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지리산 남부능선을 걷다... 그 첫날에

범여(梵如) 2015. 7. 31. 06:59

유토피아를 꿈꾸며 걸었던 지리산 남부능선

 

☞ 산행일자: 2015년 7월 28일~30일(1무1박3일)

☞ 산행날씨: 첫날... 흐린날씨에 엄청난 습도, 둘째날... 맑은 날씨에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32km  / 약20시간 소요

☞ 참석인원: 인연이 있는 9명의 岳友들과 함께 

☞ 산행코스: 쌍계사 매표소-쌍계사-국사암갈림길-환학대-마족대-불일평전-불일폭포 휴게소-불일폭포 갈림길

                  불일암-불일폭포(왕복)-계곡-생불재-산죽길-안부-쇠통바위-송정굴-내삼신봉-삼신봉갈림길-삼신봉

                  한벗샘-헬기장-안부-의신마을갈림길-음양수-거림갈림길-세석산장(1박)-촛대봉-꽁초봉(?)-연하봉

                  일출봉-장터목산장-제석봉-통천문-천왕봉-장터목 산장(왕복)-소지봉-참샘-백무봉탐방지원센터

 소 재 지: 경남 하동군 화계면, 청암면 / 산청군 시천면 / 함양군 마천면

  

 찌는듯한 찜통 더위에 이전한 사무실 공사를 비롯한 주변 정리는 해도해도 끝이없다

거기다가 먹는걸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속되는 과로로 인하여 체력은 많이 소진됐다

그 와중에 토요일 설악산 구간을 가기로 하였는데 설악산쪽에 폭우로 인하여 입산이

금지되는 바람에 지난주는 산행을 못했더니만 몸이 무거워서 미치겠는데 지난해 백두대간

남진을 같이한 岳友들과 1개여월 전에 약속한 지리산 남부능선을 같이 타기로 한 약속

때문에 주말이 아닌 화요릴 밤 열차를 타고 1무1박3일간의 일정으로 출발한다             

산행구간 지도

용산역 플렛홈(28일 밤 22:35)

집에서 저녁 9시 조금 늦은 시간에 20kg이 훨씬 넘는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서 도곡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서 옥수역에서 용산역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탄 다음에 22시 10시경

용산역 대합실에 도착하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대합실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조금 후

백두대간 길에 가장 막내이자 내가 어여삐 여기는 주원아빠가 나에게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한다

참으로 오랬만에 만난 탓이라 너무도 반가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젊은 친구 한명이

내게 다가와서 혹시 “범여님 아니세요” 하기에 맞다고하니 넙죽 인사를 하며 만나서 반갑다면서

같이 지리산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본 이 친구 얼마나 넉살이 좋은지...

금새 범여 형님하면서 말을 부치는데 참으로 오지랍 한번 넓네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이 산행을 준비한 하늘마음님이 도착하여 열차를 타러 풀렛홈으로 향한다

열차에 오르자마자 난 평소의 버릇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구례구역(29일 03:10)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구례구역을 빠져 나오는데 생각보다 지리산으로 향하는 산꾼들이

많은데 역을 빠져 나오니 택시와 버스가 산꾼들을 기다리고 이곳에 내리는 산꾼들 대부분이

성삼재로 향하며  택시에는 1인당 1만원이고 역전 앞에서 열차 시간에 맞춰 산꾼을 기다리는

버스는 화엄사를 거쳐서 성삼재로 간다고 하는데 쌍계사로 향하는 산꾼은 우리 뿐이다

구례구역(求禮口驛)의 유래

삼한시대에 54 부족국가중에 하나인 고랍국이었던 구례는 삼국시대 백제때는

구차례 또는 구차지로 불렸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 이후부터

구례(求禮)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구례의 입구에 역이 있다고 하여

구례구역(求禮口驛)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현재의 행정구역은 구례가 아닌

순천시 황전면에 속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였던 이 순신 장군이

구례현청에서 곡성 압록(鴨綠)으로 가기위해 향하던 길목인 순자강과 잔수가 만나는

역원이 자리했던 지점이며 이 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해 병참물자를

찾아 떠났던 희망의 장소가 지금의 구례구역이라고 한다 

구례구역 앞 산채식당

구례구역을 빠져나와 이번 테마산행에서 대장을 맡은 하늘마음님이 예약한 식당에서

다슬기탕으로 이른 새벽에 아침밥을 먹고 식당에서 소개한 렌트카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쌍계사 입구로 향하는데 (03:45) 야심한 새벽에 차량이 없긴 하지만 좁은

시골길을 신호와 중앙선 침범을 밥먹듯이 하면서 쌍계사로 향하는데 맨 뒷좌석에 앉은

범여는 오줌이 저릴정도로 조마조마 하는 사이에 쌍계사 입구 매표소에 도착한다(04:10) 

쌍계사 입구(04:10)

구례구역에서 25분만에 쌍계사 입구에 도착하니 아직 주위는 야심한 새벽인데

매표소 입구에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담배를 피면서 매표소에 있는데 혹 입장료를

받을까봐서 괜스레 아는척 하면서 쌍계사 회주이신 고산 큰스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니

금방 고분고분하면서 이른 새벽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어두워 이곳에서 동료산꾼들이 약간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오늘 처음만난

넉살좋은 젊은 친구를 데리고 500여m 아래에 있는 ‘雙溪, 石門’을 찾아 나선다

신라말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며 문장가 였던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857년~?)  선생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최치원에게 바위에 쓰게 하였다고 하는데

쇠지팡이로 썼다고 해서 철장서(鐵杖書)로 불리며 좌측 바위에 쌍계(雙溪), 우측 바위에

석문(石門)이라 음각이 되어 있다

우측에 암각된 석문(石門)을 촬영하려는데 가져간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 때문에 야간에 촬영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매표소로 향하는 길 우측 전봇대에는 차시배지길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데

이곳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란 분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처음 심었는데  그곳이 이곳 쌍계사와 화계면 일원이라고 한다

쌍계사 일주문 앞 숲속에는 1981년에 세워진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다

 

하동지방의 쌍계사 부근에는 섬진강이 인접해 있어 안개가 많고 다습하다.

그리고 차 생산시기에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 토양의 약산성으로 수분이

풍부하며 사력질 토양에 차 생육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하동녹차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해발 200m 산중턱의 도심다원에 수령 1,000년이

넘는 차나무가 2008년 7월 한국기록원으로 부터 삼국유사와 신라본기를 근거로

한국 최고의 차나무로 인증받아 이곳 하동이 차의 시배지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4:35)

다시 매표소롤 돌아와서 젊은 친구(닉이 선달이란다)가 성능좋은

카메라로 인증 샷을 남기고 산행을 시작하다

매표소를 지나 올라가는데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을 공사하는지 좌측으로 임시도로를 만들어 놨다

좌측 도로를 따라가니 쌍계초등학교가 보인다

쌍계사 일주문(04:47)

일주문에는 ‘三神山 雙磎寺’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삼신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뜻한다.

중국의 전설에서는 삼신산을 발해만(渤海灣)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3산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始皇帝)와 한(漢) 무제(武帝)가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명을

보냈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3년(723)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선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의 칡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설리갈화처, 雪裏葛花處)”는 꿈을 꾸었다.

귀국 후 눈 위에 꽃이 피는 땅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지리산에 이르렀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 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에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온 진감(眞鑑)선사가 중창했다.

진감선사는 선(禪)과 차(茶),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했다.

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대사가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다

 

진감선사가 삼법화상이 세운 절터에 쌍계사를 세우며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인근 진주지방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존재하자 신라 50대 임금인 정강왕이 “雙溪”라는 이름을 내려 사찰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쌍계(雙溪)라는 지명은 절 앞에 두개의 시내가 합쳐 흐른다는 지형적인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어둠속 일주문에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 다음에 쌍계사 경내로 들어선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람의 전통적인 배치이긴 하나

쌍계사처럼 3개의 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찰은 그리 많치 않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팔영루가 나타나고 이 누각을 지나면 쌍계사의 유일한

국보인  진감국사대공탑비(국보제47호) 계단 가운데 서있다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서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니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왁자지껄한데 자세히보니 어린 학생들이 홈스테이중인 모양이다

그리고는 새벽예불이 끝났을 시간에 리듬에 맞지않은 어설픈(?) 목탁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사찰로 들어오질 않고 국사암 방향으로 가버린다 

진감선사 탑비(眞鑑禪士 塔碑:국보 제47호)

천왕문을 지나면서 좌우 양쪽에 두 눈을 부릅뜨고 산꾼 범여를 바라보는 사천왕상에게

예를 갖추고 다시 올라서니 팔영루가 나오는데 문이 굳게 잠게 있어서 좌측으로

돌아서니 대웅전 앞 마당에 외롭게 서 있는 진감국사 대공탑비(眞鑑國師 大空塔碑)를

참배하는 사이에 동료들은 대웅전을 들리지 않고 등로로 올라 가버리는 바람에 괜스레

맘은 급해지는데 가지고 온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인지 아니면 사진찍는 기술이

모자람인지 탑비는 잡히지 않는다... 뒤돌아 대웅전을 향해 부처님에게 오늘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저두삼배의 예를 갖추고  서둘러 동료들의 뒤를 따라간다

진감국사 대공탑비(眞鑑國師 大空塔碑): 2012년 3월 25일 쌍계사 참배때의 사진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탑비는 국보 제47호로 신라 정강왕(50대)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력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명한후 건립한것으로
850년 77세의 나이로 선사가 입적하여 887년 진성여왕이 대공탑비라 시호,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3년이 되는 31살때 친찬(親撰). 친서(親書). 친전액(親篆額)을 한

四山碑銘중의 1구로 이 비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몇 안되는 금석문(金石門)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며 높이 약 2m의 검은 대리석에는 총 2,417자의 해서체가 음각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파괴되어 금이 가 있으며 여순사건과 6. 25전쟁때

공비와의 교전으로 총탄을 맞아 비신 전체에 흠집이 있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 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고 등 중앙에는 비 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며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 500호)

쌍계사 대웅전은 1620년에 세워졌으며 ‘世界一花祖宗六葉’이란 현판 글씨와

육조 정상탑이 잇는 금당(金堂)의 ‘六祖頂相塔’이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일주문 현액은 해강 김규진(海崗 金圭鎭)의 글씨이다

 

쌍계사는 진감선사 혜소에 의해 범패(梵唄) 음곡 원류를 이루고

신라에 범패 음곡을 널리 보급시킨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혜소는  당나라릐 신감(神鑑)에게 범패의 음곡과 창법을 배워와

12년동안 여러 사람에게 가르쳤으며, 경내의 팔영루(八泳樓)는

혜소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써 범패를 작곡한 곳이란다

대웅전을 빠져나오니 옥천교라는 다리를 만나고 ‘여기에서부터 금당까지 108계단’이라

써있는 기와를 만나면서 계단을 오르니금당선원 입구인 頓悟門을 만나는데 금당은 삼법화상이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처음 세운 곳이며 ‘頓悟’란 佛家에서 깨달음을 의미한다

금당선원으로 들어서는 어둠속의 頓悟門의 모습

국사암 갈림길(05:00)

갈림길에서 좌측 위로 올라서면 국사암인데 어둠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동료산꾼들 역시 어둠속으로 사라져 아쉽지만 국사암은 들리지 못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진 동료산꾼들 뒤로 열심히 따라가는데 20kg이 넘는 베낭 무게 때문에 따라

가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데 이제 산행이 시작일 뿐인데 땀은 비오듯 한다

국사암에는 주목할만한 문화유적은 없고 진감선사가 심었다는 사천왕수라는 노거수 한그루가 있다 

환학대(喚鶴臺:05:25)

환학대란 ‘학을 부르는 언덕’이란 뜻으로 신라시대 말기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은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다녔는데 이곳에서  학을 불러모아 학을 타고

가야산 홍류동으로 날아가곤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등로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말하며, 쌍계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의 범패(불교음악)를

신라에 도입하여 대중화시킨 진감선사를 기리기 위해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비문(碑文)을 이곳 환학대에서 지었다고 한다

 

쌍계사에서 헤어진 산꾼들을 이곳에서 따라 잡는데 난 죽을 힘을 다해서

이곳까지 왔건만 동료산꾼들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동료들과 음료를 나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마족대(馬足臺:05:45)

마족대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때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설화가 내려오는 곳이다

등로 우측에 있으며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숲속이라 그런지 이제사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무거운 베낭의 무게가 범여의 어깨를 옥죄오기 시작하는데 자꾸만 걸음은 늦어지고...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말발굽의 모습  

마족대에서 힘들게 6분정도를 오르니 이 높은곳에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 등

장승 네 기가 산꾼 범여를 맞이 하는특이한 점은 장승 네 기 중 두 기는 꼬마장승이다.

그 생김새도 귀엽지만 이름도 '아이 동(童)'자를 써서 동장군이라 명하였다.

좌측으로 밭처럼 생긴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안내판에 불일평전이라 써놨다 

불일평전(佛日平田:05:51)

우리나라 3대 평전인 세석평전(지리산)이나 덕유평전, 소백평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엄연한 평전으로 불리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휴게소와, 소망탑과,샘.. 화장실이 있다

이곳은 1993년 지리산 자연보호의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 있는 변규화씨가 거주하며

작설차와 불로주, 간단한 음료와 과자를 팔았다는 봉명산방은 변규화씨가 작고한 이후

지금은  건물이 폐가처럼 남아있고 휴게소 건물만 조금 성한체 보인다.

하기에 이곳은 등산객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불일평전의 모습

중국에서는 신선이 살만한 명당을 동천복지(東天福地)라고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亂을 피해서 살만한 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부른다 

영주 풍기와 예천 금당, 봉화 춘양, 영월 정동, 보은 속리산, 공주 유구, 남원 운봉

부안 변산, 무주 무풍, 합천 가야 등인데 특징은 깊은 산골로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최소한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는 말한다

 

亂世에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십승지라면 평상시에 道를 통할 수 있는 이상향의

땅을 청학동이라 부르는데 그러니 청학동(靑鶴洞)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십승지보다는

道를 통하여 해탈하고 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신령한 기운이 깃든 땅으로 각종

격암유록(格菴遺錄)이나 정감(鄭鑑錄) 등 풍수지리 비결서를 보면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꼽는곳이 박 경리 여사의 소설

‘土地’ 배경의 무대가 된 악양으로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한

천혜의 땅으로 너른 들에서 풍부한 양식이 생산되고 산에서는 각종 약초와 나물

그리고 과일이 생산되며, 섬진강에서는 생선이 공급되는 천하의 명당이다

게다가 섬진강은 서출동류(西出東流)라서 일조량을 가장 많이 받는 명당이다

 

그런면에서 이곳 불일평전도 그렇게 너른터전은 아니지만 청학동이란

전해져 내려오는 곳 중에 하나인 곳이기도 하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십승지(十勝地)란,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이라는 뜻이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쟁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봉명산방의 모습

이전에는 이 넓은터가 청학동으로 불린 적이 있었는데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운다" 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고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백리

,(중략)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였다.

조선조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이 곳 불일폭포 주위를 청학동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계곡이 높고 가파르며 터가 너무 좁아 용납할 곳은 아니다'라며 청학도의 난점을 살짝 제기하기도 하였다.

지리산에는 이 곳 외에도 악양 북쪽, 현재의 청학동, 세석고원,선유동 등 청학동으로 불린 곳이 많다.

이들 모두가 지리산에서 살기 좋고 비교적 너른 땅이 있는 곳이다. 

곱디고운 나리의 모습

불일폭포 갈림길(05:58)

이곳까지 오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초과 되었지만 맥 산행이 아니라

그런지 동료 산꾼들은 다들 여롭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불일폭포로 향한다 

데크목 다리를 건너서 철난간으로 올라서니 불일암이 나오고 곧 이어 불일폭포를 만난다

불일폭포(佛日瀑布:06:05)

보조국사(菩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 스님이 폭포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修道)를 하였는데, 고려 제21대 안인 희종(熙宗, 1180~1237)이 지눌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하여 불일보조(不日菩照)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시호를 따라 이 폭포를 불일폭포라 하였고 그가 수도하였던 암자를 불임암이라 하였다.

불일 폭포는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좌측의 청학봉(靑鶴峰)과 우측의 백학봉(白鶴峰)사이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60여 미터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져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리나라에서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큰 높이 58미터의 거폭으로 쏟아진 물이

중간의 학연(鶴淵)에서 잠시 머물다 흘러내리는 전형적인 2단 폭포로 지리십경중

제6경에 속하는데 최근에 많이 내린 비 때문인지 엄청나게 많은 폭포수가 장관을 이룬다

 

☞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은 고려 중기의 고승으로 한국 선(禪)을 확립한 인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로 불교계의 자각운동을 주도하였고, 나아가 많은 저술을 통해

선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여 한국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지리산 10경(智異山 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천왕산의 정상에서 돋는 아침 해 

제2경: 노고운해(老姑雲海)- 해질 무렵 하늘에 피어나는 노고산의 구름바다 

제3경: 반야낙조(般若落照)- 여름에 반야봉의 서쪽 하늘로 지는 해 

제4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에서 쳐다보는 밤 하늘의 밝은 달 

제5경: 연하선경(烟霞仙景)- 연하봉의 모습이 신선 세계에 온 듯한 느낌 

제6경: 불일현폭(佛日顯瀑)- 불일폭포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장관 

제7경: 피아단풍(陂阿丹楓)- 지리산의 가을 풍경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피아골에 물드는 단풍 

제8경: 세석철쭉(細石철쭉)- 지리산의 봄 풍경 중 하나로 세석평전에 철쭉이 피는 모습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이름 그대로~ 계곡 전체가 선경의 모습 

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봄꽃이 필 무렵 섬진강의 맑고 푸른 물줄

불일폭포 앞에서 인증샷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 만난 친구

닉이 ‘선달’이라는데 넉살좋고 붙임성도 그만이다... 첨 봤는데도 단박에 나에게

형님이라 부르는데 삼각대에다 대포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동료 산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찍어대는데 그저 고맙기만 하다

어둠속에 내가 가지고 온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찍지 못한 걸

블로그에 이 친구의 사진을 많이 인용한다...저작권 침해라고 경찰서에 신고는 안하겠지

이보시게 젊은이 고마우이... 복받을 겨

바위 채송화

베낭을 벗어둔 갈림길로 되돌아 오면서 바라본 불일폭포

불일폭포 주위는 육산(肉山)인 지리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깍아지른 절벽 지형이다.

절벽의 끝으로는 푸르디 푸른 노송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졌다.

급경사의 계단을 올라와서 등로 옆에 있는 불일암 경내로 들어선다

불일암(佛日庵) 입구위 모습

사찰 입구라기 보다는 마치 이웃집의 담장같은 정겨움을 느끼는 곳이다

불일암(佛日庵)의 모습

불일암 마당으로 들어서니 “佛日庵” 현판과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고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 문에 설치한 비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스님이 출타중이신지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좌측으로 들어서니 요사체와 해후소와 지게도

보이는데 가람 내부는 상당히 지저분하는 느낌이 든다

불일암 대웅전

불일암은 보조국사의 시호를 딴 사찰 이름이라고 하는데, 보조국사의 시호보다는 

불교에서 부처님을 가리키는 '불일(佛日)'이 더 맞을듯 싶다

신라의 원효.의상대사가 도를 닦고 고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머문 암자라고 하며

198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된 후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마당에는 보라색 불두화가 있고 甘露水가 흐르는데 물맛이 기가 막히다

지나가는 산꾼 범여가 물 한바가지 들이키고 절 마당을 빠져 나온다 

불일암 절 마당에 있는 평상

왠 빠삐용 의자(?)

법정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주석하고 계셨을 때 손수 만드셨다는 빠빠용

의자가 이곳 불일암에도 똑 같은게 있는데 아마 이것은 짝뚱이겠지

의자를 보니 갑자기 큰스님이 많이 생각난다... 難世에 큰 스님이 계셨드라면...

다시 불일폭포 갈림길(06:25)

목적 산행인 맥 산행이 아닌 이벤트 산행이다보니 다들 마음의 여유가 보인다

맥길이었으면 죽기살기 갔을 이 길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여우로운 牛步산행이다

다시 무게가 20kg가  넘는 베낭을 메고 본격적인 급경사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곳에

입산금지 팻말이 있고 사립문이 있지만 문은 열려있다... 가라는거야 말라는거야

단속구간인 비법정탐방로이긴 하지만 길은 좋고 이정표도 잘되어 있다

빡세게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코가 땅에 닿을만큼 힘이 든다

집터의 흔적

급경사의 오르막을 지나면서 ‘갈 지(之)’ 형태로 걸어가니 태양광 이동통신탑이 나오고

옛날 집터의 흔적같은 담장을 만나는데, 예전에 삶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부터는 이 능선 너머 청학동 자락과 마찬가지로 이 골짜기에도 온갖

비결쟁이와 토굴수도객, 화전민들이 삶의 터전을 이어간 곳이기도 한 곳이다

다시 호젓한 산죽길이 나오고 산죽길을 지나니 좌측은 너덜지대 우측은 계곡이다

날이 밝은지는 오래되었지만 깊은 계곡에 숲이 너무 우거져 아직도 어둡기만 하고

높은 습도에다 안개가 몰려오는 바람에 안경을 착용한 범여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시원한 계곡을 따라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하여

어젯밤에 지리 남부능선을 출발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수원역까지

캔맥주를 잔뜩 사가지고 나와 잘 갔다오라고 하신 닉이 ‘나산적님’이 하사하신

캔맥주 한잔을 마시고 잠깐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동료산꾼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나산적님은 땅끝기맥 할 때 한번인가 산행을 같이한 적이 있는데 산적답지 않게

자상하신 면도 있다... 산적 두목이 저런 자상한 면도 있어야 부하(?)들이 충성하지

나산적님... 캔맥주 정말 잘 먹었습니다...정말 복받을깁니다

내 나와바리 구역(강남)에 오시면 션한 맥주한잔 꼭 대접하리다

계곡위에 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층층나무, 노각나무, 고로쇠, 서어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다시 가파른 길로 올라서 너덜길을 건너는 싯점에 오늘 이벤트 산행에 대장을 맡은

하늘마음님이 베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덩달아 같이 쉰다

이번 산행을 기획하면서 가장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다

다시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베낭이 너무 무거워 어깨가 내려 앉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습도가 높고 땀은 비오듯 흐르는데

주위에는 산수국과 나리꽃... 이름모를 버섯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너덜길에 피어 있는 산수국

다람쥐 눈물버섯

쌍계사에서 이곳까지 4.9km를 계속해서 오르막길로 올라오니 안부능선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조금 돌아서니 넓은 공터에 상불재라는 이정표가 보인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내려가면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등로인데 길은 제법 뚜렸하다

형제봉 아래에 있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나오는데 박경리 여사의

大河小說 ‘土地’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서희, 최참판, 길상이, 용이 등등

10년도 넘은 시절에 15권이나 되는 소설을 한달만에 다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산행을 하면서 그 지역에 관련된 대하소설을 읽고 걸으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소설은 호남정맥을 걸으면서 읽었던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일 것이다... 보성,조성, 겸백, 벌교, 순천 지역에 걸쳐있는

산과 재(고개)에 관련된 사연들...그 바람에 10권이나 되는 태백산맥을 2번이나 읽었다

상불재(上佛峙:08:25)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청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우측으로 내려서며 청학동이

있는 삼성궁으로 빠지는 길이고 직진은 삼신봉, 뒷쪽은 형제봉, 좌측은 쌍계사다

예전엔 성불재(成佛), 생불재(生佛)라고 불렀는데 이정표에는 상불재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불일폭포의 계곡 이름 중 불일폭포 주변을 하불(下佛), 상류지역을

상불(上佛)이라 불렀다고 해서 상불재라는데 어딘가 모르게 좀 어색하다

상불재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연신 물을 마셔된다

쌍계사 들머리에서 이곳까지 4.9km... 베낭을 내려놓고 불일폭포까지 갔다온 거리가

왕복 0.6km... 그런데 약 4시간가량이  시간당 1km가 조금 넘게 걸었다

맥 산행에서는 상상도 못할 거리이다... 베낭이 무겁기도 했지만 쉬고 먹고 여유를 부린 탓일까?

 

삼성궁(三聖宮)

배달 민족 성전으로 한배임, 한배웅, 한배검 및 역대 나라를 세운 태조, 각 성씨의 시조, 현인과 무장을

모신 신성한 성역이며 뿌리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고, 근원 없는 강물이 있을 수 없듯이 인류의 역사가

있음에 그 겨레의 조상이 있는 것은 하늘이 정한 아름다운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수두라는 성역을 세워 하늘에 제 지내고, 배달 민족 고유의 정통 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의 삼화경과 삼륜(三倫), 오계(五戒), 팔조(八條), 구서(八誓)의

덕목을 가르쳤다

 

지리산(智異山)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흘러 섬진강에 와서 큰 봉우리를 이루었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하였고 옛부터 두류산은 영악(靈嶽)으로 동쪽은 천황봉(天皇峰)이,

서쪽은 반야봉(般若峰)이 중앙에는 영신대(靈神臺)가 있어 병풍같은 장막을 치고 있다.

영신대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맥(脈)이 삼신봉(三神峰)을 만들고, 다시 동서로 맥을 이어

신선대, 삼성봉, 삼선봉, 미륵봉, 시리봉을 잇는 주위 사십 리의 청학동을 작국(作局)하였다.

이 청학동을 신라 최치원 선생과 도선국사(道詵國師)를 비롯한 역대의 선사들이

동방제일의 명지(名地)로 가르킨 곳이다.

이 천하의 명지에 배달성전 청학선원 삼성궁(倍達聖殿 靑鶴仙苑 三聖宮)이 위치하고 있다.

잠깐 쉬는 사이에 땀이 식어 寒氣를 느껴 바람막이 체온을 유지하고 아침상을 펼친다

잠시 후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한 범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다

지금 모 산악회에서 호남정맥을 같이 하신다는 여 산꾼님들... 닉이 해미, 머루다래,

아가다, 하나하나님(닉이 맞는지 모르겠다)... 나하고는 산행은 오늘 처음이다

집에서 싸온 음식을 보고 이 분들 혹 가출을 했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가져온 밥에다가 해물, 야채를 비닐봉지에다 넣고 비벼서 즉석 비빔밥을 만드는데

난 구례 식당에서 빈 도시락에 싸온 맨밥 하나... 괜시리 미안하다

거기다가 막걸리에 담금주로 아침 해장을 하니... 세상 부러울게 하나 없다

오늘 첨 뵌 분중에 친정이 진주라는 해미님 나하고 연식이 같은 갑장이라는데

모든게 정말 똑부러진다...진주댁 무겁고 지고 온 음식으로 인해 오랫만에

범여의 입이 호강했습니다... 이 보시공덕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이곳에서 40분이상 먹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삼신봉으로 향한다 

맥 산행에서는 상상도 못할 시간으로 이른 아침에 산상만찬을 즐긴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곳은 지리산 구간중에서 오지에 속한 곳이다보니 우리 일행 이외는 개매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는다

등로 주위에는 모싯대, 며느리 밥풀 등 야생화가 흐드르지게 피어있는 산죽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암릉을 우회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지만 제도권(국립공원) 등로라 그런지 인적은 드물지만 길은 무지좋다

며느리밥풀꽃의 전설

옛날 어느 마을 가난한 집 아들이 혼인을 하여 며느리가 들어 왔다.

당시는 흉년이 계속되는 시기여서 웬만한 집안에서는 끼니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 생신날이 되어 며느리는 귀한 쌀을

한 줌 내어 밥을 지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 밥상을 차려 드리고 나서

솥을 씻으려다가 솥뚜껑 안에 붙은 밥알 두 알을 보고 얼른 입에 넣는데,

마침 시어머니가 들어와 그것을 보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엌일을 하면서 항시 자신의 몫을 감추었다 먹는

것으로 오해하고 내쫓아버렸다. 억울하게 내쫓긴 며느리는 고갯마루에 앉아

울다가 자신의 결백을 내보이기 위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은 어머니와 아들은 그 시체를 거두어 선영에 묻었

는데, 다음해 그 무덤에 하얀 밥알을 입에 문 것 같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그 며느리의 넋이 꽃으로 화했다 하여 며느리밥풀꽃이라 하였다

더덕캐는 여인

오늘 처음 같이 산행을 한 여산꾼중에 닉이 ‘머루다래’라는 분이 있는데

난 이분이 가수인줄 알았다... 길을 걸어면서 닉을 물어보니 자기가 언니라

머루이고 동생이 다래라고 하는데 약초에 대해 상당한 내공을 가지신 분이다

지나가다 냄새만 맡고 즉시 주위를 살피더니만 더덕을 발견하고 캐기 시작한다

산수국(꽃말:변하기 쉬운 마음)

독바위 갈림길(09:45)

간산꼬리풀

독바위 갈림길의 넓은 공터에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하는데 독바위쪽은 국공파들이 막아놨다

핑크빛 꿩의다리

지금의 지리산 능선은 짙은 박무로 인해 아직은 먼 산이다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앞서가던 김준길 회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등로 주위에 여인 소리로 시끄러워진다.

우리 일행말고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여성 산악회에

나와 진양, 팔공, 호미기맥을 같이한 도희 동생이 내려오는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러나 아쉽지만 갈 길이 멀어 이내 헤어진다 

쇠통바위(1,271m:10:05)

능선 위로 바라보니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암릉이 보이는데 쇠통바위란다

마치 백두대간 석병산 구간에서 만난 일월문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쇠통이란 경상도에서 잠물쇠,또는 자물통을 쇠통이라 부른다

 

 

 

 

삼신봉의 명물 쇠통바위는 일명 통천문이라 불리는 석문이 있는

 

 

 

 

암봉의 외형이 마치 쇠자물통처럼 생겨 보여 얻어진 이름이다.

 

쇠통바위는 인간세상과 이상향으로 드나드는 통문 역할을 한다.

이 쇠통바위는 청학동 사람들에겐 큰 의미를 가진 바위다.

청학동 사람들은 학동마을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이 쇠통바위를 열어야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천국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쇠통바위 아래에 있는 이정표

쇠통바위로 오르려니 흙이 자꾸 무너져 내려오고 짙은 안개가 끼여있어

쇠통바위 위로 오르는 걸 포기하고 이정표를 따라서 등로를 이어간다

의좋은 나리 삼형제

노루오줌

송정굴 아래?(10:25)

힘들게 암릉구간을 오르는데 이곳 위가 송정굴이라는데 베낭의

무게와 높은 습도를 이기지 못하고 걷다보니 송정굴을 그냥 지나친다

송정굴은 조선 선조때의 문신 하수일 선생이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숨어 지냈다는 곳이며 길이는 20여m이고, 높이는 10여m, 높이는

1.5m ~ 2m 정도되며 빨치산의 은거지이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탐방로가 아니라고 가지 말란다... 그쪽으로는 갈일이 없소이다

등로 옆에는 다래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다시 산죽길을 따라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石門이 나온다

석문(10:55)

내삼신봉 가기 직전에 통과의례로 석문을 지나가야 한다

로프를 타고 석문위로 올라서니 맞은편에 서 있는 내삼신봉 정상석이 조그맣게 보인다

석문위로 올라서서 바라본 내삼신봉의 모습

석문 정상의 모습

먼저간 동료산꾼들이 내삼신봉 정상에 서 있다

멋진 전망을 기대할 수 없고 짙은 박무로 전망은 꽝...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내삼신봉 정상 2등 삼각점(△운봉 21 / 1991 복구)

내삼신봉(內三神峰:1,354.7m:11:05)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청암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3개의 삼신봉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정상석엔 특이하게도 “三神山頂”이라 써 있는데 뭘 의미하는걸까 

암릉으로 된 정상에는 2등삼각점과 정상석만 서 있고 별 특징은 없어 보인다

거기다가 평일인데다 산꾼들이 뜸한 남부능선이다가 보니우리 이외는 개매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고 주위는 짙은 박무로 인해 오리무중... 서둘러 삼신봉으로 향한다

삼신봉 가는길

갈림길(11:30)

2010년 8월 22일 낙남정맥 마지막 구간 고운동재에서 영신봉으로 향할 때

이곳을 지났으니 정확하게 5년만에 이곳에 감회가 새롭기만 하는구나

갈림길 이정표

갈림길을 지나 삼신봉 정상으로 향한다

삼신봉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뒤돌아 본 내삼신봉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외삼신봉과 묵계치는 짙은 박무에 휩싸여 있고

모든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몰려 들었다는 청학동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삼신봉(1,284m:11:35)

삼신봉은 성산(聖山)인 지리산 봉우리 중 성봉(聖峰)으로 자리매김한다.

삼신봉 정상에서 보면 천왕봉과 노고단의 100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쌍계사와 세석을 잇는

등산로의 중간 기착지이다. 삼신봉은 지리산 남쪽에서는 한 개의 봉우리이지만 실제 삼신봉은

외삼신봉과 내삼신봉과 더불어 세 개의 봉우리다.

 

삼신의 사전적 의미는 환인, 환웅, 환검의 세 삼신인 三聖 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 三神靈.

즉 삼신 할머니를 지칭하고 있어 신화적인 의미와 생명을 점지 하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편이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인 봉래산(蓬來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컫는다.

삼신봉은 신화적인 의미와 영적(靈的)인 의미가 진하게 풍긴다. 더군더나

저 아래 청학동의 청학(靑鶴) 역시 神仙이 부리는 전설속의 새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삼신봉과 청학동은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을 지칭하며 지리산 남쪽

어느 자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봉우리에서 3km 아래에 모든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찾아들었다는 청학동...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1,000년이 지난 신라말기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상향을 찾아 들어갔다는 지리산...

선생의 입산 자취가 이 일대에 유난히도 많다

2010년 8월 25일 낙남정맥길에서

청학동을 바라보며 주원아빠는 뭘 생각하는지?

백두대간 남진길에서 만난 주원아빠... 30대의 젊은 친구인데 내가 볼 땐

보면 볼수록 참으로 기특하고 이쁜 친구이다... 요즘 온실에서 자란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나약한가... 그런데 이 친구! 그 험하디 험한 3,000리 길의 백두대간을

걷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데다 윗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깍듯하고...

그래! 산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다네... 주원아빠가 백두대간 대장할 때 꼭 동행하마

박무가 내삼신봉을 가로 막아 버린다

아무래도 오늘 삼신봉에서 지리산 전체를 조망한다는걸 불가능할 듯 싶어 동료산꾼들과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내려와 우측으로 꺽어져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참으로 반가운 표지기... 그러나

내가 낙동정맥을 했던 산악회인데 이곳에 표지가 놓여있어 무척 반갑다

온누리님, 쑥영감, 등산조아님들 다들 잘있는지 궁금하다

지난주에 낙남정맥을 시작하며 깔아놓은 표지기인 모양인데 비를 맞은채 방치되어 있다

반갑긴 한데 후미에서 회수되었으면 좋으련만... 비를 맞은채 지저분하게 깔려있다

마지막 후미대장이 회수했되으면 ... 산에는 아니온 듯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愛情이 있는 산악회라서 그런지 조금은 아쉽다

뱀무

낙남정맥길인  외삼신봉과 묵계치 방향도 짙은 박무가 가려 버린다

고사목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곳은 1997년 10월 21일 삼신봉 일대에

일어난 산불로 인해서란다... 그 당시 약 50ha의 산림을 불태웠는데

지리산이 국립공원 국립공원이 지정된 이후에 가장 큰 산불이라고 하며

등산객의 실화에 의해 발생됐는데 1천명의 인력과 13대 헬기로 진화에

나서 하룻만에 진화를 했는데 뒷불 진화용으로 비가 내렸다고 하니

그연 지리산은 영산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낙남정맥길인 등로는 생각보다 걷기가 힘들다

분홍색 꿩의다리

1278m봉(12:35)

1278m봉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서니 이정표와 말라죽은

산죽이 나오는데 이곳도 지난 5월에 걸었던 영월지맥 치악산 구간처럼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전부 우회하게 만들어놔서 조금은 아쉽지만 맥산행이 아니기에 편하게 걷는다

말라죽은 산죽길을 지나고...

무당버섯

껍질눈물버섯

다시 호젓한 산죽길을 지나고...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탓일까... 도도함을 잃지않은 소나무 한그루를 만난다

한벗샘 갈림길(13:20)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한벗샘이 나오는데 국공파들이 목책으로 막아놨다

예전 같으면 객기를 부리면서 법을 어겨서라도 가겠지만 이제 내 나이 60이라

조금은 조신하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 선두를 따라서 그냥 지나친다

한벗샘은 거림으로 이어지는 자빠진 골(엎어진 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1237m봉(13:27)

보도블럭을 깔아둔 폐헬기장에 이정표와  긴급시에 상용할 수 있는 비상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1246m봉(13:50)

다시 힘들게 고도를 높이니좌.우측 암릉으로 되어 있는 안부가 나오고

이곳에서 무거운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안부아래서 불어오는

션한 바람에 거풍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련만... 여성 산꾼들 땜에 엄두도 못낸다

안부(14:05)

세석산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체력 저하로 인해 산행속도는 점점 떨어진다

그나마 주위의 멋진 암릉들이 산꾼 범여를 격려하는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아직도 3.3km나 남았다니 오늘의 산행 수준이라면 2시간을 더 가야 한다는 애기인가?

비박하기 좋은 장소이다... 국립공원은 비박을 할 수 없습니다

암릉 위로 오르니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짙은 박무가 걷히면서 주위 능선이 보인다

이번 이벤트 산행의 대장을 맡은 하늘마음님이 일기 예보에 오후 3시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비는커녕 하늘만 맑아지는데 다 대장이 德을 쌓은 덕분이련가...암튼 고생이 많소이다

7년 가까이 매주 맥산행을 하면서 느낀 점은 기상청을 잘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하면 기상청을 구라청이라 했는가... 하늘마음님 너무 걱정마소... 하늘을 보니 절대 비는 안오겠소

전망바위(14:35)

전망암에 오르니 능선 아래로 거림마을과 자빠진골이 한 눈에 들어온다

햇볕이 너무 따갑다... 더 이상 걷기가 힘이들 정도인데 일부는 도망가고(?)

넉살좋은 선달님과 대장하고 셋이서 휴식을 취하는데 선달님이 지고 온

시원한 오이 한조각이 왜그리 꿀맛이련가...이럴땐 션한 맥주 한잔이 넘 생각난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자빠진골과 거림마을

자빠진골은 지리산의 아흔아홉 골짜기중에 하나로 능선에 삐뚜름하게 붙어 자빠진 듯 생긴

모양에서 유래되어 붙은 지명이며 그 아래로 거림마을이 보이는데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6.25라는 한국전쟁이 일어난지도 벌써 반백년도 훨씬 넘은 65년이나 넘었건만 아직도

아픈 역사를 가진 거림마을...

민주와 공산주의 이데오르기라는 이념 전쟁에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民草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중에서도 마지막 여자 빨치산(남편을 찾아 빨치산이 된 여인) 정 순덕이라는 여인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51년 빨치산 정 석조와 결혼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향을 거부하며 비전향 장기수로 남아 있다가 2004년 생을 마감한

비극의 여인 정 순덕이라는 여인이 마지막 활동한 곳이 이곳이다 

지나온 내삼신봉과 삼신봉은 자꾸만 멀어진다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내일 가야할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세석평전이 아련히 보인다

 호야와 연진낭자의 슬픈 사랑이 담겨 있는 세석평전을 바라보는 감회는 새롭기만 하다

슬픈 사랑의 결말은 호야는 영신봉이 되었고 호야를 기다리며 기도하다 돌이 되어 버렸다는

촛대봉...그러기에 봄에 세석평전에 피는 철쭉은 유난히도 곱다고 한다

석문(14:50)

이정표(15:00)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다행히도 힘든 구간을 모두 우회의 편안 구간을 걷겠끔

국공파들이 친절함을 베풀고 있는데 오늘같이 힘든 날은 그저 고맙기만 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대성동 빗점골 능선의 모습

이곳 지리산 남부 능선은 한국 현대사의 이념갈등과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1951년 12월 2천여명에 이르는 이영회 부대 빨치산들이 군.경 토벌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숨어든 이 골짜기에 그 이듬해 1월 마지막 화력을 퍼부어 엄청난 사상자를 낸 곳이

이곳 좌측의  대성골과 우측의 거림골이다

좌.우의 이념 대결에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저 민초들의 원한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편안길을 걷는데 민초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비추만 흐드르지게 피어 있다

의신마을 갈림길(15:10)

세석평전이 가까워질수록 베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발걸음 느려만 진다

이른 아침에는 높은 습도와 짙은 박무이기는 했지만 날씨가 선선하여 산행하기는

좋았다마는 오후에는 날씨가 구라청(기상청)이 오후 3시 이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는 어김없이 빗나가고 정말 산꾼 범여를 잡는다

 

의신마을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길은 조선시대 유몽인, 이륙, 김일손 같은 선비들이

천왕봉을 구경하고 세석고원의 영신사로 이동했다가 쌍계사로 하산할 때 대부분 대성동

길을 이용했다는 문헌을 남겼는데 이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선비들의 힘든 여정이 녹아있는 대성동을 오르는 이 코스는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이태 남부군)..

 60여년 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초들의 영혼은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들이 이 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배슈맑 선배님 블로그 인용)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대성골의 모습

 

이 골짜기 온통 불바다가 되던 날

박격포탄 기관총탄 하늘을 찢어

하얀 산에 불꽃 날름거리고 검은 연기

하늘을 덮어 불춤을 추던 날

이 골 저 골 저 등성이 천불을 맞아

하얀 산이 온통 피가 되고 숯덩이가 되었다

 

엉켜붙은 그 주검들 더미 위에

누깔과 상처를 쪼던 까마귀 서너 마리

숨어살던 비결쟁이도 열네살 소년도

거기 쓰러져서 역사(歷史)가 되었다

 

나는 바위를 떠다밀고 일어나 눈을 털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헤치며 내려간다

그 죽음들은 지금 어디로들 헤매고 다닐까

그로부터 40여년 침묵이 쌓인 지금

이 골짜기 왜 이리 고요해 숨이 막힐까

 

- 이성부 “대성골이 너무 고요하다 -

아직도 세석평전은 멀게만 보인다

참취나물

모싯대

까치수영

꿩의 다리

동자꽃

의신마을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고도를 높이긴해도 완만하여 걷기는 편하다

조금을 더 오르니 음양수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등로로 오르는데 지리산은 참 물이

많은 산인 모양이다... 주위에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등로 옆에는 돌절구통인지(?) 생활도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넓은 공터에 민가의 흔적이 보이는데 국립공원에서 목책으로 막아놨다

음양수 부근인 이곳은 넓고 평탄한 지역에 물이 많아 1960대까지만 해도

화전민 10여호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물이 흘러 내리는 등로를 따라서 조금 더 올라서니 음양수에서 동료산꾼들이 쉬고 있다

음양수(陰陽水:1450m:15:55)

음양수는 음양수제단이 설치된 바위 바로아래 있는 석천(石泉)으로,
햇볕이 드는 쪽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이 되듯 한 곳으로 합쳐져 흐른다.
자식없는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단다.

 

지리산 능선 해발 1,450m 고지에 있는 이 샘은 신령한 영신봉에서 내려온 약수로

좁은 돌틈 사이에서 비집고 이 물은 지리산 샘중에서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음양은 易學에서 우주만물을 만들어내는 상반된 성질의 두 기운을 합친 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흔히들 지리산을 물이 많다고 해서 여자의 산이라고 한다.

해발 1800m 고지부터 풍부한 수량의 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니 말이다.

참으로 물맛이 너무도 좋다. 양쪽에서 흘러나와 합쳐진 물을 받아 수통에 채운다

그리고 여성산꾼들이 메고온 미수가루에 각설탕을 넣어 나눠 마시는데 정말 꿀맛이다

이곳에서 맥산행에서는 상상도 못할(?)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다음에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바위떡풀

며느리 밥풀 

산오이풀

음양수 부근에도 산오이풀,며느리 밥풀, 바위떡풀, 간산꼬리, 동자꽃 등 야생화 천국이다

음양수 제단(16:15)

음양수에서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길 좌측 바위위에 돌탑으로 만든 제단이 있고

넓은 바위 공터가 있는데 이곳은 분단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부군에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여성대원 15명이 지리산

토벌군에 쫒기다가 이곳에서 포위가 되자 전원 자결했다는 슬픈 기록이 있다. 

 

또 이곳은 우천 허만수라는 분이 좌선대를 만들어 도를 딲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는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이로 지리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처자식까지 내팽겨치고

20대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초막하나 지어놓고 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토끼털 송편버섯

짚신나물(?)

거림마을 갈림길(16:27)

세석대피소(16:35)

쌍계사 입구를 출발한 지 12시간만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한다

물론 베낭의 무게 때문에 많이 쉬긴 했어도 예상시간보다 2시간이 오버됐다

아~~~! 이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일까... 무거운 베낭으로 비박산행은

무리인가... 아님 체력의 한계인가... 가야할 산은 너무 많은데 자꾸만 고민스럽다

세석평전(細石平田)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하고 북으로 덕유산 국립공원에 이어지며 천왕봉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智異山 명칭은 두음법칙의 예외로 특이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이다.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세석평전은 본시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석산장에서 여장을 푼 다음에 산장 아래 개울에서 간단하게 씻고 예약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산장 야외 데크에서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데 가져온 걸 보니 입이 벌어진다

김준길 회장님은 삼결살 3kg을 지고왔고, 여성 산꾼들은 집나온 여인처럼 바리바리

싸온 밑반찬에다가 하늘마음님, 넉살좋은 선달님, 막내 주원아빠까지 내놓은 음식이

오랫동안 독립군(나홀로 산행) 활동을 한 범여는 통 이해가 안되고 영 어색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오랫만에 범여의 입이 호강한다

범여가 가지고 온 아웃도어용 압력밥솥

백두대간 남진팀을 비롯하여 오늘 처음만난 산꾼들과 산상만찬을 끝내고

8시 30분에 숙소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면서 세석산장에서 달콤한 1박을 보낸다

 

P.S:똑닥이 카메라의 한계로 인해 선달님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