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구간- 밀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白頭大幹의 등뼈 역할을 하는 大耶山
구간은 짙은 안개로 五里霧中으로 걷다...
☞ 산행일자: 2023년 07월 09일
☞ 산행날씨: 간간히 내리는 비에 숨이 막힐듯한 높은 습도에 오후에 비
☞ 산행거리: 도상거리6.2km + 들머리 5.1km / 6시간 03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벌바위 주차장-벌바위 가든-용소바위-용추폭포-월영대지킴터
대야산 갈림길-월영대-쉼터-다리-밀재-코끼리 바위-전망대
주먹바위-대문바위-거북바위-중대봉 갈림길-거시기 바위
암봉-월영대 갈림길-대야산-암봉-안부-무명봉-안부-쉼터
2번째 쉼터-조망바위-촛대재-조망바위-조망바위2-촛대봉
안부-불란치재-무명봉-폐헬기장-안부-조망바위-미륵바위
안부-731m봉-안부-곰넘이봉-조망바위-안부-무명봉-675m 갈림길
합류점-헬기장-안부-버리미기재
☞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요즘 하루 하루가 달라지는 체력저하로 고민이 참 많다
우선 음식에 대한 食感이 너무 떨어져서 뭔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식사를 자주 굶다보니 거기에 비례하여 식욕 감소로
이어지고, 거기다가 체력이 자꾸만 방전되는 느낌이다.
지.지난주와 지난주에도 음식을 먹지 못한채, 갑자기 식은 땀이 나면서
어지럽기 시작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동네 병원에서 잘 아는 원장이 아무래도 위장 계통에 문제가 있는 듯 하다고
하면서 큰 병원에 가서 소화기내과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하기에
큰 병원에 가서 종합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나 큰 걱정은 안한다...5년전에 폐암을 판정받고, 저승 문턱까지 갔다온 내가
수술이후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산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련다.
이번주는 비도 온다고하니 산에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 잠을 청했는데
일욜마다 일어나는 그 시간에 눈을 뜨는데 막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아무래도 현재의 컨디션으로서는 지맥길을 나선다는 건
무리일 것 같고하여 백두대간의 짧은 구간을 하나 끝내야지 생각을 하다가
4차 대간길에 이빨처럼 빠져있는 밀재~버리미기재 구간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용추계곡 물놀이를 하러가는 안내산악회를 따라서 길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벌바위 주차장(09:40)
오늘 기상청의 일기예보로는 오후 4시이후부터 비가 온다는데 양재동에서
출발한 버스는 괴산읍을 지나고 쌍곡계곡을 오른 다음에 버리미기재를
넘는데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니 기저환자인 나로서는 괜스레 불안하다.
벌바위 주차장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가늘어졌으나 산행할 기분이 영 아니다.
산에 갈까말까 망설여지지만 이곳에서 죽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지루할 것
같아서 가는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비는 그치지만
반대 급부로 습도가 너무 높아서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 정도이다
산행을 시작하다(10:00)
산행을 할 기분이 나질 않아서 밍기적거리다가 20분이 지난 다음에야
산행을 시작하는데 내가 버스를 타고온 안내 산악회는 아는 사람도 없고,
칠보산, 군자산, 대야산으로 가는 등산객을 같이 싣고 왔는데 어디로 가던지
산악회에서 지정해 준 시간과 장소에만 도착하면 된다.
나처럼 대간을 하러온 등산객은 없고,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라서 그런지 어쩌면 편한지도 모르겠다.
난 처음부터 산악회를 따라온 대장에게 歸京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냥 가시라고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유 산행인 셈이다
벌바위주차장에서 용추계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높은 습도 탓인지 똑닥이 카메라에 습기가 계속 끼는 바람에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고개를 넘어서 텃밭 사이로 지난 다음에...
용추계곡 입구로 들어선다
대야산으로 향하는 등산로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한데 비가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음식점 평상마다 산행을 포기하고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등산객들이 많다
물이 흐르는 용추계곡에도 산행을 포기하고 먹자판을 벌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로 몰려있고, 등산로 바로 옆에서 술판을 벌이는 곳에서는
홍어회를 가지고 왔는지 홍어냄새가 진동을 한다...홍어회 냄새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속이 역겨울정도 냄새가 심하다
벌바위 가든(10:08)
음식점중에 가장 마지막 집이다...이곳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선유동 계곡으로 들어선다
용추계곡 초입에 있는 마을이 벌바위 마을이고, 버스정류장 지명도 벌바위로 되어
있는데 벌바위(우)는 주위의 산들이 암석으로 되어 있고, 그 형세가 벌통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암(蜂巖)이라고도 부른다.
벌바위 가든 마당에서 빗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비비추의 모습
선유동천 나들길은 대략적으로 1코스와 2코스로 나눠지는데 1코스는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서
문경 선유동 계곡까지 4.0km의 거리이고, 2구간은 대야산 주차장과 식당가가 있는 용추계곡
입구에서 월영대까지 2.2km구간을 말한다
대야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어둠속에 걷는 무박산행과 비오는 날 청승맞게 걷는 雨中산행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가급적, 아니 거의 안하는 편인데, 세상을 살면서
어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오늘도 산행이 끝날 즈음에야 비가 온다고 했는데 구라청의 예보와는 달리
산행 시작도 하기전에 비가 쏟아지니 대처할 방법이 없구나...순리대로
살아야지 우짜겠노...
등로로 접어들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야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의외로 많다...늘 나홀로 다니는
습관 탓인지 영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
식당가 끄트머리에 오르자마자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등로 우측에
용소바위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겠다
용소바위(龍搔巖:10:11)
‘암.수 두마리의 용이 용추계곡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발톱이 바위에 찍혀
그 자국이 신비롭게도 남아있어 용소함이라고 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눈이 나빠서 그런지 아님 바위가 비에 젖어서 그런지 육안(肉眼)으로 확인이 안 된다
계속을 끼고 흐릿하게 이어지는 薄霧...그나마 다행인 건
용추계곡에 흐르는 물줄기에서 뿜어내는 상쾌한 청량감에
기분은 상쾌하다
높은 습도에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산행을 시작한 지 몇분도 안됐는데 숨이 막힐 지경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산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용추폭포(龍湫瀑布:10:17)
하트 모양의 소(沼)로 유명한, 대야산 용추계곡에 있는 문경팔경 중 으뜸인 대야산
용추는 충북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깍아지른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
으로 둘러싸인 대야산 자락에 있으며, 많은 비경 가운데 2단으로 이루어진 용추폭포의
장관이야 말로 명소중의 명소로 유명하다.
용추계곡의 비경중 으뜸으로 꼽히는 용추폭포는 폭포 양쪽의 바위에는 신라시대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썼다는 세심대, 활청담, 옥하대, 영차대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비늘 흔적이
신비롭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의 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옛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기도하였다고 한 곳으로 용추의
형상을 보면 위.아래 두 개의 용추가 이어졌으며 수만년 기나긴 세월을 쉼없이
흘러 내려 마침내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는 천하에 보기드문 신비스런 하트형(♡)으로
깊게 파인 소(沼)가 윗 용추로, 절묘한 형태는 보는 이마다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잠시후에 용추폭포에 도착하는데 최근의 비가 온 이후라서
그런지 水量도 많고, 사진을 찍어려는 등산객들이 북적이는
바람에 마치 돋대기 시장을 방불케하여 사진 한컷찍고 서둘러
빠져 나간다
월영대지킴터(10:19)
이곳이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편입되면서 기상이변이 생겼을 때
통제하는 장소인데 통제를 하지 않는 걸보니 그리 비가 많이
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선유동 계곡보다는 용추계곡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계곡
옛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한
시인 묵객(墨客)들이 많이 들락거렸던 계곡이 아니던가.
전국에 선유동(仙遊洞)이란 지명이 한, 두곳이 아니지만 산 하나에 선유동계곡을
안팎으로 품은곳은 이곳 대야산뿐이다...대동여지도에는 대야산을 동서로 양쪽의
산자락 밑에 내, 외선유동으로 구분해놨으며, 백두대간의 동쪽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선유동을 내선유동, 서쪽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쪽을
외선유동이라고 한다
문경쪽의 선유동은 용추폭포의 유명세 때문에 선유동보다는 흔히 용추계곡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으로, 대야산 안팎의 물줄기는 똑같은 선유동이란 계곡을
따라 仙界에서 俗界로 흘러간다
대야산이란 하나의 산에서 생성된 물줄기가 동쪽과 서쪽의 비탈을 따라 나아가는
길은 멀기만 한데, 백두대간을 안팎의 물줄기는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만날 재간이 없다.
문경쪽의 내선유동 물은 희양산에서 발원한 가은천과 합쳐져 영강으로 해서 낙동강에
입수되고, 괴산쪽의 물은 한강으로 흘러든다...그래서 문경사람들은 “대야산에서
서쪽으로 오줌을 누면 서울사람, 동쪽으로 오줌을 누면 부산사람 입으로 들어간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백두대간 능선이 한강과 낙동강의 水界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은 속리산부터인데
대야산의 물줄기가 입수되는 영강(穎江)이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그것도 아주 오랫만에 사람들에 부대끼면서 산을 오르는데
늘상 혼자서 다니던 버릇 탓인지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다.
마치 광장시장의 순이네집 녹두빈대떡을 사먹어려고 줄을 서 있는 느낌같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자꾸만 등로를 양보하면서
걷다보니 시간은 지체되고 발걸음은 느려지는 느낌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월영대:속리 21- 02:해발 370m:↓대야산 주차장 )
지금 밀재로 향하는 내선유동 계곡은 五里霧中...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월영대:속리 21- 03:해발 395m:↓대야산 주차장 )
오늘따라 유난스레 여인들이 많이 보인다.
대야산이 100대 명산이라 그런가?
늘 홀로 다니는 독립군이라서 명산과 여인과의
相關 관계에 따른 공식은 모르겠다
대야산 갈림길(417m:10:37)
대야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의 대부분이 우측으로 향하고 밀재로 향하는 사람들은 별로없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오르는 대야산쪽은 피아골 계곡이고, 밀재쪽 방향은 다래골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밀재:속리 21- 04:해발 417m:↓대야산 주차장 )
이정표(↑대야산 1.9km, ↖밀재1.9km ↘대야산(벌바위)주차장 2.3km)가
있고, 밀재와 대야산과의 거리가 같으나 밀재방향은 다시 밀재에서
대야산까지 1km를 더 가야한다... 등산객의 80% 정도는 대야산쪽으로
향하는데 대야산 방향의 피아골쪽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만 아주
급경사이고, 밀재 방향의 다래골쪽은 완만한 편이다
대야산 갈림길에서 50m정도만 가면 월영대가 나온다
월영대(月影臺:403m:10:38)
다래골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피아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있는 월영대(月影臺)...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높이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을 흐르는 맑디
맑은 물 위에 어리는 달빛이 아름답게 드리운다 하여 월영대라고 한다
조금전의 용추폭포보다는 등산객이 적지만 이곳에서도 사진을 찍기위한
자리 싸움이 치열하다...인물로 인증샷을 잘 남기지 않은 내 스타일과는
전혀 달라서 잘 이해가 안되는 편이라, 서둘러 월영대를 떠난다
寓興(우흥) / 최치원
願言扃利門(원언경리문)
바라노니 이욕(利慾)의 문 굳게 닫아서
不使損遺體(불사손유체)
일신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爭奈探珠者(쟁내탐주자)
저 진주를 탐내는 무리들
輕生入海底(경생입해저)
죽음도 무릅쓰고 바다 속에 뛰어드네
身榮塵易染(신영진역염)
영화를 탐내면 티끌에 물들기 쉽고
心垢水難洗(심구수난세)
마음에 때 묻으면 씻기 어렵다네
澹洦與誰論(담백여수론)
담박한 이 맛을 누구와 논하리
世路嗜甘醴(세로기감예)
사람들은 모두 단술만 즐긴다네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908?)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로서 당(唐)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道)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면서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으며, 신라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 중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 해동18현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문묘에 종사(從祀)된 18명의 한국의
유학자들을 말하는데, 동방18현(東方十八賢) 또는 동국18현(東國十八賢)이라 부른다
해동18현 중에서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동방 5현(五賢)이라 하며,
고려 현종 때 최치원을 시작으로 설총,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조헌, 등이 종사됐고 고종 때 김집을
마지막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 신라삼최(新羅三崔)는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세 명의
최씨를 함께 이르는 말로 나말삼최, 일대삼최라고도 하는데, 신라 최치원(다른 두
인물에 비해 적어도 반 세대 앞의 인물. 신라삼최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며, 후백제의
최승우와 고려시대의 최언위를 신라 삼최라 부른다
쉼터(10:48)
다래골 오르는 길에서 안내산악회의 흔적들을 만나는데
나같은 대간꾼들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는 씨잘데 없는
시그널이다...비는 그쳤지만 대신 엄청나게 높은 습도로 인해서
베낭과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물 흐르듯 肉水(?)가 쏟아지고
고도차가 그리 크지않는 완만한 등로이건만 숨이 턱턱 막힐지경이다
이정표(←밀재1.5km, 월영대0.4km→)와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밀재:속리 21- 05:해발 463m:↓대야산 주차장 )
혼자 호젓하게 걸을만하면 뒷에서 등산객이 올라오니 자리를 비켜주고
또 호젓하게 걸을만하면 또 뒤에서 따라오니 혼자걷는게 몸에 베인
習性 때문인지 엄청나게 불편하고 귀찮고, 짜증이 난다
괜히 이 코스를 택했나하는 후회도 든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밀재:속리 21- 06:해발 531m:↓대야산 주차장 )
돌길이 나오면서 밀재를 향하는 고도가 슬슬 높아지기 시작한다
사랑을 향한 열정
다래골을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어차피 아침부터 맞은 비 때문에 몸뚱아리는 뼛속까지 다 젖은 상태라
카메라와 스마트폰 등 전자장비만 신경쓰고 그냥 신발을 신은채로
물 속으로 들어가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다리(11:10)
이정표(←밀재0.5km, 월영대1.4km→)와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밀재:속리 21- 07:해발 584m:↓대야산 주차장 )
얼마나 일찍 대야산에 올랐는지 벌써 내려오는 등산객들도 보인다
仙遊九谷(문경 가은, 고운 최치원)
옥하대(玉霞臺) 영사석(靈梭石) 활청담(活淸潭) 세심대(洗心臺) 관란담(觀瀾潭)
탁청대(濯淸臺) 영귀암(泳歸岩) 난생뢰(鸞笙瀨) 옥석대(玉釋臺)
仙遊九谷(괴산 송정, 퇴계 이 황)
선유동문(仙遊洞門),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와룡폭(臥龍瀑),
난가대(爛柯擡), 기국암(碁局巖),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巖)
아랫 쪽 괴산의 선유구곡이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원림은 문경 쪽으로 최근 학술조사 되었음.
지난 며칠간 비가 왔으니 날씨만 좋았다면 비가 온 후라서 주위의
멋진 仙景이 끝내주는 곳이 이곳 대야산 구간인데 오르면 오를수록
짙은 안개가 더 심하게 내려오니 아무래도 멋진 仙景을 보겠다는 꿈은
일치감치 접어야 할 듯 싶다...미끄러운 등로를 조심스레 올라서니
시끄러운 인기척이 들리는 밀재 정상으로 올라선다
밀재(蜜峙:689m:11:30)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계곡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화양계곡
농바위골을 잇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나무가 우거져 밀림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려면 밀림을 헤치고 가야한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원래는
밀목령(密木嶺)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다른 설은 양봉으로 꿀을 채취하던 곳으로
우리말로는 ‘벌(蜜)고개’로, 인근 ‘벌의 목 고개’라는 뜻의 버리미기재도 같은
어원에서 왔다고 한다
우측의 문경쪽은 유명한 용추계곡에 월영대, 용추, 무당소로 이어지는 멋진 선유동
계곡이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에 이정표가 잘되어 있으나 괴산 농바우골 쪽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놨다
이정표(↑대야산1km, 월영대0.4km→)와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대야산:속리 21- 08:해발 689m:→월영대1.9km )
밀재 정상에는 각종 안내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고, 고개 너머의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우가 있는 농바우골로 이어지는 등로는 출입금지란다
농바위는 넓적한 농처럼 생긴 바위가 커다란 암반 위에 얹혀있으며 장정 한 사람이
흔들던 여러 사람이 흔들던 똑같이 움직이고 아이를 갖지 못하던 아낙이 이 바위를
만진 후 태기가 있어 나중에 7남매의 어미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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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3일 수헌아우와 함께 의상저수지에다 차를 세워놓고 갓바위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가기로 했다가 내가 컨디션 난조로 이곳에서 농바우골로
중탈을 한 치욕을 맛보았는데 오늘 이곳에 올라서니 감회가 새롭다.
예전의 3번의 백두대간길을 걸으면서 늘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한방에
끝냈던 곳인데 4차에는 3번을 끊어서 이 구간을 걷는데도 힘이 든다.
옛 어르신들께서 하시는 말씀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말씀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도 저승 문턱까지 갔다온 몸으로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함에 걸어볼 수 있는데까지 걸어 보련다
밀재에서 10분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아침에 양재동에서 만난 후배산꾼에게서
얻은 바나나와 두유 하나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대야산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벌바위 입구에서 다래재를 거치고 밀재까지는 완만한 고도로 길을 걷다가
대야산을 향하는 암릉구간이 시작되는데 예전에 비해서 데크목 계단을
만들어 놔서 등로는 많이 좋아졌지만 숨을 쉬기조차 힘든 높은 습도 탓인지
힘이 들지만 이또한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겠지...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보지만 계속해서 대야산을 향해 오르 내리는 등산객들도 영 불편하다
데크목 계단을 지나니 로프가 처져있는 암릉 구간이 나오고 비에젖은
바위가 상당히 미끄럽다... 상.하로 교차하는 등산객들로 인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야산 오름길은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예전에 꽤나 힘들게 걸었던 등로는 데크목 계단으로 등로를 만들어 편하게
걷기는 하다마는 대간꾼의 입장에서 보면 산이란 곳이 자꾸만 野性을 잊어가는 것
같아 그리 좋지는 않다...자연이나 인간이나 本性을 잃어버리면 안되는돼...
산이란 곳은 쉬운곳이 있으면 힘든곳도 있어야 낭만도 즐기고 고통도 감내해야
산의 묘미를 알 수 있고, 은근과 끈기, 인내심도 기를 수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수련장이 되는데 자꾸만 편리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형태는 맘에 안든다.
그렇게 되면 굳이 산에 올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요즘 세대들은 편안함만 추구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곳에 단련이 익숙하다가 보면
세상사 살면서 위기상황이 닥치면 헤쳐나갈 끈기가 부족하여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많다.
힘듬과 편안함이 공존해야 조화로운 세상이 아닌가...개인적으로는 인위적인 이런곳은 질색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대야산:속리 21- 09:해발 803m:→밀재)
로프지대를 올라서서 숨 한번 크게 쉰 다음에 오르막을 올라서니
코끼리 바위가 나온다
코끼리 바위(11:58)
전망대(12:00)
이곳 전망대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통시바위에서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 멋진 곳이지만 오늘은 한치앞도 안보이는 餘白으로 채워진
五里霧中이니, 궁예가 자주 써먹었다는 觀心法으로 둔덕산 능선을 봐야겠다
맨 우측에 있는 마고할미 통시바위
‘통시’란 재래식 뒷간의 경상도와 전라도·강원도 방언으로 여기서 바위는 똥통처럼 생긴 바위다.
그런 통시바위가 지리산 통시봉에도 있지만 문경시 농암면에는 두 개의 통시바위(농암면 궁기리
산 1-1번지)가 둔덕산 능선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이름마저 특이하여, ‘마고’의 신을 의미하는
‘마귀’라는 말과 ‘할미’와 ‘손녀’라는 호칭이 들어간 ‘마귀할미 통시바위’와 ‘손녀마귀 통시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통시바위는 마고할미 사용했던 커다란 뒷간이고, 그 옆에는
손녀마고의 뒷간이다. 이렇게 커다랗고 폭이 넓은 바위 두 개에 양발을 딛고 볼일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마고할미는 백척(百尺) 장신쯤 되어야 하니 대모(大母)의 할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시’는 변소를 의미하는 것이고, ‘둔덕’은 언덕으로 엉덩이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통시바위는
엉덩이처럼 생긴 둔덕산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더욱이 만능여신인 마고할미의 엉덩이나
그 손녀마고의 엉덩이라면 신비감을 갖게 하는 눈부신 여성성을 과시하지 않겠는가.
통시바위는 ‘마고할미, 통시, 둔덕, 엉덩이, 똥’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되고, 여기서 ‘똥‘은 더러운
기피 대상이 아니라 농사를 짓던 우리 민족에게는 생산이자 황금이며 우리의 삶으로 점철된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밀재:속리 21- 10:해발 803m:↑대야산)
대야산 능선에서 내려오는 짙은 안개는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하강하고
나는 거꾸로 대야산으로 오르는데 편안한 계단이기는 하지만 범여의
숨소리는 점점 가팔라진다...5년전만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날아 다녔는데...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기력은 영영 회복 불가능하단 말인가?
암릉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주먹바위(12:08)
주먹바위를 지나자마자 대문바위를 만난다
대문바위(12:09)
누군가가 나무 꼬챙이 하나로 큰 바위를 받혀놨고 짓궂은 젊은 친구는
그 아래로 기어서 왔다리 갔다리를 한다...說에 의하면 저 꼬챙이를
빼버리면 문이 닫힌다고 한다는데 진짜 닫히려면 어쩌려고...
그 옆의 어떤 여인은 집채보다 더 대문바위를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하고 있는데, 저런걸 두고 흔히하는 말로 골값을 떤다고나 할까...
대문바위 우측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인데 짙은 안개로 인하여 感이 오지 않는다
대문바위에서 바라본 용추계곡(龍湫溪谷)은 짙은 안개로 오리무중이다
대야산 제1의 명소이자 문경8경의 하나인 용추는 거대한 화강암반을 뚫고 쏟아지는
폭포 아래에 하트형으로 패인 소[沼]가 윗용추이며,이곳에 잠시 머물던 물이 매끈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아랫용추를 빚는다...용추에서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월영대가 반기는데 달 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에 달빛이 비친다 해서 월영대(月影臺)라고 한다.
대야산 용추의 물은 '문경 선유동'으로 흘러가며, 선유동 계곡에는 학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데, 숙종 때의 학자인 이재를 기리기 위해 1906년에 세운 것으로, 학천정 앞의
큰 바위에는 선유동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부터 선유구곡이 시작되며, 옥석대,
난생뢰,영귀암,탁청대 등의 음각글씨는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857~?]이 남긴 것이라고도 전한다.
특히 문경 선유동의 용추는 하트모양으로 파인 소(沼)인데 절경이다.
늘 초록빛 투명한 물이 넘쳐흐르고 있어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주변 바위에는 옛날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용비늘 자국이 있다.
소나무 가지 아래에서 피고있는 분홍색 꿩의 다리
높은 습도 탓인지 숨이 막힐지경이고 목이 탄다.
대문바위 아래의 한적한 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갑자기 농바우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맞은편의
중대봉이 속살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히 환상적이다
휴식을 취하면서 바라본 바라본 중대봉(中臺峰:846m)의 모습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위치한 산으로 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인 중대봉은 바로 동쪽으로 인접한 상대봉(대야산)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붙여진 이름이로, 「1:50,000 지형도」에서는 정상부의 고도만 표기되어 있을 뿐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거북바위(12:25)
중대봉 갈림길(12:28)
이곳부터 좌측으로 이어지는 삼송리 방향은 비탐구간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대야산과 둔덕산의 외호(外護)를 받고있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完章里)도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야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완장리... 자연마을로는 감남비리, 관평, 벌바우, 선유동, 용추 등이 있다.
감남비리는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며, 마을 어귀 산비탈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고 하여
감나무비리라고 하다가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는 동안에 감남비리로 변음되었다.
관평은 옛날에 이 마을에서 벼슬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벌바우는 주위의
산들이 암석으로 되어 있고, 그 형세가 벌통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암이라고도 부른다.
선유동은 주변의 산들과 수석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며, 용추는 옛날에 용이 놀다가 승천한 못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용초라고도 한다.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우측의 삼송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짙은 안개는 바람에 밀려 고려시대 개경의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황진이의
치맛자락처럼 조항산은 볼일락말락 하고, 그 뒷쪽으로는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이 그의 저서 “擇里志”에서 ‘앞,뒤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고 극찬했던 청화산은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마고할미 통시바위와 둔덕산은 금방이라도 보일것 같아서
한참을 기다려도 구름이 벗겨지지 않아서 포기하고 둔덕산으로 향한다
* 문경시 가은읍과 농암면의 경계에 있는 둔덕산(屯德山:976m)은 이름 그대로
둔덕(언덕)처럼 땅냄새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곡선의 산형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부근은 시야가 넓게 트이고 후덕한 능선엔 억새가 피어 장관을 이루는 평원이 있어,
여기서 사방을 보는 조망은 등산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산이다.
북쪽 산록을 흘러내려온 물은 대야산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하여 용추폭포를 형성케 한
다음 내쳐 흘러 벌바위 마을 아래에서 이른바 신신이 머문다는 선유동을 만든다.
백두대간 버리미기재 북쪽의 선유동을 괴산 선유동이라고 하고, 이곳 둔덕산 북쪽 선유동을
문경 선유동이라 하며 문경 선유동에는 학천정, 칠우정 정자가 있어 오늘도 말없이 선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옛날 선비들의 자연 완상의 지혜와 운치를 즐기던 넉넉한 정신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소나무 이외 다른 나무들이
바위틈에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대비를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야산 石松의 조화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래 오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행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단언컨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터이다.
다른 나무로의 천이를 거부하고 소나무를 고집하는 것은 자연을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란 곧 변화와 발전이 아닌가.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아가며 발전한다.
인간 세상이 늘 안정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자유 및 평등 등 기본적
인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행복 추구권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만약 새로운 변화 없이 방향만을 뒤로 돌리려 하는 변화는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방향만을 되돌리려는 변화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수반한다.
동서양 및 국내외의 수 많은 사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며칠전부터 비가 내렸기에 오늘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을까하는
부푼 꿈을 안고 대야산 능선을 찾았지만 그건 나의 희망에 불과한
一場春夢이었다
이왕 五友歌 그리고 오우가의 소재인 돌과 소나무를 언급했으니 나머지
소재인 물(水)과 대나무(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대야산은 동쪽으로 용추계곡을 낳고 있는데 이 계곡은 국내 어느 계곡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가경을 보여주고 있다.
용추계곡 상단부와 마루금의 밀재 사이에는 산죽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용추계곡은 윤선도의 五友 가운데 하나인
물과 견줄만하며, 산죽 군락은 비록 키가 작긴 하지만 대나무에 대체할 수 있을 게다.
이 정도면 윤선도가 노래한 五友 가운데 四友는 오늘 구간에서 다 만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대야산은 산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느꼈던 낭만을 전달해주는 대간 최고의 경치를 간직한 곳이라 할 만하다.
조금전에 지나온 대문바위 아래의 밀재를 너머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구름의 발걸음이 더디게 보이고, 그 뒷쪽으로 새의 목덜미처럼 생겼다는
조항산은 맛배기로 얼굴을 살짝 내밀면서 산꾼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하나의 위안이라면 서쪽으로 보이는 중대봉만이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며 산꾼을 위로한다...고맙구나!...너한테라도 위로를 받으니...
아득히 먼 곳 속리산 능선이다
대야산 정상에서는 조망뿐만이 아니라 능선 그 자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서
온갖 형상을 만들어내며 눈을 즐겁게 한다. 소나무들도 여기에 합세한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암릉과 이들 암릉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 시대 윤선도가 해남 보길도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조 五友歌(오우가),
이 오우가에 나오는 돌(石)과 소나무(松)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시기 바위(男根岩:12:35)
자세히 보니 남정네의 거시기처럼 생겼다.
짓궂은 여인이 이곳을 꼭 붙잡고, 오늘 저녁에 집에가서
막둥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면서 사진을 한장 부탁하는데
사진을 찍어주면서도 내가 얼굴이 화끈거린다...나이로 봐서는
50대 중반쯤은 되어 보이는데 부디 막둥이 생산에 성공을 기원합니다
빗물을 살짝 머금은 양지꽃이 바위뒤에 숨어있다.
야들도 대야산이 무너질 듯 밀려오는 등산객들에
많이 시달리는 모양이다
암봉(12:37)
암봉에서 바라본 대야산 정상은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은 안개에 갇혀 버렸다.
대야산이란 이름은 그 유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다.
지명에 들어가는 ‘야(耶)’자 또한 옛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던 것을 1789년 발행한
문경현지(聞慶縣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야(耶)자로 쓰고 있으며 ‘어조사 야(耶) ’는 아버지를
호칭하는 글자이기도 하다...기독교의 예수를 야소(耶蘇)라고 표기할 때 쓰는 글자와도 같다
야소 역시 단순히 비슷한 발음을 찾아 쓴 것이라기보다 ‘소생(蘇生)하는 아버지’란
뜻을 담고 있는데...대야산 역시 큰 아버지란 뜻이 아닐까.
‘세속적인 상식에 구애(拘礙)되지 않고 고통이나 질병도 없으며 죽지 않는다’는
신선의 도를 아는 넉넉한 아버지의 산이란 뜻일게다
흔히 용추폭포의 모습이 여성의 성기를 닮아 음기가 센 산이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의 말일뿐...대야산은 근엄하고 넉넉한 아버지의 산이 맞은듯 하다
대야산을 사이에 두고 괴산군과 문경시 양쪽에 ‘선유동계곡’이 있는데, 괴산군
쪽의 선유동을 ‘외선유동’, 문경시 쪽의 선유동을 ‘내선유동’으로 구분한다.
외선유동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선정하고 구곡의 이름을 지어 바위에 새겼다고 전하는데,
제1곡 선유동문(仙遊洞門) 앞 너른 계곡은 수심이 얕고 물 흐름이 느려며, 제4곡 연단로(鍊丹爐)는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고 장수했다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이고, 제6곡 난가대(爛柯擡)와
제7곡 기국암(碁局岩), 제8곡 구암(龜岩) 등은 나란히 붙어 있다.
난가대는 ‘옛날 나무하러 가던 나무꾼이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잠깐 구경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낏자루가 썩어 없어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고,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기국암엔 바둑을 구경하다 집에 돌아가 보니 자신의 5세손이 살고 있었다는 나무꾼의
이야기가 전해 오며, 제9곡은 신선들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은선암(隱仙岩)이다.
내선유동의 제1곡은 옥하대다. 이어 영사석, 활청담, 세심대, 관란담, 탁청대, 영귀암,
난생뢰가 절경의 바통을 이어는데, 제9곡 옥석대의 길게 파인 너럭바위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쉼 없이 흐르고, 그 옆 큰 바위에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이 썼다는
‘선유동(仙遊洞)’이 선명하며, 옥석대 초입에 학천정이 세워져 있으며, 그윽한 풍모의
정자와 깊은 계곡이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며, 학천정 뒤 바위에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글씨가 음각돼 있다고 한.[출처] - 국민일보
데그목 계단을 따라서 암봉으로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월영대 갈림길이다
월영대 갈림길(12:42)
아침에 월영대 직전에서 우측으로 빡세게 올라오면 이곳으로 오는 길인데
속칭 대야산의 지름길인 셈이다...이곳에 도착하니 대야산에 오르 내리는
등산객들로 人山人海인 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대야산이 코 앞인데 오름길은 마치 돗대기 시장을 방불한다.
사람들에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대야산 정상에 오른다
대야산 (大耶山:931.0m:12:46)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괴산군 청천읍 이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선이
내려와 노닌다는 선유동(구곡)과 용추계곡을 거느린 명산으로 원래의 지명은
선유산(仙遊山)이였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地)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는 청화산 동북쪽에 있는
선유산은 정기가 높은데에 모여진 국판이어서, 꼭대기는 평탄하고 골이 깊다.
위에는 칠선대와 학소굴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에는
대야산 (大耶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 문경조에는 대치산(大治山)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지명의 유래는 예전에 홍수가 났는데 온 천지가 다 잠겨버리고 정상 봉우리에
세숫대야만큼 남아 있다고 해서 대야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정상이
세숫대야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하며, 또 다른 설은
'야(耶)'가 아버지를 일컫기 때문에 '큰아버지산'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문경쪽으로는 선유계곡과 용추계곡, 괴산쪽은 화양구곡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대야산 동쪽은 선유골로 옛 시인과 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보고 지고(至高)를
논하며 詩想을 읊조린 곳으로 유명한 곳이며,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이다
대야산은 순수 우리말로 '큰산`이고, 작은 산봉우리가 두 개 더 있어,
구별하기 위해 대야산 정상을 상대봉이라고도 하며, 작은 봉우리를 중대봉,
더 작은 봉우리를 하대봉이라 한다.
대야산은 한동안 대하산(大河山)으로 불리어 졌고, 또 국립지리원 발행
지도에는 대야산(大野山)이라고 적혀 있으나 맞는 듯하다.
여러 기록들에 大耶山으로, 적고 있으며, 특히 철종 조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대야산은 희양산의 남쪽 갈래로 제일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고 선유동의 주산이다.
서쪽의 청주 화양동이 30리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대야산 정상을 비로봉(毘盧峯)
으로도 불렀다.
대야산 정상 삼각점(속리 305 / 2003 재설)
대야산 정상은 마치 돗대기 시장을 방불케할 만큼 어수선하고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서 등산객들의 정상석을 차지하기 위한 阿修羅場이 돼버렸다.
나야 원래 인물 사진을 잘 안남기는 편이고, 3번이나 이곳을 지났기에
등산객들이 정상석 쟁탈전(?)을 사이에 얼른 정상석을 찍고 빠진 다음에
주위의 동태를 살피면서 쇠난간을 넘으려고 준비를 하는데 이게 뭐여?
이곳부터 버리미기재까지는 삵, 담비, 등 멸종 위기 동물이 서식하여
보호 중인 곳으로, 특히 암릉 구간이 많아 안전을 위해 출입을 금지하는
비탐구간으로, 대간꾼들을 감시하기 위해 2년전에 이곳을 지나갈 때만
하더라도 저 암릉위에 무인 감시카메라가 있어 경고방송이 나와서
상당히 신경이 쓰였는데 감시카메라가 철거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2021년 7월 11일 산행때 있었던 감시카메라
감시카메라가 없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심스레 내려서니 대간꾼들의 흔적이 보이고...근데 앞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몸을 움추리는데 남진을 하는 대간꾼 3명과 조우를 한다
여기서부터 경사도 90도의 급경사 지역으로 백두대간 능선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은 등로이다
비탐구간이라지만 대간꾼치고 이곳을 빼놓고 백두대간을
완주했다는 산꾼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결론부터 말하면
다닐 사람은 다 다닌다는 뜻이렸다
국공파들이 로프를 철거했다고 엄포를 놓는 곳에는 대간꾼들이
자일을 설치해놨어 큰 걱정은 없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내려서면 대야산 사면으로 내려가는 경사 90도의
직벽이라 조심스레 내려섰는데, 좌측으로 사면길이 보인다
아주 위험한 구간을 피해서 좌측으로 사면길이 나있고
대간꾼들의 시그널들이 걸려있어 그곳으로 가본다
누운 S형태의 사면길을 따라서 우측으로 향하니 빗물을 머금은
산수국이 산꾼을 반긴다
산수국(꽃말:변하기 쉬운 마음)
산수국은 참으로 이상한 꽃이다...꽃처럼 보이는 하얀것이 알고보니
꽃이 아니고 잎인 무성화(無性花:수술과 암술이 모두 퇴화하여
씨가 생기지 않는 꽃)로 벌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여 참꽃의 수정을
돕는 무성화인 헛꽃이며, 씨앗처럼 보이는 작은 꽃들이 수정을 하는
참꽃이다...世俗으로 치면 꽃처럼 보이는 하얀것은 오너가 아니라
바지 사장인 셈이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으로 내려선다...비에 젖은 암릉이라 바짝 긴장한다
90도 직벽이라 바짝 긴장을 하면 첫번째 구간을 통과하고...
2번째 로프 구간을 들어서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3번째 구간...보기는 별로이지만 아주 위험한 구간이다.
비에젖은 암릉구간을 긴장하면서 내려서는데 반가운 왜솜다리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이것으로 오늘 산행길에 본전을 뽑은 셈이다
꽃필 날 / 나태주
내게도
꽃필 날 있을까?
그렇게 묻지 마라
언제든 꽃은 핀다
문제는
가슴의 뜨거움이고
그리움, 기다림이다
급경사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가야할 촛대봉은 한치앞도 안 보인다
왜솜다리(꽃말 : 숭고한 사랑.잊을 수 없는 추억)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며, 근경에서 모여 나는
원줄기는 높이 20~50cm 정도로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라지고, 전체가 백색
면모로 덮여있고 수과는 길이 1mm정도의 타원형으로 유두상의 돌기가 있다.
한라솜다리와 달리 포엽이 드문드문 달리며, 중앙에 달린 잎은 피침형 또는
장타원형이고 두화털이 없는 부분이며 열매는 수과, 갓털은 연한 황백색이다.
솜다리에 비해 키가 작고 외총포편의 가장자리에 긴 털이 거의 없다. 식용하기도 한다.
2013년 국립산림과학원이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고성 향로봉 일대에서 멸종위기종인
왜솜다리를 다수 발견했다. 왜솜다리는 1970~1980년대 설악산 등지에서 무차별 채쥐로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한 종이다.
오늘 산행중에 첫번째 아주 힘든 구간을 내려선다.
2년전과는 달리 좌측의 안전한 구간으로 등로를 많이 돌려놔서
예전에 비해서 조금은 편하게 내려온 셈이다...숨 한번 크게 쉬고
물 한모금을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암봉(13:15)
비탐구간임에도 심심찮게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안부(13:20)
계속되는 내리막길
무명봉(13:25)
무명봉을 지나니 멋진 암릉이 보이고 우측으로 우회하면서
걷는데 등로가 마사토(암석의 풍화작용으로 생성된 흙을 말하는데,
순수한 우리 말로 굵은 모래)에다 등로가 젖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암릉으로 올라간 다음에 또 다시 내려선다
안부(13:28)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가 걷히는게 아니라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쉼터(13:32)
비탐구간이라면서 이런 시설물은 뭐람...
이런걸 두고 二律背反的이라 했던가...
통나무 계단 사이로 싸리버섯 幼生들이 보인다
2번째 쉼터(13:35)
조망바위(13:36)
촛대재(13:40)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피아골에서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 상관평
넘어가는 고개로 촛대봉 아래에 있는 고개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예전에 용추계곡 끄트머리에 사기막골이 있어 도자기 보부상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며
대야산을 경계로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많았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고개가 많이 있다
서남쪽으로는 밀재와 고모치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불란치재와 버리미기재가 있다
촛대봉을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이곳 역시 비탐구간이지만
정규군(국공파) 대신에 용병(대간 산꾼)이 설치한 가느다란 자일에다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암릉 구간을 조심스레 오른다
한구비 치고올라 숨한번 크게 쉰 다음에...
2번째 암릉을 치고 오르니 대야산을 멋지게 볼 수 있는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13:55)
산이 구름을 탓하지 않고,
물이 굴곡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것이 곧 긍정이다.
시비(是非)가 끊어진 자리,
마음으로 탓할 게 없고,
마음으로 낯을 가릴 게 없는 그런 자리의 쉼이다.
자유(自由)와 해방(解放),
누구나 내 것이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
그 길은 쉼에 있다.
물들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쉼에 있다.
법정 스님의 “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중에서
모든게 삼세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촛대봉을 향한 3번째의 암릉구간을 치고 오르는데
나같은 숏다리의 산꾼들은 상당히 불리한 곳이다
힘들게...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치고 오른다
조망바위2(13:58)
지나온 대야산의 모습
대야산이 정말 멋지게 보이는 곳이지만 아무것도 안보이니
肉眼이 아닌 慧眼으로 대야산을 상상하면서 바라본다
암릉구간의 위험지대를 벗어나 정상으로 올라서니
예전에 묘지가 있었던 자리는 후손들이 移葬을 했는지
봉분은 보이지 않고, 정상 위의 나무에 대간꾼들의
시그널만 몇장 보인다
촛대봉(661m:14:03)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청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불란치재에서 대야산 오름길에 있는 봉우리로 암릉 능선길에
앙증맞은 정상석만 있을 뿐 별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인증샷
촛대봉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안개가 계속 짙어지고
가는 보슬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높은 습도에다
초반에 맞은 비 때문에 옷이고 뭐고 다 젖어 버렸다.
속된말로 “기왕 버린 몸”...걍!...그냥 산길을 걷는다
안부(14:10)
비에젖은 하늘나리
불란치재를 향한 계속되는 내리막길
불란치재로 내려선다
불란치재(510m:14:16)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괴산군 청천읍 관평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버리미기재로 지나가는 922번 지방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문경과 괴산을
잇는 중요한 고개였다고 한다.
택리지(擇里地)로 유명한 조선 지리학자 이중환은 불한령(弗寒嶺)이라 기록했고
대동여지도에는 불한령(不寒嶺)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불(弗)과 불(不)은 같은 의미로서
풀어쓰면 춥지 않은 고개라는 의미이고, 이 불한령이 불한치 그리고 불란치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다...불한령(佛寒嶺), 불원치(佛院峙), 불한현(佛寒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춥지않은 고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길로 두 봉우리
양쪽으로는 다시 장성봉과 대야산이 가로막고 있어 한겨울에도 바람이
따스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인듯 하다
또한 ‘불이 났던 고개’라고 하여 불란치재라 불린다고 한다
'불이 났던 고개'라는 붙임보다는 '不寒嶺'에서 유래됐음이 그럴싸하다.
아무튼 문경 완장리와 관평리를 통하는 이길이 버리미기재에 포장도로를
빼앗기고 점점 풀섶으로 뒤덮혀지는 통에,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그냥
마루금 능선으로만 대간산꾼들에게 기억될 뿐이다.
불란치재 관평리쪽의 모습
불란치재 남쪽으로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로 이어지는데 차량이
다녀도 될만큼 넓은 비포장 도로가 보이고, 북쪽의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쪽인데
오늘 대간 산행 시작점인 밀재에서부터 버리미기재까지는 충북과 경북의
道界를 따라서 걷는 셈이다
완장리(完章里)는 1480년경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과 중국의
지리학자 "두사충(杜師忠)" 이 충청도 땅을 거쳐 경상도로 가는데
충청도 땅을 거쳐 경상도로 가는데 높고 험한 불산리(現:불란치재)
고개를 넘어 너른 들판에 이르니 숨이 찬 가슴이 뻥 뚫려 완장(浣場)
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完章이라 부르게 된 동기라고 하며,
관평리(官坪里)는 이 마을에서 벼슬한 사람이 많이 배출하였다 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상관평, 중관평, 하관평 3개의 촌락이 있다.
* 두사충(杜師忠)은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로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서 귀화한 인물로 풍수지리의 大家로 알려졌다
명군에서는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했다고 하며,
이순신 장군이 죽은 뒤에 묘자리를 처음 봐주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는 그가 명군의
횡포에 시달리는 조선의 서민들을 위해 자신이 찾은 명당들의 위치를 적은 예언서인
<두사충비결>(杜師忠祕訣)이란 것도 있다.
중국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섬서성 두릉(杜陵)에서 기주 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
(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고 누이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도독으로 참여했던 진린(陳璘)에게
시집갔기에 진린의 처남이 되며 이순신 장군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귀화후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정착했으며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는데, 이것은 현재 대구 남구 대명동과 도시철도 대명의 유래가 되었다.
두사충은 사후 현재 수성구 만촌2동에 있는 옛 남부정류장부근에 묻혔으며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고, 생전에 늘 단을 쌓고 매월 초하루마다 고국의 천자에게 배례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무덤 앞에는 명나라를 기린다는 뜻에서 모명재(慕明齋)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불란치재를 올라서니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지기에 얼른 스마트폰은 비닐로 싸고
라디오는 베낭속으로 넣고, 똑닥이 카메라만 넣었다 꺼냈다 하는데, 벌써부터
작동이 됐다, 안됐다를 하는데 아무래도 오늘도 지난주처럼 속을 썩일 모양이다
무명봉(14:25)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마음은 급해진다
폐헬기장(679m:14:30)
폐헬기장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안부(14:31)
안부를 지나자마자 앞을 가로막는 암릉구간...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제...
스틱을 접어서 베낭에다 꽂은 다음에...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다시피 정상으로 향한다.
쉬 영감님!...밥은 안굶고 사는지 모르겠다
왔던길을 뒤돌아보니 촛대봉이 범여에게 한마디 던진다.
비를 맞으면서 청승맞게 뭔 개고생을 하느냐고 충고를 한다
조망바위(14:45)
잠시후에 오를 731m봉을 바라보면서 오르막을 향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두는 것 이는 곧 法이다.
法이란 물(氵)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去)는 뜻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역사의 발전이 곧 법을 지키는 것이겠다.
‘자연이 곧 법이다’ 오늘 구간에서의 배움이다.
불란치재 계곡 끄트머리에 있는 대야산 벌바우 주차장이 아련히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여야 할 둔덕산 역시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둔덕산하면 빼놓을 수 있는 인물이 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의병대장이었던
운강(雲崗)이강년(李康䄵:1858~1908)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이자 을미사변 이후 문경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낙인, 호는 운강으로 무과에 급제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을미사변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 활약했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켜 1908년 7월까지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소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해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9월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에
처형되었으며, <운강문집>, <운강선생창의일록>의 저서를 남겼다.
전설에 의하면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58년 둔덕산이 바로 보이는 가은읍 완장리에서
태어났는데 출생 3일전부터 둔덕산이 웅웅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며 신기해하였으나 선생이 태어나자 울음이 그쳤고, 후일 둔덕산 기운을 타고난
운강은 국운이 위태롭던 한 말에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여 13년 동안을 오로지 의병대장으로서 싸우다
순국하였으니, 이는 곧 통시바위와 관련된 마고여신(할미)이 나라를 위해 특별히 점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미륵바위(彌勒巖:688m:14:47))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인의 몸매처럼 멋지게 생긴 암릉으로 대간길의
뭇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바위로 일명 촛대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집채 만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우회를 허락치 않으며, 비록 짧지만 지친 가랭이가
힘주어 벌리기엔 너무높아 보인다
미륵바위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미륵부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조금은 억지스런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 대야산 구간에는 산 기슭에 사찰을 보기가 힘들정도이다
또 다른 설은 아기가 없는 여인들이 미륵바위를 보고 소원을 빌면
아이가 생긴다고 하여 미륵바위라 불렀다고 하는데 佛家에서는
아이를 원하면 관음보살(觀音菩薩)에게 빌면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하는데, 뜬금없이 미륵보살이라니...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분의 억지스러움에 씁쓸함을 느낀다
완만한 오르막길
조그만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 다시 내리막길로 향한다
안부(14:50)
여인의 궁뎅이처럼 생긴 암릉위를 올라서니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731m봉이 나온다
731m봉에 있는 암릉을 살짝 우회하여 올라간다
731m봉(15:00)
가야할 곰넘이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안부(15:02)
다시 곰넘이봉을 향한 암릉구간으로 오른다
지나온 암릉구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편하지만 먹은 것이 없어서
지치고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탓인지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능선 정상에 올라서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집채만한 암릉이 나오는데 저 암릉 윗쪽이 곰넘이봉이다
비의 영향인지 똑닥이의 렌즈에 습기가 차니 상당히 불편하다
베낭을 벗어놓고, 곰넘이봉이라 부르는 바위위로 올라간다
곰넘이봉(734,4m:15:10)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경계에 있는 암릉의 봉우리로
옛날에는 커다란 암릉위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앙증맞은 정상석이 서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암릉위에 있었던 정상석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끄트머리 소나무 위에
대간꾼들의 시그널만 잔뜩 걸려있어 이곳이 곰넘이봉을 말해준다
바위위를 오르기 싫어하는 산꾼이나 암릉 아래의 우회길이 있어 방심하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곰이 넘어 다녔다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곰넘이봉 오기 직전의 암릉이 곰의 등처럼 생겼다해서 부른 이름이다
곰넘이봉 정상에 있는 대간꾼들의 흔적
힘겨루기(?)
조망바위(15:10)
곰넘이봉을 지나면서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는 폭우로 변해버리고
지금부터 비를 피하기에는 백약이 무효이다...우짜겠노,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수 밖에...
조심스럽게 급경사를 내려서니 나를 비를 쪽딱맞고 있는
일월비비추가 측은하게 보인다
암릉 위로 올라간 다음에...
암릉 아래로 내려서니 대간꾼이 설치한 듯한 자일을 부여잡고 내려선다
안부(15:16)
무명봉(15:18)
무명봉을 내려서니 조망이 좋은 암릉위를 통과하지만 조망은 포기한다
잠시후에 오를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675m봉은 왜이리도
높게 보이노...체력은 바닥나고, 비를 맞는데 머리가 아플정도의
폭우는 계속된다.
또 다시 만나는 암릉구간...
이곳이 보기는 평범해 보여도 오늘 산행중에 가장 위험한 난코스다.
손가락보다 가는 자일을 부여잡고 미끄러운 암릉을 내려서는데
금방이라도 끊어질듯한 자일도 불안하지만 비에 젖은 암릉이 엄청 미끄럽다.
그리고 암릉 좌.우의 아랫쪽은 천길 낭떠러지라 발한번 삐끗하면 黃泉가는
지름길일 듯 싶다
다행히 황천길은 면한 듯 싶다...암릉 아래로 내려서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크게 쉼호흡 한번하고 똑닥이를 작동 시키는데 비에 젖은 똑닥이 카메라가
꼬라지가 났는지 작동을 멈춰 버린다
하는 수 없이 비닐로 꽁꽁 묶어둔 스마트폰으로 간간히 기록 사진을
찍으면서 버리미기재로 향한다
잠시후에 오를 675m봉이 까칠한 모습으로 지쳐있는 산꾼의 氣를 죽인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체력은 바닥을 보이는데 아직까지 암릉구간이 더 있다니...
675m봉 갈림길(15:35)
근데 이게 뭐여...
로프를 타고 올라가야 할 675m봉 좌측으로 샛길이 나있고
사면길로 대간꾼들이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예전 같으면
내 성질에 사면길은 쳐다도 안보고 올라 갔어야 할 능선을
과감히 포기하고 좌측의 사면길로 나도 모르게 그 길을 택한다.
핑계야 좋다...암릉길에 비도 오는데 무리할 필요야 없잖은가...
거기다가 저 능선을 3번이나 걸었는데 또 뭘 바란단 말인가.
자기 합리화를 시키면서 사면길을 향하는데 갑자기 양넘 지갑줏은 기분이다
대간꾼들이 이 길을 많이 다녔는지 등로는 반질반질하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나만 몰랐단 말인가?...
합류점(15:45)
사면길을 돌아서 675m봉에서 내려오는 마루금과 합류하여
버리미기재로 향하는데 어림잡아 20분 이상을 단축한 느낌이다
안부에서 올라서니...
용도 폐기된 듯한 군 교통호가 나오고 곧이어 헬기장을 만난다
헬기장(550m:15:50)
안부(15:55)
안부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버리미기재 초소가 보이고 산꾼들이 보인다
철조망이 처져있는 수로 아래로 낮은 포복을 하여 922번 도로로 올라선다
버리미기재(16:03)
괴산군 청천면과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로 92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옛날 기근이 심할 때 이곳에서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조그만 밭떼기를
빌어 먹이던 곳이라는 뜻이고 또 ‘보리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의미로
‘보리먹이’가 다른말로 ‘빌어 먹이다’라는 경상도 방언이 변음되어
지명이 되었다는 고개이며 또 아홉번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빌어먹이던
팔자가 지독하게도 박복한 주막집 과수댁이 고단한 삶을 살며 넘나들던 고개이었다
민초들의 배고픔과 척박하고 고단한 삶은 보는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버리미기재 초소가 있는 922번 도로로 올라서니 창원에서 왔다는 대간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행여!...버스가 가은으로 가면 좀 태워 달라고 부탁하려
했더니 괴산쪽으로 간다고 해서 가은 택시를 호출한 다음에 한참을 기다려
택시를 타고 가은으로 향햐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나중에는 양동이로
붇는듯한 비가 내린다...그나마 천만 다행인게 산행할 때 이런 비가 내렸으면
큰일날뻔한 생각에 아찔함마져 든다
가은아자개 장터 정류소(16:50)
가은의 버스정류장 이름과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시장의 지명도 가은 아자개 장터이다.
가은읍은 아자개의 이름이 붙혀진 장터를 비롯하여 곳곳에 아자개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개발된 탄광이 유명한 곳으로 한참 탄광산업이
활황이었을 때는 인구가 2만명이 넘었다고 하나, 1994년 탄광이 폐광되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고, 읍세(邑勢)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아자개(阿慈介, 생몰년 미상)는 신라의 장수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아버지이다.
신라의 상주 고령군 가선현(嘉善縣,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아자개의 이름이 사서(史書)에
따라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자개(阿慈介) 아자개(阿慈个) 아자개(阿字蓋) 등 여러가지
한자로 표기되었다.
또 다른 이름이 전해지는데,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름이 원선(元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비가기》에 따르면, 아자개는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흥왕의 3남 김구륜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김원선을 낳았는데, 그 김원선이 아자개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아자개는 원래 농민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면서 세력을 키워 신라의 장군이 되었고 천수(天授:고려 태조의 연호) 원년(918년)에
고려로 망명했으며 현재 충남 논산시에 현재 아자개(阿慈介)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묘가 있다
문경시 가은읍(加恩邑)의 모습
가은(加恩)은 왕건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공을 기리는 뜻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은혜를 더한 곳’이라는 의미로 ‘가은현(加恩縣)’이라는 지명을 하사한 곳이다
가은은 옛날 상주지역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호족들이 득세할 때, 아자개가 웅거한
고향이다... 아자개(阿慈介)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이 지역에서 농업을 종사했지만,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 세력들이 봉기하자
아자개도 885년(헌강왕 11년)~887년(진성여왕 1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으로 자칭하였는데, 당시 호족들은 지역마다 세력과
지지기반을 토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견훤(甄萱:867~936)이 892년
무진주(武珍州:신라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주치(州治)는 현재의 광주)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를 근거지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서 웅거(雄據)하고 있었으며,918년
(고려 태조1년) 7월에 고려에 항복했ㅇ며, 상주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의 호족들
도움으로 왕건은 통일왕조 고려를 세우는데 성공한다.
아자개 정류장에 도착하니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대합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17시 25분에 점촌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린다
잠시후에 버스가 도착하고 45분만에 점촌터미널에 도착한다
점촌터미널(18:00)
점촌터미널에 도착하여 18시 10분에 출발하는 서울 강남터미널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하니 매진이 되어서 19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대합실내의 분식집에서 따끈한 떡국 한그릇으로 점심겸 저녁을
해결하고 대합실 의자에서 쪽잠을 잔다
점촌발 → 서울 경부행 버스표
점촌터미널 버스 시간표
19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서 서울로 향하는데 장마철이라 그런지
도로는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서 조금 이른 시간에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