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비오는 일욜 도봉산의 滿秋를 즐기며...

범여(梵如) 2015. 11. 9. 10:12

☞ 산행일시: 2015년 11월 08일

산행날씨: 하루종일 주적주적 내리는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10.2 km / 4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망월사역-쌍용산장-엄홍길 생가터-뚜거비바위-망월사-포대능선-헬기장-포대봉-출렁다리-은석봉

                 은석암-약수터-녹야원-광륜사-도봉매표소-주차장

소 재 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 서울 도봉구 도봉동

 어제부터 오랫만에 비가 내린다... 원래는 토요일 4남매가 오대산을 가기로 했는데 비가 온다고 하여

취소를 하고나니 마땅히 갈 데가 없다완전무장을 하고 마지막 한 구간 남은 풍기 십승지를 할까... 아니면

서울에서 가까운 서봉지맥 한 구간을 나설까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십승지는 아직 자료가 덜 정리를 해놨고,

서봉지맥을 하자니 산의 높이는그리 높지는 않지만 거리가 30여km 정도이고 7여년동안 매주 가는 산행이라

이제는 새벽에 눈 감고 다니는 것과 청승맞게 비오는 날의 우중산행은 정말 싫다

 

내일은 오랫만에 인도어 골프연습장에 가서 거리 조절과 샷 감각이나 익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매주 토요일 밤의 濕 때문에 새벽 3시가 되니잠에서 깨어나 도데체 잠을 이룰 수가 없기에 여명이 밝아지는 시간대에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주적주적 내리지만 그렇게 많은 비는 아니라 가까운 곳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커피를 타 먹을

따듯한 물과 감하나를 깍아 베낭에 넣고 아파트 현관문을나서니 딱히 갈 데가 마땅찮아 지하철 7호선 타고 도봉산역으로

가서 다시 1호선을 갈아타고 망월사역으로 향한다

난 도봉산 코스중에 망월사역에서 원도봉 계곡으로 오르는 이 코스를 좋하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곳보다

덜 번잡하여 조금은 호젓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봉산 지도

오늘 산행코스의 개념도

망월사역(09:10)

망월사역에 내리는데 비는 그칠줄 모르고 주적주적 내린다

그 덕분(?)에 등산객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등로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려 식당에 들려 순두부 한 그릇을(4,000원)

시켜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뒤 베낭에서 커피 한봉지를 꺼내서 가져온

따듯한 물에 타 먹은뒤 우산을 쓰고 망월사로 향한다

이제 슬슬 이별을 준비하는구나

10여년전 불알친구 淸眼과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곳... 혼자서 피식 웃으면서 지난다

그 친구 월계동 살때 매주 북한산 아님 도봉산을 다녔는데 그 친구 김포로 이사가는

바람에 나홀로 남아 아직도 독립군으로 매주 이렇게 다니니... 어쩜 그 친구한테 고마워 해야겠제

원도봉산 등로를 전세낸 느낌이다... 등산객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으니...

힘든 民草들 제발 惑世誣民하지 마시길...

비오는 어느 가을 날에  /  제  멍  장

비오는 가을날 가을 비를 흠뻑 맞으며
길을 걸었내  바람에 흗 날리는
낙엽을 벗 삼아  한참을 걸으니

어디쯤인지 마을이 보이내
그 마을은 내가 사랑 하는 그이가 사는
마을 이었내  그님에 집이 보이는

골목길을 지나가다 더 이상은
갈수가 없어  되돌아 오면서
한없이  한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내

그님에 생 각에 젖어 발걸음을 옴기며
흘러내린 눈물을 삼키며
하염없이  길을 걸으며 그님에 생각에

눈물  비가 되어 흘러 내리내
내님은 언제나  만나 볼련가
아쉬움만 남기고

가을 낙엽을 밟으며
눈물 비가 내리는 그 길을
나혼자 터벅 터벅 쓸쓸히 겉고 있내

쌍용산장 갈림길에서 우측의 원효사로 오르는 등로를 버리고

망월사 방향으로 오르는데 어젯밤 내린 비로인해 물이 꽤나 흐른다

산행시작 30분이 지난 다음에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나는데

여인 둘이서 뭘그리 할 얘기가 많은지... 계속해서 조잘거리면 걷는다

엄홍길 생가터(09:55)

天中橋(10:00)

가뭄에 지친 民草들을 위해서는 한 이틀 비가 더 내렸으면 좋으련만...

노랗게 변해가는 가을의 정취

두꺼비 바위(10:00)

安國...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요즘엔 安國스럽지 못하고 심기가 불편해요

좌.우... 보수. 진보 ... 맨날 쌈박질이나 해대니... 民草들은 힘들어요

민초들이 힘들게 벌어 세금 냈더니 맨날 밥그릇 쌈박질이나 하는 여의도의

지체높은 양반들... 제발 쌈박질 그만하소...비싼 세금으로 好衣好食 하면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대가리에 띠두르고 농성이나 하니... 천박스럽기는...

언제쯤이면 저 꼬라지 안보고 살까

관세음보살이라 새겨진 바위 아래엔 약수터가 있고...

“佛” “一切唯心造”란 글씨에 “佛” 과 “一”자를 망치를 훼손 해놨다

뭐가 그리도 못마땅 한지... 저 짓하기도 힘들낀데... 다름을 인정합시다

덕지샘을 지나 망월사 경내로 들어선다

망월사 입구(10:25)

알겠습니다

망월사 무위당의 모습

망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 말사로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8년(639) 해호(海浩) 조사(祖師)가 여왕의 명에 의해 창건하여 서라벌

월성(月城)을 향하여 기원하는 뜻에서 망월사(望月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해호조사를 존경하여 측근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조사께서는 여왕의

청을 정중히 사양하고 홀로 이 산중에 암자를 지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하는데 당시 조사가 머물렀던 동대(東臺)의 옛 산성 이름이

망월성(望月城)이었기 때문에 산성 이름을 따서 망월사((望月寺)라 불렀다

혹은 망월사 대웅전격인 낙가보전의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으로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망월사라 했다고도 한다.

 

 

그후 고려 제11대 문종(文宗) 20년(1066)에 혜거(慧炬) 국사가 재창하고 이에 열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4년(1780) 삼창(三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후 1969년 주지 춘성()이 퇴락한 선실을 철거하고 2층의 석조대웅전을 지었으며,

1972년에는 주지 도관()이 본래 있던 염불당과 낙가암()을 헐고 현대식 건물의

낙가보전을 새로 지었으며 1986년부터는 주지 능엄()이 대웅전을 헐고 선방, 관음전,

영산전,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이 절은 고려조의 혜거(慧炬), 영소(靈沼) 두 국사와 조선의 천종(天峰), 영월(映月)

도암(道庵) 3선사(三禪師)를 배출하였으며, 근대의 도인으로 숭앙받는 만공(滿空),

한암(寒岩), 오성월(吳性月), 춘성(春城)스님이 주석했던 곳이다.

秋色으로 물들어 가는 원도봉 계곡

계총선사 부도를 지나 망월사로 들어서려면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한다

해탈문을 지나 감로천에 물 한바가지 들이마시고 문수굴로 향한다

천봉당 태흘탑과 탑비를 만나는데 설명을 잠시후 하기로 하고...

 

山閑流水遠 (산 한가로워 흐르는 물 멀고)

寺古白雲深 (절 예스러워 흰 구름 깊다)

人去無消息 (사람가고 소식 없지만)

鐘嗚萬古心 (종은 만고의 마음을 울리네)

 

조선말기 영허대사의 禪詩 중에서

문수굴(文殊堀)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에 있으면서 지혜로 중생의 번뇌를 끊어주는

역할을 하며,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들고,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있는

청연화를 쥐고 있고 사자를 타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인도에서 태어나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하는 반야의 도리를

널리 알렸다고 전해지는 보살로, 반야경을 결집 편집한 보살이며, 경전을 손에 쥔 모습으로

묘사되며,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서 보현보살과 함께 삼존불의 일원이다

망월사천봉당태흘탑(望月寺天峰堂泰屹塔)과 탑비

조선시대 승려인 천봉당 태흘(1710∼1793)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태흘은 16세에 출가하여, 배천의 호국사에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정조 17년(1793)년 84세로 열반하였으며,

이후 배천 호국사, 문화 월정사와 함께 이곳 망월사에 사리탑을 세워 그 유골과 사리를 모셔두었다.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 문화재자료 제67호)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단한 모습이다.

그래도 가첨석 형태의 지붕돌은 제법 공력을 들인 모습이다. 조선 정조 21년(1797)에 비를 세워 놓았으며, 비문은 이충익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단아한 필체가 돋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그의 동문과 제자 및 신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높이가 328cm에 이를 정도로 훌쩍하다. 천봉당태흘탑과 탑비탑은 넓은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을 두고,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은 각 모서리마다다섯 개의 구슬무늬를 세로로 두어 장식하였다.

 

길쭉한 탑신의 몸돌은 아래에 작은 잎의 연꽃을 두르고, 윗부분에는 큼직한 잎을 가진 연꽃을 둘러 새겼졌으며, 가운데 부분에는

탑의 이름과 함께 조성연대를 세로로 기록해 두었고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가 꽤 두툼하게 표현되었고, 역시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새긴 둥근 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252cm로 꽤 큰 편이다

청봉당 탑비 뒷쪽 바위에 암각되어 있는 시주자의 명단

通天門

하늘로 통하는 문을 지나 영산전으로 향합니다

하늘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오르니...천중선원을 만나는데 재가자들은 출입금지다

망월사 천중선원

조계종 종립선원으로서 유서깊은 간화선(看話禪) 수행도량으로 명망이 높은 곳이다

간화선은 화두(話頭)와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생각의 작용이나 판단을 단칼에 베어 버린다

이렇게 단박에 핵심의 뿌리로 들어가 깨닫는 것을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라 하고

이러한 돈오의 가치를 최초롤 표방한 선이 달마조사로부터  시작되는 조사선(祖師禪)이라

하는데  간화선은 이 조사선의 정신을그대로 잇고 있으며그것을 가장 잘 발달시킨 수행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간화선을 참선, 좌선, 선이라 부른다 

 

망월사는 3.1독립운동 33인중 한 분이셨던 용성선사(龍城禪師)께서 1925년에 30년

활구참선정혜결사(活句參禪慧結社)를 시작한 그 이후 만공(萬空), 한암(漢岩),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스님 등 근대불교의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제접하여 후학들에게 선(禪)을 지도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 명맥을 잇기위해 1993년 능엄스님이 옛 대웅전 자라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자지붕 건물을 짓고 천중선원(天中禪院)이라 했으며, 이곳은 안거와 해제에 관계없이

깨달은을 찾는 운수납자들이 항상 머무는 곳이다

망월사 영산전(靈山殿)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도(靈山會圖)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영축산정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聖地)를 영산전을

통하여 현현시킨 것이며, 이곳에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羯羅菩薩)과 미륵보살을 협시(脇侍)로 봉안한다.

불상의 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여 영축산에서의 『법화경』

설법상을 묘사하고 있고, 그 주위에는 8폭의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다.

 

팔상탱화는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린 것으로, 불교도들이 그의 생애를

여덟 가지 사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습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팔상을 설명하는 학설에는 이론이 없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영산전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팔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① 도솔천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모습[兜率來儀相],

② 룸비니공원에서 부처님이 탄생하는 모습[毘藍降生相],

③ 동서남북의 4문을 둘러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모습[四門遊觀相],

④ 성문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瑜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고행하는 모습[雪山苦行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항복을 받는 모습[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雙林涅槃相] 등이다.

 

이와 같이 팔상의 탱화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영산전을 팔상전(捌相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사찰 중 규모가 큰 절에는 거의가 이 전각을 두고 있으며, 특

천태종사상(天台宗思想)을 계승한 사찰에서는 영산전을 본전으로 삼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56대)의 왕자였던 마의태자가 신라가 망한 뒤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을만큼 신라의 왕실과 관련이 깊으며 의정부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상좌였던 춘성스님께서 주지로 지내는 등

주로 선승들이 많이 찾는 선불교의 참선도량으로서 유명한 곳이다

여러차례의 戰火로 인하여 가람이 소실되어 대부분 전각은 새로 지은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혜거국사 부도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망월사 혜거국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망월사 영산전에서 남서쪽100m 정도 언덕을 넘어가면 혜거국사 부도가 있다.

부도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해 두는 돌탑을 말하는데, 대개 절 근처에 세운다.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며 탑모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단부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고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조성되고 높이가 80cm이며 그리고 그 위에 괴임대를 놓았다.

 

탑 몸통은 공 모양으로 조성되고, 괴임대 위쪽과 옥개석 아래쪽에 홈을 파서 탑 전체의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석은 복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귀꽃은 모두 8개이고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부도의 주인공인 혜거국사는 속성이 노씨이며, 자가 홍소로서 고려시대 국사를 지냈다.

그러나 행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도의 앞에 배례석으로 놓인 돌의 한 면에 혜거탑(慧炬塔)이라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인 조형감각인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영산전으로 되돌아 와서 통천문을 지나 무위당으로 향한다

영산전 앞에서 바라본 수락산의 모습

무위당(無爲堂)

무위당(無爲堂)이란 인연에 의해 작위(作爲)되는 것이 아닌 생멸변화를

여읜 상주절대(常住絶對)의 무위법(無爲法)을 실현한 집이란 뜻이다

망월사에서는 무위당을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하며  정면과 측면 좌우

벽면에는 수많은 여래의 모습과 열반상, 문수도자상 등 수많은 사찰의

모습들이 추상화적 개념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좀 특이하다

 

정면에는“無爲堂” , “望月寺” 편액이 걸려있고, 법당 안에는 금동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법당안 마루 우측에는 조선조 정조 10년(1786년)에

조성한 범종이 있으며, 지장보살상과 시왕탱은 최근에 조성된 듯 하다

1층은 망월사 종무소가 자리를 하고 있다

무위당과 망월사의 편액

망월사 편액

망월사 편액에는 광서신묘중추지월 주한사자원세개(光緖辛卯中秋之月 駐韓使者袁世凱)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다녀간 모양이다

 

망월사 주련

十方同聚會 (시방동취회) : 시방의 수행 납자 함께 모여서

箇箇學無爲 (개개학무위) : 모두가 함이 없는 무위법 배워 

心空及第歸 (심공급제귀) :심공한 자 급제하여 돌아가리니

不墮然機 (불타초연기) : 처량한 지경에 빠지지 않네.

有問何境界 (유문하경계) : 어느 누가 이 경계가 뭐냐고 하면 

笑指白雲飛  (소지백운비) : 빙긋이 흰구름 감 가리키리라.

 

 

이 게송은 방거사(龐居士)의 오도송(悟道頌) 중 한 구절로 방거사는 중국의 유마거사로

불리는 분으로 8 세기에서 9 세기 중당(中唐)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성은 방(龐)이요,

이름은 온(蘊)이며 자는 도현(道玄)이다

그대 어딜 그리 바삐 가고 있는가?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
이번 생 잠시 인연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따라 갈 뿐이다.

장작 두 개를 비벼서 불을 피웠다면
불은 어디에서 왔는가. 장작 속에서 왔는가,

아니면 공기 중에서
그도 아니면 우리의 손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신이 불을 만들어 주었는가.

다만 공기와 장작과 우리들의 의지가
인연 화합하여 잠시 불이 만들어 졌을 뿐,
장작이 다 타고 나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사(生死)이다.

불을 어찌 고정된 실체라 할 수 있겠으며,
'나' 라고 내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공한 인연생 인연멸일 뿐이다.
여기에 내가 어디 있고,
내 것이 어디 있으며
진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다 공적할 뿐이다.
이 몸 또한 그러하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 인연따라 사라질뿐...

나' 도 없고, '내 것' 도 없다.
그러할진데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며,
어딜 그리 바삐 가고 있는가.

갈 길 잠시 멈추고 바라볼 일이다..

- 화엄경-

무위당에서 자비문을 나와 여여문으로 들어서 관음전(낙가보전)을 들어선다

망월사에는 금강문을 비롯해 해탈문, 통천문, 자비문, 여여문, 월조문 등 6개의 문이 있다

망월사 관음전

옛 낙가암((落迦庵) 자리이던 이곳에 1846년 이래 4차례의 증.개축을 반복하다가

1993년에 능엄(楞嚴) 스님이 이 대불사를 일으켜 지금의 낙가보전으로 개명했다.

낙가보전은 관음 즉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일반 사찰에서는 원통전, 관음전이라고 한다.

낙가보전은 밖에서 보면 지붕을 얹은 2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천정까지 뚫려있다.

편액은 위는 적광전(寂光殿), 아래는 낙가보전(洛迦寶殿)이 걸려있는데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인데 법신불임으로 따로 협시불을 두지 않는 것이 상례다.

2층 구조의 관음전은 1층엔 낙가보전(落迦寶殿), 2층은 적광전(寂光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법당 내부로 들어가면 단층이다

 

중국에 있는 보타낙가산(補陀落迦山)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산인데 그래서

망월사 낙가보전도 관음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불당이며, 이곳 낙가보전도 아미타부처님 뒤에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낙가보전 편액

월조문(月釣門)

낙가보전에서 천중선원으로 이어지는 스님만 다니는 문으로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월조문은 달을 낚는다는 문을 의미한다. 달은 곧 깨달음이요 佛性, 正覺, 성불을 의미한다

월조문에서 바라본 망월사 관음전의 모습

낙가보전의 주련

曾於觀音如來會上(증어관음여래회상) : 일찍이 관음여래회상에서

聞勳聞修金剛三昧(문훈문수금강삼매) : 금강삼매를 닦으셨네.

仍號觀音跡居寶陀(잉호관음적거보타) : 그로인해 관음이라 불리며 보타산에 계셨네.

示現此土?和無方(시현차토구화무방) : 이 땅에 나타나시니 그 방편이 끝이 없어라.

欲識大聖感應有實(욕식대성감응유실) : 그 분의 감응이 헛되지 않음을 알고자 하는가!

道峰山頂秋月春花(도봉산정추월춘화) : 도봉산정에 가을 달 봄꽃이네

법당안은 관음불을 주불로 모시고 뒤에 42수관음목각탱을, 앞에는 해상용왕(海上龍王)과

남순동자(南巡童子) 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관음불 뒤에는 작은 무수한 관음불이 탱화되어 있다.

관음불은 좌우 두 곳에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낙가보전에서 바라본 영산전의 모습

망월사 전각중에 가장 명당자리에 있는듯 싶다 

관음전에 들어서니 사시예불 시간이다...예불 참여자는 스님과 불자 3명과

나를 포함하여 등산객 2명이다... 오랫만에 여법하게 사시예불에 동참하고

관음전을 나와서 법당 뒤를 돌아서 고불암으로 향한다

고불암 가는 길에서 만난 쑥부쟁이

뒷쪽에서 바라본 관음전의 모습

망월사 고불원의 모습

고불원(古佛院: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호)

목조삼불상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으며

고불(古佛)은 4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옛적의 부처님,

과거세의 부처님을 의미하고, 둘은 벽지불(?支佛)의 별칭이요,

셋은 고승(高僧)의 존칭을 이르는 말이요,

넷은 조성한 연대가 오래 된 불상(佛像)을 의미한다.

망월사 칠성각(七星閣)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성(七星)을 봉안하는 사찰 당우로 칠성은 원래 중국에서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형성된 다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불교 속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수명신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고 불교화됨에

 따라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칠성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어 있다.

 

억불(抑佛)의 시대에 수명의 연장을 기원하는 하근기(下根機)의 중생을 접수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칠성은 수명신의 구실과 함께 가람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 칠성각에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인 칠성탱화(七星幀畫)만을 봉안한다.

칠성각 뒷쪽으로 돌아서 길이없는 좁은 곳으로 들어서니 한평 남짓한

조그만 당우가 하나 있는데 편액도 없다... 짐작컨데 산신각인듯 싶다

당우 뒷쪽 바위에 ‘南無道峰山神之位’라고 암각되어 있는걸로 보아 산신각이 맞을듯 싶다

산신각을 나와 다시 관음암을 지나 범종각에서 영산전을 바라보니 한폭의 그림같다

범종각에서 바라본 영산전

그 뒷쪽으로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외호하고 있다

秋色에 빠진 망월사

보면 볼수록 추색에 빠져든다

다시 돌아온 관음전

관음전에 되돌아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포대능선으로 향하려는데 천중선원에서

나오시는 스님 한 분과 마주친다... 스님에게 예를 올리고 얼굴을 드는데 스님께서

아이구! 이게 누구신가. 총무님 정말 오랫만입니다’ 하는게 아니가

학창시절 한 기 선배였던 스님이라 학창시절에 조금 친하게 지낸 편이었고

승.속이 다르다보니 졸업한 이후로 만날일 별로 없는데 내가 3학기에 총학의

총무를 맡는 바람에 얼굴이 점 많이 팔린 탓에 아는 스님을 만난다.

스님께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하시면서 종무소에 와서 차 한잔 마시면서

茶談을 한참동안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스님과 헤어져 포대 능선으로 향한다

범종각에서 바라본 영산전의 모습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선인봉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있는

영산전은 그야말로 천하의 명당자리인듯 보인다... 감탄사 그 자체이다

금강문(11:30)

지인스님께서 조금후면(12시) 국수공양이 있으니 국수나 한 그릇하고

가라고 하는데 정중히 사양하고 스님과 헤어진 다음에 포대능선으로 향한다

포대능선 오르는 등로에는 마사토가 깍여져 나가 특이한 형태의 작품으로 보인다

비오는 날 도봉산의 秋色

포대능선(11:40)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이 능선은 중간에

대공포 진지인 포대(砲隊)가 있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이 능선의 길이는 약 1.4km이며, 북쪽의 사패산 방향으로

원도봉계곡, 회룡계곡, 안골계곡, 송추계곡, 원각사 계곡으로의

산행이 가능하며, 남쪽 도봉산 방향으로 도봉계곡, 오봉능선으로

산행이 가능하며, 우이암을 경유하여 우이동계곡 등으로 산행할 수

있는 북한산국립공원도봉지구의 주요 탐방로중의 하나이다 

포대능선으로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너무나 환상적인 도봉산의 모습

수락산과 상계동의 모습

망월사와 다락능선의 모습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사패산 방향의 멋진 암릉

자운봉가는 길의 滿秋

멀리서 오셨네요

늘 그자리에서 꿋꿋하게...

사패산의 모습

사패산(賜牌山)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6번째 딸인 정휘옹주가 1604년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賜牌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송추와 장흥의 모습

포대능선 정상(12:10)

포대능선 정상에 오르니 간간히 내리던 비는 추운 날씨탓인지

눈으로 변하기에 자운봉으로 향하던 발길을 다락능선으로 향한다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의 모습

의정부(議政府)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관청 명칭을 이곳

지명으로 따왔는데,1912년 문헌에 경기도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가 시초이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임금이던 태상왕 시절에 이곳에 머무르며 6조판서와 정사를

의논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이 이 곳의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봉산 주봉을 배경으로 인증샷

포대능선 정상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봉의 모습

경기의 금강’이라 불리는 도봉산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는 최고봉(740m)인 자운봉(紫雲峰, 740m),

만장봉(萬丈峰, 718m), 선인봉((仙人峰, 708m). 이 세 봉우리를 ‘삼봉’ 또는 ‘삼형제 봉우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운봉(紫雲峰)'은 높은 산의 봉우리에 붉은 빛의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는데, ‘자운(紫雲)’은 불교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뜻하며  '만장봉(萬丈峰, 718m)'은

 '높디높은 산봉우리'라는 뜻으로 넓고 큰 바위가 천장만장으로 깎아질러 서 있어 그 기세가

아주 굉장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고 해발 약 350m부터 화강암 바위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닭 벼슬처럼 날카로운 형상이고 '선인봉(仙人峰, 708m)'의 명칭은 신선이 도를 닦는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만장봉과 선인봉의 뒷편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잠시 후에 걸어야 할 다락능선(多樂陵線)의 모습

다락능선은 옛날 북관대로가 도봉산 아래를 통과하고, 거기에 공무로 여행중인 관원을 위한

다락집 형태의 원우(院宇)인 덕해원(德海院)과 장수원(長壽院)이 있었기에 붙혀진 이름이다

다락능선으로 향하는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오는 길에 오랫만에 등산객을 만난다

참으로 오랫만에 이 길을 걷는다

빗길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정겹기만 한 구름다리

좌측으로 향하니 도봉산 주봉이 멋지게 조망되는 전망바위가 나오고...

도봉(道峰)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나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움일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청록파 시인 박두진 님의 시

참으로 멋지다

조망바위(12:50)

이곳에서 가져온 감과 커피 한잔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아쉬움에 다시한번 더 바라보고 하산을 한다

비에 젖은 단풍

하산길 좌측으로 또다시 망월사가 조망되고...

개구멍을 지나니...

은석봉(13:10)

지나온 다락능선의 모습

전망암(13:12)

전망암에서 바라본 망월사와 포대능선

조금전 지나온 등로의 궤적

시절을 잘못 타고 났구나

저 분도 나처럼 독립군이구나... 그래 산행은 독립군이 최고 편하제

山情無限

도도함... 그리고 너무 멋짐

수락산과 의정부 I.C

암릉구간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은석암이 나온다

천년고찰 은석암이라는데 돌담이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은석암의 절집 살림이 궁핍한 모양이다

손바닥만한 텃밭에 무우... 저걸로 겨울나기는 힘들낀데...

은석암(13:25)

절집 안으로 들어서니 암릉 곳곳에 조그만 석불이 모셔져 있고 맨 윗쪽으로 산신각이 있는데

그 위로 은석봉이 보이건만 왠지 모든게 초라하게만 보인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스님 2분이 시멘트를 비벼서 돌담 쌓기에 한창이다

법당겸 요사채를 겸하고 있는 건물 하나만 달랑있는 은석암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더 처량하게만 보이는데 요즘같은

불경기에 이 절만 절집 살림이 팍팍하겠소... 스님! 힘내소

잠깐 멈췄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하산을 서두른다

호젓한 하산길

냉골 약수터(14:40)

약수터 앞 개울을 지나는데 맥산행을 하던 버릇 때문에 개울 건너는게 망설여진다

참 곱다

녹야원(13:45)

아직은 세속 중생이라 그 경계를 따라가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녹야원 법당의 모습

고향 생각이 절로 나네요

저 衆生은  뭔 고민이 있으신지?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분소

광륜사

이 시대의 선지식이셨던 청화대종사가 주석하신 곳이다

광륜사 대웅전

옷이 많이 젖어서 법당에 들어가질 못하고 밖에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원한에 대해 노여움 없으니
내 생(生)은 이미 편안하여라
사람들은 누구나 원한을 품지만
내 행에는 아무런 원한 없다네.

병(病)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으니
내 생은 이미 편안하여라
사람들은 모두 병을 앓지만
내행에는 무런 질병도 없다네.

근심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으니
내 생은 이미 편안하여라.
사람들은 누구나 근심이 있지만
내 행에는 아무런 근심 없다네. 

깨끗하여 함[爲]이 없으니
내 생은 이미 편안하여라.
즐거움으로써 음식을 삼으니
마치 광음천(光音天)과 같다네.

편안하여 아무 일이 없으니
내 생은 이미 편안하여라.
온 나라에 가득한 불 인들
어찌 나를 태울 수 있으랴

법구비유경 안녕품中에서 -

광륜사 안내판

도봉산 서원동터

대한민국은 여인들의 천국이다... 갈수록 남자들은 쪼그라들고... 솔직히 맘에 안든다

가는곳마다 남정네들을 푸대접하니...불쌍한지고...

도봉동문(道峰洞門)

조선조에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썼다는 ‘道峰洞門’ 암각화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 오르면 있는 도봉서([道峯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서원이다. 

1573년(선조 6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이후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이어 선현의 배향과 교육에 힘쓰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고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매표소 입구

나홀로 우중 산행을 즐기다가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도봉산역으로 향한다

도봉산에 오면 가끔 들리는 곳

올때마다 줄을 섰는데 오늘은 비가 온 탓인지 자리가 있다

6,000원의 행복

칼국수 3,000원에 막걸리 한병(3,000원) 마시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