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올해 첫눈을 맞으며 설악산을 걷다

범여(梵如) 2015. 10. 13. 04:32

☞ 산행일시: 2015년 10월 9일~10일(1박2일)

산행날씨:첫날 맑음...둘째날 진눈깨비에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첫날11 km...둘째날 약 15km / 13시간30분 소요

☞ 참석인원: 인연있는 山友 8명과 함께

☞ 산행코스: 백담사 주차장--백담사 탐방 안내소-영시암-수렴동 대피소-쌍용폭포-봉정골-사자바위-봉정암-석가 사리탑

                 소청대피소(1박)-소청봉-중청 대피소(왕복)-대청봉-소청봉-희운각-무너미고개무명폭포-천당폭포-오련폭포

                 양폭산장-귀면암-문수담-비선대-와선대-군량장 터-신흥교-신흥사 통일대불-일주문-설악소공원-버스주차장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북면 / 속초시 설악동 / 영양군 서면

 

지난해 백두대간을 같이한 동료산꾼들과 여름에 지리산 남부 능선을 걸으면서 10월에

설악산 비박을 하자고 한 약속 때문에 나홀로 걷고있는 십승지 구간을 한 주동안 접고

설악산 길을 나서는데... 정말 몇년만의 설악산 비박인가... 요즘은 국립공원에서 노숙자(?) 생활을

할 수 없기에 산장 예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 나처럼 독수리 타법으로 인터넷을 하는 노땅(?)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약을 할 수 없기에 우리 멤버중에 젊은 친구들이 있어서 산장 예약이 가능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서 동서울터미널에 도착... 반가운 얼굴들과 조우하여 06시 40분에

백담사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이번에 걸어야 할 등로

설악산 지도

동서울발 → 백담사 입구행 버스표

06시 40분에 출발하는 버스는 홍천, 인제 원통을 지나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에 도착한다

용대리 버스 정류장

용대리에서 백담사롤 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세차다

젊은 아그들은 다들 도망(?) 가버리고 나와 연식이 같은 해미님만 뒤쳐진다

가는길에 둘이서 사과를 사서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용대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백담사와 봉정암으로 향하는 불자들과 등산객들로 인산인해이다

독립군(나홀로 산꾼)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기가 막힌다... 이런곳은 딱 질색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백담사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우리 후배인(초등학교 한참 후배) 이 호섭군이 작사한 추억의 백담사 노래비도 보인다

잠시후 용대리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 용대리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마을 버스로

7km를 곡예하듯 계곡을 끼고 달린 후에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한다

 

백담사로 통하는 修心橋 너머 백담사 금강문의 모습

백담사 일주문

백담사 옛 일주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로로

서기 647년 신라 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 한 후 운흥사 심관사

선구사 영취사를 거쳐 1783년(정조7년) 백담사라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담사 명칭의 유래는 대청봉으로부터 작은소 100개를 지나서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백담사는 깊은 오지에 계곡을 흘러가는 맑은 물에 객진번뇌를 털어내고 설악영봉에 구름 벗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이었고 만해 한용운(1879~1944) 백담사에 입산수도 하였으며

조선조뷸교유신론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도 발표 하였으며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재 백담사에는 법당 법화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 6개 기존 건물 외에 만해기념관 교육관 연구관

수련관 등 16개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백담사는 25개의 크고작은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각보다 그리크지 않아

보는데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아 들어가 경내를 구경하고 싶지만 불교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은지 다들 벌써 등로로 접어드는 바람에 아쉬운 맘을 접고 동료 산꾼뒤로 향한다

 

  기사 관련 사진
  ▲ 만해기념관

 백담사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전각이 많다.

대표적인 건물로 만해기념관을 비롯하여, 만해교육관, 만해연구관, 만해수련원, 만해도서관 등이 있다.

충남 홍성태생인 만해선사는 한국 불교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총독부의 방침에 과감히 맞선 민족의

지도자이며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를 33인을 대표하여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만해선사는 백담사에서 승려가 돼 구도자의 길을 걸었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불제자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고 지배했을 때, 굳은 지조와 대쪽 같은 기개는 민족정기를 만방에 떨치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며 그 역할을 다했다.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민초들의 가슴을 울렸다.

1910년에는 이 절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해서 불교 개혁을 주창했다.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였던 선사께서는 '한국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만해선사는 1917년 12월 오세암에서 참선 중 진리를 깨우쳤다. 그리고 '오도송'을 읊었다.

오도송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말한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세계 뒤흔드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오마이 뉴스 기사인용

춘성대선사 부도

백담사 수심교로  들어가기 전 좌측에는 만해선사의 유일한 제자였으며 거침없는

행동과 무소유로 일관하며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신 춘성대선사 부도탑이 보인다

백담사 안내판 입구에서 동료산꾼들과 기념산행을 끝낸 후 산행을 시작한다

백담사 입구 이정표(11:25)

백담사탑방로 입구에서 좌측 숲속으로 들어가 가져온 음식으로 간단하게 허기를 면한 후 산행을 시작한다 

설악산국립공원 백담탐방안내소(11:35)

호젓한 숲길을 따라서 영시암으로 향한다

백담사 앞 수렴동계곡에는 작은 돌탑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백담사나 설악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작은 소원을 담아 쌓은 돌탑으로 큰물에

휩쓸려 허물어지면 다시 쌓고 또 쌓아 수렴동계곡을 꽉 메우고 있다

만해(卍海)선사께서도 저 돌탑의 바라보면서 이 싯귀가 떠오른 건 아닌지...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소청으로 향하는 동료산꾼들

영시암으로 향하는 길옆의 계곡... 만산홍엽 아래에 젊은 스님 한분이 사색에 잠겨있다.

속세에 대한 그리움일까...아님 미련일까... 스님 모든걸 버리셔요

백담사에서 영시암으로 향하는 수렴동 계곡길은 등로라기보다는 둘레길같은 편안 길이다

88L 베낭을 메고 시속 4.2km의 걸음으로 영시암 공양간으로 향한다

 

수렴동계곡은 금강산의 수렴동계곡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금강산의 수렴동은 설악산의 수렴동보다 한 수 아래인 모양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금강의 수렴동이 오두막집의

들창에 친 발이라면, 설악의 수렴동은 경회루의 넓은 한쪽 면을

뒤덮고 있는 큰 발이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영시암가는 다리에서 기념사진 한장을 남기고...

영시암 해후소

5년만에 찾은 영시암은 그동안 많은 불사로 인해 이젠 가람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화장실은 아직도 1960년대의 촌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시암(永矢庵:12:50)

영시암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화살 시(矢)로 '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뜻으로 영원토록 널리 베푸는 암자라는 뜻이다.

 

조선조 숙종 15년(1689) 장희빈 사건 때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재집권하는 등

혼란한 시기에 영의정 김수황이 사화에 휩쓸려 숙청당하고 사사되자

아들 김창흡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하며 살겠다고 창건한 암자이다.

영시암 법당 앞에 적혀 있는 영시암이란 현판은 여초 거사 김응현의 글씨라고 한다.

영시암 입구로 들어서자마 해우소에서 풍겨오는 인분(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에 더욱 더 심한 느낌이고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전각사이로

무우와 배추를 심은 절마당의 텃밭이 정겹기만 하다.

범종루와 약수물이 흘러 나오는 곳에 지나가는 중생을 배려한 물바가지가 많이 있고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나무 벤치가 여러개 놓여 있는데 설악산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과 봉정암으로 오르는 불자들이 너무 많은 탓인지 마치 돗대기 시장을

방불케하고 법당의 툇마루는 마치 관악산의 연주암을 연상케 한다

 

이곳에 서서 영시암 대웅전을 향해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공양간으로

가서 국수 한그릇 얻어 먹으려고 백담사에서 달려오듯 이곳까지 왔건만

아쉽게도 국수가 동이 나버려 부지런히 온 보람도 없이 허무하다

하긴 人生事가 다 그런데 어찌하랴...

국수를 얻어 먹지도 못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렴동 대피소로 부지런히 걸어간다

영시암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이곳 영시암 골짜기는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하던 터가 있다는 영시암 골짜기로 5분 정도의

급경사로 오르니 오세암과 마등령... 봉정암으로 갈라지는 등로가 나온다

오세암 갈림길(13:00)

영시암에서부터 설악산으로 오르는 길은 오름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설악산으로 오르는 가장 편한 길인 마등령구간이고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수렴동 계곡을 지나서 소청대피소로 향한다

 

오세암(五歲庵)에 관한 전설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내설악 백담사에서 10km 쯤 떨어진 해발 1,200m고지에

오세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옛날 매월대사가  두 살 된 자기 조카를 동자로 데리고 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암자를 짓고 매월암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해 늦은 겨울, 대사는 암자의 식량이 떨어지자 당시 4살 된 동자에게 식량을

 구하러 양양 큰 절에 가서 3일 간 있다가 올터이니 기다리라 하고 떠났다. 대사는 3일분 식량만 남겨

 놓은 채 길을 떠났으나 양양에서 식량을 구해 가지고 돌아올 무렵 공교롭게도 큰 눈이 내려 다섯 자나

넘게 쌓였고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눈이 녹지 않아 비통 속에서 해를 넘기고 이듬해 3월에야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사가 암자 못미쳐 망원대에 올라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암자에서 목탁소리가 들려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급히 달려가 보니 동자가 불상 앞에 앉아 목탁을 치고 있는데, 몸은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나

가느다란 목소리로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는 지난 겨을 식량을 구하러

절을 떠나기 전에 동자에게 너의 어머니는 관세음보살이니라 하고 일러 주었었다.
대사는 다섯 살 된 동자가 견성득도한 것을 보고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오세암 갈림길에 서 있는 탐방로 안내표시판

수렴동계곡에는 한참 아래까지 벌써 단풍이 내려와 있다

수렴동 계곡

수렴동계곡은 수렴동대피소 앞에서 구곡담계곡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구곡담계곡은 계곡의 굽이굽이에 담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시암에서 구곡담계곡을 따라 1.2㎞를 더 오르면 깊은 산속에 위치한 수렴동대피소가 있다

수렴동대피소(水簾洞待避所:13:15)

수렴동 대피소에 들어가 바람을 피하며 이곳에서 밥과 라면을 먹으면서

소주 한잔으로 허기를 달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바라본  가야동 계곡과 망경대의 모습

수렴동 대피소를 배경으로...

고도를 높힐수록... 단풍은 불타 오른다

막내인 주원아빠는 베낭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커보인다... 내 눈에 보면볼수록 기특하기만 친구다

방원폭포(14:15)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처음 만나는 폭포이다

폭포를 지나면서 좌측 능선위로 용아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용아장성(龍牙長城) 모습

흔히들 설악산을 5개의 능선을 구분하는데 설악산만 전문을 타는 산꾼들에겐

설악 5대 능선을 종주하지 않으면 설악을 논하지 말라고 했는데 설악 5대능선이란

용아장성, 화채능선, 가리능선, 공룡능선, 화채능선을 말하는데 이중에서도 공룡능선과

서북능선은  산행이 가능한 코스이지만 용아장성과 가리, 화채능선은 비법정 탐방로이다

구름다리를 따라 계곡을 건너고...

이정표(15:00)

선두로 도망가듯 가버린 동료산꾼들을 오랫만에 만나 휴식을 취한다

사람이란 濕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가끔 지인들과 가까운 산에가면 나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오는데

다른게 아니라 맥산행을 하는 산꾼들은 목적산행을 하다보니 일단 산에 들어오면

눈이 뒤집혀(?) 그날 정해놓은 목적지까지 죽기살기로 가는 버릇이 있다.

오늘 동료들도 나와 같은 성향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오늘은 설악산의 비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걷는 힐링 산행임에도 불구하고

맥 산행하듯이 가바리는 동료들 때문에 맨날 꼴찌는 사진찍고 기록하는 진주댁하고

나만 맨 꼴찌라...

구곡담 계곡은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변해가고 있고...

용아장성(龍牙長城)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있는 설악산의 5대 능선중에 하나로 2013년 3월 11일

대한민국 자연명승 제102호로 지정되었으며 용(龍)의 이빨(牙)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내설악을 가르며 대청봉으로 솟아오른 모습이 장성(長城)같다하여

용아장성(龍牙長城)으로 불리는 암릉구간으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 용의

송곳니처럼 솟아 있으며 소청봉에서 시작되어 구곡담계곡과 가야동 계곡을 가르며

수렴동대피소까지 암릉구간으로 설악산의 등로중에 가장 험한 코스로 자일과 클링,

카라비너 등 암벽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엄격하게 통제되는 구간이고, 비법정 탐방로이지만

산꾼들이 몰래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봉정암 석가사리탑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가야곡 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이 있고

서쪽으로는 수렴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을 끼고 서북 주릉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진다

봉정암가는 길이라 등로는 아주 좋은 편이다

계속되는 폭포가 산꾼의 눈을 호강하게 하지만 봉정암으로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번잡하여 어색하기만 하다

철난간을 지나니 쌍룡폭포가 나오지만 가뭄탓에 물이없어 별로다

쌍룡폭포(15:15)

봉정암 오르기 약 2km전에 Y자 모양의 2개의 폭포가 만나는 곳이 나오는데 쌍룡폭포란다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좌측 폭포는 22m이고 우측 폭포는 46m로

구곡담계곡을 대표하는 폭포라고 하며 전망대도 설치가 되어 있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능선... 베낭은 무겁고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다

下心하라네요

용아장성의 모습

봉정암으로 오르는 봉정골은 코가 땅에 닿을정도이다

봉정골 입구(15:50)

사자바위 입구(16:03)

사자바위(16:05)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구곡담 계곡과 우측의 용아장성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용아장성

사자바위 정상은 서 있기조차 힘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연식의 진주댁은 뭘그리 열심히 카메라 앵글에 담는지...

다시 사자바위로 내려서서 봉정암으로 향한다

봉정암 입구(16:15)

구곡담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당히 차갑다

사자바위를 지나 봉정암 초입에 들어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적멸보궁이 아닌 윤장대 방향으로 올라서서 석가사리탑이라 불리는

불뇌사리탑 방향으로 향하는데 5년만에 찾아온 봉정암은 지금 한창 불사중이다

봉정암 산령각(山靈閣)

봉정암이 이번이 3번째이지만 올때마다 올삐미처럼 밤에 왔다가 가는 바람에

봉정암의 진면모를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성지순례가 아닌 산행을 하면서

제대로 보는 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기도발이 잘 받드라도 봉정암처럼

번잡한 절은 잘 안가는 편이다... 절이란 조용하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란 생각 때문에...

處處佛像이요 事事佛供이라 하지 않았던가

산령각 산신탱화

불교의 사찰과 관계없이 지어진 산신각은 산악숭배(山岳崇拜)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 산신각은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으로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은 보통 호랑이와 함께 있는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위패는 '○○산신위(山神位)' 또는 '○○산령위(山靈位)'라 해서 산의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와 산의 이름은 없이 그냥 산신위 또는 산령위라 적어두는 경우가 있다.

 

산은 한 지역공간의 중심이며, 산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다. 한편 산신각에 모셔지는 산신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해볼 때, 산신신앙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져 있으며 그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三聖閣) 등 일정하지 않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산령각 지나면서 이정표

산령각 지나니 이정표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가면 오세암가는 길이고

직진으로 사리탑이라고 표시해논 석가사리탑 방향으로 향한다

봉정암 오층석탑(16:25)

봉정암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탑은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해서

불뇌보탑(佛腦寶塔) 또는 불뇌사리보탑(佛腦舍利寶塔) 이라 불리는데 입구에는

이정표에다가 석가사리탑이라 표기를 해놨다

 

석탑은 자연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으며 일반의

탑과는 달리 기단부가 없어서 마치 바위를 뚫고 탑이 솟아 오는듯이 보인다

탑의 몸체가 되는  자연암석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모두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님이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맨 윗쪽에는 연꽃이 피는듯한 원뿔형 보주를 올려놓아 영원한 불심을 향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불뇌보탑 앞에서 기도하는 불자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은

불보종찰이라고 하는 양산 통도사와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와 이곳 설악산 봉정암이 있는데 이를 佛家에서는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봉정암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곳에 있는 보궁으로서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중국의 오대산)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뇌사리를 오층석탑에 봉안했다.

그래서 이를 일러 불뇌사리보탑(佛腦舍利寶塔)이라 이른다

적멸보궁은 불자들이 꼭 참배해야할 성지중에 성지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적멸보궁 참배가 곧 부처님 친견과 같은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뇌보탑에서 바라본 봉정암

설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가 봉정암(鳳頂庵)이다

해발  1,244m에 위치한 봉정암은 5월 하순까지도 설화(雪花)를 볼 수 있는 암자로

백담사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내설악에 최고의 절경을 이룬 용아장성 기암괴석군에 속해있다.

 

봉정암은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시창(始創)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후 원효대사와 고려시대 보조(普照)국사가...조선시대에는 환적(幻寂)스님과 설정(雪靜)스님이

쓰러진 암자를 중창했다고 한다

진주댁은 뭘 저리 열심이도 카메라 앵글에 담고 있을꼬?

불뇌보탑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간다

봉정암 윤장대(輪藏臺)

전륜장(轉輪藏) 또는 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하며

윤장대 안에 불경을 넣고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비는 불구(佛具)의

일종으로 윤장대는 글을 알지 못하거니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 팔면으로 되어 있고 각 면에는 불교관련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하며

경전을 보관하는 보관함이라 면 된다

 

경전을 보관하고 읽어야 공덕이지만 까막눈 중생들이 글을 모르니

경전을 보관한 함을 돌려서라도 공덕을 쌓고자 하는 성물로 글을

모르는(지금이야 글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불자들을 위한

배려하는걸로 보면 되는데 우리나라보다 티벳불교에서 주로 많이 보인다 

봉정암 종무소 역할을 하고있는 108법당

적멸보궁 봉정암(鳳頂庵)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에 하나로 신라 선덕여왕 13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3.7일(21일)기도를 올리던 마지막 날, 문수보살이 현신하시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신라)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하였는바,

이를 모시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모실 길지(吉地)를 찾아 이곳 저곳을 순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나타났으니, 자장율사는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몇날, 몇일을 봉황을 쫓아갔다.

 

마침내 봉황은 어느 높은 봉우리를 선회하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어느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자장율사가 그 바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고, 또한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그 바위를 중심으로 일곱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었으니 가히 봉황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을 한 길지중에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한 뒤 5층 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는데

그게 봉정암이었다고 한다

저 여인은 왠 근심이 저리도 많을꼬?

자세히 보니 조금전 봉정골 깔딱고개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그 여인이다.

나중에 종무소 스님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봉정암에 예약도 안하고

무턱대고 찾아와서 숙소를 해결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모양이다

스님도 좀 난감해하는 눈치이다... 이곳은 철기도하는 곳이고 워낙  전국의

불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예약하지 않으면 숙소를 해결할 수 없는 곳이다

내가 옆에서 스님! 불가에서 가는사람 잡지말고, 오는사람 막지 말라 하지 않았소

하면서 숙소를 해결하지 않으면 얼어 죽으란 말이요 하니까... 스님도 그 말은

맞는데 방법이 없다고 한다... 우짤란지 걱정이다

봉바위(부처님바위) 아래 봉정암 적멸보궁 법당

암자 법당인 봉정암 적멸보궁에는 일반 법당과는 달리 불상(佛象)이 없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대신 법당의 바깥쪽이나 뒤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하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사리(舍利)는 梵語로 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원래는 신체라는 뜻이었으나

불교에서 부처님의 신골(身骨)을 뜻하는 말로 써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후대에 스님의

화장골도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넓은 의미로 통칭되어 왔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탑에 봉안하고, 승사리는 부도에 납치(納置)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궁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한 인도의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비롯됐다.

그 후 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게 됐고, 그러므로 보궁에는 불상을 설치하지 않는게 관례이다

오늘도 예약이 꽉 찾는데 경상도 불자들 아니면 봉정암 스님들 밥굶겠다 

봉정암 뒤로 이어지는 용아장성의 모습

봉정암 이곳저곳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소청대피소로 향한다

소청대피소 가는 길에 만난 소나무와 바위

상생인지?... 왠수인지?

뒤돌아 본 용아장성의 모습

봉정암에서 죽을 힘을 다해 소청 대피소에 도착하니 베낭을 다는 저울이 있다.

무게를 달아보니 18kg이네... 지난 지리산때보다는 훨 가벼웠지만 수렴동 대피소에서

비운걸 생각하니 오늘도 한 20kg정도 등짐을 지고 온듯 싶다

소청대피소(17:20)

백두대간 북진길에 이곳에서 하룻밤 잤으니 6년만에 소청대피소에서 비박을 한다

먼저 도착한 젊은 친구들이 고기에다 술상을 봐놨고 기다린다

언제나 미안한 생각이고 늘 고마운 친구들... 너무 고마우이... 복받을기야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용아장성의 모습.. 서서히 일몰을 준히한다

용아장성 너머로 구곡담계곡과 가야동 계곡도 보이고...

일몰(17:50)

백담사에서 소청대피소까지 힘들게 올라온 후 술과 고기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젊은 친구들이 꼰대(?)라고 예우하면서 주는 술을 주는대로 다 받아 마시는

바람에 나중에 숙소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도 안나고... 거기다가 옆 좌석에

부산에서 왔다는 50대 중반의 2쌍의 부부가 형님,형님 하면서 주는 술도 다 먹었다

이제 너무 노티가 나니... 머리 염색하게 조금은 조신하게 살아야겠구먼

소청대피소 숙소

6년전에는 개인이 운영했는데 지금은 국공파들이 운영하는 바람에

상당히 깨끗하고 난방을 따뜻하게 넣어주는 바람에 편하게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 4시경... 밖을 나가니 아직은 어둠속인데 짙은

안개에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5시에 취사장에서 아침밥을 해먹고 거기다가 반주로 소주 반병을 먹었더니만

속이 찌리하다...산행을 준비하고 소청대피소를 나선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일기가 상당히 불순하다

그렇다고 산행이 안 할수는 없는 법... 산꾼이 일기를 탓하며 산행을 포기하면 산꾼이 아니제

 

07시 현재 소청대피소 수은주는 영상 4도이다

대청봉을 포기한 3명의 산꾼은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6명의 동료산꾼과 대청봉으로 향한다

소청대피소 이정표(07:05)

소청봉가는 길

소청봉(小靑峰:1550m:07:20)

소청봉에서 중청대피소 가는길은 걷기조차 힘이들 정도로 바람이 드세다

중청대피소에서 우리와 반대로 걷는 산꾼들도 우리와 매한가지이다

잠시 후 중청봉 옆사면길부터는 내리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면서

올해 첫 눈을 설악산에서 맞이하는데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 버리지만

초속 11m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엄청난 추위가 엄습해온다

얼른 메인 카메라를 베낭에 넣고 방수가 되는 똑딱이 카메라로 셧터를

누르지만 손끝이 빠져나갈 정도이다 ...추워도 너무 춥다

한계령 갈림길(07:40)

중청대피소(07:40)

이곳은 진눈깨비와 바람을 피해 찾아든 산꾼들도 발디딜 틈이없다

여기서 가져온 구스다운 자켓을 켜입고 그 위에 레인코트를 입은 다음에

대청봉을 향하지만 똑바로 걷지 못할정도의 세찬 바람때문에 너무 힘이든다

중청대피소 헬기장

진눈깨비와 세찬바람을 뚫고 대청봉으로 향한다

세찬바람에 너무 힘드는데 눈이 그치면서 갑자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중청봉이 언제 그랬냐 싶을정도로 구름이 걷히면서 정말 멎진 장관을 연출한다

말 그대로 각본없는 드라마처럼... 이 맛에 중독되어 산에 오르는 건 아닌지...

눈이 살짝 보이나 쌓일정도는 아니며 기온 때문에 금새 녹아 버리지만 세찬 바람에 추위는 장난이 아니다 

대청봉 정상 삼각점(△설악 11 / 1987 재설)

대청봉(大靑峰:1,708m:08:10)

강원도 인제군 북면, 양양군 서면, 속초시 설악동에 걸쳐있는 설악산의 주봉으로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3번째 높은 봉우리로서

옛 지명은 청봉(靑峰), 봉정(鳳頂)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청봉은 창산(昌山)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중청봉과 소청봉이 있는데 중청봉은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접근할 수 없는 봉우리이고, 소청봉은 그저 밋밋한 봉우리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외설악 쪽만을 설악이라 했고, 내설악 쪽은 따로 한계산(寒溪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서는 설악을 영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으니, 신라 때부터

설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아장성, 화채능선, 서북능선 등  주요 능선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내설악, 외설악을 가르며

천불동계곡, 가야동계곡,  주전골, 구곡담계곡 등 설악산의 대부분 계곡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대청봉 정상은 일출과 낙조로 유명하며 기상변화가 심하고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 때문에

눈잣나무들이 융단처럼 낮게 자라 설악산 전체와 동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대청봉에 오르니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발디딜 틈이 없을정도로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정상석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나 역시 그 무리에 끼어 한 컷을 남기는데 찍어주는 이가 사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룡능선과 울산바위 너머로 속초앞 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대청봉 정상에서 바라본 화채능선(華彩綾線)의 모습

‘화채(華彩)’, 꽃처럼 고운 빛깔을 수놓은 능선을 일컬는 단어로

화채능선은 설악산의 VIP석이라고 하며, 자연휴식년제로 오랫동안

등산코스를 개방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화채릉은 일명, 동북(東北)능선이라고도 하며, 대청봉에서 동북쪽으로 화채봉(華彩峰, 1,320m)),

칠성봉(七星峰, 1,077m), 집선봉(集仙峰, 920m)을 지나 권금성(權金城)까지 8km에 이르는,

세찬 기세로 뻗어가고 있는 줄기다

 

설악산(雪岳山) 가는 길에 개골산(皆骨山) 중을 만나
중더러 묻는 말이 풍악(楓岳)이 어떻드니
이 사이 연하여 서리치니 때 맞았았다 하더라.

 

이 시의 지은 이는 설악산과 금강산을 자유롭게 오가던 조선 영조 무렵을

살다간 문신 조명리(趙明履)의 시조다...육당 최남선은 금강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였다.

시인이며 산악인인 김장호 님은 그의 저서 '한국명산기'에서

금강산 못지 않은 설악의 아름다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악산은 우선 그 높이가 더하다. 금강산 비로봉이 1,636m인데 설악산은 1,708m이니 702m나 더 높다.

게다가 금강산은 1만 2천 봉이라 하지만, 설악산은 7천 봉이다.

금강산 봉들이 아기자기 하다면 설악산 봉은 시원스럽다.

금강산이 만물상이며 구룡연의 계곡미를 들지만, 설악산의 천불동, 가야동, 구곡담,

탄수동이 거기 못지 않고, 더구나 서북주능이며 화채능선의 우람한 맛 특히 공룡능선,

용아장성의 걸출한 암능이 풍겨주는 역동감은 금강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설악산(1707.9m)은 남한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4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제2의 금강이라 불리는 산이다.

 

설악(雪岳)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다음과 같이 전하여 온다.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하지(夏至)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눈덮여 있는 산이라 하여 '설악'이라 부른다.
(仲秋如雪至夏至而消故名- 동국여지승람)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짓게 되었다.

 (峰巒聳列石色皆雪故名-증보문헌비고)

 

설악산은 북한에 속해 있다가 6.25 이후 우리 대한의 품에 안긴 산이다.
그 실지 회복을 위해서 수 많은 우리들의 젊은 호국 영령들의 희생이 있던 산이다.
한반도 등줄기인 백두대간에 위치한 이 명산 설악산은 우리 나라 다섯 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자연자원의 분포지역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65년 11월에 천연기념물 제171호인 '천연보호구역'과 1982년에는 유네스코가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한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인 산이기도 하다

대청봉 바로 아래에 내려서니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공룡능선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서둘러 대청봉을 내려선다

중청가는 길은 초속 11m로 불어대는 세찬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너무 힘이든다

대청봉에서 내려가는 길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다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악천고투하며 대청봉을 내려가는 등산객들...

대청봉 눈잣나무

눈잣나무는 ‘누운 잣나무’를 줄인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대청봉 일대가 유일한 자생지라고 한다

중청대피소 앞 안내판에는 눈이 보인다 

다시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중청대피소(08:30)

중청봉 아래는 지금 완연한 겨울이다... 단풍은 전혀 볼 수 없는 벌거숭이 산이 돼버렸다

조금전에 걸었던 한계령가는 갈림길에서 다시 소청봉으로 향한다

10월 초에 눈을 보셨나요?

소청봉가는 길의 강한 바람도 정말 장난이 아니다

서북능선에서 불어오는 강풍으로 인해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용아장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공룡능선 너머로 백두대간 산꾼들에겐 동경의 대상인 황철봉도 아련히 보이고...

용아장성 아래로 봉정암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소청봉 가는길에 천불동을 배경으로...

구곡담계곡과 가야동 계곡의 모습

다시 소청봉(08:50)

진눈깨비도 그치고 햇볕이 나면서 추위는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대청봉 오르면서 뿔뿔히 헤어진 동료산꾼들과 조우한 다음에 희운각으로 향한다

희운각 가는 길에서 바라본 천불동(千佛洞)계곡의 모습

비선대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7km의 중간에 있는 계곡으로 설악산의

산악미를 한 곳에 집약하고 있는 곳으로서 천불동이란 호칭은 천불폭포에서

딴 것이며, 계곡 일대에서 펼쳐지는 천봉만암과 청수옥담의 세계가 마치  

‘千佛’의 기이한 경관을 구현한 것 같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울산바위와 속초앞바다도 아련히 보인다

울산바위는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있으며 둘레가

4㎞에 이르는 6개의 거대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부에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5개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울산()이라는 명칭은 기이한 봉우리가 울타리[]를

설치한 것과 같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조선지도》 등의 고지도에는 천후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바위가 많은 산에서 바람이 불어나오는 것을 하늘이 울고 있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울산바위에 관한 전설

설악산에 구경 왔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신흥사 승려에게 울산바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는데,어느 해에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 세금을

주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울산 고을의 원님이 이 바위를 재(災)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동자승이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곧 지금의 속초 시가지에 자라고 있는 풀을 새끼로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 맨 후 불에 태워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로 적는 속초(束草)로 불리게 되었다. ---

속초문화원 발간 [속초(束草)의 옛 땅이름]에서 인용

다시 바라본 화채능선

여인의 乳頭처럼 볼록 솟아있는 화채봉(華彩峰, 1,320m) 너머로 칠성봉(七星峰, 1,077m),

집선봉(集仙峰, 920m)을 지나 권금성(權金城)까지 8km에 이르는, 세찬 기세로 뻗어가고 있는 줄기가 참으로 장쾌하게 보인다...

저 화채능선은 산꾼들보다 사진작가들에게더 유명할 정도로 뛰어난 풍경을 자랑하고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상으로는 설악의 산세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산세’를 지녔다고 한다.

대청봉이 닭의 머리이자 부리요, 서북능선이 왼쪽 날개,

화채능선이 오른쪽 날개, 그리고 공룡능선이 닭의 몸통이 되는 셈이다. 용아장성이 시작되는 봉정암은 설악의 심장이자 알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설악의 형상을 보면 화채능선은 닭의 오른쪽 날개이다.

닭의 부리로 쪼아 먹을 수 있는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오른쪽 날개 겨드랑이 밑이 죽음의 계곡이다.

희운각 가는길에 당겨본 범봉의 모습

범봉은 천화대의 암봉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숫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철 계단을지나

천불동 계곡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초입이 시작되며 끝 지점인 공룡능선에서는

비선대 방향으로는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설악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하는 구간이다.

Zoom in한 공룡능선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능선으로서, 생긴

모습이 공룡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하여 공룡릉(恐龍稜)이라 불린다.

공룡릉은 마등령에서부터 희운각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의 능선구간을 가리킨다.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로 공룡능선은 영동·영서를 분기점으로 구름이 자주 끼는 등

기상변화가 시시각각 변하며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설악의 중심 능성이며, 내설악의

가야동계곡, 용아장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외설악의 천불동계곡부터

동해 바다까지 시원하게 펼쳐진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공룡능선은 생긴 모습이 공룡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공원 100경 중 제1경일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며, 신비로운 경관을 보여준다

화채봉과 천불동계곡의 모습

희운각(喜雲閣) 대피소(09:45)

희운 최태문 선생이 1969년 2월 천불동 계곡의 최상류인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 등반훈련 도중 젊은 산악인  10명이 눈사태로 사망한 사건을 게기로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건)  1969년 당시 사재 100만원을 털어서 만들었고

자신의 호인 희운(喜雲)을 따서 대피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도착하니 대청봉을 가지않은 회장님과 이쁜 주원아빠, 그리고

갑자기 닉이 생각나지 않은 젊은 여인이 먼저 도착하여 오뎅탕을 비롯한 먹거리를

준비해논 바람에 추위에 지친 심신을 녹이면서 배고픔을 해결했는데 단 한가지

술이 없어서 너무 허전했는데 알송 아우가 이리저리 산꾼들에게 약초술을 앵벌이

해온 바람에 참으로 맛나게 먹었다... 아우님 그건 독립군인 내가 전공인데...

보면 볼수록 이쁘고 기특한 주원아빠

희운각에서 1시간 가량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후에 무너미고개로 향한다

무너미고개 가는길에서 동료산꾼들

뒤돌아 본 대청봉... 아직도 짙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잠시후 전망대가 나오는데 우린 그걸 무시하고 무너미 고개로 향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멋진 암봉의 모습

무너미고개(10:45)

천불동(千佛洞)계곡과 가야동(伽倻洞)계곡의 경계에 위치하여 내 ·외설악(內 ·外雪嶽)을

구분지으며, 고개 바로 북쪽에 희운각(喜雲閣)대피소가 있다.

무너미의 무는 물에서, 너미는 넘는다(건넌다)에서 왔음이 틀림없다.

물을 넘는다(건넌다)란 뜻의 무너미를 한자(漢字)로 수유(水蹂), 수월(水越)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지명도 전국에 무수히 많이 분포한다

무너미 고개에서 오늘은 공룡능선이 아닌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선다

무너미 고개에서 천불동으로 향하는 길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지만

올해는 너무 가물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단풍은 그리 이쁘지는 않다

천불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급경사다

계곡에서 바라본 천불동의 모습

닉이 잔다르카라는 여인... 닉부터 터프하다

범봉에서 비선대로 이어지는 천화대 구간의 암릉

무너미 고개를 내려서서 처음 만난 폭포... 이름은 모르겠고 꽤나 운치가 있어 보인다

천당폭포(11:30)

천불동 계곡에 있는 폭포로서 예전에 TV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 중에 강호동이란

친구가 왔다 갔다고해서 유명세를 치른 곳이라 하는데 그 덕분인지 포토존까지 있다

지명의 유래는 속세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가 이곳에 이르면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고 하여  천당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천당폭포를 지나 협곡위로 설치되어 있는 철계단을 따라 10여분정도 걸어 양폭대피소로 향한다

양폭(陽瀑)대피소 이정표

양폭산장이 가까워지면서 아침에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양폭산장 가기 직전에 있는 양폭포((陽瀑布)를 입구에서

카메라를 베낭속 깊숙히 넣고 다시 똑딱이 카메라를 꺼낸다

양폭포(陽瀑布)에서 떨어지는 떨어지는 물줄기가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우측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양폭이고, 좌측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음폭이라고 한다 

양폭산장(11:35)

오랫만에 이 코스를 걷는데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 철계단을 많이 설치해놔서 산행 시간이 훨씬 단축되는 느낌이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에 다시 레인코트를 꺼내입고 걷는데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범여로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카메라 렌즈도 자꾸만 습기가 차고...

얼마나 걸었을까... 오련폭포가 나온다

오련폭포(五連瀑布:11:45)

비선대와 양폭산장 사이의 깍아지른 듯한 계곡사이에 5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이전에는 폭포일대의

암벽이 천불동 계곡의 수문장  같다하여 앞문다지라 불렀다고 한다

올해 강원도의 극심한 가뭄 탓인지 물이 많지 않아 폭포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계곡을 끼고 내려가다가 급경사의 오름길에 오르니 귀면암이 나온다

귀면암(鬼面巖:11:55)

설악산 천불동계곡의 비선대와 양폭포(陽瀑布) 사이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명칭은 바위 생김새가 무시무시한 귀신의 얼굴을 닮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금강산의 귀면암에서 따왔다고 하나 원래의 명칭은 천불동계곡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겉문다지' 또는 '겉문당'이라 불렀다고 하며,

귀면암이라는 명칭은 나중에 붙여졌다고 한다

귀면암을 지나면서 비는 다시 그치기 시작한다

설악동을 향하는 등산객들이 계곡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비가 그치자 완연한 秋色을 연출하고 있는 천불동 계곡

문수담(文殊潭:12:10)

귀면암을 지나 조금 내려오니 조금만 沼가 나오는데 문수담이란다

옛날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께서 목욕을 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금강굴(金剛窟)갈림길(12:20)

좌측으로 오르면 동굴법당 형태를 띠고 있는 금강굴이 나오고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금강굴은 자연동굴로 1,300여년전 신라시대에 원효대사(617~666)가 수행처로 삼았던

곳으로 원효대사의 대표적인 저서인 “금강삼매경론”을 따서 금강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금강굴은 길이가 18m의 자연석굴로 지금은 신흥사의 부속 암자로 되어 있다.

 

비선대 미륵봉에 위치한 금강굴은 설악 8기중의 하나인 금강굴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설악 비경으로 공룡능선과 천화대 능선및 화채능선 사이로 계곡이

펼쳐지며, 계곡 양쪽으로 솟은 봉우리들은 각기 모습이 다른 천분의 부처님 형상을

새겨 놓은듯 하여 천불동(千佛洞) 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 이외에도 금강굴이 위치한 미륵봉에서 보면 설악산의 산악미를 한데 모은듯한

 경승지인 토막골, 망경대, 죽음의 계곡, 칠형제봉, 형제폭포, 유선대, 소청, 중청,

대청봉이 한 눈에 보이며, 봉우리 곳곳이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강굴 갈림굴을 지나 비선대를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니 좌측으로 비선대가 보이고

상가들이 나오는데 비는 주적주적 내리고 막걸리에 빈대떡 꿉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6년전 백두대간 북진길에서 마등령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빈대떡에 막걸리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에 비는 주적주적 청승맞게... 이때는 정말 막걸리에

빈대떡이 제격인데 동료산꾼들은 보이지 않으니 입맛만 다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계곡에서 바라본 비선대(飛仙臺 )의 모습

좌측이 금강굴이 있는 미륵봉(일명:장군봉), 가운데가 형제봉, 우측이 선녀봉인데

외설악 지구의 천불동계곡 들머리에 있는 커다란 암반(巖盤)으로 마고선(麻姑仙)

이라는 신선이 이곳에 와서 놀다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선대는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오던 곳이라 沼 주변의 암반에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늘은 비를 맞으며 내려가고 싶은 맘이 없어 그냥 패~~~스

뒤돌아 본 천불동 계곡의 모습

비선대를 지나면서부터 이곳은 마치 둘레길같은 등로가 소공원까지 이어지고

잠시 후 비를 주적주적 맞으면서 내려오니 잔다르크라는 여인을 만난다.

난 다들 나보다 한참 먼저간 줄 알고 0알에 요령소리 나도록 빠르게 내려왔는데

아무도 내려가지 않았단다...이게 뭐람... 그럴줄 알았으면 막걸리에 빈대떡...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와선대(臥仙臺:12:57)

옛날 마고선(麻姑仙)이라는 신선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며 아름다운 경치를

너럭바위(넓고 평평한 바위)에 누워서 감상하였다고 하여 와선대라고 불렀단다

숲이 울창하고 기이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히 절경이라  하였는데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너럭버위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군량장  표석(13:05)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군량미를 저장해 두었던 터를 알리는 군량장 표석이 있는 곳을

터프한 여인 잔다르크님과 신흥사 입구까지 걷는데 잠시 후 아리송 아우님한테 전화가

오는데 알고보니 우리보다 조금 뒤에 오는게 아닌가... 비선대 아래의 막걸리가 두고두고 아쉽다 

와선대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본 설악산 북쪽의 모습

이름모를 자유용사의 비(13:20)

신흥교(13:30)

좌측으로 가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이지만 신흥사 참배는

다음으로 미루고 계속되는 비를 맞으며 다리를 지나 일주문 방향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 통일대불 방향으로 가는데 기와불사를 받는 보살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신흥사는 1912년부터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197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종무를 관장,
본사로 승격되어 설악산 외설악의 주찰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의 하나이다.
지난97년 조성된 통일대불을 모신 사찰로 통일을 염원하는 불심을 발현하고 있다

신흥사 통일대불(13:35)

통일대불 안내판

신흥사 일주문을 나오면서 신흥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소공원으로 향한다

설악동 소공원 이정표(13:50)

소공원 노천식당에서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 하려고 하는데 자리도 없고

잠깐 사이에 서 있으니 너무 추워 먹는걸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설악동소공원에서 바라본 권금성(權金城)의 모습

 권금성(權金城)의 유래
아주 오랜 옛날 한 마을에 권씨 성의 장사와 김씨 성의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쳐들어오자 산세가 험한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권금성 자리이다.


적이 오자 방어할 길이 없어 서로 의논하였다. 그래서 두 장사가 그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적병이 오기 전에 성을 쌓아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안에 성을 만들어야 화를 면할 것이오.”

하지만 성을 쌓는 다는 것이 결코 생각 처럼 쉽지 않았다. 의논 끝에 돌을 날라다가 이곳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는 다면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장사가 궁리 끝에 “이렇게 합시다. 돌을 날라서는 성을 쌓을 수 없으니

내가 강에 내려가 돌을 던질 테니 당신은 여기서 받아서 성을 쌓으시오,

그래야만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좋습니다.” 그래서 권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주어서 던졌고 그러면 김장사는 그 위에서 돌을 받아가지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들면 서로 교대로 김장사가 강으로 내려가 돌을 던지고 권장사는 위에서 돌을

받아 성을 쌓았다. 이렇게 권장사와 김장사가 만든 성이라 권금성(權金城)이라고 부른다.

소공원을 지나 버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잠시 후 주차장에

도착하여 줄을 선 다음 30여분을 기다린 끝에 시내버스를 타고 속초 갯배정류장에

내려서 해수사우나에서 깔끔하고 목욕을 하고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향한다

지금 속초시내에는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축제 현장의 모습

사우나를 끝내고 식당으로 향하는 동료산꾼들

속초관광수산시장(16:00)

지난 4월에도 개포동 친목회 회원들과 여행하면서 들린 곳이다

오징어를 파는 억척스런 속초 또순이

전라도 횟집(16:10)

오늘 산행의 리딩을 맡은 하늘마음님의 단골집인 전라도 횟집

이곳에서 속초로 여행온 원일님도 같이 동행하여 깔끔한 회에다가

소맥을 부어라마셔라 했더니만 모든게 기억이 없다

1박2일동인 비박산행을 아무탈없이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가려고

속초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19시 30분발 버스에 오른 다음 모든게 기억이 없다... 일어나니 동서울터미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