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의 충북 알프스... 그 둘째날에
☞ 산행일시: 2015년 8월 15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km + 어프로치 3.5km / 10시간 08분 소요
☞ 참석인원: 동료산꾼 3명과 함께
☞ 산행코스: 장고개-묘지-헬기장-성황당-동관음고개-백두대간 갈림길-갈령 삼거리-형제봉-803m봉-피앗재
639m봉-667m봉-703m봉-대목재-한남.금북정맥 갈림길-천왕봉-헬기장-천왕석문-비로봉-입석대
경업대-신선대-청법대-문수봉-문장대탐방 안내소-성불사-반야교-오송교-속리산 화북분소
☞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 경북 상주시 화남면, 화북면
오랫만의 비박이라 그런지 어젯밤에 텐트에서의 밤잠을 설쳤더니만 왠지 몸이 무겁다
새벽 4시경에 일어나 부지런히 텐트를 철수하고 아침밥을 해서 먹고 모든걸 정리하여
차에 살고나니 6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장고개로 향하여 차량으로 이동한다
충북 알프스 지도
장고개(07:25)
장고개 정상 도로 우측에 차량을 세워놓고 워밍업을 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07:30)
잘 알겠습니다
장고개에서 5분정도 올라서니 무명묘지 2기를 연달아 만나고...
능선에 올라서는데 어젯밤에 과하게 마신 산삼주 때문인지 아님 잠을 설쳐서
그런지는 몰라도 초반에 몸이 엄청나게 무겁다... 산을 제대로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쭉쭉빵빵한 일본 낙엽송
김해 백두산악회 시그널
이 산악회 홍길동 아우님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
4년전 금남정맥을 독립군으로 다닐때 역시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할 때만났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잘 있는지 궁금하구나
무명묘지(07:40)
또 다른 묘지를 만나 우측(북동쪽)으로 진행을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에
등로에서 살짝 이탈하여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다시 길을 걷는데
등로 주위에는 이른 아침이라 박무가 많이 끼어있다
헬기장(07:47)
어제 걸었던 구병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헬기장을 지나 능선 꼭대기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급하게 8분 정도를 걸어서 내려서니
안부에 율령 산왕각이 있는데 문이 닫혀져있고 나무로 열리지 않토록 고여 놓았다.
栗嶺 山王閣(07:55)
율령 산왕각 문을 열고 산왕대신에게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예를 올리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08:00)
산신각 맞은편을 향해 오르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계속 진행을 하다 북북서쪽으로 내려서서 완만한 오르내림을
몇번 하는데 가끔 등로가 희미해 지기도 하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등로 옆에있는 앙증맞은 암릉구간을 지나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빗내림이 시작된다
묘지의 흔적(08:07)
예전에 묘지가 있었는데 移葬을 한 것인지 아님 관리가 안되어 봉분이 없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내리막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암릉사이의 오르막으로 올라서는데 초반부터 힘이 부친다
가끔씩 영지버섯이 보이기 시작하고...
안부(08:15)
잣나무 군락지가 있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잣나무 군락지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오르막 능선에 올랐다가 내려서니 묘지가 있고...
잠시후 또다른 묘지를 만나는데 이곳 묘지들은 한결같이 잔디가 없다
묘지를 지나 미끄러운 등로로 내려서니 포장임도가 보인다
동관음 고개(08:25)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장자동에서 동관음 마을로 이어지는 임도로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차량이 다닐 만큼의 도로 동네의 이름을 따 동관고개라
부르기도 하는데 동관음 고개가 있는 화남면은 경북 상주시 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동쪽은 화서면 서쪽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남쪽은 화동면, 북쪽은 화북면에 접해 있다.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는 산간 지역으로 면 가운데를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금계천을 따라 좁게 평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 면 소재지인 평온리를 비롯하여
소곡리·동관리 등 5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화남' 지명은 고려시대 화령현(化寧縣)의 남쪽이 되므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는데,
'화령' 지명은 『고려사지리지』에 "화령군은 원래 신라의 답달비군(答達匕郡, 沓達이라고도 함)인데
경덕왕이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후에 현으로 하여
본 목에 소속시켰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상주)와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에도 같은 내용의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본
래 조선시대 상주목 화북면(化北面) 지역이었다.
『여지도서』(상주)에 "화북면은 관문으로부터 100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고,
『호구총수』(상주)에도 화북면이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청구도』에도 화북면이 표기되어 있다.
1914년 기존 화북면의 여러 동리를 재편하여 11개 동리를 관할하게 된 화북면에 속하게 되었다.
1986년 상주군에 속하였고, 1989년 그동안 현재의 5개 동리를 관할하던 화북면 남부출장소를
화남면이라는 이름으로 분리하여 승격시켰다.
동관음고개로 내려온만큼 다시 급경사의 능선을 치고 오른다
능선에서 바라본 동관음 마을의 모습
묘지를 지나면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느라 힘이들어 베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한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 능선 안부를 걷는데 능선 아래에 무당집이 있는지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며 굿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저 무당이
힘없는 民草의 불안함을 미끼로 惑世誣民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붓다께서는 正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라 했것만... 저 무당은 또 업을 짓는구나
721m봉(08:55)
기암괴석 능선으로 이루어진 등로에 오르니 곧바로 오르지 못하고 우회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721m봉을 우회하여 능선에 오르니 날씨는 화창해지고 암릉
바로 아래 동관음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고 가야할 속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습지의 흔적처럼 보이는 우묵한 곳을 지나 조금 진행하니 옆 사면길이 나온다
옆사면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갑자기 더덕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자세히보니 더덕 2뿌리가 보인다
정상을 오르지 않고 옆사면 안부로 내려선다
백두대간과 합쳐지는 곳(09:15)
이곳부터 문장대까지는 충북알프스와 백두대간 길이 겹쳐지는 구간이다
이곳을 2번이나 걸었지만 주로 밤에 다녔기에 그리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이다
안부에서 올라서니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우회길을 만들어 놨다
우회길로 올라 서는데...
등로를 지나가는 뱀 한마리가 있는데 잘못하여 밟을뻔 했다
다시 로프를 잡고 급경사로 내려섰다가 암릉을 우회하여 올라서니...
백두대간 2번을 타면서 들머리와 날머리를 겸했던 갈령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리고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 형제봉으로 향한다
갈령(葛嶺) 삼거리(680m:09:40)
삼거리 정상에는 산행 안내판과 이정표, 원형으로 만든 쉼터가 있으며
직진을 하면 백두대간 길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갈령으로 가는 작약지맥길이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산꾼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곳으로 대간, 작약지맥, 우복동 십승지
충북 알프스 등로가 겹쳐지는 곳으로 그야말로 사통팔달 지역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1.3km 떨어진 갈령은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나인 상주 우복동이 있으며 6.25동란 때 한국군 제7연대가
인민군을 맞아 첫 승리한 화령장 전투중에 격전지로 유명한 곳으로 상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도로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의 넓은 도로가 지나가는 갈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지금은 나처럼 대간 산꾼이나 찾는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
과하게 마신 산삼주 때문인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힘이든다
형제봉(兄第峯 832m:10:20)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그리고 보은군 속리산면에 걸쳐있는, 백두대간상에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로써 갈령, 억시기, 상오리, 장고개, 절골, 만수동에서 접근할 수 있다.
삼면 경계봉으로 커다란 암릉 2개가 서있어 형제봉이라고 부른다
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대간 속리산 형제봉 동쪽 0.6km지점의 721m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북으로 영강, 남으로
이안천을 가르며 영강과 이안천이 합해지는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맥을 다하는 48km의 산줄기다.
영강은 태봉리에서 이안천 물을 보탠 다음 5km 더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북으로는 백두대간과 운달지맥, 남으로는 숭덕지맥을 건너보며, 두루봉(874m), 칠봉산(597m),
작약산(774m), 수정봉(486.5m)을 거쳐 함창읍 태봉리 논 한가운데
섬처럼 솟은 태봉산(106m)을 끝으로 산줄기를 마감한다.
행정구역은 상주시 화북, 화남면계로 출발을 하고, 칠봉산, 작약산을 지나면서 문경시계와 접한다.
상주시 함창읍에서 끝을 맺는데 상주시의 최북단을 달리며 사실상 상주시의 북쪽 울타리 역할을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함창IC를 건너가야 하고, 함창읍 시가지를 관통하게 되므로 마지막
구간은 대부분 산길이 아닌 도로주행이 되겠다
형제봉 정상에서 바라본 청계산(대궐터산)의 모습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와 화남면 동관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형제봉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솟은 산이며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랫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에 청계사와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는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잠시후에 가야 할 천왕봉이 아련히 보이길 시작하고...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말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용유동(龍遊洞)은 민초들이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우복동(牛腹洞)이라고 부른다.
우복동의 지세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병풍에 첩첩이 막혀있다.
또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 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나 이처럼 예전엔 접근조차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 길가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
표면에 새겨진 멋들어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봉에서 피앗재가는 길은 급경사에다 길이 움푹파여 있어 걷기가 참으로 힘이든다
마치 못된 놀부가 심보를 부리듯 하는 길을 조심해서 내려오니 편안한 안부가 나온다
803m봉(10:35)
803m봉 정상은 오르지 못하고 우측 옆사면길로 등로를 이어간다
803m봉을 우회하며 내려가는 길에 엄마와 아들이 대간을 탄다는
시그널을 만나는데 참으로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암릉을 우회하여 올랐다가 내려서니 피앗재가 보인다
피앗재(避禍峙:10:55)
보은군 내속리면(현 장안면) 대목리 만수동에서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옛날에 첩첩산중이라 피난지로 적합한 곳이어서 ‘피화재(避禍峙)’로 불렀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피앗재로 불리웠다고 한다.
옛날에는 보은의 만수동 사람들이 상주 화북장을 보러 다녔던 중요한 고갯길이었으며
만수동 계곡은 풍광이 뛰어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란다
전쟁이 일어나 팔도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아온 탓에
아직도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무명봉도 지나고...
다시 등로는 유순해지고...
뒤돌아 본 형제봉의 모습
667m봉(11:25)
장각동과 백두대간의 갈림길이다. 등로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진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유명한 장각폭포와 금란정이 있는데 폭포 아래 널찍한
소(沼)와 절벽위의 정자와 소나무가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장각마을에는 상오리의 7층 석탑(보물 제683호)이 있고 이곳은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낭만자객, 이 순신 등 드라마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상오리 7층 석탑이 뚜렸히 보이건만 카메라로는 잡히질 않는다
고려 중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오리 7층 석탑(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아름다운 자태로 뭇 사람들을 유혹하는 장각폭포와 금란정의 모습(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구조목(11:55)
힘들게 봉우리 하나를 치고 오르니 정상에 구조목 표시판이 있는데 우측으로 돌아간다
천왕봉이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고...
725m봉(12:10)
편안한 산죽길이 이어지건만 자꾸만 힘이들어 그저 주저앉고 싶다
점심&휴식(12:00~13:00)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내가 먼저 가다가 퍼져 버리니까... 조금을 더 진행하고 싶어하는 등산조아님도
어쩔 수 없이 베낭을 내리고 의자를 펴는데 동행한 여성 산꾼들도 힘이 드는 모양이다
밥보다는 물이 더 먹히고 시원한 물한모금 마시고 웃옷과 모자를 벗어 스틱에 걸어
말리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놓고 베낭을 벤 채로 10분 정도의 쪽잠을 잔 다음에
아침에 도시락으로 싸온 햇반에다 물을 말아서 억지로 점심을 먹은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1시간 가량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했는지 훨씬 편하다
급경사로 내려오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다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계속되는 오르막
지나온 능선들... 형제봉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703m봉(13:20)
703m봉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지나온 형제봉과 그 너머로 대궐터산, 도장산 등 십승지 구간이 다 보인다
2년후쯤이면 저 십승지 구간을 걸을 날이 오겠지... 가야할 산은 많은데 세월이 流水만 같으니...
계속되는 오르막
그러나 1시간 가량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탓인지 훨씬 몸은 가볍다
1년만에 다시만난 무명묘지
능선 안부에 올랐다가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대목재로 내려선다
대목재(13:45)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마을과 보은군 속리산면 대목리를 잇는 고개이다
그 대목리가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도화리(桃花里)로 바뀌었는데
이곳은 유명한 만수계곡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목재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대목리 방면은 등로가 뚜렸하나 장각동
방향은 등로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구조 이정목과 안내판이 서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56대)은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월악산 덕주사에
누이 덕주공주를 두고 망국의 한을 품고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 소백산
국망봉에서 나라잃은 설움의 한을 달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행적이 묘연했던
경순왕 행적비는 상오리 장각동에 있다고 한다
대목재에서 천왕으로 오르는 0.6km는 오늘 구간중에 가장 힘든 코스이나 그런대로 갈만하다
초반에 컨디션 저하로 상당히 고생했지만 휴식을 취한 이후부터는 상당히 좋아졌다
한남.금북정맥 갈림길(14:08)
한남. 금북정맥(총 도상거리 158.1k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1057.7m)에서 분기하여 북으로는
한강(총길이 494.5km)과 남으로는 금강(총길이 401km)의 분수계를 이루며, 충청북도를 북서방향으로
연결하고,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까지 백두대대간에서 남한의 정중앙을 잇는 큰 산줄기이다.
한남 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3정맥의 분기점으로 갈라지며, 충북 보은의 구봉산등 500m급의 많은
봉우리를 넘으며 이어지다 청주의 선두산과 백제시대의 유명한 상당산성을 지나 괴산의 좌구산을 넘고,
음성의 보현산과 소속리산을 넘으면서 9구간 정도 꾸준히 500m~600m급의 정맥 길로 줄기차게 이어오다
음성의 금왕읍을 통과하면서 표고 150m 이하의 구릉지대(도상거리 20여km)를 지나면서 끈질기게
이어지게 되고, 다시 이천의 마이산을 넘으면서 안성의 칠장산에 올라 한남 금북정맥은 분기된다.
금북정맥(총 도상거리 282.4km)은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며, 안성땅을 지나 충남의 천안과 예산의
산줄기를 거처 홍성과 당진, 서산을 지나 태안의 지령산에서 서해바다로 그 맥을 가라앉히고,
한남정맥(총 도상거리 178.5km)은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경기도 용인과 수원의 산줄기를 거쳐
부천과 인천을 지나 김포의 문수봉에서 한강하구로 그 맥을 가라앉히는데 3정맥 총 도상거리
619km에 달하는 큰 산줄기이다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의 궤적
천왕봉 직전에서 바라본 장각동의 모습
천왕봉 정상에서 주위의 仙景을 감상한 다음에 우측으로 내려서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갈령과 늘재를 관문으로 동쪽의 상주 화북면 일대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하나인 우복동천 이다
능선 숲을 헤치며 천왕봉 정상에 올라서니 부부인듯한 등산객 4명만 달랑 정상을 지키고 있다
오늘 산행중에 우리 일행 이외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만난다
천왕봉(天王峰:1,058m:14:10)
충북 보은군 속리면산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속리산 능선 9개의 봉우리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의 主峰이긴 하지만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주봉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대자재천왕이 10월 인일 축시에 이곳 천왕봉으로 내려와
45일동안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천왕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9봉9대(九峰九臺)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정상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대목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십이지종산(十二之宗山)의 하나이자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이곳부터 한남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 칠장산까지 와서 북쪽으로 김포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하는 한남정맥과 남쪽으론 칠장산에서
태안 앞바다인 안흥만에서 맥을 다하는 420km의 금북정맥의 시발점이다
예전에는 天皇峰이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에서부터는 천황봉으로 불리웠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결과라고 한다.
2007년 중앙지명위원회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등을 근거로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천황봉 정상은 삼파수(三派水)의 갈래길이도 하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
으로 이어지고,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은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천왕봉 정상 삼각점(△속리 11 / 2003 재설)
맑은 날 천왕봉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천왕봉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듯 장엄하다.
속리산을 12대 宗山의 하나로 삼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의 24절경을 꼽는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속리산(俗離山)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하였고,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1,032m)·문장대(文藏臺:1,054m)·
관음봉(觀音峰:982m)·길상봉(吉祥峰)·문수봉(文殊峰) 등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속리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으로 불리워오다가 김제 금산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진표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에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를 탄 사람이 달구지에서 내려와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묻는데 나는 금산사에서 오는 진표라는 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곳을 찾아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것을 알고
佛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고 하니까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율사를 따라
신라 말기의 문신이자,유학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이곳 속리산의 비경에 반해 다음과 같은 멋진 시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은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 구나~!
그러나 이 시는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과 <백호집>에 의하면 조선시대 백호 임제가 쓴 시라고 하니 좀 더 지켜봐야 할 사안이다. 어째거나 俗(세속 속) 離(떼놓을 리) 山을 놓고 누구는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출가해서 속리산이라 하고, 누구는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세속이 스스로 산을 떠났을 뿐이기에 속리산이라고 한단다.
천왕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3.5km 구간은 1,000m이상의 천왕봉-비로봉-입석대-신선대-경업대-청법대-
천왕봉 정상에서 속리산 주능선을 바라본 다음에 문장대로 향하는 길은
산죽으로 우거진 호젓한 길인데 오늘은 그리 사람이 많지 않지만 가끔씩
올라오는 등산객을 만날 수가 있다...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헤어진다
장각동 갈림길(14:35)
천왕봉에서 좁은 산죽길을 따라서 조금 내려오니 헬기장이 있는 장각동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서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상오리 칠층석탑과
장각폭포가 나오는 곳으로 장각동(長角洞)은 소의 뱃속모양의 명당터를 일컫는 곳으로
우복동(牛腹洞)의 쇠뿔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장각동 갈림길에서 내려오니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 직전에 ‘탐방로 아님’이라는
팻말과 함께 목책으로 막아 놨는데 저 쪽으로 올라가야 비로봉으로 갈 수 있는데
정상적인 등로로는 비로봉을 오를 수가 없는 곳이다
법주사 갈림길(14:45)
속리산은 주봉이 천왕봉이지만 문장대의 명성에 가려 푸대접을 받는곳이다
흔히들 속리산하면 문장대란 공식이 정답인양 알지만 천왕봉이 엄연한 주봉이다
법주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을 능선 위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능선이 펼쳐져 있다.
좌측이 문장대이고 우측이 천왕봉이며 그 가운데 우뚝솟은 봉우리가 비로봉이다
이곳이 속리산 전체를 가장 잘볼 수 있는 곳이다.
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왕봉도 보인다
마치 기암괴석을 모아논 암릉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곳...
속리산 전체 계곡 구석구석을 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상고암이란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539~575) 14년(553년)에 천축에서 불법을 구하고 귀국한 의신조사에
창건된 가람으로서 불법을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가람이란 뜻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한 이곳이 속세를 떠니 불법의 진리를 펼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헤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에
증통국사가 중건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고, 오른쪽 노사나불의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부쳤으며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 양식으로, 5층은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 펌)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로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율사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대찰(大刹)답게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한 법주사
법주사 회주로 계시는 월탄 큰 스님과 얼마전에 법주사 주지로 계셨던 지명
큰스님 등 지명 큰 스님께서는 저와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월례회 멤머이시기도 하다.
늘 겸손한 자세로 대하시는 모습이 마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모습
나처럼 미혹한 중생에겐 옆에서 뵙기만 해도 환희심이 절로 나는듯 하는데
늘 총무 소임을 맡고있는 나에게 뭣이던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늘 고맙기만 한 큰 스님이시다
민초들의 소원이 가득한 돌탑을 만나고...
돌탑을 지나면서 우측의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저곳으로 오르면 비로봉으로 갈 수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국공파 직원들은 보이질 않고하여 비로봉으로 오르고 싶은 마음에
禁線을 벗어나 비법정 탐방로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향하는 등로는 뚜렸하다
그런데 조금을 더 가니 집채만한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예전에 있었던 로프는
몽땅 다 절단되어 있고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비로봉 오르는 걸 포기한다
천왕석문(天王石門:15:00)
천왕석문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갈 수 없는게 마치 요즘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태를 꾸짖는 것 같다... 오만과 탐욕을 다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가라고...
배석대 갈림길(15:02)
천왕석문을 지나자마자 상고암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608년에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석대 갈림길을 올라서서 편한 등로를 따라서 문장대로 향한다
등로 주위에는 산수국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문장대 구간은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두껍등
지나온 천왕봉과 비로봉의 모습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 안에서 좌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췄고 이에 율사께서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햋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율사께서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에 그곳을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께서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진표율사께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모든것을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도룡룡바위라고 설명판을 붙혀놨는데 지난해 대간 남진길에는 없었는데...
이정표(15:10)
고릴라 바위(15:15)
멋지게 펼쳐지는 속리산의 암릉을 옛 선인들은 속리산을 말하기를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여 소금강산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이라 하여 그 仙景을 조선8경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고릴라 바위를 지나면서 급경사인데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데크목 계단에서 바라본 속리산 능선(상주 화북면쪽의 산그리메)
2주전 지리능선에서 만난 산오이풀이 여기서도 만난다
사람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암릉 사이를 지나가니...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르막을 오르니 좌측에 입석대가 보이나 이곳도 우회해야 한다
입석대(立石臺:970m:15:25)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임경업 장군이 7년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조선조 인조(16대임금)때 임경업 장군이 6년동안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정도 단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수가 없다.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의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장군은 정신을 차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주 보이는 석벽위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의 비석처럼 세워 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들린다
장군은 경업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세우려 했으나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장군은 그의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수련하여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해서 입석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입석대 아래 이정표
뒤돌아 본 입석대의 모습
계속되는 수석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속리산 암릉구간
경업대(慶業臺) 갈림길(15:38)
입석대에서 산죽길로 조금을 더 내려오니 좌측으로 경업대와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경업대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400m정도 내려가야 하며 속리산 8臺중의 하나인 경업대의
지명의 유래는 임 경업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했는 곳이라 한다
능선에 올라 줌으로 당겨본 경업대의 모습
이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준비하건만 독립군이 아닌 연합군의 일원이다보니 그리 조급하진 않다
신선대 정상에 있는 매점이 보인다
이곳에 도착하니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대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거의 없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이곳에서 당귀막걸리 1통을 시켜서 마시는데 동료산꾼들은
아무도 이 좋은 술을 입에도 대질 않아 혼자서 거의 다 먹다시피 하는데 천왕봉에서부터
우리 일행과 같이 걸어온 청주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가 막걸리 한 잔을 거들어 준다
역시 술은 친구가 있어야 술맛이 나는 법이여
그런데 등산조아 회장님과 여성 산꾼들이 이 친구를 얼마나 꼬셨는지 자기가 날머리인
화북분소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었는데 우리를 우리 차가 있는 장고개까지 태워 주겠단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리와 같이 문장대 아래까지 같이 가는게 아니라 이곳에서
성불사 방향으로 간다는데 좀 불안하여 나와 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헤어진다
신선대(神仙臺:1,026m:15:40)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막이 있다.
옛날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서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며 춤을추고 있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을 달려갈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고있는 봉우리를 신선대(神仙臺)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대 정상의 모습
당귀 막걸리를 거의 다 먹다시피 하고는 다시 신선대에서 청법대로 향한다
조금전 지나온 능선의 모습
천왕봉은 자꾸만 멀어지고 비로봉과 임석대의 모습이 아련하게 보인다
능선 위로 청법대가 보이건만 이곳 역시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며 통과한다
청법대(聽法臺)는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座臺)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을 외우는 소리에 제 정신을 차렸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오를수가
없으며 샛길로 돌아 우뚝 선 바위로 오를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냥 통과한다
문수봉(文殊峰:1,037m:16:15)
속리산 8봉중의 하나인 문수봉은 예전엔 사자봉으로 불렸으며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녔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우리나라 명산대찰의 지명중에 불교를 상징하는 지명이 많은데 이곳
속리산은 예외가 아니다... 비로봉, 천왕봉, 문수봉, 내일 가야할 관음봉 등...
문장대가 바라보이는 광장으로 내려선다
오늘은 문장대를 오르지 않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까지 간다
문장대 탐방안내소(16:25)화북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지좋다
등로에서 바라본 칠형제바위
비박하기 딱 좋은 장소다... 그러면 벌금이 30만원
등로 사이로 난 암릉구간을 지나 화북분소 1km 전쯤 지점에 일행보다 먼저 도착하여
흐르는 계곡물에 웃통을 벗고 물을 좀 뒤집어 쓰고나니 더위는 좀 가시는 기분이다
반야교(17:30)오송교(17:35)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주차장(17:38)
10시간 가량의 긴 산행을 끝내고 화북분소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하는데 신선대에서 헤어진 청주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눈물나게 고맙드만
그런데 더 미안한 것은 최근에 뽑은듯한 K7 승용차가 얼마나 깔끔한지 파리가
낙상할 지경인 이 차에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를 장고개까지 태워주니 말이다
젊은이 그날 너무 고마웠소... 世世生生 복받을기요
장고개(18:05)
고마운 젊은 친구덕에 택시비도 벌고 편하게 왔는데 ‘준마’라는 여성 산꾼이 가져온
산삼주를 따라주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또다시 명당 자리인 우리의 숙소(?)로 향한다
서원리 정부인 소나무
오늘길에 도로옆에 있는 정부인 소나무가 있는 곳도 들린다
범여의 텐트
또다시 충북 알프스의 들머리에 있는 데크목 광장에 도착하여 텐트를 쳐놓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나니 정말 살것만 같은데 그 사이에 여성산꾼 2분이
식사 준비를 했는데 얼마나 깔끔하게 잘 해주시는 바람에 정말 맛있게 먹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인들이여!... 암튼 너무 고맙습니다
난 어젯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먼저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