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3박 5일간의 베트남 다낭 여행

범여(梵如) 2024. 3. 8. 18:40

☞일       시:  2024년 02월 15일~19일(3박5일)

☞날       씨: 우기에서 건기로 바뀌는 시기라 그리 덥지는 않았음

☞참석인원: 서울인테리어협의회 회원 15명과 함께

☞여행코스:  다낭공항- 로사미아호텔- 라구나C.C- 호이안 탄하 도자기 마을

                     호이안 구도심- 바나힐스 타임게이트- 골든 브리지- 린퐁바오탑

                     덴린쭈어린뚜- 린쭈아 린추사원- 바나힐C.C- 노니 판매장

                     커피판매장-린엉사-호이안 바구니 배-다낭대성당-다낭공항

☞소  재 지: 베트남 다낭과 호이안 일원

 

예전에 서초, 강남구에서 모 가구업체 대리점을 운행했던 업체들이 결성한

단체가 서울인테리어협의회인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언 27년째다.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친목을 도모하면서 해외 여행을 갔다왔는데, 코로나라는

역병으로 인해 조금 자제하다가 이번에 짧게 여행을 가기로 했다.

 

새해 들어서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갈까말까 망설였는데, 여행 경비는100% 회비로

지원해주지만, 가지 않는다면 국물도 없다는 총무의 말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는데,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안 갈수도없다...거기다가 친구의 꼬드김도 있었고,

나말고 한명도 빠짐없이 다 가는데 나만 빠질수도 없어서 무조건 가기로 하고, 총무에게

여권을 스캔해서 보낸다

 

이번 여행의 특징은 여행조와 골프조로  나뉘는데 10명은 골프를 치고, 6명은여행을 하기로 한다.

다낭이야  몇년전에 여행을 갔다왔기에 이번에는 골프조로 신청을 한다.

 

베트남 지도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2024년 기준으로 약 1억명이고

면적은 331,210.0㎢으로 한반도 면적의 1.5배이며, 수도는 하노이이며, 공식어는 베트남어이다

 

 화폐 단위는 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국민의 대부분이 베트남 족으로 80%가 불교를 믿는다.

서북쪽에서 동남쪽까지 최대길이는 약 1,650km이고 동서간의 최대너비는 북부 550km,

남부 340km 가량이며,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타이 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와 통킨 만에 접해 있다

 

수도인 하노이는 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반면에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치민시티(이전의 사이공)는

남쪽에 있으며, 하노이를 정치적 수도라면, 호치민을 경제적 수도라고 부르는 베트남은 20세기 중반에 길고

지리한 전쟁의 결과, 1954~75년에 분단을 겪었다... 북베트남이라고 알려진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과

남베트남이라고 불리던 베트남 공화국(월남)으로 나뉜 분단은, 처음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었으나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굳어졌으며, 1975년 4월 통일되었고 1976년 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다낭 시내 지도

다낭과 후에, 호이안, 개념도

 

제1일차

친구가 집에까지 찾아와서 픽업 해주는 바람에 친구차로 편하게 인천공항까지 왔다

인천공항 제1여객 터미널(16:05)

인천발 → 다낭행 티켓

비행기 계류장 너머로 일몰이 시작된다

 

꿈이 있는한 나이는 없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사랑해도 좋다.

 

희망은 역경속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일출만 보지말고

일몰도 봐야한다

 

그리움은

사랑에서 오는 결과물이다

 

차라리 그리워하는게

정신 건강에 좋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으로 들어서 2시간여 가까이 대합실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하다가 다낭으로 가는 티켓팅이 시작되고...

 

예상보다 30분 가까이 늦은 시간에 비행기는 이륙하고 기내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잠을 청하는데 economy 좌석이라 그런지 엄청 불편하다

간간히 비행기가 氣流 때문인지 심하게 흔들리기도 하여 불안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는 사이에 기내 방송으로 다낭공항에

착륙한다는 멘트가 나온다

다낭공항(09:20)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4시간 30분만에 다낭공항에 도착한다.

한국 시간으로는 11시 20분이다...참고로 한국과 베트남의

時差는 2시간이다...입국 수속을 밟는데 워낙 한국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몇년전에 비해서 훨씬 빨라진 느낌이다

공항을 빠져나와 현지에서 가이드와 조우를 한 후

곧바로 호텔로 직행하여 체크인을 한 다음에 룸으로

향하는데, 굉장히 피곤한데도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잠은 오질않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나

호텔내의 식당으로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

우리가 3일동안 묵어야 할 로사미아호텔

집에 있을때의 습관 때문인지 이곳 시간으로 잠에서 깨어나니 이곳 시간으로 

새벽 2시정도 되었다...평소 집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밤 9시 반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4시경에 일어나는데... 

옆 침대에서 자는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보조등을 켠 다음에

집에서 가져온 어제 신문을 보고, 책을 보다가 아침 6시에 호텔내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 과일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호텔

앞에있는 미케비치 해변으로 홀로 산책을 나선다

몇년전에 와봤던 곳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다.

예전에 비해 거리도 많이 깨끗한 느낌이라 가볍게 산책을 한다

안락의자 장사는 영업 준비중이고, 난 이른 아침에는 홀로 뒷골목을

거닐면서 재래식 시장 구경하는게 취미인데 이곳은 해안가의 호텔이

즐비한 곳이라 재래식 시장은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아쉽다

미케비치 해변을 걸어본다.

호텔 창문으로 해가 뜨기전에 봤을때는 사람들이 많드니만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나같은 외국인들만 간간히 보인다.

미케비치(My Khe Beach) 해변

2005년도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세계 6대해변으로

선정된 해변으로 선짜반도에서 호이안까지 초승달 모양으로 이어졌으며

백사장 길이만 20~30km로 이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해변이라고 하며,

또다른 이름으로는 화이트비치(wait beach)라고 하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다낭 등의

도시로부터 많은 난민이 탈출하였고, 사이공 함락과 함께 월남의 군인이나

월남 정권의 협력자와 그 가족들이 난민으로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성립 후에도 난민의 해외 유출이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보트나 어선으로 탈출하는 경우도 있어 ‘보트피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보트피플(boat people)이란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함께 공산화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을

해로(海路)로 탈출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즉, 배를 타고 다니는 난민들을 말하며,

반대로 육로를 통해 이들 국가를 탈출한 사람들은 랜드피플이라 불린다.

 

나라가 망하면 국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를 말해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1979년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중.월전쟁의 영향과 베트남의 국내 사정으로 난민 수는

더욱 늘어나, 인도적 문제로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인접국으로부터의 

강제송환이나 상륙 거부로 인한 참상이 전지자 ‘바다의 아우슈비츠’라는 말까지 등장하였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가장 먼저 고통을 받는 사람이 민초인 듯 하다.

미케비치의 해변을 바라보며 이 해변에서 50만명이라는 사람이

水葬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아픈 멍멍한 맘을 가지고 호텔로 향한다

로사미아 호텔주변의 모습

다시 호텔로 되돌아와서 골프빽을 차에 싣고 다낭 시내를 빠져 나와서

2시간 가량을 달려서 오늘 라운딩할 라구나 골프장으로 향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다낭시내에서 첫날 라운딩을 할 라구나C.C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인듯한데, 거북이(?)로 운행하는 버스 때문에 라운딩 시간이 아주

촉박하여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도 하지 못한체 필드로 나서야 했다.

 

버스가 왜 느린가 알아봤더니 이곳은 고속도로가 없을뿐더러 오토바이가

많은 국가라서 차량의 최고 속도를 시속 50km이상을 달리지 못한다고 한다.

가령 과속을 하다가 공안(경찰)에 적발되면 이 나라 일반 사람들의 한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 벌금이라 과속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락카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필드에 나서서 티업을 한다...생각보다 날씨는 덥지않고 골프장의

잔디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햇빛이 없는 흐린 날씨라 라운딩하기에는

최적이다...한국의 골프장과는 달리 양잔디라 처음 2홀 정도는 버벅거렸지만

그 이후부터는 공이 아주 잘 맞았고, 스코어도 생각보다 아주 잘 나왔다

라운딩 도중에 동반자들과 인증샷

라구나(Laguna)골프장의 설계는 영국의 유명한 프로골프 닉팔도가

설계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골프장과는 달리 골프장 내에 논도 있고

논에는 오리들이 논을 헤집고 다니며, 우리나라의 소와는 달리 약간 시커먼

색깔의 소때들도 보이고, 논 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가 정겹다

 남중국해의 넓은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라구나 골프장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골프장이 아닌 자연적으로 조성된 습지와 벙커로 되어있어

대부분의 벙커가 크고 광활하긴 하지만 턱이 높지 않아서 벙커 탈출은

상당히 용이한 편이다...생각보다 골프장 관리가 잘되어 있다.

 

점심을 먹지 못한 탓에 라운딩 중간에 식사를 시켰더니만 클럽하우스에서

배달이 왔다...난 비빔밥을 시켰는데, 우리나라 비빔밥과는 달리 향신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절반도 못 먹었다

1인 1캐디에다 우리팀은 3명이 라운딩을 했는데 카트를 2대를 주었는데

카트 한대를 나혼자서 사용했고, 캐디가 고참인듯 라이를 잘봐주고 카트

운전까지 해주는 바람에 그야말로 황제 골프를 친 셈이다.

 

라운딩 비용과 카트비는 전액 회비로 지불했기 때문에 얼마인지 모르겠고

캐디피만 본인 부담인데 베트남 돈으로 400,000만동(₫)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400,000만동(₫)에서 ‘0’하나를 빼면 40,000이고

여기에서 반으로 나누면 20,000원...즉 캐디피가 20,000원이다

우리나라 골프장의 캐디피가 대체적으로 170,000원이니 엄청 싼 셈이다

 

골프장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가 한 말...공식적인 캐디피 이외는 절대로

팁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면 자연스레 요금이 올라가고, 그 주범(?)이 한국사람이란다 

라구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끝내고, 샤워를 마친 다음에 간단하게 션한 맥주

한잔을 마신 후에 버스를 타고 2시간여만에 다낭으로 되돌아 와서 여행팀과

만나  다낭 시내에서 30분정도 걸리는 호이안(Hội An:會安)으로 향한다.

호이안 관광지도

호이안(Hội An:會安)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도시로 다낭 기준 남동쪽 방향으로 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2018년 기준 15만여 명이고,1999년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이다

 

예전부터 참파왕국의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으며 이는 응우엔 왕조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5~18세기는 호이안의 황금기로 중국, 일본, 서양에서 각종 물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으나 19세기말 이후로 상황이 변했는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인근의 다낭

식민지의 주요 거점도시로 성장시켰고, 베트남 전쟁때에는 미군의 공군기지와 해병대 사령부가 다낭에

들어서는 등 다낭이 중요한 거점도시로 빠르게 성장해버리면서 상대적으로 호이안은 쇠퇴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이유로 과거 번영했던 무역항 시절의 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고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되었다.

다낭 근처에 있는 역사도시란 점에서 다낭 북서쪽의 후에와 겹치는데, 후에는 과거 수도였던 곳으로

현대적 중소도시에 궁전, 등이 많이 있는 분위기이고 반면 호이안은 후에보다 더 작은 마을이

옛 모습으로 보존이 잘 된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가깝다.

 

특히 서울의 삼청동 및 북촌한옥마을의 규모에 상당한 올드쿼터(Phố Cổ 舖古), 즉 '옛 거리'는 베트남의

전통인 노란색 벽으로 회칠을 한 전통 가옥들이 즐비한 곳으로 투본 강(sông Thu Bồn, 秋盆河)을 끼고

있는 정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며, 밤이 되면 강과 오래된 정취를 지닌 각양각색의 조명으로 꽤 괜찮은

야경도 보여준다.

호이안 탄하 도자기 마을 입구의 모습

호이안의 유명 관광지 중 한 곳이 탄하 도자기 마을 (Thanh Ha Pottery Village)은 

호이안 구시가지를 가는 목선을 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인 모양이다.

우리야 관광팀이 아닌 골프가 주목적이라 집행부에서 시키는대로 다니다보니

그냥 走馬看山 격으로 마을을 통과한다 

이곳의 도자기 마을은 투본강 근처에 위치해 있고 과거 응우옌 왕조의 도자기를

제작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도자기로 사용되는 흙은 투본강의 퇴적물인

흙으로 도자기를 만든다고 한다.

 

* 응우옌 왕조(, Nguyễn triều)는 베트남의 왕조로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43년간을

   베트남을 다스린 마지막 통일 왕조로 초대 황제인 자롱황제는 1802년에 응우옌 왕조를 건국했고,

  이후 남부의 참파, 캄보디아, 라오스지방을 정벌하면서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통일 왕조로 떠올랐다.

 

 민망황제의 재위기인 1830년대와 4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때에는 경제가 진흥하고

 강대한 해군력을 갖추는 등 동남아의 지역 강국으로 군림했으나 1840년대 후반부터 점차 서구

 세력에 의해 잠식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884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신세가 되어버렸다.
 188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비록 왕조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실권은 없이 프랑스의 괴뢰정부

 였으며 1945년에 프랑스 군대를 내쫒고 들어온 일본은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베트남

 제국을 세웠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이 처참히 몰락하면서 베트남 제국도 함께 무너졌고, 이후 1945년

 8월에 베트민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투본강의 목선을 타러가려면 도자기 골목길을 통과해야 한다

선착장 가는 길에서 만난 와불(臥佛)

목선을 타고 호이안 구시가지로 향한다

투본강의 배에서 내려 야시장으로 향하는데 마치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번잡하다...특히한 건 대다수의 관광객들이

한국인이라는 점이다...호이안과 다낭은 한국 사람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기심에 꼬치구이를 하나사서 맛을 보는데 한국의 맛과 흡사하다

노점상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서 앞서가는 일행을 따라서 가는데 가이드가 

하자는데로 걷다보니 관광을 온 건지 노점상과 사람 구경을 온건지 헷갈린다

오래된 전통가옥이 주를 이루고 있는 쩐푸 전통거리에 한국인 일색인데

서양인들도 간간히 보이는데, 패키지 여행으로 다니는 한국사람들은

대충 대충 수박 겉할키식으로 여행을 하는 반면, 서양사람들은 대부분이

혼자 아니면, 남.여간의 쌍을 이루면서 다니기에 꼼꼼히 보는듯 하다

호이안 구옥(舊屋)

호이안(Hoi An)은 예전부터 참파왕국의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으며 이는 응우옌

왕조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15~18세기는 호이안의 황금기로 중국,

일본, 서양에서 각종 물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다.

 

그러나 19세기말 이후로 상황이 변했는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인근의 다낭

식민지의 주요 거점도시로 성장시켰고, 베트남 전쟁때에는 미군의 공군기지와

해병대 사령부가 다낭에 들어서는 등 다낭이 중요한 거점도시로 빠르게 성장해버리면서

상대적으로 호이안은 쇠퇴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이유로 과거 번영했던 무역항 시절의

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고 1999년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일찍이 외국 무역상들의 출입이 빈번했던 국제 항구 도시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호이안은

도시 자체가 유럽과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압축시켜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들로

가득한데 언뜻 하노이의 구시가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 같지만, 외국 무역상들의

자취를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을의 외국인 중 일본 무역상이 최초로 집단으로 거주해, 한때 천 명 이상의 일본인이

상주했다고 하나, 이후 중국인들이 진출하여 마을에 거주했는데 아쉽게 현재 일본인의

자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2,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인간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올드 하우스라고 부르는 지역은 쩐 푸(Tran Phu) 거리, 남쪽 응우옌 타이 혹(Nguyen Thai Hoc) 거리,

강변의 박당(Bac Dang) 거리 골목이 있으며, 쩐푸 거리 서쪽 끝에 있는 내원교 주변에 볼거리와 식당,

상점들이 몰려 있다.

후배와 인증샷

가이드 뒤꽁무니를 따라가는데, 투본강의 샛강인 듯한 다리를 넘어

넓은 곳에서 30분정도 야시장을 들러보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하면서 다시 이곳에 모이라고 하는데 형형색색이 걸려있는 風燈이 이채롭다

 

호이안에는 축제들이 많이 열리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축제가 풍등(風燈)

축제라고 한다...이 축제는 중국 달력의 여름 명절인 중원절(中元節: 중국 문화권에서

음력 7월 15일 전후로 열리는 명절)을 기념하는 행사로 음력 7월 14~15일에 개최되며

축제기간 동안에는 풍등을 비롯한 전통 공예품 판매, 가수들의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옛날 중국의 지배를 받은 탓인지 풍등은 중국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먹음직한 꼬치들도 보이고... 먹고 싶지만 잠시후에

맛있는 저녁만찬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참는다

노점상의 인형가게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과일은 풍족한 듯 하다

15명의 일행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나혼자만 남았다.

나야 쇼핑에는 별 취미가 없다...앙증맞은 불상 하나와

숙소에서 먹을 망고와 두리안을 좀 샀다

이 아줌씨에게 망고를 사고...

냄새가 고약하긴 하지만 맛으로는 두리안이 최고다.

숙소에서 소주한잔 하려면 과일이 있어야할 것 같아 두리안을

산 다음에 시간에 맞춰 집합장소로 가서 근처에 있는 유명한

식당이라는 곳을 갔는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패키지로 온 한국의

관광객들이다...여행사에서 제공한 모닝글로리라는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았다

 

morning glory는 호이안에서 유명한 베트남 음식 전문 레스토랑으로

쌀국수, 파키타, 반미 등 정통 베트남 음식을 맛볼수 있는데 한국

관광객을 위해 소주와 김치를 주는데 소주는 8달러(약 10,000)이고,

김치는 추가하면 돈을 더 달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배를 타러 간다

호이안의 야경은 환상적이다...배를 타고 주차장 방향으로 향한다

 

호이안의 올드타운은 낮보다는 밤이 더 화려하다고 하는데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호이안 전통 등이 밤을 밝히는 가운데 낮에는 한가하던 거리가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올드타운을 적시며 흘러가는 투본강은 ‘밤의 제왕’ 역할을 한다.

 

베트남 전통 등을 매단 나룻배들이 ‘소원 배’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태우고 강물 위를 노닌다.

수면 위로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며 흘려보낸 ‘소원 꽃등’과 ‘소원 배’들이 뒤엉켜 장관을

이루는게 마치 등불의 향연 같기도 하고 몽환적인 신선 세상에 들어선 듯도 하다. 

투본강(베트남어:(Sông Thu Bồn / 瀧秋盆)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꽝남성과 꽝응아이성의 경계에서 발원되어 북서쪽을 흘러 박짜미, 뿌닌, 히엡덕 그리고

꿰손 현을 가로질러 가다 북동쪽으로 흐름을 틀어 다이록 현과 주이쑤옌 현 사이에

경계를 형성한 다음 계속 흘러내려가 호이안에서 남중국해로 빠져나간다.

 

투본강 계곡은 700년부터 1471년 베트남의 정복 때까지 참파 문화의 중심지였다.

꾸어다이치엠은 호이안에 있는 강의 어귀에 위치한 참파의 항구였지만 오늘날에는

보트로강의 상류로 올라가 미선유적으로 여행을 하는 호이안 관광의 인기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투본강의 야경

투본강의 소원배

배를 타고가다가 중간쯤에 소원등에 불을 켜서 하나씩 나눠주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면서 강가에 띄우는 형식이다...내 소원이라면

올 한해는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게다는 발원을 한다

 

배에서 올라와 하루 여행을 마감하며 호텔로 향한다.

호텔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지난 1월에 교통사고로

다친 허리에 심한 통증이 오는데 미칠것만 같다.

 

하는 수 없이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근처에 있는 마사지샵을

소개해달라고 하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사지샵에 데려다 준다

이곳에서 90분짜리 전신 마사지(요금 한국돈 30,000원, 팁3$)이다

마사지를 받고나니 몸이 한결 개운하다...호텔로 돌아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소주 한잔도 못하고 잠자리에 든다

 

제2일차

 로사미아 호텔 로비의 風燈

예전에 중국의 지배를 받았은 탓인지 중국풍이 물씬 풍긴다

다른 일행들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호텔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줌씨가 열대 과일을 가지고와서 하나 먹어보라고 주면서 호객 행위를

하는데 하나를 공짜로 먹고는 안 살수가 없어서 골프를 치면서

먹으려고 1kg를 샀는데 베트남 돈으로 150,000동(₫)을 달라고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려면 예를 들어 100,000동(₫) 이면 100,000 ▶️

10,000 (0하나 빼기) ▶️ 5,000 (2로 나누기) 대략 5,000원 정도인데

150,000(₫)이니 우리나라 돈으로 7.500원이다...거기다가 첫 손님이라고

몇개를 덤으로 더주니 기분이 좋다

호텔을 출발하여 다낭 시내를 빠져 나가는데 관음상이 있는 절집이 보인다

 

오늘은 아침부터 여행팀과 함께 다낭에서 가장 유명한 ‘바나힐’(바나산)으로

향하는데, 오전에는 골프팀과 관광팀이 함께 관광을 하다가 골프팀은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바나힐C.C에서 골프를 치고 관광팀은 다시 다낭

시내로 되돌아와서 투어를 하기로 했다

다낭 시내를 출발한 지 40여분만에 썬월드입구 타임게이트에 도착한다.

 

썬월드입구에 있는 타임게이트는 달과 태양시계의 디자인이 인상적인 시간의 문은

음향과 조명, 물의 예술적인 퍼포먼스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법의 상징을 만들어내며

시간의 문을 열고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인들의 고향인 초현실세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바나힐스 썬월드 광장에 도착하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로 人山人海를 이루는데, 다낭의 관광 수입의 70%가

이곳 바나힐에서 나온다는 가이드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인테리어 친목회원들과 처음으로 찍은 단체 사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 바나힐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에 오른다

바나힐산 정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5대나 있는데 저마다

부지런히 관광객을 싣고 정상을 향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방에 정상으로 향하는게 아니고 중간 기착지인 골든브릿지에

잠깐 쉬었다가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이곳 케이블카 길이가 5.7km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지금은 중국의 장가계에서 천문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길이가

7.5km로 이곳 바나힐 케이블카가 최장 타이틀을 빼았겠다고 한다.

 

베트남과 중국은 조그만한 것도 경쟁을 한다고 하는데 다시

타이틀을 빼앗아 오기 위해, 장가계보다 더 긴 케이블카 공사를

하고 있다고 가이드가 귀뜸을 한다.

 

베트남과 중국은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라이벌 의식이 있는 모양이다

쉴새없이 바나힐산 정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의 모습

바나힐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뒤돌아 본 모습

골든브릿지

2017년 11월에 이곳 바나힐산에 왔을때는

없었던 골든브릿지라는 조형물이 있 중간 기착지에 도착한다

 

베트남의 대표건축물은 다낭의 꺼우방(golden Bridge:황금다리)이다.

다낭의 구름 사이로 금색 비단실과 같은 다리를 받치는 이끼 낀 거대한

손이 인상적인데 다리는 바나힐 정상에 위치한다

 

골드브릿지에 도착하니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와서

주변 환경이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환상적이다.

이곳에서 내려 골드브릿지를 한바퀴 돌고, 조각공원을

돌아서 원점 회귀를 하는데, 가이드가 20분밖에 시간을

주지않아 난 그냥 안마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골든 브리지(베트남어: Cầu Vàng)

2018년 6월에 개통되었다는 골든 브릿지는 해발 1402m의 높이에 길이 150m (490ft)

이 다리는 두 개의 거대한 손이 다리를 받들고 있는 모양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으로 다리가 개방되자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관광객과 언론에 의해 유명세를 떨치며

여러 차례 국내 및 국제상을 받았을 정도다.

 

썬월드에서 올라오는 케이블카역과 정상을 연결하여 경치와 관광 명소를

제공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으며, 반원형으로 빙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그 구조물을

지탱하는 것처럼 고안된 2대의 거대한 돌로 만든 손이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갑자기 밀려오는 안개가 골든브릿지의 멋진 그림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골든브릿지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향한다

이런 높은곳에 중세 프랑스풍의 멋진 건물이 있다는 게 언뜻 이해가 안된다

‘바나힐’(바나산) 정상의 모습

바나힐은 쯔엉선산맥 해발 1487m에 위치한 테마파크. 프랑스 식민 시절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의 습하고 더운 날씨를 피해 바나힐 꼭대기에 별장을

지어 휴양지로 사용했던 곳인데, 프랑스인들이 돌아간 이후 방치돼 있던

바나힐은 베트남 정부의 지원과 베트남 최고의 기업인 ‘썬그룹’의 투자를

통해 지금의 테마파크로 재탄생했다.

바나힐 정상에 도착하면 고대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마을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집과 광장, 그리고 교회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로맨틱하고 멋진 공간들이 이곳에 그대로 구현된 것으로 그래서인지

현지인은 물론 한국인 여행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곳이 바나힐이다

 

광장앞에 보이는 멋진 건축물이 성당인데 미사를 보는 곳이 아니고

관광객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이 높은곳에 어마어마한 건축물

베트남 사람들의 애환 고스란히 녹아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곳을 불질러 버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복원이 되어 관광객 유치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풍이 물씬 풍기는 바나힐 광장(프렌치빌리지)

 바나힐 정상에 있는 프랑스풍의 화려한 건축물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힘이 없었던 베트남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게

마치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의 비애와 동병상련이 아닐까  

 

가이드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곳 건축물을 짓기위해 10만명의 베트남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는데 그 당시 먹을것도 제대로 주지않고

일을 시키는 바람에 약 30,000여명의 餓死者가 생겨났다고 한다

바나힐 썬월드(Sun World Banahills)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들이 더위를 피해 산 위에 만든 휴양지를 베트남의

썬월드 그룹이라는 회사가 새롭게 재탄생시킨 곳으로 고도가 높기 때문에 다낭

시내보다 시원한 편이며, 메인 테마파크로, 프랑스 마을, 놀이공원, 식물원, 사찰

등이 있으며, 프랑스 마을은 유럽의 건축물과 분위기를 재현한 곳인데, 카페, 레스토랑,

숙소 등이 있으며 놀이공원은 롤러코스터, 회전목마, 루지 등의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다.

 

바나힐 정상의 광장에 도착하니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유난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1시간의 시간을 주면서 시간내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뿔뿔히 헤어진다

이곳 바나힐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하루종일 다녀도 부족한데

골프팀들에겐 달랑 1시간밖에 주지 않으니 나야 아무래도 

절로 가는게 맞을 것 같아서 맨 꼭대기에 있는 절집으로 향한다

 

영주영사(嶺主靈祠)와 영봉선사(靈峰禪寺)를 바라보면서 계단으로

올라가는길의 나무에다가 붉은색의 연등같은 것을 많이 달아놨는데

이곳 베트남도 중국의 지배를 받은 탓인지 붉은색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계단 주위에는 각종 꽃들로 장엄되어 있고 석고로 만든듯한 동자승이 앙증맞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에 목이 말라서 코코넛 열매의 즙을 사서 목을 축이면서

올라가니 산 위로 긴 계단이 시작하는곳의 안내표지판 앞에 도착한다.

계단의 중간 쯤에는 관경영산 (觀境嶺山)이라고 써진 패방형식의 문이 있고

산 위의 영봉선사(靈峰禪寺)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풍보탑(靈風寶塔:린퐁바오탑:Linh Phong Stupa)

계단을 다 올라가서 우측으로 들어서니  4각 9층의 영풍보탑(靈風寶塔, 린퐁바오탑)이

나오고 사각의 모서리마다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이 영풍보탑을 외호하고 있는데, 대리석으로 조각된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절집의 사천왕과 같은데,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는 대리석으로

하지않고, 목재와 소조로 하는게 일반적이다

영풍보탑 내부에 있는 불상...특이한 점은 불상 가슴의 절(卍)자가 이채롭다

영풍보탑 옆에있는 영주영사(嶺主靈祠)편액이 붙은 전각으로 향한다

영주영사(嶺主靈祠)

영주영사(嶺主靈祠:덴린쭈어린뚜)를 한문으로 풀이하면 절집이 아니라

사당(祠堂: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인데 내부에는 불상을 모셔놓은

irony가 펼쳐진다

 

영주영사(嶺主靈祠)를 베트남어로 표기하자면 공주의 궁전(Temple of the

Lady Princess)이라는 의미의 사당인데 공주의 이름이 바나(Ba Na:八那(팔나),

巴拿(파나)로 바나힐의 지명유래가 이곳에서 시작된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없어서 영주영사 내부로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서둘러

영봉선사(靈峰禪寺)로 향한다

영봉선사(靈峰禪寺:린쭈아 린추사원 )

영봉선사(靈峰禪寺) 내부의 모습

현판에 새겨진 사당과 달리 내부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우리나라 절집에 배치된 불상과는 확연히 다른게 중국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불교와 도교가 합쳐져 있는듯한 모습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지역이긴 하지만, 미얀마, 라오스, 태국, 스리랑카 등이

취하고 있는 남방불교 형태인 소승불교가 아닌 한국과 중국 불교가 취하고

있는 대승불교 형태인듯이 보인다

영봉선사(靈峰禪寺) 앞마당에 있는 포대화상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의 스님으로 이름은 계차이고 명주 봉화현 사람으로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늘 찡그려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커다란 배는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일정치 않고 횡설수설 아무말이나 잘 지껄였으며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잘 눕고 졸리면 어디서라도 잠을 잤으며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지니고 다녔는데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그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였는데 얻은 물건도 모두 자루 속에 넣고

다니다가 가난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하고,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자루 속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포대화상이라고

붙였다.


특히 날씨 예측이나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잘 예언하였는데 맞지 않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하며,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고 계속 어디론가 방황하면서

늘 길을 걸어다니며 일생을 보냈다.


그가 남긴 게송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一鉢千家飯(일발천가반): 바루대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으며

孤身萬里遊(고신만리유): 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靑日觀人少(청일관인소): 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렵고

問路白雲頭(문로백운두): 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기 916년 3월 명주 악림사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는데 그때도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불 중에도 진짜 미륵불
分身百千億(분신백천억):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時時示時人(시시시시인):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그때서야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이라 하여

그 모습을 그려서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영봉선사(靈峰禪寺)  마당에는 불두화라 불리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영봉선사(靈峰禪寺) 에서 바라본 바나힐스

영풍영사 종루(鐘樓)

특이한 점은 시간에 맞춰서 종을 치는 로봇이 있는 있는데

로봇이 2층에 있어서 아쉽지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바나힐스의 맨 윗쪽에 자리잡은 사찰은 베트남의 영혼이 깃든 장엄하고

신성한 영적문화유산의 공간으로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영봉선사(靈峰禪寺:린쭈어린두사원, 영풍보탑(靈風寶塔:린퐁스투파),

영주영사(嶺主靈祠 린퐁티엔드사원) 등과 같은 불교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골프 티업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부지런히 내려오는 길에 좌측에 있는

양정(陽亭)이라고 해놨는데 중국식 전각 형태라 정확한 걸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정통 찻집의 형태를 띠고있는 곳을 들렸다 나오는데 대구에서 왔다는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여인들이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나를보고 사진 한장을

찍어달라고 하는데, 내가 구도를 잘 맞쳐 사진한장을 찍어 줬더니 정말

찍었다고 하면서 연신 “작가님 감사합니다” 를 연발한다.

 

이 여인들 사람볼 줄 아네...

동자승과 인증샷

다시 프렌치빌리지라 불리는 썬월드 광장으로 내려간다

부지런히 약속 장소를 내려왔지만 아직도 15분이나 남아있는 탓인지

일행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7년전에 와서 타보지 못한 레일바이크를

타보려고 갔더니만 대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약속장소로 되돌아 간다

레일바이크 아랫쪽으로는 거대한 불상이 있는 린엉사는 구름에

가려서 환상적인 모습이다...선 채로 부처님을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테마파크를 들렸다가 시간에 맞춰서 약속장소로 가니

일행들이 오기 시작하고,  케이블카 탑승장소로 향한다

케이블카 아랫쪽은  원시림에 가까울만큼 숲이 우거져 있다

바나힐은 다낭 지역이 36도로 무더울 때도 15~26도를 유지하는 쾌적한 곳으로,

해발 1,500여m 정상에 지어진 테마파크(놀이공원) 수십개의 건물 외관은

다양한 성곽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곳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만든 휴양시설로, 당시 프랑스인과 무거운 짐을

베트남 사람들이 일일이 등에 지고 이 곳까지 오르내렸다는 아픈 역사도

지니고 있는 곳이 이곳 바나힐이다.

바나힐을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던 썬월드입구 타임게이트로 향한다

새로운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공산국가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1980년대 이후 베트남 공산당이 자유경제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 경제로 통합되는

이면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그런 전략적 흡수와 적절한 변형은 베트남이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어낸 시장경제 국가가 되도록 했다.

케이블카 아랫쪽으로는 홰손되지 않은 완벽한 자연 그대로가 환상적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타임게이트에 내려서 근처에 있는 바나힐C.C로 향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라운딩에 나선다

늦게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여 급하게 점심을 먹고 라운딩을

나섰는데, 어제 라운딩을 한 라구나 C.C와는 전혀 딴판이고

가이드가 이야기 하기로는 아주 명문 골프장이라고 했는데

서비스는 엉망이고, 골프장의 횡포도 아주 심하다.

 

명문 골프장이라면 고객의 감동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명문 골프장은 고객에게 갑질하는게

명문인 모양이다

 

우리 일행이 10명인데, 4명, 4명이 나가고 2명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쪼인을 하지 않으면 라운딩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마치 한국의 골프장 횡포와 전혀 다르지 않다

green과 fairway 상태도 썩 좋은 편도 아닌데, 어제의 골프장과는

달리 난이도는 있어서 쪼이는 맛은 있으나 스크어는 영 엉망다

그래도 겨울철에 이렇게 라운딩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My caddy와 함께

아마 우리가 골프장의 마지막 팀이었던 모양이다.

라운딩을 끝내고 락카로 들어서는데 가이드가 지랄발광을 한다

다낭 식당에 저녁을 예약한 시간이 촉박하니 샤워를 하지말고

빨리 가야한다고 성화이다...말이야 막걸리야...하면서 소리를

지르니 10분안에 샤워를 끝내 달라고 사정을 한다

오늘은 골프장에서 이래저래 불쾌한 기억만 가지고 간다

바나힐C.C에서 다낭 시내로 들어오는데 저녁 시간대라서

그런지 오토바이로 인하여 50여분이 걸려 다낭 한강근처의

식당에서 일행들보다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치고 한강 주변을 산책한다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 한강인데 이곳 다낭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 이름도

한강인데, 남중국해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은 다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밤이 되면 강바람도 선선하고 주변 건물들이 환하게 불을 밝혀, 야간 산책을

나가거나 강변길 옆 카페에서 차 한잔 즐기기에 좋다.

 

야경이 가장 화려한 곳은 용 모양을 한 롱교(Cầu Rồng)인데 특히 주말 밤 9시에

5분 남짓 용머리에서 불을 내뿜는 불쇼가 큰 인기이지만 꼭 주말이 아니어도

용머리 근처 사랑의 다리(Cầu Tàu Tình Yêu)에는 하트 모양의 조명과 머라이언상이

불을 밝혀 항상 젊은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식당앞 한강변에서 바라본 용머리 다리

저 화려한 용머리 다리는 매주 금.토.일  저녁 9시에 용이 불을

내뿜는 불쑈가 펼쳐진다고 하는데 시간이 맞지않아 구경을 

할 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다낭의 기원은 192년 말레이계인 참족(Cham people)이 세운 참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부터 다낭은 참족의 주요 거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0세기에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베트남의 지속적인 남진(南進) 정책으로 참파를

위협했고, 결국 15세기 말에 참파는 대부분의 영토를 레 왕조(1428~1789)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6세기에는 꽝남 정권의 수도 후에(Huế)의 외항(外港)인 호이안(Hội An)에서

동남아시아 무역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다낭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18세기가 되자

투본강(Thu Bồn:秋盆江) 하구에 있는 호이안 항이 상류에서 운반된 모래의 퇴적으로

점점 쇠퇴했기 때문에, 한강 하구의 다낭항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35년에 응우엔 왕조(阮朝)의 민 망(Minh Mạng, 1820~1840 재위) 황제(明命帝)가

베트남에 오는 서구의 모든 선박은 다낭으로 입항해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며, 다낭이

베트남 중부 최대의 항구가 되었으며, 응우옌 왕조의 반(反) 로마카톨릭교회정책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1847년에 수감되자, 프랑스 측은 이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 가톨릭

포교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2대의 전함과 라삐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에 파견했다.

 

양국의 협상이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자, 프랑스 해군은 다낭 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측의

배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고, 양측 해군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전투로 베트남 측의

배 3척이 침몰했고, 프랑스 함대는 도망쳐 나왔다... 1858년에 프랑스 정부가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 조정의 탄압을 응징하고, 응우옌 왕조 조정에 프랑스군 주둔을 요구하는 전쟁 개시를

승인하자,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 19세기 말에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되었고,

이때부터 다낭은 뚜란느(Tourane)라고 불리며 5대 식민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낭의 슬픈 역사를 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다가

숙소인 로데사 호텔로 향한다...호텔로 돌아와서 오랫만에

만난 회원들이 술 한잔을 하자고 하는데 난 원래 양주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것보다 이틀 연속 라운딩을 한 탓인지 너무 피곤하여

먼저 숙소로 가서 잠자리에 든다

 

제3일자

어제 저녁에 남들보다 일찍 잠을 자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새벽 4시정도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일어나기에 눈을 뜨니

이곳 베트남의 시간으로 새벽 2시(한국과의 시차:2시간)에

채 안된 시간이다....가지고 온 책을 좀 보다가 6시에 호텔내에

있는 부페에서 간단하게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 과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싼 다음에 후론트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호텔밖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아침 8시쯤에 가이드와 미팅을 하고 마지막 일정으로 골프팀은 링엄사와

다낭대성당 구경 이외는 전부 쇼핑 투어란다...여행사에서 물건을 사던

안사던 간에 의무적으로 들려야 한다는데 난 이런건 딱 질색이다. 

처음으로 간 곳이 다낭에서 유명하다는 노니와 침향을 판매하는 곳인데

솔직히 난 관심이 없어서 맨 뒷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조금은

미안하다...직원들이 전부 한국 사람인 것 같은데, 우리 회원들이 의외로

물건을 많이 구매하는 바람에 가이드가 뽀찌를 많이 받았는지 입이

귀에 걸렸다...침향은 워낙 비싸서 사는 사람이 별로없다

 

노니(Noni)는 용담목 꼭두서니과의 식물 중 하나로 열매는 구토맛이라고

표현 가능한 강렬한 향취 탓에 일상적인 식품으로 쓰이기보다 구황식품으로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실제로 원산지가 환초들로 가득한 태평양 지역이다 보니

햇빛이 뜨거워도 비가 쉴새없이 내려도 소금기 머금은 모래흙에서도 화산재로

가득한 땅에서도 자라기는 참 잘 자란다고 하며 이 역겨운 풍미는 부탄산 때문인데,

부탄산은 토사물과 은행 열매, 썩은 버터 등의 냄새의 주 원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단순히 호불호가 갈리는 정도인 두리안보다도 심한 냄새와 맛을 자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들은 평상시에는 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기근이 닥쳐서

노니 외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먹었다고 하니, 단순한

구황작물보다는 비상식량에 가까운 위치였던 셈이다

2번째 쇼핑 코스가 노니 판매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커피판매장이다

커피 홍보및 판매장으로 들어선다

베트남은 인스턴트커피로 소비하는 로부스타 품종의 최대 생산국인데

커피 생산량으로 따진다면 브라질에 이어 제2의 커피 생산국이라 한다

베트남 커피는 코페아 아라비카 종 커피가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에 의해 1857년

베트남에 처음 유입되었으며, 신선한 젖의 공급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과

베트남인들은 다크 로스트 커피와 함께 달달한 응축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커피중에서는 가장 비싼 커피는 족제비똥 커피라는

위즐(wessel, 족제비) 커피라고 라고 하는데, 족제비가 커피 원두를

먹고 싼 똥에서 수집한 커피라고 한다

 

위즐 커피는 넓은 산악지역에서 족제비를 방목하며, 똥을 모으는 방법은 찹살떡을

미끼로 놓아두면 족제비가 와서 찹쌀떡을 먹고 그 자리에서 똥을 싸기 때문에

산악지역을 헤메며 똥을 채집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커피와 함께 파는 커피콩으로 만든 피부 각질제거용 스크럽(scrub)이 있는데,

투명한 점성 액체로 손등에 짜준 것을 계속 문지르면 뭔가 뭉치는데 피부 각질이

제거되어 뭉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발에 각질이 많아서 이것을 사는데

생각보다 비싼편이다

커피판매장 내부의 모습

원두와 커피 추출 과정의 모습

족제비커피의 설명을 듣고있는 회원들

전 세계 커피 생산국의 생산량

베트남은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커피생산과 수출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는 고산지대의 토지 활용과 소득 증대를 통해 빈곤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커피산업을 육성했다... 현재 베트남의 커피는 90% 이상이 가격이 낮은품종으로

수출량에 비해 수출액이 적고 원두에 비해 가공커피 비중이 낮은 편이란다

 

원래 베트남은 1860년대에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아라비카 품종의 커피를 심었는데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남부 고산지대에 로부스타 품종을

심고 일본에서 재배기법을 이용하면서커피의 세계적인 생산대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은 커피에 대한 모든것을 정부주도하에 관리하고 있으며 전 세계 40개국에

수출을 한다고 한다

베트남 커피의 안내판

이곳에서는 다들 커피에 관심이 많은지 거의 다 커피를

많이 산 다음에 다음 여행지인 린엉사(靈應寺)로 향한다

대웅전 가는 길에서 바라본 모전탑의 모습

노니와 커피매장에서 일행들이 많은 제품을 구매하여서 그런지 

가이드의 화색이 돌고, 목소리가 우렁차다...그러면서 다음 스케줄

관계로 린엉사(靈應寺) 관람 시간을 30분 주겠다고 하는데 佛者로서

볼 것이 많은데 갑자기 왕짜증이 난다...7년전 이곳에 초딩이 동창들과

을때는 3시간의 관람시간을 주었는데도 다 구경을 못했는데 말이다

 

가이드에게 한마디 하고 싶지만, 아무도 異議를 달지 않기에 괜히

분위기를 해칠까봐 꾹 참기는 했지만 기분이 영 아니다

하기야 저 가이드가 뭔 잘못이 있겠나...모두투어라는 여행사의

횡포겠지...1인당 여행경비도 190만원의 거금인데 말이다.

하기사 이번 여행 경비는 전액 기금에서 지불하긴 했지만 그 돈도

엄연히 우리가 낸 회비가 아니던가...속된말로 자기 닭 잡아먹는 꼴인데

당장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안 나가니 다들 관심이 없는듯 하다

 린엉사(靈應寺)로 들어서는데 경건하고 엄숙한 절집의 풍경과는 거리가

먼 마치 시장통에 온 것같은 느낌이다...우리나라의 경주 불국사나 합천

해인사도 관광지이긴 하지만 엄숙하여 부처님에 대한 경배심이 절로

우러러 나오는데 이곳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듯하다

절집 경내로 들어서서  린엉사(靈應寺) 대웅전으로 향한다

린엉사 대웅전 안으로 들어서니 주불(主佛)로 모셔진 부처님 뒷쪽에는 대웅전을

뜻하는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이 보이고, 우측에는 불일증휘(佛日增輝)에 좌측에는 

법륜상전(法輪常轉)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뜻은 “부처님의 밝으신법  부처님의 은혜가  

출세간(出世間:속세의 생사 번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듦)을 통해 고루 전해지고  

부처님의  설법은 무량겁(無量劫: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을 통하여

막힘이없고 불법(佛法)이 영원토록  길이길이 전하도록 발원한다”는 현판이 걸려있고

실내 기둥에는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 삼아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은 있으나

우리나라 절집에 있는 닫집(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은 보이지가 않는다  

린엉사 대웅전 내부의 모습

린엉사 내부에는 반바지와 모자를 쓰고는 들어갈 수가 없고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아랫도리를 가릴 수 있는 천을 제공한다

시간이 없어서 법당 내부에 들어가서 참배도 못하고 밖에서 선 채로

부처님께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포대화상 앞에 있는 불전함에

1$ 지폐 한장을 넣고 법당을 빠져 나오는데, 예전과는 달리 참배 형태가

많이 완화되었는지 모자를 쓴 꼬마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린응사(靈應寺: Linh Ung)

린엉사(靈應寺)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전이 끝나가던 시점에 베트남을 탈출하려던

남베트남인들이 다낭항에서 100만명 이상이 미케비치 일대를 통해서 탈출을 감행했는데

이때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50만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불상이 린엉사 해수관음상이라고 한다

 

2003년도에는 이런 사항들이 공공연히 알려지지 못할 정도의 사회 체제였기 때문에

기부 이유등이 비밀에 붙여졌다고 해서 '비밀의 화원'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며, 근처에

다양한 분재와 불상들이 많고 미케비치와 다낭 시내가 한 눈에 보여 아름다운 절경

때문에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은 곳이다

다낭 현지인들에겐 레이디 붓다(Lady Buddha)라고 불리는 해수관음상

린엉사 해수관음상의 몸 속에 있는 법당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좌.우 협시보살로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꽃 장식이 많은 점이 특이하다

들어갈 시간이 없어서 7년전에 들어가서 참배한 추억을 되새기며 참배를 갈음한다

 

동양에서 가장 높은 해수관음상은 다낭시내와 해변 그리고 동중국해를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고 서있는데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달라는

바람에서 이 해수관음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링엄사’(영응사)를 ‘비밀의 사원’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 무슨 소원이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데 무엇을 빌었는지 발설하면

절대 소원이 이루어 지지 않는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린엄사 해수 관음상

높이가 67m로 약 30층의 건물 높이와 같은데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불상으로

2001년도에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조성된 불상이라고 하며 이 해수관음상이

세워진 이후로 다낭에는 단 한번도 태풍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의 높이가 16m인 걸 감안하면 이해가 편할 듯...

 

이 해수관음상을 조성한 배경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고 한다

베트남의 국민 80% 이상이 불교를 믿는 국가로 옛날에는 우리나라처럼 베트남도

자유(월남)진영과 공산(월맹)진영 치열하게 오랜 세월동안 경쟁을 하다가 1975년

4월 30일에 월맹 탱크가 사이공의 월남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월맹 깃발을 꽂으면서 월남이 패망하고 공산국가로 통일이 되었다

 

당시 자유민주진영인 남베트남(월남)의 정치인과 관료, 군인,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에서

종사했던 부유층들이 보복이 두려워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14,000여명의 bout people이

자유를 향해 목숨 걸고 배를 타고 가다가 폭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 중 단 3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생존하신 분이 훗날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여기에 부지를 구입하고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서

해수관음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월남전 패망 당시 수많은 보트피플들이 水葬된 선짜반도 바다의 모습

다낭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선짜반도 중턱에 린엉사가 있고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세계 6대해변으로 선정된 미케비치

해변은 정말 환상적이다

린엉사 해수관음상(海水觀音)

관세음보살은 현세에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다를 향한 관음보살을

해수관음보살이라 하며, 주로 바다에 관계된 중생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상은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의 해수관음상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산스크리트어: अवलोकितेश्वर 아발로키테슈바라)은

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로, 중생의 소리를 듣고 어디든지

몸을 나투어, 고통과 어려움에서 구제해주는 보살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도

많이 부르는데, 중국어권에서는 성관음(聖觀音)이라고도 하는데 지장보살과 함께

불교 2대보살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까지 합해서는불교 4대보살이라고 일컫는다.

30분도 안되었는데 깃발을 든 현지 가이드는 일행을 찾아 다니느라 분주하다

린엉사, 린응사, 영흥사(靈應寺), 림엉사 등으로도 불리는 사찰이 다낭에는 린엉사가

3군데가 있는데 이곳 쏜짜반도와 바나산 정상,오행산에 있다고 하는데 다낭을

측정할 때는 린엉사 3곳을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아! 귀엽다...내 70인데 아직 손주가 없으니...우리 새끼들은 뭐하는지?...

린엉사 일주문

해수관음상을 대충 둘러보고 올라가는데 우리나라 절집의

일주문 형태의 전각이 나오는데 이곳을 “깨달음의 문”이라고 하는

곳으로 베트남의 사찰들은 가람의 전각 배치에 룰이 없는듯 하다

 

우리나라의 가람 배치는 절집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곳이 일주문(一柱門)인데

일주문은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문이다. 

 

그 다음이 사천왕문, 금당(金堂:주불을 모신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산신각 등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데, 베트남의 법당에는 부처님만 모셔져 있는게 아니고, 포대화상,

달마대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손오공까지 있는 절집도 보인다

가이드의 재촉으로 급하게 가는길에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전각에는 동남아 지역의 소승불교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행상의 부처님 모습도 보인다

주마간산격으로 린엉사를 둘러보고 주차장 가는 길에서 바라본 9층의 석탑 모습

모전석탑(模塼石塔) 형식이나 우리나라 절집의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중국의

지배를 받은 탓인지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석탑이다.

 

* 인도의 불탑(佛塔, Stūpa)은 석재를 가공하여 축조한 모전(模塼) 형식과 벽돌을 구워 조성한

  전탑(塼塔) 형식으로 나뉜다... 그러나 모전석탑과 전탑은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선후 관계를 구분할 수 없으며, 모전석탑은 신라의 전형양식(典型樣式) 석탑과 전탑(塼塔)의

  특징이 함께 반영된 석탑이다.

 

 모전탑에는 재료의 모방과 전탑 양식의 모방이라는 2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인도 불탑의 시원으로 인정받는 산치 스투파는 모전석(模塼石)을 이용한 석탑인데,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불탑이 동시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모전석탑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로 쌓은 탑으로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유행하였으며,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모전석탑은 석재를

벽돌 형태로 가공해 쌓거나, 전형양식(典型樣式) 석탑에 탑신부 우주를 생략하고 옥개석 낙수면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탑이다... 벽돌 형태로 쌓은 모전석탑은 분황사탑(634년)을 제외하면 모두

통일신라 이후에 건립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다수 건립되었다.

짧은 린엉사 참배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이안 바구니(광주리)

배를 타러가는 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월남쌈에다가 한국식으로 돼지고기를 주는데 먹을만 했다.

식사를 하면서 소주에다 맥주를 말아서 2잔을 마시고 

다음 코스로 향한다

여유로운 午寢을 즐기는 젊은 친구들

다낭에서 식사를 하고 호이안 바구니 배를 타는 곳으로 왔는데

오늘이 일정의 마지날 날인데 생각보다 날씨가 상당히 덥다

지금이 베트남은 乾期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의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바구니배 타는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관광객들이 타고온 버스들이

꽉 들어차서 옴싹 달짝도 못할 지경이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투어로

온 관광객들 대부분이 한국 사람인 듯 하며, 주차 안내원과, 상점에서

호객행위를 상점 쥔장들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거기다가

음악도 한국의 경쾌한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니 다낭이 “경기도 다낭시”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 바구니배는 관광팀만 타고, 골프팀들은 관광팀들이 바구니배를

타고 나올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참으로 야박하다.

이유인 즉...골프팀들이 경비를 너무 많이 썼다고 못 태우 주겠단다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데서 냉커피 한잔을 시켜 마시고는...

바구니배 타는 곳으로 가본다

바구니배가 들어오는 입구에는 개구리 복장을 한 마스코트가

한국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데 마치 한국의 유원지에 온 듯한

느낌이다

우리 일행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고, 다들 신나

보이는데 난 저 배를 못 타봤으니 아쉽기만 하다

호이안에서는 베트남 전통 문화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게 ‘바구니 배’ 체험이다.

호이안 어부들이 투본강에서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배인데, 코코넛을 반으로 갈라놓은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코코넛 배’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언뜻 금방 뒤집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타보면 매우 안전하다고 한다.

 

노를 저어 물에서 자라는 코코넛 나무 정글 사이로 다니는 재미도 있고, 배에서

낚싯대로 강변의 숨은 게를 유인해 잡아보는 즐거움도 준다고 하는데 난 체험을

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바구니 배 체험은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투어 상품 중 하나로

꼽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찾아오면 한국의 트로트 노래로 강변이 떠들썩해진다.

물길을 따라 코코넛 배들이 모여드는 지점에서 노래방 기계로 트로트 가요를 열창하는

현지인 사공을 보면 정이 많은 한국인 호주머니에서 팁이 저절로 나온다고 한다. 

온갖 묘기를 부리는 바구니배 사공...최고의 스타인 듯 싶다

관광팀들이 다 온 다음에 다음 코스인 다낭 대성당으로 향한다

다낭 시내를 들어와서  다낭 시내를 관통하고 있는 한강변에다

버스를 주차하고 다낭대성당으로 향한다

낮에 바라본 한강과 용다리의 모습

다낭대성당(Danang Cathedral , Nhà Thờ Chính Tòa Đà Nẵng)

다낭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마리아 연보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라고 하

1923년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건축된 성당으로 풍향계가 돌아가는 독특한 지붕으로

인해 현지인들은 닭 성당이라는 의미인 찐 또아 꽁 가(Chinh Toa Con Ga)라고 부른다.

 

분홍색 외벽이 인상적이며 일요일 미사 시간에는 신도들이 몰려 장관을 이루며,

내부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으며, 성당 오른편에는 주교관이, 뒤편에는

성직자들의 납골당과 성모마리아상이 놓여 있는 작은 인공 동굴이 있고 특별한

볼거리라기보다 사진을 찍으러 많이 찾는다.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일요 미사시간이라 성당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알고보니 이 성당은 일반인은 성당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으며 단 베트남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다낭에 지어진 유일한 성당이고, 다낭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랩이나 택시를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으로 다낭 대성당

주변에는 한 시장, 콩카페, 주문제작 상점 등이 있어서 함께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밖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씨클로(인력거)

미사중인 대성당은 구경조차 못하니 가이드는 신이났다.

우리 일행을 근처에 있는 쇼핑센터로 밀어넣는데, 이곳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샤넬, 구찌, 아르마니, 입생롤랑 등의 유명 백과 의류,

그리고 롤렉스, 파텍필립 등의 짝뚱 제품들이 백화점같은 멋진 매장에서

버젓이 전시되어 팔리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광경을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는 아무런 죄의식없이 자행되고 있다

가이드가 이곳의 쇼핑이 끝나자 근처의 잡화점으로 또 일행을 몰아넣는데

가이드 이 친구...돈 독이 잔뜩 오른 모양이다...도데체 오늘 몇번째

쇼핑을 시키는지 모르겠다...난 이런 곳에서는 지갑을 열지 않는 편이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가는데 다낭의 마지막 식사는 삼겹살 파티다

베트남와서 제대로 밥을 먹는 기분이다...식사를 끝내고 마지막 일정으로

이발관으로 향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이발관하면 머리깍고 면도해주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다낭에서의 이발관은 면도와 맛사지, 귀청소를 해주는 곳인데, 퇴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아주 건전한 곳으로 이번 다낭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다.

 

가격은 회비에서 지불했으니 알 길은 없다... 편하게 면도와 귀청소, 풀코스의

맛사지를 받고 나오니 공항으로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가이드가

다낭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호텔 옥상으로 안내하는데, 이번에 수입이

짭짤했던지 자기가 맥주와 음료를 쏘겠다고 하면서 다낭에서 가장 높은 

호텔 옥상으로 안내한다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다낭시내 야경과 미케비치 해변의 모습

3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가이드와 작별을 한 다음에...

다낭공항으로 향한다

다낭공항

비행기 이륙시간 2시간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친 다음에 일행들과 함께 한참을 멍때리기 한 다음에 비행기에 탑승한다

다낭발 → 인천행 비행기표

다낭에서 밤 22시 50분(한국시간 0시 50분)에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새벽05시 30분...짐을 찾아서 친구의 승용차로 집에 왔는데, 너무 피곤하다

추저추적 내리는 빗속에 집에 도착하니 몸뚱아리는 녹초가 된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