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구간-문장대에서 늘재까지
속세(俗)를 떠나려다(離)... 근심만 가지고 왔다
☞ 산행일자: 2023년 11월 26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간간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8.5km +들머리4.3km / 6시간 2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화북탐방지원센터-오송교-반야교
성불사입구-오송폭포-쉼터-쉼터-쉴바위-다리-쉼터바위-쉼터
늑대바위-문장대 광장-문장대-문장대 헬기장-공터-안부
안부-암봉-안부-안부-918.5m봉-조망바위-암봉-안부-안부
706.3m봉-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697.9m봉-무명봉
안부-암봉-안부-무명봉-593m봉-무명봉-무명묘지-갈림길
밤티재-무명묘지-안부-무명봉-조망바위-암봉-697.1m봉-안부
무명봉-무명봉-안부-안부-무명봉-무명봉-안부-629m봉-안부
무명묘지-늘재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북면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매달 대엿번씩 다니는 산행을 이번달에는 2번밖에 못했더니만 컨디션이 엉망이다.
마음과는 달리 이제는 체력이 받쳐주지 않기도 하지만, 주말마다 내리는 비가
태클을 걸어대는데는 우중산행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지난주는 자식 많이 낳은 죄(?)로 고생만 하시다가 生을 마감하신 장모님의
喪을 치르느라 산행을 하지 못하고, 또다시 2주만에 산행에 나선다.
이제 백두대간이 몇 구간 남지 않았는데, 이번주는 중간에 빼먹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늘재의 땜방 구간을 마치기로 하고, 속리산 구간의 100대 명산을 하는
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이른 아침에 대충 베낭을 챙겨서 집에서 가까운 양재역에서
산악회 버스에 올라 습관처럼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정차하는 바람에 깨어나니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 화장실에 들렸다가 다시 버스는 출발하고 30분이 지나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주차장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09:50)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에 도착한 다음에 잠시 여유로움을 가진다
소위 100대 명산을 한다는 등산객들은 대부분이 2~30대의 젊은층으로
보이는데 늘 혼자 다니는 습관 때문에 젊은 친구들이 다 출발하고 난 다음에
혼자서 산행 채비를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0:05)
오늘 날씨는 한파 특보가 내리고 무지무지 춥다고 예보한 기상청의
호들갑에 옷을 잔뜩 껴입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춥기는 커녕 포근한
날씨에 산행하기에는 더 없아 좋은 날씨이다...산행 시작 10분도 안되어
너무 더워서 여러겹 입었던 옷을 2겹이나 벗고나니 괜찮다.
우리 산꾼들이 왜 기상청을 구라청이라 부르는 이유를 저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오송교(10:10)
몇번이나 왔던 길이지만 늘 올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면서
가슴을 설레게하는 문장대 가는 길...옷을 2겹이나 벗었는데도
또 다시 땀이나기 시작한다
반야교(10:12)
반야교에 도착하여 베낭을 내려놓고 좌측의 계곡 100m지점에 있는
오송폭포를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조금전에 옷을 벗으면서 빠졌는지
장갑 한쪽이 사라졌다...베낭을 내려놓고 오송폭포가 아닌 주차장쪽으로
잃어버린 장갑 한짝을 찾아 나선다
반야교에서 주차장 바로 위에까지 왔는데도 장갑 한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포기를 하고다시 베낭을 벗어논 성불사 입구로 향한다
포기를 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오송교 다리 가운데에서
장갑 한짝이 쥔장인 범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에공 미안혀...
잃어버린 장갑과 반갑게 조우를 한 다음에 다시 반야교로 향한다
다시 반야교(10:21)
초반에 버벅거리는 바람에 아까운 10분을 허비했지만 산악회를
따라서 문장대, 천왕봉을 찍고, 법주사로 향하는 길이 아니기에
누군의 간섭도 없이 홀로 대간길 땜방을 하고 늘재에서 화령으로
가서 상주가는 버스타고 귀경을 하는 코스라 신경을 쓰지않고 가는
여유로운 산행길이다
성불사 입구에서 오송폭포로 향하는데 오송폭포 우측에 있는
성불사 뒷쪽으로는 문장대 방향으로 오르지 않고 신선대쪽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있다
2021년 6월 6일에 3차 대간길에 들렸으니 벌써 2년반이 흘렀구나.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폭포의 물줄기는 흘러 내리고 있다
오송폭포(五松瀑布:10:23)
속리산 신선대에서 발원한 오송폭포는 시어동 오송정골 어림대 안에 있는
폭포로 성불사의 동쪽 아래에 있으며 높이는 7m 정도되는데 5층 대(臺)로 되었다.
밑에 학이 서식하였다는 학소대가 있어서 경치가 좋고 세조가 올랐다는 어림대(御臨臺)가
있으며, 옛적에는 오른쪽으로 오송정(五松亭)이 있었고, 지금도 그 터에 오송이 항상 푸르다 하여
오송폭포라 한다고 하며 이 곳의 칡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데, 세조가 문장대에 오르기 위하여
이 산을 오르다가 칡에 걸려 넘어지면서 호령하여 나무라자 그 때부터 땅으로 뻗지 않고
나무로 오른다고 한다.
다시 반야교(10:25)
입산 통제시간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제도권 등로에다 우리나라의 알아주는 등산코스라 그런지 그리 낯설지가 않다.
거의 대다수 등산객들이 스틱도 잡지않고, 가벼운 베낭...거기다가 베낭도
메지않은 등산객들이 심심잖게 보이는데, 나처럼 꼰대나 대간길을 나선
산꾼들은 하나도 없고, 한결같이 100대 명산이라는 하기위해 산악회를
따라 나선 등산객인 모양이다
오랫만에 등산객들이 붐비는 등로를 걷다보니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독립군 스타일의 산꾼인가...이런 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걸어서 문장대를 지나서 비탐구간으로 들어서는
방법 이외는 없을 듯 하고, 숙명이라 생각하며 말없이 걷는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5- 01:해발 449m↓화북주차장)
쉼터(10:39)
오랫만에 풋풋하고 싱그러운 사람들의 향기를 느낀다.
젊은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저 모습이 참으로 부럽다.
그래 맘껏 즐겨라...세월을 너희들을 기다려주지는 않을끼다
문장대를 향하는 빡센 오르막길...이곳부터 본격적인 苦行이 시작된다
쉼터옆 돌무더기에 나도 돌 하나를 얹어놓고 1주일전에
生을 마감하신 聘母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면서...
늘 딸을 많이 낳은 죄(?)로 큰 소리한번 내지않고 오직 자식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사시다가 가신 장모님...몹쓸병에 아직은
조금 더 사셔도 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가셨으니 아쉽기만 하다.
그러면서 큰 사위인 나에게 미안한 맘 때문인지 고통이 엄청 심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싫은 내색하지 한번 않으셨고, 마지막 6개월을
우리집에 계시면서 나에게 의지하신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이제 모든 짐을 내려 놓으시고 부디 편안한 永眠에 접어드소서...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문장대를 찍고 내려오는 모양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5- 02:해발 556m↓화북주차장)
잠시 등산객들의 등쌀(?)에 벗어나 호젓하게 홀로 걷는 것에 용서가 안된다
금새 뒷쪽에 2군데의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이 웃고, 떠들면서 올라가는데
그 일행들에게 비켜주고 천천히 가려는데 또 뒷쪽에서 등산객들이 몰려온다
쉼터(10:55)
계속되는 오르막길
산행길에 젊은 친구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청량제처럼 들리는데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난 저 나이때는 죽기 살기로 일만하여
저렇게 다니는 걸 꿈도 꾸지 못했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의
젊은 시절과 같은게 1도 없는 것 같다...그래! 즐길 수 있으면
맘껏 즐겨라
숨이 꼴깍 넘어갈 것만 같은 급경사의 오르막길
이런 곳은 범여에겐 쥐약같은 코스이다...등산객들에게
무조건 길을 양보하면서 최대한 천천히 걸어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쉴바위(11:06)
‘쉬어가는 바위’란 뜻인 모양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5- 03:해발 708m↓화북주차장)
쉴바위에서 문장대까지 1.6km, 화북주차장까지 1.7km이니
이곳이 정중간 셈인데, 맞은편에 있는 칠형제 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산꾼의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문장대로 향하는 길을 나선다
쉴바위를 지나면서 문장대로 가는 코스중에 가장 힘든 코스이다
쉴바위를 지나면서 바라본 칠형제 바위(역광이라 그림이 좀 그렇다)
오늘은 백두대간 산행 코스중에 가장 難解한 곳이긴 해도
산행 거리가 짧아서 큰 걱정을 하지않고, 천천히 오르막길로 향한다
이정표를 지나면서 멋진 다리 하나가 암릉 사이를 연결해 준다
다리(11:20)
문장대 오르는 구간은 이름없는 멋진 암릉들이
많아서 마치 수석전시장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5- 04:해발 806m↓화북주차장)
쉼터바위(11:28)
마치 여인의 엉덩이처럼 보이는 민망한 모습을 하고있는
쉼터 바위가 나오지만 천천히 걸어가는 터라 그리 힘들다는
생각없이 쉬지않고 문장대로 향한다
다시 빡센 오르막은 시작되고...힘들지 않고, 노동의 댓가를
바랄 수 없듯이, 땀을 흘리지 않고 산행을 한다는건 어쩌면
무미건조한 일이지도 모르겠지...
예전에 푸르름을 유지했던 산죽에게 약을 쳤는지 모두 다 죽은 모습이다
쉼터(11:33)
쉼터에 올라서서 크게 한번 쉼호흡을 한 후에 우측으로 향한다
앙증맞은 데크목 다리가 범여를 반긴다
늑대바위(11:34)
많은 산행기에 늑대바위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는 암릉...
출입금지 목책이 처져있고, 그 아래는 비박지로 끝내줄 듯
싶은 멋진 공터가 산꾼을 반긴다
늑대바위 윗쪽의 모습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늑대바위 윗쪽은 칠형제 바위가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지나친다
늑대바위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멋진 奇巖이 보이는데 저 모습이
마치 설악산 비선대에서 마등령 오르는 길에 있는 관음봉처럼 멋지다
이제 문장대로 오르는 길에 험하고 힘든 암릉 구간은 다 지난듯 싶다
남.여가 쓴 벙거지가 똑같은데 아마도 연인인듯 싶다.
보기가 참으로 좋다...반대 급부로 자꾸만 쪼그라드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만 보이는 내 모습...현실로 받아 들이자꾸나
문장대는 점점 가까워 지고...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5- 05:해발 888m↓화북주차장)
아랫쪽 계곡에서는 보지못한 얼음들이 보이지만 오늘은
구라청이 내린 한파 특보와는 정반대의 포근한 날씨이다
먼 길 / 나태주
너와 함께라면
멀어도 가깝고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다운 길
나도 그 길 위에서
나무가 되고
너를 위해 착한
바람이 되고 싶다
문장대 광장이 거의 다 온 모양이다...왁자지껄거리는 사람소리가 요란하다
문장대 광장(11:55)
문장대 광장에 올라서니 등산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마치 남대문 시장이나
광장시장에 온 것 처럼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늘 혼자 산행을 하는 나로서는 조금은 어색한 풍경이지만
오랫만에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채취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앞에 보이는 문장대 거점검문소라는 초소가 있고 그 뒷쪽 봉우리가
1,016.2m봉인데 암릉 옆의 이동통신탑쪽이 백두대간의 주릉이나
갈 수도 없거니와 갈 필요도 없이 우측 광장을 지나 문장대로 향한다
구조이정목(현 위치번호:↑문장대:속리 01- 07:해발 1,006m↓법주사)
문장대 광장의 이정표
문장대 광장 좌측으로 5.8km를 내려가면 고찰 법주사로 향하는 길이다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로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776년(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眞表律師 )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광장을 지나서 문장대로 오르는 등로 우측의 옴팍한 바위 한 곳에
바람을 피하기 좋은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밥상을 펴고 만찬을 준비한다
점심만찬(11:57~12:15)
독립군의 밥상이란 점심이래봐야 인절미 한팩에다 따뜻한 커피 한잔에
두유가 전부이다...어쩌면 이게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인지도 모른다.
양지바른 곳에서 간단한 점심을 해결하고, 베낭을 베개삼아 잠깐
누웠다가 문장대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쉬엄쉬엄 걸어서 문장대로 올라서니 전국의 산악회에서 온
등산객들이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2개나 서 있는 정상석
쟁탈전이 치열하다...나마저도 저기 대에 끼여들면 안되겠지
문장대(文藏臺:1,031.7m:12:18)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에서 비로봉에 이어서 2번째 높은 봉우리로 흰 구름이 항상 정상에
걸려 있다고 해서 운장대(雲藏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평생에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을 간다고 했다
운장대라 불리운 문장대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복전암(福田庵)에서
감로수(甘露水)를 마시며 요양을 하고 있을때 꿈속에서 월광태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현몽하여
운장대에 올랐더니 “삼강오륜(三講五倫)”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로 불리웠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3천명이 앉을만하다고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문장대 정상 아래에는 2개의 표시석이 있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山水들이 즐비해 俗離 36景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 第一景이 이곳 문장대로 옛부터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10번도 넘게 문장대에 온 산꾼이 저런것에 연연하면 안되지
싶어서 정상석 윗쪽의 문장대로 오르는데 꼭대기 오르는 길에
강한 바람에 세차게 불어온다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암릉으로 올라서니 온 사방이 두루 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정상에는 부산 금정산의 고당봉 정상에 있는 금샘(金泉)과 흡사하게 생긴 웅덩이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보은현(報恩縣) 편에 '속리산 문장대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 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 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누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중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으로 들어 간다'는
기록이 있다.
달천(達川:보은군·괴산군·충주시를 북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은 남한강과
합류하여 따라서 한강, 금강, 낙동강 3대강이 속리산을 기점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해
나누어져 흐른다... 바로 그 삼파수(三派水)의 중심이 이곳 속리산이다.
일부에서는 문장대가 아니라 속리산의 주봉인 정상 천왕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간에 속리산이 삼대강의 발원지가 되는 삼수지원(三水之源)인 것이다
문장대 정상의 안내판
문장대에서 바라본 속리 주능선의 모습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이루는 12종산의
하나로, 그 산세가 웅대하고 기묘한 바위봉우리들이 구름위로 솟아 있어 옥구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소금강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기암괴석과 맑은 물,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대한 8경"에도 꼽히는 속리산은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峰, 8臺, 8石門의 24絶景을 꼽는다.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되는데, 8봉은 천황봉을 비롯해
비로봉, 문수봉, 보현봉, 길상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를 비롯해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를 말하며,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을 일컫는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바로 앞은 관음봉은 손에 잡힐듯하고 그 너머로 묘봉, 상학봉, 미남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관음봉 넘어의 묘봉은 산세가 빼어나고
아름다워 묘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관음봉(觀音峰:982.9m)
법주사 북쪽 계곡 안쪽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북쪽으로 큰 골 건너에 있으며
관음(觀音)이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말하며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보살(菩薩)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로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는 보살로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기적은 〈관음경>, 〈법화경〉 등 많은 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잠시후에 내가 저 암릉구간을 통과하여 밤티재로 가야하는
속리산 구간의 백두대간 마루금이다...예전에는 국립공원에서
저 곳을 비탐구간으로 정해놓고, 워낙 단속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어둠속에서만 걸었는데, 최근에는 단속을 하는둥, 마는둥 느슨한
탓에 오늘 홀로 걸어 볼려고 왔지만, 워낙 험하고 힘든 암릉 구간이라
조금은 긴장이 되는 느낌이다
가야할 능선 끄트머리에는 밤티재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 내가 후반에
걸어야 할 경미산(?:697.1m)과 백악산(百岳山:855.5m), 우측으로 보이는
옴팍한 곳이 오늘 내가 산행을 종료해야 하는 늘재이다
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청화산(靑華山:987.7m)과
도장산(道藏山:828.5m)으로 이어지는 상주 십승지 구간이 보이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도장산의 모습이 심상찮다
같은 마루금內에서 같은 봉우리를 바라 보아도 느낌이 이렇게 다르니 만약 마루금
바깥(外)에서 보면 어떨까...다행히도 속리산 부근에는 이런 산이 있다.
천왕봉 동쪽 우복동 건너에 자리 잡은 도장산이다.
도장산에 서면 형제봉-천왕봉-입석대-문장대 능선이 거침없이 一字를 그리고
있는데, 하늘에 걸린 병풍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 수 있다.
속리산 옆에 이런 산(도장산)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안에서도 보고 바깥에서도 보고 해서 균형잡힌 객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은 아닐까 싶은데, 이미 알아버린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물이나 사람이 지닌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 대간의 가르침이다.
신라 말기의 문신이자,유학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이곳 속리산의 비경에 반해 다음과 같은 멋진 시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은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 구나~!
문장대 정상에 본 백두대간 마루금(좌)과 칠형제 능선및 산수유릿지(우)
속리산국립공원 화북 공원 관리소에서 청법대로 연결된 능선으로
1995년 청주 청심산악회에서 개척하였는데 개척당시 9피치를 개척하던
김 선주씨가 추락하여 사망한 곳으로 故 김선주씨를 기리는 뜻에서
9피치 40m 벽을 선주벽이라 명명했다하며 그 때가 산수유가 필 무렵이어서
산수유릿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백두대간 마루금 뒷쪽으로는 162지맥을 끝내고 걸어볼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주 십승지 청화산~도장산~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렸하게 보인다
인증샷
지난해 7월에 후배들과 걸었던 문장대에서 신선대~천왕봉~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左(상주방향), 右(보은방향)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속리산이 왜 속리산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는데, 산은 산골짜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산다... 그래서 俗(人+谷)이란 말이 나왔다.
즉 사람들은 산이 만든 골짜기에서 산에 의지하며 산다는 의미이다.
속리산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떠난 산이라는 뜻이다.
왜 사람들이 속리산을 떠났을까?...속리산이 무서워서 떠났을까?
속리산을 밖에서 보면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져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 찾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순하고 또 순하다. 속리산이 무섭다는 말은
가당치 않으며 속리산이 무서워 사람들이 떠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속리산이 너무 깊어 떠났을 것이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 골짜기 끝자락에만 옹기종기 모여 사니 사람들이 속리산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속리산은 참으로 ‘산이 깊은’ 말 그대로의 속리산이다.
다시 문장대 정상에서 10분정도 머물다가 정상석이 2개나 있는 넓은
곳으로 내려오니 조금전과는 달리 그리 많지 않아서 사진 한장을 담아 본다
조그만 정상석 뒷쪽으로 목책을 쳐논 저곳으로 내려가면
충북알프스로 이어지는 관음봉으로 가는 코스인데
비탐구간에다 등로가 상당히 험한 구간이라 2015년 여름에
2박 3일간의 비박을 하면서 걸었던 추억이 아련하다
문장대 큰 정상석 앞에있는 출입금지 목책을 넘어서 비탐구간으로
들어서는데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고, 그냥 통과한다.
이곳부터 오늘의 날머리인 늘재까지가 출입금지 구간이다
예전과는 달리 단속요원도 없고 등로도 뚜렸하다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문장대 헬기장이 나온다
문장대 헬기장(12:30)
문장대 주변에는 580여종의 동물과 670여종의 식물이 서식한다고 하며
특히 희귀식물인 백색 진달래를 비롯한 주모과 금낭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문장대 헬기장 한 켠에는 예전에 대간꾼들의 일거수일투족으로
감시하며, 갑질을 해대던 CCTV가 生을 마감한 채 누워있다.
한동안 대간 산꾼들에게 엄청난 갑질을 해대면서 산꾼들의
호주머니(벌금)를 많이 털었제...이제 니 임무는 끝났으니
대간꾼들 괴롭히지 말고 푹 쉬거라...
헬기장에서 문장대를 향해서 뒤돌아보니 어떤 여인이 조심해서 잘 가시라고
큰 소리로 작별 인사를 보낸다...자세히 보니 아침에 타고온 버스에서 만난
안내산악회의 대장님이시다...나 역시 인사를 건내고 숲 속으로 들어선다
등로에서 들어서니 등로는 뚜렸하고, 예전처럼 국공파의
등쌀에 가슴 조리면서 걷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맘이 편하구나.
不安과 平安은 글자 한자 차이일 뿐인데 느끼는 감정은 정반대라...
참으로 오묘한 이치로구나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이 비탐구간에서 벌어진다.
예전에는 이 구간에 시그널을 걸려고 생각조차도 못했는데
지금은 당당하게 스그널이 걸려 있으니, 대간꾼들이 간이
부었는지, 아니면 아니면 국공파들이 단속을 포기했는지
홀로 걷는 범여의 아둔한 머리로는 알 길이 없다
좌측 능선방향으로 대간길이 이어지나 암릉구간이라 갈 수가
없는 길에 아주 쓸만한 알루미늄 사다리 하나가 방치되어 있다
예전에 이곳에 CCTV가 있었던 자리인데 그걸 철거하고 그냥 사다리를
내버려둔 모양이다...국립공원 직원들이 私費를 들여서 저 사다리를
사지는 않았을테고, 공금으로 구입했다면 분명히 세금으로 했다는
얘기인데, 민초들이 낸 돈으로 저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사면으로 뚜렸한 등로가 있어서 그 길로 향하면서 오르지 못한 암릉을 바라본다
공터(12:33)
오르지 못한 암릉구간을 바라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예전에는 없었던 산꾼이 아닌 동물들의
이동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보이기 시작하고...
또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등로는 마사토라 상당히 미끄럽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는 첫번째 바위가 보인다
안부(12:37)
안부에서 산죽 사이로 이어지는 암릉구간으로 향한다
대간꾼들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올라서니...
손가락만한 로프가 매달려 있지만 기럭지가 짧은 범여로서는
올라가기가 쉽지를 않다...몇번을 시도하다가 도저히 오를수가
없어서 다시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좌측의 급경사 비탈을 따라서
우회를 한다...3년전에는 수헌 아우가 동행해 주는 바람에 큰 어려움
없이 걸었는데, 홀로걷는 겨울산의 암릉구간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좌측의 급경사의 산비탈을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를 한 다음에
오르지 못한 암릉구간을 바라보면서 안부로 내려서는데,
기럭지가 짧은 범여는 숏다리의 悲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2:46)
안부로 올라서니 2번째 암릉구간이 나오고 이곳은 생각보다 쉽게 통과한다
2번째 암릉을 통과하면서 첫번째 암릉구간을 통과하지 못한
암릉 정상을 뒤돌아보지만, 그래도 홀로 안전하게 통과했다는데
위안을 삼으면서 2번째의 암릉 정상으로 올라간다
2번째 암릉 아래로 내려선 다음에...
개구멍을 방불케하는 암릉 사이를 왔다가다 하면서 통과하는 문장대 암릉구간
어쩌면 백두대간 마루금중에 난이도가 높은 암릉구간이지만, 스릴을
느끼면서 걷는 재미도 솔솔하니...이 또한 산행에 대한 즐거움이 아닐까
좌측에 우뚝솟은 문장대를 기준으로 관음봉에서 중벌리로 내려가는 능선 또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수석전시장을 방불케하는 멋진 능선이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평소에 도회의 성냥갑(아파트) 속에서 블라인드로 가리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멀리 안타깝게 타인처럼 비춰오는 느낌인데, 우린 얼마나
대자연의 우람하고 큰 힘을 모른채 속세의 늪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암릉 구간 사이에 약방의 甘草처럼 나타나는 낙엽이 푹신한 등로는
바짝 긴장하면서 걷는 마음을 잠시나마 무장해제를 시키는 느낌이랄까...
근데 갑자기 나타나는 마사토(磨沙土:화강암이 풍화하여 잘게 부서진 산모래)
구간의 미끄러운 급경사 내리막길이 다시 바짝 산꾼을 긴장하게 만든다.
한참을 내려온 후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오르막으로 오른다
이런곳도 통과하고...
암봉으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리기에 올라서 보니 여성 등산객
3명이 컵라면을 끓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게 아닌가...
옷차림과 베낭을 봐서는 대간 산꾼이 아닌듯 한데 어찌
이 험한 곳으로 왔단 말인가...이곳은 일반 등산객들이
오는 곳이 아니잖는가...
암봉(12:55)
내가 지나가는데도 관심조차 없다.
나 역시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레 우측으로 내려간다
胸生火( 흉생화:가슴에 불이 일어나면 / 임제(林悌)
莫怪隆冬贈扇枝(막괴융동증선지)
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히 여기지 마라
爾今年小豈能知(이금연소기능지)
너는 나이가 어려 아직은 모르리라 마는
相思半夜胸生火(상사반야흉생화)
상사병으로 한밤중에 가슴이 탈 때면
獨勝炎蒸六月時(독승염증유월시)
한여름 무더위가 비할 바 아니니라
조선 중기 천재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임제의 호는 백호(白湖), 자는 자순(子順)이고
본관은 나주(羅州)로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장인이기도 하였던
그는 고려 말 72현인 중의 한 명인 임탁(林卓)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제주목사를
지낸바 있는 임진(林晉)이다.
타고난 풍류가객이었던 백호는 젊어서부터 칼과 거문고를 함께 어깨에 메고 다닐 만큼 성격이
강직하고 문장이 호방하였던 백호는 스승 대곡 성운(成運)은 그의 급한 성격을 순화시키기
위해 중용(中庸)을 1천 번 읽도록 권유하였다...백호는 스승의 뜻에 따라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을 800번쯤 읽자, 이만하면 하산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하산하였다.
나이 28세 때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1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흥양현감을 거쳐, 서·북도 병마사, 예조정랑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벼슬을 내려놓고 전국을 방랑하는가 하면, 당쟁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국을 한탄하며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래기 일쑤였다.
그는 야박(野薄)한 세태를 탄(歎)하기보다는 시와 술과 함께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다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고, 문집으로는 700여 수가
넘는 시와 시조 등을 담은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안부(12:57)
수많은 암봉의 급경사를 오르고 내리고의 반복에 육신은 지쳐만 가고 저 멀리
소의 뱃속처럼 포근하여, 정감록(鄭鑑錄)에서,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인 우복동천의 ‘십승지(十勝地)’로
불리는청화산~도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구름인지 황사인지 분간되질 않는
시야 속에서 밤티재로 내려가는 능선을 조망하며 천천히 여유로운 트래킹을 즐긴다.
속리산 개구멍- 이런 크고 작은 구멍이 수도없이 지나야 한다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스레 밟아 내리다 보니 오늘 산행중에 난이도가
가장 높은 시작되고, 오전까지만 해도, 구라청의 한파 특보를 무산시키면서(?)
맑고 따뜻한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잿빛의 흐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지금 이곳에서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것도 아니잖은가...
다시금 뒤돌아서서 밤티재 내려가야 하는 속세로의 인연이 참 질기다.
진작 이 곳을 맛보았더라면 쌓지 말았을 인연들인가...
아주 좁은 암릉 구간을 내려서는데 등에 메고있는 베낭이 거추장스럽다.
3년전 여름인가...수헌아우와 갈령에서 늘재까지 1박2일 일정으로
걸을때는 서로 베낭을 주고 받고 하면서 이곳을 편하게 지났었는데
홀로 걸으니 불편한게 한두것이 아니구나...베낭을 아래로 던져놓고
가느다란 로프에다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조심스레 내려간다
천천히 내려선 다음에 다시 베낭을 들쳐메고 보이는 저 개구멍(?)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드는 구간으로 손끝과 발끝이 긴장해야 하는
암릉 코스의 연속이긴 하지만, 좁은 로프 크랙에 매달려 정신없이 기어
오르 내리는 지금까지가 되려 맘이 편하다...가도 또 나오고 반복되는
긴 거대 암군(岩群)들에 점점 더 압도되어 氣가 질릴 지경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암릉도 어쩔 수 없이 산꾼의 발길을 허락한다.
가장 힘든 구간의 가장 마지막 개구멍 방향으로
대간꾼들의 노란 시그널들이 많이 보인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개구멍(?)을 통과한 다음에...
대간꾼들의 시그널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린다
오전과는 달리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고, 흐린 날씨 탓인가.
몸뚱아리에 寒氣를 느낄만큼 점점 추워지는 느낌이다
죽음을 맞이한 산죽 지대를 지나고...
가장 힘든 구간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리 방심하면 안 될 곳이다.
잠시후에 또다른 암릉 구간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부(13:08)
우측 능선으로 향하는데 화북분소가 있는 시어동 계곡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그리
못견딜정도는 아니니 천천히 암릉구간으로 향한다
암릉 구간에 오르면서 당겨본 칠형제봉 능선의 모습
가느다란 로프가 있지만 기럭지가 짧은 범여에겐 손이 닿을락말락
할 정도라 한참동안 애를 먹다가 겨우 암릉위로 올라간다
또다시 암릉 구간이 시작되고...
2번째 암릉의 로프...조금전의 학습효과(?) 탓인가
조금은 편하게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암릉구간을 우회하면서 올라서니 암릉이 나오는데
국토정보지리원에 등록되어 있는 918.5m봉이다
918.5m봉(13:15)
918.5m봉에서 살짝 우회하여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집 채만한 암릉구간 사이의 迷路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암벽에서 얻는 즐거움은
어려운 일을 성취했다는 기쁨과
수직으로 상승한다는 느낌이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마치 창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인간은 결코 대지에
매여 있는 벌레가 아니라
알프스의 영양이 된다,
아니 새가 되는 것이다.
- 리오넬 테레이 -
7-8m의 긴 로프를 잡고 별로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암릉위로 올라서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크랙을 올라 큰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나온 암릉들의 희미한 자취들을 담아본다
베낭을 메고는 저 좁은 개구멍(?)을 통과할 수가 없어서
베낭을 벗어서 먼저 밀어 넣고는 몸과 베낭을 분리하여
개구멍을 통과한다
조망바위(13:25)
이곳만 통과하면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이어지는 위험한 암릉지대가
끝이 나는 곳으로, 밤티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이 극찬했던 청화산(靑華山:987.7m)...
그는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하고 청화산에 기거하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말기에 많은 부자들이 이곳에 땅을 사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복동이란 당쟁과 전쟁을 피하고, 사람과 속세를 피하기 위한 피란처 라고도 볼수 있는데,
또 어찌보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찾던 전설의 이상향 과도 맥락이 통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본관은 경기도 여주(驪州)로, 자는 휘조(輝祖)이며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또는 청화자(靑華子)로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던 인물로,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김천도찰방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했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남인(南人)인 그는 목호룡(睦虎龍:1684~1724)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1725년(영조 1) 2~4월에 4차례나 형을 받았다... 1726년 절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중환이 관직에서 탈락된 후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해 움직이는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현실에 대한 자구책으로 관심을 집중한 분야는 인문지리학이었는데, 지리학에
대한 평생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 택리지(擇里志)인데,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로 1751년
62세 때 저술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종래의 풍수학적(風水學的) 지리를 지양하고, '자아의 인식'을 전제로 했으며 실용성을
추구했으며, 그의 지리학은 오늘날 현대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으며, 실생활에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맨 윗쪽에는 오전에 산행을 시작한 성불사(옴팍한 곳의 기와집)가 보이고
맨끄트머리에는 화북면소재지 좌측으로는 견훤산성이 흐릿하게 보인다.
견훤산성(甄萱山城)은 경북 상주시 장바위산 꼭대기를 에워싼, 테뫼식산성으로
견훤이 신라와 고려를 방어·공격하기 위해 동으로 진출할 때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기에 이름이 견훤산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
(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하며, 얼마 남지 않은,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경북 상주시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해서 견훤산성이라 불리는데 이 산성 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4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상주쪽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성벽 둘레는 650m이고, 높이는 7∼15m이며, 너비는 4∼7m이다.
지나온 문장대(좌)와 관음봉(우)이 범여가 잘가고 있는지 勞心焦思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인다...조심해서 잘 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소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상주땅...속리산의 산그리메
백두대간의 67km가 거쳐가는 상주땅...백두대간이 지나는 33개 시.군 중에서
문경(116km) 다음으로 긴 대간 능선을 품고 있지만, 가장 유순한 길이라서
흔히 상주땅의 대간길을 非山非野(산도 평야도 아닌 땅)라 하지 않았던가...
내가 5번째 대간길을 걷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상주땅의 대간길이 마지막일듯 싶다...
체력이 허락하여 십승지를 걸을수만 있다면, 이 길을 한번 더 걸을수 있겠지...
조망바위를 지나자마자 전망이 뛰어난 암봉이 나온다
암봉(13:29)
고도를 확 낮추면서 내려서니...
앙증맞은 바위가 나오고...
다시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3:34)
이곳에서 문장대 헬기장을 지나면서 접었던 스틱을 다시 편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암릉 구간 사이의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대간 능선을 지키고 있는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범여를 반긴다...나도 방가방가...
오르막길을 올라선 다음에...
예전에 올랐던 암봉은 오르지 않고...
사면길을 만들어 논 등로를 따르는데, 예전에 비해
대간 마루금이 상당히 많이 바뀐듯 하여 어색하다
예전에 올랐던 길을 사면에서 바라보며, 편안한 등로를 따라간다
최근에는 이곳으로 가는게 대세인 듯, 대간꾼들의 시그널들이 많이 보인다
집채보다 더 큰 암릉이 길을 막으면...
편안한 우측의 급경사로 내려가 버린다
로프가 걸려 있지만 그냥 통과한다
극락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으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한없이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서서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지만 조금전 위험구간의 학습효과의
영향인지 편하다...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 했잖아...
긴장을 하면서 걷는다
안부(13:47)
706.3m봉(13:49)
무명봉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북면의 모습
저 곳이 흔히 말하는 상주 십승지의 중심인 우복동(牛腹洞)인데, 멀리서 봐도
‘소의 뱃속’처럼 보인다...그러나 상주시 화북면에는 우복동이란 행정 지명은 없다.
펜션이나 식당, 도로명 주소에는 우복동이란 단어가 보이지만, 어디 딱 한곳을 찍어서
우복동이라 부르는게 아니고, ‘최고의 길지(吉地)’를 부르는 이름이라서 그렇다.
우복동은 조선 시대 이래 민간에서 널리 읽힌 예언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와 연관이 있는 곳으로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이자 예언가였던
격암 남사고(格庵 南師古(생몰연대 미상:조선 중기의 학자·도사) ... 그는 전국
열 곳의 최고 명당을 가려내 ‘십승지지(十勝之地)’라 불렀다.
우복동천 십승지 가운데 중심에 있는 보은 속리산이 어딜 가리키는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한데, 충북 보은 구병산을 꼽는 사람도 있고, 문경의 농암면을 지목하는 이도
있으며, 청주의 우암산이 그곳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믿을 만한 정설은 상주의
용유리의 용유계곡 일대를 말한다....용유리 사람은 제 동네를 행정 지명 대신 ‘우복동’이라
불러왔는데, 오랫동안 그걸 믿고 다들 그렇게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곳은 이미 우복동이다.
무명봉을 지나면서 마루금은 살짝 좌로 꺽어져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선 다음에...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낙엽이 푹신한 사면길을 따라서 밤티재로 향한다
안부(13:57)
무명봉(13:59)
등로가 좋아지면서 산행 속도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안부(14:03)
안부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4:05)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맞은편에는 멋진 立石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697.9m봉이 보인다
안부(14:08)
697.9m봉으로 가는 길
입석이 서 있는 697.9m봉으로 올라선다
697.9m봉(14:10)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내려가면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성불사쪽으로 가는 길이다
아기자기한 편안한 등로로 내려선다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갑자기 등로가 열리면서 강한 바람이 시작된다
하늘 덮고
산을 베고
땅 위에 누웠다가
구름 병풍에
달빛 등불 삼아
바닷물을 마신다.
맘껏 취하여
비틀비틀
춤추리다
어허!
소매길어
곤륜산(崑崙山)에
걸리겠네.
진묵 일옥(震默 一玉:1562~1633)의 東師列傳 중에서
* 곤륜산(崑崙山)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성한 산으로 중국의 서쪽에 있으며
황허강(黃河江)이 이 산에서 발원한다고 하며, 늘에 이르는 높은 산, 또는
아름다운 옥이 나는 산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살며 불사(不死)의 물이 흐르는
곳이라고 믿어졌다.
마사토의 내리막길...암릉길이 끝나가니
꿩 대신에 닭이라 했던가...미끄러운 마사토가
갈 길 바쁜 산꾼의 발길을 붙잡는다
무명봉(14:14)
무명봉에서 바라본 백악산(白岳山:855.5m)의 모습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걸쳐 있으면서 속리산국립공원 북부에
속하는 백악산(白岳山)은 100개의 암봉이 솟아 있다고 해서 ‘百岳’이라 부르기도 하고
속리산에서 바라보면 산 전체에 백옥같이 하얀 바위들이 많다고 해서 ‘白岳’이라 부르기도
하는 산으로, 바위가 많고 능선도 제법 거친만큼 거친 남성의 이미지를 풍기며 웅장한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저 백악산 아래는 1873년 서유영이 자신이 들은
141편의 이야기를 수록한 설화집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나오는 보굴암(寶窟岩)에서
있었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산꾼의 가슴을 짠하게 하는구나.
보굴암에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 수양대군...그러니까 세조의 딸과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김종서의 손자가 결혼해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조가
죽은 지 400여 년이 지난 뒤에 딱 한 편의 설화집에 나온 이야기를 사실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 꾸며낸 이야기라는 확증도 없다... 세조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둘째 딸 의숙공주만 기록으로 남아 있고, 큰 딸의 행적은 묘연하니 말이다.
어쩌면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안부(14:17)
안부에서 좁은 암봉 사이로 올라간다
암봉(14:18)
구라청의 한파 특보 예보와는 아침에는 약간 더울 정도의
맑고 따뜻한 날씨였는데, 오후로 들어서면서 흐린 날씨에
춥고 강한 바람이 불어대니, 추위에 취약한 범여의 몸뚱아리는
참으로 힘이 드는구나
안부에 내려선 다음에 직진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범여가
힘들어 하는걸 아는지 고맙게도 예전과는 달리 등로는 사면길이다
예전에 올랐던 봉우리는 눈팅이 하고...
다시 마루금에 복귀하여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14:24)
???
무명봉(14:27)
아기자기한 능선을 따라서 가다가...
예전에 걸었던 마루금은 우측 아래의 사면길로 인도한다
나 역시 능선을 포기하고 다른 산꾼이 걸었던 사면길로 걸어간다
말 타면 종부리고 싶다고 했던가...등로는 산꾼들이 자꾸만 野性을
잃어버리게 할 모양인지 편안한 길만으로 유도(誘導)를 하는구나
다시 마루금에 복귀한 다음에...
바위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지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593m봉에 도착한다
593m봉(14:33)
정상에는 묘지가 지키고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이곳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면 견훤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593m봉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시며,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밤티재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
조금전에 힘들게 걸었던 암릉 구간을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오늘 산행을 하면서 喜怒哀樂을 다 맛보면서 길을 걷는다
무명봉(14:38)
계속되는 편안한 길
무명묘지(14:40)
베낭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취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4:42)
2년전 수헌아우와 둘이서 이 길을 걸을때는 바로 윗쪽 능선에
CCTV가 있어서 우측 갈림길로 내려간 기억이 있는 길이였는데
능선 윗쪽을 바라보니 CCTV는 보이지가 않는다...문장대 헬기장처럼
CCTV가 철거된 모양인데 그냥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예전에 있었던 CCTV는 사라지고 산꾼
대신에 동물의 이동을 감시하 엉뚱한 카메라가 달려 있다.
무작정 직진으로 내려간다
생태통로를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 너머로 경미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직진의 내리막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밤티재 생태통로가 보이는데 이런곳은 터널 공법으로 했으면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산을 절개하여 도로를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
밤티재 생태통로 윗쪽을 통과한다
밤티재(栗峙:480m:14:51)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늘티마을에서 중벌리 밤티마을을 잇는 고개로
997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밤티라는 지명유래는 이곳이 산이 높은 지대라
농작물이 잘되지 않아 마을 전체에 밤나무를 심었는데 ‘밤 율(栗)’, ‘고개 티(峙)’를
써서 밤티재라고 부르면 율치(栗峙)라고도 부른다
밤티재 생태통로 윗쪽을 통과하여 좌측으로 향하다가 도로 아랫쪽을
내려다보니 예전에 대간 산꾼들에게 엄청나게 갑질을 해댔던 초소가 보인다
절개지 끄트머리에서 水路를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힘들게 올라서니...
암릉이 보이고 능선에 올라서니 무명묘지가 능선을 지키고 있다
무명묘지(15:02)
잠시동안 편안한 길을 걷다가...
다시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안부(15:13)
다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오후가 들면서 체력이 부치기 시작한다.
밤티재 오기전 까지만 해도 문장대 암릉 구간만 통과하면 오늘 산행은
날로 먹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끝나고 스틱을 접어야만 산행이
끝난다는 걸,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치고 올라서니 편안한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5:20)
다시 오르는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암릉구간으로 올라가는데 오전에 걸었던 암릉구간의
학습효과(?) 탓인지 이곳의 암릉 통과는 식은 죽(?) 먹기다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문장대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능선 방향으로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잔뜩 흐린 날씨가 산꾼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계속되는 암릉구간의 오르막길
조망바위(15:28)
오늘 내가 조금전에 걸었던 능선 너머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문장대~관음봉~
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병풍처럼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속리산(俗離山)
속리산은 조선 8경의 하나로 손색이 없을만큼 빼어난 암봉을 자랑하는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9개의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서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렀다가
신라시대에서 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리산의 유래는 신라 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법주사를 중창하기 위해
보은 땅을 들어서는데 밭을 갈던 소들이 진표율사를 알아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고 하는데,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들이 저럴진대 하물며
우리야’ 하며 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길로 낫과
괭이를 버리고 속세(俗)를 떠나니(離)... 그 이후로 속리산이 불렀다고 한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호서제일의 가람인
법주사가 있어 유명해진 곳으로 1970년 3월20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칡넝쿨, 할미꽃, 모기가 없어서 3無의 산으로 유명하며 경북 상주와 충북 보은에
걸쳐있는 탓에 상주 속리산, 보은 속리산으로 불리운다.
백악산 좌측 아랫쪽으로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가 보인다.
중벌리(中伐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며, 벌판 가운데에 이룩된 마을이므로 중벌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중벌, 밤나뭇골, 대흥, 장터거리, 신흥동마을 등이 있는데 중벌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중벌리의 그것과 같으며, 밤나뭇골마을은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대흥마을은 크게 번성할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장터거리마을은 전에
시장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신흥동마을은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 한다.
집채만한 암릉이 길을 막고 있어서 우회를 한다
암봉(15:31)
암봉을 지나면서 경미산(?)으로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빡센 오르막에서 만난 아그들의 흔적
697.1m봉(15:37)
등로 가운데 삼각점인지 지적도근점인지 구분이 안되는 삼각점(?)이 있다.
그런데 트랭글앱에서는 이곳을 경미산이라고 알려주는데 믿음이 안간다
작명자의 여친이 ‘경미’라서 그렇게 부르나...
정체불명의 697.1m봉 삼각점(?)
지맥길에서 자주만난 무영객님은 이곳을 치마봉이라 표기를 해놔서
더 헷갈리게 만든다...경미봉이나 경미의 치마봉이던간에 용어 통일이
중요할 듯 싶다
697.1m봉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대부분의 대간꾼들이 이곳을 야간에 지나가는 탓에 알바하는 산꾼들이 많은 모양이다
대간길은 우측으로 내려가고, 좌측으로는 백악산, 낙영산, 도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나 역시 2009년도에 새벽에 늘재에서 출발하여 이곳에서 백악산
방향으로 어둠속에 2km 가까이 알바를 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구간이다
그 당시에는 맥 산행에 대해서 無知했고,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트랭글앱이나, 오룩스앱은 전무한 상태였기에, 오직 종이지도와 나침판,
산행 대장의 리더십에만 의존해서 산행을 했던 시절이라, 알바를 밤먹듯이
하였다
한검선사의 흔적...반갑습니다...잘 계시죠?
내리막길의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로프가 있긴 하지만 별 도움이 안된다
안부(15:44)
사람이나 소나무나 산다는 자체가 苦인가 보다...
무명봉(15:46)
늘재로 향하는 등로는 마사토 지역이 많아서 상당히 미끄럽다
맞은편으로는 청화산~시루봉~도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렸하다
밋밋한 안부를 통과한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49)
다시 내리막길...낙엽속에 묻힌 등로가 많이 파여있다
안부(15:52)
고도차가 없는 완만한 능선을 걸어가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백악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곳도 예전과는
달리 마루금이 사면길을 걷겠끔 해놨다
이곳에서 상주지역에 오면 간간히 이용하는 화령택시
기사분에게 시간을 맞춰서 늘재에 오라고 연락을 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예전에 걸었던 저 윗쪽의 봉우리는 눈팅이로 정상을 찍고...
금새 마루금에 복귀를 한 다음에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5:57)
살짝 우측으로 꺽어지면서 부지런히 걷는데 잔뜩 흐린 날씨
탓인지 아직 일몰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도 어두워지는
느낌이라서 조금은 불안하다
무명봉(16:04)
무명봉을 지나면서 조망바위가 나오고 백악산이 뚜렸하게 보인다
석문사 보굴암을 품고있는 백악산
세조의 큰 딸과, 세조의 아버지 세종이 총애했던 김종서(金宗瑞) 장군 손주와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아련한 추억이 산꾼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을 하면서 저지른 온갖 만행을 말년에 여러곳의 사찰을 다니며
참회하던 세조가 인근에 왔다가 자기를 닮은 아들을 발견하곤 공주가 자신이 죽인
김종서의 손자와 혼인한 사실을 알고 화해하려 했지만, 두 사람은 신분을 숨긴 채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금계필담에서 이야기는 끝나는데,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얘길일까?
좌측의 괴산쪽 방향으로 청화산 휴게소가 흐릿하게
보이는데 늘재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무명봉(16:07)
늘재로 향하는 길에는 고만고만한 무명봉이 은근히 많다
나무 계단이 낙엽속에 묻혀있다...비탐구간에...
제도권 등로로 바뀌었다는 얘기인가?
안부(16:10)
629m봉(16:13)
629m봉을 지나 암릉 끄트머리에 서니 맞은편에 청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출입금지 목책이 있는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출입금지 팻말을 뒤돌아 보면서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향한다
늘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안부(16:18)
부지런히 걷다보니...
맞은편 능선에 무명묘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명묘지(16:22)
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맞은편 능선 정상에
예전에 있었던 CCTV는 철거되고 없으나 대다수의 대간꾼들이
저 봉우리를 패스하고 좌측의 편안한 등로로 내려가는 길이라
나 역시 저 봉우리를 패스하고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좌측으로 향했다가 늘재로 내려선다
늘재(371m:16:30)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용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번
국도가 지나는데, 늘재란 고개 위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붙어진 지명으로 또 다른 표현은
양쪽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완만하여 ‘늘어진 고개’라 하여 늘티,늘고개,늘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중심으로 민초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역을 나누고,
물줄기가 갈라지는 고개이기에 어느 높은 고개 못지않고크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가올 땐
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한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분수령이다
늘재에 내려서면서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동시에 바뀌는데, 북쪽인 충북쪽은 보은군에서
괴산군으로 바뀌고 남쪽은 백두대간 중에 67km를 지나는 상주지역이 끝나고 백두대간이
거쳐가는 33개 시.군중에서 대간길이 장장 116km가 걸쳐있는 문경지역으로 접어드는
시작점이 이곳 늘재이다
도로 좌측 위에는 성황당과 정상석이 있지만 날씨도 추워서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하고 나니 택시가 도착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화령으로 향한다
화령터미널(17:10)
화령터미널에 도착하니 17시 10분 ...17시 40분에 보은에서 상주로 향하는
직행버스를 예매한 다음에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터미널 편의점에서
따뜻한 두유 한병을 사서 마시면서 멍하니 20분정도 앉아 있으니 버스가 들어온다
화령발 → 상주시외 버스표
화령터미널에서 상주까지 오는 직행버스에 손님이라곤 단 3명이고,
중간에 2군데 거쳐야 하는 정류장에도 손님이 없어서 논스톱으로
상주터미널로 향한다
상주시외버스 터미널(18:10)
상주터미널에 도착하니 다행이 서울 경부고속터미널로 가는
버스표가 있어서 표를 예매한 다음에 화장실에 들려서 볼 일을
보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서 늘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마음 한구석에 늘 찜찜했던 속리산 구간을 마무리하고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 보니 버스는 어느새 궁내동 톨게이트를 지나 판교I.C를
통과하고 있다
상주시외 → 서울행버스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