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구간- 고적대 삼거리에서 이기령까지(역산행)
대간길에서 苦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치다
☞ 산행일자: 2024년 10월 27일
☞ 산행날씨: 흐린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5.9km +들머리 3.9km+날머리 8.2km / 7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이기동 마을- 이기마을- 장재터 갈림길- 반달곰산악회 농장- 이기마을 끝
미역널이 싯점- 무명묘지- 한양길(소원 성취의 길)- 쉼터- 이기령- 안부
898m봉- 임도 합류점- 안부- 무명봉- 무명봉- 쉼터- 1145.8m봉 갈림길
1145.8m봉 합류점- 안부- 암봉-안부- 1167.1m봉- 쉼터- 갈미봉- 조망바위
무명봉- 전망바위- 1285.9m봉- 안부- 1285.6m봉- 고적대삼거리- 안부
암봉- 암봉- 암봉- 사원터- 문간재-안부(쉼터)-용추폭포-장군바위- 방화계
베틀바위 전망대 가는 갈림길-운영교- 쉼터- 학소대- 관음암갈림길- 삼화사
삼화사 일주문-금란정-무릉반석-무릉계곡 주차장
☞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이기동, 삼화동 / 정선군 임계면
지난 7월 20일에 백천(신산경표상:칠봉)지맥을 아주 짧게 타고는 사무실 이전을
하느라고 3개월동안 거의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산행을 못했더니만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몸무게가 무려 5kg 넘게 빠져 버리니 덜컥 겁이났다.
불안한 마음에 아산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다행히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휴~~~! 깜짝 놀랬잖아...
이제 사무실과 매장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서 산을 나서 보기로 하는데
아직까지 험하디 험한 지맥길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 싶어서 백두대간이나
마무리해야겠다 싶어서 청옥산 구간의 땜방을 하기로 하고 토욜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간단하게 베낭을 챙겨서 경부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동해행 버스표
3개월만에 나선 백두대간 길
해가 많이 짧아진 모양이다... 06시가 지났는데도
터미널은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고 있다.
잠시후 06시 20분에 동해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오른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고속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나 역시 평소의 습관대로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얼마나 잤을까...버스가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니
영동고속도로 횡성휴게소이다...휴게소에 들려 유부우동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동해로 향한다
동해종합버스 터미널(09:40)
예상했던 시간보다 살짝 늦게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하여
나를 내려주고는 최종 종착지인 삼척으로 향하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에 들려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기동 마을(230m:10:20)
택시기사에게 이기동 마을로 가자고 하니 나이드신 기사분이
귀가 잘 안들리는지 2번, 3번을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몇번을 시도한 끝에 이기동 마을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이기동 마을에 도착한다
강원도 동해시의 법정동인 이기동은 예전에 구리광산이 있었다고 하는 곳인데
지금은 그 구리광산이 어딘지는 알 길이 없고 산불초소가 있는 계곡을 끼고 민가
서너채만 띄엄띄엄 보인다
이기란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이(耳)로
표기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구리터'에서 귀터마을이 되었고 한자화 하여 '이기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기동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마을 윗쪽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도로가 보이기에 기사에게 차가 갈 수 있는데까지 가자고
하니까...갈 수가 없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0:30)
초반부터 빡센 오르막길의 시멘트 도로... 초반부터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올라서니 민가 몇채가
있는 이기마을이 나오는데 윗쪽 이기마을이다
이기마을(耳基村:350m:10:45)
이곳을 윗 이기마을이라 부르는데 민가 서너채와 여러대의 차량들이 보인다.
그런데 기아자동차 박물관에서나 있을법한 트럭 한대가 눈길을 끈다,
이곳까지는 포정도로였지만 이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서는데 지도상에는 이기마을은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힘든 여름을 보내고 오랫만에 산길에 접어든 범여를 구절초가
그동안 어찌 지냈냐고 하면서 범여의 안부를 묻는다.
참으로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산이좋아 산길에 들어서니 너를
만날수가 있어서 너무 좋구나...근데 내가 너무 늦게 왔나보다.
벌써 내년을 기약을 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령으로 향하는 부드러운 길
아쉽다면 이곳부터 백두대간의 접속구간이 이기령까지
4km이상을 계속 올라하는 고난의 길이라는 점이다.
평지에는 그럭저럭 걷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오르막만 만나면
갑자기 심장이 멈출듯한 고통이 따르는 범여의 몸뚱아리 그러나...어쩌겠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 내가 걷는 목적 산행을 달성할 없으니 말이다
牛步걸음으로 느릿느릿 오르다보니 억새 너머로 달바니산이
얼굴을 내밀면서 범여에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동해시 이기동에 위치한 달바니산(599.5m)은 백두대간 고적대와 상월산 사이에
있는 838m봉에서 분기한 능선에 있는 산으로 “ 달을 받는다는 의미 ” 의 유래가
전해내려 오는 산이다
느릿느릿 오르다가보니 구절초의 사촌격인 불쟁이의 딸
쑥부쟁이가 반갑게 산꾼을 반긴다...그래!... 나도 반갑구나...
장재터 갈림길(11:00)
윗이기마을에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15분정도 올라오니 이정표가 나오는데
동해소금길 2코스 더바지길이라는데 장재터~국시뎅이~미역널이~이기령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장재터란 옛날에 굉장한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2.8km)를 보니 아침에 내가 택시에서 내렸던
그 아래가 아니였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동해소금길 2코스 더바지길 안내지도(사진 펌)
반달곰산악회 농장(11:02)
산악회가 잘되는가보다...농장도 소유하고 있고...
난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독립군이라 저런데는 관심조차 없다
이기령으로 이어지는 길은 반달곰산악회 농장에서 좌측으로 이어지고,,,
조금전에 지나온 이기마을 너머로 쌍용양회 석회광산과 동해바다가
肉眼으로는 뚜렸이 보이나 똑닥이카메라로는 확인이 잘 안되는구나
잠시후에 걸어야 할 백두대간 능선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데, 조금씩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오늘 짧은 땜방구간을 마치면 마지막 진부령 구간만
남았기에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면서 滿感이 교차한다
이기마을 끝(11:06)
이기마을은 백두대간 이기령 아래에 형성된 산촌마을로 예전에는 火田을
일구어 인근의 북평 등에 도회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다팔아
생활을 했다...봄철에는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산나물을 채취하여
3일과 8일에 서는 북평장에다 내다 팔았고, 또 산림간수(山林看守:일제 강점기에
산림을 보호하고 지키던 하급 관리로 당시에는 산림녹화라는 명목으로 산림간수가
사람들을 입산 금지시키고 나무를 못하게 하였다) 몰래 나무를 캐 장작을 만들어
북평장에 내다팔아 생필품을 사가지고 와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기마을 끄트머리에서 동해소금길 2코스 이정표를 따라서 이기령으로 향한다
미역널이 싯점(11:08)
이기령으로 가는 임도 우측 숲속으로 장재터, 미역널이로 가는
표식이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미역널이 바위는 1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그냥 패스하고 이기령으로 향한다
미역널이란 미역을 널어놓은 듯한 거대한 암릉을 말하는데, 넓은 암반으로 된
폭포도 있고, 주변에는 봄에는 야생화가 지천이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곳이라고 한다
무명묘지(11:10)
동해소금길 2코스 이정표는 계속 보이고...
낙엽 관목 사이에서 멋진 금강송 한그루가 산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유난히도 기세를 부리면서 무더웠던 더위도 세월앞에는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다...산 아래와는 달리 고도를 높이면서
올라가는 산 윗쪽은 서서히 단풍이 가을을 재촉하는 듯 하다
단풍 너를 보니 / 법정스님
늙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가슴을 태우다 태우다
이렇게도 붉게 멍이 들었는가
한창 푸르를 때는
늘 시퍼럴 줄 알았는데
가을바람 소슬하니
하는 수 없이 너도
옷을 갈아 입는구나
붉은 옷 속 가슴에는
아직 푸른 마음이
미련으로 머물고 있겠지
나도 너처럼
늘 청춘일줄 알았는데
나도 몰래 나를 데려간
세월이 야속하다 여겨지네
세월 따라 가다보니
육신은 사위어 갔어도
아직도 내 가슴은
이팔청춘 붉은 단심인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
주책이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너나 나나 잘 익은 지금이
제일 멋지지 아니한가
이왕 울긋불긋
색동옷을 갈아입었으니
온 산을 무대삼아
실컷 춤이라도 추려무나
신나게 추다보면
흰바위 푸른솔도
손뼉 치며 끼어 들겠지
기왕에 벌린 춤
미련 없이 너를 불사르고
온 천지를 붉게 활활
불 태워라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라 초반부터 산행길에 힘이 부친다
아침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유부우동으로 아침을 해결했던
탓인지 허기가 몰려오고, 다리도 아파 오기에 오르막길
계단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카스테라와 쥬스 하나로 허기를
면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능선에 올라서니 쉼 의자 2개와
성황당같은 돌무더기가 있는 안부에 도착하는데, 글씨가 잘
안 보이는 한양길(소원 성취의 길) 안내판이 서 있다
한양길(소원 성취의 길:11:45)
한양길(소원 성취의 길)
아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괴나리봇짐과 짚신을 등에 멘 선비 유생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이 길을 걷고 걸었다. 등짐과 봇짐을 메고 든 장돌뱅이 보부상들은
거상의 꿈을 꾸며 험하고 험한 이 길을 수도 없이 오갔다. 한양 천 리 길은 장원급제의
꿈과 큰 포부를 안고 오가던 선비에게는 희망의 길이었고 이정터 저장터를 떠도는
장돌뱅이 보부상에게는 한 많은 애환이 담긴 길이기도 하였다.
이 험난한 고갯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여로의 무사 안녕과 소원을 빌며 한두 개의
돌탑을 쌓거나 던졌다고 한다. 하나둘씩 쌓인 돌무더기는 국시댕이(쿠시)라 불리며
서낭당과 같은 신령한 장소처럼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국시댕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나그네에게 이 옛길을 힐링의 길, 소원성취의 희망의 길로 거듭나게 하고자 한다.
2015년 10월 31일 (사) 동북아시아 문화 허브 센터
나무 인형에 천을 둘둘 말아놨는데 아마도 무속인들이
한 짓거리인 모양이다
흐미!...산이 불타겠네...
쉼터(11:47)
계곡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오늘 백두대간 접속구간인 이기령에 도착하는데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아랫 이기마을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3.9km나 되었고
계속되는 오르막에다 3개월만에 하는 산행이고, 거기다가 5kg
넘게 몸무게가 빠진 탓이라 그런지 정말 힘이 들었다
이기령(耳基嶺:더바지령:810m:12:02)
강원도 동해시 이기동과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를 잇는 고개로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는데, “구리터”의
중간 자음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되었다 한다.
이곳이 이기령이 된 理由는 대강 이렇다.
"銅基" 의 순수한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개명으로,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 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변음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의미하는 '령'으로 넘어 가니 "이기령(耳基嶺)이 되었다.
이 고개는 강원도 삼척의 해산물과 강원도 정선의 특산물을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
우마차가 넘나 들던 고개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이기령은 백복령과 더불어
옛 북평읍에서 정선으로 통하게 되는 주요 관문구실을 하였으나, 백복령이 지방도로로
개통되면서 이기령은 고개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이제는 점점 잊혀져 가는 옛길로
밀려나 이제는 백두대간 산꾼들만 걷는 고개가 되어 버렸다.
넓은 공터에 휴식 평상과 이정표와 돌무더기(국시뎅이)등이 있으며,
맞은편에는 백두대간 안내판과 이기령에서 부수베리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범여를 반긴다...지난 5월 5일에 백복령에서 이기령까지
걸었다가 지루하게 부수베리까지 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전의 3번의 백두대간을 걸을때는 댓재에서 백복령까지 한번에 종주를
했는데 지금은 3번을 끊으면서도 이렇게 힘이드니...범여도 참 많이 늙은 모양이다
이 지역 주민들이 말하는 '이기령'이란 지명은 예전에는 없었고 원래는
'더바지'로 불렸다고 하는데, 더바지라는 뜻은 옛날 마을 주민이 생계유지를
위해 이기령을 오가면서 힘들다는 의미가 담긴 강원도 사투리라고 한다.
상인들은 영동쪽에서는 소금, 영서인 정선과 삼척 하장쪽에서는 삼베
같은 것을 가지고, 더바지를 넘었다고 하는데, 더바지길에는 국시뎅이가 있다
쿠시라고 불리기도 하는 국시뎅이는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무사안녕과
소원을 빌며 돌탑을 쌓아 놓은 곳인데, 쌓인 돌탑은 서넝당과 같이 신령한
장소로 여겼다고 한다
조금전에 지나온 곳과 똑같은 국시뎅이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길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 저 아랫쪽과는 달리
강한 바람이 불어되는데 추위를 느낄만큼 찬바람이다
소소한 산길이 3개월만 산 속에 들어선 범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산에 대한 나의 짝사랑일까... 산 속에만 접어들면 이렇게 가슴이
설레니 말이다
금새 주위는 산죽길로 변하고,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남쪽으로 향하는 역산행의 발걸음은 가볍다
안부(12:09)
안부에서 898m봉으로 오르는 길에 死藥의 원료로 쓰였다는 빨간
천남성의 열매를 만난다...조선조 숙종의 임금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하직할 때, 사약으로 저 열매를 만들었을까.
왠지 그게 궁금하다
898m봉(12:14)
아침과 달리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면서 주위의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이지만 오랜 산행 경험상 비가 오지는 않을듯 하다
접속구간이 상당히 힘든 이 구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마루금에 들어선 이상 죽어나 사나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
모든건 運命에 맡기고 목적지까지 가는게 산꾼의 운명이 아닐까?
임도 합류점(12:35)
대간 마루금을 걷다보니 우측의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서 갈미봉으로 향하는데, 이정표와
대간 산꾼을 배려한 듯, 등로 옆에는 나무의자가 보인다
임도 합류점을 지키고 있는 이정표
우측에 있는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道田里)는 원래는 삼척군 도상면 소속이었으나
1914면 삼척군 하장면으로 이관되어 도전리로 불리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선군 임계면으로 이속되었다...예전에는 돈전(敦田), 승전(升田)이라 불리던 것이
1914년 하장면으로 이관될 때 도전리로 개편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외도전, 내도전, 너래골, 광석동, 형틀거리, 장아리, 응암동, 상두전,
점구비, 기추목이, 은점구비, 천패랭굴, 나무골, 뒤골, 아우라지, 절골, 버드내, 방아다리,
상장바우골, 하묵골, 사실내골, 섬바위(선바위) 등이 있으며, 너래골은 주변에 너래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상두전은 바위 밑의 게가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점구비는 밭갈이 보섭을 쇠로 녹여 만드는 부락이라는 뜻이며, 기추목이는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며, 은점구비는 은광을 개발하여 생산하던 곳에서 유래되었으며, 섬바위는 먼 곳에서 보면
곡식을 넣어 쌓아올린 섬 같이 보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모습이라는 뜻의 괘병산(掛屛山)과, 신라시대의 명승 의상대사가 대를 짓고 수도한 곳이라
전해지는 고적산(高積山)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짧은 마을이름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를 뜻하는 '뙡'이라고 한다.
옛날 이 일대에 '뙈기밭'이 많아 '뙈밭'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 '뙡'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뙡'은 도전을 일컫는 우리말로 '바깥 도전'을 뜻하는 '밧뙡'과 '안도전'을 뜻하는 '안뙡'으로
구분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도전리로 개편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지금도 도전리나 가목리에
사는 고령의 노인들은 '뙡'이라는 지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6·25전쟁 직후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긴 지명인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와 두 번째로
긴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 이어 가장 짧은 지명도 정선군에 있는
셈이어서 눈길을 끈다.
안부(12:37)
임도합류점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대간길 오르막이 시작된다
무명봉(12:40)
자작나무인지 사촌격인 사스래나무인지 확인도 못하고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참으로 힘이든다...3개월 가까이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이사를 하면서 빠진 체중 탓인지 오늘은 베낭도 아주 가볍게 하고
왔는데도 힘이 드니 왠지 모르게 겁이 난다
하기사 높은 산치고 어디 쉬운 산이 있었던가.
힘들면 힘든대로 숙명처럼 걷고, 또 걷다보면 끝이 보이겠지...
무명봉(13:03)
힘들게 무명봉에 올라서 대간길은 서쪽으로 이어지는데,
조금전 오르막길이 힘들었던지 오른쪽 다리에 쥐가나기
시작하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잠시후에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걸려있는 쉼터가 나온다
쉼터(13:07~20)
울고 싶은데 빰맞은 꼴이랄까.
다리에 쥐도나고 힘이 들어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베낭속을 뒤져 보니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비상 구급약통이
보이지 않는구나...이럴땐 아스피린이나 군육이완제 한알이면
해결되는데 조금은 난감하다
쉼터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올라서니 1145.8m 봉 갈림길이 나온다
1145.8m봉 갈림길(13:26)
좌측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original 대간길이지만, 이곳은 사면길로
등로를 돌려놔서 등로가 잘 보이지도 않고, 그쪽으로 향하는 대간꾼도
없는 모양이다...오늘은 산행 거리도 짧고, 삼각점(423 재설, 건설부) 이
있는 1145.8m봉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계속되는 쥐가나는 다리를 가지고 올라갈
자신이 없다
좌측 위에 있는 1145.8m봉을 바라보면서 사면길을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너덜겅이 나오고 갈미봉으로 향하는 대간길로 향한다
1145.8m봉 합류점(13:42)
1145.8m봉을 띵가묵고 사면길로 편하게 온 다음에 서쪽
방향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13:44)
이기령에서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길
며칠전까지만 해도 찌든듯한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였는데
어느새 온 산이 낙엽은 지고, 단풍나무 한그루가 茶毘式을 준비한다.
금방이라도 단풍나무의 불쏘시개를 쑤셔대니
자칫 내가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발길을 재촉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 내가 부처가 된다해도 입적(入寂)하고 싶지는 않다.
붉은색뿐만 아니라 노랑, 초롱, 파랑(하늘) 등 각양각색이 조화를 부린다.
아! 이런 것이 바로 가을색이로구나!! ………
오랫만에 산길에 들러선 대간 산길은 이렇게 범여를 반긴다.
* 다비식(茶毘式)이란 불교에서 승려가 사망하면 거행하는 불교적 화장의식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화장(火葬 )의 범주에 들기는 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화장은 일반적으로
고온의 화로에 넣고 완전히 태워버리는데, 불교의 다비는 일부를 제외하고 현대적 도구를
쓰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 다만, 일부 사찰은 환경문제를 이유로, 화로를 사용하여 다비식을
치르기도 한다.
암봉(14:02)
암봉의 나뭇가지 사이의 아랫쪽으로는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유명한 삼화사가 있는 삼화동이 보인다
강원도 동해시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삼화동(三和洞)은 남쪽에 두타산(1,353m)이 있고,
관내에 쌍용시멘트공장이 소재하는 마을로 삼화동 · 이로동 · 이기동 · 신흥동 · 비천동 ·
달방동의 6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합해
동해시로 승격할 때 북평읍 중 삼화리 · 이로리 · 이기리의 3개 동리를 합해 삼화동이라 하였다.
삼화(三和)라는 지명은 삼화(三華)를 삼화(三和)로 표기하였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화(三華)라 함은 ‘세 번 빛난다’는 뜻으로 누가 처음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형지세를
살펴본 고승(高僧)이 명명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일제말기 1935년 자철광산이 개발되어
빛을 보았고 두 번째는 1966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으로 빛을 보았는데 세 번째는 언제 빛을 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삼화(三和)는 819년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일한 후 전란의 고혼을 달래는
수륙대재를 삼공암에서 올리고 사명을 삼화사(三和寺)라 개칭하는 데에서 기인되었다.
속칭(俗稱) 삼홧골 또는 삼애골이라 불려지다가 이것이 변하여 흔히 사매골이라고도 한다.
『척주지』의 「두타산기(頭陀山記)」에 "6월에 두타산에 갔다... 삼화사는 두타산의 옛 사찰인데
지금은 폐허화되어 그 연대를 알 수가 없고,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다만 무너진 석탑과 부서진
철불(鐵佛)만이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화동은 이 기록에 나타난 삼화사에서 유래하였다.
암봉의 좌측인 무릉도원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천길 낭떠러지에다
출입을 할 수가 없어서 암봉 우측 아랫쪽인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14:04)
1167.1m봉(14:06)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암봉 정상에 대간 산꾼의 시그널 한장만
걸려있는 이곳이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표기된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대간 산꾼들에게 철저히 외면 받는듯한 홀대(?)받는
봉우리이구나.
고도를 높이면서 능선에 올라서니 아랫쪽과는 춥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능선 건너편에는
지난 6월말에 무거운 베낭을 메고 힘들게 걸었던 두타산 능선이
아직도 뚜렸하게 기억이 나는구나
잠시후에 가야할 봉우리들이 까칠한 모습으로
범여를 劫迫하지만, 산에서만큼은 山戰水戰
다 겪은 내가 저런데 겁을 먹어서야 되겠는가
쉼터(14:18)
쉼터를 지나고 1167.1m봉을 지나면서 까칠한 봉우리는 오르지 않고
우측의 편안한 사면의 너덜길을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겨울도 아닌데 이곳의 나무에는 겨우사리들이 보이는구나.
사바세계의 인간들이 바르게 살지 않으니, 식물들도 변칙적으로
살아가는 모양이다
오르지 못하는 봉우리는 눈팅이짓만 하고
너덜겅의 사면길을 따라서 갈미봉으로 향한다
갈미봉가는 길
갈미봉 오르는 길 서남쪽으로는 고적대에서 청옥산,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빡세게 한달음 치고 올라서니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갈미봉 정상에 도착한다
갈미봉(1277.4m:14:36)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우측으로는 임계쪽에 있는 괘병산(수병산)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뚜렸하다
정상에는 낡은 철제 안내판이 있고, 오늘 산행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붙은 봉우리나,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높이조차도 표기되지 않은
무명봉인데, 그 이유가 뭔지 참으로 궁금하다
'갈'은 노적가리나 볏가리 꼭지의 우뚝한 형태를 갈미라고 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갈은 '가리' 의 준말이며 '미(尾) '는 꼬리 혹은 끝이라는
뜻의 명사형 어미(名詞形 語尾)인데, 꼭지라 우뚝한 봉우리라는 뜻으로
갈미봉이라 부른다
전국의 산에 흔해빠진 이름중에 하나가 갈미봉이 아닐까.
모든 산들의 갈미봉...모두 같은 어원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갈”은 나누다(分)와
“嵋”는 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하는데, 갈미봉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 높은 봉우리에 이름 붙이는가 보다
이곳은 예전에 民草들이 화전(火田)을 이루고 살 때, 이 부근이
화전을 하던 곳이었고, 이 갈미봉을 통하여 도전리나 가목리의
부수베리가 있는 임계쪽으로 갔다고 한다
인증샷
오후가 들어서면서 능선의 바람이 차갑다.
서둘러 갈미봉을 떠나서 고적대 삼거리 방향으로 향한다
지리산 종주보다 힘들다는 덕유산 종주,
덕유 종주도 미치지 못한다는 두타·청옥-백봉령 구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을 생각하게 하는 고마운 길이다.
특히 오늘 구간처럼 내가 발걸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이 나를 이끌 때 자연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신체의
살가움과 고마움도 함께 깨달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자연과 소통방법을 배우는 데에는 백두대간 만한 대상이 없다'
조망바위(14:42)
무명봉(14:44)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무릉계곡
청옥에서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綠陰芳草로
우거졌던 능선인데, 어느새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봉우리가 높고 골이 깊은 계곡치고 사연이 없는 산이 있었던가?
두타에서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두타산성이 아련히 보인다.
신라가 실직국을 병합(파사왕23년)한 후 처음 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두타산성은
조선시대 태종 때(1414년) 삼척부사 김맹손이 쌓은 것이라고도 전하는 산성으로
높이 1.5m 길이 2.5km로 두타산의 험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축성하였으며
현재도 두타산 능선에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이 견고하지는 않으나 험준한 지형탓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592년(선조25년) 인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후퇴한 왜군과 조선관군이 이곳에서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왜군에게 함락되었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빨래하던 할머니가 적병에게
비밀을 누설해서 그렀다고 한다... 지금도 그 전쟁의 흔적으로 수구비, 비굴다리, 대구리 등 마을 지명과
다리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요즘은 이곳 삼화동에서 두타산성과 관련한 허병장문화재가 열리는데
‘허병장’은 허수아비병장의 줄임말로써, ‘임진왜란 때 두타산성과 파수안 일대에서
왜적들의 침공을 허수아비로 병장을 만들어 왜군를 물리쳤다는 승전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전망바위(14:47)
고적대와 더불어 무릉도원 방향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해동3봉이라 부르는
청옥산(1,407.2m:우측)과 두타산(1,357.0m:좌측)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은 편이라 주위의 산그리메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청옥산이 두타산보다 높은 산이지만 두타보단 찡한 감정은 없다.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쌍둥이처럼 서있는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이는데 부처의 모든게 아련히 베어있는 이 능선길을 걷는 즐거움
수도자가 두타행의 즐거움을 얻는 그 기분과 같을까?
두타산은 인도 초기불교의 두타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범어(梵語:산크리스트어)인 “dhuta” 를
소리나는대로 음역한 것으로 버리다, 씻다, 닦다 등의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佛道를 닦는 수행을 뜻하는데 오늘 청옥산을 지나
두타산을 걷는 오늘 대간길은 세속의 길을 벗어나 정진의 길을 걷는 두타행이다.
어찌 함부로 걸을 수 있는 만만한 길이겠는가?
조선중기에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1532~1590) ’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천하에 산수가 빼어난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으며, 영동의
산수 중 최고는 금강산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고 기록하였다.
괴로움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 가장 분명하고 일반적인 형태의 괴로움(苦苦性),
둘째 조건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즉 불만족(行苦性),
셋째 변화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壞苦性)이 그것이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이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괴로움이고 이것들을 고고성(苦苦性)이라 한다.
인생의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과학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붓다의 옛길 中에서-
1285.9m봉(14:52)
1285.9m봉도 국토지리정보원에 등록된 엄연한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이곳도 오를수가 없어서 지나온 봉우리와 마찬가지로 눈팅이만 하고
사면길로 이어지는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안부(15:03)
사면길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지난 여름에 참으로 힘들게 올랐던 고적대가 보이는구나.
고적대(高積臺:1357.3m)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와,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
동해시 삼화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봉우리로 동쪽으로 뻗혀진 청옥산, 두타산이
어우러져 해동삼봉(海東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1285.6m봉(15:10)
정상을 오르지 않고, 사면으로 걸어간다
좌측의 오르지 못한 1285.6m봉을 바라보면서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면서 내려서는데 갑자기 다리 근육에
쥐가 나면서 통증이 시작되고, 마비가 되는 느낌이라 꼼짝을
할 수가 없구나
千辛萬苦 끝에 안부로 내려와서 다리를 주무르면서
통증을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고적대삼거리(15:25)
참으로 힘들게 짧은 구간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끝내고 지금부터는
날머리 구간의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데, 3개월만에 산행을 한 탓인지
지나온 구간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조금은 불안한 느낌이다
지난 6월에 내려갔던 길이지만 계절이 바뀐 탓인지
왠지 등로가 낯설게만 보이는데, 계속되는 내리막길에
등로에 깔린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보니 자연히 몸뚱아리를
스틱에 의지해보지만 자꾸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구나
조금전에 지나온 1285.9m봉과 1285.6m봉이 장엄한
모습으로 하산길의 배웅을 해주는구나.
그래 고맙다...이제 또한번 더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쩌면 이생에서 너와의 인연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드는구나...행여!...체력이 회복되면
다시오마...
무릉계곡 명승관리소에서 설치한 구조이정판이 보이지만
이곳은 스마트폰의 통화불능지역이라 핸드폰이
터지지 않으니 어찌보면 무용지물일수도 있겠다
5개월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그널도 간간히 보이는구나
2번째 구조이정 안내판을 통과하면서 내리막길은 계속된다
안부(15:42)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법정스님 法語중에서
암봉(15:45)
계속되는 내리막길...다리의 통증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또다시 베낭을 내려놓고 다리를 주무려보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수만 없어서
다리를 끌다시피 하면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간다
흐릿한 날씨라 그런지 아니면 산속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산중턱에서 서서히 어둠의 그림자가 몰려오는 것아서
왠지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구나
가을, 그리고 이별 / 이효녕
떨어져 쌓인 낙엽 위에 누우면
이 아픔 풀어낼 수 있을까
여름 보내고
가을을 안고 사는 동안
내 마음 낙엽처럼 물들어
또 다른 이별을 생각하는 것일까
낙엽 밟으며 사랑 할 때도
마음의 바람이 불어
때로는 가슴 저려라
가을은 모두가 떠나는 계절
밟히는 낙엽 위에 비가 내려
그리움이 차갑게 씻긴다
암봉(16:05)
금방이라도 산을 불태울듯한 태세인 오색창연한 멋진 단풍이
요염한 여인이 교태를 부리는듯 멋진 산이건만, 범여의 몸뚱아리를
짓누르는 이 고통은 언제쯤 멈출란가...
암봉(16:08)
암봉을 내려서니, 또 다시 고통은 시작되고...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 나오는 10가지 교훈중에서 맨처음 나오는 구절
염신불구무병(念身不求無病) 신무병즉탐욕역생(身無病則貪欲易生).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으로 삼으라.
그래 맞는 말이다...내가 아프지 않고, 예전처럼 산행을 했으면 나 자신이
얼마나 건방지고 기고했을까...어쩌면 지금의 이 고통으로 인해 나를 뒤돌아
나를 뒤돌아 보게하는 계기인지도 모르지...
*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은 14세기 명나라 시대에 선승 묘협(妙葉) 스님이 집필한 글로,
수행자가 삶에서 겪는 고난과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 글은 "열 가지 가르침"으로 불리며, 현실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고통을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삼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왕삼매론은 몸의 병과 심리적 고통,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참된 성장의 양약"으로 보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더 큰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다.
보왕삼매론의 열 가지 교훈은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첫 번째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루는데, 예를 들어, 고통과 손실을 원망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탐욕이나 이기심을 낮추는 계기가 된다고 강조하며,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삶을 덜 집착하고,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권장한다
급경사의 등로가 거의 다 내려온 느낌이고, 스마트폰이 터지기 시작한다
넓은 공터를 내려서니 연칠성령에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는 사원터에 도착한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오는지 급하게 똑닥이 카메라를 눌러서
초점이 맞지않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림이 심하게 흔들렸다
사원터(16:33)
지도상에는 사원터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인데 ‘동해시 무릉계곡 대피소’라고
표기가 되어있고, 이곳에서 연칠령성에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데 사원터란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추측컨데 예전에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범여의 생각中에서...
대피소 맞은편에 팻말이 있는걸로 보아 이곳이 사원터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무릉계곡 주차장까지 아직도 4km가 훨씬 넘게 남아 있어서
마음이 급하다
산속이라 그런지 아직 일몰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어둠이 밀려오고
그에 비례하여 후레쉬 성능이 좋지않은 똑닥이 카메라로는 깨끗한
사진을 찍기가 불가능하다
마음이 급하니 또다시 다리에 쥐가난다...이곳부터 무릉계곡 주차장까지는
아직까지 거리가 많이 남긴 하지만,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는 장군바위까지만
가면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제도권 등로라 길을 잃어 버릴 염려가 없기에
계곡으로 내려가서 물에 발을 담그고 통증을 달래 보려고 한다
무릉계곡의 무릉은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했는데
세상과 따로 떨어져 복숭아꽃이 만발한 별천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실제 무릉계곡은 그 명칭에 손색없으며, 길이는 약 4㎞나 되며 무릉계곡 입구
호암소(虎岩沼)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용추폭포(龍楸瀑布)까지를 말한다.
무릉반석(武陵盤石), 쌍폭(雙瀑), 용추폭포(龍楸瀑布), 학소대(鶴巢臺), 양사언(楊士彦)
석각(石刻)등 기암괴석과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낸 산답게 끊이질 않는 깊고 푸른 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 환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용추폭포와
무릉반석은 동해 2경과 3경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이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으로
중국 후난성의 한 어부가 발견하였다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낙원이다.
‘별천지(別天地)’나 ‘이상향(理想鄕)’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조선시대 삼척부사 신광한이 쓴 소설 ‘최생우진기’의 배경이 바로 이곳 두타산 무릉계곡이다.
‘두타(頭陀)’는 마음의 번뇌를 털어버리고자 불도를 닦는 수행을 가리키는 말로
소설 속에는 불교와 유교, 도교를 넘나드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이다
이 무릉도원을 걷는 범여는 신선놀음을 하는게 아니라 ‘苦’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무릉도원이란 지명과는 이율배반적인 발걸음으로
삼화사로 내려간다
문간재로 향하는 철계단으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려 깜짝 놀랬는데, 자세히보니 등산객이다...인천의 산악회에서
왔다는 등산객인데 연칠성령에서 내려오는 길이란다
문간재(17:02)
우측으로 50m 지점에 신선봉이 있지만 자꾸만 밀려오는
어둠 탓에 그냥 포기하고 하산길을 서두른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철재 계단을 내려가는 길
쉼터(17:07)
철계단을 내려오니 쉼터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장군바위와 용추폭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장군바위로 향하는 다리에서 바라본 용추폭포(龍湫瀑布)
용추폭포(龍湫瀑布:17:10)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용추폭포 두타산(頭陀山, 1,353m)과 청옥산(靑玉山, 1,404m) 사이의
무릉계곡 서쪽 4㎞인 문간봉 절벽 아래에 있는 폭포로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곳이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을 지닌 폭포로 상탕, 중탕은 옹기항아리 같은 형태로, 하탕은
진옥색의 큰 용소로 이뤄져 있으며, 폭포 한쪽에는 어느 묵객이 새겨놓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대형석각이 용추폭포의 자연경관을 적확하게 대변해 주는데 삼척부사 유한준이 ‘용추(龍湫)’라
이름 짓고 글을 썼다고 전한다.
*유한준(兪漢雋:1732~1811)은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만청(曼倩),
여성(汝成), 호는 저암(著菴)로 과거합격 후 김포군수와 삼척부사, 형조참의를 지냈다.
당대에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집》, 《허생전》 등을 쓴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겸 소설가 로 잘 알려진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경쟁 관계였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침식과 마식작용을 통해 항아리 모양의 상ㆍ중ㆍ하 3단의
바위용소(Pothole)를 형성하면서 흘러내리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제일 아래 계단을
밟으면 전체 암석이 동요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동석(動石)이라 불리며, 이 일대를
폭포골 또는 용추동이라 부른다... 상단ㆍ중단ㆍ하단 등 3단으로 연결되는 폭포는 전국에서
이 곳 뿐이며, 폭포들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형상과 주위 무릉계곡의 뛰어난 경관과의 조화는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장군바위(17:11)
수직으로 늘어선 암석들이 병풍을 펼쳐놓은 듯 보이는데, 투구를 쓴 용맹스러운
장군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장군바위는 육안으로는 뚜렸하게 보이지만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싯점에서 카메라로는 잡을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장군바위에서 내려와서 제6곡 수류천(隨柳川)을 지나면서
아예 똑닥이를 베낭속에 집어 넣어 버린다.
.
.
.
삼화사까지의 기록은 백두대간 산행기 45-1구간의 기록으로 대체한다
잠시후에 어둠의 너무 짙어서 베낭에서 헤드렌턴을 꺼내서 불을 켜고
관음암을 지나 삼화사로 향하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구나.
기상청의 예보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제도권 등로에서 비를 만났으니 천만다행이다.
삼화사가 가까울 즈음에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기사에게 받은 명함으로
삼화사 주차장으로 와 달라고 하고는 삼화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무릉계곡 주차장에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힘들게 산행을 종료한다(17:50)
다시 10여분을 더 걸어서 무릉계곡 주차장에서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동해발 → 동서울행 버스표
터미널로 가는 택시 차창 밖에는 청승맞은 가을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다.
19시 20분에 터미널에 도착하여 일단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버스표를 예매하는데 강남으로 가는 버스는 매진이고,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금방 들어온다고 하여, 동서울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는데 삼척에서 오는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온다
지체없이 버스에 올라 깊은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을 지나고 있다...3개월만에 한 산행이라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잔치국수 한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