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팔음)지맥(終)

보청(팔음)지맥 제3구간 - 별재에서 밤재까지

범여(梵如) 2024. 3. 23. 19:39

☞ 산행일자: 2024년 03월 17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 짙은 미세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12.3km  / 6시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별재- 335.3m봉- 330.0m봉- 별재?- 372.1m봉- 무명봉- 안부- 무명봉

                     안부- 425m봉- 무명봉- 안부- 천금산- 안부- 462.1m봉- 안부- 안부

                    갈림길-  442.0m봉-다시 갈림길- 무명봉-  무명묘지- 갈림길

                    전주이공& 배 창녕조씨 묘- 전주이공 묘- 무명봉- 안부- 무명봉- 안부

                    전주이공 묘- 유인 능성구씨 묘- 무명묘지- 쌀아터(미전) 고개- 묘지

                    무명봉- 무명봉- 308.8m봉- 안부- 296.1m봉- 옥천 효목 이동통신탑

                    샘티재- 무명봉- 349.9m봉- 안부- 무명봉- 무명봉- 안부- 408.0m봉

                    안부- 갈림길- 묘지-성황당 고개- 법화리 갈림길- 안부- 무명봉- 갈림길

                    무명봉- 412.5m봉- 무명봉- 동학역사 탐방길 이정표- 무명봉- 무명봉

                    안부- 천관산- 안부- 407.0m봉- 갈림길- 안부- 371m봉- 갈림길- 388.7m봉

                    묘지- 안부- 358.0m봉- 무명봉- 안부- 무명봉- 밤재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모서면 / 충북 옥천군 청산면 / 영동군 용산면

 

원래 계획은 토요일 밤에 해남가서 자고, 화원지맥 2구간을 하려고 했는데 구라청(기상청)의

예보로는 해남땅은 일요일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는데, 아무리 구라청이라고는

하나, 아주 안 믿을수는  없는 노릇...더군더나 어둠속 산행과, 비를 맞으면서 걷기는

죽기보다 더 힘들어하는 범여로서는 많은 고민을 한다...그래 기저환자가 비를

맞으면서 걷는다는 건 싫다...하는 수 없이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지난 1월과 2월에

두번이나 시도했다가 구라청의 예보와는 달리 폭설로 인해 들머리를 접근하지 못해서

포기한 보청지맥(신산경표상:팔음지맥) 3구간을 나서기로 한다.

 

다음주 초에 골프 약속이 잡혀 있어서 이번주는 토요일에 산행을 하기로 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베낭을 챙긴 다음에 집을 나서 서울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05:05)

집에서 탑승한 오늘 첫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신호란 신호는 다 걸리는

바람에 상당히 촉박한 시간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겨우 열차에 올라선다

서울역에서 대전역까지는 ktx열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영동가는 무궁화 열차로

환승한 다음에 영동역으로 가야한다...물론 서울역에서 영동역으로 다이렉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역에서 05시 56분에 출발하여 08시

38분에 영동역에 도착하여 다시 들머리까지 가서 산행을 하려면 10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이라 시간을 줄이기 위해 부득히 ktx를 이용한다

대전발 → 부산행 무궁화 열차

대전역에 도착하여 대합실로 나가지 않고, 곧바로 플렛홈으로 가서 06시 25분에

대전역을 출발하여 부산역으로 가서 무궁화 열차로 환승한 다음에 영동역으로 향한다

영동역(07:05)

영동역에서 내려 화장실에 들려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판기에서 커피한잔을 마신 다음에 驛舍 밖으로 나온다.

영동지역에 오면 간간히 이용하는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하니 10분정도

기다리란다...10분후에 택시가 도착하고, 택시기사에게 옥천군 청산면 별재로

가자고 하자, 별재가 어딘지 모른다고 하니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네비에다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마을회관을 쳐서 별재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거리도 멀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삼방리 마을에서 별재로 오르는 길은

비포장도로에다 돌멩이들이 길 가운데 있는데 택시 아래에 돌이 걸려서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별재 정상에 올라서니 별재 정상의 상주방향은 깔끔하게 도로

포장이 되어 있다.

별재(星峙:310m:08:02)

경북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 별재마을에서 충북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의 의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 수목과 산으로 둘러 싸여 하늘과 별만이 보인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민치민의 정려(旌閭)가 있고 황맹헌(黃孟獻)의 묘가 이곳에 있다고 한다.

‘별’은 ‘벼랑’의 옛말이며, ‘낭떠러지’의 뜻이 들어간 지명에 한자로는 ‘별(別), 성(星)’이 취해졌다.

 

* 정려 (旌閭)는 예전에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정문(旌門)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  황맹헌(黃孟獻)은 조선전기 예조참판, 한성부판윤,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조선 시대, 사간원에  정육품의 벼슬)을

   지냈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사인에 올랐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성부판윤에 올랐다가, 앞서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송(詞訟)에 사사로운

 인정을 베푼 혐의로 경기감사로 전직된 뒤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성질이 탐오하여 남의 민전(民田)을

 마구 빼앗는 일이 잦았으나, 형제 친척이 모두 요직에 있었던 관계로 죄를 받지 않았으며,

 시호는 소양(昭養)이다.

2021년 7월초에 2구간을 끝내고 3여년만에 별재에 도착하니 고개는 그 사이에 많이 변했다.

옥천쪽은 아직도 비포장 도로이지 예전에 비포장 도로였던 상주 방향은 2차선으로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있어 지나간 세월이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나를 내려주고 길이 좋은 상주쪽으로 내려가는 택시기사에게 괜시리 미안하다.

택시에서 내리니 높은 지대라 그런지 약간 쌀쌀한 날씨이나 그리 추운 정도는

아니라 산행 채비를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08:10)

별재에서 올라서니 우측으로는 밤나무 단지인지 밤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시그널을 만난다.

시그널이 걸려 있다는 건 알바가 아니니 안심하고 가라는 뜻이다

335.3m봉(08:15)

매주 산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세속에서 심란했던 모든 것들이

이렇게 산속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별재에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첫번째 만나는 무명봉인 335.3m봉 ...

이곳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확 꺽어져 내려가는데 우측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이고, 좌측은 경북 상주시 모서면이니 충북과 경북의 道界를

따라서 한동안 맥길을 이어가야 한다

좌측으로 확 꺽어져 내려가는 길...낙엽으로 인해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역시 큰물(?)에서 노는 맥길이라 force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이다.

이야기인 즉,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지맥길은 정맥이나 기맥에서

가지를 친 지맥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마치 둘레길 걷듯 편안 길을 걷는데 얼마만에 걸어보는 길이던가...

오랫만에 범여의 몸뚱아리는 생채기를 느끼지 않으면서 호강을 누린다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꽤나 큰 규모의 의동저수지가 보이고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늘 중부지방의 미세먼지는 꽤나 심한 편이다

편안한 산줄기를 걷다가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후손들이 돌보지

않은지  키작은 소나무숲에 묻혀버린 묘지가 있는 330.0m봉에 도착한다

330.0m봉(08:20)

등로는 좌측으로 확 꺽어져 절개지를 연상케 할 만큼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가야할 천금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길에 걸려있는 시그널중에 10년도 훨씬 넘은 시절에

같이 호남정맥길을 걸었던 나산적님의 시그널이 참으로 반갑다.

 

우째 잘 사시는지 모르겠다?...친구분인 군이대장님은 수시로

연락을 주는데...하기사 ‘내가 산적이요’하고 광고를 하고 다니니

진작에 포졸들에게 잡혀 포도청으로 압송됐겠지...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급경사이고, 낙엽으로 인해서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에 잔뜩 힘을주고 내려서다가 삐끗하여 초반부터 된통 꼬꾸라진다

그러나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디야...넘어지는 것도 산행의

일부라 생각하며 바지를 털고 일어선다

급경사 내려오는 길에 또다른 반가운 이를 만나는데 양호씨다.

예전에 하남시 부시장으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하여 수원인가

어디인가에서 행정사를 하는 후배인데, 늘 말이없고, 겸손한 후배로

예전에 같이 산행을 많이 했는데, 162지맥을 완주했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그 이후에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잘 있는지 궁금하다

별재?(08:24)

이곳이 예전에 민초들이 넘었던 original 별재로 우측의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와 좌측의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로 이어지는 뚜렸한 고개의 흔적이 보인다 

좌측 아래로 바라보니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가짜 별재(?)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아랫쪽으로는 정산리에 있는 별티소류지가 살짝 보인다

원래 별재에서 의지리로 이어지는 등로

원래 별재에서 정산리로 이어지는 등로

 original 별재에서 빡세게 올라서니...

다시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마루금은 이어지고...

따사로운 햇빛이 비춰주는 등로는 참으로 한가롭다

산행전에 조금 춥다는 느낌은 따사로운 햇빛에 봄눈

녹듯 사라지고, 바람한 점 없는 편안한 길이다.

아쉽다면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서 산속이지만

숨을 쉬기가 조금 힘든다는 것이다

372.1m봉(08:30)

375m봉 정상에서 심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못난이 소나무들이 지키고 있는 맥길을 호젓하게 홀로

걷고 있는데, 이런 멋진 길을 홀로 걷다니...독립군의

特權을 톡톡히 누리는 셈이다

독립군의 유일한 친구라곤 계속해서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뿐이다

무명봉(08:34)

가야할 천금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기저 질환을 앓고있는 범여로는서 냄새와 공기 質에

상당히 민감한 편인데, 오늘은 산행은 미세먼지로

인해 걷기가 불편하기는 하나, 그 대신에 등로가

좋으니 그것에 만족해야 할 듯 싶다

또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천금산을 향하는 길은 등로도 좋고, 고도도 완만한 듯 하나,

은근히 무명봉이 많아서 오르내림으로 조금은 힘이 든다.

산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닮아가는 듯 하다...이 산줄기도

속내를 잘 보이지 않은 충청도 사람들의 氣質을 닮은듯 하다

등로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모서면 정산리에 있는

별티소류지가 보이고, 그 아래의 별티마을은 흐릿하여

마을 구분이 힘들다...3년전 여름에 2구간을 끝내고

저 아래 마을까지 걸었던 추억이 아련하구나...

안부(08:36)

요염한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소나무...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을 넘어 고희(古希)에  

접어든 범여가 너의 유혹에  넘어가기에는 세월이 너무 흘렀구나...

미안하다...가끔은 모른척하고 요염한 유혹에 넘어가 주는것도

하나의 추억거리인데 말이다

무명봉(08:40)

예전에 YS가 한 말...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라고 했는데

폭설이 내리면서 요란을 떨던 날씨가 어느듯 봄으로 바뀌었는지

등로에는 생강나무가 꽃을 틔우기 시작하는데,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는듯 하다

간간히 만나는 반가운 흔적들...

안부(08:45)

425m봉(08:50)

425m봉 정상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잠시후에 오를 천금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왜 천금산인지 가보면 알겠지...

등로 우측으로는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에 있는 의동저수지가 보인다

 

의지리(義旨里)는 청산면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보청천이

흐르며 의동 저수지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개경주,

덕지, 의동 등이 있으며, 개경주는 옛날에 주막이 있던 마을이라고 한다.

덕지는 덕이 많은 마을이라 전해지며, 의동은 의지리의 중심마을로 마을 앞에

의지천이 흐르는데, 문화유적으로 풍천 임씨 열녀문, 도명화 효자비 등이 있다.

이곳은 아직까지 봄이 오려면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메마른 나무는 그저 밋밋하고, 낙엽에서 베어 나오는

먼지땜에 코가 맹맹하다...그래도 매주 이렇게 걸을 수

있는게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만 한 걸... 

무명봉(08:56)

다시 우측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별재에서 시작한 오늘의 산길은 의동저수지을 중심축으로 하여

⊃형태로 맥길로 이어져서 천금산으로 향하는 형태이다

안부(09:00)

천금산 가는 길

천금산 오르는 길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니 3년전에 올랐던

팔음산이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보이는데 너무 惻隱해 보인다

곧이어 천금산에 도착한다

 

상주시 화동면 평산리와 모서면 득수리,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명치리와

경계에 있는 팔음산(八音山:762.3m) 흑연이 많이 생산되었던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천지개벽 당시 파리 등만큼 남고 모두 물에 잠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임진왜란 당시 여덟 번 소리가 났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도

팔음산(八音山)이란 기록이 있다

 

‘팔음(八音)’은 불교에서는 부처가 지닌 여덟 가지 특색이 있는 음성, 즉 ‘극호음. 유연음. 화적음.

존혜음. 불녀음. 불오음. 심원음. 불갈음’을 뜻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음악에서는 악기를 만든

재료에 따라 여덟 가지고 나눈 것, 즉 ‘쇠. 돌. 실. 대나무. 박(포). 흙. 가죽. 나무’를 ‘팔음’이라 한다.

천금산(千金山:464.9m:09:08)

천금산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의 의지리와 영동군 용산면 비전리, 경북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서쪽에 천관산(445m), 동북쪽으로

팔음산으로  이어지는 보청(팔음)지맥에 위치하는 산으로 북쪽에는 보청천이 흐르는데

지명의 유래는 금광이 있었고 천량의 금이 있어 천금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천금산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청산)에 천둔산은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여지도서」(청산)에 천둔산은 주맥이 보은현 속리산으로부터 온다. 현15리에 있다고

했고, 「1872년 지방지도」(청산), 「대동여지도」에도 천둔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천둔산 대신 천금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또한 순 한글 이름 '매봉'도 소개하였다.

인증샷

아무도 찾지않는 천금산 정상의 삼각점...깨끗히 청소를 한다

천금산 정상 삼각점(△관기 315  / 2003 복구)

천금산에서 내려서는 등로에는 가느다란 소나무들이 도열하여 산꾼을 반긴다

등로 가운데서 덩그러니 누워 맥길을 지키고 있는 무명묘지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의 모습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미세먼지로 인하여 상황파악이 너무 안된다

 

정산리(井山里)는 백화산 끝자락에 자리한 산촌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고개가 발달한 곳으로 자연마을로는 숲골, 가눈골, 별태, 학교앞, 주막뜸마을 등이 있다.

숲골마을은 느티나무와 팽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가눈골마을은 가는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별태마을은 수목과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과 별만이 보인다는 고개인 별재의 밑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학교앞마을은 화산 초등학교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막뜸마을은

주막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안부(09:11)

안부에서 올라서니 우측으로 가는 뚜렸한 길이 보이나

등로가 없는 직진의 봉우리로 올라서니 462.1m봉이 나온다

462.1m봉(09:15)

462.1m봉은 경북 상주시 모서면과 충북 옥천군 청산면의 경계에 있는 

道 경계봉으로 이곳에서 직진으로는 상주시 모서면으로 가는 능선이고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이곳부터 경북과 충북의 도 경계는이별한다.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면 좌측으로 영동군 용산면이고, 우측은 옥천군 청산면으로

좌.우 모두가 충북이란 행정구역 안으로 들어선다

경북과의 작별을 하고 우측 아래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꽤나 큰 규모의 호두농장이 나오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봉우리가 잠시후에 오를 442.0m봉이다

호두밭 윗쪽 능선으로 향하다가...

능선을 탈출하여...

호두밭으로 내려선다

우측 능선이 맥길이지만 호두밭 농로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마루금을 고집한다는 건 별의미가 없다

등로에서 바라본 호두나무 농장

호두농장 너머에 있는 박달산을 zoom in 해본다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의 율리 · 한석리에 걸쳐 있는 박달산(朴達山:481m)에 대한 지명 유래는

정확하지 않은데, 다만 조선 시대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박달산 혹은 박달라산으로 기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가 1곳이니, 현 북쪽의 박달산이다.

동쪽으로 황간 소이산에, 서쪽으로 옥천 임내의 이산현 현이산(懸伊山)에, 북쪽으로 청산

덕이산(德伊山)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박달산은 고을

북쪽 14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박달산 봉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도 유사한 내용과 함께 박달라사(朴達羅寺)라는 사찰도 언급하고 있다.

호두밭에는 민들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데 봄이 오는가보다

호두밭에서 만든 산길인가?...덕분에 오늘 범여의

몸뚱아리는 오랫만에 호사를 누리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이런날도 있었야제...맨날 혹사만 시키면 되겠는가

청산면 의지리가 꽤나 큰 마을인가 보다.

아직까지 등로는 의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부(09:26)

영동군 용산면 청화리로 내려가는 길이 뚜렸이 보인다

 

청화리(靑化里)는 평지가 넓은 편이나 동쪽에는 백화산맥이 이어져 높은 산지가

계속되고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지으며 담배, 고추가 많이 나며, 남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있고 영동인터체인지가 있다... 자연마을에는 상청화, 하청화가 있다.

청화라는 이름은 청산제와 적화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상청화는 위쪽 마을,

하청화는 아래쪽 마을이란 뜻으로 이름 지어졌다.

마루금은 계속해서 호두농장길로 이어지고...

조금전 462.1m봉에서 헤어진 충북과 경북의 도 경계 능선 너머로

보이는 백화산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있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경북 상주시 모서면과 충북 영동군 황간읍의 경계에 있는 백화산(白華山:933m)은

산 전체가 티없이 맑고 밝다는 뜻 이라고 하며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나라엔

많은 백화산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곳의 백화산은 한성봉에서 주행봉으로 이어진

능선의 암릉코스로 인기가 많은 곳 이다.

 

일제시대에 민족정기를 말살 하려는 흉계로 이름도 포성봉이라 바뀌고 지도에서도

삭제가 되는 수모를 겪는등많은 부침을 않고있지만 근래들어 백화산과 한성봉이라는

지명을 되찾고 금돌산성 및 저승골에 깃든 역사적인의의가 부각되고 있는 명산 이다. 

 

추풍령에서 황간으로 내려가며 1시 방향의 하늘을 보면 커다란 배가 하늘을 

떠가는 모양이 산을 볼 수 있는데, 하늘을 떠가는 배 모양을 한 봉우리가

백화산 주행봉(舟行峰)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줄기 흐름과는 달리 동쪽의

포성봉(933m)과 서쪽의 주행봉(874m)으로 이루어진 이 줄기는 북동에서 남서로

뻗쳐있어 작지만 하나의 산맥으로 대접하여 백화산맥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화산맥의 이 특이한 흐름으로 머리가 거꾸로 된 산이라 해서 두역산(頭逆山)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름이 점잖지 못하여 백화산으로 고쳤다는기록도 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모든 기록에 백화산으로 되어 있고, 상주쪽에서는 한성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포성봉이라 부르는 유래는알 수 없으나 주행봉을 현지 주민들은

쌀개봉이라 부르며, 주행봉의 머리를 이루는 바위봉우리 두 개가 옛날 디딜방아의

쌀개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행봉과 포성봉은 백화산의 쌍벽을 이루는 봉우리로, 기암괴봉과 숲이 아름답다. 

특히 주행봉은 쌀개 모양의 등성이 일대와 고스락에서 포성봉쪽 잘록이까지 온통

날카로운 바위로 되어 있고, 기암괴봉과 낭떠러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관이 좋으며, 

또 이 백화산 줄기와 남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매우 뾰족하고 우뚝한 지장산(약 670m) 

사이에 깊고 좁은 협곡이 있다. 

 

이 협곡을 흐르는 냇물이 석천인데 충북(영동)과 경북(상주) 경계를 이루는 석천의 반야사

위쪽(상류) 일대는 냇물 양쪽이 천길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으며 이 일대는 굽이굽이 벼루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아 그야말로 별천지이다. 

잠시후에 오를 422.0m봉이 참으로 까칠하게 보인다

안부(09:33)

갑자기 시작되는 빡센 오르막길...짧은 구간이지만 힘들게 오르는데

매주 느끼는 산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디 쉬운 산길이

있었던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442.0m봉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09:43)

지맥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직진

방향으로 살짝 벗어나 있는  442.0m봉을 갔다 오기로 한다

 442.0m봉(09:44)

다시  갈림봉(09:46)

우측으로 내려가니...

좌측의 소나무 사이로 영동군 용산면 미전리와 미전저수지가

흐릿하게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공장지대는 법화농공공단인 듯 하다

무명봉(09:49)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속을 헤매기는 최적의 날씨인데,

아쉽다면 산속에서도 숨을 쉬기 힘들정도인 극성스런

미세먼지가 산꾼을 괴롭히는구나...그래도 가야지 우짜겠노...

아무런 생각없이 능선을 거다가 내려서니 죽어서도 다정스럽게

보이는 묘지 2기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

무명묘지(09:56)

갈림길(09:58)

묘지를 내려와 살짝 좌측으로 내려서니 전주이공 부부 묘지가 나온다

전주이공& 배 창녕조씨 묘(10:00)

살짝 거칠어질듯 한 등로는...

이내 걷기 좋은 등로로 바뀌고...

펑퍼짐한 등로 가운데 묘비가 있는 묘지로 내려선다

전주이공 묘(10:03)

이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歸京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여유롭다... 내려다 보이는 목동저수지

물은 여느때보다 더 푸른듯 하고 그 뒷쪽으로 미세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오똑하게 청산면소재지 뒷쪽으로 이어지는 산은 도덕봉과 덕의봉인 듯 하다.

 

옥천군의 동단부에 위치한 청산면(靑山面)은 금강 수계인 보청천이 보은에서 흘러와 면의

중앙을 가로질러 청성면 고당리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하며, 보청천 유역에 소규모 산간

분지로 형성되어 있으며, 19번 국도를 통해 보은읍과 영동읍으로 연결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옥천군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영동군에 속하는 듯 하며, 현재 지전리 · 백운리 · 교평리 · 하서리 ·

신매리 · 대덕리 · 장위리 등 1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지명은 『삼국사기지리지』(상주) 삼년군에 "기산현(耆山縣)은 본시 굴현(屈縣)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청산현이다."라는 관련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데,『고려사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청산현)의 "청산현은 원래 신라의 굴산현(돌산이라고도 함)인데 경덕왕은 기산으로

고쳐서 삼년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940년(고려 태조 23)에 '기산현'을 청산현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명봉(10:05)

쌀아터 고개가 가까워져 가는지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 간다.

약간의 바람이 불긴하나 어느새 겨울바람이 아닌 春風으로

바뀌어 버려 몸도 마음도 한결 여유롭다...이것 하나만으로

오늘 산에 들어서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안부(10:07)

안부 아래로 내려서니...

등로 좌측의 양지바른 곳에 망자의 보금자리가 자리를 잡고있다.

生前에 참으로 다정스런 부부였던 모양이다...그러기에 死後에도

저렇게 다정스레 보이는 걸까...흔히 말하는 닭살부부였던 모양이다

무명봉(10:10)

안부(10:12)

고도차가 없는 완만한 능선으로 인해 쥔장 잘못만나 맨날

개고생하던 범여의 두 다리가 오랫만에 호사를 누린다 

전주이공 묘(10:14)

이곳 아랫마을에는 전주이씨 집성촌이었는지

유난히도 전주이씨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호젓한 산길은 계속되고, 世俗의 찌든때를 한거플씩 벗겨 가면서

길을 걷는다...그러면서 산이란 스승에게 “空의 意味”의 깨우친다

유인 능성구씨 묘(10:16)

묘지 우측의 숲속으로 내려간다

능성구씨 할머니 묘지앞에 있는 뫳선생의 목욕탕...이노무 쉬끼들...

무명묘지(10:17)

무명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후손들이 돌보지 않은 연일정씨(延日鄭氏) 할머니와

밀양박공 할아버지 묘지를 지나니 쌀아터 고개가 나오는데,  호두나무 농장위의

422.0m봉에서 이곳까지는 망자들의 영구임대주택(묘지)을 두루두루 거치면서

마치 조선 왕릉 순례길을 걷는 기분이다

쌀아터 고개(米田峴:10:19)

옥천군 청산면 효목리 목동(목골)마을에서 영동군 용산면 미전리

쌀아터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시멘트 포장으로 된 도로에

당산나무인듯 멋진 老巨樹 한 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데

옥천 사람들은 목동고개라고 하고, 영동사람들은 쌀아터 고개 또는

미전리 고개라고 부르지만, 정작 지도상에는 아무런 지명 표식도 없다

 

고개 좌측에 있는 미전리(米田里)는 영동군 용산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마을

앞으로 내천이 흐르며 미전저수지가 있다... 벼와 고추를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쌀아티(미전동), 돌무링이(석우동,하미전,돌못골),

상미전 등이 있다.

 

쌀아티는 살티고개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돌무링이는 근처에 돌모롱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고, 상미전은 쌀아티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가는 길  /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쌀아터  고개의 노거수를 지나니 새로 조성한 듯한 과수원이 보인다

과수원으로 올라서면서 잡목지대가 나오고 오늘 이곳까지

참으로 편하게 걸어왔는데 서서히 지맥길의 本色을 드러내긴

하지만 지난 1~2월에 걸었던 남도땅의 지맥길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다...그래!...이 정도의 산길을 가지고 힘들다 하면

지맥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제...

잡목을 헤치고 올라가면 곧바로 좋은 길이 나오니

쫄지말고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하는듯 선답자의

시그널이 반겨준다

까칠하고 등로가 보이지 않은 마루금이지만 조금씩 봄기운이

베어나오는 듯한 가풀막 능선을 뚜버기처럼 올라간다

부뜰이님 반갑습니다...지난번 보내주신 진도지맥의

자료를 참고삼아 힘들지만 무사히 끝냈습니다...복받을깁니다 

묘지(10:25)

준.희 쌤의 격려를 받으면서...

까칠한 능선을 무작정 치고 올라간다

오늘 산행중에 오랫만에 땀을 흘리면서 능선을 치고 올라간다

무명봉(10:33)

우측으로 꺽어져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못생긴(?) 소나무에서 뿜어나오는 솔향(松香)에 취하여 힘든줄도

모르고 걸어가는데, 오랫만에 지맥길에서 느끼는 healing...참!...좋다

전통적인 陸山길에 양념으로 만나는 암릉...

무명봉(10:39)

따스한 봄기운 탓인지 사초(莎草: 들이나 산에 자라는 키가 작고 

뿌리가 붙은 상태로 무리 지어 있는 풀)도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구나

나뭇가지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옥천군 청산면 효목리의 모습

 

효목리(孝木里)는 천금산 아래 자리하고 있으며 목동 저수지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목동(목골), 새터말(새터),

효림이(효림리) 등이 있으며, 목골은 옛날부터 수목이 울창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터말은 목동 동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효림이는 옛날에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하며, 효림과 목동의 이름을 따서

효목리라 하였다.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고 했던가...

등로가 편하니 범여의 夢遊病이 도질 모양이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온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졸면서 걷다보니 308.8m봉에 도착한다

308.8m봉(10:44)

마모가 심해서 판독이 불가능한 308.8m봉 정상 삼각점

308.8m봉 정상을 지나서 작은 소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맥길.

산행 시작전에는 약간 추웠지만, 해가 뜨면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호젓하게 홀로걷는 이 길...너무 좋다.

안부(10:47)

人生事 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살말큼 살았는데 더 이상 뭘 바랄게 있나, 이제는

서서히 시절 因緣을 하나 하나 정리할 나이가 아닐까...

그걸 정리하기에는 산만큼 좋은곳이 더 있을까...

 

*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로 출전(出典)은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이다

 

옛날에 중국 북쪽 변방에 사는 노인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낙심하였는데

얼마 뒤에  말이  필의 준마를 데리고 와서 노인이 좋아하였다... 이후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어 다시 낙담하지만  때문에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목숨을 구하게 되어 노인이 다시 기뻐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296.1m봉(10:50)

옥천군 청산면 효목리 새마을(새터골)로 이어지는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확 꺽어져서 내리막길로 내려가야 하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좌측으로 내려서니 빛바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산꾼을 반긴다

금새 안부로 내려서고...

移葬을 한 듯한 묘터가 나오고...

뚜렸한 등로가 보이면서 차량소리가 심하게

들리는데 오늘 지나가야 할 샘터재가 다 온 모양이다.

그리고 금새 샘터재 생태통로 직전에 있는 이동통신탑을 만난다

옥천 효목 이동통신탑(10:57)

이동통신탑을 지나서 내려가니...

샘티재를 통과하는 생태통로(Ecobridge)가 나오고, 인간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곳인지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듯한 곳이다

샘티재(泉:235.5m:11:00~15)

충북 옥천군 청산면 효목리에서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명은 조선 후기 여러 지리지와 고지도에 정치(井峙), 천치(泉峙)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청산면소재지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하여, 용산, 영동읍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예전에는 2차선 도로였으나 지금은

4차선의 신도로가 생겼고, 교통편은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1872년지방지도」 (청산)에 천치(泉峙)가 「조선지지자료」(청산)에 천치현(泉峙峴)이

동면 목동 앞에 있다."고 기록되어, 19세기 후반 경에 '샘'에 대한 표기가 정(井)에서

천(泉)으로 바뀌었음을 알수 있는데,「한국지명총람」에는 샘티재의 이명칭(異名稱)으로

'천고개', '천현(泉峴)', '시암티고개'가 제시되어 있고, 지명 유래에 대해 ‘옛날 고개

마루에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지금은 고개위에 생태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오면서 별로 먹은것이 없다보니 허기가 지고

졸음이 쏟아진다...생태통로  옆에 베낭을 내려놓고 간단하게

요기를 한 다음에 베낭을 베개삼아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샘티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은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는지

산들이 회색빛을 띠고 있지만, 공기는 완연한 봄날을 느끼게 한다

낙엽으로 덮혀있는 희미한 등로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산꾼 앞으로

휙 지나가는 고라니 한마리...얼마나 빠른지 빛의 속도로 지나는 기분이다.

미안하구나...조용히 지나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너는 얼마나 놀랬을까...

능선에 올라선 후, 다시 조금을 더 올라가 우측으로 앙증맞은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1:30)

미국의 유명한 배우이자 작가였던 벤스타인(Ben Stin)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라 했다”...나는 뭘 원했을까...예전에는 아니였지만

지금에 그 질문을 받는다면 “산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명산만 걷는 등산객들이야 이런곳을 걸어라고 하면 단박에

NO라고 하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소위 명산이란

곳은 왠지 어색하다...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잘 찾지않은

이런 능선이 왜 이리도 정겨운지 모르겠다

349.9m봉(11:38)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은 밋밋한 무명봉에

준.희 쌤의 산패가 붙어있는 무명봉...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곳에 산패가 있는데 나도 그냥 지나칠 뻔 했다

349.9m봉에서 직진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확 꺽어지는데, 보이지 않은 능선을 내려가니

비실이부부님의 시그널이 독립군에게 길을 안내한다

급하게 능선을 내려서니... 

능선 좌측의 법화리쪽에는 마치 늪지대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같은 곳이 보이나, 자세히보니 늪지대는 아닌듯 하다

안부(11:40)

무명봉(11:43)

인생(人生)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며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라고 한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주지 못했고
베풀며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이 가장 큰 후회란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라고 한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 했던가?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것에
대한 후회 라고 한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한 이러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한다.   

무명봉(11:46)

등로에서 바라본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法化里)의 모습

 

법화리(法化里)는 천마산 산자락 남창받이 산기슭에 위치하며 마을

앞으로는 법화천(法化川:법화리에서 발원하여 율리 초강으로 흐르는

지방하천)이 흐르며, 배와 포도를 주로 재배하는 농촌마을로 법화논공단지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법화(법화동), 돌고지(석우동) 등이 있다.

 

법화는 본래 법화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돌고지는 법화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근처에 돌이 박힌 산혈이 죽 내민 곶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석우동이라고도 불린다.

안부(11:48)

희미한 등로로 올라서니 408.0m봉이 나온다

408.0m봉(11:54)

408.0m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내리막길 바닥에는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고사목들

生前에 있었던 사연들을 나에게 하고 말하고 싶은 눈치이다.

다...부질없는 짓거리요...미련일랑 다 잊어버리셔요

안부(11:57)

지난주에 걸었던 남도지방과는 달리 공기는 완연한

봄에 들어선 듯 하지만 계절의 변화에 鈍感한 듯 아직도

겨울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갈림길(12:02)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낡은 시그널 2개가 산꾼을 안내한다

묘지(12:05)

망자가 고이 잠든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耳目口鼻가

뚜렸한 고개가 나오는데 예전에 民草들이 넘었던

고개였던 모양이다

성황당고개(12:12)

옥천군 청산군 한곡리와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지명은 없고 예전에 성황당의 흔적인듯한 돌무더기가 있으며, 민초들이

다녔는지 아직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고개에는 흐릿한 등로가 보인다

고개에서 올라서니 등로에 드러누운체 微動조차 없는

고사목을 넘어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천관산으로 향한다

법화리 갈림길(12:18)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로 이어지는 등로의 갈림길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천관산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후에 오를

천관산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안부(12:23)

안부 좌측의 뚜렸한 사면길이 보이는데 천관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맥 마루금은 등로가 보이지 않은 빡센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임도파라면 편안한 좌측의 사면길로 향하겠지만 명색이 정통

산꾼으로 자처하는 범여가 그럴수는 없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풀막(몹시 비탈진 땅바닥)을 치고 오르는데

범여에게는 쥐약같은 구간이 이런 곳이다....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보지만 바닥에 깔려있는 솔갈비가 어찌나

미끄러운지 오르면 미끌어지고, 다시 오르다보니 능선에 도착한다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은 능선에 올라서니

비실이부부님의 흔적이 산꾼을 반긴다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다시한번 빡센 등로를 치고 올라서니 우측의

청산면 한곡리에서 올라오는 제도권 등로가

나오는데, 로프가 처져있는 말뚝을 만나

좌측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32)

천관산으로 향하는 잠시 편안한 길을 걷는다

갈림길(12:35)

조금전 사면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고

우측으로는 청산면 한곡리로 이어지는 길이고, 직진의 법화저수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천관산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한곡리(閑谷里)는 마을 뒤편으로 장군봉이 우뚝 서 있으며 문암저수지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한골(한곡), 문바우(문암) 등이 있다.

본래 큰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한골 또는 한곡이라 하였으며,  문바우는

마을에 문바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교도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수천명의 교도들이 이곳(문바위골)에서 집회를 열어 지금에까지도

이어져 행사를 개최하는 역사가 있으며, 계화공주와 웅인의 전설이 얽힌 문바위가 있다

무명봉(12:37)

조금전에 힘들게 올라온 마루금길을 보상받은 기분으로

조금 편하게 천관산을 햐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412.5m봉(12:40)

쉼터용 벤취 3개가 있고, 직진 능선으로 따라서  천관산 방향으로 향한다

무명봉(12:42)

천관산이 지척이라 금방 도착할 것만 같은데도 아직은 멀었다

동학역사 탐방길 이정표(12:44)

동학역사 탐방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이곳이 동학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하고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기로 한다.

동학혁명’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인 한곡리...마을 끝 천관산 계곡으로 이어지는

초입에는 동학기념공원이 조성돼 있고, 이 자리부터 이른바 ‘동학역사 탐방길’이 시작된다. 

 

동학역사 탐방길이라는 이름의 길이기는 하지만 동학농민군과 혁명운동에

관련한 유적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하며,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산책로라고 한다

날씨도 춥지않고, 바람도 전혀없어서 오늘 산행을 하는데, 최적의

날씨이기는 하나, 짙은 미세먼지에다, 등로에 있는 나무들로 인해서

전망이 전혀없는 길이긴 하지만, 사람은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도 못하고, 오직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친구삼아 걷는데

갑자기 후닥닥 하는 소리에 앞을 쳐다보니,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구분이 안되는 짐승 한마리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상당히

놀랐다...짐승땜에 놀라는 건 2번째다...

무명봉(12:50)

등로에서 만난 連理枝?

안부(12:53)

좌측 산 아래에 있는 법화논공산업단지의 모습

능선 앞에 보이는 천관산은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 확보가 잘 안되는구나...숨을 쉬기조차 힘들정도로 

미세먼지가 심하다

얼키고 설켜버린 나무 뿌리들...마치 이 나라의 정치하는

인간들이 民草들의 이익이 아닌 자기들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는 자들의 離合集散처럼 보인다

안전로프가 있는 천관산으로 올라간다

천관산(天冠山:445.1m:13:00)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와 대덕리,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국방부대삼각점과 이정표, 쉼터의자 2개와 계화공주와 웅인(熊人)

총각의 러브스토리 안내판, 백두사랑 산악회의 산패가 걸려있다

 

천관산으 조선 시대에 관련 기록이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영동)에 "천관산(天冠山)은

북일면 풍천리에 있다... 북이면 대동리 한곡촌 뒤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처음으로 관련

지명이 등장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산 모양이 갓처럼 생겨 지어진 이름”이라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 '천관산(天冠山)'과 함께 다른 이름 '천강산(天剛山)'도 소개하였는데,  천강산이란

명칭은 지역주민의 '천관산' 발음을 한자로 옮기면서 달리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천관산 정상에 있는 계화공주와 웅인총각 러브스토리 안내판

인증샷

천관산 정상에 있는 국방부대삼각점

천관산 정상에서 직진으로 이어지는 영동군 용산면 법화리쪽으로

이어지는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 아래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간다

산으로 아우님의 흔적을 만난다... 랑탕 트레킹을

갔었는데 귀국을 했는지 모르겠다...꼬라지 한번

봐야 할터인데...다들 바쁘다보니 언제 만났는지

기억조차 없구나

아주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등로의 솔갈비가 엄청 미끄럽다

등로 좌측에는 간벌을 한 다음에 새로운 묘목을 심으려고

준비중인 듯 하며, 그 뒷쪽으로 보이는 박달산은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급경사를 내려서니, 어린 시절에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불렀던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안내판이 보이는구나 

새야새야 파랑새야 안내판에는 동요작곡가 정순철의 이름이 보인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불렀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정순철이

이곳 옥천군 청산면 출신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동학길 시작점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13:15)

우측으로는 동학길 시작점 표식이 있는 옥천군 청산면 대덕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골짜기 형태의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사람들이 별로 다닌 흔적이 없는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로 내려가는

길이다...우측의 청산면에도 한곡리가 있고, 좌측의 용산면에도

한곡리가 있어서 조금은 헷갈리는 곳이다

 

고개에는 밤재에 동학농민 운동에 관한 안내판과 쉼터용 벤취가 있는데

이곳의 동학에 관한 스토리는 용산면 한곡리가 아닌 청산면 한곡리에

관한 내용이다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마을에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혜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 살았던 마을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혼란했던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다양한 형태로 雨後竹筍처럼 생겨놨는데,

그 당시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대신해서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던 사람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창종한 종교가

동학(東學)이였다.

 

몰락한 양반가의 庶子출신인 최제우는 당시 매관매직이 일상화 되었던 사회상에

조정(朝廷)에 진출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시천주(侍天主: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동학, 천도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가 1861년 포교를 시작한 이후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은

두려움을 느끼고 제자 20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 중 철종이 죽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좌도난정(左道亂正: 다른 종교를 전파해 유교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히고 문란케 한 행위)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최제우가 처형된 이후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힘을 키우던 중 1894년(고종 31) 1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를 매개로 하여 동학혁명은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곳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에 동학이 유입된 시기는 1886~87년으로 추정되며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의 주도로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집회를 열었던 곳으로, 최시형은 1893년 4월 관군에게 쫓겨 이 마을로 숨어들어

동학농민군의 주요 인사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다음 전략을 도모했는데, 그 증거는

‘문바위’로 불리는 마을 뒷산의 큰 바위에 음각된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박희근·

김정섭·박맹호·김영규·김재섭·박창근·신필우 등 7명의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농민항쟁을 보면서 일본군의 침략과 조선 조정의 부패한 세력에

대항하여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동학전쟁을 계획했다.

그 당시 문바위 근처에는 핍박받는 수많은 민초들이 몰려들었으며,  이곳에

동학 훈련장이 생겼는데, 동학교도를 관리하기 위해 통솔할 접주(接主)를 임명했는데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 했다.

 

 

최시형은 이 마을에 머무르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전주화약

이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에 나서는 일본에 대한 대일 항전을 선언했다.

1894년 9월18일, 전국의 동학 교도들에게 총기포할 것을 명령한 이른바 ‘청산기포’가

그것인데, 일원화한 지휘체계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전국화 과정을 거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때 한곡리 마을은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이 모인 곳이라 해서 ‘새 서울’이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 전주화약(全州和約)은 1894년 4월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1차 농민전쟁의 결과 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맺어진 협약으로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전역과 충청도로 확대되었고, 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했다.

  정부는 청에 원병으로 일본군까지 개입하게 되자 농민군은 조선을 무대로 한 국제분쟁의 국면을

  피하고자 휴전을 제의하였다... 농민군의 제의는 6월 조정에 받아들여졌고 휴전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는데, 정부를 상대로 개혁의 요구를 관철해낸 전주화약은 농민군의 승리였고,

  이후 농민군은 11월 하순 제2차 농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사실상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스스로의 힘으로 시행했다.

한곡리에 머물던 최시형은 동학을 정당한 종교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 당시 조선의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로 시간만 끌었으며, 이에 농민봉기를

일으켜, 조선 관군에 대항했던 최시형은 청나라과 일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관군에게 대패했으며, 공주의 우금치(牛禁峙: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고개)

전투에서 몰살 당했다고 한다

동학의 슬픈 흔적이 남아있는 고개를 지나면서 동학 탐방길의

시작점이 표시되어 있는 이정표쪽을 바라보는 산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예나 지금이나 늘 고통받으면 사는 사람은 나같은 민초인 듯 하다

갑자기 사라진 등로...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든다.

땀이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빡센 가풀막에다가

쌓여있는 솔갈비로 인해 미끄러운 등로를 치고 오르려니

힘이 드는구나...그래도 올라야지 우짜겠노

우리나라의 맥산꾼의 legend중의 한 분이신 부산의

맨발님의 낡은 시그널이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한다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으면 올라서니 407.0m봉이다

407.0m봉(13:32)

407.0m봉을 지난 다음에...

갈림길(13:34)

급하게 좌측 아래로 내려가는 맥길도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13:38)

좌측으로 나있는 사면길을 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371m봉(13:42)

조금전의 사면길로 향했던 길을 다시 만나 맥길을 이어간다

갈림길(13:43)

조그만 봉우리에서  지맥길은 우측으로 향한다

산꾼들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맥길은 비교적 뚜렸한 편이다

388.7m봉(13:47)

가난하건, 부자건, 권력이 있건, 없건,
모든 사람은 등로에 쓰러진 저 나무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길을 갈 수밖에 없다 

 

걷지도 못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후회하지 말고

이제는 늦기 전에 인생을 즐기면서 생로병사에

순응하며 살자... 머물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묘지(13:50)

몸은 의사에게 맡기고 목숨은 하늘에 맡기고
마음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이제서야 느낀다.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온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안부(13:53)

358.0m봉 오르는 길

아직까지 봄이 오지않은 회색빛 산에 가장 먼저 봄기운을

주는 생강나무꽃...1~2주만 지나면 온 산을 노랗게 물들게

하겠지...

358.0m봉(13:57)

준.희 쌤의 산패가 걸려있는 358.0m봉 정상에서

맥길은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완만한 내리막길에는 선답자들의 흔적이 간간히

보이니 길을 앓어버릴 염여는 없을듯 하다

무명봉을 오르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데 축사가 있는지

가축의 축분(畜糞)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한곡리(閑谷里)는 영동군 용산면의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지가 넓은 편이며

남쪽에는 경부고속도로와 지방도로가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낮은 산지가

이어져 박달산에 이르는데, 자연마을에는 한골, 중동, 동문동이 있다.

한골이라는 마을 이름은 큰 골짜기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며 중동은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무명봉(14:02)

우측으로 꺽어져서 밤재 방향으로 내려간다

안부(14:04)

무명봉(14:06)

무명봉을 내려서자마자 등로는 좌측으로 꺽어지고...

이장을 한 묘지의 흔적 아래로 내려선다

다시 시작되는 급경사 아래로 절개지가 보이고...

절개지 아래에 도로가 보이는데 지도상의 밤재이다

밤재(14:10)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와 옥천군 청산면 대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1차선의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이동통신탑이 있고, 대덕리 쪽은 잘 꾸며진

연안전씨 가족묘지(전가원)가 보이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밤재라

부르지 않고 뱀치재라 부르는데, 지도상의 뱀치재는 이곳에서 대덕리쪽으로

더 가야 하는데 밤재에 대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옥천군 청산면에 있는 대덕리(大德里)는 천관산 자락에 위치하여 자연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으로 자연마을로는 더구리(덕곡), 큰뱀티(대사동) 등이 있다.

더구리는 큰 뱀티 북쪽에 있는 묵은 마을이고, 큰뱀티는 대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뱀티재(큰고개)아래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덕리라 부르게 된 것은 덕을 지닌 선비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대덕리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 때 대사(大巳)의 대(大)자와

덕곡(德谷)의 덕(德)자를 한자씩 취하여 만든 것이다.

대덕리 방향에 있는 연안전씨 가족묘지(전가원)의 모습

너무 일찍 산행을 끝내려니 조금은 아쉽지만, 화요일에 오랫만에

지인들과 약속한 골프 약속 땜에 몸도 좀 추스려야하고, 내일은

골프연습장에 가서 채도 좀 잡아봐야 할 것 같아서 아쉽지만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묘지의 상석에 앉아 빵과 두유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베낭을 정리한다...이곳은 차량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고개로 수통에 남은 물에다가 수건을 적셔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부를까 생각을 하면서 20분정도 미적거리는

사이에 대덕리쪽에서 1톤 트럭 한대가 올라오고 있다.

 

재빨리 손을 드니 차를 세운다...서울을 가기 위해서 영동역을 

가려고 하는데, 영동역으로 가는 버스서는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만

태워 달라고 하니, 타라고 한다...자기가 영동을 가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영동역 입구에 내려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다

지인의 도움으로 편하게 영동역에 도착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영동역 옆에 있는 순국의사  심석재송선생병순지상(心石齋宋先生秉珣之像)

 

순국의사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1839~1912)은 1865년(고종 2) 서원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것을 상소하였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으며,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형 송병선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활동하다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고, 그 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에게 배포하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으며,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영동역(15:25)

영동발 → 영등포행 열차표

영동역에 도착하여 영등포로 가는 열차표를 예매하는데 

열차표는 입석밖에 없다...2시간 반의 거리이니 기꺼이

입석표를 예매하고 곧바로 플렛홈으로 향한다

부산역에서 오는 무궁화 열차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10분정도

늦게 영동역에 도착한다...한결 여유롭게 열차를 기다린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무궁화 열차의 4호칸의 예전의 식당칸으로 

입석의 의자와 노래방, 자판기가 있는 열차 칸이었는데 지금은

입석으로 표를 끊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칸이라 항상 만원이라

자리 싸움이 치열한 곳이었는데 오늘은 대전까지는 자리가 널널했다

산에서 먹다남은 떡과 과일, 미싯가루에다 우유를 부어

마시면서 베낭털이를 한 다음에 느긋하게 한숨을 푹자고 나니

열차는 영등포에 도착하고, 영등포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