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 산행일시: 2025년 01월 01일
☞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약간 추운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8.7km / 5시간 10분정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장암역-박세당 사랑- 청풍정터- 노강서원-석림사 일주문-석림사
선유곡-제1쉼터-기차바위 갈림길-안부- 전망대- 깔딱고개
청학리 갈림길- 수락산 정상- 내원암갈림길- 철모바위-코끼리바위
하강바위(장군봉)-치마바위-수락골 갈림길- 쉼터 삼거리- 쉼터
신선교- 벽운클럽- 벽운교- 도솔봉 갈림길- 장락교- 수락교
시립수락양로원 입구- 수락산역
☞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 남양주시 별내읍
왜 이리 세월이 빠를까?...또 한해가 바뀌고 새해를 맞이했건만 이제는 새해에
대한 설레임도 없이 무감각하게 사는 내자신이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느낌이다.
하기사 50년을 구독한 신문도 끊고, TV를 안보고 살면서 세상의 인연과는
조금씩 단절하고 살아가니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듯 하여 좋다.
새해 아침에 특별히 할 것도 없어서 사무실로 출근하여 요즘에 보다가 만
책이나 볼까 하다가, 오랫만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사무실 나가기도 뭐하여
물 한병만 달랑 베낭에 넣고, 오랫만에 수락산을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장암역(10:40)
집을 나와서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고 수락산 입구인 장암역에 도착한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수락산 등산로 중에서 비교적 한가하다는 점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 지맥길을 걸으면서 나홀로 산행을 한 탓이라 이제는
사람들이 많은 제도권 등로에 접어들면 왠지 불편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호젓한 등로를 좋아한다
장암역을 빠져나와 신호를 기다리면서 바라본 수락산 정상의 모습
산행 시작점에 만나야 할 들머리가 쌩뚱맞게 갈비집이라니...
범여가 헤매는 지맥길의 들머리와 다르니 조금은 헷갈리는구나.
"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 고 했거늘...우짜겠노...순리대로 따라야지...
들머리에서 만난 이정표.
이 이정표는 불.수.사.도.북 종주자들을 위한 것인가?
예전에 산을 우습게 알면서(?) 겁없이 산을 대하면서 걸었던 그 시절...
불암산에서 저녁 9시경에 출발하여 16시간을 걸어서 북한산 끝자락인
불광동으로 내려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주(酒)님을 영접했던 그 당시를
생각하니 왠지 모를 쓴 웃음이 나오는구나...불암산을 접수하고 수락산에서
내려와 동막골 근처의 해장국집에서 새벽술에 취해 사패산으로 오르던
그때가 범여의 봄날이었는데...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사랑채(10:45)
서계 박세당은 인조 7년(1629)에 남원부사 정( )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숙종때의 실학파 학자로서 예조좌랑, 병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내다가 4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장암동 석천동(石泉洞)으로 돌아와 궤산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색경(穡經)』이라는 농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으며 고전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사변록(思辨綠)』을 저술하였다.
궤산정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서계의 생가가 있고 주위에는 그가 심었다고 전해오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지금도 무성함을 자랑하고 있고, 서계 박세당 학당터는
궤산정 북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당쟁에 혐오감을 느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원래 안채와 안사랑·바깥사랑·행랑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6.25 전쟁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당시 사랑채는 좌향(坐向)인 남향·남서향·남동향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 가옥의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서쪽에 있는 도봉산을 안산(案山)으로 한 좌향을
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향(向)보다는 배산임수의 자연지세를 더욱 중요하게 생
각했던 것 같으며, 사랑채의 남쪽으로부터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수락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현재는 이 시냇물을 끼고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 남쪽으로 날개집 형식의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乙'자 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곳에는 서계 영당이 있고 영당 앞에 『색경』에 나오는 기록처럼 서계 박세당이
심었다는 대나무가 있는데, 이곳 계곡을 석천동계곡이라고 하는데 서계 선생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붙인 이름이다.
서계 사랑채를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어
되돌아와서 입맛을 다시는데, 개울가에 백구 한마리가 오늘만
날인가요...어르신!...다음에 오셔요 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그래 다음에 보자하면서 길을 걷다가보니 청풍정터를 만난다
청풍정(淸風亭) 터(10:52)
청풍정은 노강서원(鷺江書院) 앞에 있는 정자로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후에 처음에는
청풍정에 숨었다가 폭천정사(瀑泉精舍)로 옮겨 은둔하였다고 한다.
청풍정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影堂)을 짓고 그 앞에 세운 정자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주추의 크기는 높이 90㎝, 아래 폭 60㎝, 위 폭 38㎝ 정도이며 모두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주추간의 거리는 가로 2.2m, 세로 2.4m인 것으로 보아 정자의 평면적은 1.6평 정도로 추측된다.
정자 아래쪽 계곡 암면에는 수락동천(水落洞川)이라는 매월당의 친필이 남아 있다.
이 글씨는 매월당이 전국을 유랑 할 즈음 이 곳 수락산에 머물고 있을 때 남겨 놓은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청풍정(淸風亭) 터 안내판
서계선생의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전라남도 나주시의 반남(潘南)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덕수이씨(율곡 이이), 진보이씨(퇴계 이황). 반남박씨(현석 박세채),
광산김씨(신독재 김집), 은율송씨(우암 송시열), 여주이씨(회재 이언적)를 조선의 6대
국반(國班)으로, 문묘와 종묘에 동시 배향된 대학자 여섯분 가문을 이루는 말로 나라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명문가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반남박씨 가문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청풍정(淸風亭) 터 주추돌
청풍정(淸風亭) 터를 둘러보고 맞은편의 노강서원으로 향한다
노강서원 홍살문(10:55)
홍살문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으로 예를 갖추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문이다
*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두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지며 문짝을
달지 않는 상징적인 문으로, 일주문과 다른 점은 지붕이 없다는 것이며, 또 기둥이 가늘기 때문에
일주문처럼 자력으로 서있지 못하고 기둥하부 양쪽에 지주석을 세워 쐐기를 박아 고정시킨다.
기둥 상부에는 가로대를 길게 건너지르고 그 위에는 세로 살대를 촘촘히 박아 구성한다.
세로살대 중간은 태극문양 등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모두 붉은색 주칠(朱漆)을 하는데, 그래서
홍살문(紅箭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노강서원(鷺江書院:경기도 기념물 제41호)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15년)에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하다 죽음을 당한
정재 박태보(朴泰輔:1654~1689)의 뜻을 기리고 지방 교율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1695년(숙종21년)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하였으며,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1697년
(숙종23년) 숙종이“鷺江”이라고 이름을 지은어 새긴 현판을 내렸으며, 이후 1754년
(영조30년)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 이후에 남은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반남박씨(潘南朴氏) 16세손인 박태보는 1677년(숙종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그러나 1689년(숙종15년)에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를 가던중에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94년(숙종20년)에 모든 죄를 사면받고 그의 충절과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이조판서의
벼슬과 문열(文烈)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노량진 노강서원은 6.25 전란으로 소실되어 1969년에 의정부시 장암동 현 위치에 아버지인
서계 박세당 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했던 청절사의 옛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
노강서원 외삼문(外三門)
현판에는 정조신해(正祖辛亥) 사액(賜額) 표기로 보아서는 이 현판의 편액은 정조15년
(1791년)받은 것으로 보이며,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 문이 낮은 대문을 ‘솟을 삼문’ 이라고
하는데 보통때는 양쪽 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모실때는 세문을 다 열어 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동.서 협문만 동협문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나올때는 서협문으로 나오는데
오늘은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노강서원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체
석림사로 향한다
석림사(石林寺)일주문(10:57)
수락산 산중에 위치한 석림사는 반남박씨 박세당의 원찰로, 매월당 김시습을
충절을 흠모하던 조선 후기의 문신 박태보가 중창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자 비구니 절인 경기도 전통사찰로
수락산 일대는 박태보의 할아버지인 박정이 인조반정의 공을 인정받아 하사 받은 사패지의
일부였는데, 그 연고로 박태보의 아버지인 서계 박세당 선생(1629~1703)이 1668년 관직을
그만두고 이 골짜기에 터를 잡으면서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다수 탄생되었고, 석림사의 역사도
함께 시작되었다.
석림사는 1671년(조선 현종 12) 석현과 그의 제자 치흠이 창건한 사찰로, 당시
서계 박세당 선생이 석림암(石林庵)이라 이름 짓고 「석림암기」와 「석림암 상량문」을
지어주었다고 하며 1796년(정조 20)에 유담이 삼소각을 세웠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 세상을 떠난 박태보(1654~1689)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창하였다.
김시습은 계유정난 후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이곳 석림사 계곡에 은거했다고도 전하는데,
그의 절개를 흠모하던 박세당이 인근에 청절사라는 사당을 세워 기리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노강서원이 그 터에 자리잡고 있다.
乙巳年 새해 첫날에 산 냄새를 맡는다... 아무래도 난 산에 중독된 모양이다.
낙엽 아래에서 올라오는 산에서 뿜어내는 흙의 향기를 맡으면서
석림사의 부처님을 보러나 갈까...
석림사(11:00)
절 집 마당 우측으로는 수락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으나
절집을 통과할 때는 늘 습관처럼 절집으로 향하는 버릇이
있는터라, 적묵당을 지나 큰 법당으로 향하는데 사시예불인가?...
비구님의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천수경의 염불소리가 범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석림사는 1671년(조선 현종 12) 석현(錫賢)스님과 그의 제자 치흠(致欽)스님이 창건한 절집으로
창건 당시에는 석림암(石林庵)이라고 불렀고, 창건 직후에 유담(裕潭)이 삼소각(三笑閣)을 세웠다.
숙종(재위:1674∼1720) 때 문신인 박태보(朴泰輔)가 김시습(金時習)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창하였고, 1698년(숙종 24)에는 삼소각을 중건하였으며, 1745년(영조 21) 홍수로 피해를
입은 뒤에도 바로 중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부터 바구니(比丘尼 ) 상인(相仁)스님이 제자인
보각(寶覺)스님과 함께 중창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칠성각·
독성각·적묵당·요사채 2동이 있으며,
이 중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등이 조성되어 있고,
극락보전 앞에는 1969년 상인스님이 부처님의 구해 모셔 둔 사리탑이 있다.
석림사 큰법당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니 큰법당이라고 쓴 한글 편액이 이채로운데
기둥에 쓴 주련(柱聯)도 한글이다...1층은 요사채로 사용하는 듯 보이고.
2층은 큰법당인데 지금 사시예불중인지 비구니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천수경(千手經)의 독경소리가 정겹게 들리는구나
* 천수경(千手經) 은 관세음보살의 광대한 자비심을 찬양하는 불교 경전으로 한국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인 독경 경전 중의 하나가 『천수경(千手經)』인데, 『천수경』이 이렇게 대중적인
독경 경전으로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천수경』의 참회 사상과 이와 더불어
행해지는 참회 진언 수행법 때문이다
『천수경(千手經)』의 한역본은 당나라 가범달마(伽梵達磨)의 번역본 등 10여 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가범달마의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礙大悲心陀羅尼經)』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염불의 삼매경에 빠진 스님에게 행여 민폐가 민폐가 될것같아 큰법당은
다음에 들리기로 하고 선 채로 마당에서 큰법당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큰법당의 현판과 주련, 범종각의 주련도 한글로 쓰여 있는데 이 절집의
本刹이 봉선사가 아닌가... 봉선사에는 평생동안 팔만대장경의 한글 역경
사업을 하시다가 열반하신 운허(耘虛)선사의 작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절집 마당을 빠져 나와 수락산을 향하는 길에 도랑 건너를 바라보니
육환장을 들고 서 계시는 지장보살 입상이 있는 지장단과, 진영각과
삼성각이 보인다
오랫만에 온 탓일까?.
인간들에 의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자꾸만
野性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꾸나
선유곡(仙遊谷)의 계곡물은 얼어있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위함인지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의 계단...편리하긴 하지만,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때가 가장 예쁜게 아닐까?
선유곡은 석림사 위에 계곡으로 옛날에 선녀가 와서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곳에는 험막골, 중소난골(中小難谷), 열두바퀴 계곡이 있는데 험막골은 올라가기
힘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소난골은 선녀탕 밑 오른쪽 골짜기인데 이곳 역시
험하다고 하며, 열두바퀴 계곡은 수락산에 골짜기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큰골 또는 긴골 등으로도 불린다
제1쉼터(11:13)
서울 근교의 산이라 그런가...등로는 반질반질 광택이 난다
기차바위 갈림길(11:16)
계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좌측으로 가면 기차바위로 향하는 길인데 오랫만에 기차바위의
아찔한 로프놀이를 해볼까 하다가 너무 늦게 산행을 시작한데다가
아무런 간식도 가져오질 않아 오후에 체력저하가 염려되어
그냥 정상을 향한 단거리 코스인 깔닥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수락산 정상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헤럴드 V 멜처트는
하루 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 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중에서 인생 여정중
최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안부(11:40)
매주 걷는 지맥길의 목적 산행이 아닌 발길가는대로의
편안한 길을 스틱도 없이 여유로운 발걸음이 참으로 편하다.
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상으로 향한다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오랜 시간이 걸려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로 중국의 태행(太行)과 왕옥(王屋) 두 산맥은 오래전엔 북산(北山)을
사이에 두고 지금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북산에 살고있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높은 산에
가로막혀 왕래하는 데 겪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두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둘레가 700리에 달하는 큰 산맥의 흙을 퍼담아서 왕복하는 데 1년이 걸리는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하는 우공(愚公)의 모습을 보고,친구 지수(智叟)가 그만둘 것을 권유하자 우공(愚公)이 말했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과 손자가 있고, 그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산은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대를 이어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산이 깎여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산신령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옥황상제가 두 산을 멀리 옮겨주어 노인의 뜻은
성취되었고, 1년 동안 묵묵히 산을 옮긴 우공의 노력과 믿음, 끊임없는 열정이 옥황상제를 감응시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급경사의 오름길에서 뒤돌아 보니...
내가 겨울산행지로 즐겨 찾는 도봉산에서 사패산으로
이어지는 멋진 스카이라인...흐린 미세먼지만 아니면
錦上添花련만...
급경사의 오르막이다...느림보를 배려하려는가?
디딤 받침대가 예술이다
겨울 소나무 / 정심 김덕성
잎들이 떠나간 겨울나무
벌거숭이로 추위로 떨고 있는 데
푸름을 자랑하는 소나무
언제 보아도
늘 청순하게 맑고 푸른 얼굴로
솔향기 담아 웃음을 머금고
향기로운 솔 향 풍긴다
세월의 흐름에도
개의치 않고 고요히 낮은 자세로
누가 뭐라 해도 강한 위지로
굴하지 않는 푸른 소나무
오직 하나 푸름을
마음껏 들어내는 참신한 그 자태
그 고집 하나로 늘 푸르러 있는
겨울에도 변함없는 그 자태가 곧
불로장수하는 비법인가
도봉산(右)에서 북한산(左)이어으로 이어지는 멋진 산줄기
북한산은 자기 속살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운지 모든게 흐리구나
지난해의 묵은 감정은 머리속에 지우고 올 한해는
우짜든지 편하게 살아 보련다...이제 내 삶이 아둥바둥
해봤자...팔팔하게 살 날이 울매나 되겠는가
가벼운 베낭하나 짊어지고 올라서니 전망대가 나오는구나
전망대(12:20)
수락산 정산에서 도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예전에 불,수.사.도.북을 종주할 때 걸어보고 한번도
가지 못했으니 이제는 기억조차도 가물가물 하는구나...
전망대에 올라서 이름에 걸맞게 서쪽으로 북한산과 도봉산, 사패산에서
양주 불곡산, 은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오랫만에 수락산으로 오르는
범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구나...아!...산에만 오르면 이렇게 좋은데...
수락산 정상 너머로 보이는 도솔봉과 벽운계곡의 모습이
오랫만에 수락산을 찾아온 범여의 눈을 호강시켜 주는구나
저 아래에 사는 속물들은 늘 내는 옳고, 니는 틀렸다고 하면서
쌈박질만 하는데, 산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가소로울까...
겨울 산길 / 유안진
속세의 웃음맛과
속세의 울음맛을
영영 끊어버린
겨울나무들
산사로 올라가며
염불외는 소린 듯
바람이 분다
뉘우친 파계승(破戒僧)
뒤처져 걷는 길에
때묻은 발자욱을
따라가며 지워주는
눈발이 흩날린다
풍경소리 들린다
향 내음도 자욱하다.
오늘이야 급할것도 없겠다
느릿느릿 걷다보니 이정표상의 깔닥고개에 도착한다
깔딱고개(12:22)
좌측으로 가면 기차바위 가는 길인데, 오늘은 가볍게 산행을
하려고 물한통에 초콜렛 2개가 전부라...후반에 체력 저하가
염려되어 기차바위 아닌 수락산 정상으로 향한다
깔닥고개에서 까칠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기차바위가 보이는구나
등로에서 바라본 기차바위봉(607.9m)
기차바위가 범여에게 자꾸만 손짓을 하는
가고싶은 맘은 굴뚝 같은데 하루가 다르게
겁쟁이로 변해가는 나 자신이 자꾸만 미워지는구나
기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는 동봉(東峰)이라고 하였다.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서는 이 바위가 향로(香爐)같이 생겼다고 하여
향로바위(향로봉) 부르기도 하며, 대슬랩으로 된 긴 바위에 2개의
홈이 파여있어 홈통바위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관한 서계 박세당의
시(詩)가 있다고 한다
정겨운 철계단으로 올라서니...
잠시 검문이 있겠소이다
수문장처럼 보이는 암릉이 정상이 오르기전에
검문을 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검문을 통과(?)후 수락산 정상을 향하는 안부 능선에 도착한다
청학리(靑鶴里) 갈림길(12:37)
직진 아래로 청학리로 가는 길이 보이고, 우측은 정상으로 가는 길,
좌측은 기차바위로 가는 길인데 지금은 통제를 하면서
대신에 우회길을 만들어논 모양이다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청학리는 용암천이 마을 곳곳을 흐르며, 마을 뒤쪽에는
산지가 있어서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동락, 월촌, 사기막,
정촌, 응달 등이 있다. 동편 은행나무에 청학이 살았다 하여 청학리라 하였다.
동락의 지명유래는 청학리의 지명유래와 같다. 월촌은 동학 건너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기막은 고려 시대에 사기를 제조하던 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정촌은 정씨촌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응달은 동쪽에 높은 산이 있으며, 마을이 서편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응달졌다 하여
응달이라 한다고 한다.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서 있는 저 소나무들...
산에 오는 어느 아낙을 유혹하려는지?
아님 어느 남정네를 유혹하려는걸까?...내는 모르겠네...
니 팔자도 내 팔자만큼 기구하고 고단한 삶이구나.
세상살이 자체가 苦라고는 하지만, 하필이면 이런곳에
뿌리를 박고 사는 바람에 개고생을 하는구나.
너무 서러워 마라...저 아래에서 인간들도 마찬가진기라.
도둑넘, 사기꾼, 목소리 큰놈, 대가리에 뻘건 띠두르고
선동질 잘하는 넘은 잘도 사는데, 나같이 힘없고 빽없는
넘은 늘 힘들게 사니...니하고 내하곤 도찐개찐인기라...
도정봉 너머로 보이는 양주의 불곡산과 은봉산은 感이 오지
않을만큼 짙은 구름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흐릿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의정부(議政府)
의정부의 지명유래
조선 제3대 태종이 방번(芳善)과 방석(芳碩)을 살해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태조는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成興)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차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차사’ 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그후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부왕을 맞으려고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태조는
활의 명수이었기 때문에 중신 하륜(河崙)은 부왕 태조가 반드시 태종을
해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막에 큰 기둥을 많이 세웠다.
그 결과 태종은 부왕이 쏜 화살을 피할 수 있었고, 곧 잔치가 시작되자
태종은 ‘헌수(獻壽)’의 뜻으로 친히 부왕 태조에게 잔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륜의 지략으로 하륜 자신이 잔을 올림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 지방에 장기간 머물렀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각 대신(大臣)들은 한양보다도 지금의 의정부로 와서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기 때문에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의정부 시내 너머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사패산(賜牌山:552m)
과년(瓜年)한 딸을 남의 집으로 보낼때는 왕이나 민초들이나
아쉬웠던 건 마찬가지였나보다... 조선시대 14대 임금 선조의
여섯째 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사패산으로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산이다
수락산(水落山:637m:12:45)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과, 남양주시 별내면, 서울 노원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도봉산, 사패산 북한산과 마주 보고 있으며, 남쪽으로 덕릉고개를
중심으로 불암산과 이어지며, 산세는 비교적 험하지 않으며, 중량천의
이 산 중턱에서 중랑천의 지류가 발원하며,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암벽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수림은 울창하지 않다
동쪽 사면의 금류계곡에는 금류동(金流洞),은선동(隱仙洞), 옥류동(玉流洞)
폭포가 있으며 산의 동쪽 사면에는 조선조 정조 때 300일 기도를 올려 순조의
탄생을 보게 했다는 내원암(內院庵)이 있으며, 계곡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등산로가
다양하고 교통이 편리해서 등산객의 많은 곳이다
수락산(水落山)의 지명에 대해서 몇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첫째는 의정부 내원암 일대 계곡의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수락(水落)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
두번째는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 과 같다해서 붙혀졌다는
설이 있으며 또다른 설은 어느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간 아들을 찾아 ‘수락’이라는
이름을 외쳐 부르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은 뒤 비오는 날만 되면 ‘수락아 수락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지명이 수락산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수락산 능선상의 암봉들은 모두 서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이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 건국 후 수락산을 서울의 수호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설에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수락산이 서울을 등지고 앉은 산세를 하고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지로 삼은 왕의 뜻에 어긋 난다하여 반역산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저 윗쪽에 3등 삼각점(△ 성동301 / 1994재설)이 있는데
나처럼 기럭지가 짧은 숏다리는 올라갈 방법이 없구나
인증샷
'수락'의 유래는 원광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법(佛法)을 닦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잠깐 머무르다가 '수락사(水落寺)'라는 절을 연 데서 명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떨어지는 모습에서
'수락(水落)'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과 산봉우리의 형상이 마치 물이 떨어진 모습과
같다는데서 붙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금류동계곡으로 쏟아붓는 물을 두고
'상당히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뜻이 가장 보편적이라고 한다
이곳 정상에는 평소같으면 막걸리를 비롯해, 커피, 컵라면을
파는 잡상인들이 많은데 오늘이 양력 설날이라 그런지 모두 다
휴무인가 보다...이곳에서 간단한 컵라면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정상의 바람이 차가워 서둘러 길을 나선다
수락산에는 멋진 기암괴석들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구나.
앞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도솔봉이고 그 뒷쪽은 불암산이다
정상 맞은편의 기암괴석
정상의 바람이 오후로 들어서면서 상당히 차갑다.
추위에 약한 범여의 몸뚱아리가 서둘러 하산하자고
재촉을 하는구나
내원암(內院庵) 갈림길(12:52)
좌측 아래로 내원암으로 가는 길이 보이고, 직진은 도솔봉으로 가는 길,
우측은 철모바위와 수락골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수도권 시민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고 있는 수락산에는 ‘경기도의 갓바위’ 라는
별칭을 얻고 있을만큼 수많은 기도 영험담을 갖고있는 기도도량 내원암이 있다.
미륵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곳. 도솔천 내원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내원암은 수락산
중턱에서 조금 더 올라간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불교 경전속의 내원궁의
묘사가 그러하듯 내원암도 사방이 시원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1795년부터 이 절을
성사(聖寺)라고 칭호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 절의 이명(異名)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세(寺勢)를 확장하였다.
1693년 숙종은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에 영조를 얻었고, 그 뒤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坡)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올린 뒤,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출산하였으므로 1794년에
칠성각을 짓고 관음전(觀音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인 내원암은 비구니 도량으로 역사가
꽤나 깊은 사찰로, 내원(內院)이란 도솔천에서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56억 7천년만년
뒤에 사바세계로 내려와 중생을 구원할 미륵불이 계시는 곳이 도솔천 내원궁이다
이곳 내원암에는 실물로는 볼 수 없으나 경기도 유형문화재 197호로 지정된 괘불이 있다.
괘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그 아래에는 관세음보살, 그리고 좌.우에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그려져 있으며 법회나 큰 행사때만 내건다고 한다
내원암 갈림길에 우측으로 0.1km 떨어진 지점에
철모바위가 있어서 범여의 발길은 그곳으로 향한다
철모(鐵矛)바위(12:55)
철모바위에서 되돌아 나오니 예전에는 없었던 수락산의
안내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우측의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수락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좌측의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아랫쪽에는 꽤나 큰 규모의 가건물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걸로
봐서 영업을 하는 모양이라 간단하게 요기를 할 생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많고, 쥔장이라는 자는
사람이 들어가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아서 그냥 되돌아 나온다
저 아랫쪽의 내원암은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가 않구나
조선후기에 내원암에 머물던 정허거사(淨虛居士)가
수락산의 가을 풍경을 보고 읊었다는 수락팔경이란
시가 생각나는구나
『수락팔경(水落八景)』
양주라 수락산을 예듣고 이제오니
아름답게 솟은 봉(峰)이 구름 속에 장관일세
청학동(靑鶴洞) 찾아들어
옥류폭(玉流瀑)에 다다르니
거울 같은 맑은 물이
수정같이 흘러가네.
푸른 송림(松林) 바위길을
더듬어 발 옮기니
백운동(白雲洞)의 은류폭(銀流瀑)이
그림같이 내려 쏟고
자운동(紫雲洞)에 돌아들어
금류폭(金流瀑)을 바라보니
선녀 내려 목욕할 듯
오색서기 영롱하구나.
미륵봉의 흰 구름은
하늘가에 실려 있고
향로봉의 맑은 바람
시원하기 짝이 없네.
칠성대 기암괴석
금강산이 무색하고
울긋불긋 고운 단풍
그림인 듯 선경인 듯
내원암(內院庵) 풍경소리
저녁연기 물소리에
불노정 맑은 약수(藥水)
감로수가 이 아닌가
선인봉 영락대에
신선 선녀 놀고 가니
청학(靑鶴) 백학(白鶴)
간 곳 없고
구름만이 오고가네
스마트폰 三昧境에 빠진 등산객
뭘 저리도 열심히 검색할까?...궁금하네...
코끼리 바위를 바라보며서 안부로 내려선다
좌측으로는 은류폭포와 옥류폭포, 사기막골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이고, 코끼리 바위로 직접 오르지는 못하고 우회를 한다
지금 코끼리 바위를 우회중...
코끼리 바위(13:12)
造物主가 빚어낸 수락산의 멋진 기암괴석은 범여를 수락산에
푹 빠지도록 환상에 젖어들게 하는구나...참!...좋다
바로앞에 보이는 암봉이 조금전에 지나온 코끼리 바위이고.
그 뒷쪽에 수락산 정상 좌측에 있는 멋진 암릉이 책가방 바위란다
확연하게 보이는 하강바위.
암벽등반을 즐길 때 주로 하강 연습을 하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하강바위에 있는 안내판
인생사에 있어서 하산길에 조심하라 했던가...
철제 안전로프를 부여잡고 조심스레 하산한다
하산길에 간간히 만나는 등산객들.
중간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여인을 만나는데
먼저 안산(안전산행)을 하라고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유쾌한 작별을 한다
이 분도 오늘 휴무인가 보다...
치마바위(13:22)
오리봉 서쪽 밑에 있는 바위로 생김새가 주름을 잡은 치마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암벽 등반을 하는 릿지꾼들을 만난다... 저 바위가 오리봉인가?
오랫만에 와서 그런지 상당히 헷갈린다
능선에서 바라본 도솔봉 (兜率峰:540m)의 모습
도솔(兜率)이란 지명은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내원은 내원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원에서는 수많은 천인들이 오욕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하며,
욕계의 제4천에 불과한 도솔천이 이렇듯 이상적인 정토로 등장하게 된 것은
미륵보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곳은 칠보(七寶)와 광명 등으로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십선과 사홍서원을 설하는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천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연히 보리심이 우러난다고 한다
수락골 갈림길(13:40)
수락골의 옛 이름은 벽운동계곡으로 서울 근교에서 알아주는 명소였다.
벽운동계곡이 있는 수락골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영의정
홍봉한이 별장을 짓고 사는 동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홍봉한의 맏딸인 정주의 생모 혜경궁 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서정성을 키워
훗날 '한중록' 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고 하는데 현재 덕성여대 생활관 안에 퇴락한
벽운동 별장의 안채 우우당이 남아 있는데,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은 간데없고 추사의
글씨로 쓴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온다.
이곳에서 덕릉고개로 갈까말까 망설인다.
덕릉고개 너머로 있는 유명한 절집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도반 스님에게 전화를 하니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스님에게 세배를 가려고 하는데 하니까...지금 출타중이라며
엄청 미안해 하시는데, 괜찮다고 하면서 다음에 가게노라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렇다면 구태여 그리로 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수락골로 내려간다
수락골에 내려서니 능선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잦아들고,
편안한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悠悠自適 편안한 걸음으로 내려간다
乙巳年 새해 첫날에 사람들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으며 호젓하게
벽운계곡으로 내려가니 참으로 기분이 개운하구나...올 한해도
계속 이랬으면 좋으련만, 어디 사람사는 일이 내 맘대로만 되면
뭘 꺽정하겠는가...
이 바위도 멋진 이름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내가
니 이름을 모르는건지, 아님 이름이 없는건지 알 길이 없구나
쉼터 삼거리(14:05)
철모바위 능선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쉼터를 통과한다
쉼터 삼거리에서 벽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의 돌탑에
나도 돌 하나를 얹어 놓는다...올 한해는 건강하게 해달라고...
이제 내리막길은 거의 다 내려온 듯 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수락산역으로 향한다
흔히 제도권 등로에 들어서면 가장 짜증나는게
등로에 깔린 돌 때문에 도가니에 무리가 가서
싫은데 서울 근교 산이라 그런지 이곳도 예외없이
바닥을 돌로 치장을 해놨구나...
쉼터(14:10)
수락산 벽운계곡의 모습
쉼터를 지나니...
좌측으로 보이는 암릉은 마치 백두대간 능선의 이기령
아래에 있는 미역널이 바위와 너무나 흡사하구나
니 이름은 뭐꼬?
물개바위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나왔다
신선교(14:22)
벽운클럽(14:24)
벽운교(14:26)
도솔봉 갈림길(14:27)
벽운교를 지나면서 도솔봉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합류를 하여 수락산역으로 향한다
장락교(14:32)
수락교(14:33)
수락교를 지나니 나뭇가지 사이로 염불사의 산신각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고,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와 함께 짙은
향내음이 코끝을 자극한다
시립수락양로원 입구(14:38)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쉬~~~를 하고는 그 옆에 있는
에어건으로 먼지를 털어낸 후에 편안한 도로를 따라간다
예룸예술학교를 지나서 내려오니 길가에 포장마차들이
많이 보인다...이곳에서 잔치국수 한그릇에 막걸리
한통을 시켜서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는 수락산역으로 향한다
이것들아...좌다, 우다 편갈라서 쌈박질 하는통에 민초들은 죽을 맛이다
그래!...너거들 한테 한가지만 물어보자, 말은 국민들 위한답시고 결국
너거들 밥그릇 싸움이 아니던가...운제쯤 저 꼬라지 안보고 살까...
수락산역(15:30)
지하철 경로석에 앉아 정신없이 졸다보니 강남구청역에
내려야 하는데 고속터미널역까지 가버렸다... 그래도
지하철이 공짜라서 다행이고 정신을 차려서 집으로 향한다