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몸뚱아리는 맘을 따라주지 않고...오르지 못한 검단산

범여(梵如) 2018. 7. 16. 20:54

☞ 산행일시: 2018년 07월 15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폭염경보가 발생한 날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4.5km / 2시간 50분 정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하남 에니메이션 고교 버스 정류장-노거수 외창모루-벙커-송전탑-공터- 공터

                 293봉-큰고개-나무계단-묘지-운동기구-NO71송전탑-넓은 임도-월남참전 용사비

소 재 지: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배알미동

 

산꾼 범여가 요즘은 참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살아간다...사연은 이렇다.

지난 4월쯤이었나보다 2년에 한번씩 국민건강보험에서 받아보라는 신체검사를 사무실 근처에 있는

내가 다니는 중소병원에서 신체검사중 폐 CT를 찍다가 평소 나의 건강을 체크 해주시는 주치의가

신체 검사를 중단하고 갑자기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한다

오늘은 신체 검사를 겸하면서 항상 酒님을 즐겨하는 탓에 꼭 체크하는  위와 대장 내시경을 검사를

위해 어제부터 굶고 속을 비운탓에 말할 힘도 없는 상태인 나를 평소에 대하는 태도와 다르게 겁박을 한다

“김사장님!... 위. 대장 내시경이 문제가 아니라 폐쪽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니 큰 병원으로 가봐야겠습니다”

하면서 모든 검사를 중단 시키고 여기저기 큰 병원으로 연락을 하더니만 주치의인 원장님이 폐CT  CD를

복사하여 아산 병원에 연락하여 조치를 해놨으니 지금 바로 가라는 것이다

 

‘이게 뭔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야’... 여태껏 아픈데도 없었고 잘먹고 잘자고 잘싸며 살았는데 뭔 소린지...

원장님에게 혹시 오진 아니냐고 따지니, 20년 넘게 한동네에 살면서 자기를 못믿느냐고 하니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다...아산병원에 가서 담당교수와 상담을 한 다음에 5월 1일에 입원하여 2박3일간 정밀 검사를

한 결과 폐 윗쪽에 있는 흉선(胸腺)에 암으로 의심되는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청천벽력같은

결과를 들으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다... 내가 암이라니... 그러면서 가장 빨리 수술 날짜가 잡힌것이 6월 25이란다

 

그 사이에 난 열심히 지맥길을 걸었고 입원하기 전날에도 그 더운날씨에 9시간 가까이 금적지맥 마지막 구간을

걸었는데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아 혹 오진이 아닐까 싶어 수술을 않하겠다고 하니 가족들이 난리이다

소 도살장 가는 심정으로 6월 25일 병원으로 가서 26일날 약 6시간의 수술을 끝내고 마취에서 깨어나니

온 몸이 아파서 미치겠다... 멀쩡한 사람이 병신된 기분이다

10일정도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퇴원하여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검사 결과 흉선암은 아니고 바로 전단계인데 흉선을 절개하고 흉선과 붙은 좌측 폐 1/3을 절개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치의인 교수가 하는 말인 ‘선생님은 天運을 타고 났다고 한다’ ... 이 암은 통증이 오지도 않고 잘 발견도

안되는데 어떻게 조그만 병원에서 발견을 하였냐는 것이다

 

수술 후 통증은 조금 가라 앉았으나 걷지를 못하는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평지는 그런데로 걸을만하나 폐를 절개한 탓인지 오르막은 전혀 걸을 수가 없다

평소에 집에 10분도 못 있는 성격이 집에 있으려니 정말 미칠 지경이다.

집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의 감시가 심하다... 일욜날 오후 마눌이 근처 마트에 가고 없기에 집을 탈출한다(?)

근데 막상 집을 나오고보니 갈만한 곳이 없다...누님이 살고 계시는 하남시의 검단산으로 향한다

올해 84세의 누님!.. 막내의 소식을 듣고 상심하고 계신다는 소식에 얼굴이나 보고 와야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강변역(14:40)

검단산을 가기위해 강변역에 도착하니 도로는 그야말로 가마솥같은 열기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이든다

이곳에서 10여분을 기다렸다가 112-1번 버스를 타고 검단산 방향으로 향한다

검단산 입구 한국전력앞 버스 정류장(16:20)

서울에서 검단산으로 오는 버스노선 번호표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이곳 역시 덥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검단산으로 향하는데 등산객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외창모루 방향으로 향한다

외창모루 가는 길에 멋진 노거수 한그루도 만난다.

창모루 마을 표시석

하남시 창우동에 있는 창모루 마을은 올림픽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직진을 하면 45분 국도가 연결되어 있는

붕어찜으로유명한 광주시 남종면이 나오고 팔당댐을 관리하는 수자원공사가 있는 아래배알미 마을이 나오는

인터체인지를 돌면 팔당대교가 넘어가는 곳이며 식당가가 있는 마을이다.

미식가들에게  ‘해물 칼국수와 칼제비꽤나 유명한 이 지역 마을 이름과 같은 ‘창모루’마을 입구 표시석이 있다

 

창모루’란 이곳 동이 창우동인데 예전에 이곳에 군량미 창고가 있은 탓에 부르게 된 모양이다.

이곳은 한남정맥에 속해 있는 검단지맥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부분이기도 한 곳으로 범여가 지맥길의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 이곳이기도 참으로 감회가 깊은 곳이다

그때가 2011년 9월 11일이라...참으로 세월이 그간 많이도 흘렀구나

급경사의 오르막을 올라서니 산꾼들의 흔적이 보인다

지난 겨울에 남암, 용천, 용천북지맥에서 자주 뵈었던 대구 의산님의 시그널...참으로 반가웠다

군벙커가 있는  급경사로 오르니 숨이 막힐정도로 힘이든다

저녁마다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을 8km정도를 걸을때는 몰랐는데 오르막은 힘이 들어 걸을수가 없다.

아직까지 수술부위의 실밥을 뽑지 않은 탓인지  상당히 땡기고 힘이들며, 좌측의 폐를 1/3정도 잘라낸

후휴증인지 오르막길을 아예 오르수가 없을 정도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200m 정도 지나니 송전탑이 나오고 숨이차서 오를수가 없다

송전탑 아래 등로에 드러누워 버린다... 다행히 등로 주위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평지가 나오고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나 모든게 힘이들고 귀찮기만 하다.

수술 부위는 아직 실밥을 뽑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이 너무 심하다

다시 오르막길에 만난 시그널

지난달에 하남시 부시장에서 정년 퇴임을 한 김양호님의 흔적을 만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금적지맥을 같이 걸었는데 이 분은 검단지맥을 하신지는 얼마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다리셔요 부지런히 몸 만들어서 지맥길 복귀할 때 까지 기다려 주셔요

오르막만 만나면 몸뚱아리는 자동으로 멈추는 느낌이다

좌측 폐를 1/3정도 절개한 후유증인 모양이다

천하의 맥산꾼 범여가 우째 이런일이...괜히 수술대에 올랐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로 막는다

오름길에 만난 누리장나무꽃도 오늘은 귀찮기만 하다

1km 조금 넘는 등로를 올라오면서 10번도 넘게 쉬어야만 했다

독성이 강한 달걀버섯도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옆으로 들어서니...

삼각점이 있는 293m봉 정상이 나타난다. 

293m봉

293m봉 정상 삼각점(△성동489 / 1994재설)

큰고개

293m봉에서 내려서니 하남 에니메이션 고교에서 검단산으로 오르는 주 등산로가 나온다

넓은 공터에 운동기구들이 있고 좌측으로는 팔당댐이 있는 배알미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에니메이션 고교에서 올라오는 검단산 주 등산로가 있는데 등산객은 별로없다

거기다가 저녁 7시가 가까워지고 있고, 검단산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2.04km이다

현재의 컨디션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이곳에서 하산을 해야할 듯 싶다

정상가는 길을 포기하고 나니 맘이 한결 편하다

내려가는 길을 거든데는 문제가 없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이미 옷은 물에 빠진 새앙쥐처럼 땀에 다 젖어 버렸고

꺼놓은 핸드폰을 켜고 마눌에게 전화를 하니 지금 어디냐고 하면서 난리부르스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검단산에서 내려가고 있으니 누나 아파트에 들려서 누나를 모시고

검단신 입구로 오라고 해놓고는 검단산 입구로 내려간다

 

좌측으로 내려가는 배알미동(拜謁尾洞)은 검단산 자락에 팔당호를 끼고 있어서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옛날에 관리(官吏)가 낙향을 하거나 귀향을 갈 때, 이곳에서 한양 도성을

향해 임금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던 곳으로 즉, 왕을 마지막 배알(拜謁) 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큰고개에서 검단산 정상으로 포기하고 편안한 등로를 내려오다가 유길준 묘소가 있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쳐다보니 검단산이 보이는데 미치겠다

뜸한 등로로 내로다 바라본 검단산 정상의 모습

검단산(黔丹山:657m)...2011년 9월 13일 검단지맥 때의 모습

경기도 하남시 배알동과  창우동, 산곡동의 경게에 있는 산으로 또한 산세가 특이한 것이 특징이며 가파른

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의 전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서서히 정상에 오르는 길이 매우 다채롭다.

또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한남정맥의 지맥으로서 탄천이 중앙부를 북류하고

그 좌우에 지류가 발원하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凹형을 띠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 왕이 하늘에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

또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소가 있다. 

 

검단산의 유래에 대해서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그 산에 은거하였어서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黔丹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중에 하나인데 그러나 검단선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북 고창의 유명한 사찰

선운사(禪雲寺)의 창건 설화 중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것과 백제 위덕왕(525년 ~ 598년) 24년인 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인이라면 검단선사가 검단산에 있었던 것은 6세기 중반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때 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있는 산'

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유길준의 묘소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조선의문신이자 구한 말의 정치가·개화 사상가로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이며,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었으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 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으며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 사회의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10월에 한.일 병합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도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을 조직했다.

쉼터에서 또다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넓은 길로 내려오니...

NO71 송전탑

등로옆에는 우산버섯이 보인다

송전탑에서 넓은 임도로 내려오는데 너무나도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점심때 먹었던 음식물을 다 토해내고 나니 어지럽기 시작한다

근처의 벤취에 드러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데 전화통이 불이 나기 시작한다

등산로 입구에 내려가서 전화를 하여 집사람과 누나를 만난다

하남시 현충탑(河南市顯忠塔)

검단산 등산로에 자리잡고 있다. 하남시민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2001년 7월 11일에 건립하였다.

전체 높이 20m 규모의 조형물로서, 검단산을 조형화한 삼각의 구도 위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의 

거룩한 뜻을 기리는 높이 9m의 대형 청동상을 세웠고, 좌우로는 자유와 평화를 추상화한 조형물을 배치하였다.

청동상은 영령들의 승천과 영생복락을 바라는 마음을 철학적,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탑 좌우 끝부분에 있는

반추상의 군상 조각은 넋을 달래는 진혼곡을 연주하는 이미지를, 삼각 구도 중앙에 있는 4개의 선은 하남시의

발전과 시민의 화합을 상징하였으며 조각은 이일영, 글은 한운사가 썼으며 이병태가 글씨를 새겼다.

매년 새해와 현충일에 이곳에서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곳에서 누나를 만나는데 아픈 동생을 바라보고는 한없이 눈물만 흘린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울기만 하는데 맘이 편치않다.

누나를 위로하고 이곳에서 좀 떨어져 있는 은고개의 愛馬라는 곳에 가서 오리훈제로 저녁을 먹고

누님을 집에 모셔 드리고 나는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