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에 떠난 공주 마곡사와 부여 무량사
순례일시: 2018년 12월 22일
순례코스: 공주 마곡사와 부여 무량사
법보신문사에서 올해 마지막의 성지순례를 나서는데 하필이면 동짓날이라 조금은 불편하지만 어찌하라
하루 전날 제적사찰에 가서 쌀 한포대를 법당에 올리고 부모님 위패에 예를 올린 다음에 점심공양을
하고 사무실로 오려고 하는데 스님께서 ‘낼 동지기도 하러 안오실 모양이죠?’ 하는데 좀 미안하다.
사정을 얘기하니 잘 다녀 오라고 하신다.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대설과 소한사이에 오지만, 다른 절기와는 다르게 양력 12월 22일경이 된다.
이 날은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지나 간 태양은 소멸하고 새로운 태양이
솟아난다고 하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작은 설(亞歲)라고 하여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세시풍속으로는 팥죽을 쑤어서 나누어 먹으며, 집안에 뿌려 잡귀를 물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동지에 대한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특히 동지에는 각 사원마다 동지기도가 연중행사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는데 동지기도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지만, 지난해를 무사히 보내는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와 새로운 한 해의 소원을
기원하는 원력의 기도일 것이다.
절에서는 동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 여러 가지 있으며, 즉 동지를 맞이한다는 것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바로 한 해 동안 수행에 필요한
살림살이를 준비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동지(冬至)를 깃점으로 해서 하루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진다고 하는 날 성지순례를
가기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인 공주와 부여를 향하는데 한 해를 잘 마무리 되었으면 한다
나에게는 올 한 정말로 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아닌가 싶다.
그로 인해 앞만보고 달려왔던 내 인생길을 한번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곡사 가람 배치도
법보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삼국유사 성지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기행’ 비로자나불의 길이란
타이틀로 올해 마지막 성지를 떠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탑승지인
조계사 앞에 가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조계사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데
동지 철야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불자들이 너무 많아 발디딜 틈이 없다.
다시 버스로 되돌아 와서 버스에 올라 마곡사로 향하는데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다
지난 여름 큰 수술로 인해 한쪽 폐가 부실한 범여로서는 상당히 힘이 든다
마곡사 일주문(一柱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태화산(泰華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선사(無染禪師)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일주문 천정의 단청 모습
일주문이란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른데,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으며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새워진 것이다.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선 채로 저두(低頭三拜)의 예를 올리고 마곡사로 향한다
마곡사 현판
마곡사의 연혁
마곡사 가는 길에서 바라본 군왕대(君王臺)와 극락교 아래로 흐르는 태극천(마곡천)
군왕대(君王臺)는 마곡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한 곳으로 가히 군왕이 나올만 하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에 몰래 매장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기위해 조선 말기에
암매장된 유골을 모두 파낸 후 돌로 채웠다고 한다.
조선 세조가 군왕대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마곡사는 매우 독특한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는데, 사역(寺域) 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개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는데 영산전(靈山殿)을 중심으로 한 남원(南院)은
수행 영역이고, 대광보전(大光寶殿)을 중심으로 한 북원(北院)교화 영역이다
태화산 마곡사 표시석
주차장을 지나 마곡사 입구로 들어서니 “太華山麻谷寺” 표시석이 순례객을 반긴다.
근데 태화산이라니...마곡사를 품에 안고 있는 산은 분명히 태화산이 아닌 무성산이다.
무성산에는 유서깊은 마곡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예로부터 길지(吉地)로 소문난
마곡사 터는 기근이나 병란의 염려가 없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일컬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많은 시인 묵객들의
찬탄을 받은 곳이 마곡사였다.
왜 무성산이 아닌 태화산이라 한 것이 궁금하여 동행한 주수완 교수님께 물어봤다.
주박사님의 얘기로는 마곡사는 선종을 표방하는 사찰이라 태화산이라 했다고 하는데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마곡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되는데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신라의 보조체징(普照體澄:804~880)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체징 선사는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 가운데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창조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통요범일(通曉梵日:810~889),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각순(覺淳) 스님등이
중창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마곡사 남원(南院)의 모습
마곡사 남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전각(殿閣)이 해탈문인데 우리는 해탈문에 들어서기 전에
좌측으로 꺽어져 영산전과 매화당, 수선사,명부전, 흥성루가 있는 곳으로 먼저 올라간다
마곡사 흥성루(麻谷寺 興聖樓)
마곡사에 진입하기 위해 세심교를 건너면 마곡사 해탈문을 만나기 전 왼쪽 축대 위에 마곡사 흥성루가 있다.
흥성루는 언제 처음 건립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건축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규모는 일반 사찰의 진입 누각에 비해 매우 큰 편이며 마곡사 영산전 앞에 큰 누각이 있다는
것은 마곡사 영산전 앞마당에서 사찰의 대규모 행사가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대규모 사찰 행사 때 마곡사 흥성루는 강당 기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인데 수행 가람의 진입 누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건물 구조는
마룻바닥이 높지 않아 누각 구조는 아니다. 내부는 하나의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중정 쪽이 벽이나 창호 없이
터져 있어 사찰 행사 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앞면 각 칸에는 장판문을 달아 외부와 시각적으로 차단시켰다.
또한 막돌로 외벌대 기단을 만들었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주를 세웠고 기둥 위쪽에는 주두를 놓고 장여와 대량을
함께 결구하였으며 측면이 21자임에도 고주를 세우지 않았고, 대량을 앞뒤 기둥 위에 걸었다.
긴 대량이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구조재 겸 장식재로 무익공을 끼워두었다.
무익공의 내부는 보를 받치는 보아지 역할을 한다. 보아지 밑에 곡선의 까치발을 끼워 보강하였다.
대량 위에는 양쪽에 동자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종보를 올렸다.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세웠고, 종도리를 올린 다음 서
까래를 걸어두었다. 창호는 앞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심벽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수선사(修禪社)
영산전 일곽의 마당 남쪽에 위치한 수선사는 선(禪)을 수행하는 스님들의 도량으로
ㄱ자형 건물의 남동 모서리에 부엌이 있으며 나머지의 크고 작은 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건축 양식은 공포를 사용하지 않은 간략한 소로수장집(小櫨修粧閣:도리와 장여 밑에 접시
받침을 받쳐서 장식한 집)이며 홑치마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부엌 출입구 양쪽의 기둥은 휜 만곡재 그대로 사용하여 전통 목조 건축에 있어서
부재 사용의 유연성을 잘 보여주는 전각이다
「명부전창건기」에는 136년에 수선사를 중건하였다고 하며 그 이후 1980년에 보수하였다
매화당(梅花堂) 전면의 모습
영산전 앞 마당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매화당은 요사용 전각으로 1983년에 신축하였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양 사익(舍翼:주요 건물의 좌.우로 뻗어있는 부속건물)가 만나는 곳에
대중방과 부엌이 있고, 좌.우 익사에는 방들을 배치 하였다.
조선 후기 양식을 모방하여 연봉과 연꽃으로 장식한 익공을 사용하였으며 팔작지붕의 양식이다
매화당의 모습
편액은 우송 민효식 선생의 글씨이다
매화당 측면의 모습
마곡사 영산전(靈山殿:보물 제800호)
영산전은 마곡사에 있는 전각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2년(1651년)에
각순대사(覺淳大師)가 다시 세웠으며 편액은 세조가 이곳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한다.
「태화산마곡사천불전중수문(太華山麻谷寺千佛殿重修文)」에 의하면 1682년에 건립하여 1842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다른「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太華山麻谷寺寺跡立案)」에는 영산전의
천불(千佛)은 인영(印英)스님에게 의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영산( 靈山)은 영취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던 곳을 말하는데,
현재 영산전 내부에는 7분의 여래불상과 1,000분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어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한다
영산전은 사역(寺域)을 가로 지르는 개울 남쪽 수행 지역의 중심 불전으로, 북원(北院)의
불전(佛殿)들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이 측면에
비해 비교적 길어 세장(細長)한 느낌을 준다.
영산전 내부에는 ‘ㄷ’형 불단(佛壇)을 마련하여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불단 가운데는 석가모니불과
좌.우 보처불 등 칠불(七佛)을 모셨는데 모두가 목조불이며, 그 후면과 좌.우 불단에는 소형 불상들을
봉안하였다.
영산전은 본래 영산회상을 재현하는 곳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성중(聖衆)이 나한(羅漢)이어야 하는데
모두가 부처님이다. 따라서 영산전이란 명칭보다는 천불전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이런한 추정은 「천불전중수문(千佛殿重修文)」에 천불전을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영산전 내부의 모습
영산전 측면의 모습
남쪽 수행 지역의 중심 불전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놓는 주심포계이며 살미 끝을 감아올린 듯한
독특한 공포 장식에서 당시 공사를 담당했던 장인들의 독창성을 느낄 수 있다.
영산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머리등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를 놓는
주심포계(柱心包系)이며 기둥과 기둥사이에 화반(花盤:도리를 받치는 장여밑에 끼우는 널조각)을 놓아 지붕의
하중을 받쳐주고 있으며, 공포는 외 2출목(出目)으로 살미(山彌:도리에 직교하여 받친 공포 부재) 끝을 감아
올린 듯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이런 돋을 새김(초각:峭刻) 수법의 예를 찾기 힘들어
당시 공사를 담당하였던 장인의 독창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건물 뒷쪽의 공포는 앞쪽과 달리 마구리(목재의 길이 방향의 양끝)를 직각으로 재단한
간략한 모습으로 마감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고, 지붕 처리에서도정면성의 기법을 적용하였는데
앞쪽 처마는 부연(浮椽: 서까래 위에 덧댄 작은 서까래)을 단 겹처마이나 뒷쪽은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로 앞.뒤를 달리 처리하였다.
가구(架構)는 내부의 고주(高柱)에 대들보와 툇간 위에 얹은 짧은 보인 툇보(退樑)를 끼우는 방식을 택했다.
대들보는 천연스럽게 휜 부재를 많이 많이 사용하였는데 휜 부분을 위로 놓아 처짐을 방지하고 있어서
당시 장인들이 부재가 지닌 역학적인 성질을 잘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주심포계 건물의 천정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 방식으로 처리하였는데 영산전에서는
다포계 건물에서 흔히 쓰는 ‘井’자형의 우물 천장 방식으로 구성하였고, 내진(內陳)을 외진(外陳)
보다 한단계 높게 처리한 층급(層級)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영산전 내부에는 고식(古式) 단청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대웅보전이나
대광보전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공주목사 이태연이 영산전을 중수한
1650년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전 정면의 화반과 공포 벽화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화반을 놓아 지붕의 하중을 받쳐주고 양 옆으로 벽화를 그려 놓았다.
영산전 주련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 : 허공이 큰 깨달음 속에서 생겨난 것이
如海一漚發(여해일구발) :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듯 하도다.
有漏微塵國(유루미진국) : 티끌같이 셀수없는 중생의 세계도
皆依空所生(개의공소생) : 모두 허공을 의지하여 생겨 났도다.
漚滅空本無(구멸공본무) : 물거품이 소멸하듯 허공도 본래 없거늘
況復諸三有(황부제삼유) : 하물며 다시 삼계가 있을수 있을까.
영산전 편액편액 좌측에는 ‘世祖大王 御筆’이란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1465년에서1487년 사이에 세조가 마곡사를 유람하였을 때 하사받은 것이라고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다
마곡사에는 세조가 타고 온 보련((寶輦:예전에, 임금이 대궐 안이나 나들이 때 타는, 나무로 집처럼 꾸며 만든 가마)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세조 때에 매월당 김시습이 무주 덕유산 백련암에 십여 년 간 있다가 마곡사로 왔다.
그는 마곡사 벽안당에 머물면서 사육신 등 단종 복위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주고 있었다.
마침 세조가 명산대찰을 찾아다닐 때 김시습이 마곡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조는 절의를 지키며 충신답게 사는
그를 만나보고자 마곡사로 향하였다.
평소 김시습은, “비록 왕이라 한들 세상을 역경 속에 처하게 한 군주는 군주가 아니라 폭군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폭군이라고 생각하는 세조가 마곡사에 온다는 소식과 자기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전갈을 듣자,
“이제 그 사람은 만나서 무엇 한단 말이냐.”하고는 여장을 챙겨 다른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고자 찾아왔으나 그가 없어 만날 수 없게 되자 크게 통탄하면서,
“김시습이 만나주지 않으니 나는 임금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매월당의 높은 절개를 기리면서, “시습이가 나를 버리는 불당 앞에서 어찌 내가 보련을 타고 가리.”
하고는 타고 온 보련을 이곳에 남기고 갔다. 이 보련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영산전 주련도 아마 그 당시에 세조가 쓰지 않았을까?
명부전(冥府殿: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64호)
마곡사 명부전은 정면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다포계 팔작 지붕이다.
건축 양식은 기둥 공간 포를 두 조(組)씩 설치한 다포계이나 세부 수법에서는
익공계 요소도 혼합되어 있으며 공포의 살미(山彌)에는 19세기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여 연봉과 연꽃으로 돋을 새김을 하였다.
「명부전창건기(冥府殿創建記)」에 따르면 1939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그 좌.우에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였다.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저승의 세계로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시왕(十王)을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은 삭발하고 이마에 띠를 두른 형상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고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이기 때문에
‘대원본존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菩薩)’이라 하고, 특히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시왕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심판한다는 열명의 왕으로사람이 죽어서 명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재는,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지내는 49재, 또 죽은 지 100일에 지내는 백재(百齋)와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小祥)과 대상(大祥)까지 모두 열번이다.
이 열 번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의 시왕 각각에게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을 받을 때마다 재를 올린다는
명부시왕신앙에 의한 것으로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생긴 건물이다.
명부전 정면의 화반과 공포 벽화
명부전 내부의 천장 모습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천장의 동자기둥 중간에 가로로 얹은 중도리
사이에만 우물천장을 만들었고, 나머지는 연등천장으로 처리를 하였다.
명부전 내부의 불단
지장탱 앞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보처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고 시왕이 있는데
시왕은 모든 중생들의 갖고 있는 죄의 경중(輕重)을 심판하는 지옥의 왕들로 도산지옥(刀山地獄)의
진광대왕(秦廣大王)· 화탕지옥(火湯地獄)의 초강대왕(初江大王). 한빙지옥(寒氷地獄)의 송제대왕(宋帝大王)
검수지옥(劍樹地獄)의 오관대왕(五官大王). 발설지옥(拔舌地獄)의 염라대왕(閻羅大王)· 독사지옥(毒死地獄)의
변성대왕(變成大王). 거해지옥(鉅解地獄)의 태산대왕(泰山大王). 철상지옥(鐵床地獄)의 평등대왕(平等大王).
풍도지옥(風途地獄)의 도시대왕(都市大王). 흑암지옥(黑暗地獄)의 오도전륜대왕(五道轉 輪大王)을 말한다
地藏大聖誓願力(지장대성서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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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 큰 성현의 위대하신 서원의 힘
恒沙衆生出苦海(항사중생출고해)
항사 같은 많은 중생 고해에서 건지시고
十殿照律地獄空(십전조율지옥공)
명부세계 재판 밝혀 지옥을 비게하며
業盡衆生放人間(업진중생방인간)
업이 다한 중생들은 인간계에 보낸다네
이 명부전 주련은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 항하사겁설난진
(恒河沙劫說難盡)... 하는 게송과 더불어 지장보살의 위신력을 찬탄한 게송이다
마곡사 해탈문(解脫門: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66호)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의 그물을 벗어나 아무 거리낌이 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문이라는 뜻이다.
마곡사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 해탈문이니 마곡사의 정문인 셈이다
이 문을 지나면서 속세(俗世)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
해탈문은 추녀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ㅠ도구를 여러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 벽으로 막았으며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상부에 조두형(鳥頭形)
돋을 새김을 하고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보살,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금강역사와 보현보살
해탈문에서 바라본 천왕문
통로가 一자형으로 되었다.
해탈문 측면의 모습
천왕문(天王門: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62호)
마곡사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인
해탈문과는 달리천왕문은 1출목 익공식(翼工式) 공포를 짜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華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이다.
동서남북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사천왕상이 조성되어 있으며,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내부에 걸린 편액(扁額)에는 ‘1910년 6월 중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지역을 관할하는 신적(神的)
존재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를 따라서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비파를 연주하는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과 큰 칼을 휘두르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왕)
다문천왕은 부처님의 설법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해서 다문(多聞)이라 하였는데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으며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지국천왕은 왼손에 큰 칼을 쥐고, 오른손에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왕)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왕)
증장천왕은 붉은색 기운이 도는 적색의 몸에 상당히 노한 눈을 하고 있다.
오른손엔 용을 꽉잡고 왼손에는 용한테서 뺏은듯한 여의주를 쥐고 있다.
광목천왕은 원래 백색의 몸에 열변을 토해 내면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기
때문에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엔 삼지창, 왼손에는보탑을 들고 있다
사천왕의 발 아래에 깔린 악귀
남원(南院)에서 바라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의 모습
주수완 박사님의 명쾌한 설명은 계속되고...
남원과 북원의 경계가 되는 극락교를 지나 북원으로 들어선다
극락교
마곡사의 수행 영역과 교화영역을 가르는 극락교
극락교 아래에는 돌거북상 2개가 있는데 하나같이 새끼 거북이를 등에다 메고 있다.
동행한 법보신문사 김현태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저 거북이는 충청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 류현진과 김태균이라고 한다
공주하면 박찬호 산수가 유명한데...박찬호는 제적사찰이 구인사라서 안했다고 한다
극락교에서 바라본 대웅보전(뒷쪽)과 대광보전의 모습
마곡사 범종루(梵鐘樓)사찰에 종루(鐘樓)가 2층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梵鐘樓)라고 하고
불전사물(佛前四物) 가운데 범종만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梵鐘閣) 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든 부처님께예배 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佛具)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범종루 1층은 운암당이라 하여 불교용품 판매점으로 이용이 되고 있는데 이 범종루는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듯 하다
범종루는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梵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홍고(弘鼓) 등을
비치하는 사찰 당우의 하나로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 중생을 향하여 불음(佛音)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들을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곡사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은 대광보전(大光寶殿)의 동남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언제 지어졌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1797년(정조 21)과 1856년(철종 7)에 각각 중수하고, 1909년에 기와를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치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있는 ‘ㄷ’자 형인데, 양쪽으로 날개처럼 방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 쪽은 겹집이고, 다른 한 쪽은 홑집 형식이다.
이러한 건물은 대개 양쪽 평면을 거의 비슷하게 만드는데, 후기에 중수하면서 원형이 많이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각 방의 배치를 보면, 가운데 큰 대중방을 두고 그 남쪽에 부엌을 배치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작은 방들을 만들어 두었다. 대중방 남측 면에는 4칸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로 기둥은 대중방 쪽에는 두리기둥을,
후면에는 네모기둥을 쓰고, 지붕 모양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혼용하여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심검당(尋劒堂)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심검당의 ‘劒’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蕙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사찰내에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 적묵당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곳은 순수한 수행처이므로 외인들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다.
심검당에는 마곡사 현판이 같이 걸려 있는데 麻谷寺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송하 조윤형(1725~1799)의 글씨로 청빈한 그의 인품을 보여주듯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尋劒"이란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심검당 편액
심검당(尋劒堂) 편액을 쓴조윤형의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치행, 호는 송하옹(松下翁)이며,
개성부유수 명교의 아들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1781년(정조5년) 상의원 주부가 되고,
1784 예조좌랑을 거쳐 보덕 겸 책례도감상래를 지냈다.
안악군주,광주목사가 되고 1791년 호조참의를 거쳐 1797년 돈령부지사를 역임하였다.
서화에 능하고, 특히 초ㅇㅖ의 필법은 송나라 미원장을 방불케 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검소하였으며, 늘 필묵으로 초(草), 석(石), 죽(竹) 나무를 그렸다.
글씨로는 <이보혁무기신공비><유점사풍악당대사비><용흥잠정고정기> 등이 있다.
마곡사 오층석탑(麻谷寺五層石塔:보물 제799호)
마곡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높이 8.4m이며 일명 다보탑(多寶塔)이라 한다
기단부는 이중으로 지대석(地臺石)과 하대 저석(低石)·중석(中石)·갑석(甲石)을 높게 쌓고
상대 중석에는 탱주(撑柱: 받침기둥)와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형식적으로 새겨넣었다
상대 갑석 위의 옥신(屋身)굄은 2단으로, 1단은 별석(別石)으로 매우 큰 편이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塔身)은 1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1층 탑신 남면에 문비(門扉)를 조각하고 2층 탑신 4면에
사방불(四方佛)을 배치하였다.
옥개의 전각(轉角)은 반전(反轉)이 심한 편이고 5층 옥개석에는 2개의 풍탁이 남아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풍마동(風磨銅)이라는 청동제로 된 상륜을 장식하였는데, 현재 이러한
상륜은 다른 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은 손상을 입어 1974년에 조금 앞으로 옮기면서 손상된 부분을 화강암으로 개수하였기
때문에 이질감을 주는데,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낮아 안정감은 없으나 당당하며, 조성시기는 풍마동의 형식이
원나라의 라마식(喇嘛式) 보탑(寶塔)과 비슷한 점에서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1782년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화강암으로 보수되어 있으며
1972년 탑을 해체·보수할 때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으며,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특이한 상륜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상층기단에는 양쪽
모서리에 우주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안쪽으로 둥근 형태의 기둥이 1개씩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석은 높고 폭이 넓은 편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며 상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높은 2단 굄이 있다.
탑신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석은 각 층마다 양쪽으로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로 1층 탑신의 남면에는 문비와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고, 2층의 각 면에는 불좌상 1구씩을 새겨
사방불 형식을 취했다
2단받침의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며 처마 끝부분의 반전이 심해 장식화 경향을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풍마동이라는 청동제로 된 부재가 놓여 있는데, 그 형태는 3층의 전각형 건축물 위에
원형의 복발과 보주가 놓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륜부의 형식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중국 원대의 라마식 보탑과 유사하여 원나라와 문화적으로 교섭이 빈번했던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마곡사 5층 석탑의 사방불(四方佛)
사방불의 개념은 밀교(密敎)와도 일맥 상통하는데 5층 석탑의 탑신(塔身)에도 사방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마곡사와 인접한 장곡사, 백곡사, 안곡사와 함께 4곡사(四谷寺) 체계에
속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 체계와도 관련이 있어 가람 배치에 사방불 개념이
원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한편「금강경만다라도」는 화엄종의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통일사상과도 연계된다
따라서 마곡사는 화엄사상과 밀교의 영향 등을 받아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사방에 불전을
배치한 가람 배치를 가졌 것으로 보인다
5층 석탑 2층 몸돌에 선명한 부처와 보살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층 지붕돌에만 2개의 풍경이 달려있다
탑의 끝부분에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風磨銅: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면 광택이 마치 불처럼
이글거린다는 구리) 장식을 두어 일명 다보탑이라고 부르는데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원나라 때에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5층 석탑은 대광보전이 크게 불타을 때크게 훼손되었고,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개성의 경천사탑,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탑과 함께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탑이다
5층 석탑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시는 주수완 박사님
마곡사의 주변 지형을 보면 절 뒷쪽의 국사봉(590m )과 서쪽의 옥녀봉(361.3m), 동쪽의 무성산(613m) 등
나지막한 산들이 절을 에워싸고 있으며 국사봉에서 발원한 마곡천이 사역 중심을 가로질러 S자형의
만곡(灣谷)을 이루며마곡사를 감싸 흘러내리고 있다.
여기에 작은 개울이 절의 동쪽에서 마곡천과 합류하여 소위 삼합수(三合水)를 이루는데 이곳은 아름답고
다정스러운 산봉우리 사이로 청계수(淸溪水)가 가득 흐르고 있어 이른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물 위에
뜬 연꽃 형상의 지형)’의 형국을 이룬 곳인데, 바로 그 명당의 혈장(穴場)에 마곡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곡사가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길지(吉地)로 이름난 곳으로 이중환은 저서「택리지」에서 남사고의
예언을 인용하여 마곡과 유구 두 냇가 사이를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로 기록하였다.
도선국사도 ‘이곳은 삼재(三災)가 들지 못하는 곳으로 천만년 오랫동안 좋은 땅이며 이곳에 집이나
묘 자리로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春麻谷秋甲寺(춘마곡추갑사)”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곡사 주변은 맑은
개울물과 소나무, 벚나무 등이 우거진 숲이 잘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奇:1567~1573)도 「유마곡사기(遊麻谷寺記)」에서
십여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十餘路傍 淸泉白石 己自開眼)’라고
절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마곡사 응진전(應眞殿):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응진전은 나한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나한(羅漢)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산스크리트어
아라한(arhan)에서 음역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다. 일반적으로 불전들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비해 응진전은 조금 다르다. 불전에 있는 개성이 강한 나한상 때문이다
마곡사 응진전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다만 마곡사 응진전을 1852년(철종 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건물 내부에 걸린 편액에 나타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식 건축이다.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석가의 존자인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정면 어칸은 10자로, 양 측면은 8자로
만들어 어칸의 폭이 크며 기단은 방형 치석을 이용하여 외벌대로 만들었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놓은 다음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그 위에 다포식으로 공포(栱包)를 짜 올렸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주간포는 각각 1조씩 올려두었으며 공포는 1출목 3포식으로, 제공의 끝은
쇠서 모양으로 마감하였고, 쇠서 안장에는 연화를 조각하였다. 외부로 나온 보머리 끝에는 봉황을 새겨 달았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대량과 중보를 기준으로 단을 둔 층급 천장이다.
창호는 건물 정면에만 달아 출입토록 하였고, 나머지 3면은 회사벽으로 마감하였다.
정면 어칸에는 삼분합문을, 양 협칸에는 하단에 머름을 설치하고 분합문을 달았다.
마곡사 백범당(白凡堂)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신 백범 김구(金九 1879 ~ 1949)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거할 때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여 수도하였던 곳으로 백범 김구선생은 1898년 마곡사를 떠난후, 근 50년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의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澗 猶如夢中事)
돌아와 세상을 보니 마치 꿈 가운데 일 같구나"라는 능엄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그 때를 생각하며 한그루의 향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지금도 백범당 옆에 푸르게 자라고 있다.
나는 이 서방과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따났다.(중략) 마곡사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 었다.
산에 단풍이 벌써 누릇불긋하여(중략) 감회를 갖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있어서 풍진에 더러워진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 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온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것 같이 들린다.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당 전경
마곡사 조사전(祖師殿)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불전(佛殿)으로 다른 불전과는
달리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조상을 모시는 유교의 사당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불전이다
보통은 현판을 조사당(祖師堂)이라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마곡사에서는 불전의 의미가 강한
전(殿)이라는 이름을 붙혀 놓았다
조사전에는 개산조로 추앙받는 자장율사, 마곡사를 중건한 범일국사(梵日國師), 서산대사(西山大師)휴정(休靜)
사명대사(泗溟大師)유정(惟政), 기허(騎虛) 대화상 영규(靈圭), 금호당(錦湖堂) 약효(若效)스님, 도선국사(道詵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 금파당 묘화(錦波堂 妙華), 경허(鏡虛) 대선사, 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
용음당 법천(法泉) 대선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조사전 내부의 모습
마곡사 대광보전(앞)과 대웅보전
마곡사의 가람배치는 좀 특이한데 마곡사의 주불전인 대광보전이 앞에 있고 그 뒤에
대웅보전이 있다...흔히들 사찰에서는 대웅보전이 중심 전각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대광보전이 주불전(主佛殿)을 하고 있다.
대광보전을 참배하려고 하는데 오늘이 동지라서 동지법회가 있는 모양이다
마곡사 주지이신 원경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려고 법당에 들어가시는데 인사를 올린다
대광보전을 참배를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곳으로 향한다
대광보전 옆에있는 쪽문 안쪽에는 고방과 템플스테이관으로 쓰이는 화엄전이 쓰인다.
고방에서 바라본 굴뚝과 대웅보전, 대광보전의 모습
굴뚝의 모습이 조금 특이한데 조선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옹기를 구웠다고 하는데 그 때의 옹기가마 굴뚝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마곡사 고방(庫房:충청남도 문화재 제135호)
심검당 북쪽 대광보전 동쪽에 있는 중층 창고 건물로 창고를 중층으로 건립한 것은 습기나
곤충으로부터 곡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통도사에서도 곡루(穀樓)라 불리는
유사한 중층 창고가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장방형이며, 아랫쪽은 흙바닥이고, 윗쪽에는 마루를 깔았다.
아랫쪽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창방(昌枋)을 돌리고 마루 귀틀을 얹어 위 층이
기둥을 받치고 있으며 윗층의 기둥은 아랫층과는 달리 내모진 기둥으로 처리하였으며
아래층 벽체의 재료의 판장문과 판재이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과 윗층을 직접 연결하지 않고 밖에서 계단을 이용하여 출입토록 하였다.
그리고 통나무를 그대로 다듬어 만든 계단을 놓았는데, 계단에 사용된 목재를 다듬은 수법이
매우 고식이고 독특하다.
고방은 창고건물을 뜻하는데 마곡사의 고방은 ‘一’자형 평면이지만 심검당
동측에 위치하여 안마당을 막고 있어 심검당과 함께 보면 ‘口’자집 배치가 된다.
마치 규모가 큰 조선시대 양반집 같은 모습이다
고방은 심검당 북쪽에 있는 2층으로 된 창고이며,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방 위층에는 조선시대 문신인 포저 조익과 그의 셋째아들인 송곡 조복양의 문집 목판인 포저유저 및 송곡문집 판각 등이 보관되어 있다.
고방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이층건물로 불전에 비해서 건축양식이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건물틈새로 내부에 보관하고 있는 목판들이 약간씩 보인다.
나무를 깎아 만든 2층으로 오르른 계단이 투박스럽지만 멋스럽게 느껴진다.
대웅전 가는길에서 만난 일곽(一廓)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801호)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효종2년(1651년)에 각순대사(覺淳大師)와
공주목사 이주연(李奏淵)이 다시 지은 것으로 대광보전 뒷쪽 언덕을 깍아내려 좁은 대지에 꽉 들어차 있어
다소 협소한 느낌을 주지만 정면 5칸, 측면 4칸의 아랫층과 정면 3칸, 측면 3칸의 윗층으로 이루어진 중층 건물이다
인근에 있는 부여 무량사 극락전처럼 윗층의 툇간 한 칸을 체감한 온칸물림 방식으로 처리되었으나 위,아랫층의
체감률이 지나치게 크고 건물 규모에 비해 대지가 협소하여 원래부터 중층 건물로 축조하였는지 의문시 된다
재건 당시에는 대웅전의 용도가 아니라 경전(經典)을 보관하는 대장전(大藏殿)이었다고 한다
건물 내부는 위 아래층이 개방된 통풍 구조이지만 중층 건물의 일반 법식과 다르게 처리했다.
온칸물림 방식의 중층 건물에서는 아래층 고주가 윗층까지 연결되어 윗층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웅보전 측면에서는 아래층 기둥위에 멍에창방(기둥 사이에 걸쳐되는 수평 보강재)을 놓아
윗층 기둥을 지탱하는 방식으로 결구하였다.
팔작지붕에서 정면과 측면에 협칸을 만들 때에는 중심의 칸이 설정하는 것이 가구를 구성하는데
유리하나 대웅보전에서는 정면과 측면 협칸의 길이가 서로 다른데 그 결과 윗층 추녀가 45도 방향에서
벗어나므로 자연히 추녀를 받치는 기둥을 받치는 활주(活柱)는 아랫층 추녀 마루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게 된다.
공포는 위아래층 모두 내외 3출목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공포는 짤막한 사각의
나무토막을 십자로 교차시킨 것이 기본 단위인데, 이때 좌우에 있는것을 첨차(檐遮),
앞뒤 방향에 있는 것을 살미(山彌)라고 한다
마곡사 대웅보전의 살미에는 연꽃 새김을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방식이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다포계 공포에서는 점차 바닥에 돋을 새김을 하지 않지만
대웅보전에서는 일부 점차 바닥에 돋을새김을 하는 등 조선 후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건물 내부의 위 아래층을 막지 않고 터 놓았으며, 온칸물림 방식으로 체감하여 내부 공간의수직 상승감을
더하고 있는데, 내부의 단청은 비교적 오랜 기법을 유지하고 있으나 외부의단청은 1985년에 새로 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편액의 글씨는 신라 33대 선덕여왕 때의 유명한 서성(書聖)이라 일컫는 김생(金生)의
친필이라고 하며 혹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대웅보전 주련
古不未生前(고불미생전) : 옛 부처님 나기 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 : 한 둥그런 것이 있었다.(의젓한 일원상)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 :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 : 어찌 가섭이 전하리
本來非조白(본래비조백) : 본래 검거나 희지도 않으며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느리라
대웅보전 혹은 대웅전은 법화경(法華經)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며 부처님이 주석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마곡사 대웅전은 1785년에서 1788년에 중수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보처로 약사여래,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목조삼세불(木造三世佛: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측에 서방세계 아미타부처님, 우측에 동방의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목불(木佛)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 하는데 목불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마곡사 대웅보전 불상 뒷쪽의 후불탱화
대웅보전내의 각각의 불상 뒷쪽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는데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라고 한다.
삼세불회도는 모두 비단위에 채색되어 있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중심으로 좌측에 미타회상도
(彌陀會上圖)와 우측에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를 배치하였다.
삼세불회도는 중앙에 본존불을 두고 좌우에 보살(菩薩)과 신중(神衆)이 배치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웅보전 마당에서 바라본 마곡사의 모습
마곡사대광보전(麻谷寺大光寶殿:보물 제802호)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대광보전은 뒤편에 위치한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중심 불전이다.
1782년 발생한 대화재로 불타버렸지만 1785년 재건되었다. 재건 내용은 내부에 걸려 있는
「충청우도공주판지서령태화산마곡사대광보전중창기(忠淸右道公州判地西嶺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
를 통해 알 수 있다는데 높이 약 1m의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 건물이며, 막돌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는데 정면의 각 칸 간격은 모두 같고
측면 가운데 칸의 간격과도 같다.
그 결과 공간포도 정면의 5칸과 측면 가운데 칸은 2구씩, 측면 전후퇴칸은 1구씩 배열했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內四出目)·외3출목(外三出目)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부 살미첨차는 정면과
측면이 연봉을 조각한 앙서형 살미 3개와 수서형 살미를 포개 놓은 형식인 반면 내부 살미는 사선 방향으로
연속해 올라가는 연봉형으로 천정부를 화려하게 떠받치고 있으며, 배면의 살미는 쇠서를 수직으로 자른
교두형(翹頭形)으로, 정면과 다른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모양을 조각한 안초공이 결구되어 있다.
이밖에 주심선상에 소첨차와 대첨차가 놓일 자리에 평주상부 주두끼리 연결하는 긴 장혀 같은 부재인 ‘주장첨차’가
구성되어 있는데 가구(架構)는 2고주 5량 구성이나, 고주가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보와 결구되는 방식도
각 칸마다 다르다. 향좌측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기둥 위쪽에만 가장 큰 대들보를 건너질러 놓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전면 평주와 고주 사이에만 가설하거나 불단이 있는 후불벽 고주에서는 앞뒤로 퇴량만을 걸고 대들보를 쓰지 않았다.
창호는 정면에 삼분합 꽃살문, 좌우측면에 띠살창호, 배면의 중앙과 좌우에 판문을 설치했다.
천장은 2단의 우물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맨 좌측(서쪽) 고주열에 기대어 동향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을 연화대좌 위에 봉안하고 겹아자형(亞字形) 천개를 천정에 가설하였다.
후불벽 배면에는 수월관음 형식의 백의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마룻바닥은 우물마루 위에 갈참나무로 만든 자리를 깔아놓았고, 단청은 모로단청(毛老丹靑 : 부재의 끝 부분에만
그린 단청)으로 대량(大樑)에 용을 그렸고, 후불벽에는 보살상을 그렸다.
대광보전(大光寶殿) 편액
조선시대 영·정조시대 시문서화(詩文書畵) 사절(四絶)로 이름을 날렸던
예원의 총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글씨이다.
건물 내부에 들어선 기둥렬의 위치에 따라 대들보의 처리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즉 불단 전면의 2열은 고주를 생략하거나 1칸을 두어 대들보를 걸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불단 전면에 넓은 공간을 형성하였다.
제멋대로 휜 부재를 대들보를 사용하고 짧은 부재를 이어 내부 고주로 사용한 점 등으로
보아 당시의 목재 수급 사정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광보전에서는 기둥을 적절히 생략하는 감주법(減柱法)과 자연스럽게 휜 만곡재(灣曲材)를
사용하여 내부가 오히려 생동감 있고 변화있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대광보전 비로자나불
일반적인 불전(佛殿)에서는 불상이 중앙에서 앞쪽을 바라보도록 봉안되어 있으나
대광보전에서는 건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도록 봉안되었다.
그 결과 불단 앞쪽으로 법회등을 열기에 충분히 넓은 장소가 확보되며, 깊이감 있는 내부
공간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면 구성의 예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불갑사 대웅전이 그렇다.
비로자나불 위에는 다포계 건물을 모방한 쌍아자형(雙亞字形)의 닫집(궁궐의 법전이나 법당의
불좌위에 장식을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닫집은 빈틈없이 꽉 짜인 공포와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 기둥 사이를 장식한 돋을새김(낙양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 하였고, 천정은 다포계 불전의 격식에 맞게 우물반자를 사용하였고
내진을 주변보다 한 단 높은 층급 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처럼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방식인데이곳에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어 드문 예를 보이고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선물받은
인도의 향단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는 하지만 양식으로 보아서는
인후한 표정과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후기의 불상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마곡사가 소실되었을 때 목불이 온전할 리가 없을 터인데 아마 창건때의
모셨던 불상의에 관했던 전설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으로 오른쪽 손가락 끝으로 왼쪽 손가락 끝을 덮어 누르고 있는
독특한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부처님, 왼손은 중생을 나타낸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비로자불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는데 1788년에 조성되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10대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광보전 삿자리
대광보전 바닥에는 다른 불전에서는 보기 힘든 참나무 껍질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앉은뱅이가 불구(不具)를 고치려고 부처님께 백일 기도를 올리려고
찾아왔다가기도를 하는 백일동안 법당 바닥에 깔 삿자리를 짜겠다고 자청하였다고 한다
백일기도도 끝나고 삿자리도 완성되 부처님께 절을 하고 돌아 나오는데 자신도 모르게
걸어 나왔다고 한다
대광보전 백의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벽면을 가득 채우는 이 관세음보살상은 고려 말기에 성행했던 수월관음도 형식이
조선 초기에 후불벽에 그려진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한 다리는 내리고 다른
한 다리는 다른 다리에 포개 앉은 반가부좌 자세이다. 오른쪽 옆의 선재동자가
검소한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청조(靑鳥)를 바치고 있다
순조로운 출산과 어린아이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는 백의관음(白衣觀音).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나는데, 흰 옷을 걸치고 있는 백의관음이 그 중 하나로 백의관음신앙은 인도에서 발생했다.
중국의 수월관음(수월관음)이 형성되기 이전에 성립됐으나, 당나라 말부터 수묵화의 발달과 선종의 융성에
딸 수월관음상에 흰옷을 입힘으로써 두 신앙의 융합이 이뤄졌다.
이를 벽화나 탱화 등 불교미술로 표현한 것이 ‘백의관음도’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에 그려져 있는 백의관음도 벽화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마곡사 백의관음도 벽화는 마곡사 벽화를 대표할만한 수작으로 꼽힌다
마곡사 대광보전에는 외부 남측면 포벽과 내부 서측면 후불벽에 2점의 백의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외부포벽에 그려진 백의관음은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물결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몸을 옆으로
기울여 화면 오른쪽에 합장해 있는 남순동자를 굽어보고 있다. 또 두 손은 앞으로 모았는데 왼손에
정병(淨甁)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감로수가 쏟아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서측면 후불벽에 있는 백의관음도는 고주 사이에 한지를 여러 겹 겹쳐 발라 후불벽을 조성해
일반 화폭에 그린 것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관음보살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상 위의 기암괴석에
앉아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백색의 장포(長袍)를 입고 정면을 향해 반가좌를 한 모습이다,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으며 상호는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에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했다. 양손은 반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고,
맨발인 상태의 왼쪽 발은 홍련의 청록색 연밥을 밟고 있다.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긴 머리칼이 양쪽으로 3갈래씩 드리워져 있으며, 입상의 화불(化佛)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瓔珞)으로 장식했다. 옷자락의 주름을 비롯해 연꽃의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하게 그렸으며 또한 보살의 양쪽 반석위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 배례하는 남순동자가 화면
우측에 버들가지가 꽂힌 흑색의 정병이 좌측에 그렸다. 배경을 이루는 부분은 모두 먹으로 표현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암벽의 세밀한 단층과 명암표현에서부터 굽이치는 물결과 포말, 우측상단에 표현된 대나무 잎 등 섬세한 묘사는
벽화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마곡사는 불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승들을 많이 배출하여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였다.
금호(錦湖)-보응(普應)-일섭(日燮)으로 이어지는 화승의 계보를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화승들을
추모하는 불모다례제가 매년 행해지고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 마당에서
마곡사 순례를 마치고 공양간으로 향하는데 조금 있다가 점심공양을 해야 하는데 웬 공양간?
오늘이 동지라서 팥죽맛을 보고 가잔다... 공양간에서 비구니 스님이 팥죽을 퍼주는데
스님에게 전 나이를 먹기 싫으니 새알을 빼주셔요 하니까...그렇게는 안된단다
마곡사 요사의 모습
마곡사를 뒤돌아서 저두삼배의 예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마곡사에서 일주문까지 15분정도 걸어내려와서 주차장앞 식당에서 점심공양을 마치고
이곳에서 1시간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다음 순례지인 무량사로 향한다
무량사 가람배치도
무량사 입구에서 만난 감나무
무량사(無量寺) 일주문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옛 문헌에는 홍산 무량사라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무량사가 위치한 지역이 행정구역으로 부여군 외산면에
해당되어 외산 무량사라 불리고 있는데 절에 대한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초기에 개창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5층탑(보물 제185호)·석등(보물 제233호)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당간지주와 김시습의 부도가 남아 있다.
무량사 현판
'萬壽山無量寺 '는 무량은 셀수 없다는 말로 목숨도 지혜도 셀 수 없는 극락,
극락점토를 지향하며 어두운 곳을 한없이 밝히며 여한이 없다는 뜻이다.
무량사 편액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측 상단에 한반도 지형의 두인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차우 김찬균의 글씨 일체유심조( 一切維心造 )가 적혀있다.
'문을 들어서면서 어둠에서 밝고 환한 희망을 상징하는 내용이다.
무량사 일주문 천정의 모습
일주문의 기둥은 싸리나무라고 하는데 저렇게 큰 나무가 있을까 언뜻 이해가 잘 안된다.
배흘림 기둥인데 배흘림 기둥이란 원형기둥 중에서 기둥의 허리부분을 가장 직경이 크게 하고
기둥 머리와 기둥 뿌리로 갈수록 직경을 줄인 항아리 모양의 기둥을 배흘림 기둥이라고 한다.
이것은 큰 건물에서 기둥의 길이가 길게 되면 기둥의 중앙부가 얇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며,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서 사용된 수법이라고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다시 뒤돌아보면 광명문이라 적혀있다
무량(無量)이란 무엇인가?
미타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세계의 부처님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光明과 수명(壽命)이 한량없어 무엇으로도 셀 수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이 곳 무량사(無量寺)는 극락정토(極樂淨土)로 가기를 희망하는 모든 사대부중들이 하나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공유하는 절 집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덕해(德海)대화상 공적비
활불성해상인공덕비(좌)와 비구니정혜원 토지헌납 기념비(우)
무량사 가는 길
무량사 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높이 2.84m로 무량사의 천왕문(天王門) 앞 동편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는 앞뒤로 2개의 판석을 깎아 맞추어 대석을 마련하고, 그 사이에는 높이 26㎝
정도의 간좌(竿座)를 돋우고 그 양 옆으로 너비 45㎝ 가량의 지주를 세웠다
또한 간좌의 중앙에는 직경 20㎝ 정도의 홈을 팠고 그 주변은 테를 둘러 약간 돋우어 원좌형을 나타냈다.
당간지주는 각각 앞뒷면의 주변을 따라 돋을띠를 새겼으며 양 외즉면 중앙부에도 세로로 길게 돌대를 나타내었다
뿐만 아니라 상단은 둥글게 모깎이를 하면서 한 차례 굴곡을 주어 당간지주 전체를 장식적으로 꾸미고 있다.
한편, 양 지주의 내측면에는 상하 두 곳에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홈이 나 있다
전체적으로 이 당간지주는 거의 완형을 오늘날까지 보전하고 있다.
신라의 당간지주에 비하여 다소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서
보기 드문 조형미와 장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무량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은 이곳에서 순례객을 맞이하는데 이들은 그 길을 지키면서 힘겨워하는
중생들에게 다시 한번 정진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번뇌를
떨쳐내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청정도량인 사찰을 잡스런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신성한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금강역사가 수호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천왕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만물을 소생시키며
복락을 나누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방위에 따라 청, 백, 적, 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사천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서른 세 개의 하늘 중 욕계 여섯 번째 하늘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이다
다문천왕(多聞天王:좌)과 지국천왕(持國天王:우)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수정타에서 생활. 암측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 몸은 흑색, 왼손엔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비파줄을 튕기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쪽을 수호하며 안민의 신으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에 있는 천궁에 삶.
선한이에게는 복을 악한자에게는 벌을... 온몸은 푸른빛이고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주먹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올려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증장천왕(增長天王:좌)과 광목천왕(廣木天王:우)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을 수호하며 수미산 중턱의 유리타에서 생활하는데 자신의 위덕을 증장시켜
만물을 소생 시키는 덕을 베풀겠다는 신으로 몸은 붉은빛을 띠는 적육색. 노한 눈, 오른손엔 용을 움켜잡고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광목천왕(廣木天王)은 서쪽을 수호하며 백은타에서 생활을 하며 죄인에게 벌을 내려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을 일으키도록... 몸은 백색.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삼지창을
들고 왼손에 보탑을 들고 있으며, 입은 벌린 모습에 부릅뜬 눈이 특징이다
천왕문을 지나 무량사 마당에 들어서니 극락보전과 오층석탑 그리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1997년인지 98년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40대에 이곳을 왔으니 20년은 넘은듯 하다
무량사 극락전(無量寺極樂殿:보물 제356호)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교 건물로 사찰의 전각 중에서는 보기 드문
2층 건물로, 1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2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바깥쪽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쪽은 위아래층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통하여 있고 건물의 앞면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살문을 달았다.
곧 가운데의 정간(正間)에는 4짝의 살문을 달았는데, 그 좌우의 협간(夾間)과 귀퉁이의 툇간(退間)에는
각각 2짝과 1짝씩을 달았으며 양쪽 옆면의 앞쪽 1칸과 뒷면 가운데칸에는 출입문이 나 있으며, 그 밖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널빤지를 세워 널벽[板壁]을 쳤다.
건물 안은 4면에 너비 1칸의 바깥둘레칸을 두고서, 그 안쪽으로 3칸×2칸인 평면을 구분하여 고주(高柱)를 둘러 세웠다.
이 구획의 가운데 뒤쪽에는 제법 높은 불단(佛壇)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모셨다. 1층의 고주는 2층으로 길게 이어져 2층의 네 귀퉁이 기둥이 되었다. 이 기둥 사이는 판벽으로 막아 아주
낮은 벽면을 만들었는데, 벽면에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광창(光窓)이 설치되었다.
건물의 공포는 여느 다포(多包)계 건물처럼 각 기둥의 머리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배열되어 있다.
공포를 짜 맞춘 포작(包作)의 수는 1층이 안팎 모두 3출목(三出目)인 데에 반해 2층은 안팎 4출목이어서
출목수에 변화를 주었다. 특히 기둥 위의 쇠서[牛舌]가 풀꽃 모양의 초화형(草花形)이어서 특이하다.
이러한 모습은 내부의 살미첨차가 1장의 장식판처럼 연결되어 구름 모양을 새긴 운공(雲工)으로 처리된 점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에 성행하였던 가구(架構)의 장식화 경향을 잘 보여준다.
천장에는 종보[宗樑] 위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아래쪽의 대들보에서 옆면 기둥까지는 대들보와 직각
방향으로 충량(衝樑)을 두었는데, 끝부분에는 용머리 모양이 조각되었다.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치않은 2층의 불전(佛殿)으로 무량사의 중심 전각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윗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4칸이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윗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 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빛을 받아 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을 막아 놓았다.
무량사에는 국가의 보물로 지정된 것이 7점이나 있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석등(보물 제233호),
미륵불 괘불탱(보물 제1265호)이 있는데 한 곳에 극락전과 오층석당, 석등이
있는 경우는 드물며, 또 다른 보물은 아미타불 삼존상(보물 제1565호),
삼전패(보물 제1860호), 김시습 영정(보물 제1497호)이 있다.
극락전은 무사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남향하여 세운 2층집인데 밖으로는 2층이고 안으로는 통층이 되었다.
아래측 평면은 평주와 고주로 구성되고 2층은 9본의 고주와 1본의 평주로 짜여져 있다.
아래층의 평주 중 우주들은 평주보다 약 5푼의 비율로 비대해지고 5치정도의 귀솟음이 있는데 수평은
도리목에서 잡도록 되어 있으며 기둥은 4.85m나 되는 높은 것을 사용하였고, 앞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에는 앞 한칸과 후면 중앙칸에 따로 문짝을 달고 나머지는 모두 회벽을 쳤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 4면에 1칸통의 외둘레 칸을 두고 그 안쪽에 3칸×2칸의 평면을 구획하여
고주를 돌려 세웠으며 불단은 이 중앙부분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여 크게 만들고, 그 위에 아미타불(높이 5.46m,
가슴둘레 7.27m)을 주존으로 하고, 좌측에 관음보살(높이 4.85m, 가슴둘레 5.46m), 우측에 대세지보살(높이 4.85m,
가슴 둘레 5.46m)의 삼존을 토불로 봉안하였다. 우리나라 불교사우너의 토불로는 규모가 큰 존상이다.
대량의 위 멍에창방 아래로 1층 퇴간의 사천장이 있고 멍에창방 위로는 중방과 토벽을 겹쳐 짜올렸으며
2층 창방 밑으로는 교창을 내어 실내가 밝도록 하였다. 2층 충량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고 충량보와 천정이
맞붙은 부분에는 소로를 받친 첨차가 있는 공포 양식물을 끼었다. 2층 보의 첨정 접속부분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무량사 약지에 의하면 1679년 중수가 있었고 1931년에는 동초화상이 대소세철로 서로 끊어 매달도록 보강공사를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건물의 양식은 조선 중기적인 수법이 대부분이다. 무량사는 임진왜란때 불타고, 인조때
재건되었는데 절에는 인조 14년(서기 1636년)에 주조된 범종과 불화가 전하여 진다. 이 극락전을 개축하고
삼존불을 개금하는 불사시 아미타불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연기지(綠記誌)를 비롯한 불경등이 있었다.
연기지는 숭정 16년(서기 1643년)의 연대기명이 있어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무량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無量寺 塑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보물 제1565호)
무량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1633)의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으로 아미타불 6.6m,
관음보살 5.8m, 대세지보살 5.8m의 높이이며 중층건물인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흙으로 빚은
거대한 크기의 소조삼존좌상이다. 본존상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존[향우] 관음보살과
우존[향좌] 대세지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형식이다.
17세기 전반기 유행한 대형 소조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6년 7월 18일 복장품(腹藏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의해 조성 연대와 조성 연유, 조성자가 밝혀졌다.
조성 연대는 1633년(인조 11) 6월인데,조성 연유는 특별한 경위를 밝히지는 않고 다만 불교신앙적 측면만 밝히고 있다.
끝부분에 ‘주상삼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數萬歲)’라 되어 있는데, 이러한 문구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상투적인 문구로
왕실(王室)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유교적 충효사상과 결합된 당시 불교를 대변해 주고 있다.
불상 조성에 참여한 인물은 모두 191명이 참여하였다. 시주자(施主者)는 대표인 이효갑(李孝甲)을 비롯한
124명이 참여하여 불상 조성에 많은 인물이 재원(財源)을 담당하였으며, 이효갑이 관직이
없다는 점을 통해 시주자가 대부분 그 지방의 유지이거나 일반 백성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조선 초에 주로 왕실이나 중앙관료에 의해 불상이 조성되었던 점과는 다른 현상이다.
작가는 대화사(大畵師)인 현진(玄眞), 증명(證明)인 두인(斗仁), 차화사(次畵師)인 연묵(衍默)과
회묵(懷黙)으로 대형부상에 참여하는 작가군에 비하여 매우 적은 편이다.
작가군은 모두 승려로 이는 조선후기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진은 1633년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불좌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긴 당대 최고의 작가로 추정된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전 내 수미단을 앞으로 하고 바닥에 봉안된 불상으로 금산사 소조미륵삼존불입상과
동일하게 봉안되어 있다. 이는 대형 불상의 묵중한 무게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좌의
뒷부분이 후불벽(後佛壁)과 연결되어 있는데,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체구 네모난 형태로 장중하고
괴체적이지만 부드럽고 질박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본존상의 머리 부분은 상투를 나타내는 육계(肉髻)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구형(半球形)으로 정상계주(頂上髻珠)는 원통형으로 두드러지고, 중앙계주(中央髻珠)는
반달형으로 넓고 크게 표현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은 높은 상투에 보관으로 쓰고 있으며, 어깨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매우 크며, 특히 눈두덩이 두툼하고 인중이 넓다.
이에 반해 백호는 돋을새김으로 아주 작다. 삼도는 목과 가슴이 나뉘는
부분에 치우쳐 음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공통된 특징이다.
상체는 건장한 편이지만 어깨가 경직되고 평판적이며 양감은 거의 없다.
손은 투박하지만 경직된 상체에 비하여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신체적 특징은 1619년 봉서사 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 1633년 수종사탑
금동불좌상군, 1641년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삼세불좌상 등과 유사하다.
수인(手印)은 모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결하고 있어 아미타삼존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협시보살상 수인은 본존을 중심으로 대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량사 극락전의 천정
극락정토(極樂淨土)란 불교에서 멀리 서쪽에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이상향(理想鄕)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 즉,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도 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 .. "여기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를 지나서 하나의 세계가 있으니,
그 이름을 극락이라고 한다"고 한데서 나온 말로, 곧 극락세계를 말한다.
정토(淨土)는 넓은 의미에서 "부처의 세계"를 말한다. 중생들의 세계는 번뇌와 더러움에 가득한
예토(濊土)인데 반하여 부처의 세계는 깨끗하고 번뇌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정토라고 한다.
다른 말로 청정토, 청정불찰(淸淨佛刹), 정계(淨界), 佛刹, 불국(佛國)이라고도 한다.
淨土에 대하여는 "실제로 이 세계를 떠난 곳에 부처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와
"마음의 청정함"이 곧 정토라는 견해가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대표적인 정토인데,
이를 묘락(妙樂), 안락(安樂), 안양(安養)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의 공포
극락전 옆면의 모습
무량사 석등(石燈:보물 제233호)
무량사 극락전 앞뜰에 있는 팔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주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이 석등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상부구조가 팔각으로 꾸며진 것으로 높이가 293cm이다.
아래 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그 받침돌은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 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중 8면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은 창이 뚫려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 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주며꼭대기에는 자그만한 보주(寶珠)가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래, 위받침돌의 연꽃조각은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 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각 부분이 형식적인 흐른감이 있다...조성된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 사이닌 10세기경을 추정된다
무량사 극락전과 오층석탑의 모습
석등과 탑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이지만, 얇은 석등의 지붕돌, 처마
선을 살짝 치켜세운 석탑에는 백제의 색채가 그대로 묻어난다.
무량사 오층석탑(無量寺五層石塔:보물 제185호)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높이 7.5m. 2층기단 위에 서 있는
오층석탑으로 각 부재의 결구(結構)에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1층기단은 땅속에 묻혀 있어
자세한 구조와 양식을 밝힐 수 없으나 면석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층 갑석은 12매로 조성되었으며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조각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다른 돌로 다듬은 3단의 기단받침이 있다.
2단의 기단받침 중 1단과 3단받침은 낮은 받침이며, 2층받침은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높고 광대한 호형(弧形 : 활모양)받침을 각출하였다.
이 탑에서와 같이 각(角)·호(弧)·각의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을 다른 양식으로 구비한
예는 다른 곳에도 볼 수 있지만, 이처럼 호형이 큰 것은 바로 이 탑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층기단의 결구수법에서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감은사지동서탑(感恩寺址東西塔)의 예와 같이 4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비롯하여 각 면
중앙에 있는 일주식(一柱式)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 우주와 탱주 사이를 메운 면석들은 모두 별개의
석재로 결구하였고, 갑석은 8매로서 기단을 마감하였는데 밑에는 기단받침과 같은 3단의 갑석받침인
부연을 조각하였다
1층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4우주와 면석은 역시 다른 석재로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너비에 비하여 낮아서 마치 목조건물의 지붕모양과 같이 처마곡선이 우각(隅角)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나타내고 있는데, 받침과 옥개부는 각각 4매씩으로 구성되었으며, 추녀 밑으로 한 줄의 홈이 돌려 있고
그 안에 받침을 삽입할 수 있도록 패어 있다. 옥개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극히 약하다.
2층 이상도 거의 같은 수법으로 탑신과 옥개석을 장식하였는데, 전체적인 체감비율은 우아하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일부를 남기고 있으며, 노반은 탑신부의 형식을 따라 신부에 4우주를 갖추고
별석의 노반 갑석으로 마감하였다.갑석 밑부분에는 낙수가 탑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절수구(切水溝)를 마련하였으며, 윗면에는 반구형의 복발(覆鉢)과 원형의 앙화(仰花) 등으로 장식하였다
1971년에 이 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5층탑신 내부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 높이 26㎝, 너비
33.27㎝)가 발견되었는데, 청동합(靑銅盒) 속에 수정병·다라니경(陀羅泥經)·자단목(紫壇木)·
방분향(芳粉香) 등이 들어 있었다.
또, 제4층 탑신 속에서는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다
이 탑의 전체적인 균형과 양식은 부근에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어서, 중부지방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석탑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옥개석이 넓고, 상층 기단받침의 양식을 비롯하여 기단의 면석부재들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된 점은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오층석탑, 또는 감은사지석탑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옛 수법이며,
옥개석의 추녀곡선 처마 밑에 설치된 절수구는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법이다. 따라서, 이 탑의 조성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무량사 명부전(冥府殿: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76호)
무량사에는 조선시대 지장보살상 및 시왕상 일괄이 봉안되어 있는데 무량사 명부전에는 중앙 불단 위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그 측면에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의 삼존상이 있고
시왕(十王)이 각각 좌우에 5왕씩 대칭으로 모셔져 있다. 그 옆으로 판관(判官)과 사자(使者), 인왕(仁王) 등이 있다.
각기 다양한 모양의 존상들은 색채가 화려하고 옷에 새겨진 문양 등이 섬세하며 각기 17∼18세기에 유행했던
시대적 조각양식과 조선후기에 성행했던 명부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바, 무량사의 불교유물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부전의 모든 존상들을 잘 갖추고 있다.
무량사 명부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창건되었으며, 전각 안에 모셔진 지장보살 및
시왕상 일괄은 종교적·학술적인 면과 불교미술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명부전의 시왕상(十王象)
저승 세계의 한 가운데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를 하고 있다.
좌.우로는 원유관에 문관복을 입고 홀을 든 모습의 시왕(十王)이 홀수(1,3,5,7,9) 대왕과
짝수(2,4,6,8,10) 대왕이 배치되어 있으며, 시왕상의 양쪽 끝에는 악귀를 쫒는 인왕상이 있다.
우화궁(雨花宮)극락전 좌측에 있는데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는 건물이다
우화(雨花)란 꽃비를 말하는데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흰 연꽃,
붉은 연꽃이 꽃비가 되어 내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부속 전각 대부분은 극락전 서쪽 완만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영산전과 영정각, 원통전이 있으며이들 전각은 극락전을 바라보고 있다.
계곡 건너에 있는 삼성각(三聖閣:좌)과 청한당(淸閒堂:우)의 모습
좌측에 단청이 되어 있는 건물이 산신각이고, 우측에 단청이 없는 정갈한 건물이
청한당인데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머물다가 이곳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삼성각은 1931년에 건립한 3칸짜리 건물로 안에는 불단을 두고 각 칸마다
산신탱, 칠성탱, 독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청안당 현판
청한당는 선방 겸 손님방으로 세 칸짜리 새집인데 특별할 것 없는 듯 하지만 현판을 보면 한(閒)자를
뒤집어서 적혀있는데, 김시습의 호가 본래 청한자(淸寒子)인 것을 슬쩍 바꾸어 놓고 글자를 뒤집어
한가한 경지를 넘어 드러누운 형상으로 재치가 넘치는 글씨다.
영정각(影幀閣)
김시습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다.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한 점이 많았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뜻을 같이 하여 김종서·황보인 등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계유정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지향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과 다른 것이었다.
그결과 이 두 세력은 충돌하게 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변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많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유학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죽음을 당한 사람을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불렀다
살아서 절개를 지킨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을 가리키는 말인데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이곳 무량사에서 生을 마감했다고 한다
生爲一罪人(생위일죄인) : 살아서는 한 사람의 죄인 되고
死作窮鬼了(사작궁귀료) : 죽어서는 궁색한 귀신 되겠네.
更復騰虛名(갱부등허명) : 다시 헛된 이름 또 일어나니
反顧增憂惱(반고증우뇌) : 돌아보니 근심번뇌만 더하니
百歲標余壙(백세표여광) : 백년 후에 이내 무덤 표할 적에는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 꿈속에 죽은 늙은이라 그렇게만 쓸지어다.
庶幾得我心(서기득아심) : 행여나 내 마음 알아주어
千載知懷抱(천재지회포) : 천년 뒤 이내 회포 알아나 주소.
김시습의「我生」이라는 詩의 뒷부분중에서
김시습 초상화 (보물 제1497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코·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무량사 원통전(圓通殿)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부르는데 관세음보살의 공덕이 주원융통(周圓融通) 하다는 의미에서 원통전이라고 한다
관음상은 대개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양류관음(楊柳觀音圖)이나
해수관음(海水觀音) 또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모시기도 하는데 무량사 원통전은 천수관음이 모셔져 있다.
천수관음의 여러 손에 들려있는 다양한 도상들이 흥미롭다.
좌.우에 있는 도상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중생과 가장 친숙한 보살인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이 세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은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미륵불괘불탱(彌勒佛掛佛撑:보물 제1265호)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구씩의 화불을 그린 괘불인데,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치룰 때 예배를 드리는대상으로 법당 앞 뜰에 걸어 놓았던 대형 불교 그림을 말한다.
미륵불은 두 손으로 용화수(龍華樹 .. 석가모니가 成佛한 보리수) 나뭇가지를 받쳐 들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서있는 모습이다. 보관의 끝에는 6具의 불상이 있고 그 사이로는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등 59具의 얼굴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눈과 속눈썹, 도톰한 입술, 콧수염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옷에는 화려한 장식들이 달려 있다.
머리 光背와 몸광배가 그려져 있고, 몸 光背에는 연꽃과 모란 등의 무늬가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밖으로는
오색의 구름과 함께 배치된 작은 불상들이 마치 彌勒佛을 수호하고 있는 듯하다.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영축산(靈駕山)에서 석가가 설법하던 〈법화경〉의 영산회상을 상징하는 건물로
일명 팔상전이라고도 부르며,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평면을 하고 있다.
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종보를 동자주를 사용하여 결구하는 간략한 방식이다.
기단은 막돌을 6단 쌓은 위에 축조하였는데 자연석을 덤벙주초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형단면의 것이나 좌측면에는 방형단면, 우측면에는 원형단면의 것을 사용하였는데
크기는 다른 기둥에 비하여 매우 적다. 기둥 위에는 초익공을 사용하였는데 앙서 끝에 연화로
장식하였으며 보머리는 봉황두를 끼워놓았다. 벽면은 정면 어칸의 2짝 세살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장벽으로 마감하였다.
내부에는 뒷벽체에 붙여 ‘ㄱ자형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여래, 10대제자 중 대가섭(大迦葉)과 아나진(阿那律)을
협시하고 오백나한을 함께 봉안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지붕은 정면 겹처마, 후면 홑처마
형식으로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속건물 성격에 맞도록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측면에는 풍판을 두었다.
익공의 장식화된 형태로 보아 1872년 비구니 원열화상(元悅和尙)이 명부전과 함께 창건하였다는 기록과 일
치하는 19세기의 건물이다
영산전 뒷편에서 바라본 만수산의 모습
무량사 삼전패(三殿牌:보물 제1860호)...사진 캡쳐
부여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는 나무로 만든 전패 3기로, 규모는 높이 150㎝, 폭 53.5㎝이다.
1654년에 만들어진 삼전패는 머리, 몸체, 대좌의 삼단(三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체부는 대좌와
분리할 수 있으며, 몸체에는 직사각형의 명문곽을 만들어 불상의 명칭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나무대세지보살(南無大勢至菩薩)을 묵서(墨書)로 써 놓았다.
중심 문양은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며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꽉 채웠으며 모두
투각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약 35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국내 최대의 규모이며 조각기법이나
채색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예술성과 불교미술적, 사료적 가치가 있다
1654년에 철학, 천승, 도균이 제작한 것으로 “二層殿丹靑畢後而兼備三殿牌(이층전 단청을 마친 후
삼전패를 겸비하였다)”라는 묵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왕실의 안녕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형태는 전형적인
불패 형식을 갖추었으며, 사실성과 조각성이 뛰어난 용 조각, 황금색과 홍색 위주의 단청, 보란을 갖춘
삼단대좌 등 공예기술도 뛰어나 조선 17세기 불교 목공예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확한 제작 연대와 제작 장인들을 알려주는 묵서명이 있는 점과 규모가 큰 점 등에서 조선후기
불교목공예의 편년과 도상연구의 기준이 될 수 있어 의의가 크다. 특히 17세기 전․중반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불화승과 조각승이 공동작업을 한 점이 흥미롭다.
이렇듯 무량사 삼전패는 구조와 도상, 기술적, 조성기의 사료적 가치 등에서 중요한 유물이며 현존하는
삼전패 중 예술성과 전체 구조면에서 가장 뛰어나다.
무량사 범종각(梵鐘閣)
사방 1칸의 단칸 건물로 누각형이 아닌 단층 사모지붕 건물로 극락전 방향으로 현판이 걸려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기둥 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외1출목 공포를 짰는데 주간에는 간포 1구를 두었다.
가구는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놓고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대들보 위에 범종을 메달기 위에 보를 따로
걸쳐 놓았고,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를 구성하고 한식 기와를 올려 사모 지붕을 만들었다.
지붕 정상부에는 돌로 만든 절병통을 올랴 마감하였고, 기둥 사이는 개방되어 있으나 상부에 낙양을
드려 장식 하였다.
순례길에 시원한 甘露水 한 잔이 빠질소냐...
극락전을 배경으로...
극락전을 향해 선 채로 저두삼배(低頭三拜)를 올리고 절 마당을 나선다
절집을 나서면서 만난 돌탑
올 한해는 참으로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무사히 보낸 걸 감사 드리며
내년 3월에 도반들과 다시 만날것을 기원하며 戊戌年 마지막 순례 일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