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구간- 박달령에서 도래기재까지(역산행)
아프지 말고 살아야제
☞ 산행일자: 2023년 03월 26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5.7km + 날머리 6.4km / 5시간 40분 소요(시간 의미없음)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 산악회 따라가서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도래기재-안부-무명봉-쉼터-무명봉-암봉-무명봉-안부-무명봉
봉화 우구치 철쭉-무명봉-옥석산(옥돌봉)-암봉-내성(문수)지맥 분기봉
무명봉-무명봉-무명봉-안부-암봉-991.1m봉-안부-무명봉-안부-쉼터
무명봉-1,006.5m봉-박달령-오전약수-오전약수터 주차장-오전교
보부상 위령비-전망대-오전댐 쉼터-생달마을 버스 정류장
☞ 경북 봉화군 춘양면, 물야면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지난 2주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사무실 업무와 현장에서 인부들과 씨름을
하느라 체력이 완전히 방전이 되었는지 그로기 상태로 몰렸다가 급기야
금욜부터는 과로로 인한 감기 몸살에 도저히 더 버틸수가 없어서 몸져 누웠다,
병원에 실려가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토요일에 휴식을 취했지만 나이 탓인지
몸뚱아리의 회복이 느리다... 이번주에 만경 남 지맥(신산경표상:모악지맥)을
가려고 했는데 너무 바빠서 지난주에 갔다온 산행기도 마무리하지 못했고,
남은 구간의 공부도 전혀 하지 못해서 나설수도 없었다.
토요일에 다시 링겔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나니 조금 나은듯 하다싶어 산은
가야겠는데 지맥길은 공부를 하지않아 선뜻 나설수는 없어서 예전에
백두대간을 한 적이 있는 산악회에서 백두대간길을 나선다기에 따라 나서려고,
저녁 늦게 신청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또 몸뚱아리에 식은 땀이 나면서
열이나고, 가래에 피가 섞혀서 나오는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느낌상 산에를 갔다오면 나을 것 같아서 대충 베낭을 챙겨서
탑승지인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양재역에서 버스에 오르면서 감기약을 먹었더니만 몸뚱아리는 나른해지며서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정신없이 자다가 버스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서 깨어나보니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를 빠져 나와서 31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영월읍내를 지나서 사북, 고한으로 가는 길을 따르다가 석항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구절양장의 강원도의 산길인 내리계곡길을 따라서 도래기재에
도착하니 양재역에서 출발한 지 3시간 30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곳은 지난 2~3년간 이곳에 있는 여러개 지맥길을 걷기위해서 수도 없이 와봤던 길이다.
도래기재로 오는 길은 영월쪽으로 오면 거리상으로 조금 가까울지 모르지만
중앙고속도로를 타고오다가 풍기I.C를 빠져나와 영주, 봉화를 거쳐서 춘양에서
올라오면 길이 워낙 좋아서 2시간 반이면 떡을 치면서 오는 곳인데 1시간 이상은
더 걸린 셈이다.
도래기재(導驛峙:754.9m:10:37)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서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산행 들머리의 도래기재 안내판에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하며,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부족국가 시대에는 소라국이 있어 번창하였고, 조선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 도래기재
주변마을은 여관과 극장 등이 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재넘어 있는 우구치마을은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고
적혀있는데 영주,봉화의 윤승일님의 글은 금정으로 불리는 우구치는 금광이 열리면서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당시 캐낸 금이나 은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도래기재 아래에는 1925년
터널이 뚫렸다.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송아지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금광은 폐광된 지 오래고 금정수도 역시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라고 한다.
우구치리는 6.25동란 당시 국군과 북괴군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2019년 6월 15일 나홀로 내성지맥(신산경표상:문수지맥)을 시작할 때
왔으니 잠깐 사이에 세월이 흘러도 너무나 많이 흘러가 버렸구나.
버스에서 내리니 흐린 날씨지만 바람도 불지않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 산행하기 딱 좋은 날씨이건만 대한민국의 최오지중에 오지인
이곳도 미세먼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것 같다.
지난주에 걸었던 전주, 김제지역과는 비교가 안될만큼이지만 이곳 역시
미세먼지 탓에 주변이 흐릿하고, 추운 날씨 탓인지 주변의 山河들은
아직도 겨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래기재 도로옆에 있는 수준점
수준점(水準點)이란
측량의 3차원 위치결정에서 높이(z)에 해당하는 값의 기준이 되는 것은 표고의 기준이 되는
평균해수면으로, 이 수직 높이를 정확히 구해놓은 표석이 수준점인데, 이 수준점은 국가에서
법률로서 관리하는 중요한 국가기준점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국도와 도로를 따라 약 4km마다 1등 수준점을, 이를 기준으로
다시 2km마다 2등 수준점을 설치하였고, 이들 수준점은 인하공업전문대학 내에 있는
대한민국수준원점을 기준으로 하여 정밀수준측량을 실시하여 표고를 결정해 놓은 점이다.
이 수준점들에 대한 성과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고 있다.
이 수준점은 모든 수준측량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수준점을 이용하여 각종 건설공사,
하천의 이수와 치수 공사 등 높이를 필요로 하는 여러 분야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늘상 혼자걷는 것이 습관화가 된 탓인지 산악회를 따라오니 왠지 불편하다.
일행들은 단체 사진을 찍고, 곧바로 산행을 할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하다(10:45)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휀스에 걸어둔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그 사이에 선두로 올라서 산꾼들은 벌써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우측에는 산림유전보전구역의 습지대가 보이고 같이온 산꾼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
내 뒷쪽에서 따라오며 후미대장을 맡고있는 태양아우가 천천히 같이 가자고 하면서
내 뒷쪽에서 나와 보조를 맞추려는데, 왠지 모르게 불편하여 먼저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 친구를 쫒아 버리다시피 먼저 보내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오늘 산행구간인 도래기재에서 늦은목이 구간은 전통적인 陸山으로 대간길에서는
몇 안되는 편안한 길로, 도래기재에서 옥돌봉까지만 꾸준히 치고 오르면
그 이후부터는 완만한 등로라 나혼자 왔으면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가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으련만 산악회를 따라오면 하산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주할 생각이 없고,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걸어다가가 박달령에서 중탈할 계획이다.
태양아우의 배려를 정중하게 사양한 것은 걸음은 느리지만 볼 것 다 봐야하고,
사진 찍을 것 다 찍어야 하니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더 느려질 수 밖에 없는 건
自明한 일이고, 좌측 폐가없는 탓에 초반의 오르막길에 헉헉거리는 내 숨소리에
쪽팔리는 것 같아서 먼저 보내고나니 한결 맘이 편하다
태양 아우를 먼저 보내고 오르막길에 초반에 컨디션 차원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한 분이 따라온다...길을 비켜주고, 그 이후는 일행들과 조우할 일이 없었다.
도래기재에서 500m 지나는 지점에 예전에 없었던 구조 이정목을 만난다.
최근에 몸뚱아리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이번주에 산행을 포기하려 했는데
지난 둘째주에도 비가 온다는 예보로 인해 산행을 안 했더니만 1주일내내 힘이 들었다.
오늘의 날머리인 늦은목이까지는 못 가더라도 가는데까지 가보려고 한다
지난 2~3월 걸었던 남도지맥에서 느꼈던 봄기운은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전혀 느낄수가 없구나
능선에 올라서니 정통 대간길을 막아놓고 좌측으로 우회길을 만들어 놨다.
우회길을 만들어 논 것은 자기들 사정이고 안전 로프 뒷쪽으로 올라간다
빡센 오르막을 올라서니...
대간꾼들의 흔적이 보이고...
우회했던 길과 다시 만난다.
안부(11:00)
겨울옷을 벗지않은 철쭉나무들의 도열을 받으며 철쭉터널 가운데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산행이나 일생살이나 시절을 잘타고나야 하는가 보다...철쭉이 필 즈음이면 꽃길을
걸을 수 있으련만, 시절이 맞질 않으니 이곳을 5번이나 걸으면서도 한번도 꽃길을
걷지 못하고 황량한 회색길을 걷는구나.
무명봉(11:04)
도래기재를 출발하여 1km를 지난 지점이라고 한다
쉼터(11:10)
쉼터에 있는 안내판
오늘에 걷는 대간길은 영주국유림 관리소가 “친절한 금자씨” 마냥 각종 이정표와
나무에도 산꾼들이 그 나무에 대한 이해를 하라는 뜻인지 팻말을 많이 걸어놨다.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옥석산) 가는 길에는 붉은 빛이 돌아 적송으로 불리는 금강송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경북의 시베리아'라고도 불렸으며, 옥돌봉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옥과 함께 자연금이 많이 있어 보상과 부상들이 수없이 다녔을 이곳 도래기재는 현대사에
또 다른 아픔을 묻어두고 있다.
쉼터를 지나는데 등로 주위에 있는 생강나무들의 꽃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래기재에서 고도를 150m정도를 높힌 지점이다
다시 고도를 높이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예전에 없던 통나무 계단을 만들어 놨다
무명봉(11:12)
이곳 주변에 예전에는 금강송군락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시절부터 대규모 벌채로 우수한 금강소나무들은 몇 그루 남지 않고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당시 벌채된 소나무가 40m가 넘고,
그루터기에 열 명 이상이 올라 앉아 밥을 먹었다고 하니 백두대간을 따라 생태계가 훼손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도래기재에서 옥돌봉까지 생각보다 그리 급경사는
아닐지라도 꾸준한 인내를 요구하는 아주 지루한 대간길이다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대간길은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암봉(11:18)
암봉을 우회하여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정표가 나오고 우측으로 옥돌봉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앞서가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그러던지
말던지 나는 볼 것 다보면서 내 페이스대로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
이곳도 영주국유림관리소 관할지역인지 지난해에 걸었던 저 아랫녁의 예천,
영주지역의 대간길처럼 조금 힘든곳은 어김없이 사면길을 만들어 놨다
무명봉(11:28)
안부(11:29)
잠시후에 오를 옥돌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
새로운 것을
찾아 낼 수 있다.
내 자신만이
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내 삶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법정스님의 잠언(箴言) 중에서
* 잠언(箴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훈계가 되는 짧은 말을 말한다
고도를 250여m 높인 지점을 통과한 다음에 힘들게 산행을 하는
범여를 배려함인지 잠깐동안에 편안한 길을 걷는다.
한동안 편안한 산행을 즐기다가...
다시 옥돌봉을 향하는 능선의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능선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는 억지춘양의 고을로 알려진 춘양면소재지가 흐릿하게 보인다
억지춘양의 유래는 해방전부터 영주에서 철암까지 영암선 철도를 개설도중 8.15해방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금의 방전삼거리 근방을 지나 녹동방면으로 90%이상 공사가 진행중 당시 춘양면
서벽리에 고향을 둔 자유당 시절 2.3.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원내 총무를 역임한 정문흠씨의 주장에
따라 춘양면소재지를 거치도록 공사계획이 변경되어 법전면 소지리와 춘양면 의양리를 잇는 터널
300m와 연이어 당시 철교 공사로서는 보기드문 높이 30.7m 길이 60m의 철구조 빔다리가 놓여지는 등
우여곡절 속에 억지로 공사가 추진되어 영동선(당시 영암선)이 춘양면 소재지를 돌아가게 됨으로써
억지 춘양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최오지중에 오지인 이곳도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인지 서해나 남부지역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미세먼지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산들이 보이지 않거나 흐릿하기만 하여 아쉽다.
이제는 맑은 날에 산에와서 깨끗한 仙景을 감상한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이게 다 인간들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생긴 부산물이겠지.
인간들의 편안함을 위해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연을 홰손한
因果應報의 댓가치고는 너무나 혹독한 느낌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미물 중생중에 인간만큼 잔인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미세먼지를 비롯한 각종 공해들은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한 부산물일진데...욕심을 버리고 양보하면 살면 해결될 문제이건만
갈수록 오만과 탐욕으로 인간사가 점철되니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구나
무명봉(11:36)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옥돌봉으로 향한다
키큰 갈참나무에는 수확시기를 놓쳐버린 겨우사리들이 많이 보인다
세월의 무게
통나무 계단을 올라서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철쭉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철쭉나무 주변에는 예전에 없었던 소화기를 비치한 방화장비함이 있고,
찰쭉나무에는 접근조차 못하게 한참 떨어져서 보라고 거리를 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봉화 우구치 철쭉(11:42)
보호수 철쭉나무 고유번호:제2006-1호
나이:550년 지정일 2006.5.25 / 높이5m 둘레105Cm
위치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1-1 / 영주국유림관리소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쭉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있어 보호수로
지정하여 지속적인 보호관리를 하고자 함. / 남부지방산림청장
세계 최대의 철쭉나무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으로 올라서는 길은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곳으로
철쭉 군락 속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550년(2006년 기준) 된 철쭉나무가 자란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난 비탈을 지키는 철쭉은 나무 둘레가 1m가 넘는다.
수령과 크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한다.
고령의 철쭉이 한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50여 년전에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나무라 하여 대대적인 벌목이 있었으나 다행히 살아 남아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령임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 보호수의 주소지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소의 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짐) 산1-1번지라고 한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철쭉나무 군락지 표지판이 있는 대간에 복귀한다
무명봉(11:50)
옥돌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길
???
그리 빡세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옥돌봉 정상석이 보이는데 이게 뭐여...
3년 사이에 정상석이 바뀌어 버렸잖아
옥돌봉이 아닌 옥석산으로...그 이름이 그 이름인데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산이 바뀌어 지는것도 아니고...
어!...이것도 바뀌었네, 예전에 있던 주변 지역의 거리 안내판은 사라지고
새로이 백두대간 등산로 종합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주변이 3년 사이에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어 혼란스럽다
예전에 있었던 옥돌봉에서 이어지는 거리표
옥석산 헬기장
헬기장 건너 춘양면 우구치리 방향으로 가본다
우구치리쪽에 있는 안내판에는 예전부터 옥석산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다시 옥석산 정상으로 돌아온다...예전에 없었던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라는
안내판이 있다...지맥길이 트레킹길이라니 더군더나 100km가 넘는 지맥길을...
옥석산(玉石山:1244.0m:12:09~15)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예전에는 옥돌봉이라는
정상석이 있는데 지금은 옥석산으로 바뀌었고, 고도도 국토정보 지리원의 지도에는
1,244.0m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정상석에는 1,242m로 표기가 되어있다.
지명의 유래는 정상 아래의 하얀 바위 탓에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예천에서도 보인다 해서 예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 마을은 그 빛이 비친다 해서 서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백병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같은 산으로 서북쪽으로는 선달산과 이어지는 산으로 옥돌봉은 한자로
옥석산(玉石山)으로 기록되어서인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러진다.
옥돌(玉石)이란 귀한 것과 천한 것, 선과 악 등 상반된 뜻이 합성된 말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쁜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인해 더욱 드러난다는
의미이니 옥과 돌은 서로 화답하며 뒤따르는 존재일 것이다
대간은 오늘 산행의 초입에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
인증샷
정상석 옆에는 반가운 한검선사의 시그널이 범여를 반긴다
한검선사는 오늘은 어느 산을 헤매고 있을까?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버릴 수 있다면 / 류시화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옥석산 정상에서 5분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내성(문수)지맥 갈림길까지는 아기자기한 암릉을 자주 만난다
암봉(12:17)
편안한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말을 따라주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같은 날에는 산행하기 더 없이 좋은 錦上添花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약간 흐리니 햇빛도 없고,
바람까지 없는 최적의 산행 조건이건만 몸뚱아리가
안 따라주니...아! 이 세월의 무게를 어찌 감당할꼬
도래기재에서 이곳까지 3km라는 얘기다
내성(문수)지맥 분기봉(1,015m:12:20)
이곳에 직진을 하면 옥석산의 유래가 되었다는 예천바위가 있고, 급경사로
내려서면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 오전약수로 이어지는 91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주실령(朱實嶺)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쪽으로는
오전약수와 쌍벽을 이룬다는 두내약수가 있고, 물야면 오전리쪽에는 전국의
약수중에 최고로 치는 오전약수로 이어지는 고개로, 옛날에 주실령까지 물이
차 있어 ‘배가 다니던 고개’라 하여 배 '주(舟)' 자를 써서 주실령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확실한 어원은 알 수 없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도산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나는데,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
에서는 내성지맥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5분만 가면 옥석산의 유래가 된 예천바위가 지맥길 가운데에 있다
옥돌봉과 옥석산에 대한 자료를 보면 옥돌봉 정상에 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빛이
예천까지 빛이 난다고 하여 예천바위라 불렀다고했는데, 이곳은 6.25사변때 북괴군과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주실령으로 이어지는 내성(문수)지맥길을 따라서 5분정도만 가면
옥석산의 유래가 되었다는 예천바위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입맛만 다시고 우측으로 꺽어져 박달령으로 향한다
내성(문수)지맥 갈림길에서 박달령으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에다 낙엽이
푹신한 陸山으로 이런곳에서는 범여도 아무리 빠른 산꾼이라도 따라
갈 수 있는 길이다
내리막길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선달산의 모습
선달산(仙達山:1,239,0m)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영주시 부석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이 김선달을 연상케 하는
선달산의 유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신선이 노닐던 산이란 뜻의 仙達山이 먼저 올라야 할 산의 先達山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남쪽 산기슭 부석사의 浮石을 일컫던 우리말 선돌(立石)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산 북동쪽 지능선상의 마대산 동쪽 산기슭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일대에
위치한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언 봉이 김선달)의 신위를 모신 당집과 묘소에서
그 이름을 유추하기도 한다.
先達이란 ‘과거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는 신분’이라는 뜻과
‘먼저 올라야 할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선답자 최창남 선생은 '먼저 깨달은 산'이라는
뜻으로 보고 '선(先)'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의 '먼저'가 아니라
'선험(先驗)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仙達이란 ‘仙道를 추구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으로 오르면서 힘듬을 보상이라도 받듯히 편하게 걷는다
무명봉(12:28)
대간길을 둘레길로 만드는데 一助하고 있는 영주국유림사업소.
오르막길이나 암릉이 나오면 어김없이 사면길을 만들어놔서
자꾸만 산꾼들의 野性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1등 공신인 듯 싶다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편안한 안부로 내려서면서 좌측을 바라보니 문수산이 보인다
문수산(文殊山:1.207.4m)은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봉성면 금봉리, 춘양면 서벽리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의 진산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에 "조선 세조 3년에 순흥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순흥)에 "백병산에서 뻗어 나와 안동 학가산(鶴駕山)의 으뜸 줄기를 이룬다."라고
하였고,『여지도서』(안동)에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북쪽의 안동 태백산에서 뻗어 나와서
동쪽으로 봉화 갈방산으로 뻗어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순흥)에 "지금은
순흥에 속한다."라는 간략한 기사만 나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관찬사료의 내용은
지명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시사할 뿐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축서사(鷲栖寺)라는 사찰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산중에는 673년
(신라 문무왕 13)에 의상조사(義湘祖師, 625~702)가 창건한 축서사(鷲棲寺)가 있는데,
향토지에서는 "문수산 아래의 축서사에서 광채가 비쳐 가보니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였다."
라는 축서사 관련설이 언급되어 있다
전국의 지맥 능선에서 어김없이 만나는 시그널...산꾼들중에 레전드의 반열에
오르신 대구의 비실이부부님의 흔적을 대간길에서도 만나니 무지 반갑다
무명봉(12:35)
박달령으로 향하는 계속되는 편안한 길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취해서 걷고 있는데 근데 갑자기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북진하는 대간꾼들을 만난다...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옥돌봉에서 출발한 지 1km를 지날 무렵에 예전에 없던 구조 이정목을 만난다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내려가는데 괜히 산악회를 따라서 온 걸 후회하면서 걷는다
나홀로 왔더라면 늦은목이까지 가서 생달마을에서 택시를 불러서 봉화읍까지 가면
18시 40분에 봉화에서 동서울터미널로가는 버스를 충분히 탈 수가 있으련만...
산악회로 왔으니 시간상 맞지않고, 보조 옷가방도 차에 있어서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선달산으로 올라서면 최소한 1시간 이상의 차이가 나기에 후배들에
밉상으로 찍히기 전에 아무래도 박달령에서 중탈을 해야할 듯 싶다
무명봉(12:42)
안부(12:43)
암봉(12:45)
991.1m봉(12:47)
이곳은 엄연한 국토정보지리원의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대간꾼들은
관삼조차 두지 않는 봉우리이다...유일하게 우리나라 봉따먹기 大家이신
문정남 선생의 시그널 하나가 족보있는 봉우리임을 말해주는데 지맥길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족보있는 991.1m봉 옆에는 1-3 119구조 이정목이 보인다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을 오르면서 힘듬을 완벽하게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여유로운 발걸음을 하면서 또다시 북진 대간꾼들과 조우를 하고 인사를
나누면서 각자의 갈 길로 향한다
안부(12:49)
살짝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4번의 대간을 걸으면서 13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좌측의
암릉위에 있는 저 소나무는 변함없이 절개를 지키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무명봉(12:55)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섰다가 다시 고도를 살짝 높이면서 박달령으로 향하고 있다
連理枝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 연리지(連理枝)란 맞닿아 연이어진 가지.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원래는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짙은 부부애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산행 초반에는 엄청 힘이 들었는데 이젠 몸이 산에 同化되어 가는지
힘듬을 별로 모르고 걸어간다...힘이 들었어도 산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등로 좌측 아랫쪽으로는 예전엔 보지못한 임도가 보인다
완만한 오르막 봉우리를 향하는데 후미대장을 맡고있는 태양아우의 전화가 온다
‘형님!...지금 어디냐고?’...자기들은 박달령에서 식사를 끝냈다고 하기에
난 박달령에 도착하려면 10분 정도는 더 가야하고, 난 박달령에서 오전 약수로
내려갈테니 내 걱정을 하지말고 먼저 가라고 했다
안부(13:03)
쉼터(958m:13:06)
쉼터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이 지역이 옛날엔 춘양목이 많았던 모양이다
박달령까지 500m밖에 남지 않았단다
이곳에서 조금씩 고도를 높이면서 봉우리로 올라선다
등로 주위의 나뭇가지 위에는 겨우사리들이 많이 보인다.
지금의 겨우사리는 藥性보다 毒性이 더 많아 아무런 효과가 없다
무명봉(13:10)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확 꺽어져서 박달령으로 향하는데
또 다시 대간 북진을 하는 여성산꾼을 2명을 만난다
아마도 맨처음 만난 팀과 한 산악회인듯한데 거리 차이가 많이
나는듯 하다...얼른가소...나처럼 밉상(?)이 되지 말고...
1,006.5m봉(13:16)
대간길에서는 참으로 만나기 힘든 준.희선생의 산패가 그져 반갑기만 하다
박달령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선달산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아그들은 저 능선을 넘었겠지
박달령 헬기장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려서니...
박달령 산령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박달령 산령각(朴達嶺山靈閣)
산령각에 도착하여 문고리를 당기니 안쪽으로 문이 잠겨있어 열수가 없다.
그리고 옆에는 무속인들의 굿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박달령은 고치령, 마구령과 함께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나드는
길목으로 유명하며 뒤에 있는 산령각에서는 이들의 安寧을 기원하며 매년 4월 초파일에
지금도 고사를 지낸다고 하며, 박달령 정상에 있는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되어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란다....고려시대에는 이곳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앙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형성의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깡그리 무시되고
미신이라는 이름하에 많이도 때려 부셨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려와 수많은 성황당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던 시절이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그때 박달령 산령실도 꽤 많은 오명과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용쾌도 살아남은 박달령 산령각을 만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만남이 되었던 그때 그시절에 있었던 광풍의 이름이 안타깝게도 농촌부흥의
기치를 내건 새마을운동이었는데 태백산신을 모시던 산령각은 ‘朴達嶺城隍神位’라는 위패가
놓여 있다.
박달령 산령각 내부의 모습...2017년 4월 30일(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박달령 헬기장 우측에는 봉화군과 경상북도에서 세운 자세한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가
서 있고, 그 옆의 이정표에는 "(서쪽)선달산 4.8km,(동쪽)옥돌봉 3.08km" 라 적혀 있고,
그리고 박달령 북쪽 50m 아래에 샘터가 있다고 이정표가 서있다.
박달령 정상에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오전약수쪽에서 이어져 온 임도가 있어서
사륜구동형 차는 올라 올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박달령에 도착하여 사진 몇 컷을 찍고는 헬기장으로 올라서니 이게 누구여!
아침에 같은 차를 타고온 동료산꾼 노루아우 부부가 점심 만찬을 준비중이다.
나는 도래기재에서 올라왔고, 노루 아우는 오전약수에서 올라 왔다고 한다.
이 친구와는 10년도 넘은 시절에 호남정맥과 백두대간 남진을 같이한 친구로
정말 산을 잘타고 걸음도 빨랐던 후배인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으나
심장쪽에 이상이 있어서 수술 휴우증으로 나와 비슷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오전약수에서 올라와서 선달산을 거쳐 늦은목이로 하산하려 했는데
박달령 오르는 길에 스마트폰을 분실하여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포기를
하고 다시 오전 약수쪽으로 하산할 계획이란다...갑자기 동료가 생긴 기분이다
박달령(朴達嶺:970m:13:18)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와 춘양면 우구치리 경계에 있는 박달령은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에 있는 고개로 고치령,마구령, 도래기재와 함께
과거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라들던 길목으로 ,정상에는
널따랗게 잘 정비된 헬기장이 있고, 한쪽에 산령실이 있으며,전각 형태의
쉼터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야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박달”은 배달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배달이란 곧 고대한국을
가르키는 말이니 박달이란 상고시대 우리의 국가명이다...또한 박달(朴達, 또는
白達)은 檀(박달나무)을 뜻하며, 이는 곧 단군의 ‘단’을 의미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있다
인증샷
헬기장에서 만난 후배부부와 오랫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참을 박달령 헬기장에서 머물다가 오전약수로 내려간다
박달령에서 약 40분간을 머물렀다가 오전약수로 향한다(14:20)
노루아우님!...제발 아프지 마시게나
아파보니 알겠더이다...내만 서럽다는 것을...
금.은 보화가 뭔 필요있으며, 친척, 친구가 뭐 필요있던가?
아우님!...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삽시다
넓은 임도로 내려서다가 임도를 버리고 우측 숲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외씨 버선길이란다
외씨버선길이란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경상북도 청송군, 영양군, 봉화군 및
강원도 영월군 등 4개 군이 모여 만든 4색 매력이 있는 길로 외씨버선길이라는
명칭은 전체 구간이 조지훈 시인의「승무(僧舞)」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 길이는 총 200㎞[연결구간 포함 240㎞]로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부터 강원도 영월군에
달하는 총 13구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씨버선길 청송객주, 외씨버선길 영양객주,
외씨버선길 봉화객주, 외씨버선길 영월객주에서 지역별로 안내하고 있다.
임도에서 숲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오전약수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
등로에서 올해 처음으로 만나는 올괴불나무꽃(꽃말:사랑의 희열)
꽃은 3 ~ 4월에 피며 연한 노란색 혹은 붉은색으로 잎보다 먼저 피고, 전년지 끝에
2개씩 달리고, 꽃대는 길이 2 ~ 8mm로 잔털과 샘이 존재하며, 포에는 털이 있고
작은포가 없으며, 꽃부리는 양측이 깊이 갈라지고, 상하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며
판통은 짧고 밑부분이 넓은데 열매는 식용으로 가능하며 편도선, 목감기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찍 피는 봄꽃은 매화와 산수유이지만, 하지만 심어 기르는 그들 말고
실제로 우리 숲에서 가장 먼저 꽃눈을 틔우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올괴불나무로 늦봄에
꽃이 피는 괴불나무와 달리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올되게 꽃을 피운다고 하여 올괴불나무란다
정상의 능선에서와의 달리 아래로 내려올수록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고,
둘레길 형태인 외씨버선발을 표시하는 시그널들이 수도없이 걸려있다
고도를 낮출수록 생강나무와 진달래들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이곳은 워낙 오지에다 고도가 높은 추운 곳이라서 그런지
이제서야 꽃봉우리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오전약수 내리막길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문수산의 모습
외씨버선발의 시그널이 많아도 너무 많다
娑婆世界에 산다는 자체가 苦라고 했던가
오전약수가 거의 도착할 즈음에는 滿開한 진달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전약수에 거의 다 내려온 느낌이다
봄이오는 소리
오전약수 음식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망가진 이정표
첫 민가를 지나니 오전약수란 곳이 나오는데 물이 말라 버렸는지 물이 안 나온다.
참고로 조금을 더 내려오면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오전약수가 따로 있다
오전 약수 가는길에 낙엽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반가운 제비꽃을 만난다.
제비꽃이란 이름은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쯤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지방에 따라서는 오랑캐꽃, 반지꽃, 앉은뱅이꽃, 외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오랑캐꽃이란 이름은, 꽃을 뒤에서 보면 그 모양이 오랑캐의 투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우리나라의 산지에서 자생하고 있는 제비꽃의 종류는 6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물이 나오지 않은 첫번째 오전약수를 내려오니 주상절리 형태의 인공 수직
폭포가 나오는데 겨울철이라 가동을 않는지 물이 없어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다
오전약수(吾田藥水:15:20)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있는 오전약수탕이 있는 오전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에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褓負商)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고, 조선 제9대 성종(1469 ~ 1494)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하며,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이 약수를 마시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라고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약수터 옆 바위에는 “樂山樂水人生不老(요산요수인생불로)”라는 주세붕의
휘호가 남아 있는데 '산을 즐기고 약수를 즐기면 인생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전약수는 혀끝을 쏘는 듯한 청량감이 있는 탄산수로 함유성분은 1ℓ당 유리탄산 1.01㎎,
마그네슘 47.2㎎, 칼슘 44.8㎎, 철 30.0㎎, 염소 10.6㎎ 등이며, 조선시대에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 약수로 선정되었다고 전해지며,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또한 부정한 여인이 이 물을 마시려 하자 맑게 흐르던 물이 문득 흙탕물로 변하고 물에서
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약수터이다.
약수물은 겨울철이라 그런지 水量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에 와서 약수물을 안 마시고 갈 수는 없잖은가.
코로나라는 역병을 염려한 탓인지 옆에있는 물바가지 대신에
종이컵을 비치해 놓고 먹으라고 하기에 한컵을 마시니 똑쏘는 맛이
鐵分이 강한 탓인지 마치 설악산의 오색약수와 같은 느낌이다
봉화라는 고장은 오지중에 오지라서 그런지 태백산과 문수산을 중심으로 각화산,
청량산이 마치 차양을 치듯 봉화 땅을 감싸고 있으며, 물줄기를 따라 여러 곳에
자리하는 맑은 약수는 여전히 봉화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고장이다.
셋 다 그리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오전약수, 두내약수, 다덕약수의 삼총사는
모두 짜릿한 맛의 탄산수로 약수의 탄산성분 속에는 철분 등 사람에게 이로운
성분을 가득 담고 있어 위장병에 특별한 효험을 보인다고 한다.
약수터 주변에는 전부 닭백숙같은 요리만 파는 음식점만 보이는데 겨울철이라 그런지
식당문을 닫은 집이 많고, 약수터 앞에 리어커에 난전(亂廛)을 벌려놓고, 약수물통과
약초, 엿을 파는 여인이 ‘어르신! 엿 하나만 팔아 주셔요’ 한다...여인의 부탁인데
안 팔아 줄수도 없고하여 엿 2봉지를 산 다음에 앞서가는 노루 아우를 뒤따라서 간다
오전약수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낸 다음에 동료산꾼들이 늦은목이에서
생달마을로 내려오는 상운사 방향의 생달마을로 향한다
오전약수탕은 겨울철의 비수기라 그런지 한산하기만 하다
오전약수터 주차장(15:25)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생달마을로 가도 되지만
산행대장이 하산 종료시간을 5시까지로 정해주었기에, 이곳에서
어영부영 걸어가도 생달마을까지는 4시반까지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것 같아서 노루아우님 부부와 생달마을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따라서 걸어 가기로 한다
오전리 마을 끄트머리에 화덕피자를 파는 봉화객주라는 점빵이 보인다.
상호만으로만 보면 옛날 보부상들이 들릴만한 곳이지만, 음식은 서양식이라
심히 unbalance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봉화가 이몽룡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자료를 검색해 보니...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이 실존인물이 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이몽룡의 생가인 계서당(溪西堂)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고택으로
성이성은 13살(1607년)에 남원부사로 부임받은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成安義)를
따라 남원으로 갔다가 1차 임기를 마치고 연임해 남원에서 4년을 보내면서 어엿한
청년기를 맞았지만, 17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광주목사로 전근하면서 남원에서의 생활은 끝난다.
광주로 내려간 두 부자는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세상,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 고향의 집에서 성이성은 학문에 정진했고 22살에 경시(京試), 33살에 식년 문과
급제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두 차례 경상도, 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세 번째 암행어사로 부임받은 성이성은 마침내
남원을 떠난지 28년만인 1639년(45살)에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간다.
이곳에서 성이성은 어린시절의 스승 산서 조경남(趙慶男ㆍ1570~1641) 장군을 만나 광한루에서
밤새도록 회포를 풀며, 술잔을 기울이던 성이성이 옛 추억이 떠올라 스승에게 춘향이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묵묵히 듣고난 스승 조경남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꾸민다.
성이성의 이름은 이몽룡으로, 그리고 그의 성(姓) 성(成)씨는 춘향에게 붙여 성춘향으로 등장시켰다.
당시 양반이 기생 집안과 사랑을 논했다간 큰일 날 시대였으니 성과 이름을 바꿀 수 밖에. 하지만
춘향의 성에 그 흔한 성들을 두고 굳이 성(成)씨로 한 것은 성이성이 이 이야기의 주인임을 암시하게
한 것이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소설이자 4대 국문소설의 하나인 춘향전의 모델 성이성의 실화가 35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건 불과 20여년 전의 일로 창녕 성(成)씨 양반가문에서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건 큰일 날 일이었기에 이 사실을 숨겨왔다가 그러던 중 한 대학교수의 열정으로
베일을 벗었다... 지난 1999년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축서사(鷲棲寺)...사진 펌
축사사는 독수리 축(鷲),깃들서(棲),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 보살님을 뜻하며 또 다른 가설로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해서 문수산이라 한듯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인데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보탑성전 편액...사진 펌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
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등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도솔암,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축서사에는 석조비로자나불및 목조광배(보물제995호), 괘불탱화(보물1739호). 석등(문화재 자료 제158호).
삼층석탑(문화재 자료 제157호)가 있으며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자 학승(學僧)인 무여(無如)
큰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절이다.
생달마을을 가기위해 915번 도로를 따라서 물야저수지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가 다소곳이 피어있는 산괴불주머니를 만나니 참으로 반갑다.
해마다 3, 4월이면 야생화를 촬영한답시고 대포카메라(dslr)에다
메크로 렌즈를 장착하고, 전국의 山河를 다녔는데 올해는 바쁘다는
이유와, 컨디션 저하로 인해서 한번도 出寫를 나가지 못했다.
그 바람에 카메라동호회 멤버들로부터 잘못하면 왕따를 당하게 생겼다.
멤버들과 사진을 찍어와서 서로 품평회도 하고, 같이 뽀샵을 같이하면서
멤버들은 열심히 다니면서 동행하자고 자주 연락이 오는데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니 우짜면 좋노...그래도 길가에서 너라도 보니 조금은 가슴속의 멍울이
조금은 가시는구나...시인 나태주님은 너희같은 들꽃을 이렇게 말했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뒤돌아 본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梧田里)의 모습
오전리(梧田里)는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봉황산 밑이 되며, 봉황은 오동나무를 좋아하고 죽실을 먹고 산다 하여 오전리라고 이름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오전, 곰직이골, 사기점, 생달, 쑥밭, 용목마을 등이 있는데, 오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오전리의 그것과 같다. 곰직이골마을은 전에 이곳에서 곰이
새끼를 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사기점마을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생달마을은 선달산 밑이 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쑥밭마을은 쑥이 무성한 들판에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용목마을은 지형이 용의 목과 같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 한다.
오전마을을 빠져나와서 915번 도로를 버리고 우측에 조성된 외씨버선길로 향한다
바람을 피해서 나무밑둥치에 자리잡은 개별꽃이 앙증맞게 피어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너가 참으로 대견하구나...반갑다...다음에 또보자
915번 도로위로 조성된 외씨버선발길은 벼리길이지만 생각보다 그리 낭떠러지는 아니다.
벼리라는 지명은 순 우리말로 벼랑, 낭떠러지라는 지명이다
보라제비꽃(꽃말:순진한 사랑, 나를 생각해주오)
벼리길에는 잣나무와 생각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세상살이가 참으로 공평하지가 않구나.
누구는 맨날 사람들의 발에 채이고 밟히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누구는 자리를 잘 잡아서 황제처럼(?) 살아가니 참으로 불공평하다.
세상을 탓하지마라...터를 잘못잡은 네가 잘못인걸...누굴 탓하랴...
생강나무꽃들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그 옆에는 양지꽃도 보인다
양지꽃(꽃말:사랑스러움)
꽃은 3∼5월에 노란 색으로 피고, 줄기 끝에 취산꽃차례를 이룬다.
꽃잎은 5개이고,둥근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며, 끝이 오목하며,
작은잎은 길넓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 또는 타원 모양이고,
맥 위에 털이 많으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줄기는 붉은 빛을 띄며,
하나의 줄기에 여러개의 꽃대가 갈라지고,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한방에서는 식물체 전체를 치자연이라 하여 약용하며, 잎과 줄기는 위장의
소화력을 높이고, 뿌리는 지혈제로 쓰이며 산기슭이나 풀밭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는데, 음지, 양지에서 모두 잘자란다
잎만 보면 흔히들 많이 알고있는 돌양지꽃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꽃이 전체적인 크기와 키를 보면 알 수 있으며, 주로 관상용으로 쓰인다.
오전교가 나오고 이곳에서 915번 지방도는 좌측의 물야면소재와
봉화읍내로 향하고 우리는 오전교 우측으로 가서 물야저수지를 끼고
생달마을 쪽으로 가야한다
오전교(15:50)
물야저수지 상부쪽에는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고
생달마을로 가는 도로 우측위에 보부상위령비가 보인다
보부상위령비(褓負商慰靈碑:15:55))
조선말기에 봉화 보부상 11명이 백병에 정착(지금의 오전댐 자리)하여 장사를
잘하여 큰 돈을 벌게되자 마을의 논밭을 사들여, 화전민이던 마을 사람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경작케하니 그 규모가 만여평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보부상들이 혈육이 없는 사람이 태반으로 그들이 죽으면서 집과
논밭은 소작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게 되었고, 그들이 남긴
토지는 수십년 동안, 형편이 어려운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돕거나 좋은 일에
쓰여왔다
계속 공동 관리해오던 마을사람들은 오전댐이 건설됨에 따라 이 토지를 팔아
마을기금으로 적립하여 운영하여 오다가 마을회관 건립비로 일부 사용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백병마을 입구에 합동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그뭄이면
전 주민이 모여 극진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전해지고 있는 보부상의 이름은
이청양, 김울산, 문울산, 강영월, 곽개천 등이다.
*보부상(褓負商)은 전통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했던 전문적인 상인을
칭하는 단어로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며,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한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발달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데
반하여,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하였다.
또한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에 따라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도 하였다.
물야저수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저수지 주변으로는 데크목으로
외씨버선발길을 조성해놓고, 벚꽃나무들이 많아서 벚꽃이 필 즈음이면
멋진 산책코스가 될 듯하나 지맥꾼들에겐 그림에 떡처럼 보인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915번 지방도로
봉화군은 예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 중에 선비는 가장 많은 고을'로 이름나
있으며 (조선 총독부부 문건 등) 따라서 역으로 "봉화지방은 글을 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서책(眞書)의 가르침에 따라 문신과 충신 그리고 효자 효녀,열녀 등이 많이 났던 곳으로
이는 옛적부터 내려오는 풍습으로 모든 현민(군민)들이 흠모하고 받들어 왔다"는 의미다
봉화군 소재지의 명칭은 일제시대인 1913년 군청사를 현재의 춘양면 의양3리(현마)에서
내성면(奈城面: 그후 다시 '내(乃)자의 내성면으로 개명) 포저리로 옮기게 되었고,
자유당때 어느 정치인이 군청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우려하여 1956년 군청소재지의
명칭은 군명과 동일하여야 한다는 면민들의 여론에 따라 면명개정(안)이 내성(乃城)면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같은해 7월 8일 '내성면'을 '봉화면'으로 개명하여 현재의
'봉화읍'으로 이어오고 있다.
물야저수지(오전댐)은 2002 루사, 2003 매미 등, 태풍과 집중 호우로 큰 피해를
입자,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위해 백병마을(오전2리)
부지에 저수용량 458만톤 규모로 댐을 만든 곳이다
전망대(16:02)
물야저수지 뒷쪽으로는 옥돌봉에서 갈라져 내려오는 내성지맥(신산경표상:문수지맥)
능선이 보이고 옥돌봉의 유래가 되었다는 예천바위가 肉眼으로는 뚜렸히 보이나
흐릿한 미세먼지에 먼거리 탓인지 똑닥이카메라는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지
예천바위가 보이질 않아서 안타깝다
오전댐 쉼터가 나오고 물야저수지와 오전댐 위령비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보부상들이 살았다는 백병마을은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고 그 대신에
지나오면서 본 위령비와 보부상의 흔적이 적혀있는 안내문의 보부상의 이름이
이채롭다...이청양, 강울산, 문울산, 강영월 등 미천한 탓이라 그랬는지 이름은
없고, 자기가 태어났던 고장이 이름으로 바뀐듯 하다
오전댐 쉼터(16:05~15)
오전댐 쉼터에서 노루아우 부부와 함께 10분정도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고
댐 윗쪽으로 보이는 선달산을 바라보면서 동료산꾼들이 내려오는 생달마을로 향한다
생달마을 버스정류(16:25)
생달마을의 지명은 선달산 밑이 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후미가 도착하고...버스는 봉화읍내로 향한다
봉화읍내에 들려 산악회에서 제공한 목욕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의관정제를 한 다음에 맛있는 식사로 저녁을 해결한 후에 귀경하는
버스에 오른다...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묵묵히 쥔장에게 싫은
내색없이 같이해 준 내 몸뚱아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늘은 산이란 스승이 죽비(竹篦)를 내리치며 이렇게 훈계한다
몸뚱아리 잘 관리하고 아프지 말고 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