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지맥 제1구간 - 분기점(첨봉)에서 우슬재까지
☞산행일자: 2024년 03월 10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의 미세면지
☞산행거리: 도상거리 11.2km +들머리 0.9km / 6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바람재(동물이동통로)-분기점(첨봉)- 무명봉- 안부- 안부- 무명봉
다시 바람재(자경동고개)- 무명봉- 안부- 무명봉- 388.3m봉- 안부
295.2m봉- 안부- 건들재- 갈림길- 무명봉- 안부- 382.4m봉 갈림길
무명봉- 무명봉- 수원백공 묘-임도- 나주나공 묘- 삼거리 갈림길
137.5m봉- 구룡목재(상가치)- 청주한씨 가족묘- 상개마을
청주한씨 가족묘- 묘지봉?- 안부- 무명봉- 안부- 무명봉- 195.5m봉
안부- 184.5m봉- 안부- NO69송전탑- 덕음산 갈림길- 덕음산(덕룡산)
다시 덕음산 갈림길- 넓은 공터- 조망바위- 암봉- 안부- 무명봉
416.4m봉- 안부- 383.7m봉- 암봉- 갈림길- 안부- 별바위- 암봉
274.5m봉- 갈림길- 해남터널 위- 185m봉- 우슬재
☞소 재 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옥천면, 해남읍
지난주에 잡목으로 악명높은 진도지맥을 끝내고, 이번주는 진도지맥 못지않게
산길이 험한 해남땅의 화원지맥 첫 구간을 하기로 하고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해남을 가기 위해서 고속터미널로 향한다
화원지맥 개념도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화원지맥 개념도
화원지맥 (花源枝脈)이란 전라남도 남서단 진도와 목포 사이에 황해로 길쭉하게 뻗어나간
반도의 끝 동네가 해남군 화원면인데, 이 화원면의 이름을 따 화원반도(花源半島)가 되었고,
땅끝기맥에서 분기하여 반도 끝으로 가는 산줄기는 여타 지맥과 달리 물(강)을 가르는 분수령이
아니라서 땅끝기맥이나 호미, 고흥, 여수처럼 지역의 명칭을 따 ‘화원지맥’이 되었다.
산경표에는 金剛山 玉梅山 日星峰 登山浦가 기재되어 있고 (101頁)
대동여지도에는 金剛山 德隱山 眉岩山 竹山 南郭山 白峙 轅門 日城山 黃原 登山 등이
표기되어 있으며, 금강산, 옥매산, 일성산, 죽산산성, 흰재(백치) 등의 이름이 현재도
남아있고, 덕음산(德隱山), 우슬치(于膝峙)는 남쪽 땅끝기맥에 표기 되었다.
금북정맥 서산의 금강산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었으나 해남의 금강산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모두 등재가 된 족보있는 산이다.
땅끝기맥 첨봉(352m)에서 분기하고, 만대산(493m)이 지맥 최고봉으로, 초반 두 구간 거리인
마산면의 국사봉을 내려서면 산인지 들인지 모를 낮은 구릉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막판에
다시 힘을 내 솟구친 다음, 목포로 들어가는 바닷길의 길목인 목포구등대(木浦舊燈臺)에서
달리도(達里島)를 마주보며 바다로 스며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해남행 버스표
17시 55분에 서울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정안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를 한 다음에
중간 기착지인 목포터미널에서 2/3정도의 손님이 하차한 다음에 종착지인
해남으로 향하는데 400여km를 달려 해남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훨씬 넘어 버렸다...중간에 차가 막혀서 예상시간보다도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해남터미널(23:10)
2014년 땅끝기맥을 홀로 다닐 때 해남땅을 와봤으니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시골이라 그리 변하지는 않았는데, 코로나라는
endemic을 거친 이후라 숙박과 교통 문제가 상당히 불편하게
바퀴어버렸다...예전에는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서울과
목포로 가는 교통편이 상당히 많았었는데, 지금은 인구가 줄었는지
교통편도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불편하다.
불꺼진 터미널을 빠져나와 찜질방을 찾으려고, 터미널앞에 있는
택시기사에게 물으니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주변의 모텔로 향하는데, 1시간을 넘는 시간을
헤매면서 7군데의 모텔을 다녔지만 가는곳마다 滿室을 걸어놓고
불이 끄진 상태라 참으로 난감하다...그래도 길거리에서는 잘 수
없잖은가...8번째 간 모텔에서 방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50,000원을 달라고 한다...잠을 서너시간만
자고 나가는데 현금을 줄테니 40,000원만 받으라고 읍소를 하니
측은해 보였던지 그 돈을 받고 열쇠를 내 준다.
길거리에서 숙소를 찾아서 1시간 이상을 헤맨 탓인지 방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하는데 좀처럼 잠이오질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씻고, 모텔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김밥한줄에다 오뎅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에
아침을 해결하고, 화원지맥 들머리인 바람재로 향하는데
아직까지 주위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사물이 구분되지
않는데, 해남읍에서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바람재로 가자고 하니
바람재를 잘 모른다고 한다...허!... 참 난감하네 하는 수 없이 주소를
알려주니 주소를 찍어서 바람재로 향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지역 사람들은 바람재로 부르지 않고 자경고개라고 한다(06:15)
바람재(215m:06:15)
해남군 옥천면 용동리 자경마을 위에 있는 동물이동통로(Ecobridge)를 넘어서
산자락길 팻말이 있는 이정표에 앞에 내려 산행을 준비하는데, 남녘지방이긴해도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날씨가 추워서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06:20)
우측으로 나있는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에
등로 가운데에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과 라디오만 가지고 첨봉으로
향한다...이 길이 화원지맥길이라 분기점인 첨봉을 찍고 되돌아와야 한다
첨봉으로 오르는 길
2014년 11월 9일...땅끝기맥을 할 때, 이곳 첨봉을 지났으니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그때만 범여는 봄날이었는데,
지금은 이빨빠진 호랭이가 되어 버린 퇴물이다...그때 같이 걸었던
아그들한테 배척당하고 찬밥신세(?)다.
첨봉(尖峰:351.5m:06:55)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백호리와 대산리, 용동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땅끝기맥이 지나가며, 땅끝기맥에서 가지를 친 화원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한
봉우리로 지명의 유래는 봉우리가 높고 뾰족하여 ‘뾰족할 첨(尖)’자를 써서
첨봉이라 불렀다고 한다...첨봉은 온 사방이 온전하게 해남군 옥천면에 속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상의 표지판은 강진군에서 설치했는지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에 있는 산이라 표기를 해놨는데 봉황리는 여기서 한참 먼 곳에 있다.
첨봉은 삼산천(三山川)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으로 이곳 사면에서 발원한 삼산천은
옥천면 용동리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양촌저수지를 지나면서 서북쪽으로,
해남군 삼산면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삼산면 고천암호를 통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해남군의 지명유래에는 첨봉을 삐죽산이라 표기한 지명이 보이는데
삐죽산(원경산 또는 첨봉)은 옥천면 대산리와 백호리 및 용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40m이고 꼭대기가 뽀족하고 높아서 북쪽으로 멀리
바라보며 경치가 아름다우며 옥봉(玉峰)이라고도 하니 해남을 대표하는
문장가인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가 아호(雅號)가 여기에서 인연했다고 한다.
* 백옥봉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에는 해남을 대표하는 문장가인 옥봉 백광훈의 묘가 있다.
백옥봉(白玉峰)은 시를 매우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필체도 뛰어났다.
하루는 평양 기생이 옥봉이 글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사를 갔는데, 학생들만 있고
옥봉은 보이지 않았다. 학생에게 “선생님 어디 가셨냐?”라고 묻자, “저그 소풍 가더니
저기 오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멀리서 오는 옥봉의 차림새를 보니 한눈에도 매우 가난하게 보였다.
기대를 안고 여비라도 받아 가기 위해 찾아온 평양 기생은 추레한 옥봉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
기왕 왔으니 인사라도 하고 가려는 마음으로 “나는 평양 사는 기생입니다.”라고 인사하였다.
그러자 옥봉은 여비를 챙겨 주지 못하여 미안하다면서 기생의 치마폭에 “금중여수신묘 옥중공항
담낭일필두[금을 주자니 여수 물이 깊어 줄 수가 없고, 옥을 주자니 공항이 멀어 못 주지만,
붓 끄트머리로 특별히 당부의 마음을 허락한다]
”라고 써 주었다.
옥봉이 써 준 글씨의 뛰어남을 알지 못한 기생은 비싼 치마를 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기생은 중국에 가서 기생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중국 선비들이 치마폭에 쓰인 옥봉의
글씨를 보고 감탄하며 치마를 비싼 값에 사 갔다. 나중에 기생의 치마에 쓴 옥봉의 글은
중국의 국보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첨봉 정상에 걸려있는 수많은 시그널들...
실제로 얼굴을 본 산꾼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기.지맥길에서
시그널로는 수도없이 많이 만났던 분이라 그저 반갑기만 하다
백두사랑산악회의 이대장, 유주열님, 양호씨 다들 반갑구먼...
화원지맥길의 첫발을 내디디며 100여km 정도되는 목포구등대로 향한다
내림길 등로 좌측의 자경마을 뒷쪽으로는 땅끝기맥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주작산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무명봉(07:00)
올라갈 때는 약간 어두워서 몰랐는데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거친 지맥길은 범여가 힘들다, 힘들다 했던 진도지맥 못지않다.
예전에 산불이 난 곳인지, 불타서 나딩구는 나뭇가지 사이로
잡목과 두릅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을 통과하는데 가시에
얼굴이 할퀴어 초반부터 피를 본다
잠시후에 바람재를 지나서 올라가야 할 388.3m봉 너머로 10년전
땅끝기맥을 아그들과 종주할 때 걸었던 덕룡산이 얼굴을 내민다
강진군 도암면과 신전면의 경계에 있는 덕룡산(德龍山:432.9m)은 산이
반드시 높이에 따라 산세가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산이다.
해남 두륜산과 이어져 있는 덕룡산은 높이래야 고작 400m를 가까스로 넘지만
산세만큼은 해발 1,000m 높이의 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상인 동봉과 서봉, 쌍봉으로 이루어진 이 산은 웅장하면서도 창끝처럼 날카롭게
솟구친 암릉, 암릉과 암릉사이의 초원능선 등 능선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힘의 진수를 보여주며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자연의 은밀함을 맛볼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편 산천조에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고,
남평현 산수조에는 '현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고 산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남평현에 속한다는 기록이 있다.
안부(07:02)
초반부터 피를 보면서 안부를 통과하는데 서쪽으로는
지난주에 끝냈던 진도지맥 능선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등로 우측으로는 드넓은 옥천면의 풍요로운 들녘이 보이고
나뭇가지 뒷쪽으로는 덕음산, 그 뒷쪽으로 여인의 유두처럼
뾰족하게 생긴 산이 만대산과 금강산이고, 뒷쪽의 병풍처럼
보이는 산이 흑석산이다
화원지맥길...초반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다
그래!...이런 것으로 氣가 죽으면 지맥길을 걷지 말아야지.
어차피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생강나무꽃도 범여를 응원한다...기 죽지 말라고...
안부(07:07)
지독한 잡목으로 혹독한 화원지맥길의 신고식을 치르고 내려서니
넓고 팽평한 안부가 나오는데, 편백나무 조림지가 있고, 우측으로는
족보가 있는 264.3m봉으로 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맥길은
좌측의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바람재(자경고개)로 향한다
아침에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등로가 뚜렸하다
자경마을 너머로 보이는 주작산의 모습
무명봉(07:10)
바람재로 향하는 계속되는 내리막길
등로에서 바라본 해남군 옥천면 용동리 자경마을의 모습
자경동은 1587년 해남윤씨 16대손 윤선호가 삼산 송정에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용동리 중에서도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인 도림마을이
도림, 분동, 화연동, 자경동의 4개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경동에서
강진 수양리로 이어지는 산길은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일지암과 다산초당을
오가며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쌓았던 길로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새벽에 이곳에 벗어둔 베낭을 다시메고 바람재로 내려간다
자경마을 너머로 이어지는 땅끝기맥의 산그리메
바람재를 통과하는 동물이동통로 윗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바람재(자경고개:215m:07:20)
해남군 옥천면 백호리 개비자골에서 용동리 자경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동물이동통로(Ecobridge)가 설치되어 있는 구절양장으로 이어지며, 산행
지도상에는 바람재라 표기된 지도와 자경재라 표기된 지도가 있으나 이 지역의
사람들은 바람재라면 잘 모르고, 그냥 자경고개라 부르는데, 지명은 고개 좌측
아래에 있는 자경동 마을을 따와서 자경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다음지도에는
바람재로 표기되어 있으며 바람이 세서 바람재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도 한다
반바지님께서 붙혀논 바람재란 코팅지를 바라보며 빡센 오르막길로 향한다
바람재에서 오르는 등로는 초반부터 강력한 잡목의 태클로
산꾼 범여의 氣를 꺽어 버린다...지금이야 비록 이빨빠진
호랑이이긴 해도 16년간 대간 4회, 9정맥, 130여개의 기.지맥을
걸었던 산행 짠밥이 얼마인데 이런데 氣 죽을수는 없잖은가...
갈수록 가관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좋은것만 바라면서 살수야 없잖은가.
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좋으면 좋은데로 힘들면 힘든데로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묵묵히 가야하는게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희미한 등로를 빡세게 오르는데 홀로걷는 산꾼이 길을 잃을까봐
간간히 나타나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빡세게 한번 치고 올라서니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07:35)
또다시 시작되는 지독한 잡목지대, 어디로 가야할 지 틈이 안 보인다
그래도 겨울에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면서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 안부에 도착한다
안부(07:38)
짧은 산죽지대를 지나고...
봉우리가 나온다...388.3m봉인줄 알았는데 조금 더가야 할 듯 싶다
무명봉(07:46)
안부를 지나서 , 388.3m봉으로 향하는 좌측으로는 멋진
주작산이 보여야 하는 곳인데 숲에 가려져 아무것도
안 보이니 아쉽기만 하다
388.3m봉(07:52)
388.3m봉 정상에 올라서니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주작산의
흔적이 보이고, 너무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388.3m봉 정상 삼각점
388.3m봉 정상에서 11시 방향으로 내려서는데 엄청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두륜산의 모습
네 생각에 물든 날 / 정한미
오늘 하루 네 생각이 난다
밥을 먹어도 보고 싶고
길을 걸어도 네 얼굴만 떠오른다
너와 마주 보며 꽃길을 걷고 싶고
길가 카페에 앉아 고구마 라떼와
커피콩빵을 마주 보며 먹고 싶다
해지는 저녁노을 등에지고
예쁘게 웃는 너를 보며
사랑과 행복에 감사도 하고 싶다
너는 언제나 내 기억속에
오래 머물며 그리운 얼굴로
반가운 모습으로 맴돌다 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음지에다 최근에 내린 비의 영향인지
젖어있는 낙엽 아랫쪽에 숨어있는 흙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08:00)
산죽사이로 오르는 길...따스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고 이른 새벽의
추운 날씨에 溫氣가 스며들기 시작하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완만한 능선으로 치고 오르니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295.2m봉이다
295.2m봉(08:06)
薄福한 삶
295.2m봉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꺽어져 내려서는데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진달래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도 급경사에다가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08:09)
등로 우측에는 묘지를 보호하기 위한 돌담이 보이는데
묘지를 移葬했는지 정작 묘지의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편안한 내리막길을 걷다가 내려서는데 다시 등로는 거칠어진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곳을 내려서니...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옹벽 아래의 2차선 도로로 내려선다
건들재(08:17)
해남군 옥천면 용동리와 백호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도로명 주소:용동길)가
통과하며, 직진으로는 산사면을 휘감으면서 올라가는 비포장 도로의 임도가 있고
이동통신탑과 반사경이 있는데 건들재라는 지명유래는 어느 자료에도 없다
인증샷
건들재를 가로질러 비포장 도로로 들었다가...
무단투기 경고판이 있는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숲으로 들어선다
곧바로 오름길이 시작되고...
관리가 되지않은 편백나무 숲사이의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갈림길(08:26)
직진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빡센 오르막길에서 잡목들이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등로가 전혀 없는 곳인데, 길을 잃을까봐 시그널을 걸어놨다.
감사합니다...당신은 산꾼들의 진정한 legend입니다
오르막길인데 땀을 흘릴정도는 아니나 숨 한번 크게 쉬고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08:34)
안부처럼 보이는 펑퍼짐한 안부를 지나고...
나홀로 걷는 독립군에도 응원이 필요하다면서 선답자들이
격려하는 흔적들이 보이는데, 늘 저런분들 때문에 이 길을
걷는지 모르겠다
안부(08:38)
382.4m봉 갈림길(08:40)
382.4m봉 정상쪽으로 오르지 않고 ∠형태로 꺽어지면서 우측 아래로 내려간다
이곳도 내리막길은 급경사이다...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해남군 삼산면의 들녘도 풍요롭기만한데, 이렇게 살기좋은
고장에 자꾸만 사는 사람들이 줄어드니 참으로 걱정이구나.
하기사 우리나라의 인구 소멸문제야, 이곳 삼산면의 문제만은
아니겠지...
등로가 보이지 않은 내리막에 도착한 후에...
잠시나마 키작은 조릿대숲과 조우를 한다
무명봉(08:45)
또다시 내리막길은 시작되고...
이제는 잡목의 태클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인지 별로 두렵지도 않다
무명봉(08:48)
트랙상으로는 직진인데, 선답자들의 우측의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이유가 있겠지...나 역시 우측 아래로 내려간다
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다
한참을 내려온 후에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좌측으로 향한다
사면의 끄트머리에서 직진으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서...
산죽길이 나오고 내리막 아래로 내려서니...
벌목지가 나온다
벌목지 아랫쪽은 해남군 옥천리 백호리 마을 한가롭게 보이고, 옥천면
들녘 뒷쪽으로는 올 봄에 걸어볼 예정인 해남지맥(신산경표상:흑석지맥)
산줄기에 걸려있는 가학산(574.7m). 흑석산(652.8m), 호미동산(581m),
두억봉(527.8m) 등이 흐릿하게 파노라마처럼 보이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해남군 옥천군에 있는 백호리(白虎里)는 마을이 풍수상으로 원경산(뽀쭉산)의
오른쪽(백호)에 자리잡고 있기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본래 망골, 양지물동,
새터를 합하여 백호동, 백오동이라 칭했는데, 망골은 백호의 큰마을로 고려시대에는
옥산현과 이웃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옥천면소재지였다.
영암군 옥천종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 해남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성리, 용흥리, 청룡리, 남촌리, 화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옥천면 백호리로 개설되었다고 하며, 자연마을로는 백호, 가성,
금동, 백운동, 옥동이 있는데, 옥동은 대산리의 옥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하며, 옥산에 옥봉 백광훈의 사당인 백옥봉사당이 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덕음산과, 그 너머로 만대산, 그 뒷쪽으로
해남지맥 산줄기들이 스카이 라인을 이루고 있다
묘지가 보이는 벌목지 아래로 향한다...벌목후에 후박나무들을 심어놨다
수원백공 묘(09:05)
수원백공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조금전 건들재에서 헤어진 임도를 다시 만난다
임도(09:06)
삼산면 평활리로 향하는 임도를 가로질러 내리막으로 향한다
해남군 삼산면은 민족시인·혁명시인·저항시인 등으로 유명한
김남주(1946~1994) 시인의 생가와 민족·민중·여성을 위해
살다 간 고정희 시인(1949~1991)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벌목을 하고 새로 식재한 후박나무들의 모습
백호리 우측 너머로 강진만이 흐릿하게 보이고 우측에 보이는 산이
다산 정약용의 숨결이 묻어있는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는 곳인데
遠景이라 그런지 맑은 날씨임에도 뿌옇게 보이니 아쉽기만 하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백련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39년(문성왕 1)에 무염국사(無染國師:800~888)가 창건한 사찰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고려시대에
백련결사(白蓮社結社)를 이끈 고려시대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스님이 중창했다.
요세스님은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하며,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다운 절집이다
흐릿한 등로로 따라서 내려가니 그물망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平活里)는 녹산면의 하단 녹산골(큰골)마을들과
병합하여 활기차게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뜻과 평지에 새로 이룩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평활(平活)이라 한 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본래 해남군 녹산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활리, 양촌리,
산림리, 신기리, 중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평활마을, 신활마을, 신기마을, 산림마을, 나범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평활마을 입향조인 밀양박씨 박정진(朴正鎭)은 충청도 연기군에서 거주하다 외가인
구씨(具氏) 집안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피난을 다니다 300년 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하며, 신활마을은 밀양박씨 박필용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신기마을은 신활마을 서쪽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었다. 산림마을은 최초 입향자가
밀양박씨 또는 양촌허씨라고 하며, 나범마을은 원주이씨 이규림이 처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물망의 능선으로 내려서니 잘 관리된 나주나공의 묘지가 나온다
나주나공 묘(09:12)
망자들 덕분(?)에 묘지를 따라서 내리막의 편안한 임도로 맥길을 이어간다
잠시후에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가야할 덕음산으로 이어지는
화원지맥 능선들이 펼쳐지는데 맨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
만대산이다
흐미!...이쁜놈들...묘지 아래의 밭에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농로와 묘지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
삼거리 갈림길(09:22)
직진으로 내려가면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화원지맥 마루금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숲으로 들어선다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서...
그물망이 처져있는 밭 옆으로 맥길을 이어간 다음에
간벌이 된 시누대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향한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해남땅의 이런 길을 내가 걸을줄 상상이나 했겠나...
명산만 고집하는 등산객들에게는 이해가 안되겠지만, 지맥길을 고집하는
산꾼들은 이런 길이 어쩌면 더 맘이 편할지도 모른다...편백나무 군락지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향에 취해서 기분좋은 산행을 이어간다
괜스레 이런곳을 걸으면 맘이 편해진다...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마삭줄이 푹신하게 깔려있는 등로에 올라서니 족보있는 137.5m봉이다
137.5m봉(09:33)
으례 걸려있는 준.희 쌤의 산패는 누군가가 엿을 바꿔 먹었는지
산패는 보이지 않고 반가운 선답자의 시그널들이 쌤의 산패를
대신한다
137.5m봉에서 내려서니 낡은 휀스가 마루금을 점령했다.
그래도 농장 쥔이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휀스옆으로 뚜렸한
등로를 만들어놔서 편안하게 내려간다
이 산악회는 밤에만 산행하나?...산악회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휀스를 따라서 내려가니 뚜렸한 길이 나오고...
곧바로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휀스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휀스를 따라 내려가니...
우측으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밀양박씨 가족묘가 보이고...
상가버스정류장과 물좋은 가재골이란 표시석과 꽤나
큰규모의 상가저수지가 있는 구룡목재에 내려선다
구룡목재(加峙峴:80m:09:38~50)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와 옥천면 백호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개 옆에는
큰 규모의 상가저수지와 버스정류장, 가재골과 상가마을 입구 표석 및
상가마을유래 안내판 등이 보이고, 삼거리 위에 세워둔 서 있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 있는데, 또 다른 지명으로 가치현(加峙峴)이라 불리운다
구룡목재는 1914년 이전에는 해남군 녹산면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옥천면 백호리
용심마을과 삼산면 상가리 중리마을이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인접한 계동마을은
고려시대 치소(행정기관:옥산고성)가 있던곳으로 이 구룡목재가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선사시대부터 해남의 유력한 세력들이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육상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도 대흥사와 그 이남을 오가는
모든 문화와 사람들이 거쳐 갈 수 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구룡목재와 이정표
가재골 입구 팻말
구룡목재 고개의 모습
맥길은 구룡목 안내판 옆쪽의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날씨가 너무좋아서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시면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오라는데는 없어서 갈곳이 너무 많이 이 산꾼...지맥길이 아니였다면
이 곳이 올 일이 있었겠는가...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매화꽃 너머로
덕음산이 얼굴을 내밀면서 빨리 오라고하니 다시 길을 떠난다
매화밭이 피어있는 밭 가운데를 지나서 가건물 형태의 농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쥔장은 출타중인지 인기척도 없고, 쥔장의 命에 충실한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강아지 한마리가 산꾼 범여에게 지랄발광을 한다...그래!...너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나 역시 이 길이 지맥길이라 가지 않을수가 없구나
서로 한참을 대치(?)하다가 내가 옆으로 피해서 농막을 지나간다
농막 아랫쪽에 유난히 물이 새파란 상가저수지가 보이고, 상개마을로 가는
시멘트 도로가 편안한 길로 가라고 산꾼을 유혹한다(저 길로 가도 금새
맥길로 복귀하기에 임도파들이 좋아하는 길일듯 하다)
농막을 지나니 매화꽃이 핀 밭이 나오고 밭을 지나 시멘트 농로로 들어선다
청주한씨 가족묘(09:56)
묘지 아래로 보이는 상가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깃대봉이 멋지게 보인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산꾼의 눈에 이쁘게 보이지 않은 산이 있었던가?
청주한씨 가족묘를 지나자마자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진다
시누대밭을 헤쳐나가니...
청주한공과 한산이씨 합장묘가 마을 도로로 내려선다
마을 도로로 내려서서 우측으로 바라보니 아침에 바람재(자경고개)로 올라갔던
오르막 도로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분기점인 첨봉, 우측으로는 바람재에서
힘들게 올랐던 388.3m봉이 지척에 있다...산자분수령의 법칙에 따라서
걷다보니 ⊃형태로 이곳까지 걸어왔다
상개마을(10:02)
동백꽃에 가려져 있는 상개마을 이정표( ← 첨봉4.15km, →연동리 4.7km,
←주작산 휴양림 9.4km)
상개마을 입구에서 직진방향의 정미소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 상개마을의 모습
상개(웃가재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상가리의
그것과 같은데, 맨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상개 또는 웃가재마을이라
부른다
상가리(上駕里)는 마을 뒷산 지형이 소 멍에 모양이라 하여 가치(駕峙)라고 부르다가
마을이 가재 위쪽에 있다 하여 웃가재, 한자로는 상가(上駕)라 한 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해남군 녹산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점리, 계동리, 신촌리,
중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로 개설되었으며, 현재 상가마을,
중리마을, 계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상가마을 최초의 입향조는 남양홍씨로 후에 청주한씨, 해남윤씨, 전주이씨, 밀양박씨가
들어왔으며, 1507년경 청주한씨 한세전(韓世佺)이 구례에서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해진다.
덕음산(德陰山) 줄기를 따라 펼쳐진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고 가재골에서 발원한 샘물이
삼산천을 따라 어성포로 흐르며 지형은 대체적으로 남서쪽을 제외하고는 높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나 춥지는 않고, 동쪽에 상가저수지가 있다
상개마을 정미소를 지나 묘지로 올라서는데 종려나무 한그루가
묘지를 外護 하고 있다...종려나무는 많은 사람들이 야자수 나무로
잘못 알고있는 樹種이다
청주한씨 가족묘(10:10)
청주한씨 가족묘를 벗어나 좌측의 숲속으로 올라간다
삼산임도에서 이곳까지 1시간 넘게 편안하게 맥길을 걸었는데
이곳부터 본격적인 苦行이 시작될 모양이다...하기사 맥길을
걸어면서 그리만만한 길이 있었던가...골프를 칠 때 핸디가 있듯이
산길도 꼭 어려운 곳이 툭툭 튀어 나오는데 그걸 감안하고 걸어야제...
이곳이 예전에 계단으로 된 논, 아니면 밭이었던 모양이다
대여섯번 이런 곳을 지나서 올라가는데 생각보다 힘이 드는구나
너무 힘이 들어서...
좌측으로 살짝 우회를 한 다음에...
푹신한 낙엽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묘지봉?(10:23)
정상에 올라서니 무명묘지 2기가 있고 맥길은 좌측으로 살짝 휘어져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꽤나 넓은 공터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도
예전에는 밭이었던 모양이다.
안부(10:25)
남녘지방이라 그런지 따사로운 햇볕이 참 좋다...등로 바닥에는
남도지방 산에서만 볼 수 있는 마삭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무명봉(10:28)
좌측으로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 때문에 예전에 2~30km씩 무박으로
걸어갔던 산행에 대한 추억은 이제 머릿속에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 대신 짧게 걸으면서 볼 것 다보고, 즐길것 다 즐기면서 걸으련다.
물론 남쪽끝에 지맥길 한 구간을 하려 서울에서 와서 15km정도
걸으려고, 왕복 10시간 넘게 차를 타야하고, 경비도 많이 들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짓거리...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남들이 5구간에 끝낼 구간, 난 7구간을 걸으면 될 것이고, 들어가는
돈이야, 난 아직까지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 벌면 될것 아닌가...
돈이야 쓰려고 버는 것이다...아껴서 자식들 물려줘봐야 요즘의
새끼들은 우리 세대와는 달라서 고마워 하지 않을것 같으니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안부(10:31)
무명봉(10:34)
뫳돼지 쉬끼들이 등로를 난도질 해놨다...이노무 쉬키, 만나기만 해봐라...
195.5m봉(10:37)
직진 능선 너머로 덕음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진다
195.5m봉에서 직진으로 내려가는데 예전에 산불이 난 곳인지
지독한 잡가시들이 극성을 부려서 정면돌파가 힘이들어서
일보전진을 위한 2보 후퇴작전으로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인가...뚜렸한 임도가 나온다
안부(10:42)
좌측으로 골짜기가 보이는데 웃가재마을로 내려가는 길인듯 하다
다시 시작되는 빡센 오르막길
184.5m봉(10:52)
조금 앞의 험한 길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맞쳐 콧노래를 부르면서 덕음산으로 향한다
안부(10:56)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고, 행여나하고 트랙을 확인하니 지맥길은 맞다
나무 틈사이의 구멍처럼 보이는 등로를 낮은 포복으로 통과한다
스틱으로 나뭇가지를 쳐내고 올라서니 송전탑이 나를 반긴다
NO69 송전탑(11:13)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
홀로 산을 걸을때 가장 겁이 나는게 사람이다...습관적으로 몸을 숙인다
내 라디오의 음악 소리를 듣고 나를 바라보더니 산에 올라올 때
상가청년회에서 통제를 안하냐고 묻는데,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약초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청년을 못받다고 하고는
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서둘러 내 갈길을 간다
지독한 잡목지대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서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무너진 돌담위로 올라서니 예전에 밭인듯한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덕음산 갈림길이다
덕음산 갈림길(327m:11:20)
지맥길에서 370m정도 벗어나 있는 덕음산을 가기 위에서
이곳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지고 덕음산으로 향한다
덕음산 가는 길에서 만난 산죽
바위를 뒤덮은 콩짜개덩쿨도 만난다
덕음산가는 길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잡목의
격한 저항을 받으면서 덕음산 정상에 올라간다
덕음산(德陰山:327.3m:11:31)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와 삼산면 상가리 및 옥천면 영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옥천천(玉泉川)의 발원지이고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의 주산(主山)으로, 또다른
지명으로는 덕은산, 덕룡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명칭 유래를 보면 덕음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덤벙산으로 부르며 덤벙산을 한자로 차자하여 덕음산(德陰山)이라고
명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덕음산은 땅끝기맥에서 뻗어내린 화원지맥에 속하며 옥천천의 발원지이고 해남천의
지류인 남송천의 발원지기도 하며, 덕음산 중턱에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해남 녹우단 비자나무 숲이 있고 정상 부근에는 신선바위와 유암(油岩) 등이 있다.
해남군지(1925)에 유암은 군의 동남간 10리(약 3.93㎞)에 있고 바위가 산에 붙어 있으며 곁에
계택(溪澤)이 없고 날씨가 맑으면 마르며 비가 오려면 물이 분다...축축함으로 그 진액(津液)의
낮고 깊음을 보아서 시우(時雨)의 다소(多小)와 가뭄을 점쳤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덕음산 아래에는 해남읍 연동리 입향조인 어초은(漁樵隱) 묘지와 500여 년 동안 내려온
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 및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과 땅끝순례문학관이 있으며, 덕음산
자락의 어초은 묘지와 녹우당은 풍수지리의 형국에서 좌청룡과 우백호 안산을 잘 갖추고
있어서 해남에서는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호남읍지(해남)에 덕음산은 현의 동남으로 7리(약 2.75㎞)에 있고 기암이 우뚝 솟아 중봉(重峰)이
나래와 같으니 그 봉우리를 이름하여 진봉(振鳳, 봉이 펼치는 형국)이라고 하며 윤구가 아버지를
여의고 그 아래서 3년을 시묘하고 자손이 눌러 살며 세상이 변하여 관명을 누리나 세상이 백련동이라
일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은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등산로는
우슬재에서 신선바위 왕복에 약 2시간이 소요된다.
다시 덕음산 갈림길(11:37~42)
넓은 공터(11:43)
예전에 헬기장이었던지 간간히 보도블럭이 보이는 곳을 통과하면서 뒤돌아보니...
잡목사이로 보이는 덕음산이 범여에게 잘가라고 손을 흔든다
등로는 보이지 않고 발아래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를
들으면서 올라서니 해남윤씨 녹우당(海南尹氏綠雨堂)이
한 눈에 보이는 조망바위에 올라선다
조망바위(11:5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海南尹氏綠雨堂)은 해남윤씨 어초은파(漁樵隱派)의
종택(宗宅:종가가 대대로 사용해 오고 있는 집)으로 해남윤씨 득관조(得貫祖)인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15세기 중엽 무렵 연동리에 터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집 뒤로는 덕음산(德陰山:덕움산)이 있고, 앞으로는 멀리
문필봉(文筆峯)이 자리 잡고 있다.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에는 녹우당 고택을 중심으로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어초은 묘역,
그리고 녹우당 입구에는 백련지가 있는 등 풍수지리로 보았을 때 명당 터로 손꼽힌다.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은 ㅁ자 형의 녹우당 고택 건물을 중심으로 건물 밖으로는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어초은 묘역 등이 있으며, 고택의 중심 공간인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데 서쪽을 향하고 있다...사랑채 툇마루 위에는 녹우당, 운업(芸業), 정관(靜觀) 등의
현판이 걸려 있어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다... 또 사랑채 서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고
초가지붕의 옛 화장실도 있으며, 고택의 안채는 ㅁ자 형의 마당을 중심에 두고 대청과 마루를
둔 방들이 이어져 있다
녹우당 일원은 조선시대 양반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고,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윤씨 집안 인물들의 문적과 문서, 고화 등을 보존하고 있어 건축뿐만 아니라 사회사,
미술사, 문학사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녹우당 뒤 저 멀리 서당산과 호산 뒤로는 달바위산과 남각산도 보이는데 그 남각산
뒷쪽으로는 급격하게 낮아지는 산줄기로 이어지는 화원지맥 마루금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비산비야를 이루고 있는 모습도 살짝 눈에 들어 온다.
녹우당의 멋진 전경을 바라보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11:53)
다시 시작되는 산죽길
안부(11:57)
어젯방 늦은 시간까지 숙소를 찾아 헤매느라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탓인지 따스한 햇살에 엄청나게 잠이 쏟아지는데 미칠지경이다
무명봉(12:05)
땅바닥에는 마삭줄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아직 잎이나지 않은
관목사이로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우슬재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낙엽사이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제비꽃
아직까지 꽃은 보이지 않는구나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동백과 산죽이 빽빽하여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구나
얼굴을 할키면서 산죽 사이를 낮은 포복으로 통과하니...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416.4m봉으로 오르는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동서남북이 다 보이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아슬아슬한 암릉구간의 칼날 능선을 곡예하듯 걸어가는데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차기는 하나, 바람에 봄기운이 스며들었는지 그리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구나.
동쪽 아랫쪽에는 마고제라는 저수지가 보이고,그 너머로 10년전에 걸었던
땅끝기맥 능선에 있는 주작공룡능선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보인다.
그 당시에 진권아우가 땅끝기맥 리딩대장을 맡았었는데 요즘에 베트남에
사업을 한답시고, 행님한테 문안인사도 없으니 많이 섭섭하구나...괴씸한 넘
니는 안 늙을줄 아나...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처럼 보인다고해서 주작공룡능선으로 부리는 주작산(朱雀山:429.5m)은
해남군 삼산면, 옥천면, 북일면과 강진군 신전면, 도암면에 경계에 있는 산으로, 긴 바위능선이
많고 정상에서 다도해가 한눈에 보이는 산이다.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오소재에서부터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용굴바위, 강진 신전면 주작산 정상, 기름바위, 주작산자연휴양림, 덕룡산까지 이어지며,
능선의 길이는 약 12㎞이며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암릉, 소석문(小石門)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산세가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듯하다 하여 주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주작산은 『여지도서(輿地圖書)』
강진현 편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다산 정약용의 외손 윤정기(尹廷琦)[1814~1879]의 『동환록』[1859]에
주작산이 덕룡산(德龍山)으로 나타난다... 『동환록』 이후에 간행된 모든 지리서에 산 이름은 다시 주작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주작산의 산 이름은 산의 모습이 전설 속의 새 주작(朱雀)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데서 유래하였다.
주작은 남방을 지키는 신령인데, 주조(朱鳥)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붉은 봉황을 형상화하여 무덤과 관 앞 쪽에
그렸던 새다... 강진군의 신전천과 도암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주작산은 4월 초에 진달래가 만개하면 주작산에
많은 사진작가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산이다
북동쪽으로는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13번 국도가 지나가며, 옥천들녁을 풍요롭게
적시는 영춘지라는 저수지의 물은 더없이 푸르기만 하고 그 뒷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해남지맥(신산경표상:흑석지맥)에 걸려있는 산이 흑석산이다
서쪽으로 미세먼지로 인하여 흐릿하게도 잘 안보이는 저곳이 지난주에
마쳤던 진도지맥 능선인데 워낙 멀어서 그런지 바다건너 진도땅이
잘 보이지 않으니 많이 아쉽다...참으로 개고생하면서 걸었던 진도땅의
산줄기였지만, 넓은들에 풍요로운 진도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에 감동을
먹었던 산길이었기에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으로 쳐다본다
조금전에 지나온 덕음산 뒷쪽으로 보이는 두륜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名刹 대흥사를 품고있는 두륜산 정상의 KBS 송신탑이 肉眼으로는 흐릿하게
보이는데, 똑닥이 카메라의 그림으로는 잡히지가 않는구나.
두륜산(頭輪山:700m)은 해남군 북평면ㆍ삼산면ㆍ북일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원래 두륜산은
대둔사(大芚寺)의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칭하다가 대둔사가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대둔산의 명칭은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
→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두륜의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 또는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며, 또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딴 이름이라고도 한다.
1979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두륜산은 주봉인 두륜봉을 중심으로 한 가련봉·고계봉·노승봉·도솔봉·
연화봉 등 두륜산의 여덟 봉우리가 있으며, 산자락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가 있다.
일명 대둔사라고도 불리는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이 어머니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544년
아도화상(阿道 和尙)로 하여금 창건하게 했다는기록이 있으며,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張意恂)이 40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던 일지암(一枝庵)이 있다.
이 때문에 이 일대는 예로부터 한국 고유의 차와 다도(茶道)로 널리 알려졌고 유자 산지로도 유명하다.
암릉을 곡예하듯 416.4m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옥천들녘 너머 저멀리 어디쯤에 다산(茶山)과,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가 교류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는 곳인데
미세먼지로 인하여 가늠하기조차 힘이드니 아쉽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청백리(淸白吏:청렴결백한 관리) 의 표상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사상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머물던
다산초당...강진으로 유배생활 18년중 11년을 초당에서 보내면서, 초의선사 의순,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茶와 詩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시다일치(詩茶一致)”의 높은 경지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저술했다는
『동다기(東茶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산은 “차를 마시면 일어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말로 茶에 대한 예찬을 했으며,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차문화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급속히 쇠퇴한 걸 부활시킨 분이
다산, 초의, 추사였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당시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 글씨다
다산초당을 논할때 빠질수 없는 인물이 그 당시 백련사의 아함혜장(兒庵惠藏:1772~1812)이다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은 1805년경에 다산은 백련사를 찾아가 한나절 가량이나 아암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끝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이 돌아간 후 자신과
담소하던 인물이 다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암은 종종걸음으로 다산을 쫒아가 “公은 정대부
선생이 아닙니까. 저는 밤낮으로 공을 뵙고자했는데 공께서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렇게 만난 이들은 하루 밤 사이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주역〉에 대해 누구보다 밝은 식견을 지녔다고 자부했던 아암의 승복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하루 밤 사이에 다산의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에 탄복한 아암은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실로 스스로
슬기로운 체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후 다산과 아암은 서로에게 이로운 인연을 엮어나갔는데 이는 다산에게는 자신의 뜻을
피력할 제자들을 얻은 것이며 아암은 다산의 높은 학문의 향훈(香熏)을 누린 연유였다.
실제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시절에 든든한 후원자는 아암과 그의 문도들이었다
강진땅에 유배온 다산이 백련사 혜장선사와 만나 같이 걸었던 우정과 思惟하며
걸었던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그 길이 요즘에는 “인연의 길”로 바뀌어
관광개들에게 상당히 인기있는 길이라고 한다
* 사의재(四宜齋) 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던 주막집으로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인데,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416.4m봉(12:15)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 준.희 쌤의 산패가 분명히 걸려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산패는 안보이고, 선답자의 시그널 서너개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또다시 바라본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의 모습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은 해남윤씨 일가의 종택과 사당 등을 함께 이르는 말로서
녹우당(錄雨堂)은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살았던 사랑채를 일컫는데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르는데,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백련동
(現해남읍 연동리)에 터를 정하면서 15세기 중엽에 지은 건물로 녹우당이란 이름의 유래는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녹우당은 덕음산을 주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 하나로 유명한데 덕음산을 뒤로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있어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현무(玄武),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이 잘 짜여진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해남윤씨는 세 곳의 중심영역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해남 윤씨가 처음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으로 해남윤씨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곳은 백련동
녹우당에 터를 닦은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 윤경(尹耕)을 비롯해 조부인
윤사보(尹思甫)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두 번째로는 해남윤씨의 윗대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시조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하여
7세 윤록화(尹祿和), 중시조인 윤광전 (尹光琠)과 그의 아들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의
산소가 있는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이고, 마지막으로 윤효정이 해남으로 장가들어 자리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번성시킨 곳이 백련동으로 지금의 연동이다.
고산의 5대조인 윤경은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윤효정이 해남읍 백련동에서 크게 가업을
이루고 어초은공파를 형성하였으며 이후 해남윤씨가 번창하게 되었는데, 어초은 선생이 해남윤씨를
이 지역의 명문집안을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경위는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대부호이자 향족(鄕族)인 초계정씨(당시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 확보를 이룰 수 있었으며
이후 자손이 영주할 새터를 잡고 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초은 선생은 해남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금남 최부선생으로부터 수학하였고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시키게 되며 해남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 국문학의 비조(鼻祖:시조(始祖)나, 어떤 일을 처음 창시한 사람을 말함)로
일컬어지는 단가 문학의 최고봉인 고산 윤선도를 배출하였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으며,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482호),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 1, 현무(玄武)는 하늘의 다섯개 구문인 오관(五官) 중 북관(北官)을 다스리는 신을 말한다
2, 주작(朱雀)은 남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으로 여겨진 짐승으로 붉은 봉황으로 형상화하였다.
416.4m봉 정상에서 바라본 해남읍(海南邑)
고려시대 침명현이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되어 처음으로 ‘해남’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였으며, 조선 초 직촌화 과정에서 황원군(黃原郡)·죽산현(竹山縣)과 통합되면서
현재의 해남이 시작되었다... 1409년(태종 9) 해남현이 진도군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 되고,
1437년(세종 19) 해진군에서 해남과 진도가 분리되면서 해남현이 되었는데, 현재의 해남읍이
읍호(邑號)로 처음 불린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남면이 되면서이고, 이후 1955년
해남읍으로 승격하였다
416.4m봉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에 우슬재 윗쪽에 있는 만대산이 얼굴을 내민다.
지금 시간으로 봐서는 만대산을 넘어 금강재로 빠지면 해남에서 서울로 가는
막차(17시 출발)는 탈 수 있을것 같으나, 무리하게 가슴 조이면 오늘 저 산을
넘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우슬재에서 산행을 종료하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고 여유롭다
416.4m봉 정상에서 내려서면서 등로는 산죽길로 변한다
안부(12:18)
산죽길로 이어지는 등로...보이지는 않지만 걷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오늘 산행 초반에 잡목의 태클로 인한 개고생 한 것에 비하면 그저
고맙기만한데, 거기다가 우슬재로 향하는 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완만한 등로를 걷다보니...
383.7m봉 정상에 도착한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아마도 땅의 경계를 표시한 지적도근점 표식인듯 하다
383.7m봉(12:25)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나 지나온 지독한 잡목의 태클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인지 이런곳은 이제 식은죽 먹기다
우슬재로 향하는 길은 꼭 내리막길만 있는 건 아니다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하는 암릉구간도 양념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부처손
특히 여성병에 효험이 있다는데 왜 부처손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하네...
암봉에 올라서니 옥천 들녘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그 앞쪽
어디에 다산초당과 백련사 있는데 짙게 드리우진 미세먼지로
가늠조차 되지 않는구나
歸故鄕詩(귀고향시) / 초의선사
遠別鄕關四十秋(원별향관사십추)
아득히 고향 떠난 지 사십여 년 만에
歸來不覺雪盈頭(귀래불각설영두)
흰 눈 같은 머리 깨닫 지 못하고 돌아왔네
新基草沒家安在(신기초몰가안재)
새터 마을 옛집은 잡초에 묻혀 간데없고
古墓笞荒履跡愁(고묘태황리적수)
옛 선영은 이끼만 수북해 발자국마다 수심이네
心死恨從何處起(심사한종하처기)
마음이 죽었는데 한(恨)은 어디서 일며
血乾淚亦不能流(혈건루역불능류)
피가 말랐으니 눈물 역시 흐르지 않네
孤笻更欲髓雲去(고공갱욕수운거)
외로운 중(僧)은 다시 구름 따라 가리니
已矣人生傀首邱(이의인생괴수구)
아서라, 수구초심이란 말조차 부끄럽네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는 속가 고향이 전 무안으로 조선 후기 우리나라 차(茶)의
이론을 정립한, 차성(茶聖)으로도 불리며, 법명은 의순(意恂)이지만 법호인 초의(草衣)가
더 잘 알려졌기에 보통 초의선사라고 부르며, ‘고향에 돌아와 지은 시(歸故鄕詩·귀고향시)’로,
그의 문집인 ‘초의시고(草衣詩藁)’에 수록되어있다
암봉(12:28)
당겨본 주작공룡 능선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을 지도로 확인해보니 강진만 너머에 있는 가을억새로
유명한 장흥의 천관산인 듯 하다
암봉에서 바라본 해남군 옥천면(玉泉面) 들녘
해남군의 동쪽에 위치한 옥천면은 사방이 산지로 에워싸여 있어 분지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그러나 면의 가운데를 지나는 옥천천과 월평천 일대에는 넓은 들판이 있으며,
『해동여지도』(해남)에는 영암의 월경지로 되어 있는데, 『호구총수』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 옥천시면(玉泉始面)과 옥천종면(玉川終面)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1906년 영암군에서 분리되어 해남군에 속했으며, 1914년에 두 면이 합쳐져 옥천면(玉泉面)이
되었는데, 본래 이 지역은 영암군에 딸린 냉천부곡(冷泉部曲)이었는데, 그것이 고려 시대에는
옥천현(玉泉縣)이 되었다... 따라서 지명의 유래는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암봉에 내려서자마자 잠시 끊겼던 산죽길이 계속 이어진다
갈림길(12:35)
산죽으로 이어지는 등로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고, 기럭지가 짧은 범여는 낮은 포복하듯
산죽을 헤집고 나오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인 암릉구간이 나온다
미끄러운 내리막 암봉에서 옥천 들녘을 바라보며 내려간다
다음 구간에 오를 만대산 뒷쪽으로의 흑석산 보일락말락 하고
우측으로 보이는 산이 아마도 해남군 계곡면에 있는 호미동산인 듯 하다
산죽에 파묻혀버린 멋진 바위 아래로 내려서니...
망가진 폐그물망이 조이는데 아마도 예전에 약초 재배지인 듯 하다
산죽속에 묻힌 녹색 그물을 따라서 내려간다
안부(12:40)
약초재배지 그물 안쪽으로 들어서서 산죽밭으로 들어서니
산죽과 잡목속에 묻혀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이는데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 별바위라 표기가 되어있다.
별바위(12:45)
요모조모 아무리 쳐다봐도 별처럼 보이지가 않구나...
별바위를 지나서 암릉으로 올라선다
또다시 이어지는 산죽터널
등로가 보이지 않는 산죽길을 헤치면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암봉(12:50)
마치 여인의 궁뎅이처럼 보이는 암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산죽길을 지나고...
암릉을 지나 274.5m봉에 도착한다
274.5m봉(12:53)
274.5m봉에서 당겨본 주작공룡능선의 모습
보이는 만대산을 바라보면서 많은 고민을 한다.
시간상으로 충분히 저 곳을 넘을 수 있으나 서울가는
막차 시간이 애매하다...차선의 방법으로 해남에서
목포나 광주로 나가면 서울로 갈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내일에 있을 작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래...산은 거기 있는데 다음에 한번 더 오면 되지하고
과감히 포기하고 나니 맘이 편하다
갈림길(12:55)
산죽밭 끄트머리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진다
산죽밭이 끝나고...
약간은 거추장스런 잡목지대를 통과하니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 아래로 해남터널이 지나가는 곳이다
해남터널 위(13:00)
2001년 개통된 해남터널이 이곳 아래로 통과하는데 예전에 우슬재로 이어지던
13번 국도(공룡대로)는 지금 4차선으로 확장되어 이곳 아래로 지나고 있다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직진으로 올라간다
산 중간에 군 교통호가 보이고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185m봉에 오른다
185m봉(13:06)
185m봉을 찍고 내려서니 편백나무 군락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향이 상쾌하다
우슬재로 내려서는데 해남라이온스클럽에서 설치한
사자상이 격하게 반겨주는데, 라이온스 회원인 범여도
무척이나 반갑다
우슬재(牛膝峙:147.4m:13:10)
해남군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만대산과 덕음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국제라이온스 318 A지구 해남클럽과 해남군번영회에서 세운
사자상과 해태상, 5·18민중항쟁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정상 아래 옥천면 영춘리쪽에는
효열부 황자숙 열녀문이 있다
고개 아래로 통과하는 해남터널이 완공되기 이전에는 옥천면, 광주, 강진, 장흥, 순천,
여수, 부산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으나 2001년 해남터널이 개통되면서 옛 영화를
잃어버린 고개가 되었다
우슬재의 명칭 변경 시기는 알 수 없다... 원래의 명칭은 우사현(于沙峴)이라 하였다가
우슬치(牛膝峙)로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한데서
우슬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슬재[牛膝峙]에 대한 기록은 1925년 편찬 『해남군지』에 “군의 동쪽 10리[약 3.93㎞]에 있다.
즉 금강의 중맥으로 금강 즉 군의 진산인 미암의 상맥이다. 옛날의 관로는 군의 경계인
가치현(加峙峴:지금의 삼산면 상가리 구렁목재)이 길의 끝인데 언제 절개했는지 알 수 없다.
듣건대 고래로 해남에는 고관이 많아 해남현감 김서구가 이를 싫어하여 지술(地術)로서
일길을 장개(創開)하여 주맥(主脈)을 절단한 이래, 이로 말미암아 본군이 조폐부진(凋弊不振)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우슬치(牛膝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해남현감으로
있었던 김서구가 해남 사람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석 자 석 치씩 깎아 내렸다는 설화가 전한다.
큰봄까치꽃(꽃말:기쁜 소식)
우슬재 도롯가에는 봄까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봄소식을 전하는
까치와 같다고 해서 ‘봄까치꽃’이라 부르며, 유럽이 원산지로 두해살이풀 귀화식물이다.
꽃은 2~6월에 피며 개불알풀보다 잎이나 꽃이 크며, 큰봄까치꽃
(큰개불알꽃)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꽃이 지고 맺는 열매의 모양이 희한하게도 개의 불알을 닮아서 '개불알풀'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게 조금 더 큰 것이 큰개불알풀꽃이다...봄까치꽃은 '큰개불알풀', '큰지금',
'왕지금꼬리풀', '왕지금', '봄가리꽃', '땅비단'이라고도 불리는 현삼과 식물이다.
지금(地錦)...즉 땅 위의 비단이라는 뜻으로, 봄날에 이 꽃이 군락을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마치 비단을 쫙 깔아놓은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서양에서는 꽃이
피었을 때 보이는 수술 2개가 꼭 새의 눈처럼 보여서 ‘새의 눈의 뜻으로
버드 아이(bird‘s eye)’라고 부르는데, 어린순은 식용하며 한방과 민간에서는 주로
혈증을 다스리는 약재로 활혈과 풍, 이뇨제, 소종에 약용하며, 봄을 기별하는 꽃이라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이른 시간에 산행을 종료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여유롭다.
이곳에서 해남터미널까지 걸어가도 될 수 있는 거리인데
옥천면쪽에서 빈 택시 한대가 넘어오는게 아닌가
말타면 종부리 싶다고 했거늘...지나가는 택시를 세워서
해남터미널로 향하는데 10분도 안 걸려 터미널에 도착한다
해남터미널(13:35)
해남터미널에 도착하여 14시에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표를 예매하려는데
비싸디 비싼 프리미엄 고속버스인데도 매진이라 버스표가 없다.
그 다음 버스가 서울가는 막차인데 17시 버스란다...3시간 반동안 이곳에서
죽치고 있을수는 없잖은가...14시 30분에 목포로 출발하는 버스표를 예매하고는
장애인 화장실로 가서 문을 잠근 다음에 깔끔하게 씻고 환복을 한 후에
베낭에 남아있는 먹거리로 점심을 대신하고 대합실 의자에서 잠깐 사이의
꿀맛같은 쪽잠을 잔 다음에 목포가는 버스에 오른다
해남 군내 버스 시간표
해남발 → 목포행 버스표
해남에서 출발한 버스는 순탄하게 잘 오다가 대불공단을 거치고 목포시내를
통과하면서 신호등에 자주 걸리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목포터미널에 도착한다
목포터미널(15:35)
목포터미널 버스 시간표
목포발 → 서울행 버스표
16시에 목포를 출발하는 버스는 비싼 프리미엄 버스이다
1시간을 기다렸다가 가격이 싼 우등버스를 탈까 생각하다가
그냥 비싼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가 정안
휴게소에서 유부우동 한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