는 형제폭포, 물이 벼랑중턱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리명수폭포는 백두산의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백두산의 폭포는 모두 60여 개. 중국지역에는 장백폭포, 금강폭포, 옥계폭포가 대표적이다

북파로 오르는 길에만 볼 수 있는 가장 유명한 명소는 비룡폭포라고도 불리는 장백폭포(長白瀑布)이다

천지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옆으로는 서파 등로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언제가 TV프로그램 1박2일팀 올랐던 서파로 향하는 등로인데 지금은 출입금지라 입만만 다신다 

일행중에 전문찍사(?)인 닉이 스쿠버란 분 카메라 앞에서 다들 모델인양 포즈를 취한다

염주황귀

요즘 전세계적으로 지진 공포에 휩싸여 있는데 이곳 백두산도

곧 화산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곳곳에서 나오는 편이다

그 예로 백두산 여러군데서 폭발 징후인 가스분출로 인 한 나무가 고사하고 있으며,

위성사진으로도 천지가 부풀어 오르고 있으며, 잦은 지진도 몇배 많아졌다고 한다.

2014년~2015년 쯤으로 화산분출시기를 예상하여 불과 몇년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발해의 멸망이 거란족의 침공에 의한 멸망이 아니고 1000년전 대규모

백두산 화산폭팔에 의한 재해로 동북아 최강의 발해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발해가 멸망했던 시점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었는데 갑자기 거란족에 의해 하루 아침에 멸망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대규모 화산폭발 시기와 발해 멸망 시기가 맞물린데 근거한 주장이다.

 백두산 화산폭팔이 일어 난다면 아이슬란드에 화산에 1,000~1,500배의 위력이 있다고 하며,

이는 중국의 동북부와 북한과 일본북부까지 막대한 영양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장백폭포를 배경으로...

중국인 가족들이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사스레 나무 군락지를 따라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쥐오줌풀

개당귀

백두산 곰취

털쥐손이

장백폭포 아래의 V계곡의 모습

곰취밭에 세들어 사는 미나리아재비

사스레 나무 군락지

금매화

좀설앵초인가... 조금 아리까리하다

악화림대 지역이라 그런지 추위에 강한 자작나무와 사스레 나무가 많이 보인다

V계곡 전망대에서 바라본 장백폭포 아래 온천지대의 모습

백두산 곰취 군락지

대체적으로 나물종류는 꽃이피면 먹기가 힘든 법인데 이곳 백두산

곰취는 꽃이 피었음에도 불구하고 곰취잎은 상당히 부드럽다

나도 올해 5월에 영월지맥 치악산 구간중에 비법정 탐방로인 비로봉에서

전재구간을 걸으면서 45L 베낭에 가득 곰취를 수확했는데 이곳은 아예 곰취밭이다

아마 쑥 영감이 봤으면 기절초풍 할 정도이다

온천수가 나오는 곳

취룡천(聚龍泉)

온천수 분출구 안내판에 ‘모일 취(聚)는 그대로인데 ‘룡’자는 한국에서는 쓰지 않는 간자체이다

온천수가 올라오는게  한 눈에 보인다

온천수 분출지(12:05)

천지의 총 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가 없었으나, 각종 물고기를 방류하여 보니, 모두 죽고 산천어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창바이)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강을 이루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며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르고 중국의 장백폭포와 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나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온천물에다 계란을 삶아 파는 곳

20여년전에 일본 도쿄 인근의 화산지대 하코네에서 삶은 계란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곳의 계란장수가 하나 먹으면 수명이 5년이 연장된다고 5개나 먹은 적이 있었는데...

장뇌삼인지(?)... 산삼(?)인지 모르겠다

다시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주차장으로 향한다

노점상에서 파는 중국산 컵라면

원래 여행의 일정은 이곳 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장과 총무가

이 더운 날씨에 뭔 온천이냐고 하면서 일정을 변경하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인듯 하다

온천지대에서 버스를 타고 북파산문 주차장에서 내린다

북파산문(13:10)

북파산문 주차장

북파산문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점심으로 먹으로 식당으로 가는데 버스는

매케한 곰팡이 냄새에다가 에어컨을 켜놓지 않은 탓인지 완전히 찜통이다

일행들과 사브사브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더운데 식탁 가운데 화덕에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더 덥기만 하다

그러면서 반주로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마시고 또다시 조선족 가이드가

독주 한병을 주는 걸 마셨는데 영 컨디션이 좋질 않다

이도백하 거리의 모습

일행중에 참깨같은 농산물을 사는 동안에  난 할일없이 밖에서 빙빙돈다

이도백하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첫날 중국땅을

밟았던 목단강을 향하는데 중국에서는 버스를 5시간정도 타는 건 보통이란다

차창밖으로 바라본 돈화시의 모습

돈화시는 중국 지린성 동부에 위치한 옌볜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에 있는

도시로 이곳은 742~755년에는 발해왕국(渤海王國)의 수도였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발해의 지도

돈화시의 풍경

첫날 송강하가는 길에서 만났던 금정대불의 모습

돈화시를 가로지르는 송화강(松花江)의 모습

돈화시 중심지를 지나면서 차창밖으로 본 돈화시의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 시절의 각국의 영토및 세력판도(AD 412년)

돈화시에서 우리가 내일 오전 비행기에 오를 목단강까지 가는 도로옆으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저 넓은 광활한 평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호남평야는 이곳에 비하면

鳥足之血에 불과한데 저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예전에 저 땅은 우리의 땅이었는데 말이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20대 장수왕이 古土 회복을 하면서 넓은 만주땅을 지배하였고, 그 이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이 땅을 지배했는데... 이 착잡한 맘!... 오직 범여만의 생각일까

돈화를 빠져나와 한동안 농촌길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목단강시로 향하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이 넓은 땅도 우리나라였을텐데 말이다

 

지금 우리의 이웃나라들은 지난 역사를 조작하면서까지 자기들에 유리한 역사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입시에 치중하여 역사교육도 시키지 않으니 미래가 암울하기만 하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암울하다’ 했거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다

 

현재 이곳을 지배하는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찬란한 역사인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지우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또한 바다건너 섬나라 일본 쪽바리의 수상인 아베신조(安倍晋三)라는 자는 자기들이

온갖 만행을 저질놓은 모든걸  헌법까지 바꾸가면서 위안부 문제등을 비롯한 모든 걸 부정하고

있건만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런걸 강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니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계속해서  펼쳐지는 넓은 들녘

송화강의 일몰

이도백하를 출발하여 버스로 5여시간만에 목단강 시내 외곽의 한 식당으로 저녁을 먹기위해

가는데 현재 시간이 저녁 8시경이건만 인구 280만명의 거대한 도시는 적막강산처럼 어둡기만 하다

우리같으면 각종 간판으로 도시가 휘항 찬란하겠건만 실리를 추구하는 중국 국민성을 엿보게 한다

저녁을 먹을 식당

식당 내부의 모습

중국에서 마지막날의 저녁이라 그런지 밥상은 진수성찬이간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아마 낮에 가이드가 각 테이블마다 한병씩 돌린 곡주(穀酒)가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지

버스에서 계속 머리가 아프더니만 저녁맛을 싹 가시게 한다

저녁은 먹는둥마는둥하고 호텔로 가서 체크인하고 잠자리에 든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위치한 하와이호텔

오늘은 잠자리 파트너가 또 바뀌었는데 왕십리에서 이동통신기기 판매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는데 나하고는 띠동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격이시다

나는 저 나이까지 저런 건강을 유지할까싶다... 늘 健安하소서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목단강 시내의 모습

이곳은 아마도 목단강시의 중심지인 모양이다

고층 건물에다 주위의 환경도 깨끗한 편이고 특히 집행부에서 잠자리(호텔)와

식사에 상당히 신경을 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나도 여행을 좀 다니는 편이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사를 따라가다보면 숙식문제로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하와이 호텔의 아침풍경

이곳은 한국과의 시차가 1시간인데 이곳 시간으로 새벽 4시임에도 불구하고

해가 벌써 떠올라 있다... 어제밤에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카메라를 들고 호텔 문을 나선다

 

오늘은 특별히 할 것도 없고 아침을 먹고 난 다음에 짐을 챙겨서 공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는데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그리 멀지않은 곳이기에 맘이 느긋하다

호텔 맞은편으로 가서 뒷골목으로 들어서니 재래식 시장이 보인다

여행이란 그 지역의 뒷골목을 가봐야 그 지역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에...

중국사람들은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은 모양인가?

호텔 건너편 뒷골목의 모습

과일가게

강아지 파는 가게

한국이나 중국이나 뒷골목은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침장을 봐서 오는 사람들

뭐 사셨어요?

젊은 여인도 시장을 봐가네요

1970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저런 삼륜차가 있었지

과일 노점상

어~라 남자도 시장을 봐서 가네...내 스타일은 아냐... 난 굶고말지 저런짓은 못해

국수장수

향신료를 파는 노점상

과자 노점상

야채 노점상

선그라스 노점상... 내 폼 좀 괜찮아요?

생선 노점상... 좀 불결해 보이네요... 파리가 윙~~~윙

이 분은 벌써 물건을 다 팔아가네요... 축하합니다

포도를 파는 젊은 친구

감처럼 생긴 과일을 파는 저 여인은 장사할 생각은 않고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는 나만 쳐다본다

재래식 시장에 오면 늘 활력이 넘치는 걸 볼 수가 있다

나도 한때는 나 자신이 나태해질 때 황학동의 중앙시장이나 청계천의 벼룩시장을 헤매고 다녔지

중국사람들의 식단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식빵을 사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야채를 파는 조선족 아주머니

저 찐빵을 하나 사먹고 싶었는데 지갑을 가져오질 않아서 입맛만 다신다

미싱을 그려진 걸개를 들고 연신 소리를 질러대는 저 친구

궁금하여 한참을 옆에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미싱수리공이다

물어보는 사람에게 자기 명함을 준다... 별걸 다 구경한다

치약 노점상

저건 뭔지 모르겠다

매상은 좀 올랐나요?

농약을 치지 않았는지 오이가 전부 꼬부랑이다

버섯 노점상

귀한 노루궁뎅이 버섯이 잔뜩있다

옷가계

어~~~랴 우리 일행도 보이네...뭔가를 열심히 보고있다

벌써 고구마가 나왔네

민물고기 노점상... 난 생선이라곤 꽁치와 갈치밖에 몰러... 관심도 없고...

만두도 먹고 싶었는데... 돈이 없으니...

개고기와 돼지고기 파는 노점상

잡곡 노점상

마늘과 생강을 파는 저 여인은 장사할 생각은 않고 카메라를 눌러대는 나를보고 웃어댄다

노점에서 옷을파는 저 여인은 수완이 좋은지 손님이 가장많다

또다시 우리일행을 만나는데 과일을 사는 모양이다

이보시게 왕서방 웃통 좀 입고 장사해라...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시장구경을 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간다

중국도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모양이다

뒷골목 서민 아파트의 모습

夫妻保健이라... 산부인과란 뜻인가?(범여의 생각 中에서)

내가 하룻밤 유숙했던 호텔이 보인다

삼성 핸드폰 매장도 만나고...

호텔로 돌아와 식당에 들려서 토스트와 과일, 커피한잔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긴 다음에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목단강(牧丹江) 시내의 모습

버스에서 바라본 목단강((牧丹江)의 모습

목단강시를 가로 지르는 목단강을 경계로 市의 강남과 강북이 갈라지는데 강남은

이제 갓 개발이 된 곳이라서 건물은 반듯하고 신식이 많으나 빈집들이 많이 보인다

목단강(牧丹江)은 중국 동북부로 흐르는 강으로 송화강의 최대 지류로 길이가

무려 700km에 달하며 지명의 유래는 만주어로 ‘구부러지는 강’이라는 뜻으로

중국식 발음으로는 ‘무단장’이라고 한다

지린성(吉林省) 무단링에서 발원하여 흑룡강성 하얼빈시 이란현까지 이어지면

우리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고구려나 발해사의 중심에 있었던 강이었다

발해는 당나라 시대 중국은 9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가리켜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는데 그 중심지가 이곳

목단강시를 중심으로 융성했다고 하며 이곳 목단강 지류에 살았던 발해를 비롯하여

고구려, 거란, 말갈, 여진등의 민족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강한 기마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용맹한 사람들이었으며 지금도 이곳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공항가는 길에 시간이 좀 남아서 러시아인 운영하는 기념품 가계에 들린다

이곳 목단강시는 중국의 최북단의 도시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러시아풍의 건물들이 많이 보이고 러시아와의 교역이

가장 활발한 도시라고 하는데 기념품점에 들리니 러시아 상품이 가득하다

기념품점 계단에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러시아 기념품점 내부의 모습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목단강 공항으로 향한다

목단강 공항(10:40)

3박 4일간의 백두산 투어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목단강 공항으로 들어선다

공항 안으로 접어드니 냉방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지 완전히 찜통이다

목단강발 → 인천행 대한항공 KE824 비행기 티켓

목단강 공항의 모습

이틀동안 백두산 천지를 봤다는 황홀함은 뒤로하고 비행기 트랩으로 오른다

비행기에 이륙하면서 찍은 목단강의 모습

비행기는 서해 바다를 건너는데 기내식이 나온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기내식을 깨끗하게 비우고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캔맥주 하나에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고는 다시 다시 눈을감고 잠에 빠진다

‘이 비행기는 곧 인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라는

멘트에 잠을 깨어보니 창문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방을 찾은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는 계속 내린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간 동료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게 좀 아쉽지만

어차피 만나면 헤어지는게 인연법인걸...대장님과 총무님, 스쿠버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 고생하셨습니다... 전 또 일상으로 돌아가 독립군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