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칠봉)지맥(진행중)

백천(칠봉)지맥 제1구간 -염속봉산(분기봉)에서 땅고개까지

범여(梵如) 2024. 6. 13. 19:37

☞ 산행일시: 2024년 06월 02일

☞ 산행날씨: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14.2km+들머리 2.3km  / 7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살치재-무명묘지-496.7m봉-안부-무명봉-무명봉-안부-염속봉산

                     무인산불감시초소-안부-460.4m봉-갈림길-임도-고개-갈림길

                    487.3m봉-안부고개-갈림길-487.9m봉-갈림길-적산-안부-갈림길

                무명봉-470.6m봉-남평문씨 가족묘-417m봉-절충장군 남평문공 묘

                고개-임도삼거리-갈림길-370.4m봉-갈림길-안부-무명봉

                393.5m봉-고사리밭-381.4m봉-안부-안부-242.6m봉-256m봉

                성산여씨 가족묘-언내고개-안부고개-268.9m봉-고름재-옛고름재?

                안부-안부-에그네재-무명봉-고개-무명봉-전인산-296.7m봉

                할미산성-안부-성주배공 묘-자리섬 고개-284.2m봉-249.7m

                안부-247.2m봉-225.7m봉-안부고개-무명봉-무명봉-215m봉

                212m봉-오현재-땅고개

☞ 소 재 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 성주군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해가 길고 날이 더울때는 강원도의 산을 집중적으로 걸어려고 했는데 , 그 이유는

남쪽보다는 날씨도 덜 더운편이기도 하지만, 산이 높고, 골도 깊어서,

초반의 접속구간도 길지만 날머리의 탈출로 역시 너무 길어서 늘 고민이 많다...

더군더나 예전같은 체력이 아니라 발걸음이 느리다보니 해가 길 때, 다니는게 최상이다.

 

이번주는 마지막 구간이 남은 양양 남 지맥(신산경표상:만월지맥)을 가려고

계획하며, 일기예보를 검색하는데, 헐~~~ 이번주 일욜날 양양에 비가 온단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산꾼의 樂이라곤 주말에 산에 가는 것 밖에 없는데

주말마다 비가오니 우짜면 좋는교...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당일로  갈 수 있는 곳을 검색하다보니 김천 근처에 있는 칠봉지맥이다.

 

주말에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좀보고 떠나야 했었는데, 하는 것 없이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토욜 저녁 늦은 시간이다...너무 피곤하여 저녁도 먹지 못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대충 베낭을 챙긴 다음에

집 앞에서 출발하는 서울역가는 버스에 오른다 

 

칠봉지맥(七峰枝脈) 개념도

 

칠봉지맥은 백두대간의 대덕산(大德山 1,290.9m) 남쪽 삼도봉(일명 초점산.1250m)에서

분기한 수도지맥(길이 103.4km)이 남동쪽으로 18.4km를 내려가 수도산(1317.1m.)에서

동북쪽으로 금오지맥을 분기하고, 분기한 금오지맥(길이 79km)은 북동진하여 28.8km를

가서는 염속봉산(679m)에서 다시 남동쪽으로 한 가지를 쳐 낙동강과 회천이 합류하는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정터마을앞에서 끝나는 길이 58.8km되는 산줄기를 말하며

최고봉인 칠봉산(517m)의 이름을 빌려와 칠봉지맥(七峰枝脈)이라 부르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출발지점은 같으나 신산경표상의 금오지맥

일부와 영암지맥으로 흘러 경북 성주군 선남면 선원리 끄트머리에서 백천이

낙동강과 합수하는데 백천지맥이라 부르고 있다

 

칠봉지맥의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회천(길이 78km 유역면적 781㎢)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백천(길이 32km 유역면적289.8㎢)내지 낙동강물이 된다.

지나는 산과 고개는 염속봉산(679m), 적산(510m), 고름재(30번도로), 에그너재(2차선),

할미산성, 땅고개(33번도로), 호령고개(2차선도로), 칠봉산(517m), 하미기재,

추산 (524.1m), 배티재, 이레재(79번도로), 의봉산(551m), 담밑재,기 산고개(88고속도로),

청룡산(300.2m), 용머리산(179m), 대봉산(121m), 67,79번도로이고

지맥의 끝인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는 서쪽과 남쪽은 경남 창녕군과 접하고

동측은 대구시와 접하는 삼도경계가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04:55)

해가 많이 길어졌구나...5시도 안된 시간인데 날이 훤하고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빌딩 유리창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있다

서울발 → 김천구미행 열차표

매표소에 가서 인터넷으로 예매한 표를 찾은 다음에 플렛홈으로 향한다

서울역 플렛홈에 있는 철도기점 표시석

05시 28분 정각에 열차는 김천구미역으로 향하고 열차에 오르자마자

늘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열차는 벌써

바람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 아래를 통과하여, 온 들판에 비닐하우스로

뒤덮힌 김천의 들녘을 통과한 후 잠시 김천구미역에 도착한다

김천구미역(07:00)

난생 처음 와보는 김천구미역...김천에서도 멀고, 구미에서도 먼 곳에다

열차라곤 KTX열차만 서는 곳인데 주위의 상권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침을 해결하려고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침에 영업을 하는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다행히 돼지국밥집이 보여서 갔지만, 문은 열려 있는데, 쥔장이

뒷간을 갔는지, 10분을 걸려도 오지않아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서 김밥 한줄을 산 다음에 택시타는 곳으로 향한다.

 

택시에 올라타서 살치재로 가자고 하니, 잘 모르겠단다.

하는 수 없이 살치재 주소를 가리켜 주면서 가자고하니, 나이드신 분이라

그런지,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젊은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하더니만

그제서야 이해가 됐는지 살치재로 향한다...그 바람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살티재(箭峠峴:389m:07:58)

김천시 조마면 대방리와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를 잇는 잇는 고개로 살치(티)재는

성주와 김천의 경계를 이루는 염속산과 속봉산 사이에 위치한 높은 고개로

예로부터 김천과 성주는 물론, 경상남도 합천까지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으며, 지금은 59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데 살치재는 『조선지도』와

『대동여지도』 등에 모두 전현(箭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에는 사을(沙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같은 한자 이름의 주막에

한글로 살티주막이라고 쓰여 있는데, 살티재는 “사을”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살티재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성주의 후평리와 김천의 대방리에서

전해 오는 설이 다른데, 후평리에서는 바람이 세어 산의 모래가 많이 날리고 멀리서도

모래흙이 보인다고 하여 살티라고 부른다고하는데, 한편 대방리에서는 옛날에 이곳에

사청(射廳)이 있어서 궁항, 활미기와 같은 활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 있으며,

고개 이름도 화살을 줍는 고개라고 하여 살티재라 하였다고 한다

살티재 김천 방면의 모습

살티(箭峠)는 화살과 관련되어 붙인 이름으로 살치재 또는 전령(箭嶺)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주음시”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 화살을 줍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살티재가 있는 대방리 일대에도 궁항(弓項), 성궁[일명 활목, 활미기] 등 활과 관련된

지명이 있으며, 살티재 북쪽 사면에서 발원한 대방천(大坊川)이 조마면을 지나 감천면

도평리에서 감천(甘川)으로 흘러들고, 살티재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성주군과 고령군을

지나는 대가천(大伽川)으로 흘러든다

산행을 시작하다(08:10)

살티재 옆에있는 노거수 한그루가 오랫만에 온 산꾼을 반긴다

2016년 11월에 회천(금오)지맥 2구간을 할 때 진권아우와 이곳을 

지나갔으니 어느덧 8여년이라 세월이 흘렀구나...그때만 해도

천하에 겁없이 산엘 다녔었고, 산행 走力도 좋아 어는 누구와 다녔어도

꿀리지 않았는데, 그 이후인 2018년 여름에 몸뚱아리에 칼을 대면서

망가진 체력이 회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구나...그 당시 나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진권아우는 베트남에 사업을 한답시고, 형님한테

안부 인사조차 없으니, 참으로 괘씸(?)하구나...니는 평생 안 늙을줄 아느냐...

그래 어디서 살던간에 아프지말고 살아라

염속봉산으로 이어지는 회천(금오)지맥의 2구간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제도권 등로답게 등로는 아주좋고, 전국의 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대구의 비실이부부님의 시그널이 초반부터 반겨준다.

감사합니다...이 곳이 나와바리 구역이죠...조신하게 지나가겠습니다

무명묘지(08:15)

세속에서의 힘든 삶도 산속에만 들어서면 멀쩡해지니

범여의 몸뚱아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이것도 병이련가

남쪽 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왔건만 이른

아침인데도 바람한 점이 없는 탓인지 땀이나기 시작한다

496.7m봉(08:21)

무명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496.7m봉이 나오고

마루금을 우측으로 꺽어지면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이른 아침인데도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예감상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에 예감한다

홀연히 나서는 산길...올 때마다 늘 가슴이 설레인다.

나혼자만 하는 산에 대한 짝사랑인가?...

안부(08:23)

청승맞게 비를 맞으면서 걷는게 싫어서 갑자기 행선지를

바꿔 공부도 하지 못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지

못하고 길을 나선 탓인지 조금은 불안하다...하기사 아직까지

분기점이 아닌 회천(신산경표상:금오)지맥길이라 8년전에

걷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남았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무명봉(08:34)

분기점인 염속봉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염속봉산 가는길에서 뒤돌아보니 염속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성주군의 금수면 무학리와 김천시 조마면 대방리에 걸쳐 있는

염속산(厭俗山.870.2m) 남쪽으로 대가천을 사이에 두고 독용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염속봉산·연봉산으로 이어진다. 

 

염속산의 남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들은 대가천으로 합류하며, 북사면에서는

대방천이 발원하고, 산의 동쪽에 있는 살치재로 59번 국도가 통과하며,

남동쪽에는 성주댐이 있다.

 

염속산은 조선시대의 사료에 기록이 없으며, 『조선지지자료』에 금수면(金水面)에

있는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에는 산 높이가 870.2m라고 기재되어 있다. 

염속산은 과거에 이 산에 염속사(厭俗寺)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눈가링”이라는 이칭(異稱)을 가지고 있으며, 또 다른 설은 수백년전 어느 노파가

며느리의 불효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세상을 등 뒤로 하고 이 산으로 들어와 여생을

보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인 김천의 산그리메

미세먼지로 인해 아침에 열차에서 내렸던 김천구미역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보이지가 않는구나

 

삼산이수(三山二水)란 3개의 산과 2개의 물이라는 의미이니,

이는 곧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으로,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三山)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을 가리킨다.

염속봉산으로 오르길에는 김천시경계 산을 탐사한다는 시그널이 자주 보인다

무명봉(08:43)

안부(08:46)

안부에서 올라선 다음에 숲속을 빠져 나오니...

“kt염속산 중계소”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정상의

나뭇가지 사이로 중계소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으로 향한다

kt염속산 중계소의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철조망 사이로 개구멍이

보이기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철대문만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염속봉산(厭俗鳳山:679.3m:08:51)

김천시 조마면과 성주군 벽진면, 금수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바로

아랫쪽에는 성주와 김천으로 연결되는 59번 국도가 지나는 살티재가 있고,

은편엔 염속산이 보이며 염속봉산 정상에는 kt염속산 중계소가 자리잡고

있어서 정상엔 접근을 할 수가 없는 곳인데 이곳부터 칠봉지맥이 분기되는

분기봉이건만, 들어갈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헷갈리는 건 맞은편엔 염속산이 있고, 근처인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에

연봉산(704.9m)이 있어 그 산이 그 산 같아서 머리가 혼란스럽다

 

'디지털김천문화대전'에는 속봉산(粟鳳山)으로도 부르고 있고, 또 살티재 서쪽에

염속산(厭俗山 872.5m)이 따로 있으니 정확히 알 길이 없는데 다만 염속(厭俗)이란

‘속세가 싫다’는  뜻인데 산명(山名)의 이름이 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염속봉산 정상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 않고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는데, 올해 처음보는 기린초가 안쓰런듯 나를 바라본다 

 

기린초(꽃말:기다림, 소녀의 사랑)

줄기가 기린 목처럼 쭉 뻗는 기린초는 이름만 들어서는 아주 큰 식물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키는 고작 20~30㎝ 정도 밖에 안되는 식물이다...영특하고 뛰어난 아이를 ‘기린아’라고 부르는데,

약초로 이용되는 식물 중 그 기능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여 ‘기린초’라고 하는데, 키는 작지만

줄기는 기린의 목처럼 곧게 위로 뻗어 있으며, 육질이 좋아서 나물로도 많이 먹는 식물이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산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산의 바위틈이나 너무 습하지

않은 곳에서 자생하며, 남쪽 지방에서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잘 자랄만큼 생명력이

강한데, 메마른 바위 위에도 뿌리를 내릴 정도이다.

어렸을 때 달달한 꿀물을 먹으려고 빨았던 꿀풀이라 부르는 하고초(夏枯草)도 많이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좌측으로는 회천(금오)지맥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의

내리막길을 가다가 분기점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행여...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나 싶어서 시멘트 담벼락으로 올라간다

시멘트 옹벽으로 오르는데, 도로 좌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8년전에 걸었던 빌무산(783.6m) 얼굴을 내민다

 

김천시 조마면과 성주군 벽진면의 경계에 있는 빌무산의 정상에는 3등

삼각점만 있을뿐 그냥 밋밋한 산일 뿐이다...성주군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성주군의

뒷벽인 빌무산(一名 乞手山 784m)과 그 북쪽 능선의 별뫼고개(星山峴)로 이어진

김천시와 접경하여 동쪽은 초전면, 남쪽은 성주읍과 대가면, 서남쪽은 금수면과

인접해 있는데 북부는 산악지대이고 그 곳 비지산에서 발원한 이천(伊川)이

중남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며 동남으로 귀류한다

담벼락을 올라서니 이중으로 된 철조망으로 인해 정상으로

가는 길은 틈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안쪽에 녹슨

철조망이 있고, 바깥쪽은 새로된 철조망이 있어서 들어간다는

자체가 불가능 하다.

윗쪽으로는 중계소 송신탑이 보이건만 갈수가 없으니

아쉽고 kt란 통신회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선답자의 시그널 한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꽤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소득이 없어서 정상을 포기하고

길이 없는 능선 내려간다

빛바랜 이 대장의 흔적도 만나고...

염속봉산 중계소에서 살티재로 내려가는 시멘트 도로가 보이고...

소득도 없이 20분을 넘게 철조망과 씨름을 한 다음에 도로로 내려선다

'

'

' 집에와서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니 회천(금오) 지맥길 갈림길에서 코너 돌기

 직전에 시멘트 계단으로 올라가면 염속봉산 표시석이 있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무인산불감시초소(09:22)

중계소로 향하는 시멘트 도로 옆에 컨테이너로 된 산불무인 감시카메라가 있고,

그 아래에는 망루로 된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도로를 가로질러 본격적인 백천(칠봉)지맥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도로를 가로 지르니 산불감시초소 망루가 보이고 바로 앞에는

잠시후에 오를 적산이 보이며, 저 멀리 흐릿하게는 칠봉산이

보이고, 오늘 걸어야 할 마루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망루 아래로 내려간다

아쉬움이 많이 남아 다시한번 염속봉산 정상을 바라보지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던지 중계소탑마저 숨어 버렸다

산불감시초소 망루 아래로 내려서니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2016년 12월에 산으로, 진권아우와 같이 걸었던 감천 남(신산경표상:영암)지맥

능선에 있는 영암산과 선석산이 쌍봉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산불감시초소 망루 아래로 내려서니 벌목후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소나무 가지들이 초반부터 태클을 걸면서 텃세를 한다

벌목지에서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을 당겨본다

가야산 호랑이 불렸던 퇴옹당 성철 큰스님의 주석했던 백련암이

저 산 어느 골짜기쯤일까?...큰 스님은 환갑을 맞은 해부터 

‘스스로 물러난 늙은이’라는 뜻의 퇴옹(退翁) 호를 붙이셨다. 

 

큰 스님이 계셨더라면 윤리가 사리지고 五濁惡世에 물든 중생들에게

과연 어떤 죽비를 내리 치실까...생전에 조계사에서 딱한번 친견했었는데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으니...末法시대 큰 스님이 너무 그립습니다  

 

黃河西流崑崙頂 (황하서류곤륜정) 

황하는 역류하며 곤륜산을 후려치니


日月無光大地沈 (일월무광대지침)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잠기네


遽然一笑回首立 (거연일소회수립) 

넉넉히 웃으며 고개 돌리고 서 있나니


靑山依舊白雲重 (청산의구백운중) 

청산은 옛날 그대로 흰 구름속에 있네.

 

성철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 오도송(悟道頌)이란... 고승(高僧)들이 불도(佛道)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가(詩歌)를 말한다

당겨본 영암산의 모습

 

영암산(鈴岩山:784.7m)은 경북 김천시 남면과 성주군 초전면, 칠곡군 북삼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3개의 암봉으로 되어있으며, 1917년 조선지형도를 보면

鉢巖山(발암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예전의 성주의 읍지(邑誌)인 경산지(京山誌)나

성산지(星山誌)에는 매달린 방울을 뜻하는 현령산(懸鈴山)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말로는 방올암산(方兀音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방울암산이라 하는 것은 성주쪽에서 바라보면 정상에 있는

3개의 암봉이 흡사 방울처럼 보인다고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바위가 많아서

바위암산, 바위산인 금오산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바우남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숲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다가...

뚜렸한 등로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마치 국민학교 시절에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듯

희미한 등로를 찾아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09:35)

뫳돼지 쉬키들이 맥길을 마구 파헤쳐놨다...이노무 쉬키들...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의 흔적들...똑바로 가고 있다는 건가?

오늘 산길은 갑자기 행선지가 바뀌면서 공부를 안하고 와서

마치 장님 문고리 잡듯 감각적으로 걸어야 할 듯 싶다

아무도 찾지않은 길...고요한 적막감만 흐르는 이 길을

나홀로 호젓하게 걸어가는데 난 이런 길이 참으로 좋다

460.4m봉(09:48)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지고...

등로 좌측 아랫쪽에는 남평문공과 유인 해주오씨

묘비가 보이지만 봉분은 보이지가 않는구나

묘지 근처에서 보기가 그리 쉽지않은 흰색꼬들배기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갈림길(09:50)

등로가 보이지 않은 소나무 숲사이로 내려간다

 

급하게 내려서니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보인다

임도(09:53~10:05)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좌)와 금수면 후평리(우)의 경계에 있는 임도이다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 대야마을쪽의 모습

벽진면 마을 유래에 대한 자료를 보면 봉학리에 있는 대야(大夜)마을은 1600년경

이광목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 入鄕하였는데 마을 뒤에 수동산이 있어 등(燈)은

어두운 밤에 사용한다는 뜻에서 한밤(大夜)이라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경북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살티마을쪽의 모습

염속봉산 서사면 아래에 있는 살티 마을은

 바람이 세어 산의 모래가  많이 날리며 멀리서도 모래흙이

보인다 하여 살티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사현(砂縣)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침에 김천구미역 앞에서 아침을 해결했어야 했는데

쥔장의 출타로 인해 식사를 하지 못하고 이곳까지 왔더니만

가 많이 고프다...편의점에서 산 김밥한줄로 아침을 해결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행복한 기다림  / 이해인.  

 

뿌연 안개가 하늘로 올라가는 새벽

초록빛으로 덮인 들길에 서서

행여 찾아올지도 모르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혹시 내가 보고싶어

이곳을 찾아 올지도 모르는

그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설레임과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난 오늘도 그 자리에 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아픔을 안고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그대를 기다리렵니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트랙상의 등로가 마치 둘레길처럼 좋다

지난달에는 강원도 정선지역의 산을 집중적으로 타면서

워낙 개고생을 한 탓인지 이런 편안한 등로를 만나니

갑자기 불안해진다...더군더나 공부를 전혀 안하고

온 맥길이라 트랙을 자주 보는데 트랙상으로는 제대로 가고 있다

고개(10:12)

옴팍한 고개가 나오고 우측에는 맥길에서 벗어나 있는 족보있는

523.0m봉이 있고, 지맥 마루금은 좌측으로 꺽어져 적산으로 향한다

고개를 오르자마자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10:14)

그러면 그렇지...지맥길인데 그럴 일이 없제

갑자기 등로는 사라지고...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에 숨어버린 맥길...그러나 잡목이 없어서 걷는데는 큰 불편이 없다

487.3m봉(10:19)

487.3m봉으로 올라서니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조금전에 만났던 고개처럼 옴팍한 안부고개를 만난다

안부고개(10:22)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황산마을(좌)과 벽진면 봉학리 대야마을(우)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좌,우 양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뚜렸하다

안부 고개로 올라서서 동남쪽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갈림길(10:27)

좌측으로 이어지는 벽진면 봉학리 대야마을로 이어지는

등로를 버리고 Y자 형태의 길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옴팍한 등로를 지나는데...

새로운 임도를 개설하려는지 마구 파헤쳐져 있는 임도로 내려선다

둘레길을 만드려고 그러는가?

느림보 산꾼이 걷기는 편하지만

망가지는 山河를 바라보는 산꾼의 맘은 편치가 않다.

 

개발이란 미명아래 망가지는 자연의 폐해는

고스란히 세속 인간들이 받는다는 걸, 왜 모를까... 

공사 현장 옆의 소나무  아주 높은곳에 부뜰이님의 격려문구가 걸려있다.

예전에 이곳이 오르막의 힘든 곳이었나?...감사합니다.

지금은 양넘 지갑줏듯 편하게 지나갑니다...근데 저 높은곳에 어케 올라 갔나요

공사 현장 윗쪽의 능선으로 올라가니 무명봉이 나온다

 487.9m봉(10:41) 

갈림길(10:45)

마구 파헤쳐진 임도는 우측 내리막길인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로 향하고, 지맥 마루금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공사 현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올라서니 적산이 나온다

적산(510.1m:10:48)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와 금수면 후평리, 어은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능선으로

연봉산(704.9m)과 염속봉산(연속산, 679.3m), 매적산(496m)과 연결되어 있으며,

산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오지산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전형적인 육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 곳인 적산마을에서 붙여진 듯

한데 적산마을은 적산사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산마을에 있었던 적산사는 조선 전기 고승(高僧) 학조(學祖)스님이 세운 절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 이곳에는 기와 조각과 석축(石築) 일부가 남아 있다

인증샷

적산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향하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걸려있어서 알바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따가운 햇빛을 받으면서 소나무숲 사이를 향하는데

가을철에는 송이가 나올법한 곳으로 보이며, 요즘

산에서 한참 극성을 부리는 진딧물이 나뭇잎에 많이

떨어져 있어, 끈적끈적한 진딧물에 몸뚱아리에 닿으니

찝찝하다

등로는 보이지 않으나 지맥 산행의 짠밥이 얼만데...

트랙을 확인하면서 감각적을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0:55)

안부에서 올라서니 우측이 송이밭인지 아니면 약초재배지인지는

몰라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식인듯 하얀 노끈이 산꾼의 길을 막는다

갈림길(11:00)

우측의 뚜렸한 임도 방향으로 약초재배지

노끈은 그리로 향하고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무명봉(11:02)

무명봉으로 내려서자마자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다시 만난다

다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마치 迷路를 걷는 느낌이다

등로는 그리 까칠하지 않으나 어디로 틸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왔다리 갔다리하는 등로 때문에 바짝 긴장을 하면서 걷는다

능선을 따라서 걷다가 다시 길이 잘보이지 않는 내리막길로 향한다

그 넘의 비가 내리는다는 일기예보로 갑자기 산행지를

바꾸면서 공부를 하지않고 들어선 지맥길이라 긴장의

끈을 멈출수가 없구나

또 다시 등로는 좌측으로 꺽어져서 동쪽으로 향한다

470.6m봉(11:08)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리막으로 향한다

안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서 맥길은 좌측으로 향하는데

등로 우측 아래에는 봉분은 없고 와석 형태로 조성된 남평문씨

가족묘가 보인다

남평문씨 가족묘(11:11)

남평문씨 가족묘로 내려왔다가 다시 능선으로 복귀한다

417m봉(11:12)

생각보다 마루금을 편하게 걷는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을수가 없다.

맥길이란 언제 험한길로 변할지 모르니까

갑자기 숲은 사라지고 퇴악볕 아래로 내려서니....

 장군의 모습을 한 무인석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절충장군 남평문공 묘지로 내려선다

절충장군 남평문공 묘(11:16)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조선 시대정삼품(正三品당상관(堂上官) 무관 품계

어모장군(禦侮將軍) 위로 1392년(태조 1) 7월 조선건국 직후 처음 관제를 정할 때

문산계에서 독립된 무산계 가운데 가장 높은 관계로 규정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 당상관으로 되었다... 한편, 무반관원(武班官員)으로서

절충장군에서 승진하여 종2품 이상의 산계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문산계에 따르고 있다

당상관(堂上官)은 의관(醫官)·역관(譯官) 등 기술관, 또는 환관(宦官)

등에게도 간혹 제수하였으나 이는 특례이고 대부분 양반이 독점하으며,

조선시대의 관직 가운데 최고의 관직으로 임금과 함께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 3품의 이상의 품계로,문반계는 통정대부

(通政大夫), 무반계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상이며, 당상관이 아닌 그 아래

품계는 무조건 당하관(堂下官)이었다

 

당상관(堂上官)과 당하관(堂下官)의 차이는 엄격했으며 부르는 칭호부터 달랐는데,

보통 당상관(堂上官)은 '영감(令監)'이라고 부르지만, 딩관(堂下官)은 '나으리(나리)'

또는 '사또'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평문공 묘지 아래로 내려오니 묘지로 이어지는넓은 임도가

나오고 먼지가 나풀거리는 임도를 따라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고개(11:19)

옴팍한 고개가 나오고 직진으로는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漁隱池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이고 맥길은 좌측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올라서니..

뫳돼지의 체력단련장(?)인지 소나무 밑둥치가 홀랑당 다 까져 버렸다

소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시멘트 임도 삼거리가 나온다

임도삼거리(11:25~40)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우)와  벽진면 외기리 내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 삼거리에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가 나오는데, 정오가 다되어

가는 시간대라 그런지 날씨도 상당히 덥고, 조금전의 내림길의

흙먼지 때문인지 목이 답답하다...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면서 꽤나 많은 시간의 휴식을 취한다.

 

근데 반대쪽에서 잔차족인지 MTB 잔차를 타고 외기리쪽으로 내려가고

잠시후에 낡아빠진 1톤 트럭이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 나를 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취조하듯 물어본다...범여 曰... ‘산에서 내려왔소’ 하니까, 처음에는 뭔 뜻인지

알아 먹지를 못하고, 재차 묻길래 퉁명스럽게 서울에서 왔는데 그건 왜 물어요

하니까...서울에서 이곳까지 왜 왔느냐고 또 묻는다...내 발로 내가 다니는데

그것까지 얘기해야 하냐고 하니까...그냥 가버린다...별 희안한 넘을 다본다 

다시 길을 떠난다...외기리 뒷쪽 저 멀리에 2016년 겨울에 진권아우와

걸었던 빌무산이 나에게 잘가라는 듯 얼굴을 쭉 내밀고 있다

앞에 보이는 산이 495.9m봉으로 지맥 마루금은 직진의 416.9m봉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조금 올라가보니 등로는 칡넝쿨과 잡목으로 인해

틈이 보이지 않는다... 495.9m봉은 족보있는 봉우리도 아니라서

다시 임도로 되돌아 나온다

임도로 내려와서 트랙을 확인하니 우측의 임도를 따라서 조금만 가면

마루금과 합류하기에 495.9m봉을 쳐다보며 눈팅이질만 하고 띵가 묵는다

예전의 범여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세월가고 나이먹어 체력이

떨어지니 방법이 없구나...나훈아 노래의 가사처럼, 고장난 벽시계는 멈췄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으니 우짜면 좋노...

임도를 따라서 가는데 미세먼지를 뒤집어 쓴 가야산을

바라보면서 잠시동안이지만 편하게 길을 걷는다 

등로 우측 아래는 벌통만 보이지 쥔장은 보이지도 않고 주변에

벌들이 없으니, 양봉 농사를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양봉업을 하는 분들이 전국에 雨後竹筍처럼 생겨난 태양광

패널의 전자파로 인해 농사를 망치신 분이 많다고 하는데 저 분도

그 피해자중의 한 분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495.9m봉에서 내려오는 마루금과 다시 조우를 하고...

금새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11:47)

숲속으로 들어서자 마자 갈림길을 만난다

갈림길(11:52)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금수면 어은리

적산마을로 내려가는 등로이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등로는 희미하고 고도를 조금씩 낮춰 가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370.4m봉(11:54)

매주 걸어면서도 늘 가슴앓이를 해야하는 이 길...

산에 대한 범여의 짝사랑은 언제쯤 끝이나려나...

5월에 걸었던 강원도의 산길과는 달리 남쪽이라 그런지

산속이라도 바람한 점 없으니 생각보다 날씨가 상당히 덥다

갈림길(11:58)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안부(12:01)

별의별 넘이 시비를 걸어되면서 텃세를 하지만 

니네들이 산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멈추지 못할끼다

무명봉(12:04)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서 3분정도

걸으니 족보있는 393.5m봉 정상에 도착한다

393.5m봉(12:07)

지맥길은 약간 좌측으로 휘어져 이어지고...

고사리밭(12:11)

고사리밭 아래로 내려서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진다

상수리 나무 이파리는 진드기물로 융단 폭격을 맞은듯 하다

오늘 산길에 바람 한 점이 없다.

산길에서 간간히 불어주는 바람은 홀로 걷는

범여에겐 많은 힘이 되는데 오늘은 왜 이리도 바람이 인색하냐...

381.4m봉(12:15)

맥길은 381.4m봉인 무명봉에서 우측의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내리막길에는 공부도 안하고 무대포로 들이미는 범여가

걱정되는지 부뜰이님 부부의 시그널이 길 안내를 해준다

...복받을깁니다

 

시누대숲을 통과하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2:20)

안부에서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오고 마루금은 우측 방향으로 이어진다

다시 급하게 좌측으로 이어지고...곧이어 안부가 나온다

안부(12:23)

주위에 마을이 있는지 등로는 뚜렸한데...

오늘 간간히 보이는 선답자의 시그널중에 유난히 

구미 옹달샘이란 분의 흔적을 자주 만난다...고맙심더

안부를 지나서 마루금은 동남쪽으로 이어진다

242.6m봉(12:26)

242.6m봉 아래에는 묘지가 풀섶에 묻혀있다

등로 좌측 아래의 나뭇가지 사이로 흐릿하게 건물들이 보이나

뭔 건물인지 식별이 안되어 트랙을 확인하니 적산사라고 표기가

되어 있어나 등로에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다

256m봉(12:30)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서 내려가니...

빛바랜 선답자의 시그널의 문구 가슴에 와 닿는다.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어쩌면 

목적이 나와 같을까...잘 배웠습니다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잘 관리된 묘지가 마루금 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다

성산여씨 가족묘(12:32)

성산여씨 묘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등로가 열리고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창고같은 건물들이 보인다

숲을 빠져나와 절개지로 내려서니 시멘트 임도가 나온다

언내고개( 12:37)

경북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에서 어은리 언내고개로 넘어가는

길인데 좌측 아래쪽에 언내마을이 있어서 산꾼들이 언내고개라

부르지만 공식적인 지명은 아니다

 

어은리(漁隱里)는 약 300여년전에 김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금물방 또는 어천곡(漁川谷)이라 하였고, 약 280여년전 김중익이라는 訓練副正(

부정(副正)은 조선시대, 중앙관서에 설치한 종3품의 관직)이 어천곡에 고기가 많이 숨어

있다고 하여 어은이라 명명했다고 하는데, 언내, 엇내, 어은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맥길은 좌측의 언내마을쪽으로 가다가...

잡풀이 무성하여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우측의 임도로 올라간다

뫳돼지의 사우나탕

마루금은 우측 능선인 듯한데 트랙상으로는 임도가

마루금으로 되어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울고싶은데 빰 맞은 꼴이랄까...ㅋㅋㅋ

산딸기 나무의 태클이 너무 심하다

안부고개(12:45)

언내고개에서 같이온 잡풀로 뒤덮인 임도는 직진의 아래의 금수면 면소재가 있는

광산리 골마마을로 내려가고 맥길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골마[남계] 마을은 마을 옆에 푸른 시냇물이 흘러서 ‘푸를 남(藍)’ 자에

‘시내 계(溪)’ 자를 써서 남계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잡풀이 무성하여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우측의 임도로 올라간다

 268.9m봉(12:53)

밋밋한 봉우리에 올라서니 대구산꾼 와룡산님이란 분이

 268.9m봉 (고루산)이라 표기를 해놨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무명봉에 불과하며, 고루산은

지도상에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나 고름재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 듯 하다

268.9m봉에서 고름재로 내려가는 길은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고, 낙엽이 수북히 깔려있는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한참을 버벅거린  끝에 고름재로 내려선다

고름재(13:04)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와 광산리를 잇는 2차선 도로 30번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우측의 광산리쪽의 내리막 도로 옆에는 가야실버 요양원이 자리를 잡고있다

 

고름재란 지명은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적산마을 남쪽 고루산(260m)에는 할미산성의

전초망루가 있었고, 이 누각에는 북을 달아 산성과 요소에 북을 울려 교신했다고 하며

고루(북다락)가 있어서 고루산이 되고, 고루재를 고름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상의 실제 고름재는 이곳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도로 우측으로는 가야실버 요양원이  보이고 그너머로 가야산이 얼굴을 내민다

고개 아래에 마을이 살짝 보이는데 금수면 소재지가 있는 광산리(廣山里)이다

 

성주와 관련한 지지에 조선 전기가 넘어가면서 이곳에 ‘광대원(廣大院)’이라는 역원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산(廣山)’은 여기에서 따온 지명으로 추정된다. 광산1리의

자연 마을로 원터[주막뜸·죽전(竹田)·광대원], 평촌(坪村·平村), 골마[남계(藍溪)]가 있고,

광산2리의 자연 마을로 덕말리[덕촌(德村)], 광산3리의 자연 마을로 오당(吾堂·梧堂)과

중평(中坪), 동산(東山)[외티]이 있다.

고름재에서 바라본 금수면 어은리의 모습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낙동강의 상류가

굽이져 흐르는 곳이며 내가 엇비슷하게 흐르므로 어은리라 하였다고 하는데

자연마을로 엇내, 적산, 매밋골, 노루목, 정자마을 등이 있으며, 엇내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어은리와 같으며, 적산마을은 적산사가 있던 곳이고,

매밋골 마을은 말의 발처럼 생긴 산 밑이 된다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노루목마을은

지형이 노루의 몫과 비슷하다 하여 불리되었고, 정자마을은 백운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루금은 어은리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의 임도로 올라간다

가던길을 뒤돌아 보니 조금전에 지나온 지맥 능선 아래로

적산(뒤)마을과 어은(앞)마을이 골짜기에 숨어 있다

 엉겅퀴꽃 / 유안진

 

천년 묵은

소쩍이 쉰 목청도

한고비 잦아진 채

지쳐 잠든 사이

 

잠꼬대 잠꼬대로나

불러보는 이름이듯

달빛으로 크는 엉겅퀴풀

 

野談처럼 묻어나는

짙고 독한 꽃내음엔

벌 나비도 취하여 나자빠져라

 

도깨비불 쓰러지는 밤에만

꽃피는 엉겅퀴

수유리 깎은 돌밭에서만

꽃진 흐르는 엉겅퀴

임도이긴 하지만 잡풀이 무성하여 걷기는 불편하다

인동초(忍冬草:사랑의 굴레, 우애, 헌신적 사랑)

꼭두서니목 인동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흔히 인동초라고 불리고, 우리나라

전역의 숲이나 구릉지 등에서 자라며, 줄기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 길이가

5m에 이른다. 잎은 넓은 피침형 또는 난형으로 마주 나며 끝은 둔하다.

꽃은 6~7월경에 흰색으로 피었다가 곧 노란색으로 변하며, 한방에서 잎과 꽃을

이뇨제·해독제·건위제·해열제·소염제·지혈제로 쓴다

 

인동과에 속하는 반상록 덩굴식물. 학명은 Lonicera japonica Thunb.이다.

인동과 겨우살이덩굴이란 이름은 겨울에도 줄기가 마르지 않고 겨울을 견디어내

봄에 다시 새순을 내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금은화란 이름은 흰꽃과 노란꽃이

한꺼번에 달리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한방에서 잎과 꽃을 이뇨제·해독제·건위제·

해열제·소염제·지혈제로 쓰며, 인동초(忍冬草)라고 불리는 것도 인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곤경을 이겨내는 인내와 끈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나뭇가지가 전혀없는 임도의 햇빛은 한여름 못지않게 따갑다

고름재(?:13:15)

다음 지도에는 이곳을 고름재라 표기를 해놨다

고개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좌측에는 부도가 났는지

아니면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 수확을 포기했는지 관리가 안된

매실농장을 끼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농장 쥔장의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농사를 포기한 농장을

좌측에 두고 능선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마루금을 이어간다

무명묘지가 있는 이름없는 봉우리...네 이름이 무명봉이라 했던가?

“무명”이라 붙은 지명이 어디 너뿐이겠느냐!...무명초도 있고, 국립묘지에

가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무명용사도 많고 많으니 너무

서러워 말거라

무명묘지에서 잡목을 헤치고 남동쪽으로 치고 내려가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낙엽속에서 피고 있는 순백색의 반가운 매화노루발을 만난다

매화노루발(꽃말:소녀의 기도)

노루발과 매화노루발속의 상록 여러해살이 풀로 꽃모양이 매화를 닮아 곱고

잎맥은 노루발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풀차”라고도 한다.

 

매화노루발은 소나무나 상록수림 아래에서 잘 자라는데 다른 식물들은 소나무나 상

록식물들에서 나오는 성분과 해가림으로, 생육에 방해가 되는데 매화노루발은 이런 곳에

적응해 살므로 다른 식물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자라는데, 실제로 매화노루발은 상록식물과

공생하는 곰팡이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일종의 부생식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화노루발은 전국의 산야에서 자라는 식물로 우리나라, 일본, 타이완, 중국, 사할린 섬

등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꽃은 흰색으로 꽃자루 끝에 1~2개 정도가

아래를 향해 피는데 잎은 어긋나게 돋으며, 두껍고  잎 끝은 뾰족하며

잎 밑 부분은 둥글고 잎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톱니가 조금나 있으니

털은 없으며, 줄기는 곧게 자라다가 가지가 갈라지고 키는 10cm 정도 자란다. 

열매는 둥근모양의 삭과(익으면 껍질이 벌어져서 튀어나오는 열매)로

암술머리에 붙어 있다.

넓은 임도같은 곳에 잡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는데 등로는 보이지 않는다.

여름 산이니 그러려니 하고 편하게 마음을 먹고 걷는다

희미한 임도를 따라서 가는데 선답자의 시그널이 산꾼을 안내한다

안부(13:30)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서 동쪽으로 맥길은 이어지는데

능선 우측 아래에 풀섶에 묻혀있는 묘지가 보이고 이쁘게

피어있는 으아리꽃을 만나는데, 내 불알친구 淸眼이 유난히

좋아하는 꽃이다

으아리꽃(꽃말:순결한 사랑)

고추나물·선인초(仙人草)·마음가리나물이라고도 하며, 산기슭에서 자라는데

길이가 약 2m로 덩굴이 잎자루로 감아 올라가는데 잎은 마주 달리고 5∼7개의

작은잎이 있는 깃꼴겹잎이며, 작은잎은 잎자루가 있고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양면에 털이 없다. 잎자루는 덩굴손처럼 구부러진다.

꽃은 6∼8월에 흰색으로 피고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취산꽃차례로 달리는데,

꽃받침조각은 4∼5개이고 길이 1.2∼2cm로서 꽃잎처럼 생기며,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의 긴 타원형이며, 수술과 암술은 여러 개이다... 열매는 수과(瘦果)

로서 달걀 모양이고, 9월에 익으며 털이 난 암술대가 꼬리처럼 달린다.

어린 잎은 식용하고 뿌리는 이뇨·진통·통풍·류머티즘·신경통에 사용하며,

한국·중국·우수리강·헤이룽강에 분포한다.

비슷한 종 가운데 긴잎으아리(for. lancifolia)는 잎이 바소꼴이고 꽃이 약간 크며

꽃받침 길이가 12∼16mm이며, 큰위령선(var. koreana)은 으아리보다 키가 크고

취산상 원추꽃차례이며 잎맥이 튀어나와 있고 잎축이 약간 연하며 한방에서

뿌리를 통풍에 쓴다.

잡풀이 무성한 임도 아래로 내려서니...

금수면 명천리 덕산소류지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쥔장 잘못만난 범여의 두 다리가 잠깐의 호사를 누린다

안부(13:35)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 윗쪽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올라가보니 잡풀이 무성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도 안보이고

선답자들도 대부분이 편안한 도로로 향했는지 시그널 하나도 없다.

안부 뒷쪽으로 보이는 도장골산(526.8m)을 똑닥이로 당겨본 모습

도장골산은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와 금수면 광산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의 동쪽에 금수면의 소재지인 광산리가 있으며, 서쪽에는 대가천을 막은 성주호가 있다.

북쪽으로 남티재가 있고 남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개고재까지 이어진다. 도장골산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사료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도장골산의 이름은

산이 깊숙하여 도둑의 소굴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도로 우측이 마루금이지만 편안한 시멘트 도로를 따라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덕산소류지(앞)와 명천리(明川里)의 모습

성주군 금수면에 속하는 명천리는 ‘명천(明川)’의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없으나 자연 마을인 대내[죽천(竹川)]에서 나온 이름이 아닐까 추측된다.

 

명천1리의 자연 마을로 대내[죽천]와 새터[신기(新基)]가 있고, 명천2리의 자연 마을로

웃수름재[수음(水音)·덕산(德山)]와 아랫수름재[화음(禾音)], 회봉(回峯), 소도굴[소도리

(所道里)·소도골·소도(蘇塗)]이 있다.

아파트가 보이는 성주읍내도 당겨본다

성주 명천리 고분 안내판 뒷쪽에서 내려오는 마루금과 합류하여...

성주 명천리 고분 안내판

에그네재에 도착한다

에그네재(13:39)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서 금수면 소재지가 있는 광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주변에는 명천리 고분군 표지판과 넓은 공터, 2차선도로가 지나가는데

도로명 주소는 명천로이고,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교통이 뜸한 고개이다.

 

마치 외국의 지명같은 에그네재란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단지 고개의 좌측 아래에 있는 광산리 웃덕말 마을에 있는 저수지 지명이

에그네소류지인데,  웃덕말리는 1572년 조선 선조때 김연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사방에 산이 둘러 쌓이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번창해서

德이 많은 부락이라고 해서 德村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명천리 고분군은 금수면 명천리 에그네재를 중심으로 주변 능선 정상부에 분포된

대형 봉토 고분군으로 할미산성 또는 노고산성으로도 불리는 명천리 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싼 산정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 정상부는 돌로 쌓고 길게

이어지는 북쪽 능선에는 흙으로 쌓은 방어용 산성으로 둘레가 1km 정도 되는데 산성은

높고 앞이 훤히 트여 가야산과 대가천 하류의 고령 방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 내부에서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채집돼 성산가야 세력이 대가야를 방어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산성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던 능선은 다시 동서로 방향을 바꾸며

돌아가는데 동서능선 정상부를 따라 봉토 직경 20~30m의 대형분 7기가 10~20m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서 있고, 산성 쪽으로 연결된 남북능선에도 10~20m의 중형분과

소형 석곽분이 밀집 분포돼 있다.

 

이곳 성주지역에는 성주읍의 성산성과 성산리 고분군, 월항면의 봉화산성과 용각리 고분군,

금수면의 노고산성과 명천리 고분군 등 3곳의 대형 고분군이 존재하면서 성산가야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도로를 가로질러 우측의 넓은 공터를 점령하고 있는 잡풀더미쪽으로 향한다

잡풀을 헤치면서 보이지 않은 등로로 올라 섰다가...

안부를 지나서...

 동남쪽으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무명봉(13:50)

무명봉을 지나면서 넓은 임도를 만나는데

좌측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를 만나서

직진으로 향한다

고개(13:55)

좌측에서 올라오는 급경사 오르막의 시멘트 도로가 보이는데

저 아랫쪽이 지도상에 표기되어 있는 웃수름재이다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는 웃수름재는  또는다른 지명으로 덕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덕산은 마을의 숲 이름인 봉소림의 ‘봉(鳳)’ 자가 봉황을 뜻하는데,

봉황이 덕(德)이 많은 동물로 알려져서 그 덕(德) 자를 따서 ‘덕산(德山)’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약 300여년전에 박수목이라는 선비가 입향하여 골짜기 계곡 옆에 집을 지어 놓고

낮에는 열심히 밭을 갈고 밤에는 부지런히 책과 씨름하며 과거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낮에 힘들게 일을 하다 보니 밤이면 잠이 쏟아졌고, 그때마다 밖으로 나가

계곡물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들어와 공부를 하였다...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여 금의환향 후

집 옆의 계곡물을 바라보며 물소리로 잠을 깨우던 옛일을 회상하며 ‘수음(水音)’이라 하였는데

이후 수음이 ‘수름’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뫳돼지를 비롯한 산짐승의 횡포로부터 선조들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철조망에다 철대문까지 달아놨다...그려!

조상들한테 잘해야 복을 받는깁니다

묘지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마루금은 임도로 이어진다

얼마만에 맛보는 오들깨(오디의 경상도 방언)인가.

임도 근처에 있는 커다란 뽕나무에 오들깨가 지천으로

달려 있기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오디를 따서 입으로

넣으면서 어릴때의 옛 추억을 생각한다

동쪽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비룡산과 각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계속되는 넓은 임도...고도차가 없는 편안한 길이다보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데, 범여의 주특기(?)인 졸면서 걸어가는 布行이 잠시 진행한다

걷다가 눈을 떠보니 임도옆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가는것 봤어...한참동안 산딸기로 비타민을 보충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와 그 뒷쪽으로는 성주읍내가 보인다

 

성주는 초기 국가 시대 성주 지역에 있었던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耶)는 고대 시기 성주 지역에 있었던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인데,

일명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성주 지역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조(五伽耶條)’에 다섯 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 지역으로

기록된 이래 성산가야의 옛땅으로 알려져 왔고, 또 성주 지역에 분포한 고분군을 성산가야의 고분으로

이해하였으나 『삼국유사』에 더 이상의 내용은 없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성주의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에 “성산군(星山郡)은 본래 일리군

(一利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개명한 것이며, 오늘날의 성주군 지역에 해당된다.”는 내용이

보일 뿐...그 외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없어 성산가야에 대한 사정은 더 이상 상세하게 알 수 없다.

* 초기 국가 시대 낙동강 하류에 있던 여섯 개의 가야국이 있었는데  곧 금관가야(金官伽倻:지금의 김해),

   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의 함안), 고령가야(高寧伽倻), 대가야(大加耶:지금의 고령), 성산가야

   (星山伽倻:지금의 성주),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가 있다

편안한 임도를 한참을 걸어왔다

바로 아래에 보이는 금수면 명천리 우측으로는 땅고개 근처에 있는

대가면쪽의 참외 비닐하우스들이 보이고, 그 뒷쪽에 솟은 산이 칠봉산이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성주읍내 좌측으로는 영암지맥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 멀리 영암산과 선석산, 비룡산, 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미세먼지만 아니면

그림이 환상적일 듯 싶다...근데 많이 아쉽다

한동안 임도를 따라서 걷다가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에 있는 315.8m봉으로 향한다...이 봉우리를 포기하려면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서 걸어도 된다

기린초의 환영을 받으면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 315,8m봉의 전위봉인 무명봉에 올라서니 

무성한 잡목이 支脈길의 本色을 드러내면서 꼬라지를 부린다

그래...野性을 잃어버리면 안되지...

무명봉(14:10)

맥길이 남서쪽으로 향하면서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빈틈이라곤

보이지가 않는구나...정면 돌파를 하자니 몸뚱아리가 피를 볼 것

같아서 우측의 사면길을 돌아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능선으로 올라서니 준,희쌤의 산패가

있는 315.8m봉 정상이 나온다

전인산(315.8m:14:15)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와 광산리, 대가면 도남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국토지리원 정보원의 지도를 비롯해서 전인산이란 표시가 없는

그냥 315.8m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나 준.희쌤의 산패에는

전인산이라 표기가 되어있다.

 

이 지역 신문인 성주신문이라 곳의 자료를 찾아보면...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에는 자리섬·성곡·전인이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다... 동네 뒤에는 산성이 있는데 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으로 '자리섬'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성곡'이라 부른 것도 '성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리섬'의 다른 설명으로는 마을의 위치가 산자락이 마을을 좌우로 둥글게

감싸고 있는 곳에 마치 섬 모양을 한 자리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을 뒤에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산성이 있는데 전인이란 장군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전인산성의 전설이 있어서 '전인'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전인산성은 할미산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지명의 유래는 전인마을

에서 차용된 듯 하다

전인산이라 부르는 정상에서 잠깐 머물다가 좌측으로 내려간다

전인산으로 오르기 위해 조금전에 헤어졌던

임도로 내려서서 할미산성으로 향해서 걸어간다

빛바랜 할미산성 등산로 안내판을 만나는데 알아볼 수가 없구나

이곳 성주군청의 유적지의 몰이해에 관한 인식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잠시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할미산성의 흔적이 있는 296.7m봉에 도착한다

296.7m봉(14:20)

할미산성(14:22)

칠봉지맥은 고대에는 성산가야(지금의 경북 성주)와 대가야(지금의 경북 고령)의

자연 경계선으로 기능하며 곳곳에 가야인들의 산성을 남겼는데, 성주 할미산성과

고령 의봉산성이 대표적인 칠봉지맥 상의 산성인데 성주 할미산성(전인산성이라고도 함)이다

 

한국고고학전문사전의 성곽봉수편에 실린 설명에 보루성 같은 느낌이었으나 답사 후

둘레가 1000m 내외의 비교적 규모가 큰 산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테뫼식이 아니라 가파른 동쪽 계곡으로 열린 포곡식 산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임

도로 인해 석축이 일부 훼손되는 했으나 북벽, 서벽, 남벽의 석축 대부분은 온전했다.

 

가볍게 보루성 답사로 여겼는데 의외로 훌륭한 대어를 건진 격으로 인생처럼 산성 답사

또한 대부분 기대한 산성은 실망스럽고 기대하지 않은 산성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보상 받은 것 같다...성주 할미산성은 대가야가 초축은 하였으나 대가야 멸망 후에도

이 산성은 신라에 의해 방어성 내지 통치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할미산성의 유래에서처럼 신라군의 중로 보급기지 역할을 했을 것은 자명하다.

흔적만 남은 할미성을 꿋꿋히 지키고 있는 노거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할미산성의 모습

노거수 앞의 직진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뚫고 나갈수가 없어서

우측을 엿보니 무너진 성곽사이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성곽 아래로 내려서니 급경사 내리막의 뚜렸한 길이 보인다

안부(14:28)

안부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마루금 등로옆에는 시누대가 있지만 태클은 걸지 않아서 편안한 걸음이다

시누대 지대를 통과하니 잡풀에 묻혀버린 묘지가 나온다

성주배공 묘(14:30)

성주배공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잡풀로 인해 길찾기가 참으로 난해하다

묘지로 올라오는 좌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향한다

고맙습니다

나무숲을 헤치고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보이고 

민가가 있는지 개쉬키들이 때창을 하면서 짖어대는데

귀가 따가울 정도이다...도로로 내려선다

자리섬 고개(14:35~50)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자리섬 마을(우측)에서 금수면 명천리 

아랫수름재라 부르는 화음(禾音)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지명은 자리섬 마을에서 차용한 듯 하나 공식적인 지명은 아니다

 

좌측의 명천리에 있는 화음마을은 약 250년전에 근면한 어느 농부가

개척한 마을로 벼가 소리가 나도록 잘자란다 하여 마을 이름을

화음(禾音)이라 하였다고 하며, 대가면 도남리에 있는 자리섬 마을은

동네 뒤에는 산성이 있는데 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으로 '자리섬'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좌측의 화음마을쪽으로 가니 RV 차량이 한 대있고 그 윗쪽에

농장이 있는데 여러마리의 개들이 때창을 하면서 지랄발광을 한다

도롯가 옆에 앉아서 수분 보충과 체력 안배를 위해서 가져온 이온음료와

두유 한개, 초콜렛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1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다음에 농장으로 향하는 편안한 길을 가려고 하니

쥔장인듯한 남자가 험상 궂은 모습으로 나를 째려보는데 괜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을 듯 하여 자리섬 방향으로 와서 좌측 절개지로 올라간다

농장 옆의 잡목을 헤치고 올라가니 등로는 보이지 않고...

큰 개 2마리가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들듯한 공포감을 조성한다

다행히 큰 개는 쇠사슬에 묶혀 있으나, 조그만 개쉬키는 쇠사슬이

풀린 채 나에게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 기세로 덤비는데, 나도 스틱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개쉬키의 공포에서 벗어나 빡센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빡세게 치고

올라서니 284.2m봉 정상이 나온다

284.2m봉(15:05)

대구의 와룡산님이란 분은 시그널에다가 회봉산이라

적어놨는데 지도상에는 그냥 284.2m봉이라 표기되어 있다 

 

회봉산(回峰山)은 등로 좌측 아래에 있는 명천리 회봉마을에 따온 듯 하며,

회봉마을의 유래는 학 한 마리가 날아와 마을 남쪽 산봉우리를 돌아서

날아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84.2m봉 정상에서 맥길은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마루금을 점령하고 있는 잡목의 강력한 태클로 인해서

틈이 보이지 않는데, 그 와중에서도 광주의 ‘일대구정’이라

적혀 있는 반가운 시그널이 맥길을 안내한다

잡목의 저항을 벗어나니 비로소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등로의

사면길로 이어지는 편한한 등로를 버리고 우뚝 솟아있는 능선으로

올라가 본다...편안한 길로 가도 되는데 뭐가 그리 궁금하여 능선으로

올라가는지 아마 이것도 지맥꾼의 병일 것이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길이 없는 능선을 올랐다가 좌측으로 향한다

249.7m(15:12)

비록 희미할망정 힘들지 않는 등로는 계속 이어진다

안부(15:14)

247.2m봉(15:21)

앙증맞은 암봉이 길을 지키고, 그 윗쪽의 누군가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갖다논듯한 철제의자 하나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247.2m봉에 우측으로 확 꺽어져 내려서면서 맥길은 이어진다

잠시지만 동쪽으로 향하는 맥길은 뚜렸하고...

잎이 방정인가?...편하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잡목의 강력한

태클이 시작되는데...하기사 맥길을 걸으면서 이런 일이야

수도없이 많이 만나니 걱정 자체를 하지 않는다

225.7m봉(15:25)

등로가 보이지 않은 희미한 능선을 치고 나가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않는 낙엽이 푹신한 등로가 나오고...

등로 우측 아래에 풀섶에 묻혀버린 무명묘지 2기를 만난다

 

 

옴팍 파이고 좌.우측으로 등로가 뚜렸한 걸 보니

예전에 민초들이 넘나 들었던 안부 고개가 나온다

안부고개(15:21)

트랙을 확인해보니 우측의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중마지가 있는 중마마을에서

금수면 명천리 회봉마을로 이어주는 고개인데 좌.우 양쪽으로 등로는 뚜렸하다

 

옥화리에 있는 중마마을은 능골에 살던 김 씨와 이 씨가 서로 다툰 후 이 씨가 새뜸과

능골 중간 지점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하여 ‘중마[중리(中里)]’라 불렀다고 전한다.

무명봉(15:23)

동쪽으로 뚜렸한 등로는 이어지고 고도차는 별로

없지만  고만고만한 이름없는 봉우리를 자주 만나면서

범여의 몸뚱아리는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한다.

하기사 체력이 방전될 시간이지

무명봉(15:23)

무명봉을 내려서면서 안부가 나오는데 우측의 대가면 옥화리로

이어지는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좌측으로 향한다

215m봉(15:25)

215m봉 정상에서 직진으로는 성주읍내 방향인 대가면 금산리 방향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맥길은 숲이 우거져 등로 자체가 보이지 않는

우측의 급경경사 내리막을 향해서 땅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215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맥길은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아침에 오면서 내심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호령고개까지는 지금으로선

산행 자체가 힘들것 같다...갑자기 비 예보 때문에 산행지가 바뀌어

공부를 하지 않하고 온 탓에 주위를 두리 거리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고, 잡목에다 여름에 발걸음이 느려진 탓도 있다.

 

거기다가 볼 것 다보고 사진 찍을 것 다 찍어야 하니, 산행시간과

거리에 목을 매다는 맥꾼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내 생전에 이곳은

다시 올 일 없으니 한구간을 더 걷드라도 볼 것 다보고, 즐길것 다

즐기고 가는게, 진정한 산꾼이 아닐까...

212m봉(15:33)

등로는 보이지 않지만 무대포로 밀어 붙이면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내가 하는 이 짓거리가 苦樂竝行인지, 自繩自縛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내가 좋아서 미쳐 다니는 이 길...난 늘 즐겁기만 하다 

 

*  1, 고락병행(苦樂竝行)이란 괴로움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즐거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는 고사성어

   2,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제 줄로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자신이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이르는 말인데

      佛家에서는 제 마음으로 번뇌를 일으켜 괴로워함을 이르는 말을 말한다

땅고개가 가까워진 모양이다...차량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하고, 대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젓한 대나무 숲길이 나오고 트랙을 따라서 좌측으로 향한다

대밭을 지나니 풀섶에 몯혀있는 어느 문중의 공덕비가 보이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땅고개로 내려가는 절개지는 천길 낭떠러지에다

설령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옹벽 휀스가 있어서 통행이 불가능하다(15:44)

도로 끄트머리에서 본 땅고개와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모습

 

옥화리(玉花里)는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서남방향으로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금파면의 중리(中里)[중마],

오현(梧峴), 남전(藍田), 행화(杏花)골을 합하여 ‘옥화동(玉花洞)’이라고 하였는데,

‘옥화’의 정확한 유래는 추정할 수 없다.

 

옥화1리의 자연 마을로 새뜸[새터·신기(新基)]과 중리(中里)[중마], 능골[능곡(陵谷)·

오현(梧峴)]이 있고, 옥화2리의 자연 마을로 머징[머지이·뫼정·산정(山亭)·남전(藍田)]과

회화골[괴동(槐洞)·행화골·행화곡(杏花谷)·살구골·행촌(杏村)]이 있다.

새터는 대가면 금산리에서 옥화리로 넘어가는 국도 제33호선상의 당고개 너머에 자리한

마을로,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 ‘새터’라고 하였으며, 또 ‘새뜸’ 혹은 ‘신기(新基)’라고도 한다.

중리는 새터에서 북쪽으로 회봉산(回峰山)[284.2m] 골짜기에 있는데 국도에서 약 500m

떨어져 있으며, 능골에 살던 김 씨와 이 씨가 서로 다툰 후 이 씨가 새뜸과 능골 중간 지점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하여 ‘중마[중리(中里)]’라 불렀다고 전한다.

 

능골은 당고개에서 성주군 가천면 방향으로 국도 제33호선 오른쪽으로 100m 거리에 있는데,

마을 뒷산의 모습이 능(陵)같이 생겼다고 해서 ‘능골’이라 이름 붙였으며, 머징은 능골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건물을 뫼정(山亭)이라

부르면서 ‘머지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여(吕) 씨가 많이 사는데, 원래 여 씨는 중국 남전(藍田)에서 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남전’이라 불렀다고도 전하며, 회화골은 머징 맞은편 국도 제33호선 건너편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당산목으로 인식되어 온 오래된 느티나무[槻木] 때문에 ‘회화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옛날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골’ 또는 ‘행촌(杏村)’이라

불렀는데 음이 변하여 ‘회야골’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우측의 대나무숲속으로 우측을 바라보지만 

내려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 호젓한 대나무숲을 따라서 내려가니

아주 관리가 잘된 성주 이씨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을

모신 오현재(梧峴齊)란 제실(齋室)이 지친 산꾼을 반긴다

오현재(梧峴齊:15:55)

성주 이씨 유래와 시조 시조 이순유(李純由)... 성주 있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경주 이씨로부터 갈라져 나와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알평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성주 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은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신라 말의 재상

이순유(李純由)의 12대손이며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성주(옛 지명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장경의 아버지인 이득희는 태몽에서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 현 성주)에 떨어지는

것을 본 후 이장경이 출생한 까닭에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태어났으며 아들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

(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으며, 사당은 성주읍 봉산재 내 상덕사(尙德祠)에 있다.

 

   이장경 혼인에 대해서는 성주군수로 부임한 합천이씨 이약(李若)은 이장경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세에 반드시 창성할 것이라 예상, 자신의 딸과 혼인하도록 주선하였고 

이장경과 부인 합천 이씨 사이에 아들 5명이 태어난 것이다. 

 

  한편, 이장경의 손(孫)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 이씨라고도 하였다.

 

  원래 이장경의 묘는 성주 월항 선석산에 있었으나 세종대왕 자(아들)의 태를 묻게되자

 세종대왕이 특명을 내려 길지를 택해 하사하여, 성주의 서쪽 서오치(西梧峙)의 남쪽인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이장된 것이다.

오현재는 성주이씨 중시조(中始祖)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

묘소(墓所)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求心點)이 되는 곳으로, 공(公)의

묘소(墓所)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星州郡 月恒面 仁村里)

선석사(禪石寺) 옆 비호석봉(非乎石峰)에 있었으나,  세종대왕의 적서 18王子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로 지정됨에 따라 지금의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오현(梧峴)에

이장하였다.

 

유품전시관에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어 안산에 봉안된 영정 13폭을

사진으로 사본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또한 고려조 문열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의 현조

친필 병풍 사본, 1613년(광해 5년)에 간행된 계축보와 성주이씨 역대의 족보 15종과

문집 50여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장경(李長庚)한테는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5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막내 아들인 이조년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아들들의 출세로 고려조로부터는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 門下左侍中)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 上濩軍)에

추증된 뒤 원나라 황제로부터는 농서군공에 추봉되었다....그의 후손들중에 故전두환 대통령의

영부인인 이순자 여사와 처남인 이규광, 이규동이 있다

오현재를 지나 땅고개를 향하면서 언제 올를지도 모를 다음 구간의

능선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우측으로는 가야산이 산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성주에서 서울로 가는 막차가 18시인데 아무래도 호령고개까지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땅고개로 향하면서 대가택시를 호출한다 

땅고개(16:00)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와 금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성주와 고령을 잇는 고개로

성주와 고령으로 연결되는 4차선의 33번 국도(도로명 주소 : 가야로)가 지나간다

 

이정표에는 땅고개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고, 옥화삼거리라는 표식으로 되어 있는데

성주군의 어느 자료에도 땅고개에 대한 자료도 보이지를 않고, 이곳을 당고개라

표기한 지명들이 많이 보이는데, 땅고개 지명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이곳의 땅고개에 정확한 지명유래는 찾을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많이 보이는 땅고개를

살펴보면 고개 위에 당산나무가 있어 그 옆에 사람들이 오가며 던져 모은 큰 돌무더기가

쌓여 땅(당)고개라 불렀다고 하거나 고갯마루에 사당이 있어 당고개라 하는 설 및

옛날 기도의 당(堂)이 이곳에 있었다 하여 불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또한

이 고개를 넘을 때 땀이 많이 난다고 하여 땅고개라고도 불렸다는 설명들이 보이는데

이곳 상주의 땅고개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택시를 호출한 지 3분만에 택시는 도착하고, 베낭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택시에 올라타고 7분만에 임시로 생긴 성주터미널에 도착한다 

성주임시 터미널(06:15)

참외산지로 유명한 성주는 2017년 2월에 산으로 아우님과 감천 남(신산경표상:영암)지맥을

할 때 와봤다..그 당시에는 성주읍내 중심지에 터미널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주읍내를

가로 지르며 흐르고 있는 이천(利川)변의 한적한 곳에 임시 터미널이 자리를 잡고있다

성주발 → 서울 남부행 버스표

임시 터미널엔 표를 파는 매표원도 없고, 자판기에서 표를 예매하고는

옆에있는 화장실로 갔는데 사람이라 구경조차 할 수 없으니 얼마나 좋노...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홀랑 벗은채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날아갈 것만 같은 쾌감을 느낀다...화장실을 나와서 베낭에 남은 음료와

육포, 빵하나로 베낭털이를 한 다음에 벤취에서 베낭을 베고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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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시간을 잔 듯하고 일어나니 17시 30여분경...아직도 버스가 오려면

30분이란 시간이 남아있고,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17시 40분이 넘어서야 서울가려는 사람들인지 한.두명씩 오기 시작한다

상주발 → 서울행 버스 시간표

성주행 버스는 첫 출발지가 합천이고, 고령을 거쳐서 거의 滿車 수준으로

성주에 도착하여 서너명을 실고 서울로 향한다...얼떨결에 공부도 안하고

간 지맥길이지만 무사히 끝내고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